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50화 (350/760)

350화

신아름의 촬영은 비교적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배경이 한국이기 때문일까, 촬영팀이나 보조 배우들이나 익숙하고 수월하게 촬영에 임했다.

‘확실히 해외보다는 분위기가 낫네.’

조정훈만 보아도 그러했다. 그는 자신의 리더십을 가감 없이 발휘하는 중이었다.

‘외국에선 잘 안 되는 영어 섞어 쓰거나, 한 이사님 도움을 빌려서 겨우 지시하셨는데.’

역시 모국어를 사용하니 능력이 100% 발휘된다. 어쩌면, 외국에서의 촬영이 더뎌지거나 느렸던 건 조정훈이 한국어를 쓰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너 대학생이라고?”

“당연히 대학생이지. 아님 뭐 하겠냐?”

놀랍게도, 이번 VCR 촬영엔 신아름의 고등학교 친구들이 몇 명 도와주러 왔다.

다들 ‘아니’ 뮤직비디오에서도, 4·19혁명의 학생 역할을 맡아주었던 이들이었다.

신아름은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에게 반가움을 표하면서 쉬는 시간을 알차게 활용했다.

‘아니 뮤비 찍을 땐 아름이 학교 학생들 수십 명이 도와주러 왔었는데.’

아무래도 같은 학교 소속인지라, 학생들은 기꺼이 신아름을 도우러 왔었다.

하지만 이젠 그로부터 2년이나 넘게 지나, 모인 이들은 고작 수 명에 불과했다. 애초에 그땐 별로 친하지도 않은 이들도 아이돌 신아름의 데뷔란 소식에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번엔 신아름과 친분을 유지했던 이들만 모았으니, 수가 적은 건 당연했다.

“내가 유현이한테도 연락했거든? 근데 아예 답장이 없더라. 걔 뭐 하고 사는지 알아? 뭐, 재수라도 하러 들어갔나?”

“유현이 군대 갔어.”

“아…….”

21살이면 일반적으로 군대에 갈 나이긴 했다.

신아름은 성필에게 들었던 군대 썰을 떠올리며, 유현이를 위해 잠깐 마음속으로 위로와 응원을 전했…….

“혹시 부대 주소 알아?”

“왜, 편지라도 보내게?”

“어. 이왕 말 나왔으니까.”

“아이돌이 편지 보내주면 거기 뒤집어지는 거 아니야?”

신아름은 유현과 같은 대학으로 간 친구에게 부대 주소를 얻고 핸드폰에 저장했다.

이윽고 촬영이 재개되고, 조정훈의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작업이 끝났다.

신아름은 촬영을 마치자마자 성필에게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친구들 만났는데, 같이 안 놀아도 돼?”

“놀 시간이 어딨어요. 회사 가서 연습해야죠.”

신아름은 자신의 60년대 교복을 이리저리 매만져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멤버들 옷은 괜찮은데, 저만 멋없네요.”

“어쩔 수 없지.”

한국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영상으로 재현하는데, 복장을 아이돌리시하게 리폼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특히 교복이니까 말이다.

‘아니’ 때도 똑같이 했던 논의였다.

“팀장님 그…….”

“아름아 미안한데 나 감독님한테 인사 좀 하고 올게.”

조정훈의 팀이 스태프와 배우들의 지휘를 마치고 철수하려는 타이밍 같았다.

성필은 조정훈에게 급하게 뛰어가 미소 지었다.

“조 감독님,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아이고, 그래도 알아주시니 감사하네요.”

조정훈은 일주일 넘게 여러 지역의 시차에 맞추느라 생체 리듬이 말이 아니었다.

그건 성필과 한구인, 이유이도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였다.

“결과물은 잘 나온 거 같아요.”

“나온 거 ‘같아’요?”

“잘 나왔어요. 확실합니다.”

조정훈은 피곤한 듯 눈가를 쓸다가, 앞에 성필이 있단 걸 깨닫곤 곧바로 행동을 멈추었다.

성필은 쓰게 입꼬리를 올렸다.

“많이 피곤하시죠?”

“어, 예. 마음 같아선 촬영 끝난 기념이라도 하고 싶은데…….”

조정훈이 자신의 뒤로 고갯짓했다. 그의 팀원들은 거의 좀비처럼 장비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팀원들 또한 외국을 다니면서 심신을 소모해왔다.

“그럼 나중에 하면 되죠. 영상 작업 끝나면 해요. 진짜 다 끝났을 때요.”

“최대한 빨리 보내드리겠습니다.”

“빨리 술 드시고 싶어서요?”

“쪼금?”

둘은 웃으면서 악수한 뒤 시원하게 뒤로 돌았다.

성필은 신아름을 데리고 차로 향했다.

오늘 촬영에 이사인 성필이 신아름의 매니저로 직접 온 건 형평을 위해서였다.

성필은 다른 멤버들의 촬영에 모두 동행했는데, 신아름의 촬영에만 동행하지 않으면 모양이 살지 않으니까.

‘그리고 아름이가 속상해할 테니까.’

매일 그녀와 영상 통화를 했지만, 성필이 없는 시간을 좋게 보냈을 리 만무하다.

성필이 차를 몰기 시작하자마자 신아름이 입을 열었다.

“팀장님, 그거 약속 안 잊었죠?”

“너희 본가 가는 거? 안 잊었어.”

신아름의 어머니를 뵙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소녀연맹의 콘서트 표를 드릴 것이다.

홀로 키워낸 딸이 마침내 콘서트에 서는 모습을 그 어머니에게 보여드리는 건, 성필이 석세스 엔터에 있을 시절부터 가져온 목표였다.

“그때 뭐 먹고 싶…….”

“팀장님 근데 쌤이랑 프랑스에 있을 때 있잖아요.”

“어? 어, 그게 왜?”

“쌤이 했던 말 다 진짜인가 싶어서요.”

성필이 의아하게 신아름을 보았다.

“다 진짜냐니? 설하가 뭐라고 했어?”

* * *

백설하가 돌아온 날, 소녀연맹의 숙소.

멤버들은 오랜만에 다 함께 모여 저녁을 먹었다. 오늘의 요리사는 리카로, 메뉴는…….

“리카 너 톤지루 좀 그만 만들어! 왜 한국 와서까지 자꾸 우리한테 일식 먹이냐고!”

“지방 잘라낸 고기 썼어!”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아아아!”

성필과 떨어진 시간이 길어져서 그런지, 신아름의 목소리에는 짙은 히스테리가 배어 있었다.

리카는 움찔하곤, 어깨를 움츠리면서 비굴히 답했다.

“아, 아타시(나)는 다들 일식을 좋아했으면 해서어……. 마, 맛있다고 해줘서어…….”

신아름의 눈동자엔 갈망으로 인한 불꽃이 피어났다. 그녀에겐 충족되지 못한 무언가가 있었고, 그 공허함은 연료가 되어 자신을 불태웠다.

신아름은 리카를 쭉 노려보았다. 그러다 겨우 진정하여 의자에 몸을 푹 묻었다.

“리카, 소리 질러서 미안. 언니들, 미안해요.”

“나한텐 사과 안 해?”

“뭐.”

“그래.”

조아라는 리카가 만든 톤지루를 맛있게 먹었다.

신아름은 깊이 심호흡한 뒤, 아까보다 확연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일식 맛있어. 맛있는데에…… 요리 당번 자주 맡아주는 것도 정말 고마운데에……. 나는 좀 정상적인 걸 먹고 싶다고…….”

“아름아 미안해…….”

리카가 사과하자 신아름의 기세가 더욱 약해졌다. 슬슬 제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냐, 아니야, 내가 미안해.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신아름과 리카의 사과 릴레이를 지켜보면서, 조아라는 생각했다.

‘신아름 얘 상태가 말이 아니네.’

옛날에 신아름이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성필만 찾았을 때, 그녀는 자신에게 병이 있다고 고백했었다.

성필이 진정시켜줘야 해결되는 것이라고.

그때 이후로 낌새가 없어서 ‘이제 나았나?’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듯했다.

‘얘 뭐 아저씨한테 애인 생기면 막 달려들어서 패고 그러는 거 아니야? 자기랑 아저씨 시간 뺏는다고.’

이번엔 시간을 뺏는 게 멤버들이라 별일이 없었지, 상대가 알지도 못하는 여자라면 신아름이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르겠다.

조아라는 심각한 얼굴로 사색에 잠겼다.

그러는 동안 리카와 신아름이 서로 훌쩍이면서 포옹까지 마쳤다.

“…….”

그 가운데서 백설하는 깨작깨작 밥을 먹었다. 오늘 저녁 식사는 자신이 돌아온 걸 축하하는 자리가 될 줄 알았는데, 시작부터 뭔가 어긋났다.

“프랑스는 어떠셨어요?”

리카와 신아름의 눈물을 닦아준 장하양이, 백설하의 옆에서 은은하게 물어왔다.

“맞네. 쌤 얘기를 안 들었네.”

조아라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백설하는 이 상황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맞나 잠시 고민했으나, 이목이 집중된 것을 보곤 애매하게 웃으며 입을 뗐다.

“응, 좋았어. 촬영은 스무스했구, 그래서 관광 시간도 많이 남았구…… 좋았어.”

백설하는 아이돌 활동을 마치게 되면, 나중에 프랑스에서 단기간 지내보고 싶단 의사를 내비쳤다.

리카가 놀라서 물었다.

“프랑스가 그렇게 좋으셨나요!”

“응. 그냥 평범한 거리만 걸어도 영화 주인공 된 거 같아.”

“일본은 안 좋으셨나요!”

“어? 이, 일본도 좋았지.”

“그럼 왜 일본이 아니라 프랑스인가요!”

솔직히, 백설하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각국의 특성을 나타내는 도시 구조 등은 달랐으나, 기본적으로 번화한 동양 도시였다.

이왕 산다면 이색적인 서양이 낫지 않을까.

“어, 음, 일본도 생각해볼게…….”

“나중에 아타시(저)랑 동거하는 거예요! 같이 일본 방방곡곡을 노려…….”

멤버 귀화계획을 추진하려던 리카가 돌연 말을 멈추었다.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동거는 좀 그렇겠네요! 가까운 곳에 사는 걸로 해요!”

“으, 응.”

만약 그럴 날이 온다면, 동거의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이미 둘은 거의 3년 넘게 같이 사는 중 아닌가.

서로의 장점을 잘 알지만, 그만큼 단점도 안다. 이미 볼 장 다 봤기에 꺼려질 수밖에 없겠지.

‘그래도 같이 살자고 말해주면 좋았을 텐데.’

백설하는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꼈다.

“관광…… 하셨다고 했죠? 어디 가셨어요? 박 이사님이 안내해주신 거죠?”

“응. 여러 군데 갔지.”

“여러 군데요? 저는 식물원밖에 못 갔는데?”

“나, 나는 촬영이 빨리 끝나서…….”

백설하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장하양을 피해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옛날에 갔던 시장에 먼저 가서…… 그 헤어핀 있지? 그거 산 곳.”

백설하가 ‘음악을 위한 동행’ 촬영에 갔을 때, 성필은 멤버들에게 줄 헤어핀을 사서 왔었다.

그리하여 멤버들은 저마다 헤어핀을 하나씩 갖게 됐다. 스타일링이 힘들다면서 아예 안 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거기서, 헤헤.”

백설하가 행복에 겨운 웃음을 보였다.

“화가분이 계셨거든. 초상화 그려주셨어.”

“초상화요?”

장하양이 기억하기로, 백설하가 짐을 풀 때 종이 같은 건 보이지 않았었다.

“박 이사님 집에 있어.”

조아라가 질린 얼굴로 허허 웃었다.

“이젠 아저씨가 사제 굿즈도 모으네. 하다 하다 쌤 초상화를 집에 둬요?”

“아, 아니이…… 박 이사님이랑 나랑 같이 그려진 거라서…….”

“같이 그렸다고요?”

“하양아 자꾸 왜 그래애…….”

백설하가 뭐만 말하면 장하양이 잡아먹을 듯이 몸을 그녀 쪽으로 기울인다.

“그러니까, 두 분이 같은 캔버스에?”

“으, 응. 화가분이 되게 잘 그려주셨어. 신기한 게, 태블릿으로도 그릴 수 있다고 하시더라. 태블릿으로 그리면 약간 싸고 메일로 전송해주신다고 하셨어. 그래서, 그 초상화 그리느라…….”

성필과 백설하는 어깨가 맞닿을 거리에서 계속 같이 앉아 있었었다.

“나중엔 둘 다 어깨에 땀이 막 흥건해서 헤헤…….”

“…….”

“…….”

“…….”

“…….”

“다, 다들 갑자기 왜 조용해?”

“……아녜요, 그리고요?”

“아, 다음은.”

함께 세느강변(Seine江邊)을 산책했다.

“막 강에 배도 다니고 해서 신기했어. 그리고 공원에 사람이 정말 많더라. 근데 계속 다니니까 땀이 너무 많이 나고 해서…….”

“공원에서 피크닉 했나요!”

“아니, 아까우니까 계속 걸었어.”

이왕 프랑스에 왔다.

언제 또 올지 모르니, 지쳤단 이유로 쉬고 싶진 않았다. 본전 뽑을 때까지 걸었다.

“박 이사님한텐 미안했지. 그, 부끄러운데, 내가 계속 일렉 기타 가지고 다녔었거든.”

“와, 진짜 아티스트병 걸린 사람 같아.”

“아티스트 맞거든?! 뮤지션이거든?!”

백설하가 신아름에게 소심한 반항을 가했다. 그러면서도 뺨엔 창피함으로 분홍빛이 새겨졌다.

“응…… 사실 그런 말 들어도 할 말이 없지…….”

장하양이 신아름의 머리를 약하게 콩 때렸다. 신아름은 장난스레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면서, 더 이야기하란 뜻으로 백설하를 응시했다.

“팀장님한테 미안한 건 왜요? 더운데 계속 같이 다니자고 해서요?”

“도중부터 내 기타 들어주셨거든.”

케이스까지 합쳐 5kg이 넘는 무게를 성필에게 맡겼다. 5kg짜리 아령을 계속 어깨에 메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 가볍지 않다.

“네?”

신아름이 이상하단 듯 반문했다.

“쌤 옛날에 자기 악기 남한테 안 맡긴다면서요.”

“어?”

“소오(맞아)! 자기 악기니까 다른 사람 손 타게 하기 싫댔어!”

“어어?”

“언니, 전에는 제가 대신 들어준다니까 ‘괜찮아’라면서 손사래 치셨잖아요.”

“그, 그건 하양이 너도 베이스 들고 있어서…….”

“근데 아저씨한텐 맡겼다고요?”

다들 백설하의 기타를 들어주려다가 거절당한 경험이 한 번씩 있었다.

그때마다 백설하는 ‘자기 악기를 자기가 드는 건 나의 아티스트십이다’라는 논리로 거절했었다.

당시에 무슨 록스타 관련 영화를 보고 잔뜩 바람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래서요?”

장하양이 멤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외치는 말들을 일축했다. 그리고 형사라도 된 듯이 목소리에 무게를 담았다.

“계속…….”

“계속?”

“걸었어.”

“……걷기만?”

“응.”

한 네 시간 정도 걸은 것으로 기억한다.

“걷기만 네 시간?!”

리카가 경악했다.

그 더운 날씨에 네 시간 동안 걷기만 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걸으면서 뭐 했는데요?”

“그냥 얘기했지.”

“…….”

조아라는 무언가 말하려 입을 뻐끔거리다가, 그냥 입을 꾹 닫았다.

하고픈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이야기만 나누면서 네 시간을 걷는다고?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지. 그런데 성필과 백설하 사이에 뭐 그리 할 말이 많을까…….

“그러니까 밤이더라.”

“이, 이야기 진행을 못 따라가겠어요!”

시장에서 아이 쇼핑하다가, 초상화를 그리고, 세느 강변을 네 시간 걷다 보니 밤이 됐다.

사건의 밀도가 시간에 걸맞지 않는 듯하다.

만약 다른 멤버에게 그 정도 시간이 있었다면, 온갖 것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백설하는 비슷한 거리의 장소에서 그냥 돌아다니는 게 전부였다. 그걸 계속했단 것도 신기하고, 거기에 어울려준 성필도 이상했다.

애초에 몇 시간 동안 같이 걷기만 하면서도 즐거웠다는 건, 그건…….

“그리고 강변에 앉아서…….”

“뭐요. 같이 와인이라도 깠어요?”

“버스킹 했어.”

우연찮게 근처에 앰프를 들고 온 인디 밴드가 있었다. 그들은 백설하의 일렉 기타를 알아보고, 처음 본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프랑스어로.

“위기잖아요! 어떻게 헤쳐갔나요!”

“번역 어플로.”

“스마트폰 대단해!”

그렇게 때아닌 합주가 이뤄졌다.

백설하는 몇 개월 전부터 록에 관심을 가졌던 터라, 그 밴드들과 유명한 곡으로 합을 맞출 수 있었다.

그리고 성필은 옆에서 신나게 춤을 추었다.

조아라가 마시던 물을 뿜었다.

“에이 씨, 더러워 죽겠네.”

“넌 놀라지도 않냐?!”

조아라가 신아름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지금까지 성필에게 얼마나 많이 춤춰달라고, 물론 반쯤 농담 삼아서였지만, 춤을 춰달라고 부탁했던가?

정말 한 번도 들어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백설하 앞에서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춤을 췄다고?

“차별이야!”

“아앗, 아라쨩 아타시(나) 따라 하…… 따라 하는 거 많이 귀여울지도? 더 해줘!”

“명백한 차별이다.”

“히도이(너무해)…….”

이젠 진짜 나올 이야기는 다 나온 것 같다.

강변 산책에 버스킹까지 했으니, 족히 밤 9시는 넘었을 터다.

그쯤에서 숙소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공원에 앉아서 와인…….”

“더는 못 들어주겠군.”

장하양이 백설하를 향해 일장 연설을 펼쳤다.

‘일하러 간 거냐 놀러 간 거냐’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낮부터 밤까지 논 얘기밖에 안 하냐(장하양이 물어봄)’고 말이다.

다른 멤버들도 가세하여 백설하를 몰아붙였다. 본인들은 촬영에 열심히 일하느라고 관광다운 관광도 못 했는데, 리더가 이래도 되냐고 열을 올렸다.

리더 백설하는 그것을 들으면서.

“헤헤.”

느슨하게 웃었다.

그녀의 눈꼬리가 여유를 담아 휘었다.

‘이게 나의 리더십.’

이게 나의 아이돌리즘.

이제 이런 역할은 익숙하니까…….

* * *

“들어보니까 거의 데이트던데요?”

“뭘 그렇게 말하고 그러냐. 아름이는 남녀끼리 같이 놀면 다 데이트야? 그럼 너랑 나랑 있는 것도 데이트겠네?”

“가불기 쓰지 마요.”

신아름은 다시 성필과 백설하가 했던 일을 열거했다.

“같이 전통시장에서 아이쇼핑. 같이 초상화 모델 되기. 몇 시간 동안 강변 산책. 강변에 앉아 야경 보면서 담소 나누고 술 마시기. 아니, 종일 같이 있었잖아요. 이게 어떻게 데이트 아님?”

“그래, 아름이는 그렇게 생각해. 난 그렇게 생각 안 할게. 만약 내가 한 이사님이랑 그랬어도 데이트라고 했을 거야?”

“코스 자체가 데이트잖아요.”

확실히, 만약 성필이 한구인과 그 코스를 그대로 이행했어도 데이트처럼 보였을 것이다.

한구인과 네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강변을 걷는다라…….

‘진짜 보통 사이가 아닌데?’

성필은 새삼스레 자기 객관화가 됐다.

하지만 그에게는 변명이 있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백설하는 성필이 가장 친근하게 대할 수 있는 멤버다.

약 1시간 정도 이야기하면 소재가 고갈되는 리카와 달리, 백설하와는 어쩐지 대화 코드도 잘 맞아서 몇 시간이고 이야기할 수 있다.

사실, 딱히 리카와도 대화가 툭 끊기지 않는다. 다만 리카는 코드가 맞지 않는데도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일 뿐.

“이럴 거면 저도 뮤비 배경을 한국으로 안 잡고 외국으로 할 걸 그랬어요.”

“오, 뭐 아이디어 있어?”

“문화대혁명?”

“농담도 잘하셔.”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은 공이 첫 번째고 과가 두 번째라고 했다.

그 과(過) 중 하나가 문화대혁명이다.

혁명이긴 한데, 썩 좋은 의미는 아니다. 중국에서도 그러니 해외의 인식이 어떤지는……(생략).

“근데 재밌긴 했나 봐요. 그 얘기할 때 쌤 진짜 좋아서 죽으려고 하던데.”

“소녀연맹은 리더에 대한 예의가 그다지 없는 편이구나. ‘좋아 죽는다’라니…….”

뭐, 재밌긴 했으니.

성필이 VCR 영상 촬영으로 다닌 외국.

그곳에서 했던 관광 중에선, 백설하와의 파리 투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여러 관광을 비교할 수 있는 성필마저도 최고로 치는데, 백설하는 어떻겠는가.

“이제 완전히 콘서트에 집중할…… 아, 팀장님 그거 들었어요?”

“뭐?”

“우리 케이어스 쇼케이스 초대받았어요.”

* * *

KS 엔터 매니지먼트 1팀은 곧 다가올 폭풍에 대비하고 있었다.

아니, 그들이 폭풍이었다.

‘드디어 케이어스의 컴백이다. 정규 앨범 컴백이야.’

1팀장은 본인의 자리에서 남몰래 의지를 다졌다. 그와 마찬가지로, 팀원들의 사기 또한 남달랐다.

케이어스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압박감과 사명감이 차올랐다.

매니지먼트 팀은 케이어스를 위한 꽃길을 준비해야만 한다.

‘반드시 성공시킨다. KS 엔터에 다시 없을 성공을 만드는 거야.’

무거운 열기가 감도는 사무실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녀의 등장을 확인하자마자 팀원들이 우르르 일어나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진저!”

“안녕하심미까.”

1팀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귀염둥이 진저의 강림이었다.

매니저들은 우르르 진저에게 몰려가 먹을 것이며 마실 것을 조공하듯이 바쳤…….

“전부 다 자리로 돌아가!”

1팀장의 일갈에 사무실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진저는 그런 반응이 익숙한 듯, 동요하지 않고 1팀장의 앞으로 왔다.

“팀장님 잘 지내셨슴미까.”

“1시간 전에 봐 놓고 잘 지내긴 뭘.”

1팀장의 말투가 언뜻 싸늘하게 들리자, 부하 직원들의 눈빛이 총알처럼 날아왔다.

지도자의 덕목은 부하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1팀장은 즉시 다정한 말투와 표정을 만들어냈다.

절대 무서워서 바로 태도가 바뀐 건 아니었다.

“어, 잘 지냈지. 그래서 웬일이야?”

“저희 컴백 쇼케이스 있잖슴미까.”

정규 앨범 릴리즈 바로 다음 날에 잡힌 스케줄이다.

케이어스가 무대를 빌려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MC와 함께 토크와 노래로 무대를 이끌어간다.

쇼케이스란 말대로, 케이어스가 본인들의 앨범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소녀연맹 분들을 초대해도 되겠슴미까?”

“진저, 컴백 쇼케이스는 중요하고 진지한 자리야. 너희랑 스태프 집중도를 올리려고 방청객들, 심지어 기자도 안 불러. 인터넷으로만 생방송 되고. 우리 쪽 사람들 우글거리면서 너희 잘되기만 바라면서 일하는 자리인데…….”

거기에 무슨 콘서트처럼 외부인을 부를 수는 없다. 이미 여러 번 리허설을 거쳤으니, 리허설과 같은 상황이어야 실수가 발생하는 빈도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그렇슴미까…….”

진저가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을 비쳤다.

1팀장은 팀원들이 노려보는 것을 억지로 무시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너희들이 소녀연맹이랑 친한 건 아는데, 이런 쇼케이스 자리에 부르는 건 좀 아니지.”

“알겠슴미다.”

진저는 어린애처럼 떼쓰거나, 안 될 걸 알면서 굳이 한 번 더 부탁하지 않았다.

그녀는 케이어스의 매니지먼트 담당자인 1팀장을 존중했으니까. 그의 판단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무리한 부탁드려서 죄송함미다.”

“아니야. 미안하게 됐다. 너희 무대는 음방 사녹에 초대해서 보여줘.”

진저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뒤로 돌자, 1팀장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진저!”

“네?”

“너 혹시 이번에도 정호환 이사님 데려오고 그럴 거 아니지?”

“아, 아님미다.”

“……그래.”

진저가 나가자 1팀장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본인의 부탁이 안 먹힐 때마다 정호환 이사를 불러서 의지를 관철하곤 했었다.

당연히 1팀장이 뭐라고 할 순 없었다.

‘이번엔 정 이사님이 오셔도 절대 동의 안 했겠지만.’

정말이다.

정말로 동의 안 했을 것이다.

진짜로.

‘매니지먼트 1팀 팀장인 내가 다른 부서에 휘둘려야 해? 아니!’

매니지먼트 부서는 독립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프로듀싱 부문 이사인 정호환이 KS 엔터 그 자체라고 불리는 인물이긴 하지만, 그의 권한엔 분명히 한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매니지먼트 부문은 그런 한계 중 하나였다.

‘옛날엔 당황해서 얼떨결에 허락해줬지만, 이젠 안 돼. 진저, 미안하게 됐다만 네 방법은 더 이상 안 먹.’

진저가 매니지먼트 이사인 남홍범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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