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57화 (357/760)

357화

성필의 차가 백설하의 집 앞에 도착했다.

해가 져서 거리가 어둑했다.

차 문이 열리고, 백수현의 발이 불안함을 담아 소심하게 뻗어 나왔다. 그의 발은 가로등만이 희미하게 비춰주는 어둠을 한동안 밟기만 했다.

“빨리 가.”

백설하는 언제까지고 차 안에 있을 것만 같던 백수현을 힘껏 밀었다.

그는 억지로 내린 후, 본가의 대문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도저히 못 하겠단 생각이 들어 곧장 뒤로 돌았다.

“누나 이거 맞아? 누나는 표만 주고 온다 쳐도, 나는 가출했다가 돌아오는 거잖아…….”

장장 몇 개월에 이르는 가출이었다.

사실 가출이라기에도 뭐한 게, 아버지는 백수현의 출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프로젝트 포유 출연에 동의해주었으니까.

문제는 어머니 쪽이었다.

“내년이 수능인데 몇 개월을 깡으로 날렸고…… 엄마한텐 일언반구 없이 나왔고…….”

백수현도 자기가 어지간한 불효자란 사실을 잘 알았다.

‘나올 때 난리라도 안 쳤으면 덜 쪽팔릴 텐데.’

19살 백수현은 프로젝트 포유를 위해 집을 뛰쳐나올 적, 어머니에게 온갖 괴상한 논리를 들어가며 자신의 꿈을 피력했었다.

아니, 그건 논리라고 부르기에도 뭐했다.

흔히 말하는 예술병 비슷한 말들이었으니까.

평범하게 대학 가서 취직할 바에는 하고픈 거 하다가 요절하는 게 낫다느니 뭐…… 그런 것들…….

“나랑 누나랑 같이 들어가면 상황 더 안 좋아질…….”

“너 목표가 뭐야?”

백설하가 뜬금없이 그리 물었다. 백수현이 답을 주저하자 그녀는 재차 물어왔다.

“목표가 뭐야. 네 목표를 이루려면 수능이 중요해?”

그제야 백수현의 눈이 뜨였다.

“학교에서의 몇 개월이 중요해? 그걸 날린다는 게, 부모님한테 죄송할 정도야?”

“…….”

“다시 물을게, 목표가 뭐야?”

백수현은 무엇 때문에 집을 뛰쳐나와 몇 개월간 심지가 깎이는 방송 촬영을 감내했는가.

“아이돌…….”

아이돌이 되기 위해서, 누나처럼 되고 싶어서다. 그건 목표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꿈이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을 전부 불사르고, 흥분을 가라앉히려면 수십 분은 뛰어야 하며, 멍하니 그것을 이룬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꿈이었다.

“그래.”

백설하가 미소 지으면서 백수현의 어깨를 강하게 두드렸다.

백수현이 누나에게 맞은 부위를 문지르면서 생각했다.

‘옛날이랑 달라졌어.’

옛날의 백설하는, 어린아이였던 백수현이 보기에도 어린아이였다.

이기적이거나 사리 판단이 분명하지 않다, 그런 의미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백설하는 여렸다.

노래를 배우기 시작한 후로는 화도 잘 내지 않았고, 자기주장마저 약해졌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항상 백수현에게 이리 말했었다.

‘네가 누나를 지켜줘야 해.’

백수현은 ‘누나는 어린애야. 어린애는 지켜줘야 해’라면서, 자기 코가 석 자인 상황에서도 백설하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어 했었다.

처음 데뷔했던 그룹이 망하고선, 백설하는 그보다 훨씬 유약해졌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백설하는 완전히 달라졌다.

“설하 뭐야. 동생 앞이라고 폼 잡는 거야?”

“포, 폼 잡는 거 아니에요…….”

성필이 놀리자 백설하가 순식간에 옛날 모습으로 돌아갔다. 헤실거리는 미소와 상대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태도로.

동생 앞이라 폼 잡고 싶던 게 맞는 모양이었다.

“수현아.”

성필이 말했다.

“설하랑 네가 같이 들어가는 게 맞아. 설하는 표만 주고 나오는 게 아니야. 오늘에서야 자기 꿈을, 자기 직업을 인정받으러 온 거야.”

“……저처럼요.”

“맞아, 너처럼.”

백수현은 연습생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백설하는 연습생이 됐고, 아이돌이 됐다. 그 두 과정 모두에서 어머니의 인정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이나마 받고자 한다.

“불 난 집에 기름을 두 배로 붓는 느낌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이사님 쫌 진지하게 생각해주세요……. 저는 오늘 일 잘 안 풀리면 갈 데 없다고요…….”

“그럼 원랜 어떡하려고 했어?”

“저요? 저는, 으음, 기획사 아무 데나 찾아가서 연습생으로 뽑아주면 회사에서 먹고 자고…….”

“무슨 아메리칸 드림이라도 꿈꾸냐.”

배에서 내린다고 낙원이 펼쳐지지는 않는다.

성필은 격려 차원에서 백수현의 어깨를 오른팔로 둘렀다. 그리고 백설하의 어깨에 왼손을 얹었다.

“가자.”

“……이사님.”

“왜?”

“왜 수현이는 어깨동무고, 저는 손만 올려두세요?”

“내 나름 매너손이지.”

“저희 그런 거 신경 쓸 사이였어요?!”

성필이 쾌활하게 웃으면서 백설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둘을 이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둘의 본가, 문을 향해서.

“계획 다시 말할게.”

현관문에 도착하자 성필은 어깨동무를 풀고 초인종을 눌렀다.

“내가 외부인이니까, 내가 있으면 쉽게 뭐라고 못 하실 거야. 일단 난 딸이 신세 지는 회사의 중역이기도 하고.”

인터폰으로 ‘누구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백수현이 ‘나요’라고 답했다.

“요컨대…… 최소한 옛날에 설하가 들었던 말처럼 직접적인 비난 같은 건…… 아마 안 나올 거야.”

인터폰에서 침묵이 이어졌다.

치직, 그리고 소리가 끊겼다.

“수현이 너는, 내가 사정을 몰라서 뭐라고 말해주질 못하겠네.”

“저도요. 저도 몰라요.”

문이 열렸다.

백설하, 백수현의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기다리던 게 백수현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백설하와 성필까지 있으니 깜짝 놀랐다.

성필이 허리를 팍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어머님. 따님을 맡고 있는 가로 엔터의 박성필 이사입니다. 다름 아니라 오늘…….”

“엄마.”

백설하가 성필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성필은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

백설하는 계획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당장 떨리는 손으로 품을 뒤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나, 나…….”

백설하가 겨우 품 안에 넣어두었던 티켓 봉투를 찾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이 곱게 접힌 봉투를 집고는, 태풍에 흔들리는 나비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이거, 나, 소녀연맹 콘서트, 표야. 보러 와. 아빠랑, 동생들이랑, 같이…….”

백설하는 중간중간 침을 많이도 삼켰다.

긴장으로 과호흡이 일어났다.

백설하를 아는 사람이라면 말이 안 되는 일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백설하의 호흡 조절은 요가 수행자급이다.

의식적으로 숨을 80%까지만 쉰다고 하며, 점막분비물의 양과 점도를 늘리기 위해 우유를 제외한 유제품을 즐겨 먹고, 성대 건조를 피하려 코로만 숨 쉬면서, 목이 상한다고 소리도 안 지른다.

그런 그녀에게 과호흡이 왔다.

“어, 엄마…….”

백설하의 시선이 어머니의 손 언저리에 머물렀다. 그 이상 올라갈 용기가 없었다.

“나 초등학생 때 학예회에서 노래 불렀잖아. 노래를 불렀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어. 그때까지 해봤던 것 중에 제일 기분 좋았어. 그냥, 그냥 좋았어. 그날 사람들이 웅성이던 소리랑 공기가 어땠는지 하늘은 무슨 색이었는지까지 전부 기억나. 노래 부르는 게…… 좋아.”

요즘은 좋아서 부른다기보다, 노래 자체가 삶이 된 느낌이지만.

“그래서 나, 지금 행복하고, 그래. 응, 행복해. 잘살고 있어. 그으, 엄마가 싫어하는 건 알지만…….”

백설하는 시선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위로 올렸다. 그녀가 어머니의 얼굴을 못 보았던 건, 어머니의 화난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단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백설하의 호흡은 가라앉아 있었다.

“계속하려구.”

백설하가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고, 가식 없는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의 비위를 맞추거나 애매한 호감을 사기 위함이 아니었다.

“시간 있으면 보러 오…….”

백설하가 말을 멈추었다. 어머니의 표정이 생각했던 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화나거나 슬픈 표정이 아니었다.

백설하가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어떤 하나의 감정을 담고 있다기엔 굉장히 복잡하여, 심중을 조금도 읽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백설하가 내민 봉투를 받았다.

“하아.”

한숨 한 번과, 어머니의 표정처럼 애매한 미소가 한 번.

“장녀 장남이란 게 다 아이돌 하겠다고 집을 나가네.”

핀잔처럼 들렸지만 다정함이 엿보였다. 부모의 애정 어린 잔소리처럼.

어머니가 성필을 보면서 예의를 차렸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신세 많이 지고 있습니다. 아직 저녁 안 드셨으면 오셔서 한 술 드세요.”

“……?”

백설하와 백수현의 머리 위로 동시에 물음표가 올라왔다.

어머니의 태도는 근 몇 년간의 태도와 전혀 달랐으니까.

* * *

“어이어이 형 돌아온 거냐고! 믿고 있었다고!”

셋째 동생이 기쁨의 팔 굽혀 펴기를 하면서 백수현의 귀환을 축하했다.

말투는 몇 개월 전이랑 비교해서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리카 뷔라이브와 아이튜브 클립 금지령이라도 내려야 할 판이었다.

저런 꼴인데 학교에서 친구나 잘 사귈는지 모르겠다.

“나 피곤하다.”

백수현이 침대에 풀썩 눕자 동생은 자연스럽게 책상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저 박 이사님이란 분 나이 몇이야?”

“몰라.”

“20대 후반?”

“에이, 30살은 넘지.”

“껍스.”

“야. 엄마 갑자기 왜 저러냐?”

“뭐가?”

“아니, 나는 진짜 나 돌아오면 집안 개박살 날 줄 알았거든?”

진심이었다.

백수현은 백설하가 어떤 취급을 받으면서 살았는지 보아왔다.

한 번 아이돌로 실패했던 백설하가 다시 연습생이 되겠다고 했을 때, 백수현조차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니 어머니는 어땠겠는가.

백설하는 거의 난신적자였다.

그리고 백수현도 그리될 운명이었을 텐데…….

“아, 그거?”

동생은 이유를 아는 눈치였다.

“국뽕연맹 클라스.”

“……뭐?”

“소녀연맹 말야. 일본에서…… 아, 형 그때 감옥 가 있었지?”

“감옥이 아니라 합숙소거든. 아니, 국뽕연맹은 뭔데?”

동생은 소녀연맹이 일본에서 달성했던 말도 안 되는 쾌거들을 열거했다.

한국 아이돌 최초로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일본 탑티어 가수를 이겼느니.

일본 각지의 방송이 못 불러서 안달이었다느니, 무슨 명품 패션쇼에 나갔느니, 오리콘 차트 1위를 찍었다느니.

백수현은 들으면서도 ‘무슨 국뽕 소설 내용인가?’ 싶을 정도였다.

“어어어어어어엄청 유명했었거든? 소녀연맹 한국 돌아와선 한국 방송에도 많이 다녀서, 엄마도 알아.”

“엄마도? 엄마 아이돌 나오는 방송 안 보잖아.”

“안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니까? 그래서 뭐.”

텔레비전에서 질리도록 떠들고 다니니, 어머니 또한 딸이 속한 그룹의 유명세를 체감한 것이다.

백설하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옛날의 그룹처럼 되지는 않겠다. 그리 생각하여 안심했던 거겠지.

“엄마 나이대 사람한테는 텔레비전이 신이잖아.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면 다 믿어.”

“너는 아이튜브에 나오는 거 다 믿잖아.”

“그런 말투는 야메로(그만둬)! 아이튜브는 탈중앙집권적 탈권위적 신세대 플랫폼이라고! 티비랑 같은 선상에 놓는 건 용서하지 않아!”

뭐, 그렇단 거지…….

“그럼 나는? 나는 왜 프리패스로 용서됐어?”

“말했잖아. 엄마 나이대 사람한테는 텔레비전이 신이라고.”

“……설마?”

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텔레비전에 계속 나오니까 엄마 친구들이 알게 된 거지 뭐. 누나도 마찬가지고. 주변에서 띄워주면 별 수 있어. ‘우리 애가 참 잘나긴 했죠’ 하는 거지.”

손나(그런)…….

“이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라고? 나랑 누나는 대체 왜 몇 년 동안…….”

“오리콘 차트 1위 한 게 어떻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거야! 국뽕연맹한테 사과해!”

“넌 씨 아이튜브 그만 봐라. 진짜 죽여버리기 전에. 말투 개열받네.”

“손나(그런) 야리카타(태도)는 야메로(그만둬)!”

“닌 뒤졌다.”

백수현은 오랜만에 동생과 장난을 쳤다.

집에 오기까지 얼굴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전부 거짓이었다는 듯, 그의 표정은 맑게 개었다.

* * *

조수석에 앉은 백설하는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드디어 바라마지 않던 어머니의 인정을 받은 참인데도 그러했다.

도로 정체가 길어질 듯하자 성필은 백설하에게로 몸을 슬쩍 돌렸다.

“오늘 좀 그랬나?”

“……네?”

“설하 부모님 뵀는데 너무 딱딱하게 행동한 걸까 싶어서. 다시 생각하니까 선물이라도 사서 드렸어야 했는데. 나 밥 먹을 때 너무 쩝쩝거리거나 예의 없던 건 아니었지?”

백설하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어쩌지. 어머님 아버님이 나 마음에 안 들어 하셨으면 어떡해?”

백설하가 풋 웃었다.

“갑자기 상황극이에요?”

“네가 20분째 입 꾹 다물고 있었잖아. 내가 뭐라도 말해야지.”

“……그냥요.”

백설하가 무릎 위에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러, 이렇게 쉽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니, 솔직히 어이가 없어서…….”

그건 성필도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 성필이 백설하의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미지상으로는 일종의 악마와 비슷했다.

백설하는 그 악마와 마주할 때마다 반드시 울었으니까.

게다가 숙소에 처음 들어가는 날에는 뺨에 거즈까지 붙이고 왔었다. 아마 뺨을 맞았던 것이었겠지.

“제가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로 계속 앓았다는 게…… 바보 같기도 하고…….”

“쇼 미 앤 프루브(Show me and prove).”

“네?”

성필이 빙긋 웃었다.

“래퍼들이 그런 말 하잖아. 혓바닥으로만 나불거리지 말고 그냥 보여서 증명하라고. 그 경우가 아닌가 싶네.”

자식이 본인의 꿈을 아무리 유창하고 정열적으로 피력한다 한들, 부모는 걱정될 수밖에 없다.

남들 다 고꾸라지는 가시밭길로 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말 따위로는 설득할 수 없을 만한 가시밭길. 그렇기에 그 길을 건너는 것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할 수 있는 놈이라고.

“보여주면 할 말이 없잖아.”

성필은 아틀라스사(社)의 조진만 사장이 해주었던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사람들은 불가능한 꿈을 말하면 ‘하지 마’라고 한다. 고작 몇 분의 고민도 없이 그저 ‘하지 마’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이루면, 하지 말라고 했던 게 무색하게 ‘축하해’라고 한다.

반대를 반사적으로 했던 것처럼 축하도 반사적으로 할 뿐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 말은 듣지 말라고 했었지.’

백설하는 그만큼 굳은 심지가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깊은 상처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갈 것이다.

“그렇, 죠…….”

백설하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기색이었다.

“설하야.”

“네?”

“상황이 드라마틱하지 않아서 실망했어?”

“그게 무슨…… 어…… 음…….”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백설하는 어머니와의 격렬한 말다툼 끝에 간신히 갈등이 해소될 줄 알았다.

아니, 어쩌면 콘서트에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니, 백설하에겐 차갑게 대했지만 실은 콘서트를 보러 올지도 몰랐었다. 그리고 백설하의 퍼포먼스를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그, 그만하자.’

백설하는 요즘 자신의 망상이 점점 심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시나리오 작가라도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백설하는 성필의 해석이 맞다고 여겨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너무 쉽게 일이 풀려서…….”

“쉽게 풀리긴. 엄청 어려웠잖아.”

“……어려워요?”

“3년이나 걸렸어.”

성필이 손을 내밀었다.

백설하가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그녀는 데뷔하기 전이 떠올랐다.

언젠가 가로 엔터가, 소녀연맹이 안 좋게 끝나서 모두 뿔뿔이 흩어지면 그날까지 쌓은 추억이 전부 없어질 줄 알았다.

그런 시답잖은 고민을 갖고 있었었다.

‘박 이사님도 그러셨었지.’

그래서, 백설하는 그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손을 잡아주었었다.

지금 잡은 성필의 손은 그때보다 더 따뜻했다.

“3년의 증명으로 얻어낸 거잖아. 드라마틱하지. 설하야, 정말 노력 많이 했어.”

노력 많이 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성필의 입에서 나오니 무게감이 달라, 백설하는 눈시울이 울컥 뜨거워져 왔다.

“그 노력으로 얻어낸 걸 쉽다거나 간단하다고 표현하는 건, 너 자신한테 너무한 거 아닐까. 그리고 좀 안타깝기도 해. 설하는 고통이 있어야만 뭘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서.”

성필이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아니야, 설하야. 힘들어야만 뭔가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야. 세상은 너한테 훨씬 친절하고 따스해. 오늘도 봐, 그렇지?”

백설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토록 원하던 것, 어머니와의 화해를 얻었다. 하지만 방금까지는 손에 아무것도 쥐지 못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성필의 몇 마디로 백설하는 원하던 것 이상을 얻은 듯했다.

“그리고 또.”

성필은 백설하의 눈물 대신 웃음을 보고 싶어서 목소리를 쾌활하게 바뀌었다.

“나만 봐도 그렇지. 설하 네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앞에 뿅 나타나서 도와줬잖아. 거의 요정 아니야 이 정도면?”

“하하…….”

백설하가 성필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꼬리가 찡그려져 있었는데, 슬퍼서는 아닌 듯했다. 그 휘어짐은 만월을 기대하며 차오르는 초승달과 닮았다.

“요정은 아니죠…….”

“평가가 박하네.”

“왕자님 아닐까요?”

둘은 손을 잡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필이 황급히 그녀와 손을 뗐다. 그녀가 검지로 성필의 손바닥을 슬슬 간지럽혔기 때문이다.

“뭐, 뭐 해…….”

“이사님이 이상한 분위기 잡으니까 깨려구요.”

“이상한 분위기 잡은 건 너잖아. 내가 왕자님이야? 그럼…… 앞으로 나를 ‘프린스 차밍’이라고 불러줄 수 있을까?”

“네, 프린스 차밍.”

둘은 웃었다.

시간이 지나고, 퇴근한 성필은 리카로부터 톡을 받았다.

[프린스 차밍!]

[내 유리구두 내놔요!]

“큰일 났다.”

내일 회사로 가면 놀림 받다 못해 가루가 되도록 비웃음당할 것이다.

안 그래도 백설하에게 고백하는 영상이 회사 전체에 퍼진 마당인데…….

성필은 미소를 품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에 붙여진 소녀연맹의 브로마이드가 한눈에 들어왔다.

소녀연맹의 브로마이드. 가족사진을 보며, 성필은 기분 좋게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음 날, 출근.

성필은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러자마자 홍규헌의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 안으로 들어왔다.

‘어, 사장님이다.’

회사로 들어가기도 전에 홍규헌과 마주하다니, 오늘은 운이 좋군.

성필은 홍규헌은 만나는 타이밍에 따라 하루의 운세를 점친다.

회사로 출근하기 전에 홍규헌과 마주치면, 그날의 운세는 최상이다. 참고로 정기회의 시간에 처음 보면 그날의 운세는 최악이다.

일 중독인 성필은 대체로 평범한 운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장님 안녕하…….”

차에서 나온 건 경리팀 권아인이었다.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고급진 선글라스를 벗으면서, 성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박 이사님!”

“……왜 경리 씨가 사장님 차에서?”

“제 이름은 경리가 아니거든요?!”

“와, 이사한테 소리 빽빽 지르네. 언제까지 한 이사님이 경리 씨를 보호해줄 거 같아요? 예? 돈 만지는 부서면 다야?”

“저 먼저 가볼게요.”

“그, 그래서 왜 사장님 차를…….”

“못 들으셨어요? 며칠 전부터…….”

사정을 들은 성필은 우당탕탕 한구인에게로 뛰어갔다.

손발을 다 쓰면서 경악을 표현하는 성필을 보고, 한구인은 올 게 왔단 듯 그를 휴게실로 안내했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일단, 사장님과 권아인 경리가 집을 한 달간 교환하여 지낸단 건 알고 계시…….”

“왜 그러냐고 물었잖아요!”

“……사실, 이건 가로 엔터의 투자자이신 박 이사님께 가장 먼저 보고드렸어야 했는데. 그게 맞기도 하고, 하아.”

성필은 혈관으로 얼음이 흐르는 듯했다.

삐죽한 얼음이 피부 아래를 마구잡이로 헤집는 기분이다.

한구인이 한숨을 쉬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란 뜻일까.

“아, 안 좋은 일인가요?”

“투자자이신 박 이사님 입장에선 좋은 일이죠.”

“예?”

“가로 엔터가 BG 인베스트먼트로부터 30%의 지분을 회수했습니다.”

“지분을 회수해요? 아, 어, 그게, 돼요?”

“여러 사정이 있습니다. 본래라면 불가능했겠지만…….”

한구인은 엔터 업계에 도는 소문이나 찌라시, 금융가의 행보, 곧 다가올 총선 등등, 성필로는 도저히 도출해낼 수 없는 비전을 설명했다.

그 모든 것을 종합하여, 한구인이 말했다.

“지분 투자 시의 원금만으로 지분을 전부 회수할 수 있었습니다.”

“어, 확실히 저한테는 좋은 일이네요.”

30%의 지분은, 홍규헌이란 절대적인 의결권자가 없으면 자의적으로 이사회 임면권까지 행사할 수 있을 수치다.

행동주의 투자회사들은 지분을 10%, 때로는 20%까지 매수하여 적극적으로 경영에 간섭하기도 한다. 10%만으로도 적극적인 간섭이 가능한데, BG 인베스트먼트는 무려 30%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그만한 지분이 다시 홍규헌의 손으로 흘러들어왔으니, 가로 엔터는 외압에 버틸 수 있는 힘을 더욱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게 사장님이랑 무슨 상관이 있…….”

“사장님이 개인 대출을 받으셔서 회수했습니다. 30억을요.”

한구인의 설명을 듣고, 성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그러니까, 사장님이…….”

홍규헌, 29세.

현재 재무 상황.

대출 원금 30억.

집에 틀어박혀 숨만 쉬어도 연이자 1억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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