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61화 (361/760)

361화

런스루 리허설.

쉽게 번역하면 실전 같은 연습이다.

어떤 돌발 상황이 나와도 멈추지 않고 실제 콘서트와 같이 진행한다.

그로써 조각 리허설로는 알 수 없던 문제점까지 알 수 있다.

‘이제 무대 하나 남았지.’

성필은 초조한 마음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시계를 보는 것마저 시간이 아깝단 듯 곧장 무대로 다시 눈을 돌렸다.

완벽한 세팅이 갖추어진 무대가 보였다.

가장 안쪽에 가로로 긴 A스테이지. 그 중앙을 직선으로 뻗어 나오는 돌출 무대인 B스테이지.

성필의 위치는 B스테이지의 바로 앞, 팬들이 가장 앉고 싶어 하는 자리 중 하나였다.

멤버들이 ‘보라색 튤립’의 브릿지 파트를 이용해서 돌출 무대로 걸어 나온다.

그녀들은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관객석 여기저기로 손을 흔들거나 손키스를 날린다. 그 뒤로는 백댄서들이 따라 나오고 있었다.

마침내 소녀연맹과 백댄서들이 B스테이지의 끝, 성필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길게 늘어서 ‘보라색 튤립’의 하이라이트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경쾌하고도 아련한 멜로디가 성필의 귓가에 오랫동안 남았다.

[여러분,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꼭, 다음에도 꼭 다시 만나요!]

밴드 ‘데비’의 기타리스트가 강하게 줄을 당기고, 이어서 축제의 마지막을 선언하는 연주가 시작됐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화려한 밴드 음악에 맞춰 관객석의 사방팔방으로 손을 흔들었다.

이어서 백댄서들과 일렬로 손을 잡고 허리를 꾸벅꾸벅 숙였다. 인사를 마친 후엔 차례로 B스테이지를 통해 A스테이지로 돌아간다.

소녀연맹은 밴드 ‘데비’의 멤버들을 소개하려, 밴드 멤버들에게 차례차례로 다가갔다. 자기 차례가 된 밴드 멤버들은 저마다의 악기로 솔로 연주를 펼쳤다.

‘B파티 소개, 감사 인사 끝.’

B파티란 콘서트의 보조 출연자, 즉 댄서나 밴드를 뜻한다.

B파티 인사가 끝나자 무대가 천천히 암전되었다. 낮게 깔리는 어둠을 배경으로 멤버들이 무대 뒤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중앙 스크린과 무대 양쪽의 아이맥에 콘서트 크레디트가 나타났다.

영화의 마지막처럼, 사방이 어두워진 가운데 크레디트의 이름들만이 하얗게 떠올랐다.

‘성공했어.’

큰 실수 없이 런스루 리허설을 성공했다.

기쁘다. 기쁘지만, 성필은 그런 것보다 소녀연맹의 완전한 콘서트를 세상 누구보다 빨리 보았단 게 훨씬 기뻤다.

‘아냐, 기쁜 정도가 아니야.’

기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행복했다.

성필은 버릇처럼 입술을 꾹 물었다. 울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흐느낌이 섞인 웃음이 터져 나옴으로써 울지 않으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안 돼. 울지 마.’

성필에게는 임무가 남아 있다.

크레디트가 전부 올라갔다.

하지만 관객 퇴장을 위한 형광등은 켜지지 않았다. 아니, 켜지고는 있지만 그 속도가 매우 느렸다.

마치 관객들에게 나가지 말라고 강요하는 듯했다. 그에 성필이 양손을 번쩍 들고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앙코르!”

공허한 공연장에 그의 외침만이 울렸다.

“앙코르!”

다시 한번.

그러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콘서트 스태프들이 발을 구르면서 화답했다.

“앙코르!”

외침은 점점 더 커져 간다.

이윽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같은 말을, 같은 박자로, 같은 요구를 담아서 외쳤다.

“앙코르!”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조명 기구가 움직인다.

꺼졌던 중앙 스크린과 양쪽의 아이맥이 빛을 발하고 영상을 띄운다. 조명이 하나씩 켜지면서 무대를 비춘다.

그리고.

[어쩔 수 없네요!]

리카의 목소리가 공연장을 꿰뚫었다.

[앙코르예요!]

철컥, 위이잉.

와이어가 리프트를 잡아당기는 소리와 함께, 무대 바닥에서 소녀연맹이 뛰어올랐다.

소녀연맹의 정규 앨범 수록곡, ‘비익연리’가 울려 퍼졌다.

성필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소녀연맹 응원봉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그 광경을 뒤에서 지켜보는 홍규헌은.

“박 이사 일하는 거야 노는 거야?”

“둘 다 아닐까요. 놔두세요. 행복해 보이고 좋네요.”

“뭐어…….”

홍규헌은 피식 웃으면서 성필을 보았다.

손혜빈의 말마따나, 성필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그럼 나도 마지막 무대는 아무 생각 없이 즐겨볼까.”

* * *

리카가 관객석 한가운데에 서서 멍하니 소녀연맹의 응원봉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응원봉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더니, 무언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했다는 양 성필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박 이사님 이리 와보세요!”

“나 지금 조 사장님이랑 얘기하고 있잖아.”

“제가 신기한 거 찾았다구요!”

결국 성필은 리카의 발견을 구경하러 갔다.

“후후, 놀라지 마세요!”

리카는 소녀연맹 응원봉을 핸드폰 어플에 블루투스로 연결했다.

응원봉이 푸른색으로 빛났다.

“자, 보세요! 제 위대한 발견을!”

리카가 응원봉을 앞으로 뻗었다. 일정 범위를 벗어난 응원봉 빛이 주황색으로 변했다.

“신기하지 않나요!”

“구역이 바뀌니까 색도 바뀌지.”

리카는 성필의 냉철한 판단 따위 듣지도 않고 응원봉을 왔다 갔다 움직이면서 신나 했다.

색이 저절로 바뀌는 게 그리도 신기할까.

‘요즘 나오는 응원봉은 거의 다 저런데.’

해당 아이돌 그룹의 어플에 연결하고 콘서트장에 입장하면 좌석에 따라 색이 저절로 바뀐다.

그래서 관객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응원봉이 스스로 색을 바꾸며 바다와 노을을 만들거나, 멤버들의 이름을 쓰기도 한다.

옛날엔 팬들이 때에 따라 색이 다른 형광봉을 바꿔 흔들어야만 했다.

팬클럽은 콘서트에서 아이돌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따로 모여 연습까지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블루투스 응원봉 하나로 감동을 쉽게도 연출할 수 있으니, 세상 참 좋아졌다고 해야겠다.

“리카 씨, 그게 그렇게 신기하십니까?”

“당연하죠! 세상이 정말 빠르게 발전하네요! 곧 있으면 하늘을 나는 자동차도 나오겠어요!”

조진만은 아빠 웃음을 짓더니, 스태프에게 연락하여 어떤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리카가 가진 응원봉이 총천연색 빛을 뿜어내며 화려하게 빛났다. 리카는 더욱 신나서 흥을 주체하지 못했다.

성필과 조진만은 강아지를 반려견 공원에 풀어둔 느낌으로 리카를 놔두고 무대 쪽으로 갔다.

다른 멤버들은 공연의 여운 때문인지, 아니면 체력적으로 한계에 다다라서 그러는지 B스테이지의 끝에 철퍼덕 앉아 있었다.

“얘들아 잠깐 카메라 돌 건데 괜찮지?”

“뭐 또 찍어요?”

조아라가 지쳐서 죽겠단 듯이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까까지 수십 명은 밟았을 법한 곳인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만큼 힘든 것이다.

“아니. 너흰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곧이어 카메라맨이 무대로 올라왔다. 그의 모습을 본 멤버들이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카메라맨은 스테디캠을 들었다. 스테디캠이란 카메라를 몸과 연결하여 진동을 최소화시키는 도구였다.

“움직일게요.”

카메라는 멤버들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거나 갑자기 도약하거나 뒤로 휙 물러나거나, 콘서트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동선 전부를 재현했다.

그러자 카메라에 찍힌 모습이 중앙 스크린과 아이맥에 그대로 비쳤다.

“이분이 찍은 게 스크린에 나와요?”

“그거 담당하시는 분이 따로 있고. 이분이 찍은 건 너희 콘서트 CD에 포함될 거야.”

“CD?”

“서울 콘서트잖아.”

성필이 콘서트장을 쭉 둘러보았다.

“첫 번째 공연이고, 가장 상징적인 장소에서의 공연이니까. 라이브 CD를 팔면 서울 공연 걸로 해야지.”

“와, 뭔데. 그럼 우리 첫 번째 콘서트는 영원히 영상으로 남는 거예요?”

“그렇지.”

조아라는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리카만이 응원봉을 들고 관객석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성필은 어정쩡하게 웃었다.

‘격려가 통할 상태가 아니지.’

당장 얼마 후가 콘서트다.

콘서트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을 땐 긴장감보다 기대감이 컸었다.

하지만 이젠 긴장감이 훨씬 컸다.

“얘들아.”

격려가 통하진 않겠지만, 아예 이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성필이 다정하게 멤버들을 불렀다.

“내가 콘서트 많이 보러 다녔잖아. 그런데 실수 없던 공연이란 건 의외로 드물어. 하나둘씩 꼭 하자가 있었어.”

다들 귀를 쫑긋했다.

타인의 실패 사례를 들음으로써 불안감을 줄이는 건 꽤 유효한 방법이니까.

“춤추다가 인이어가 떨어져서 밟아 버린 아이돌도 있었어. 조명 위치를 잘못 알아서 어둠 속에서 퍼포먼스를 시작했던 아이돌도 있었고. 포그 머신 수증기가 바닥에 맺혀 있었는데 그걸 밟고는 주르륵 미끄러졌던 아이돌도. 지퍼를 안 잠그고 나와서 춤추는 동안 바지가 내려갔던 아이돌도. 지쳐서 아예 음악이 안 들리는지 전혀 다른 노래를 부르는 아이돌도. 야외무대에서 노래 부르다가 벌레를 삼킨 아이돌도, 그렇게 많은 실수가 있었어.”

성필은 그들 모두의 이름을 특정해서 말해주었다. 멤버들은 놀란 동시에 안심했다.

그렇게나 유명한 사람들도 실수를 한다니.

멤버들은 오늘 런스루 리허설 전, 조각 리허설들을 하면서 많은 실수를 경험했었다. 자신들의 무능이나 기억력, 재능을 탓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도 실전에서 실수한다면, 자신들이 부족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

“그런데 너희들도 그렇게 할 거야?”

갑자기 성필의 목소리가 엄격해졌다.

그에 더해 그의 표정은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진지하게 변했다.

“네?”

“너희들도 그럴 거냐고!”

백설하의 어벙한 반문에 성필이 소리쳤다.

백설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성필은 강단에 선 열성적인 교수처럼 강하게 주장했다.

“안 돼, 절대 안 돼. 이번이 마지막 콘서트라고 생각하면서 해. 너희들의 실수는 영원히 역사에 남을 거야! 죽을 각오로, 최후의 화려하게 장식하겠단 마음가짐으로 서. 알겠어?!”

침묵.

몇 초 지나지 않아서 장하양이 큭큭 웃었다.

“말씀 안 하셔도 당연히 그럴 거예요.”

“난 또 뭐라고.”

조아라가 여전히 바닥에 드러누워서 말했다.

“아저씨나 잘해요.”

“아라야.”

장하양의 부드러운 부름에, 조아라는 방금 자신이 뱉었던 예의 없는 발언을 수정했다.

“우린 걱정하지 말라고요.”

“그럼 조아라 넌 실수 한 번 할 때마다 벌금 낼래? 팀장님한테 만 원씩 주자.”

“내가 왜.”

“너 팀장님한테 뜯어먹은 거 생각하면 적은 건데?”

“야, 그건 내가 뜯어먹은 게 아니라 아저씨가 제발 사주겠다고 사정사정해서 받은 거거든?”

조아라가 자신의 머리칼을 비단이라도 되는 양 부드럽게 손으로 쓸었다.

“뭐, 이해해. 나 같은 사람이랑 관계 유지하려면 월 3만 원 정도는 써야지.”

“너 되게 싸구나?”

조아라가 신아름에게 달려들어 마운트 자세를 취했다. 둘은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다투었다.

성필은 그것을 귀엽단 듯 바라보고, 마지막으로 백설하에게로 눈을 돌렸다.

백설하는 결연한 표정이었다.

‘박 이사님은 정말 실수하지 말란 뜻으로 그런 격려를 하신 게 아니야.’

오히려 실수해도 괜찮단 뜻이었다. 그것을 유머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백설하는 실수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많은 선배들이 콘서트에서 실수를 저질렀더라도, 자신만큼은 그러지 않길 바랐다.

방금 성필이 해준 격려의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쓰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사님.”

백설하가 자신의 강철 같은 의지를 언어로 표현하려던 차.

“설하는 실수할 때마다 벌칙 받자.”

“……네?”

“좋은 생각이에요.”

장하양이 기다렸다는 듯 동의했다.

“어?”

“맞네. 쌤은 리더니까 우리보다 짐을 더 져야죠.”

조아라의 팔을 등으로 돌려 꺾어 제압한 신아름이 동의를 표했다.

“리얼.”

신아름에게 깔린 조아라가 힘겹게 숨 쉬면서 동의의 뜻을 비쳤다.

“어, 어어……?”

“오케이, 그렇게 결정한다?”

‘……왜 나만?’

백설하는 여느 때처럼 ‘이런 역할은 익숙하니까’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다른 멤버들처럼 멋진 말을 해보고 싶었는데, 성필의 장난으로 기회가 날아가 버렸다.

“……헤헤.”

그래서 그냥 웃었다.

‘나는 리더니까.’

이 십자가는 자신만이 질 수 있…….

“네, 얼마든지.”

아니, 멋진 말은 포기 못 한다.

백설하는 선언했다.

“벌칙이든 벌금이든 뭐든 매기세요. 왜냐면, 실수 따위 없을 거니까요.”

“그럼 벌칙은 수익 분배 비율 1%씩 차감하는 걸로 하자.”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현재 백설하가 성필과 한 계약.

1. 돔 투어로 100만 관객 동원 못 할 시 현재와 같은 조건으로 계약 7년 연장(법적으로 불가능함).

2. 콘서트에서 실수 한 번 당 수익 분배 비율 1%씩 차감.

그렇게, 백설하는 누구보다 큰 짐을 짊어지고 콘서트에 임하…….

“절대 안 해요!”

“오, 설하 의외로 잘 안 넘어오는구나?”

“그러게요. 언니는 말만 잘하면 간이든 쓸개든 다 주실 거 같았는데. 분위기에도 잘 휩쓸리시고.”

성필과 장하양의 컬래버레이션에, 백설하는 뒷목을 부여잡고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 * *

‘안 고독한 소련방’의 구성원들이 피 맺히는 마음으로 진행한 ‘결국엔 이기는 티켓팅’은 그럭저럭 괜찮은 결과를 얻었다.

인민이들을 절망에 빠뜨렸던 첫날 콘서트 티켓팅의 승자는 두 명이었다.

“마리아, 목 안 말라?”

김채현이 생수병을 내밀자 김마리아는 눈치를 보다가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김채현은 김마리아의 손목을 붙잡고 강제로 생수병을 쥐여주었다.

김마리아는 아까부터 길게 늘어선 줄 주위를 돌아다니는 잡상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그 잡상인이 끌고 다니는 미니 카트 안에 든 음료들을.

“마리아.”

“네, 네에.”

“언니가 주면 그냥 받는 거야.”

김마리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생수를 약간 마셨다. 김채현은 그걸 안쓰럽단 듯 바라보았다.

‘애가 뭘 받는 데 익숙하질 않네. 왜 이러지?’

체구가 작아서 친구들 사이에 잘 섞여들지 못했나? 왕따라도 당하는 걸까?

김마리아는 사소한 호의마저 굉장한 선물이라도 되는 양 굴곤 했다.

“저, 언니.”

김마리아는 품에서 꼬깃꼬깃 넣어두었던 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소녀연맹의 콘서트 티켓이 있었다.

김마리아가 티켓을 김채현에게 보여주었다.

“이, 이거 진짜 맞죠?”

벌써 몇 번이나 묻는지 모르겠다.

김마리아는 자신이 이런 거대한 행운의 수혜자가 된 것을 못 믿고 있었다.

김채현은 귀찮은 기색 없이 그녀의 티켓을 받아들고 자리를 확인했다.

‘이건 진짜 말도 안 된다.’

김마리아의 자리는 돌출 무대에 접한 스탠딩석이었다. 김마리아가 시력이 1.0 이상이란 가정하에 소녀연맹의 모공도 볼 수 있을 만한 거리다.

‘좀 여유 있을 때 핸드폰 내밀면 셀카도 찍어달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경쟁률 때문에 무서워서 이런 자리 절대로 못 고르는데. 초심자의 운인가?’

김채현은 부러움을 가득 담아 티켓의 좌석 표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김마리아의 작은 키였다.

만약 트인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김마리아는 사람들에게 가로막혀 소녀연맹의 얼굴을 제대로 못 볼 터였다.

‘차라리 일반석인 편이 마리아한테는 나았을 텐데.’

마음 같아서는 김마리아와 자리를 바꿔 주고 싶었다. 김채현이 좋은 자리에 가기 위함이 아니라, 순수하게 김마리아를 걱정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김채현의 자리는 2층의 무대 대각선 방향이었으니까. 아무리 재어 봐도 김마리아의 자리보다는 격이 훨씬 떨어진다.

“응, 맞아. 다시 봐도 부럽네.”

“죄송해요…….”

“아니 뭐라는 게 아니야!”

김채현이 황급히 김마리아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마리아, 오늘 무대 잘 즐기자. 있는 힘껏 소리도 질러. 민폐라는 생각하지 말고. 알았지?”

“네, 네!”

두 사람은 다시 지루한 기다림을 시작했다.

20분 후가 입장 시간이다.

혹시 공연 준비가 예정 시간보다 빠르게 끝나 일찍 입장되지 않을까, 그런 기적을 바라기도 했었다.

하지만 제시간에 입장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어, 언니. 저기요.”

“응?”

김마리아가 줄 뒤쪽을 가리켰다.

무엇을 보고 김마리아가 당황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늘을 절반쯤 드리운 노을을 받아 황금처럼 빛나는 머리칼. 거기에 더해 늘씬하며 길쭉한 몸, 새하얀 피부. 미디어에서 질리도록 보았던 서양인 미녀의 스테레오 타입 같은 사람이 있었다.

“외국인이에요.”

“그러게.”

김채현은 인민이로서 자부심을 느꼈다.

케이팝 콘서트에 외국인이 오는 경우가 드문 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시아권 국가에서 온다. 접근성 때문인지 특히 일본인이 한국 콘서트에 자주 오곤 했다.

‘서양인을 볼 줄은 몰랐네.’

서양인은 그 여자 한 명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주위를 근육질의 우락부락한 남자 둘이 차지하고 있었다.

‘근데 무슨 재벌가 따님인가? 보디가드들 표까지 같이 구해서 보러 왔나?’

* * *

“플레하노브.”

겨울철 옷이라기엔 너무 얇은 차림인 로자가 코를 훌쩍이면서 말했다.

“왜 그러지, 로자.”

“한국은 러시아보다 남쪽이죠?”

“내가 알기론 그런데.”

“근데 왜 날씨가…… 에취!”

로자가 재채기를 터뜨렸다. 콧물이 나오자 당황한 그녀가 얼굴을 가리면서 허둥거렸다.

옆에 있던 선전관이 티슈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선전관님.”

“미리 날씨를 알아보고 오셨어야죠.”

“아니, 남쪽에 있는 나라니까 당연히 따뜻할 줄 알았죠! 누가 모스크바랑 다를 바 없을지 알았어요? 선전관님은 알고 계셨으면 귀띔이라도 해주시지!”

선전관은 쓰게 웃으면서 외투를 벗었다. 그것을 본 로자가 당황하면서 손을 저었다.

“아, 아니, 옷을 달라는 건 아니었…….”

선전관이 외투를 플레하노브의 어깨에 걸쳤다. 플레하노브가 콧방귀를 뀌었다.

“난 이딴 거 필요 없다.”

“그러다 정말 죽습니다. 콘서트 보기 전에 죽을 겁니까? 안 그래도 굿즈 사겠다면서 아침부터 헐레벌떡 나왔으면서.”

플레하노브가 한국까지 입고 온 옷은 긴팔 티와 얇은 외투가 전부였다. 로자보다 훨씬 더 추위에 취약한 차림이었다.

그런데도 플레하노브는 전혀 추운 티를 내지 않았다.

아마, 그의 품에 한가득 안긴 소녀연맹 콘서트장 전용 구매 굿즈가 온기를 전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흥, 이 정도야 별거 아니지. 난 매일 냉수로 씻고 눈밭에 구르고 군생활 때는 그보다 더하게 살았어. 이 정도야 애들 장난이지.”

“플레하노브 씨도 한국이 따뜻할 줄 알았죠?”

“나를 뭘로 보고! 난 군인이었다! 작전 지역을 조사하는 건 당연해! 난 정말 이깟 추위는 아무렇지도 않……!”

플레하노브가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인상을 팍 쓴 뒤 침을 꿀꺽 삼켰다.

로자가 실실 웃었다.

“재채기 참았어요?”

“마음대로 생각해라.”

“그러고 보니 선전관님은 코리아에서 유학했댔죠? 서울이었어요?”

“아아, 코리아…….”

선전관의 눈동자에 노스텔지아가 떠올랐다.

“서울보다 북쪽이었죠.”

“그래요?”

로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서울보다 북쪽인 도시 어딘가의 대학을 다녔겠지 뭐.

“옛날부터 궁금했는데 선전관님은 무슨 직장에 다녀요? 돈 되게 많은 거 같던데. 전공이…… 무슨 물리학이랬죠?”

“핵물리학입니다. 제 직업은 뭐…… 과학자? 공학자? 그런 겁니다.”

“가르쳐주기 싫으면 싫다고 해요. 과학자? 공학자? 는 뭔…….”

“헬로.”

그들의 뒤에 선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그 사람은 서양인이 소녀연맹의 공연을 보러 온 게 신기한지, 눈동자 가득 호기심을 담아 선전관에게 말을 걸었다.

“두 유 노우 걸스 리그(소녀연맹을 아십니까)?”

선전관이 하하 웃으면서 답했다.

“마땅히 압네다.”

“……???”

그 사람은 선전관과 몇 마디 나누다가 두려운 낯빛으로 시급히 대화를 종료했다.

로자와 플레하노브가 선전관을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배운 인간은 뭐가 다르군.”

“선전관님 다시 봤어요.”

“별거 아닙니다.”

그때 앞줄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겨울철의 뱀처럼 뻣뻣이 굳어 있던 줄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플레하노브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시작됐군.”

그는 주머니에서 티켓을 꺼내어 다시 좌석을 확인했다.

F석.

좌석을 확인한 그는 인터넷에 올림픽홀을 검색하여 좌석 배치도를 다시금 훑어보았다.

“돌출 무대 옆.”

플레하노브가 가슴에 티켓을 품었다.

“드디어 보는구나.”

플레하노브는 티켓에 선명히 인쇄된 콘서트의 이름을 읊조렸다.

“Girl’s League – Domino Theory in Seoul.”

* * *

사람의 물결을 따라 공연장 안에 입장한 김마리아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나 기쁨으로 설렜던 적은 처음이 아닐까 싶다.

오직 행복만이 존재하는 공간.

세상 무엇도 그녀의 행복을 없앨 수 없을 것이다.

“으우…….”

그 행복은 자신의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산산조각 났다.

김마리아는 돌출부에 접한 스탠딩석이었다. 당연히 다들 일어나 있었는데, 김마리아의 키로는 무대를 볼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발끝을 세워보았다.

턱도 없다.

어떻게든 시야를 바꿔가며 사람의 벽을 뚫고 작은 틈이나마 확보하고자 했다.

안 된다.

김마리아는 울기 직전이 됐다.

“저어, 저기이…….”

김마리아는 인생 최대의 용기를 냈다. 바로, 앞자리의 사람에게 조금만, 아주 조금만 옆으로 비켜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그마한 손을 강하게 감싸고 어깨를 덜덜 떨었다.

“저기, 저기요오…….”

그제야 앞사람이 돌아보았다.

키가 180이 넘어가는 근육질의 서양인이었다. 그의 험상궂은 표정을 보자 김마리아는 뱀을 마주한 쥐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김마리아가 자연스럽게 눈을 깔았다.

‘아, 안 돼. 복날 개처럼 맞은 뒤에 널브러질 게 분명해…….’

김마리아는 자신의 키가 이렇게나 원망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평소에도 초등학생이냐며 남자애들한테 놀림받긴 한다만, 실제로 초등학생과 비슷한 생김새니 별로 타격이 없었다.

그런데 이 작은 키 때문에 실제적으로 피해를 입으니 어지간히 억울한 게 아니었다.

‘오빠는 큰데 왜 나만 작은 거야아…….’

이대로 소녀연맹의 얼굴도 못 보고 2시간 넘게 있을 생각을 하니, 김마리아는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오빠 품에 안겨서 위로받고 싶다.

하지만 오빠는 없다.

오빠가 없는 낯선 곳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안녕하십네까.”

괴상한 인사말이 앞에서 들려왔다.

김마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드니, 유려한 인상의 서양인 남자가 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이어서 그 옆에 있던 서양인 여자가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말했다.

“앞으로.”

여자가 부드럽게 김마리아의 손을 잡고 앞으로 끌어주었다.

김마리아의 세계가 바뀌었다.

인간의 벽에 가려져 있던 시야가 탁 트이고, 금속 펜스 너머로 소녀연맹이 설 무대가 드러났다.

김마리아는 자신의 어깨에 올라온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다. 돌아보니, 그 서양인 여자가 미소 짓고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김마리아의 감사에,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인민이잖습네까. 인민끼린 서로 돕는 겁네다.”

김마리아는 울컥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받은 친절이 이렇게나 따스하게 다가온 적은 처음이다.

거의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다.

말투는 좀 이상하지만, 천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친절한 사람이다.

김마리아는 어떻게 감사를 전해야 할지 몰랐다. 오빠가 가르쳐준 대로라면, 관절이 닳도록 허리를 꾸벅꾸벅 숙여야 할 것이다.

부족하나마 감사를 표하려 할 때, 공연장이 암전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중앙 스크린과 무대 양편의 아이맥에 빛이 들어왔다.

와아아아아아―!

귀를 찢는 인민이들의 함성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터져 나왔다.

김마리아는 그 거대한 열기에 깜짝 놀랐다.

무대 스크린에 영상이 떠오른다.

소녀연맹 멤버들이 저마다 의상을 입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영상 속의 백설하가 어린이 프로그램 진행자처럼 상냥하게 말했다.

[여러분, 와주셔서 감사해요!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쾌적한 관람을 위한 에티켓을 배워볼까요?]

“아아, 왔다.”

선전관이 황홀하게 읊조렸다.

“첫 번째 도미노가 쓰러진다…….”

소녀연맹 콘서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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