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정호환은 컴백 쇼케이스를 몇 시간 앞두고 쇼케이스장을 찾았다.
케이어스의 퍼포먼스를 위해 만들어진 거대한 무대 위엔, 그녀들의 앨범이 지닌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온갖 장식물이 가득했다.
천장과 벽, 바닥을 차지한 LED에선 창공과 지평선, 대지를 표현한 영상이 유려하게 흘렀다.
거기에 신전의 기둥이나 나무, 풀밭을 표현한 형광 입체 구조물이 생동감을 표현했다.
‘무대 자체가 하나의 세계군.’
카메라에 담기는 앵글로 한정하자면, 이 무대는 현실과는 다른 별세계로 불리기 충분했다.
케이어스의 세계다.
“그래픽으로 보는 것보다 훨 낫죠?”
정호환의 옆으로 40대의 여자가 다가왔다.
“윤 이사, 왔네요.”
“그럼 왔죠.”
KS 엔터 비주얼 부문 이사인 윤희연이었다.
그녀는 비주얼 디렉터로서 KS 엔터의 모든 아티스트를 관리 감독한다.
문자 그대로 ‘보이는 모든 것’은 윤희연의 검토를 거쳐야만 대중에게 선보이는 게 가능하다.
이 무대도 그녀의 감독하에 탄생했다.
“이미 정 이사님 표정으로 알겠지만, 그래도 감상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말해 무얼 하겠습니까.”
뮤직비디오 때도 느꼈지만, 이번 무대도 케이어스의 음악 세계를 시각적으로 완벽히 표현했다.
정호환은 새삼스레 KS 엔터의 비주얼 팀에게 감탄했다. 인간의 머릿속, 상상에만 존재하던 것을 현실로 끄집어오는 이들이다.
정호환은 누가 때려죽인다 해도 하지 못 할 일들이었다.
“미리 축하드려도 될까요?”
‘뭐뭐 해도 될까요’는 그녀의 말버릇이다.
과거 KS 엔터의 말단 사원일 때부터 입에 익은 것이다. 이사가 된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설령 그녀가 정호환에게 갑작스레 반말을 하더라도, KS 엔터에서 그녀를 나무랄 인간은 없을 텐데도 말이다.
“뭘 말입니까.”
“케이어스 초동판매량 엄청날 거예요.”
역대 모든 걸그룹을 통틀어 1위, 는 안 되겠지만. 고작 2년이란 연차를 고려하자면, 케이어스는 여태껏 걸그룹이 가져왔던 한계를 깨게 될 것이다.
“‘가이아’ 만드실 때 뭐에 홀리신 것처럼 컴백도 미루시더니. 결과적으로 더 나아졌네요.”
“나아지긴요.”
각종 음악 관련 매체가 케이어스는 물론 KS 엔터를 동네북처럼 두드리지 않았던가.
“평가야 어떻든, 시장이 움직였잖아요.”
케이어스가 ‘가이아’로 비판받았던 주요 이유는 ‘케이팝답지 않다’는 것이었다.
웃긴 건, 그런 비판을 가했던 주류가 미국에 있는 이들이었단 사실이다.
한국에서 ‘아이돌이 뮤지션이냐 아니냐’로 소모적인 갈등을 이루고 있을 때, 케이팝에 관한 담론의 주도권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현재 케이팝에 관한 세계의 인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건, 한국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미국 사람들의 생각인 것이다.
그리고 그 미국의 평론가들이, 정호환이 프로듀싱한 ‘가이아’를 ‘케이팝답지 않다’고 비판한다.
윤희연이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한국 땅 밟지도 않는 인간들 신경 써서 뭐해요?”
“…….”
“어, 그 눈빛?”
윤희연이 명랑하게 말했다.
“20년 전에 ‘우린 일본으로 간다’고 할 때랑 비슷한데? 설마 이번엔 미국? SMS 엔터처럼 되시려고요?”
“SMS 엔터한테 너무 그러지 맙시다.”
그들이 미국에 진출하려 했던 용기를, 정호환은 높게 평가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그 일을 욕하지 못해 안달이지만, 원래 산업이란 저절로 발전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의도적인 도전이 계속되어야 발전한다.
SMS 엔터의 삽질 아니, 용기 있는 도전은 한국 음악 산업이 나아갈 한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안 그래도 그쪽 대표님이 나 만날 때마다 하소연한단 말입니다.”
“그런 줄은 몰랐네요.”
“……윤 이사님.”
정호환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연약한 모습을 보였다. 세월로 쌓아온 믿음이 사라지고, 도전을 앞둔 젊은이처럼 두려움이 가득 찼다.
“이번 곡…… 우리가 만들었습니다.”
KS 엔터의 A&R팀, 프로듀싱 부문의 모두가 심혈을 기울여 창조해냈다.
“우리가 만들었으니, 성공하겠지요?”
윤희연은 피식 웃었다.
‘정말 언제쯤 저 버릇이 고쳐질지.’
정호환은 본인이 프로듀싱을 진두지휘했음에도, 굳이 ‘우리가 했다’는 말을 덧붙인다.
동료, 부하와의 유대를 강조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는 게 두려운 것이었다.
정호환은 자신의 두려움을 타인에게 철저히 숨긴다.
하지만 윤희연처럼 오래 지닌 이들 앞에선 이처럼 변명거리를 찾곤 한다.
“A&R팀은 전부 정 이사님이 뽑으셨잖아요. 믿으세요.”
“제가 다 뽑은 건…….”
“팀 전체가 만들었잖아요. 다 같이 열심히 했으니 좋은 결과가 있겠죠.”
그제야 정호환은 아주 조금 안심한 기색을 보였다.
“그런데 상열이가 안 보이네요.”
“윤상열 PD 퇴사한 지 벌써 몇 년 됐습니다.”
“네? 아, 아아, 그렇구나. 그렇, 거짓말이죠?! 시간이 그렇게 흘렀어?! 몇 년?!”
윤희연은 일중독이다.
모든 젊음을 일에 갈아 넣었고, 지금도 그랬다.
시간과 인간관계의 변화에 무뎠다.
세상 모든 게 본인 중심이니, 외곽에 있는 이들은 흐릿해진다. 그게 윤희연이란 인간이었다.
“아으…… 맞네, 상열이 사직서 냈었지 그치…….”
“얼마나 못 잔 겁니까?”
“모르겠는데요?”
정호환이 스태프를 불러 윤희연을 잡아가도록 했다. 그녀는 자기는 정상이라면서 저항했지만, 곧 쇼케이스장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정호환은 다시 침묵 속에서 무대를 보았다.
‘그래, 우리가 만들었으니…….’
그때, 정호환의 머릿속에 두 사람이 차례로 떠올랐다. 첫째로 성필, 둘째로 정지음.
정호환의 생각이 정지하고, 곧 새살이 돋듯 새로운 생각이 자리를 대신했다.
‘아니, 내가 만들었다.’
그러니 보아라.
* * *
“케이어스 신곡이요.”
A&R팀 이재호는 자신의 직관적인 감상을 정지음에게 전달했다.
“‘이게 뭐지?’하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정지음은 이재호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바로 앞의 노트북에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곳엔 케이어스의 정규 앨범 타이틀곡 ‘Time’의 뮤비가 나오고 있었다.
이재호가 말을 이었다.
“진짜 우리나라 노래 아닌 느낌이요.”
한국에서 만든 게 아닌 거 같다.
즉, 난해하단 뜻이었다.
“처음 들었을 땐 그랬어요.”
하지만 계속 듣다 보니 달랐다.
“중독성도 있고 리스너들이 즐길 부분도 많고요. 곡 자체가 나쁘다…… 고 생각하진 않아요.”
정지음은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아니, 그의 이야기를 듣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정지음의 눈은 노트북 안의 뮤직비디오에만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솔직히 제가 전문가는 아니니까, 이렇다 저렇다 할 순 없지만요. 그래도 굳이 말씀드리자면…….”
이재호는 입사 초기, 손혜빈의 지시로 세계 각국의 음원 차트를 수시로 확인했었다.
한국은 당연하고 오리콘 차트, QQ차트, 빌보드 차트, 유럽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음원 차트 등.
사실상 이재호는 전 세계의 음악적 트렌드를 따라갔던 것이다.
그런 그가 평가하기에.
“음악적 완성도랑 독창성으론, 한국에서 비교할 곡이 없네요.”
굳이 비교하자면.
“유럽 일렉트로닉 뮤직 씬이랑 해야 할 거 같은데요.”
케이어스의 ‘Time’은 일렉트로닉 씬의 본고장이자,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일렉트로닉 음악들과 같이 세워야만 비교 상대를 찾을 수 있다.
“제 생각은 그래요.”
KS 엔터가 한국 사람들을 도발하는 듯하다.
계속 비슷비슷한 곡, 목소리, 악기, 사운드만 듣고 살아도 재밌니? 음악이란 게 이렇게 발전했어. 들어봐.
“인더스트리얼한 느낌의 최첨단이랄까. 근데 사비(후렴) 빼면 조각조각…… PD님 제 말 듣고 계세요?”
정지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케이어스의 ‘Time’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사운드에 영혼을 맡겼다.
그리고 점점 소름이 돋았다.
‘작곡가가 다섯, 여섯…….’
정지음은 그 곡에서 인격을 읽어냈다.
수많은 사람의 인격을.
‘일곱, 여덟…….’
정지음이 허 웃었다.
‘한 곡에만 서로 다른 작곡가가 10명 넘게 들어간 거 같은데?’
작곡가‘만’ 10명이다.
다른 사운드 엔지니어들을 몇십 명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렇게 많은 사람을 곡 하나에 밀어 넣고서도 통일성을 유지했어.’
아마, 정호환의 작품이겠지.
‘이 인간은 늙지를 않나……?’
어쩌면 정호환의 머리는 영원히 굳지 않을 듯하다.
* * *
조아라는 넋이 나가서 케이어스의 퍼포먼스를 지켜보았다.
타이틀곡 퍼포먼스가 시작되기 전, MC와 주고받았던 농담 섞인 대화가 전부 거짓이었던 듯했다.
케이어스는 아이돌답게 유머러스한 멘트와 발언, 팬들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애정 어린 말투를 구사했었다.
하지만, 전부 필요 없었다.
‘이런 걸 보면…….’
설령 사랑해주는 것에 대한 보답이 없더라도, 누가 팬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케이어스의 춤은 1분 1초가 놀랍기 그지없었다. 실력적인 면뿐 아니라 안무 구성도 그러했다.
안무 구성.
모든 파트에 중복되는 동작이 없다.
케이어스의 안무는 매 파트마다 새롭게 바뀐다. 아니, 곡마저 그러했다.
유일하게 반복되는 구성은 후렴구가 유일했다. 그 후렴구에서마저 안무가 1절과 2절이 같지 않다.
이 곡을 중간중간 잘라서 모르는 사람에게 들려주면, 같은 곡이란 걸 모를 만큼 해체적이었다.
‘이게, 이게, 이런 게…….’
가능한 것이었나?
이런 구성을 시도하는 건 케이팝 아이돌로서, 아니. 세계에서 케이어스가 최초임이 틀림없다.
반복이 없는 퍼포먼스.
제목대로 ‘시간’을 표현한다.
시간의 비가역성을 퍼포먼스로, 춤의 본질인 시간의 박제 불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과도하게 힘을 주거나 몰아치지 않고서, 안무는 부분부분 강렬함을 드러내어 비직관적인 사운드를 직관적으로 상징화하는 것에 성공했다.
2절이 끝나자 조아라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댄스 브레이크 파트다.’
역시나 이전과 무엇하나 겹치지 않는 춤이다.
다행히 조아라는 케이어스의 퍼포먼스에서 마음에 안 드는 점을 잡아냈다.
그래, 정말 다행히도 감탄만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무대가 비어 보이네.’
저만한 춤을 준비했다.
보조 댄서가 여럿 있었다면 훨씬 더 파워풀하고 양적으로 완성된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케이어스 멤버만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나?’
물론 나쁘진 않지만, 더 나은 길이 있었다.
비록 안무적인 부분으로 찾아낸 단점이라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프로듀싱적인 측면에선…….
‘왜 안 끝나지?’
15초가 흘렀는데도 댄스 브레이크가 끝나지 않는다. 사운드는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면서, 케이어스를 쉬지 않고 끌고 간다.
20초.
30초.
40초.
‘언제까지…….’
50초.
댄스 브레이크만 50초를 넘었다. 그동안 어떤 보컬도 나오지 않았다.
몽환적인 동시에 강렬하고 인더스트리얼한 사운드가 변화하며 이어질 뿐.
‘내가, 틀렸네.’
무대가 비어 보이지 않는다.
퍼포먼스를 거듭하며 무대는 가득 찼다.
케이어스 멤버들이 뿜어내는 아우라는, 고작 네 명만으로 음악 방송 무대보다 족히 2배는 큰 공간을 메웠다.
댄스 브레이크 60초.
케이팝 역사상 시도된 적 없었던, 1분에 걸친 댄스 퍼포먼스 피날레.
* * *
댄스 브레이크 직전까지, 장하양은 도저히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소유 언니가 후렴구를 전부 맡았어?’
진소유가 곡의 모든 하이라이트 후렴구를 배분받았다.
공정한 파트 배분 따윈 없었다.
같은 아이돌이 보기에 너무나 폭력적인 광경이었다.
동시에 굉장히 잘한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간다, 간다, TIME, 잡아, TIME, 빨리, 잡아]
후렴구는 랩이었다.
랩이라기도 뭐한 단어의 나열에 불과했지만, 귀에서 떨쳐내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날카롭게 파고들어 왔다.
무심코 감탄을 자아내는 고음의 보컬도, 귀를 사로잡는 화려한 랩핑도 없다.
하지만 진소유의 후렴구는 충분 이상이었다.
‘후렴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장하양은 질투했다.
장하양 자신은 소녀연맹 내에서 타이틀곡 하이라이트 후렴을 맡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진소유는 맡았다.
쟁쟁한 케이어스 멤버들 내에서 하이라이트 후렴구를 따낸 것이다.
* * *
글로브 멤버들은 연습실에 옹기종기 모여, 안무 커버 때 영상을 틀어놓을 때 쓰는 대형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그곳에선 케이어스의 컴백 쇼케이스가 나왔다.
“…….”
글로브의 리더 라희가 뒤를 흘끗 보았다.
윤상열이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이쪽을 보는 중이었다.
불편하다…….
[앨범 제목이 타이틀곡이랑 같네요. 왜 제목이 ‘Time’이죠? 저도 유스지만요, 유스들이 쓰는 추측글 있잖아요? ‘카오스’ 다음 ‘가이아’였으니까 다음도 그리스 신화 관련 제목이 아닐까 했거든요.]
MC가 묻자 에리카가 마이크를 들었다. 그녀의 옆으로는 실시간 영어 번역 창이 떠 있었다.
[유스분들이 생각하신 게 맞아요.]
[맞다고요?]
[네. ‘Time’은 시간의 신 크로노스를 뜻해요.]
[아아, 그렇네요! 크로노스! ……그, 어릴 때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를 보긴 했는데 기억에 없네요. 어떤 얘기에서 나왔죠?]
[제우스 아빠요.]
[아, 맞네 맞네!]
쯧.
윤상열이 혀를 차자 글로브 멤버들이 움찔했다. 감히 윤상열이 왜 혀를 찼는지 확인할 용기는 없었으므로, 다들 못 들은 척 영상에만 집중했다.
‘별 쓰잘데기 없는 얘기로 시간을 얼마나 끄는 거야.’
빨리 타이틀곡 퍼포먼스나 보이라고.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이런 말이 나와요. 카오스 그다음에 가이아가 있었다.]
[그럼 가이아 다음에 크로노스가 있었나요?]
[아니요.]
에리카가 화사하게 웃었다.
[우라노스, 하늘의 신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대지 그 자체인 가이아에게 기생하듯 붙어 있던 신이에요.]
[기생이요? 막 달라붙어서?]
[네, 달라붙어서요. 가이아의 자식들이 자기 자리를 탐할까 두려워서, 자식들이 못 태어나게 하고 있었어요.]
[어, 그 얘긴 크로노스 얘기랑 비슷하네요?]
MC는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의 1화를 떠올리곤 답했다.
크로노스는 가이아의 자식들이 태어날 때마다 잡아먹었고, 제우스를 필두로 크로노스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으니까.
[그렇죠. 크로노스는 그게 좀 아니꼬워서, 가이아랑 손잡고 우라노스를 잘라…….]
“거세시켰어.”
윤상열이 말했다.
글로브 멤버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그냥 잘라낸 게 아니라 거세시켰다고.”
“……아, 네.”
글로브 멤버들은 적당히 말을 맞춰주곤 다시 영상에 집중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갈라지게 됐죠. 어떻게 보면 천지창조랑 닮았어요.]
[그럼 앨범 제목이 ‘Time’, 크로노스인 건…….]
[네, 창조…….]
에리카가 부끄러운 듯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시작을 거창하게 표현한 거죠. 우리의 모험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런 느낌이요. 원랜 앨범 제목이 ‘크로노스’였는데, 새롭게 하자고 해서 ‘시간’으로 바뀌고, 더 새롭게 하자고 해서 ‘Time’으로 바꿨어요. 처음으로 저희 타이틀 곡명이 영어로 됐죠.]
[시작! 무엇의 시작인가요?]
에리카는 멤버들을 돌아보면서 ‘내가 해? 진짜 내가 해? 아, 부끄러워!’라며 뜸을 들였다.
그녀는 크흠 크흠 목청을 가다듬고,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만들었다.
진지하다지만, 그 안에 서린 장난기를 숨길 순 없었다. 의식적으로 이런 말을 한단 게 웃겨서 배길 수 없던 것이다.
[최고를 향한 시작이요.]
‘진짜 오글거려서 못 들어주겠네. 최고는 뭔…….’
윤상열은 에리카를, 그녀의 뒤에 있는 프로듀서를 비웃었다.
굳이 정호환을 떠올리진 않았다.
아이돌은 프로듀서의 또 다른 자아니, 아이돌을 비웃는 건 곧 프로듀서를 비웃는 것이나 다름없다.
케이어스는 정호환이 가진 아니마(남성의 무의식 중 여성적 측면)의 발현이다.
글로브가 그러하듯이.
[자, 그럼 케이어스의 시작! 천지창조! 최고를 향한 시작을 지켜봐 주세요!]
MC의 거창한 소개에 에리카가 발을 동동 구르면서 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유머러스한 시간이 지나고, 케이어스의 타이틀곡 퍼포먼스가 시작되었다.
언제 끝났는지도 모를 만큼, 다들 집중했다. 퍼포먼스가 끝나고 라희가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멋지…….”
윤상열이 거칠게 의자를 끌고 일어났다. 그는 발을 구르다시피 쾅쾅 내리찍으며 연습실을 나섰다.
글로브 멤버들은 침묵에 잠겼다.
“……또 왜 지랄이야 저 씹새끼는.”
글로브 멤버, 정진이 퉁명스레 말했다.
* * *
백설하는 거의 정신이 사라진 듯했다.
스스로 인식할 새도 없이, 백설하는 케이어스의 무대를 즐겼다. 마치 성필의 집에서 아이돌 콘서트를 볼 때처럼 말이다.
‘다들 너무 예쁘다…….’
왜 성필이 케이어스를 그토록 좋아하는지 공감이 간다. 아니, 옛날부터 어느 정도 이해는 갔지만 이젠 확실히 알겠다.
‘너무 예쁘고, 멋져…….’
특히 에리카에게 눈길이 갔다.
가장 신경 쓰는 케이어스 멤버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에리카와의 인연이 없더라도 백설하는 에리카를 집중적으로 보았을 것이다.
아우라가 샘처럼 솟아나고 있었으니까.
백설하는 타는 갈증을 느끼며 에리카가 뿜는 아우라의 샘에 눈을 박았다.
‘아이돌…… 이구나…… 에리카는…….’
아이돌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아니, 아니다.
에리카는 별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
1900년 이전에 태어났던 오페라 가수가.
60년대 이전에 태어났다면 재즈 싱어가.
80년대 이전에 태어났다면 록커가.
그 외 어느 때든 태어나기만 했다면 팝 디바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 한국과 가까운 곳에서 태어났기에 아이돌이 됐을 뿐.
‘무대 전부 에리카의 거 같아.’
에리카는 무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이게 에리카의 아티스트십이구나.’
에리카는 아티스트다.
‘이게 에리카의 아이돌리즘이구나.’
에리카는 아이돌이다.
‘이게 에리카의 아우라구나.’
에리카는 별이다.
천부의 재능(天賦之才).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로부터 동시에 축복받은 듯한 그녀.
하지만 분명 그 이면엔 뼈를 깎는 고통과 인내가 있었을 것이다. 타인은 이해할 수 없는, 아이돌이 아니면 공감하지 못할 고뇌가.
‘정말, 많이, 힘들었겠다.’
백설하는 에리카의 노력이 피부에 닿을 듯 느껴져서 절로 울컥했다.
저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괴로웠을까.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했을까.
그리고 그 고통을 죄다 떨진 지금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부디 자랑스러워하길.
‘에리카, 넌 그럴 자격이 있어. 누가 뭐래도 최고야, 최고니까, 만족하고 자랑스러워 하…….’
* * *
‘저녁 뭐 먹지.’
‘Time’의 퍼포먼스를 마친 에리카는 그런 것을 생각했다.
퍼포먼스의 완성도가 어떻니, 카메라엔 잡힌 모습은 어떻니, 사람들 반응은 어떻니.
그런 측면의 만족은 이미 앨범 준비 기간에 마쳤다. 의심할 나위 없이, 언제 어디에 서더라도 완벽할 것이다.
‘빨리 안 끝나나.’
데뷔 쇼케이스를 잘 소화했느냐 아니냐, 그딴 건 에리카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옛날 옛적에 완벽에 이르렀으니.
보통 사람이 양치질할 때 ‘내가 양치를 잘할 수 있을까? 잘했나?’라고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음?’
무대 아래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백설하에게로 눈길이 갔다.
감동한 듯 손으로 입을 막은 백설하를 향해 에리카가 싱긋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성필도 보았다.
웃는 것보다 더 나은 사인을 보내고 싶은데…… 아니다.
‘이사님한테는 직접 어땠는지 물어봐야지.’
프랑스에서 에리카가 성필에게 친구가 되길 권했던 건,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였다.
성필은 에리카에게 기대하는 게 없다.
에리카는 타인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았고, 그걸 본능적으로 맞췄기에 인생을 순탄히 살았다.
그런데 성필은 에리카에게 기대하는 게 전혀 없었다.
마치 선생이 노력을 있는 대로 다 했지만, 여전히 담배를 피우며 불량함을 유지하는 학생을 볼 때처럼.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래, 그때 물어보자.
‘우리 초동판매량 나올 때.’
사전 예약 판매량만 보여주는 건 임팩트가 없을 테니까.
에리카는 그렇게 딴생각을 하면서 퍼포먼스를 마쳤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일 따위, 하지 않았다.
* * *
케이어스 정규 1집 ‘Time’.
사전 예약 판매량.
이십일만천육백(211,600) 장.
발매 하루째, 초동 집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