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말도 안 돼.’
홍규헌이 개인적으로 빚을 내서 30억 원어치의 지분을 회수했다고?
어째서 그랬을까.
성필이 생각하기엔.
‘사장님이 이렇게 지배욕이 강하실 줄이야.’
홍규헌은 감히 다른 누군가가 30%의 지분을 갖고 있는 꼴을 보지 못한 것이다.
가로 엔터는 앞날이 창창하니, 그 30%의 지분은 미래에 엄청난 규모의 자본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이야 가로 엔터가 이윤도 제대로 못 낸다지만, 나중 일은 다르잖아.’
홍규헌은 회사의 성장성을 믿고 곧바로 30억을 대출. 지분을 다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이 가설엔 허점이 존재했다.
‘BG 인베스트먼트가 지분을 왜 팔아?’
주주로서 가로 엔터의 사정을 전부 받아보고 있는 BG 인베스트먼트다.
가로 엔터가 곧 호조로 들어서리란 사실을 알 텐데, 왜 처음 투자했을 때의 30억만 받고 지분을 넘겨주었을까?
홍규헌의 가문이 BG 인베스트먼트를 협박했단 게 가장 그럴듯한 가설일만큼,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성필이 의문을 담아 한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이사가 모르는 사정이라니, 씁쓸하네요.”
“제가 프로듀싱 부문 전체는 모르는 것처럼, 박 이사님은 재무와 경영에 대해 전부는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성필이 소녀연맹 프로듀싱에 아무리 뼈를 깎는 노력과 고생을 바친다 하여도, 재무 쪽을 담당하는 한구인이 그 고생을 전부 알기란 어렵다.
때로는 무슨 작업이 진행 중인지조차 모른다.
이번 일은 그게 역으로 작용했을 뿐이었다.
“BG 인베스트먼트가 경영 쪽으로 간섭을 시도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래라저래라했단 겁니다.”
“그럼 저도 알 수밖에 없었지 않나요?”
“사장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필은 옅은 불쾌감을 느꼈다.
마치 어린아이한테 ‘너는 저런 거 몰라도 돼’라고 하는 꼴 아닌가.
“사장님은, 박 이사님이 프로듀서로서 돈이나 외부 사정에 개의치 않고 본인의 비전을 펼치시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성필의 불쾌감이 감동으로 바뀌었다.
자식에게 집안의 가난을 어떻게든 숨기고, 자식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는 상황이었으니까.
“괜한 곳에 기 쓰길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손나(그런)…….”
“그 후로는.”
대충 여러 사건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요구 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시 BG 인베스트먼트가 투자금 상환을 요구할 거라고 엄포를 놓았단 것이었다.
약 1년이 넘는 유예가 주어지겠지만…….
‘1년 뒤에도, 가로 엔터가 30억이란 돈을 즉시 상환하면 회사가 망할 거야.’
성필은 옛날에 일본에서 진소유를 만났을 때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만약 진소유가 가로 엔터로 오고자 한다면, 가로 엔터가 KS 엔터에 수십억의 위약금을 지급해야만 했다.
그러면 당연히 가로 엔터가 망하기에, 설령 진소유가 가로 엔터로 오길 바라도 데려올 수가 없었다.
‘그건 뭐 시답잖은 망상이었지만…….’
BG 인베스트먼트가 상환을 요구하는 건 진짜 돈 달란 뜻이 아니라, 순순히 하는 말이나 들으란 뜻이었다.
30억 없으면 다물고 시키는 대로 해라,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지.
“아니, 그쪽이 뭘 요구했는데요?”
“많았습니다. 직원 수부터 소녀연맹분들의 활동, 차기 그룹에 관한 부분까지요.”
그래서 홍규헌은 그냥 30억을 대출받아서 줘버렸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뭐 엄청 많이 스킵되지 않았어요?”
“아.”
한구인은 성필의 질문을 듣자 깨닫는 게 있었다.
“아마 BG 인베스트먼트는 가로 엔터의 지분을 다른 회사에 팔고자 한 거 같습니다. 2년 내에 그 기회가 올 거라 본 듯한데, 어떤 회사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높은 값을 받기 위해선 가로 엔터의 상황이 흑자로 돌…….”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에요!”
“……아.”
한구인은 또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투자금 상환을 허가한 건 시장 상황 때문입니다. 저희와 기싸움하는 대신, 시원하게 30억을 얻으면 그 돈으로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곧 총선 아닙니까. 눈먼 돈이 몰…….”
“그게 아니라요!”
“무엇을 듣고 싶으신 겁니까?”
“사장님이요 사장님! 사장님은 괜찮으세요? 30억, 30억이잖아요!”
연이자가 숨만 쉬어도 1억이 넘는다지 않는가! 보통 사람이라면 고통스러워서 호흡도 제대로 안 될 것이다.
한구인이 우울하게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괜찮지 않으십니다. 보시면 알잖습니까.”
한구인의 말투는 그답지 않게 날카롭고, 또한 무례하단 생각이 들 만큼이나 비틀린 면이 있었다.
아마 한구인은 성필이 던졌던 질문들의 진의를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답하지 않은 건, 굳이 홍규헌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겠지.
“갚을…… 갚으실 수 있으신가요? 제지회사 있으시잖아요.”
“사장님은 거기서 나오는 수익 대부분 가로 엔터에 재투자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가로 엔터는 아직 적자입니다. 갑자기 끊을 수는 없겠죠.”
“그럼 어떡해요?”
“이자가 과도하게 불어나지 않는 선에서 야금야금 갚는 수밖에요.”
“원금은 갚을 수 있나요?”
한구인이 고개를 저었다.
“매년, 이자와 함께 원금까지 2억씩 갚는다 쳐도 20년이 넘게 걸릴 겁니다.”
그럼 홍규헌은 49살이다.
“유일한 방법은…….”
“방법은?”
“가로 엔터가 말도 안 되게 성장해서 사장님의 연봉을 한 해만 30억으로 책정하는 겁니다. 그럼 빚이고 이자고 다 갚을 수 있겠죠.”
홍규헌에게 순수한 현금이 30억 오려면, 대체 가로 엔터가 얼마나 커야 할까?
한국 재계 1위의 대기업에 속한 웬만한 계열사 사장도 연봉 30억은 못 받을 것…….
“그럼 됐네요.”
성필이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가, 하나를 더 펼쳤다.
“4년 내에 갚게 해드릴게요!”
“…….”
성필의 손가락이 하나 더 펴졌다.
“5년 내에!”
한구인은 어이가 없단 듯 그것을 보다가, 한숨도 나오지 않아 허허 웃기만 했다.
“다른 사람이 말했으면 놀리는 줄 알았을 겁니다. 그런데, 박 이사님이 하시니 믿을 수밖에 없군요.”
10억이란 돈을 홀린 것처럼 가로 엔터에 투자한 인간이 바로 성필이다.
한구인은 누누이 설명했었다.
10억이면, 주식에만 투자해도 분기당 수백만 원을 받고 살 수 있다고. 더는 노동 따위 하지 않아도 되는 돈이라고.
그런데도 성필은 이렇게 말했었다.
‘나중에 수백 수천억으로 돌아올 건데요?’
그런 인간을 상대하고 있자니, 한구인은 현실 감각이 전부 사라졌다.
그래서 가볍게 웃었다.
“근데 결국, 왜 사장님은 아인 씨랑 집을 바꾸신 거예요?”
“기분이 매우 안 좋으신 거죠.”
“네?”
“아마 수렁에 빠진 기분이실 겁니다.”
* * *
홍규헌은 퇴근했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었다.
먼 거리를 걷는다는 감각.
차가 없단 건 생각보다 훨씬 불편했다.
자랑스레 신고 다녔던 힐이 이렇게나 원망스러울 줄이야.
그녀는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지하철로 향하면서 높게 솟은 건물들을 많이도 보았다.
웃으며 백화점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콧대 높게 외제 차에 기대어 선 사람, 쇼핑백을 들고 하하호호 웃는 이들.
홍규헌은 새삼스레 자신의 손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지하철에 올랐다.
걷는 것보다 더 고역이었다. 가만히 서 있으려니 발꿈치에서 종아리, 허벅지에서 허리로 고통이 계속해서 밀려온다.
사람들 사이에 섞이며 불필요하게 신경이 분산된단 것도 괴로웠다.
지하철에서 내려도 숨통은 트이지 않았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바구니 안의 콩나물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마침내 밖으로 나왔다.
‘퇴근에만 2시간 넘게 걸리는군.’
도착한 곳은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였다.
‘권 경리는 매일 이 길로 다닌 건가. 존경스러울 정도야.’
홍규헌은 뻐근한 발을 움직여 권아인의 집 아니,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걷고 또 걷자, 걸어 다니는 게 살짝 무서울 만한 동네가 나왔다. 주황색 가로등은 위안을 주기보다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원룸촌 꼬마 빌딩의 숲에는 귀를 어지럽히는 소리가 가득했다.
눈도 어지러웠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하며 개의치 않고 담배를 버리고 들어가는 사람, 침이나 재가 눌어붙어 누렇게 변색된 거리.
‘이렇게 살면 향상심도 다 없어지겠어.’
출퇴근만 합쳐서 4시간이 넘는데, 일 이상의 다른 걸 어떻게 꿈꿀 수 있을까.
‘그런데도 권 경리는 공부를 한다지.’
한구인의 도움을 받아 재무 쪽 공부를 열심히 하는 중이라고 한다.
‘참 대단해.’
홍규헌이 집 앞에 도착했다.
선객이 있었다.
“사장님.”
성필이었다.
홍규헌은 그 뒤에 선 한구인을 보았다. 한구인이 혼난 강아지처럼 시선을 슬슬 피했다.
홍규헌이 길게 숨을 내뿜었다.
“들어와. 딱히 대접할 건 없지만.”
* * *
권아인의 집.
현재는 홍규헌의 집인 원룸. 그곳에 들어서자 성필은 그리움을 느꼈다.
‘딱 나 옛날에 살던 곳 같네.’
딱히 좁다고 느끼진 않지만, 계속 살다 보면 숨이 막히는 크기.
성필은 원룸에서 2년, 3년, 4년을 살다가 도저히 못 버티겠어서 더 넓은 집으로 옮겼었다.
“앉아.”
성필과 한구인은 침대와 책상 사이 바닥에 앉았다. 좁았기에,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어깨가 붙을 만한 거리에 있어야 했다.
“…….”
“…….”
“한 이사님.”
“예, 박 이사님.”
“그냥 마주 보고 앉으면 되지 않아요? 굳이 나란히 앉아야 할까요?”
“아.”
한구인이 재빨리 성필에게서 떨어져 그의 맞은편으로 갔다. 그는 주춤거리다가, 다시 성필의 옆으로 돌아왔다.
성필은 화들짝 놀라면서 떨어졌다.
“지금 저한테 플러팅하시는 거예요?!”
“아, 아니. 사장님이 저희 맞은편에 앉으셔야 맞지 않겠습니까…….”
“그렇네요, 하하.”
주방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이사는 기겁하면서 주방으로 달려갔다. 홍규헌이 차(茶)를 타고 있었다.
“사장님 저희가……!”
“앉아.”
“하잇(넵)!”
둘은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홍규헌은 종이컵에 녹차를 타와 그것을 바닥에 두었다. 그리고 성필과 한구인이 비워둔 맞은편의 자리를 무시하고, 그 옆의 침대에 앉았다.
“둘이 왜 꼭 붙어 있어?”
“…….”
“…….”
성필이 슬며시 일어나 한구인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사장님, 어떻게 된 거예요?”
“뭐어, 입이 싼 한 이사가 사정은 이미 다 말했겠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박 이사님이 비 맞은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쳐다보셔서.”
“……예, 뭐, 비 맞은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쳐다봤습니다 네.”
홍규헌의 입술이 살짝 열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거 내가 잘 알지.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었겠네. 소감은?”
“네?”
“회사를 지키려는 내 용기에 대한 소감은?”
“왜 그러셨어요?”
30억이란 돈은 장난으로라도 입에 담기 거북해지는 수치다.
95%의 사람들은 죽기 전까지 온전한 현금으로 만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돈.
그만한 돈을, 홍규헌은 쌩으로 대출받았다.
“저랑 상의할 수 있으셨잖아요. BG 인베스트먼트의 요구 조건이 뭐였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적절히 조정했을 수도 있어요.”
프로듀싱에 간섭받는 건 그야 속이 쓰리겠지만, 홍규헌에게 빚이 씌워지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그럭저럭 만족할 타협점을 찾을 가능성도 있었다.
“뭐어, 이미 다 끝난 일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네. 내 기준으로 그쪽 요구 사항들은 터무니없었어.”
홍규헌이 실소를 머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우리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분을 비싸게 팔려고 내건 요구들이었으니까. 우리 슬로건이랑 반대돼.”
“저희 회사 슬로건이 있었어요?”
“사내 문화부터 뜯어고쳐야겠네. 박 이사 우리 연마다 MD&A 작성할 때 정신 놓고 있어?”
“헤헷.”
“여하튼 자기 귀여운 건 알아 가지고.”
“저게 귀엽습니까……?”
가로 엔터는 연마다 ‘회사 재무 상황과 사업 실적에 관한 경영진 의견과 분석’이란 자료와 여러 자료를 엮어 회사 홈페이지에 게시한다.
성필도 경영진의 한 축으로서 그곳에 한두 마디 더하곤 하는데, 한구인의 영역이라 자세한 사항은 몰랐다.
“거기에 회사 슬로건 같은 것도 넣었었네요. 앞으로는 자세하게 읽을게요.”
“이것도 이사라고 데리고 있네.”
홍규헌은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있지, 슬로건. 최고의 아이돌.”
성필이 입만 열면 습관처럼 내뱉는 단어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물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울음 섞인 신음을 뱉을 듯해서였다.
요즘 멤버들이나 회사 사람들이 성필의 말솜씨를 보고 ‘홀린다’고 표현하곤 한다. 성필은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 이제 알 듯하다.
아마 성필 자신을 ‘홀린다’고 표현할 때는, 방금의 홍규헌과 비슷할 터였다. 성필은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하지만, 사장님 이렇게 사시는 꼴은 제가 도저히 못 보…….”
“여기 권 경리 집이거든?”
“…….”
“그리고 나 여기서 완전히 계속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성필은 권아인 경리에게 마음속으로 사과를 전했다. ‘이렇게 산다’고 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사장님은 괜찮으세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빚은 저주다.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가져다 바치는 게 자본주의의 섭리다.
주5일제라면 5일을 바치고 2일의 휴식을 얻는다. 그런데 1억이란 빚이 매년 달리면 2일의 휴식조차 제대로 즐기지 못할 터였다.
위장에 돌을 집어넣고 사는 기분이지 않을까. 항상 머릿속에는 숫자만 떠돌고, 일하지 않으면 손발마저 덜덜 떨릴지도 모른다.
자유를 얻고자 시간을 바치는데, 빚이 있으면 쉬는 동안에도 자유를 가져다 바치는 꼴이다.
“저는, 저는…….”
성필이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구인은 그의 제스처를 보고, 곧 부끄러운 말이 나올 듯하여 눈을 질끈 감았다.
“사장님의 그런 모습 보고 싶지 않…….”
“세네카 알아?”
“네? 누구요?”
새로 나온 아이돌인가?
“철학자야. 자세한 말은 기억 안 나는데, 이렇게 말했었거든.”
미래가 불안하다면 며칠간 남루한 옷을 입고, 허름한 곳에서 지내며, 맛없는 음식조차 배불리 먹지 말아 봐라.
그렇게 며칠간 살아라.
자, 이게 네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일인가?
“그렇게 해봤어.”
“…….”
성필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고, 홍규헌은 검지를 추켜세웠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아닌데요.”
“맞잖아. 내가 권 경리 집을 허름한 곳이라고 판단한 게 떨떠름한 거지?”
“아닌데요.”
“근데 뭐어, 딱히 내가 권 경리 집을 허름하…….”
“아닌데요.”
홍규헌이 주먹을 들자 성필이 입가를 일자로 다물었다.
“세네카의 말을 실천하려니까 마땅한 장소가 없더라고. 어디 모텔에서 한 달간 지내는 것도 그렇고. 아니, 모텔 정도면 준수한 거처지.”
그래서 홍규헌은 한구인에게 도움을 구했었다.
“한 이사님 이거 안 되시겠네. 아인 씨를 그렇게 보고 계셨어요? 허름한 집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사는 인간이라고요?”
“아닙니다!”
우연은 휴게실에서 시작되었었다.
재무팀 동료로서 함께 커피를 타는 도중, 한구인이 문득 물었었다.
‘적당하게 좁고 사람 냄새나면서 평범한 사람이 지내고 살짝은 가난한 집을 구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헤헤, 그거 저희 집이네요.’
권아인은 또 한구인이 괴상한 농담을 하는 줄 알고 적당히 맞장구쳐주었다.
그러자 한구인이 손가락을 튕겼었…….
“한 이사님 당장 아인 씨한테 사과해요!”
“끝까지 좀 들으십시오!”
한구인은 하우스 체인지를 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권아인은 하우스 쉐어도 아니고 체인지는 뭐냐고 되물었는데, 한구인은 말 그대로 집을 바꿔 사는 거라고 했었다.
아는 사람이 잠깐 마음의 평정을 위해서 10평보다 작은 집에서 한 달간 살고 싶어 하노라고.
‘묘하게 구체적인 평수네요. 아니, 제집 평수는 어떻게 아세요?!’
‘찍은 겁니다.’
‘……그분 집은 어딘데요?’
그녀가 평생 살지 못할 고급 아파트의 이름이 나오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안 하면 손해네요! 제가 할게요! 하하, 그런데 농담이시죠? 그렇게 형편 좋은 얘기가 있을 리…….’
현재로 돌아와서, 홍규헌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된 거야.”
홍규헌이 집 안을 둘러보았다. 성필의 눈도 그녀와 같은 곳을 따라 움직였다.
허름한 곳이 보였.
‘미안해요 권 경리님…….’
성필은 다시금 권아인 경리에게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그녀의 해맑은 웃음이 떠올랐다.
“뭐어, 세네카 말대로더라고.”
홍규헌이 권아인처럼 해맑게 웃었다.
물론 걱정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우울하게 내려갔던 기분은 조금이나마 지워져 있었다.
“30억? 연이자 1억 이상? 뭐어, 그렇다고 어떻게 되겠어. 여기보다 더 안 좋은 집에서, 지금 먹는 것보다 더 안 좋은 걸 먹고, 싸구려 옷 입고 살겠지. 생각보다 괴롭지는 않아. 할 만해.”
홍규헌은 말을 이었다. 그의 표정에서 결연함이 감돌았다.
“내 빚 갚으려고 가로 엔터의 이익을 마구잡이로 가져가는 일 따위 없어. 그것만은 확실해. 내가 길가에 널린 쓰레기 봉지처럼 태풍에 휩쓸리는 삶을 산대도, 그런 일만은 안 해.”
성필은 그다음에 이어질 말을 알 듯했다.
“내가 괴로워도, 내 꿈이 괴로운 건 못 봐.”
홍규헌의 꿈, 아이돌을 만드는 것이다.
이젠 최고의 아이돌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 회사의 사장으로 있는 것이다.
본인이 거지처럼 산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꿈인 회사만은 번듯하게 있게 만들고 싶었다.
“뭐어, 내 생각은 그래.”
홍규헌은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였다.
“요컨대 내가 지금 하는 짓은 일종의 멘탈 케어지. 혹여나 찾아올 불운한 미래를 대비해서…….”
“사장님, 제가 4년 내에 다 갚게 해드릴게요.”
“박 이사님, 오늘 아침엔 5년 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생각 바뀌었어요. 아니, 3년 내에 갚게 해드릴게요.”
“수치가 굉장히 구체적이네.”
홍규헌은 성필의 위로가 고마웠다.
아무런 근거 없는 빈말이어도 고마웠을 것이다. 그런데 성필의 발언은 빈말이 아닌 듯하여, 더욱 고마웠다.
“근데 사장님, 이건 좀 분위기 깨는 말인데.”
“해봐.”
“최악의 상황엔 집 팔면 되지 않으신가요?”
“내 집이 아니야. 관리비는 내가 내고 있고.”
“얼마인데요?”
대답을 들은 성필이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하루빨리 갚아야겠네요! 아, 그리고 뭣하시면 제가 돈 빌려드릴 수 있어요. 주식도 해보실래요? 제가 정말 좋은 정보가 있어서 주식 투자를 꾸준히…….”
“주식 맡길 거면 한 이사한테 맡기지. 내가 박 이사한테 종목 추천받게?”
“아니 진짜 좋은 거 있다니까요. 저 거의 미래 예지 수준(사실임)으로 종목 잘 골라요.”
“됐어. 무슨 투자야.”
“그러지 말고요.”
“왜 이렇게 끈질겨?!”
셋은 밤늦게까지 담소를 나누었다.
도착할 때부터 늦은 밤이긴 했지만,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잊은 듯 대화에 열을 올렸다.
회사 관련 이야기는 잘 나오지 않았다.
친구끼리 밤에 모여 수다를 떠는 것처럼 근심 걱정 없는 이야기만 나누었다.
홍규헌이 문득 생각했다.
‘옛날 같네.’
4년 전, 서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모였던 세 사람이다.
‘아니.’
옛날 같은 게 아니라, 옛날부터 달라진 게 없는 거였다.
회사가 커지고 소녀연맹이 성공했어도, 세 사람의 관계는 달라지지 않았다.
홍규헌은 그에 안도했다.
* * *
권아인 경리는 요즘 세상이 달라진 듯했다.
세상에, 서울에서 출퇴근이 가능하다니?
세상에, 세단이 생기다니?
세상에, 집이 휘황찬란하게 좋다니?
‘나 혹시 소설 주인공이 된 거 아닐까?’
예쁘고 잘생긴 언니가 왠지 모르게 친근하게 다가와 온갖 호의를 제공하는.
권아인이 학생 때나 읽었을 법한 인터넷 소설의 내용처럼 인생이 변해가고 있었다.
동시에, 권아인은 하루하루가 너무 아까웠다.
‘한 달이 지나가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야 하잖아…….’
이런 삶을 맛보았는데 어떻게 옛날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권아인은 휴게실에서 우울하게 커피를 탔다. 한구인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의 것까지 탔다. 분명 가져다주면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인 씨……’라면서 당황하겠지.
실은, 권아인은 한구인의 그런 모습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 커피나 차를 타주기도 했다.
“권 경리.”
“어, 사, 사장님 안녕하세요.”
홍규헌이 휴게실로 들어오자 권아인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요즘 홍규헌은 본인의 커피나 차마저 혼자서 탔다.
직원들은 그녀가 휴게실에 들어올 때마다 뻣뻣하게 굳곤 했다. 어색한 것이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 자체가 환상의 동물 보는 것처럼 힘들었는데, 요즘은 뻑하면 보곤 하니까.
홍규헌은 권아인의 곁에서 커피를 탔다.
권아인은 제발 물이 빨리 끊길 기도했다. 사장과 대화하는 건 어지간히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으니까.
“권 경리.”
“넵!”
“왜 이렇게 군기가 들어 있어? 한 이사가 군대놀이라도 해?”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그래.”
권아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권 경리.”
“네, 네.”
“우리 한 달 계약 있잖아.”
아, 설마.
도저히 못 지내겠으니까 예정된 날짜보다 빨리 끝내자는 걸까.
‘그래, 그런 집에서 사셔온 분이 바퀴벌레나 기어 다니는 집에서 어떻게 계속 사시겠어……. 그, 그래도 찍찍이 많이 두고 왔는데…….’
애초에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이었다.
‘잘 가, 나의 환상아.’
권아인은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거 끝나면, 내 집 들어와서 살래?”
“……으헤?”
권아인이 어벙하게 답했다.
“보니까 회사랑 너무 멀더라고. 힘들지 않아? 아, 방 계약 만료까지 좀 많이 남아서 그런가?”
“어, 어, 으, 어, 어?”
권아인은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아까 답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벙하게 물었다.
“왜, 왜요오?”
“음, 그냥.”
홍규헌이 종이컵에 믹스 커피를 부었다.
“권 경리가 동생 같아서 그래.”
권아인은 생각했다.
‘진짜 내가 소설 속 세계로 들어왔구나.’
권아인은 마침내 인정하기로 했다.
‘남주는 언제 나타나지? 혹시 사장님이 오빠분을 소개해주거나 그런 일이 생길까? 나 재벌이랑 결혼하는 거야? 다음 스토리 언제 진행돼애애애!’
* * *
가을이라고 생각했건만, 산에 자라난 풀은 여전히 싱그러움을 머금고 있었다.
장하양은 저 멀리까지 이어지는 산의 줄기들을 바라보았다. 나무들이 단풍으로 옷 갈아입을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딘가 공허한 면이 있었다.
“저, 다음 할 말은 하양이란 애가 할 건데요.”
성필의 목소리에 장하양이 멍한 상태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품에서 콘서트 티켓이 든 봉투를 꺼내어 들었다.
“처…….”
장하양의 목소리가 한 번 턱 막혔다. 그녀는 침을 삼키고 다시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장하양이 두 개의 산소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