366화
“역시 정 이사님을 라이벌로 지목한 애는 달라도 뭐가 다르네요.”
KS 엔터 비주얼 부문 이사인 윤희연이 흥분된 기색으로 말했다.
설마 리카가 즉흥적인 디제잉 무대를 보여주리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윤희연은 응원봉을 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퇴장하는 리카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면서 정호환에게 물었다.
“어땠어요? 리카가 정 이사님 발끝이라도 따라오나요?”
리카의 즉흥 퍼포먼스와 마지막의 자작곡 실연은, 디제잉 무대를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뇌리에 박힐 만한 박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이돌이 무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흔한 틀을 탈피한, 그야말로 아티스트성을 과시하는 듯한 퍼포먼스였다.
“도전장 받으신 분으로서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윤희연은 싱글벙글 정호환에게 물었다.
그는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물고 무대만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엔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거나 감탄도 간간이 흘렸었는데, 리카의 솔로 무대를 보곤 큰 반응이 없었다.
‘손녀 재롱 보는 기분으로 즐거워하고 계시나? 아니면 나를 초대해놓고서 겨우 이 정도를 보여주다니……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까?’
정호환은 KS 엔터 그 자체인 인물이다.
음악 프로듀서로서 거의 30년 동안 유행의 최전선에 서 있는, 경력이든 실력이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계의 일인자다.
그런 그에게 새파랗게 어린, 심지어 아이돌이 아티스트로서 도전장을 보내오다니.
기분이 달갑지만은 않을…….
“뭐야 저거…….”
“네?”
정호환은 도전장을 받았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나가 보니 상대는 전혀 다른 경기를 준비해두고 있던 것이다.
정호환은 당연히 주먹으로 싸울 줄 알고 갔는데, 리카가 갑옷을 갖추고 롱소드를 들고 있는 상황과 비슷했다.
“나는 저런 거 못 하는데…….”
“…….”
윤희연이 가만히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프리스타일 디제이 배틀 같은 거 기대했었는데, 못 하시는구나.’
왠지 모르게 조금 실망스럽다.
* * *
디제이 퍼포먼스를 마친 리카가 장하양, 백설하와 교대하며 백스테이지로 들어왔다.
신아름은 리카가 보이자마자 달려가 격렬하게 포옹했다.
“수고했어, 수고 많았어.”
신아름은 리카가 정말 장하단 듯이 껴안은 채로 등을 팡팡 두드려주었다.
리카가 이 무대 때문에 얼마나 불안감에 떨어왔는지 계속 보아왔기에, 신아름은 있는 힘껏 리카를 칭찬해주었다.
‘즉흥 무대잖아.’
무대가 펼쳐지기 전까지는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물론 미리 편곡 방향을 설정하고 올라갈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리카는 그것을 거부했었다.
3년간 배워왔던 작곡 능력, 그리고 그와 비슷한 기간 배워왔던 디제잉 능력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고 싶단 이유에서였다.
‘아이돌이니까…… 라고 했었지?’
신아름은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리카가 엄청난 중압감을 받고 있단 사실만은 알았다.
그래서 무대가 끝난 지금, 리카에게는 격렬한 포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신아름 자신이었어도 누군가 안아주길 바랐을 테니까.
“휴게실 가서 쉬고 있어. 네 차례 나중이니…….”
“아름아아…….”
리카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풀썩 쓰러졌다. 신아름이 깜짝 놀라 그녀의 겨드랑이를 붙잡으며 부축했다.
“나, 나 이거 중간에 실수했는데…… 어떡해……?”
“뭐? 실수?”
리카가 횡설수설했다.
뭐를 해야 했는데 뭐를 못 했고, 무엇이 더 좋았는데 다른 걸 골라버렸고, 타이밍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으며,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고.
그러니 관객들도 알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나 혼자 너무 신나서어…….”
리카가 울면서 말했다.
“망했어어…….”
신아름은 두 가지 이유로 당황했다.
첫째는 리카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조금도 모르겠단 것이었다.
실수라고 부를 게 있었나? 적어도 신아름이 듣기엔 흠잡을 데 없는 리믹스였고, 관객들의 반응도 좋으면 좋았지 나쁘진 않았다.
‘아니, 아주 그냥 열광적이었지.’
당황한 두 번째 이유는, 리카의 한국어가 매우 유창해서였다.
리카는 평소에 ‘나는 일본인이에요!’라는 티를 내듯 문장을 짧게 끊어 말하며, 몇 개의 발음을 씹거나 어눌하게 말하곤 한다.
그게 팬들한테는 ‘씹덕미 터지는 포인트’라면서 호응을 얻지만, 신아름이 생각하기엔 과도한 애교처럼 들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리카는 울먹이는 상태에서도 발음이 매우 유창했다.
‘얘 말하는 거 컨셉이었어……?’
트루 아이돌 이시카와 리카.
그녀와 가장 가까이서 생활하는 멤버들조차 알지 못했던 비밀이, 지금 신아름의 앞에 드러났다.
아무튼.
“아냐, 안 망했어.”
신아름이 피식 웃으면서 리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리카는 아예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스태프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리카의 근처로 하나둘씩 다가왔다.
“너 잘했다니까.”
“망한 거 같아…….”
신아름은 몇 번 위로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계속 ‘망했다’만 반복하는 리카를 상대하기 귀찮아져서, 는 아니었다.
리카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 때문이었다.
‘사소한 실수.’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아주 사소한 실수도, 무대 위에 서는 퍼포머에게는 거대한 죄책감으로 다가오는 때가 있다.
귀중한 시간과 돈을 써서 공연장을 찾은 팬들에게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100점으로 만들어주지 못했단 게, 리카는 괴로워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신아름이 무릎을 꿇어 리카와 눈높이를 맞추고, 조용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름아아…….”
리카가 처절하게 오열하면서 신아름을 마주 끌어안았다.
“나 망했…….”
“어 너 망했어.”
“어?”
“너 대차게 망했다고.”
“히도이(너무해)!”
리카가 아기처럼 바닥에 드러누워 사지를 흔들며 하늘까지 닿을 울음을 토해냈다.
“스태프분들한테 방해되게 언제까지 이러고 있게! 빨리 일어나!”
신아름이 리카를 일반쓰레기 봉투처럼 데굴데굴 굴려 구석으로 몰았다. 험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리카는 저항하지 않고 서럽게 울기만 할 뿐이었다.
“위로해줘! 위로해줘! 괜찮다고 말해달란 말야아아아!”
“안 괜찮아!”
신아름이 소리 치자 리카가 울음을 뚝 그쳤다. 설마 신아름이 우는 사람 앞에서 화를 내리라곤 생각지 못한 듯했다.
“네 기준에 못 맞췄으면 안 괜찮은 거지! 넌 졌어! 진 거야! 근데 무슨 위로!”
리카가 황망하게 신아름을 바라보다가, 엉금엉금 기어서 어디론가 향했다.
“아라쨩…….”
대체재를 찾으러 가는 것이었다.
신아름이 그녀를 붙잡았다.
“조아라 지쳐서 쉬고 있어. 건들지 마.”
“박 이사니이이이임!”
“팀장님 관객석에 있어. 자신 있으면 내려가 보던가.”
“끼에에에에에엑!”
“아오 팍 씨!”
신아름이 주먹을 번쩍 들자 리카가 구석으로 뛰어가 오들오들 몸을 말았다.
신아름은 멘탈이 온전치 않은 리카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리카가 떨면서 안면을 가드했다. 그럼에도 신아름의 손은 가드를 뚫고 들어와, 리카의 눈가를 거칠게 닦아냈다.
“너 이 씨, 울면 어떡해. 메이크업 수정하는 거 더 힘들어졌잖아.”
“우으…….”
“리카, 내가 생각하기론 말야, 너는 이기는 데 너무 익숙해.”
“……내가?”
“그래. 나처럼 천부의 재능이 없고서야 패배란 일상 같은 거겠지만.”
“에에…….”
“‘에에’, 뭐?”
“이, 이에(아니)…….”
“어쨌거나, 넌 앞으로도 패배를 많이 겪을 거야. 애매하게 좋은 재능을 타고 나서…….”
“아름이 아까부터 되게 재수 없는 거 알아?!”
신아름의 이야기는 리카에게 단순한 장난으로 들리지 않았다.
리카는 과거에 멤버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특출날 것 없는 자신에게 실망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특출난 신아름에게 저런 이야기를 들으니, 기만도 이런 기만이 없다고 생각했다.
“너 아까 ‘위로해줘’라고 했지?”
“그래! 했다! 어쩔래?! 공감도 지능이랬어! 아름이는 지능……!”
“위로해주면 끝이야? 그걸로 땡하고 끝내?”
“으어?”
“내가 머리 쓰다듬어주고 안아주고 뽀뽀도 해주면 그걸로 기분 좋아져서 끝이냐고.”
“뽀뽀는 괜찮…….”
“그래, 나 말고 네가 좋아하는 아라쨩한테 가서 실컷 뽀뽀해라.”
“아, 아니, 해도 괜찮은 거…… 말 돌리지 마!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니었잖아!”
리카는 일단 발끈하긴 했지만, 신아름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이해가 갔다.
“내 말은, 언제까지고 사람이 성공하고 이길 수만은 없단 얘기야.”
“민주한테 졌다고 울고 불며 이사님한테 매달린 아름이한텐 듣기 싫어!”
신아름이 주먹을 치켜올리자 리카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항상 이길 수는 없지만, 계속 지고 싶지도 않잖아. 위로? 해줄 수 있지. 근데 무대 끝내고 주저앉아서 ‘망했어’란 말만 반복하는 애한텐 위로하고픈 마음 하나도 안 생겨.”
당장 조아라만 보아도 리카와 비교된다.
그녀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휴게실의 소파에 계속 앉아 있었다. 신아름과의 무대에서 일정 부분 실수한 게 있어서였다.
하지만 조아라는 자책하고 좌절하기보단, 어째서 그런 실수가 일어났는지 분석하고 있었다.
내일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실패한 다음엔 더는 실패하지 않으려고 해야지. 배워야 해. 조아라처럼.”
“아라쨩?”
“그래, 걔 지금…….”
이 개 같은 년!
쓰레기 같은 년!
그따위밖에 못 하냐!
몇 번을 연습했는데에에에!
휴게실 벽을 뚫고 조아라의 외침이 백스테이지 전체를 울렸다. 아예 문을 쾅쾅 발로 차는지, 듣기에도 소름 끼치는 충돌음이 연달아 퍼졌다.
“…….”
“…….”
“……아라쨩이, 뭐?”
“…….”
신아름이 리카의 어깨를 정답게 두들겨주고 일으켜 세웠다.
“어때, 내 위로가 좀 도움 됐어?”
“젠젠(전혀).”
도움이 된 게 확실했다.
리카가 다시 일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니까.
“내가 ‘잘했다’고 해도 너한테 얼마나 닿을지는 모르겠는데, 잘했어.”
리카가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게 보였다.
그때 백스테이지로 백설하와 장하양이 들어왔다. 둘의 듀오 무대가 끝난 것이다.
백설하는 열띤 흥분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지금이 인생의 절정기가 아닌가 싶을 만큼이나 행복한 기색이었다.
“얘들아 우, 우리 무대 봤어? 밖에 함성 들었어? 진짜 엄청났지? 진짜 진짜 레전드 찍었어!”
안 봤다.
리카와 신아름이 서로를 흘끗 보고, 짜기라도 한 것처럼 오버했다.
“쌤이야말로 아이돌의 모범이에요! 역사에 남을 거예요! 스고이(대단해)! 스테키(멋져)!”
“우리랑 막 격이 다르다 싶었어요.”
“에헤헤, 그, 그 정도느은…….”
백설하가 부끄러움과 기쁨을 동시에 감추지 못했다.
“나, 나보다는 하양이가 정말…….”
그 순간 뒤에서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이 동시에 그쪽을 보니, 장하양이 앞으로 고꾸라져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 * *
휴게실에서 발광하고 있던 조아라는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매트에 실려서 들어온 장하양은 당장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숨이 불규칙했고, 깜짝 놀랄 정도로 땀을 많이 흘렸다.
응급 스태프는 장하양의 상태를 살피더니, 그녀의 뒷목을 마사지하면서 말했다.
“옷 갈아입혀야 하니까 남자분들은 나가주세요.”
남자 스태프들이 나가고, 남은 건 여자 스태프 몇 명과 소녀연맹 멤버들이 전부였다.
휴게실 문이 닫혔다.
“하양 씨, 몸이 어때요?”
“목, 말라, 요.”
장하양이 애처롭게 말했다.
스태프가 물을 주니 그녀가 한도 끝도 없이 벌컥거렸다. 그것을 보자마자 스태프는 물병을 치워버렸다.
“그렇게 한 번에 마시면 안 돼요.”
스태프는 장하양이 물을 달라고 함에도 주지 않았다.
그녀가 의식적으로 바라는 것과, 진실로 그녀의 몸에 필요한 건 다르다.
스태프는 멤버들에게 장하양의 옷을 벗겨달라고 했다. 몸을 최대한 빨리 식히기 위함이었다.
바지를 반쯤 벗기고 상의도 탈의했지만 열은 쉽게 식지 않았다. 스태프가 마사지를 계속하며 부채를 부쳐주었다.
“왜 이런 거예요……?”
백설하가 초조함을 담아 물었다.
“특정 동작과 행위만 과도하게 수행해서 혈액이 고루 분배되지 않아 다른 장기나 근육이 일시적으로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거예요.”
“……네?”
“어, 탈진 비슷한 건데, 음, 힘을 많이 써서 이래요.”
“아, 네. 어, 언제 나을까요?”
“길면 30분까지도 가요.”
백설하는 ‘30분?!’이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굉장히 괴로울 거예요.”
그래 보인다.
장하양이 이랬던 적이 가로 엔터에 들어온 초창기를 제외하곤 없었던 것 같은데.
그때도 장하양은 당장 숨넘어가 죽을 것처럼 괴로워했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백설하는 불안하게 입술을 깨물고, 그 즉시 화들짝 놀라 자신의 입을 막았다.
‘나, 방금…….’
백설하는 방금 화가 났었다.
‘하양이 무대가 겨우 7, 8분 뒤인데 이렇게 쓰러져 있으면……’이라고 생각해버렸다.
사랑하는 동생이 괴로워서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데, 백설하는 짜증을 낸 것이다.
자괴감이 밀려왔다.
스태프는 마사지와 부채질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구석에 있던 휴대용 산소호흡기를 가져와 장하양의 입에 대었다.
장하양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훨씬 더 크게 들렸다. 멤버들이 암울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대 순서 바꾸면 안 돼요? 아직 시간 있잖아요.”
조아라가 급박한 투로 말했다.
“안 돼.”
답한 건 신아름이었다.
“다다음 하양 언니 무대는 그거잖아. 와이어 플라잉. 다 준비해뒀는데 이제 와서 바꿀 수는 없지.”
“그럼 어떡하는데. 이 꼴로 무대에 절대 못 올라. 조 사장님한테 말이라도…….”
장하양이 팔을 번쩍 들었다.
자연스레 모두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스태프가 기겁하면서 장하양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 다시 땅에 두었다.
“할 수 있어.”
장하양의 목소리엔 여전히 괴로운 숨이 한가득 섞여 있었다.
멤버들의 표정이 고통으로 구겨졌다. 장하양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사랑이는 동생이, 언니가 이렇게나 고통스러워한다…….
“얘들아.”
“네, 네!”
조아라가 장하양의 손을 잡았다. 뒤이어 신아름과 리카도 본인을 부르는 것이란 걸 깨닫고 장하양에게 모여들었다.
“뭐, 마사지라도 해줄까요? 허벅지 주물러줘? 어디 주물러줄까요?”
“잘하고 와.”
“……네?”
조아라가 쥔 장하양의 손에 애절하리만큼 약한 힘이 들어간다.
장하양 나름 꼭 쥐려고 한 것이겠지만, 조아라가 알아차리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약하기 그지없다.
장하양이 웃었다. 웃으려고 노력했다.
“다음 내 무대에 안 지려면, 더 열심히, 해야지.”
다음 무대는 동생 라인의 보컬 퍼포먼스였다. 그다음이 장하양의 무대이다.
장하양은 홀로 동생 라인 세 명보다 나은 무대를 선보이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녀다운 농담이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아 더럽게 재미없었다.
조아라는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 통제를 지키지 않는 장하양을 바라보며 슬프게 웃었다.
“언니 그딴 말 할 체력 남았으면 몸 관리나 잘하고 있어요. 언니 이 꼴로는 우리 절대 못 이기잖아요…….”
“아하하…… 하하…….”
장하양이 천천히 눈을 감고 팔을 추욱 늘어뜨렸다.
“언니. 언니? 언니!”
조아라가 장하양의 머리를 부여안고 부르짖었다.
“이렇게 가면 우리는 어쩌라고요!”
“나, 안, 죽었…….”
조아라가 장하양의 머리를 그냥 놓았다. 그녀의 머리가 부드러운 매트로 콩 떨어졌다.
스태프가 깜짝 놀라서 조아라에게 무어라 소리쳤지만, 조아라는 듣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의지뿐이었다.
저 꼴이 되어서까지 조아라를 격려해준 장하양에게 이어받은 의지였다.
“조 사장님한테 말해서 최대한 시간 끌어볼게요. 2분, 아니, 1분이라도요. 그때까지 회복하고 있어요. 얘들아, 가자!”
동생 라인은 결연하게 휴게실 문을 벌컥 열었다. 바로 앞에 성필이 서 있었다. 노크를 하려는 포즈 그대로 굳었다.
성필의 눈은 동생 라인의 어깨 너머, 열을 식히려 옷을 반쯤 벗은 장하양에게로 갔다.
성필의 눈이 즉시 천장을 향했다.
“…….”
백설하가 눈치 있게 장하양의 옷을 천천히 입히기 시작했다.
장하양이 ‘더워요…… 왜 이래…… 더워……’라고 해도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하양아, 박 이사님 오셨…….”
“안 더워요.”
성필은 동생 라인의 어깨를 번갈아 툭툭 두드려주었다.
“얘들아, 다음 무대 힘내라.”
“아저씨 왜 여기 있…….”
“2분 남았어요!”
세 사람은 갈팡질팡하다가 스테이지로 뛰어갔다. 성필이 휴게실로 들어와 물었다.
“저 지금 들어와도 되는 거예요?”
“아뇨, 지금 하양이 안정 취해야…….”
“안 덥다니까요.”
장하양이 스태프의 손목을 꽉 쥐었다. 스태프는 그녀의 어디서 이런 힘이 생겼나 하고 놀랐다.
“이대로 쉬어도 돼요.”
“아, 네…….”
스태프가 반보 정도 물러났다.
성필이 누운 장하양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백설하가 아연하게 물었다.
“이사님 관객석에 계셔야 하잖아요.”
“하양이 상태 보고 왔어.”
백설하는 ‘그걸 보기만 해도 알아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성필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듯해서였다.
“하양아.”
성필이 장하양에게 부채를 부쳐주면서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산소호흡기를 입에 대고 있었다.
“나 애들 무대 보러 가야 하니까 짧게 할 말 끝내고 갈게.”
“계속, 같이 있어 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네 무대 굉장히 좋았어.”
갑자기 들어온 칭찬에 장하양은 멍해졌다. 그리고 가슴을 채우는 행복감을 느꼈다.
아직 콘서트를 반 정도밖에 완성하지 못했지만, 성필에게 칭찬받았다.
“에너지가 느껴져.”
진심이었다.
장하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떠한 에너지를 전신에서 뿜어내는 듯했다.
공연장의 모두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장 가까이서 그녀를 본 멤버들은 더욱 그러했다.
무대 장악력, 아우라, 존재감이라고 부르는 것. 장하양은 생명의 강렬함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한계를 넘어서까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근데, 에너지 컨트롤이 안 되는 게 한눈에 보이기도 했어.”
“하지만…….”
“알아. 팬분들에게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고 싶은 거. 하나의 무대에 쏟을 수 있는 모든 힘을 쏟고 싶은 거.”
이런 말은 적절치 않지만, 가까이서 장하양을 볼 수 있는 멤버들은 한 번씩 이런 생각을 했었다.
‘미친 사람 같다’고 말이다.
장하양의 퍼포먼스엔 광기마저 엿보였다.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체력을 무대 하나마다, 동작 하나마다 쏟고 있다.
다른 멤버들도 콘서트 초반에는 그러했었다. 하지만 초중반에 들어서선 그러한 퍼포먼스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연습대로 절제된 동작을 선보였었다.
장하양은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데, 그러지 않으면, 저는…….”
다른 멤버들보다 뒤떨어질 것이다.
자신보다 확연히 빛나는 멤버들 사이에서 흐릿한 별이 되어버릴 뿐이다.
그러고 싶지는 않다.
장하양은 자신이 다른 멤버들보다 대부분의 역량이 부족한 것을 안다.
이런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를 불태워 더 강한 빛을 내는 것이었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는데, 그러지 않는 건, 프로답지 않은 거…….”
“하나의 무대에 모든 걸 쏟지 않는다고 대충 하는 게 아니야. 남은 콘서트가 거의 20개야. 그거 전부 오늘처럼 할 수 있어?”
그때마다 이렇게 쓰러져서 콘서트 자체를 위태롭게 할 건가?
“하양아, 콘서트의 목적은 팬분들을 기쁘게 하는 거잖아. 아니야?”
“맞아요…….”
“팬분들을 기쁘게 하는 방법은, 네 건강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거야. 네가 네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모든 콘서트에서 건강하게 퍼포먼스를 소화하는 거야. 20개에 이르는 콘서트 중 하나라도 부족한 곳이 없도록. 하양아, 나도 알아.”
무대에 올라가 수천 명의 환호성을 받으면, 아드레날린이 미친 듯이 분비되어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많은 뮤지션이 그 황홀함을 인터뷰에서 설명하곤 한다.
팬들의 찬사는 마약 같다.
더 얻고 싶다.
그래서 가진 모든 것을 쥐어 짜내 팬들에게 보여주고픈 것이다.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소수의 무대를 탁월하게 수행하는 것보다 모든 무대를 평균적으로 수행하는 게 훨씬 좋아. 아니, 그게 옳아. 그걸 조절할 수 있어야 프로야. 그리고 하양아, 너는 연습한 대로만 해도 충분해. 충분히 멋지고 아름다워.”
장하양은 피곤하여 게슴츠레 감긴 눈꺼풀 사이로 성필을 보다가, 주체할 수 없는 자기혐오에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이사님, 저는…….”
장하양은 그대로 말을 멈추었다.
말할 기력조차 없이 의미 없는 숨만 거칠게 내쉬었다. 스태프가 성필에게 나가달라는 눈빛을 보였다. 더는 한계라고.
성필은 황급히 돌아 휴게실을 나섰다.
뒤로 얼음팩을 가져다 대고, 부채를 부치고, 옷을 벗기고, 마사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하양은 여전히 괴로운 숨소리를 냈다.
* * *
동생 라인의 퍼포먼스는 고작 4분이었다.
그 4분 만에 장하양의 상태가 호전될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연출 감독 조진만은 ‘상황을 보고 판단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세트리스트 순서를 바꾸는 건 공연 자체에 커다란 리스크를 불러일으키는 행위다.
직접 장하양의 상태를 볼 수 없는 감독의 입장에선, 듣는 것만큼 상황이 나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조진만은 초조하게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동생 라인의 무대가 끝나기까지 1분밖에 안 남았는데도 현장에서 보고가 들어오지 않고 있다.
‘어떻게 된 거야. 뭐라도 말해야 할 거 아니야.’
조진만은 무대를 컨트롤하는 동시에 장하양의 사정까지 신경 쓰느라 죽을 맛이었다.
그러던 도중, 백스테이지에서 보고가 왔다.
[하양이 스탠바이 들어갑니다.]
조진만이 마음속으로 환호했다.
‘다행이다. 그렇게까지 심한 건 아니었구나.’
* * *
장하양의 ‘에피타프’ 퍼포먼스에는 다섯 명의 백댄서가 동원된다.
그중 한 명, HPT 뮤직 어워드에서도 ‘아라베스크’의 백댄서를 맡았던 댄서 이명철은 넋이 나가 장하양을 바라보았다.
장하양이 스테이지로 비틀비틀 나아간다.
그 광경을 백스테이지의 모든 이들이 멈춰 서서 보고 있다.
‘저런 상태로 무대에 설 수 있는 건가……?’
이명철이 근본적인 물음을 품었다. 아마 모든 이들이 갖고 있을 물음이었다.
장하양은 서서 걷고 있었지만, 동시에 땅바닥을 기어서 앞으로 향하는 듯했다. 몸 자체가 앞으로 크게 굽어 있다.
뒤에선 여러 스태프가 그녀를 필사적으로 서포트하는 중이다.
뒷목에 얼음주머니를 대주고, 양편에서 부채를 부쳐주며, 손에 피가 통하도록 끊임없이 주물러준다.
‘이거 사고 나는 거 아니야? 중단해야…….’
다행히 무대 감독이 장하양을 막아섰다.
“하양 씨, 오기로 하겠다는 거면 무대엔 설 수 없습니다.”
“할 수 있어요.”
“이게 할 수 있는 사람의 몰골입니까?”
[1분.]
조진만의 지시가 스태프들의 인이어로 사정없이 꽂혀 들어왔다
남은 시간이 직접적으로 귀에 들어오자, 장하양을 막아섰던 무대 감독마저 움찔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
막아야 하나?
아니면 내보내야 하나?
“제 몸이에요.”
장하양이 여전히 몸을 굽힌 채로 말했다. 그녀는 허리를 똑바로 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듯, 이마와 턱에 식은땀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제가 제일 잘 알아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많은 분들이.”
장하양의 눈동자에 수십 명의 스태프가 들어왔다. 그들 모두 장하양만을 바라보았으며, 그녀의 성공을 바라서 이곳에 있다.
“저를 도와주고 계세요. 그리고 저 밖에는.”
장하양은 스테이지에서 들어오는 불빛을 보았다.
“저를 기다리는 팬분들이 계세요.”
[30초. 하양 씨 상태는 어떻습니까?]
조진만이 물었다.
무대 감독은 무전기를 켜고 한동안 ‘아……’라는 말만 했다. 그의 결단을 도와주려는 듯, 장하양은 느리고도 착실하게 스테이지로 향했다.
백댄서들이 불안하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지금, 들어갑…….”
무대 감독이 불확실하게 말했다.
백댄서들은 장하양의 뒤를 따라가며 감독이 ‘안 된다’고 해주길 바랐다.
다섯 명의 백댄서 전부 다 말이다.
장하양의 다리가 떨리고 있다. 심각하다 싶을 정도였다. 거친 숨과 식은땀을 보니, 여름철에 흔히 겪는 탈수 증상과 비슷하기도 했다.
‘탈수랑 비슷한 증상이면…….’
백댄서 이명철은 등에 소름이 돋았다.
‘저렇게 서 있는 거 자체가 죽을 정도로 괴로울 텐데…….’
“지금, 네, 하양 씨 들어갑니다.”
감독이 기어코 OK 사인을 내렸다.
스태프들 전원이 감독을 탓하는 동시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장하양에게 풍기는 분위기는 순교자와 같아서, 범인이 감히 이래라저래라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찌할지는 그녀만이 정할 수 있었다.
“언니, 몸 괜찮……!”
백스테이지로 들어오던 조아라가 맥이 끊긴 듯 멈춰 섰다. 신아름과 조아라도 그러했다.
장하양은 이전과 비교해서 조금도 더 나을 게 없는 몰골이었다. 그녀는 타올로 얼굴과 목을 덮은 땀을 닦아냈다.
타올을 아무렇게나 내던진 그녀는 동생 라인을 한꺼번에 포옹하곤, 아무 말 없이 그녀들을 지나쳤다.
세 사람과 장하양이 교차했다.
셋이 황급히 뒤로 돌았다. 장하양을 말릴 생각이었다. 스테이지로 나아가는 장하양의 등을 본 순간, 세 사람이 깜짝 놀랐다.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다.
곧게 편 허리와 파도를 가르듯 힘차게 나아가는 다리, 그 어느 곳도 떨리지 않는다.
장하양은 어둠 속으로 나아가 자리에 섰다. 이윽고 빛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녀의 상태와는 상반되는 맑은 사운드가 어둠을 꿰뚫었다.
[내가 죽으면]
장하양이 노래했다.
[묘비에 당신의 이름을 적어주세요.]
에피타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