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64화 (364/760)

364화

전혀 다르다.

김민주는 그 말이 이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단어가 아닌가 했다.

‘박력이 차원이 달라.’

소녀연맹의 아라베스크는 음악 방송 무대보다.

HPT 뮤직 어워드 무대보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강렬하다.

마치 소녀연맹이 숨기고 있던 에너지를 이 한순간에 전부 방출하는 것만 같았다.

‘안 돼.’

김민주는 풀어지려는 얼굴을 손으로 문질러서 다부지게 붙잡았다.

그리고 다시금 진지한 표정으로 무대를 보았다. 1층, 무대로부터 십수 미터는 떨어져 있어서 소녀연맹의 실물이 자세하게 보이진 않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김민주의 시력은 2.0에 근접한다.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웬만한 건 세세한 디테일까지 잡아낼 수 있다.

‘안 된다고…….’

김민주의 얼굴이 다시 멍하니 풀리려 했다.

그녀는 보았다.

소녀연맹의 피부 곳곳에서 비산하는 땀방울을. 그것은 소녀연맹이 쌓아온 노력의 증명이며, 무대에 온전히 이입하고 있단 것을 웅변하는 제2의 언어였다.

그녀들은 머리카락 한 올과 옷의 끝자락, 턱 끝에 맺힌 땀조차 퍼포먼스의 부분으로 활용한다.

존재 자체가 예술적이다.

‘왜 이렇게 달라 보이지? 어떻게 몇 개월 만에 이렇게?’

김민주는 이런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왜 아이돌은 연차가 넘어갈수록 실력이 눈에 띄게 상승하지 않는가?

아이돌 그룹의 끝이라는 7년 차에 이르면, 상식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기량이 우월해야 정상 아닌가?

그 이유를, 김민주는 아이돌로 활동하면서 알게 됐었다. 다른 아이돌들을 방송국에서 만나게 됨으로써 말이다.

‘어느 수준에 이르면 노력하지 않으니까.’

그룹의 컨셉이란 한계에 갇힌 아이돌들은 어느 순간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

항상 그 나물에 그 밥인 안무나 노래를 받으니, 굳이 기량을 향상시켜야 할 필요는 못 느끼는 것이다.

회사에서 바라는 수준에 이르고 어느 정도 요령이 들면 그 상태에서 정체해버린다.

‘그런데 얘네는…….’

소녀연맹은 아니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아닐 것이다.

그녀들이 매 순간 기량을 갈고닦아 왔단 사실이 이 무대로 증명된다.

무엇을 위해서?

‘더 높은 계단을 밟으려고.’

‘아라베스크’는 소녀연맹이 1년 차의 말미에 밟을 수 있던 가장 높은 계단이었다.

그것을 거의 1년이나 더 지나서 밟을 때는 당연히 더 쉬울 수밖에 없다.

정해진 퍼포먼스만 메우기 급급했던 때와 달리, 퍼포먼스에 본인의 스타일을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운동선수 같…….’

아니.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소녀연맹은 클래식 주자(奏者)와 같다.

클래식을 배운다는 건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다. 수백 년간 축적된 악보의 계단을, 재능과 노력이란 두 발로 올라간다.

상층에 도달할 때까지는 개성이란 변명이 통용되지 않는, 오로지 숙련도만을 판가름하는 고행길이다.

소녀연맹은 개성이 중시되는 팝에 속해 있으면서도 클래식 주자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더 어려운 춤, 더 어려운 노래, 더 어려운 기교…….’

그 모든 건 훗날 정상에 오르기 위함이다.

소녀연맹에게 가장 어울리는 곡을 받았을 때 ‘실력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거절하지 않기 위해.

김민주는 전율했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자신의 뒤에서 쫓아오는 인간들이, 어쩌면 옆에서 같이 달리는 인간들이 이러한 의식의 소유자라는 게.

기쁘고 흥분돼서 어쩔 도리가 없다.

‘안 돼. 티 내지 마.’

김민주는 입꼬리를 가라앉혔다.

케이어스 멤버들 또한 이 무대를 인상 깊게 보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티는 내지 않을 게 분명하다.

경쟁자를 보고 감탄하거나 놀라는 건, 위에 선 자로서 너무 품위 없는…….

“하양아아…….”

진소유가 눈물을 찔끔 흘리고 있다.

김민주가 어이없단 듯 바라보았지만, 진소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덮친 감정을 받아들이고 표출했다.

“소! 녀! 연! 맹! 아! 라! 베! 스! 크!”

이제 보니 진저는 ‘아라베스크’ 공식 응원 구호까지 신나게 외치고 있었다.

김민주가 무대에 심취하고 있느라 깨닫지 못하고 있던 것뿐.

에리카만이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으로 무대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래, 콘서트에 왔으니까.’

김민주는 모처럼이니 즐기기로 했.

‘아니 근데 소유 얘 이상한데?’

진소유는 계속 눈물을 찔끔거렸다. 일반적으로 감동받아 우는 사람과는 뭔가 달랐다.

계속 몸을 움찔움찔 떠는 게, 누가 옆에서 전기 충격이라도 간헐적으로 주고 있는 모양새였다.

김민주는 바르르 떨기까지 하는 진소유를 무시하고 다시 무대에 집중했다.

‘온다.’

“나온다 나온다!”

“와아아악!”

“그거다!”

기대했던 건 김민주만이 아닌 듯 근처의 인민이들이 잔뜩 흥분하면서 외쳤다.

‘아라베스크’ 최후의 하이라이트, 그 직전이다.

소녀연맹이 백댄서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 도중에 몇 명이 총에 맞은 것처럼 쓰러진다.

그래도 나아간다.

또 몇 명이 쓰러진다.

그럼에도 나아간다.

전진, 다시 전진.

마침내 남은 건 소녀연맹뿐이었다.

최후의 하이라이트를 예고하듯 불필요한 사운드는 전부 빠지고 담백한 멜로디와 트랙만이 남았다.

소녀연맹은 최후를 예감하고 춤춘다.

‘음?’

김민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 표정이 달라.’

콘서트용으로 표정 연기를 바꾼 건가?

‘아니야.’

같은 아이돌인 김민주는 그런 게 아니란 사실은 단숨에 간파했다.

소녀연맹은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것이다. 그녀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품고 저마다의 표정을 짓는다.

[우리의 연맹을 믿어.]

리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숨바꼭질하듯 간간이 터져 나오는 웃음은 엔터테인먼트적인 제스처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순간이 행복해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다쳐도 일어서.]

백설하의 표정은 언제까지고 비장했다.

이 투쟁의 시간을 영원히 박제하여 세상의 본보기로 삼겠다는 듯이.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우직함으로 퍼포먼스의 중심을 잡는다.

[우린 가시를.]

조아라는 악에 받쳐 있다.

전신의 근육 한 줄까지 섬세하게 사용하는 극도의 집중 상태.

신체를 온전히 통제해내는 고통으로 이를 꽉 물지만, 그녀의 춤사위는 더없이 황홀하게 일렁였다.

[헤치고 나아가.]

장하양은 조아라와 정반대였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다. 그 증명으로 헐겁게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멍한 상태에서 몸을 버릇에 따라 움직이도록 한다. 그렇다고 퍼포먼스를 놓은 건 아니었다.

신체에 모든 힘을 집중하여 정신까지 챙길 여력이 없는 것이다.

자신을 놓아버린 퍼포먼스. 그럼에도 한계 이상 나아가는 날갯짓이 아름다웠다.

[손을 묶고 기어서라도.]

신아름.

아, 신아름.

김민주는 그녀를 보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땀을 비처럼 맞은, 한눈에 보아도 탈진에 다가가는 상태이지만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이 매혹적으로 번뜩였다.

신아름이 손목끼리 붙이고 회전시켰다.

시계태엽이 감기는 듯한 제스처, 그것을 신호로 쓰러졌던 모든 백댄서가 일어나 자리를 잡았다.

30명이 넘는 인원이 팔짱을 끼고 철조망을 만들었다.

그 중앙에서.

“온다…….”

소녀연맹이 행진했다.

그 뒤에는 3,000명의 인민이 함께였다. 그들이 흔드는 횃불이 스크린에 비쳤다.

소녀연맹이 ‘아라베스크’에 도달하기까지 1년.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노력과 유대가 또다시 1년의 숙성을 거쳐 완전히 개화했다.

화면으로만 느껴왔던 열기는 진실한 불꽃이 되어 관객석을 덮쳤다.

거대한 화염의 풍압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했다.

HPT 뮤직 어워드에서 16,000명의 찬사를 이끌어냈던 전설적인 무대가 재현.

아니, 그 이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민주는 생각했다.

‘티켓값이 100,000원?’

턱도 없이 모자라다.

* * *

모든 조명이 꺼졌다.

백설하는 엔딩 포즈를 취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도저히 호흡을 가눌 수가 없다.

‘이게, 뭐지, 이상해.’

머리가 어지럽다.

리허설 때 느껴보지 못했던 피로감이다.

백설하는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좌우로 시선을 돌려 멤버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전부 다 마라톤 완주자처럼 숨을 헐떡인다.

‘나만 그런 게 아니야.’

공연장 온도가 너무 높나?

그래서 수분을 너무 빨리 잃었나?

‘아니, 아니야…….’

소녀연맹은 기량 이상의 퍼포먼스를 펼쳤다. 정확하게는, 체력 배분에 실패했다.

그녀들은 아니 – 팅글 – 아라베스크로 이어지는 오프닝 메들리에서 할 수 있는 한 체력을 전부 짜내어 사용했다.

뒤가 없단 마음가짐으로 퍼포먼스에 임했다.

그리고, 누구도 그걸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이 상태면 다음 무대 제대로 못 할 거야. 잘못했어. 근데, 근데에…….’

조명이 천천히 켜졌다.

그와 함께 백설하의 눈에 환상적인 광경이 잡혔다. 수천 명의 사람이 번쩍이는 횃불을 들고 끝없이 ‘소녀연맹’을 환호하는 것이었다.

‘이런 걸 보면, 이런 걸 보면 누구라도…….’

뇌가 쾌락으로 절여진 기분이다.

피로로 덜덜 떨리던 손발이 평정을 되찾고, 미친 듯이 산소를 갈구하는 폐에서의 고통이 사라졌다.

‘누구라도 체력 배분 따위 생각 못 할 거잖아…….’

3,000명의 사람.

그들 모두가 팬이다.

소녀연맹을 사랑하여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그래서 직접 소녀연맹을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아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팬들.

‘최고의 무대를 보여드리고 싶어.’

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

적당 적당한 무대는 소녀연맹 자신들이 허락하지 못한다. 그것을 무대에 오르자마자 느꼈고, 그대로 실천했다.

백설하는 굽혔던 다리를 펴고 똑바로 섰다.

숨이 거칠지만, 신기하게도 말이 똑바로 나올 듯한 예감이 들었다.

[여러분!]

백설하가 부르자 수천 명이 답했다.

아마 천국은 이런 곳이 아닐까.

수천 명이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고 환호해준다는 건, 이렇게나 행복한 것이구나.

‘이 한 몸 망가지더라도.’

백설하가 침을 꼴깍 삼켰다.

‘여러분에게 최고의 시간을.’

아이돌은 우상이지만 신이 아니다.

전능하지 않기에 숭배자들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줄 수 없다.

계속 아이돌로 남아 있기 위해선, 인간이 아이돌이 되기 위해선, 가진 모든 것을 쥐어 짜내야 한다.

고통스러운 길이다.

그런데.

‘그게 뭐?’

백설하가 신나게 외쳤다.

[둘, 셋.]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로 기뻐서 못 참는 투로 외쳤다.

[우리들의 연맹.]

소녀연맹입니다!

* * *

백설하가 활짝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오!]

“안녀으아아아아아세에에에요오오오옼!”

김채현이 미친 사람처럼 외쳤다.

그녀는 오프닝 메들리 무대를 보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1년 후에 수능을 친다는 압박감 때문에 결박되어 있던 정신이 풀려난 것이다.

마이크를 장하양이 넘겨받았다.

그녀는 풀린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 모습이 중앙 스크린과 양편의 아이맥에 선명히 나타났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앓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누군가 ‘구급차!’라고 크게 외치자 장내가 웃음에 휩싸였다.

그런데도 장하양은 여전히 풀린 눈이었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고, 갑작스레 손키스를 날렸다.

“끼으에에에에에에에아아아아아아악!”

김채현이 이마에 손을 얹고 괴물처럼 울부짖었다. 다행히 창피하진 않았는데,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같은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언니 너무 예뻐요 언니 너무 예뻐요 언니 너무 예뻐요 하루만 언니 입술로 살아보고 싶다 언니 사랑해요 언니 사랑해요 언니 사랑해요.”

라고 김채현이 말했는데, 옆의 관객은 그것마저 넘어갈 순 없었는지 소름 끼친단 듯 살짝 몸을 뺐다.

[세컨드 우먼 하양입니다.]

장하양이 SNS에 떠도는 자신의 별명을 말하자, 인민이들이 아주 좋아 죽으려고 했다.

세컨드 우먼은 장하양이 ‘후쿠요 히다카’ 패션쇼를 끝내고 얻은 별명이었다.

[네, 자기소개도 두 번째로 하게 됐네요. 어어, 오늘 다들 즐겁게 즐기셨으면 좋겠고요…….]

[언니, 즐겁게 즐기셨으면은 뭐예요. 동의 반복 아니에요?]

[똑똑한 아라한테 차례 넘길게요.]

조아라는 대본과 다른 타이밍에 마이크를 받자 적잖이 당황했다.

장하양에게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아, 하양 언니.’

장하양은 관객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입술을 파들파들 떨었다. 이제 보니 입술이 조금씩 새파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언니 진짜 미친 것처럼 뛰어다녔으니까…….’

마치 웨이트 운동을 처음 하는 사람이 본인에게 주어진 능력보다 더 큰 무게를 들었을 때 같았다.

근육이 제대로 만들어지지도 않았는데, 그에 상응하지 않는 막대한 칼로리를 소모하니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장하양은 ‘아라베스크’ 무대에서 한계를 넘는 격한 움직임을 펼쳤었다.

조아라가 감탄할 정도로, 방금 무대에서의 장하양은 쇼맨십과 무대 장악력이 엄청났었다.

그 반동이 왔다.

[네, 뭐, 똑똑한 아라입니다.]

조아라가 머리를 긁적이자 관객들이 ‘스마트 아라!’라고 환호해주었다.

[그거 나 놀리는 거잖아요. 다 알아요. 근데 진짜 나 스마트하거든요? 책도 아마 제일 많이 읽을 거 같은데.]

관객들이 크게 웃었다.

조아라도 웃었다.

3,000명의 관객 앞에 있는데도 이상하게 전혀 떨리지가 않았다.

이 느낌은 뭐랄까…….

‘유치원생 때 엄마 아빠 앞에서 춤췄던 거처럼.’

그런 따스함이 느껴진다.

조아라는 여심(남심 포함)을 사로잡는 미소를 띠었다. 유독 여자들의 환호성이 강해졌다.

[우리 오늘 정말 준비한 거 많아요. 100,000원의 가치, 우리가 지켜줄…….]

[아라쨩 돈 얘기 직접적으로 하는 건 너무 천박하잖아!]

[뭐가?]

[여긴 꿈의 세계야! 환상의 세계야! 돈 같은 건 끼어들 틈 없어!]

[어디까지 말했더라. 아, 100,000원의 가치 우리가 지켜줄 테니까 기대 많이 하세요.]

[히도이(너무해)…….]

조아라가 리카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그녀는 조아라를 한껏 째려보곤, 정면으로 눈을 돌려 인민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는 몇 초간 안절부절못하다가 피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감독님, 시간 조금만 더 쓸게요! 진짜 조금만요! 인민이들한테 부탁할 거 있어요! 되죠!]

리카가 공손하게 2층 FOH에 있는 조진만을 가리켰다.

수천 명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FOH에서 공연을 컨트롤하던 십수 명의 감독들이 기겁하면서 컨트롤 보드 안으로 숨었다.

연출 감독 조진만은 어버버 입술만 떨었다.

놀랍게도 카메라 감독이 그 광경을 찍었다. 조진만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얏타(해냈다)! 그, 그럼요! 인민이들 아타시(제)가 부탁할 거 있는데요, 들어주실 거죠?]

네에에에에에!

[저, 저, ‘리카 사랑해’라고 한 번만 해주세요!]

리카가 부끄럽단 듯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 순간.

리카 사랑해애애애―!

수천 명이 한 번에 내뱉는 ‘사랑해’.

그에 리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헤, 헤헤.]

리카가 벌떡 일어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여전히 눈시울이 붉은 채로 당당히 말했다.

[저요, 아이돌이 되길 잘한 거 같아요! 지금 너무 행복해요! 빈말 아니에…….]

[너 시간 엄청 오버야.]

신아름이 리카의 손에서 마이크를 뺏었다.

신아름이 든 마이크로 리카의 ‘너무해애애!’라는 비명이 흘러들어왔다.

[예, 아름입니다. 앞에 분들이 시간을 다들 엄청나게 오버해놔서 제 소개는 짧게 해야겠네요. 먼저 다들.]

신아름이 마이크를 리카의 품에 안긴 후, 자유로워진 양손을 모아 하트를 만들었다.

그녀가 귀엽게 윙크했다.

[너무 너무 사랑…….]

신아름이 뚝 멈추더니, 다시 리카에게서 마이크를 받아 말했다.

[사랑합니다…… 는 좀 무겁죠?]

아니요―!

[오케이!]

신아름이 손하트를 만들고 눈웃음을 지었다.

[사랑해요 인민이들! 오늘 보러 와줘서 제가 많이 많이 고마워요! 진짜, 진짜로요! 근데 거기 3층에 계신 분들은 저 보여요?]

보여요―!

[그럼…….]

[아름이야말로 시간 말도 안 되게 오버하잖아?!]

리카와 신아름이 마이크를 두고 다투었다.

팬들은 두 사람이 붙어서 투닥거리는 모습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특히 유용태는 신아름이 멤버와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실제로 보니 감격을 감출 수 없었다.

‘봐봐, 아름이가 저렇게 애들이랑 친하잖아…….’

커뮤니티나 SNS에는 아이돌 관계성 분석 같은 글들이 심심찮게 돌아다닌다.

유용태는 그중에서 ‘신아름 성격 더러워서 다른 멤버들이랑 안 친함’ 같은 분석글을 종종 보곤 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ㅋㅋㅋㅋㅋ 짜게 식긴 ㅈㄹ 네가 짜게 먹어서 손가락이 부은 거겠지’ 같은 댓글로 분노를 달랬었다.

‘아름이가 저렇게 잘 지내는데 무슨…….’

유용태는 행복했다.

매일 소녀연맹 콘서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토크를 감상하고 있자니, 어느새 다음 무대가 시작될 시간이 된 듯했다.

[여러분, 즐길 준비 됐나요!]

“네에에에에!”

[좋아요, 그럼, 다시 한번 놀아봐요! 다들 박수!]

소녀연맹 정규 1집 수록곡 중 하나가 울려 퍼졌다.

* * *

백스테이지는 분주했다.

리카는 사방팔방 바쁘게 뛰어다니는 스태프들을 보았다. 그녀는 멍하니 그것을 보다가 초조하게 물을 마셨다.

“리카 씨, 3분 뒤에 들어갈게요.”

“하이(네).”

리카는 자신의 앞에 걸린 펑퍼짐한 후드 재킷을 보았다. 재킷엔 뉴욕 거리에나 그려져 있을 법한 세련된 그래피티가 새겨져 있었다.

나시 차림의 리카는 후드 재킷을 걸치고 심호흡했다.

백스테이지가 쿵쿵 울렸다. 밖에선 조아라와 신아름의 듀오곡 무대가 진행 중이다.

그다음은.

‘나야. 내 솔로 무대.’

[안녕하세요 서울! 즐기고 있어요?!]

조아라가 흥에 겨워 물었다.

가사가 없는 브릿지를 이용해서 잠깐의 토크를 즐기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관객들의 힘찬 환호성이 돌아왔다.

[오케이! 아름, 한 번 더!]

신아름은 ‘아하핰!’ 웃더니 쾌활한 어조로 외쳤다.

[세이 예!]

예에에에―!

[세이 워!]

워어어어―!

[세이 하이!]

하이이이―!

이어서 조아라와 신아름의 보컬이 겹치며 곡이 이어졌다.

리카가 슬쩍 웃었다.

‘아라쨩이랑 아름이 엄청 신났네.’

두 사람의 보컬은 한 박자씩 흔들렸는데, 아마 발을 쾅쾅 구르면서 노래를 부르는 듯했다.

얼마나 신나면 저럴까.

그리고.

‘인민이들도 엄청 좋아하고 있어.’

저만한 환호를 보내는 것을 들으니, 둘의 무대가 얼마나 완성도가 높은지 알 수 있었다.

“리카 씨 스탠바이 하실게요.”

리카가 준비된 스냅백과 마스크를 썼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챙에 가려졌던 눈이 드러났다.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에너지를 간직한 눈빛이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어.’

스코틀랜드에서 성필과 얘기했었다.

불안할 필요는 없다.

무대가 정해졌다면 최고의 퍼포먼스를 위해서 노력할 뿐이다.

카와이 베이스는 공연용이 아니니, 한국에선 인지도가 없니, 호응이 적을 거라느니.

그딴 건 머릿속에서 지워도 된다.

리카는 스냅백의 챙을 붙잡고 뒤로 돌려썼다. 그녀의 빛나는 눈이 완전히 드러났다.

그녀가 선언했다.

“아타시(저), 디제이가 됩니다!”

카와이 베이스의 신, 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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