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안녕하십니까아아!”
1팀장을 필두로 매니저들이 힘찬 인사를 남홍범에게 전했다.
남홍범이 적당히 손을 흔들면서 1팀장의 앞으로 왔다.
“1팀장, 잘 지내나.”
“예!”
1팀장은 굳이 진저 때처럼 ‘3시간 전에도 뵙는데요’라고 하지 않았다.
“진저가 쇼케이스에 소녀연맹을 초대하고 싶다는데?”
“예!”
“근데 1팀장이 안 된다고 했다고?”
“예…….”
“웬만하면 그냥 해주지 그래? 어디 뭐 구석에 두면 작업에도 방해 안 될 거 아냐.”
“그, 그렇긴 한데…….”
“진저가 부탁하잖아. 그리고 들어보니까 케이어스 애들도 다 괜찮다고 했더만. 이야, 1팀장 이거 인정이 없네. 애들이 친구 좀 부르자니까 그걸 바로 퇴짜를 놔?”
“아…….”
“우리 진저랑 어?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도 소녀연맹 부르자고 하는데 말야.”
“누, 누구요?”
“어? 이거 봐라? 팍 씨!”
남홍범이 장난스레 웃으면서 손을 번쩍 들었다. 한 대 후려치면 사람을 죽일 듯 솥뚜껑만 한 손이 위로 올라가자, 1팀장은 저도 모르게 자라처럼 목을 쑥 움츠렸다.
“매니지먼트 팀장이라는 놈이 우리 사(社) 아티스트 브랜딩 전략도 몰라?!”
“예, 예?”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김민주!”
KS 엔터의 A&R팀과 비주얼 팀이 눈물을 흩뿌리며 제발 그건 안 된다고 남홍범에게 호소했던, 남홍범이 연습생 시절부터 김민주에게 주입한 캐치프레이즈였다.
의외로 팬들이 엄청나게 좋아했던 터라 A&R팀과 비주얼 팀이 물음표를 1만 개는 띄웠었다.
“아, 과,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이 고사리만 한 애들이 손 모으고 부탁하는데 그걸 거절하네.”
1팀장은 남홍범의 뒤에 선 진저를 보았다.
그녀는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무구한 얼굴로, 남홍범의 권력 남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중국인(소수민족임)이라서 그런가 꽌시(关系)를 잘 이용하는구나.’
1팀장은 옛날에 읽었던 ‘정글만리’란 책을 떠올리면서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동시에 리카의 뷔라이브도 생각났다.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인종차별이야!’란 리카의 목소리가 재생됐다.
‘……진짜 인종차별적 생각이네.’
1팀장은 마음속으로 진저(소수민족임)와 중국인들에게 사과를 전했다.
“어쨌거나, 알겠지?”
“예…….”
남홍범이 1팀장의 어깨를 무겁게 두드렸다. 그 안에는 짙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잘하고 있어. 미안하다.”
남홍범이 등을 돌렸다. 진저는 1팀장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인 후 남홍범을 따라나섰다.
1팀장은 실 끊긴 인형처럼 털썩 의자에 앉았다. 문득 얼마 전 친구에게 들었던 제안이 떠올랐다.
‘상목아. 나랑 인터넷 쇼핑몰 안 해볼래? 내가 자본은 다 준비해뒀거든. 네가 같이하겠다고 하면 돈 합쳐서 좀 더 크게 시작할 수도 있고. 넌 연예계에 있다 보니 이쪽에 안목이 좀 있잖아. 처음엔 사무실이래도 작은 방 빌려서 복작복작 힘들게 지내겠지만…… 그래도 내가 나름 비전은 있다. 직원도 몇 명 봐둔 애들이 있고. 너만 괜찮으면 와라. 생각해봐.’
1팀장이 책상에 퍽 엎어졌다.
‘회사 생활 힘드네에…….’
1팀장, 사직 위기?!
매니저 생활 십수 년 만에 찾아온 사상 최악의 적!
그는 과연 진저의 마수와 꽌시에 대항하여 본인의 멘탈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다음 화 ‘나도 쇼핑몰 창업에 끼워줄래?’로 이어집니다.
* * *
A&R팀 이재호는 침을 꼴깍 삼켰다.
현재 그의 앞에는 가로 엔터의 중역인 손혜빈과 성필이 앉아 있었다.
거기에 더해, 소녀연맹의 리더인 백설하 또한 아티스트적인 기세를 한껏 흘리며 이재호를 보는 중이었다.
“어, 이, 일단…….”
“재호 씨.”
손혜빈의 부름만으로 이재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캐치했다.
말을 더듬는 것이었다.
“일단 테이블에 보시면 섭외 가능한 세션의 목록이 있습니다.”
다들 이재호가 준비한 목록을 펼쳤다.
“첫 장은 섭외의 확실성에 따라 순서대로 배열했고, 두 번째 장은 제가 판단한 세션의 능력에 따라 순서대로 배열했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기준이 표의 위 칸을 차지하고, 그에 따라 세션들을 비교하고 있었다.
한눈에 밴드 세션들의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문제를 꼽자면, 이게 이재호의 주관으로 쓰여졌다는 것이었다.
즉, 목록은 이재호가 판단한 섭외 순위인 것이다.
“긍정적인 답을 준 분들에겐 가이드 세션을 받았습니다.”
세션들이 소녀연맹의 곡을 몇 개 선정하여 반주(伴奏)한 음원이었다.
밴드가 가수의 곡을 악기로 받쳐줄 때, 그 연주는 악보를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애초에 밴드 악기만으로 케이팝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경우는, 아예 밴드 사운드만 쓴 곡이 아니고선 없다.
그래서 세션이 창조적으로 곡을 해석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A급 세션이란 무대에서 실수하지 않는 능력은 당연하고, 이 해석력에 있어 일류를 뜻한다.
‘A급 세션들은 공연 성수기에 다 불려가서 못 구했지만…….’
이재호는 폰을 스피커와 연결하고 순서대로 가이드 세션들을 재생하려 했다.
그때 이재호는 성필과 백설하가 소곤소곤 대화하는 것을 보았다.
‘뭐, 뭐지? 내가 뭘 잘못 썼나? 오타가 있나? 아니면 직관성이 부족한가? 아님 아예 다른 파일을 준비한 건가?!’
이재호는 공포에 떨면서 겨우 폰에서 세션 음원을 찾아냈다.
“재호 씨.”
“옙!”
성필의 부름에 이재호가 칼 같이 답했다.
“여기, 재호 씨가 1순위로 꼽은 밴드 있잖아요.”
이 밴드는 ‘언제든지 섭외 가능’이며 ‘실력적으로 가장 뛰어남’이란 부가 설명이 붙어 있었다.
사실상 이재호가 극렬히 밀고 있는 밴드 세션이란 뜻이었다.
“‘데비’ 말씀이시죠?”
“네. 이분들이랑 어떻게 컨택하셨어요?”
“제, 제가 근래 홍대 쪽 돌아다니면서 밴드들 알아보고. 세션맨들이랑도 만나고. 그래서 알음알음…….”
“재호 씨이, 말 끌면 안 되죠오.”
손혜빈의 지적에 이재호가 자신의 입술을 툭툭 쳤다.
“만났던 다른 분들을 통해 이름을 알고 직접 찾아가 접촉했습니다.”
“아…….”
성필은 다시 목록으로 눈을 돌렸다.
이재호가 적극 추천하는 ‘데비’라는 밴드의 경력은 앨범을 하나 발매한 게 전부였다. 그 외엔 세션으로서의 경력도, 눈에 띄는 공연 경험이랄 것도 없었다.
즉, 백지나 마찬가지인 이들이었다.
* * *
밴드 ‘데비’가 사용하는 대여 작업실. 여러 기구가 들어찬 곳에 세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데비의 리더이자 베이시스트, 권동하는 CD플레이어의 앞에 진지한 얼굴로 서 있었다.
마침내 고민을 끝낸 그는 가방 안에서 CD를 한 장 꺼내어 플레이어에 넣었다.
소녀연맹의 ‘아니’가 스피커를 타고 작업실을 꽝꽝 울렸다.
“어차피 똑같은 거 넣을 거면서 왜 고민해.”
“안 똑같은데? 어제는 정규 앨범이었는데? 이건 싱글 앨범인데?”
보컬리스트의 핀잔에 권동하는 유치하게도 답했다.
밴드 ‘데비’는 서로를 더 잘 알고 여러 음악 세계를 경험해보자는 취지로, 정기 모임마다 각자 CD를 가져온다.
그리고 권동하는 약 1년 정도 전부터 소녀연맹의 CD만 가져오고 있었다.
권동하가 피 맺히는 심정으로 외쳤다.
“너희들도 그 순간에 있었어야 했다니까? 나 ‘아니’ 뮤비 보고 곡 듣고 ‘정말 대단한 아티스트가 나왔구나’ 싶었다니까? 아니, 정말 대단한 아티스트가 나왔지 그럼!”
“알겠어 그만해…….”
안 그래도 권동하 때문에 소녀연맹 곡을 수천 번은 넘게 들었다.
소녀연맹 찬양까지 듣고픈 마음은 없던 터라, 보컬리스트는 적당히 그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온몸이 땀으로 젖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에어컨 바람을 맞자마자 살았단 표정으로 팔을 쫙 펼쳤다.
“아트 블래키 왔다!”
권동하가 놀리듯이 말했다.
방금 들어온 남자, ‘데비’의 드러머는 인상을 팍 썼다. 하지만 기타리스트와 보컬리스트는 피식 웃을 뿐, 권동하의 장난을 말리지 않았다.
“놀리지 좀 말라고.”
“아트 블래키 앤 재즈 메신저스!”
“진짜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거냐?”
아트 블래키는 전설적인 재즈 드러머다.
드러머는 아는 사람의 부탁으로 요 며칠 재즈 세션에서 드럼 대타를 뛰어주었다.
록에 영혼을 팔았다고 당당히 선언하고 다니던 인간이 재즈 세션에 참여하니, 다들 그를 놀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드러머가 심술이 나서 소파에 쿵 앉았다.
“어땠어?”
권동하가 시원한 음료를 주면서 물었다. 그 다정한 태도에도 드러머는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야, 동하야. 얘네 씨…… 상상만 해도 화나네.”
드러머는 보컬리스트와 기타리스트에게 삿대질하면서 목에 핏대를 세웠다.
“얘네 지들 애인 데리고 재즈바에 왔다?”
“데이트하다가 우연히 보이더라.”
“지랄 마라. 알고 왔잖아.”
“썩 괜찮던데. 재즈에 재능 있는 거 아냐? 그 뭐냐, 단독 연주…….”
“임프로비제이션.”
“그래, 그거 나름 괜찮던데?”
재즈의 특징 중 하나가 즉흥 연주다.
“좋긴. 거기 손님들 다 깜짝 놀랐지 뭐…….”
드러머는 어이가 없었다.
자기는 록 하던 사람이니, 재즈 장르의 즉흥 연주는 못 한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 인간들은 갑자기 분위기를 띄우더니 드러머의 이름을 연호하면서 임프로비제이션을 요구했었다.
결국 드러머는 어쩔 수 없이 즉흥으로 연주했고, 자신의 록 스피릿을 가감 없이 발휘해버렸었다.
“그래도 오늘 다 끝났으니까 다행이다!”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거 좋다더니, 다행이야?”
“거기 인간들 죄다 연인이랑 와서 연주엔 별로 관심도 없더만. 그럴 거면 스피커를 두지 왜 연주자를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너희들 너 너 동료가 연주하는 바에 애인 데리고 온 너희들. 사람 꼴 받게 하려고 계속 새처럼 쪽쪽댔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밴드의 리더인 권동하가 본격적인 의제를 꺼냈다.
“동하 쟤 조울증 있나?”
“의심되긴 함. 신나게 떠들다가 갑자기 정색하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권동하가 다시 진지한 투로 의제를 꺼냈다.
“우리 레코딩 하기로 했었잖아? 이번 달, 오늘이 수금일이거든.”
권동하가 ‘데비’의 데뷔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을 품에서 꺼냈다.
평범한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든, 다른 앨범들과 비교해서 특별할 것도 없는 디자인이었다.
“언제까지 공연마다 2년 전 앨범 걸어두고 사달라고 할 거야. 정작 우리가 연주하는 곡은 들어있지도 않은데.”
“와, 벌써 2년이나 지났어?”
보컬리스트는 앨범에 인쇄된 자신의 얼굴을 보더니 크게 웃었다.
“나 진짜 젊다!”
“자자, 다들 조용하시고. 이번 달 돈 내주세요!”
다들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데비’의 수금 방식은 이러하다.
각자가 이번 달에 낼 수 있는 만큼의 돈을 제시한다.
네 사람이 동시에 그 금액을 공개한다.
가장 적게 제시한 사람의 금액을 모두가 따라간다.
이게 끝이었다. 돈이 부족한 사람이 눈치 보지 않아도 괜찮도록 만든 규칙이었다.
“하나, 둘, 셋!”
각자가 손을 펼치자 대략적으로 그림이 보였다.
권동하가 순식간에 가장 적게 낸 사람을 잡아냈다.
“7만 원?”
보컬리스트가 머쓱하게 웃었다.
“나 다른 데 진 빚 좀 갚느라…….”
다들 7만 원씩 권동하에게 주었다. 그는 돈을 세곤 사무적으로 말했다.
“현재 공동 금고에는 약 80만 원 정도 있어. 앞으로 200만 원만 더 모으면 되겠네.”
“많이 모았네.”
‘데비’는 유명하지 않은 밴드다.
홍대 무대에 서려면 다른 밴드들의 앞이나 뒤에 배치되어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만 맡아야 한다. 아니, 그 정도면 차라리 낫지.
관객이 10명도 안 되는 공연장에 서서 같은 무명 밴드들과 함께 연주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6개월…… 정도만 더 모으자.”
‘데비’는 새 앨범을 낼 것이다.
그 앨범으로 모든 게 드라마틱하게 바뀌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데비’는 더 앞으로 나아갈 게 틀림없다.
그렇게 믿고 있다.
“6개월은 너무 긴데.”
“그때까지 작업에 더 매달리면 되지.”
“돈 좀 빨리 모을 방법 없나…….”
드러머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전에 그거 어떻게 됐어? 무슨 기획사에서 와서 세션으로 뛰어달란 거!”
“연락 없어…….”
권동하가 우중충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다들 그가 왜 이러는지 의아해했다.
그때 드러머가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그 기획사가 소녀연맹 소속사거든. 그래서 동하 얘 우울해서 죽으려고 하잖아.”
“와, 그거 일 맡았으면 동하 바로 성덕(성공한 덕후) 되는 거 아님?”
“에휴.”
권동하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 수준에 무슨 소녀연맹 세션으로 서냐.”
“그 말은 그냥 넘길 수 없군. 우리가 어때서?”
드러머가 권동하의 어깨를 팍팍 쳤다. 권동하는 봐달라는 듯 웃으면서 물러났다.
문득, 드러머가 물었다.
“근데 콘서트 세션 서면 얼마 받냐?”
“몰?루.”
“아는 세션맨 없어?”
“으음, 대략 2시간 넘으니까 한…… 4만 원?”
“2시간 일하고 4만 원? 그거 완전 개혜자 아니냐? 진짜 꼭 하고 싶다 제발.”
“아니 4만 원이 뭐야. 우리가 편곡까지 할 테니까 그거 비용까지 쳐야지!”
“그럼?”
“음…… 8만?”
“우와, 진짜 꼭 한다 꼭!”
밴드 ‘데비’는 젊고, 열정 있고, 가난하다.
그래도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직 기회가 많으니까.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래와 연주를 들어줄 기회는, 그들의 젊음만큼이나 길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야, 동하야 전화.”
‘2시간 뛰고 8만 원이면 거기가 천국 아니냐?’라며 활기차 있던 권동하. 그는 보컬리스트의 부름에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전화가 왔다.
권동하는 이름이 아니라 번호가 뜨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전화를 받아 시니컬하게 답했다.
“주식 리딩방 필요 없다고…… 아, 네. 안녕하세요.”
갑자기 권동하가 저자세가 됐다.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 아, 저희한테 콘서트 세션을…… 맡겨주신다…… 네네, 시범으로 보여드릴 수 있죠 당연히. 네? 페이요? 페이, 저희가 받는 페이……?”
세션으로 뛰어본 적이 없으니 알 리가 없다.
권동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이리저리 굴러갔다.
보컬리스트와 드러머는 각자가 생각하는 적정치를 두고 싸우다가 간신히 합의가 났다.
드러머는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손가락을 전부 펼쳤다.
권동하가 깜짝 놀라 입 모양으로 물었다.
‘10만? 너 미쳤어?!’
‘앨범 하나에 몇억 들이는 인간들인데 인당 10만을 못 주겠냐!’
‘10만은 너무 많잖아!’
‘걍 말만 해 말만! 안 된다고 하면 그때 낮추면 되지! 괜히 낮게 말해서 호구 잡히는 게 더 손해야!’
권동하는 침을 꼴깍 삼키고, 결연히 말했다.
“10만…… 이요.”
다들 눈이 파충류처럼 튀어나와 권동하의 입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권동하가 말했다.
“……저, 죄송한데, 제가 재정을 맡은 게 아니라. 밴드랑 상의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가 전화를 끊자 다들 난리 치면서 무슨 일이냐고 몰아붙여 왔다.
권동하가 소리를 빽 질렀다.
“겨우 그거냐고 말했다고! 겨우 그것만 받아도 되냐고! 에누리 안 해줘도 된다고! 내가 뭐 어쩌는데!”
“…….”
“…….”
“…….”
“10만, 10만이 ‘겨우’야? 그럼 어, 얼마를 받아야 하는 거야? 세션맨 아는 사람 없어 다들?”
“…….”
“…….”
“…….”
“인터넷에 쳐보자!”
당연히 그런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세션맨의 세태를 고발한 칼럼이 있을 뿐이었다. 서로 일자리를 얻기 위해 출혈 경쟁은 물론이요, 숙련된 세션맨은 동료들과만 일을 공유한다고.
“여기도 먹고살기 힘들긴 매한가지구나.”
“동정하지 말고 얼마 받는지를 찾으라고!”
그리고, 기타리스트가 쓸 만한 정보를 찾아냈다.
현재는 그럭저럭 팬덤을 구축한 가수로 활동 중인, 한때 밴드맨이었던 이의 아이튜브 영상이었다.
“이 사람 아이돌 공연에서 세션으로 선 페이 밝혔는데?”
“콘서트는 아니고 그냥 공연? 얼만데?”
“배, 백만 원…….”
“……진짜? 그, 그룹은 누군데?”
“다키스트.”
“X나 거물이잖아! 상대가 다키스트급이면 나도 백만 원부터 부르겠다!”
잠시 후, 다시 가로 엔터 A&R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데비’는 객관적으로 본인들의 몸값을 계산한 참이었다.
“……시, 십, 15만, 15만 원이요.”
잠시 후.
“예, 진짜 죄송한데 다시 전화드릴게요. 갑자기 손님이 오셔서요.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전화가 끊기고.
“‘……예?’래.”
“뭐?”
“‘예?’라고! 15만 원도 싼 건가 봐!”
‘데비’의 고민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 * *
압도적으로 좋다.
가로 엔터의 A&R 인원들이 밴드 ‘데비’의 세션 연주를 듣고 느낀 감상이었다.
성필 또한 그러했다.
‘진짜 다른 세션들이랑 비교가 안 되는데?’
실력적으로 얼마나 뛰어난지는 알 수 없었다.
직접 악기를 만져본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런 것을 캐치하긴 힘드니까.
다만, 성필은 ‘데비’의 곡 해석력과 편곡에 깊은 감명을 느꼈다.
‘데비’는 소녀연맹의 곡들을 원래부터 밴드 사운드였던 것처럼 바꾸어냈다.
‘이 정도면 우리 애들 노래를 몇백몇천 번은 들어본 수준…….’
그들은 적당히 곡에 밴드 악기를 입힌 게 아니었다. 사운드의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서, 밴드 악기가 곡에 방해되지 않고 상승하도록 만든다.
무명 밴드가 어떻게 이 정도 수준을 보여주지?
두 가지 가설이 있다.
‘데비’가 소녀연맹의 곡을 수천 번 감상하고 연주한 경험이 있거나.
‘데비’가 천재거나.
‘당연히 후자겠지!’
A&R팀의 이재호는 천재 밴드를 찾아낸 것이다.
성필은 손혜빈에게 눈길을 주었다. 손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성필은 백설하를 보았다. 백설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호 씨.”
“예, 박 이사님…….”
이사들이 다 입을 다물고 시선만 교환하고 있자, 이재호의 불안감은 상당히 높아진 상태였다.
이재호는 혼날 것을 예감한 강아지처럼 움츠러들었다.
“보너스, 좋아하세요?”
“……예?”
“정말 기가 막히네요. 어떻게 이런 밴드를 찾아내셨어요? 진짜, 유명한 세션맨 데려와도 이 정도로 편곡을 못 할 거예요. 이건…… 진짜, 지음이랑 편곡 의논이 필요 없을 정도네요. 이미 완성됐어요.”
이재호의 얼굴이 밝게 펴졌다.
손혜빈도 칭찬 릴레이에 동참했다.
“재호 씨 잘했어요. 역시 A&R팀 1호 직원! 이대로만 가면 나중엔 A&R 팀장 달 수 있을지도?”
이재호, 성불.
* * *
오랜만에 가로 엔터의 중역들과만 점심 식사 자리를 가지게 됐다.
홍규헌은 해장국을 한 술 퍼다 말고 성필을 보았다. 안 묻고 싶었는데, 도저히 질문을 참을 수 없었다.
“박 이사, 오늘 좋은 일 있어?”
“저요?”
성필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사장한테까지 숨겨야 하는 일이야?”
“에이, 별거 아니에요.”
“성필이 얘 오늘 케이어스 컴백 쇼케이스 가잖아요. 애들 따라서요.”
“아 누나 왜 말해!”
성필은 케이어스에 대한 애정을 멤버들에게 들키는 것보다, 홍규헌에게 들키는 게 더 껄끄러웠다.
KS 엔터를 경쟁사라고 부르기엔 가로 엔터의 규모가 작긴 하지만, 어쨌거나 성필은 KS 엔터를 경쟁사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 성필로선, 경쟁사의 그룹인 케이어스를 신경 쓴단 걸 사장에게 알리는 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뭐어, 잘 구경하고 와.”
홍규헌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예상외는 아니었다.
‘요즘 사장님한테 무슨 일이 있으신가.’
최근 들어 부쩍 홍규헌의 기분이 안 좋은 듯했다. 말수도 줄고 어투도 짧아졌다.
‘아마 콘서트에 대한 부담감이겠지.’
콘서트 사업은 한두 푼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해외 투어가 아닌가.
세계 각지의 공연장을 섭외하고 설비를 들여놓는 비용은 절대 적지 않다.
홍규헌은 그 비용을 회수하는 게 가능할지,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나 벌 수 있을지 매초 매분 생각할 것이다.
‘속이 쓰릴 만도 하시겠지.’
사업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거라고 하니 말이다. 전생, 석세스 엔터의 대표인 김태훈 또한 마음 편히 지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석세스 엔터는 특히 공격적인 사업 확장으로 성장했으니까. 누군가 조금만 툭 건드려도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었었다.
‘사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성필은 홍규헌에게 성공을 약속했다.
물론 마음속으로.
이 자리에서 말하기엔 살짝 부끄러우니까.
‘제가 돈방석에 앉게 해드리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온 성필은 꽤 오랜 시간을 화장실에서 보냈다.
평소에도 왁스를 챙겨와 자주 헤어스타일을 손보지만, 오늘은 공을 조금 더 들였다.
딱히 케이어스 멤버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선 아니었다. 진짜다.
‘경쟁사로 가는 거야.’
허술한 모습은 보일 수 없다.
세팅을 마친 성필은 세면대를 짚고 심호흡했다.
‘콘서트가 코앞이야. 우리 애들한테 압박감을 줄 순 없어.’
안 그래도 케이어스가 역대급 성적을 낼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인데, 내가 괜히 케이어스 보고 들뜨는 걸 보여주면 최악이겠지.’
오늘만큼은 석세스 엔터의 악마로 돌아간다. 무표정에 무감정했던 로봇인 시절로.
성필이 자신의 뺨을 짝 때렸다.
“가자.”
* * *
KS 엔터가 컴백 쇼케이스를 위해 섭외한 공연장은, 명백히 음악 방송 무대보다 거대했다.
크기를 대략적으로나 파악하자면 음방 무대보다 두 배는 넓었다.
이런 말은 방송국에게 실례겠지만, 장비도 방송국보다 나은 듯했다.
무대 앞의 공간엔 KS 엔터의 직원들과 공연 스태프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성필과 소녀연맹은 그곳으로 들어섰.
“예에, 토모다치(친구).”
성필을 보자마자 에리카가 다가와 주먹을 내밀었다. 성필이 얼떨결에 그녀와 주먹을 맞추었다.
“박 이사님 안녕하심미까!”
진저가 쾌활하게 인사해왔다. 눈동자에서 반가움이 꿀처럼 진득이 모여 떨어지는 듯했다.
성필은 그런 인사를 매몰차게 돌려줄 수 없어서, 친근감이 넘치는 표정을 진저에게 지어주었다.
“오랜만이네요 박성필 이사님. 제 팬 되셨어요?”
진소유가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로 인사해왔다.
무뚝뚝했으나, 그녀가 외부인을 알아봤단 것만으로도 KS 엔터 사내 게시판에 대서특필 될 만한 이변이었다.
성필은 그녀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사님 하이.”
심지어 성필과 별다른 친분이 없는 김민주마저 다른 케이어스 멤버들을 따라 활기차게 인사했다.
분위기에 휩쓸린 건 아니었다.
시시각각 굳어가는 신아름의 얼굴을 보고, 재밌겠다 싶어서 한 것이었다.
“오늘 재밌게 보다 가세요. 아, 사인이라도?”
그렇게 김민주는 신아름의 심기를 긁었다.
소녀연맹과의 인사는 성필과의 인사 다음이었다. 그것마저도, 케이어스가 무대를 준비해야 해서 짧게 마쳤다.
케이어스가 떠나고, 성필은 멤버들을 보기 위해 뒤로 고개를 돌렸다.
“……우라기리, 에효.”
리카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하양 언니, 부탁해요!”
“와타시(저), 아이돌 쉽니다.”
장하양, 파업 선언!
동시에 무대의 뒤편에서는 또 다른 선언이 에리카의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쇼케이스 대본을 복기하면서 막이 오르기만을 기다리는 케이어스 멤버들.
에리카는 그중 진저를 응시했다.
시선을 감지한 진저가 미소와 함께 에리카를 보았다.
“왜 그러심미까?”
“아니야. 오늘따라 우리 진저가 더 귀여워서.”
“헤헤, 그렇슴미까?”
에리카는 의지를 다졌다.
‘이번 앨범의 내 솔로곡은, 특별히 부탁해서 감성적이고 기교적인 발라드 팝으로 준비했어. 기술적 측면에서 진저 솔로곡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진 않아.’
그 곡으로.
‘박 이사님을 울린다.’
에리카, 성필 울리기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