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65화 (365/760)

365화

“뭔데, 벌써 30분이나 지났어?”

유용태가 놀라서 말하자 이선주가 소리를 빽 질렀다.

“오빠 얼마나 지났니 그런 말 하지 마요!”

“어, 어?”

“시계 그거 당장 벗어요! 시간 얼마나 남았는지 하나도 안 알고 싶어요!”

유용태는 우물쭈물 손목시계를 벗어서 주머니 안에 넣었다.

하긴, 즐기러 와서 시간을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게 좋은 버릇은 아니다.

스크린에서는 VCR 영상이 나오는 중이었다.

리카가 나무 원탁에 귀족들과 앉아 고뇌하는 모습이 비쳤다.

‘진짜 말도 안 되게 예쁘다.’

만약 영상으로만 리카를 접했다면, 유용태는 영상에 과도한 보정이 들어간 건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보니, 오히려 영상을 실물을 전혀 담지 못한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으에엑! 끼엑! 으에에엑!”

유용태는 이선주가 좀 무서워져서 슬쩍 몸을 옆으로 돌렸다. 혹시라도 말이 걸리진 않을까 걱정됐다.

리카가 결단한 듯 칼을 들고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그로써 VCR 영상이 끝났다.

“시간상으로 보면 토크 타임이지?”

“네, 아마도요.”

이선주는 아직도 리카의 미모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자꾸만 ‘입술…… 손톱……’ 같은 말을 하는데, 유용태는 두렵기 그지없었다.

“미니 게임이라도…….”

그때 암흑으로 덮여 있던 무대 중앙에 일직선의 빛이 내리꽂혔다.

누군가 디제이 테이블 뒤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였다. 사람들은 그녀가 누구인지 짐작이 갔으나, 모자와 마스크 때문에 확실하지 않았다.

곧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들자, 애매하게 퍼지던 환호가 하나 되어 공연장 전체를 울렸다.

“리……!”

[인민이들 전부 스탠드 업!]

유용태가 당연하단 듯이 벌떡 일어났다. 이선주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당황스럽게 유용태를 바라보았다.

“오, 오빠?”

“온다.”

“뭐가요?”

유용태가 기대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이 광경을, 이 상황을 알고 있다.

‘팬미팅에서도 겪었으니까!’

리카의 디제잉 무대다.

그에 비해 이선주는 갈팡질팡하는 듯했다.

물론 리카가 작곡을 한단 사실을 알았으며, 디제잉 테이블의 뒤에 있으니 무엇을 할지도 대강은 짐작이 갔다.

‘그런데 콘서트에서?’

이선주는 디제이의 무대란 게 어떤 건지 몰랐기에, 리카의 선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스탠드…….]

리카가 손을 하늘 높이 뻗고, 즉시 테이블을 향해 내리쳤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든 이의 심장을 강타하는 베이스, 거대한 울림이 번개처럼 떨어졌다.

쿵, 으로 표현하기엔 너무나도 무거운 사운드다. 꾸웅, 심장을 손톱으로 후벼파듯이 묵직하고 강인하게 다가온다.

그 베이스가 규칙적인 박자를 따라 울린다.

[업!]

베이스는 점차 가속한다.

그제야 이선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관객석의 모두가 일어선 상태가 되었다.

일어나서,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리카가 그것을 알려주려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위에서 아래로, 힘들이지 않고 박자를 탈 수 있는 방법이었다.

사람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그것을 따라 했다.

리카는 마스크를 벗고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녀가 옆에 세워진 스탠드에서 마이크를 분리해 입에 가져갔다.

[안녕하세요, 리카예요!]

그녀는 테이블에서 손을 떼고 가볍게 상체를 까딱거리면서 박자를 탔다.

그 움직임에는 마력이 있었다.

사람들이 전부 똑같이 움직였다.

베이스에 맞춰서 함께,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리듬을 즐겼다.

[음원 차트에서 아이돌 노래 검색하시면요, 그런 거 못 보셨나요? 예를 들어 케이어스 곡이라면 ‘카오스 Remix by 누구누구’이런 거요! 저는 그게 대체 왜 있는지 이유를 몰랐었어요!]

긴장감을 고조하는 브라스가 사운드에 끼어들었다. 리카는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아무리 들어봐도 원곡보다 나을 게 없는데, 왜 굳이 리믹스곡을 내놓는지, 누가 만드는지요! 나중에 저희 회사 작곡가님한테 여쭤봤어요! 이런 곡들이 왜 생기는지요! 그분이 말씀하시더라고요!]

클럽에서 춤추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이선주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도 어떤 DJ인지도 모를 사람이 만든 케이팝 리믹스 버전 음원을 가끔씩 보곤 했다.

당연히 들어보진 않았었다.

[아, 그래서 리믹스 음원을 계속 내놓는 거구나 하고 놀랐죠! 그런데 손나(그런)!]

실로폰처럼 맑고 청량한 사운드가 추가됐다. 전자음을 먹은 물리적 충돌음은 얼핏 듣기에도 좋았다.

점점 새로운 악기들이 추가된다.

[저희 곡 리믹스는 하나도 없는 거예요! 왜 이러냐고 물어봤죠! 그러니까 작곡가님이…….]

클럽을 위한 리믹스 버전까지 만들어진다는 건 유행의 증거다. 설령 서정적인 곡이라도 인기만 있으면 무조건 리믹스 버전이 만들어진다.

아쉽지만, 소녀연맹의 리믹스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단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어요! 단지 DJ분들이 저희의 매력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리카가 패드를 가볍게 눌렀다.

그러자 소녀연맹 데뷔곡 ‘아니’가 흘러나왔다. 리카가 몇 번 더 패드를 조작하자 ‘아니’에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하나씩 쌓이기 시작했다.

[제가 세계 최초로! 지금 이 자리에서! 리믹스 해보겠습니다! 자, 다들 즐겨주세요! 마음껏 춤춰주세요!]

10분에 이르는 리믹스의 대장정.

편곡 퍼포먼스.

[들으세요! 아타시(저)의 아티스트십!]

임프로비제이션(즉흥화).

* * *

밴드 ‘데비’의 리더인 권동하는 세션석에 서서 리카를 바라보았다.

그는 스피커가 있는 자리와 가까웠던 터라, 터질 듯이 울리는 EDM의 파도를 정면에서 맞을 수 있었다.

그리고 리카의 임프로비제이션을 듣는 내내, 그는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음악을 즐기는 덴 여러 방법이 있어요. 일단은 웅장하게 가볼게요!]

수천 개의 번개가 땅을 향해 질주하는 것처럼 피부를 울리는 전자음이 퍼진다.

사람의 박수 소리와 같은 것이 뒤에서 받쳐주면서 기대감을 올린다.

전형적이고 전통적인 빌드업은, EDM에 문외한인 권동하마저도 ‘이다음이 하이라이트다’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드랍 더 베이스!]

리카가 컨트롤러를 긴 손가락으로 긁듯이 빠르게 움직이자 곡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사람의 목소리를 한계까지 긁은 듯한 사운드가 철두철미하게 멜로디를 채웠다.

[좋네요, 최악은 아니에요!]

리카는 이게 녹음된 버전이 아니란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컨트롤러 앞에서 한동안 고민했다.

[드랍은 더 크게! 더 크게!]

사운드가 2데시벨은 높아졌다.

강렬한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편곡된 ‘아니’는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춤추게 만들었다.

‘이게 콘서트장이야 클럽이야?’

리카가 만든 곡만 생으로 흘러나왔다면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들었을 것이다.

이 중에서 EDM 페스티벌이나 디제이의 공연에 참석해봤던 사람은 소수일 테니까.

그들이 이런 종류의 공연을 즐기는 방법을 모름에도 신나게 박자에 맞춰 점프하거나 몸을 흔드는 건, 오로지 리카 때문이었다.

‘디제잉을 하면서 춤까지…….’

리카는 컨트롤러를 조작한 다음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곧바로 몸을 흔들었다.

아이돌의 춤, 이라고 부를 만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간단하게 발을 구르고 고개를 까딱이면서 내면의 즐거움을 표현할 뿐이었다.

정말 이 순간이 신나서 못 견디겠단 것처럼.

그 행복함이 관객들에게까지 전해져서, 그들도 춤추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이펙터가 마음에 안 드네요. 다른 이펙터!]

곡은 변화무쌍하게 탈바꿈을 거듭했다.

나오는 곡은 ‘아니’만이 아니었다. 소녀연맹의 다음 대표곡인 ‘롱 포’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곡이 바뀔 때마다 템포도 같이 바뀌었다.

빌드업이 터지는 드랍과 잠깐씩의 쉬는 시간이 절묘하게 분배되어 있었다.

‘이게 EDM, 디제이의 공연이구나.’

자신들의 결과물을 은혜 베풀 듯 무대 아래의 관객들에게 던지는, 전통적인 스타의 무대와는 전혀 다른 성질이었다.

디제이는 음악으로써 관객과 하나가 된다.

관객들은 춤을 추며, 디제이와는 또 다른 예술의 창조자가 된다.

듣고 열광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진짜로…….’

권동하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발을 구르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아티스트 같아.’

리카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창조성을 증명하고 있었다.

* * *

리카는 무아지경에 빠졌다.

디제이 테이블, 컨트롤러를 한가득 뒤덮은 음향 조절 인터페이스.

수백 개는 넘을 법한 버튼들로 손이 자동적으로 향한다. 그녀는 어떤 효과를 주어야 가장 듣기 좋을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면 테이블에서 떨어져 다시 흥겹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아…….’

리카는 설명할 수 없는 황홀함에 빠졌다.

‘행복해…….’

21년 동안 세상으로부터 빨아들인 시대의 빛을, 지금 이 순간 전부 토해내는 것만 같다.

점점 자신이 비어가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텅 빈단 게 두렵지는 않다.

시대의 빛은 다시 채울 수 있으니까.

리카는 자신의 예술성, 재능이란 필터로 시대가 무분별하게 심어둔 양분을 보석으로 바꾸어 사방팔방 뿌렸다.

‘더, 더 나아갈 수 있어.’

리카가 ‘아라베스크’로 곡을 바꾸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대부분의 트랙과 사운드를 갈아치우고 새로운 이펙터를 바꾸고 추가했다.

신난다.

신나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녀가 춤추는 건 퍼포먼스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추고 싶으니 추는 것이었다.

‘내 악상은 신으로부터 단번에 흘러 들어온다.’

브람스.

‘위대한 즉흥 예술가는 사제와 같다. 그들은 오직 신만을 생각한다.’

스테판 그라펠리.

‘우리가 연주하는 것은 인생이다.’

루이 암스트롱.

수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창조에 대한 명언을 남겼다. 어찌 보면 오만하기까지 한 말은, 역시 천재는 천재구나 싶은 생각을 들게 한다.

리카도 그랬다.

이 장소에 서기까지는 그러했다.

‘나는 이런 거까지 할 수 있었구나. 아냐, 예술가는 다 할 수 있는 거였어.’

정해진 안무를 외우고, 노래를 연습하고, 그것도 물론 대단하고 값진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순간도 아티스트에게는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자신의 창조성을 확인받는 순간이.

‘창작이란 건, 창조란 건 이런 거야.’

리카가 흥분으로 떨리는 손가락을 몇 개의 버튼으로 가져갔다. 손가락이 버튼을 누를 때마다 곡이 극적으로 바뀌고, 극적으로 좋아진다.

리카는 자신의 재능을 지적 정수가 아니라 화려하고 강렬한 생명력, 순간의 기쁨으로 변화시켰다.

그곳에 계산은 없었다.

리카는 신내림을 받은 사제였다.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이 동시에 그녀의 머리에 시를 읊는다.

‘이게 인간이야.’

인간이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전혀 아니다.

이 순간, 리카는 그리 확신했다.

그 어떤 짐승도 지하 수백 미터를 파 내려가 우라늄을 캐고 핵분열로 에너지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 어떤 짐승도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인간의 실존과 삶의 문제에 관한 글을 써내지 않는다.

그 어떤 짐승도, 디제이 컨트롤러 앞에서 인위적으로 음악을 창조하여 황홀감에 빠지지 않는다.

‘나는, 닿았어.’

리카가 별의 소리를 들었다.

옛날에 리카가 성필에게 말했었다.

밤하늘에 별이 없다고.

그때 성필이 말했었다.

별이 있다고, 자신의 옆에.

미래의 스타가 분명히 있다고.

‘본질에 닿았어.’

인간성의 본질, 창조.

리카는 별의 소리를 듣는다.

자신의 소리를.

리카는 자신이 별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녀는 강하 준비를 마친다.

발사 버튼을 누른다.

카와이 베이스 곡, ‘러브 미러’.

* * *

별이 떨어진다.

에리카는 그렇게 느꼈다.

EDM에서 드롭(drop)이라고 부르는, 팝의 후렴구나 하이라이트와 동의어로 쓰이는 단어.

드롭이란 단어가 이렇게나 EDM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구나.

새삼 그것을 깨닫는다.

리카가 만들어낸 소리는 어두운 천장에서 내려와 사람들의 머리를 관통하고 깨달음을 내린다.

‘이걸 리카가 만들었어……?’

에리카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움직여 좌우를 살폈다. 사람들이 든 응원봉이 밤하늘에 박힌 변광성들처럼 밝아지고 흐려졌기를 반복한다.

아니, 응원봉이 번쩍이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박자에 맞춰 흔드는 몸이 빛을 가렸다가 보였다가 하는 것이다.

수천 명이.

‘3,000명이 다 함께 춤추고 있잖아…….’

예의상 일어나 있던 에리카는 양손을 꼭 모으고 입술을 물었다.

아래를 보니 발이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발을 몇 번 굴렀던 흔적이었다.

흥겨워서 비트를 타고 고개를 몇 번 끄덕였던 적도 있었다.

순수하게 듣기 좋다.

그렇게 생각한 에리카는 걷잡을 수 없는 암울함에 빠졌다.

‘나도…….’

에리카는 자신의 텅 빈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 흐릿한 형체가 생겼다.

기타였다.

‘나도…….’

백설하와 함께 ‘음악을 위한 동행’에서 자작곡을 만들었을 때가 떠오른다.

KS 엔터의 프로듀싱 팀에 비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에리카는 그 곡을 만드는 광경이 찍힌다는 게 부끄러웠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그만큼 즐거웠던 적이 있었을까 싶다.

기타를 치고, 멜로디를 만들고, 어쩌면 노래의 형태로 세상에 드러날지도 모르는 흥얼거림을 내뱉는다는 게.

‘나도, 할 수, 있…….’

에리카가 힘없이 손을 축 늘어뜨렸다.

영원히 그럴 날이 오지 않으리란 것을 알기에.

KS 엔터의 프로듀싱 팀.

성공을 만들어내는 기계들이 버티고 있는 한, 에리카의 보잘것없는 창조성은 영원히 그늘에 가려 꽃피울 수 없을 것이다.

에리카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리카가 두 팔을 번쩍 들고, 아이돌답지 않게 인상을 와락 쓰면서도, 흥겨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르짖었다.

[인민이들 즐겁게 놀았나요오―!]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사람들의 등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카와이 베이스의 신!]

리카가 스냅백을 벗어 관객석으로 던졌다.

[이시카와 리카, 였습니다!]

신내림을 받은 사제를 향해 사람들이 찬양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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