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낮은 주택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모양의 거리엔, 오랜만에 손님들이 몰려들어 활기를 띠었다.
건물 곳곳의 창문이 열렸다.
파리의 주민들은 아래를, 장하양의 영상 촬영이 이루어지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건물의 낮은 지붕을 타고 미끄러져 오는 햇빛을 맞으며, 장하양이 서 있었다.
“으음.”
이유이는 장하양의 근처를 빙글빙글 돌면서 고민에 빠졌다.
“어딘가…… 부족해.”
장하양은 밑단이 길어 엉덩이를 덮는 길이의 흰 티셔츠, 그리고 그 위에 노란 배경에 보라색 꽃이 새겨진 남방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스키니진을 입고 있어 그녀의 각선미를 드러내긴 했으나, 상의 쪽은 좋은 말로도 아이돌답지 못했다.
그야말로 프리함의 정석.
자유로움을 한껏 드러내는, 품이 크고 헐렁한 차림이었기에.
“한 이사님, 하양이 옷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면 어떨까요?”
“역사적으로 말입니까?”
“60년대 유럽 대학생 같아요?”
68혁명 당시 찍힌 사진들을 보면, 젊은이들의 옷이 왠지 모르게 갑갑한 느낌이 든다.
패션으로 개성을 드러내는 게 익숙지 않은 시대라 그렇다.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압력, ‘단정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시선에 갇혀 지냈을 때다.
“그런 배경을 생각해보자면, 하양 씨의 차림은 혁명의 선두에 선 신세대 같아서 적당하다고 봅니다.”
“어떤 점이요?”
“반팔 와이셔츠에…… 꽃무늬라는 점?”
“한 이사님은 꽃무늬 넣는 걸 굉장한 개성이라고 생각하시나 보네요.”
“제 정장을 모욕하는 건 참지 않겠습니다.”
“모욕한 적 없어요…….”
“제 차림이 남들 보기엔 갑갑하단 걸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마치 공작새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세계에서 온 것 같죠.”
공작새 혁명이란 60년대에 일어난 남성 패션 혁명이다. 남자의 꾸미기 혁명이라고도 불린다.
확실히, 모던한 엠비언스의 정장을 고집하는 한구인은 공작새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이젠 캐주얼한 복장이 너무나 당연시된 시대 아닙니까. 그러니, 저는 그런 세태에 반항하는 겁니다. 다시 남자를 기품있게…… 이른바 역(逆) 공작새 혁명입니다.”
“의외로 패션 철학이 있으셨네요. 옷 고르기 귀찮아하셔서 정장만 입으시는 줄 알았는데요.”
성필은 이유이에게 달려들려는 한구인을 간신히 잡아 말렸다.
“무, 물론 한 이사님은 굉장히 멋지시죠 네!”
이유이는 한발 늦게 한구인을 포장해주었다. 그를 멋지다고 생각하는 건 진심이기도 했다.
‘유이 씨는 결과물이 원하는 대로 안 나오면 시니컬해지는 성격이시구나.’
사람마다 일이 안 풀릴 때마다 취하는 태도가 다르다. 성필의 경우엔 혼자 우울해져선 구석에 틀어박힌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우울할 때마다 회사 사람들이나 멤버들이 위로해줘서, 어디 틀어박힌 적이 없네.’
성필이 한구인의 신세 한탄을 듣는 사이, 이유이는 결정을 내리고 장하양에게 접근했다.
이유이는 길게 내려오는 장하양의 티셔츠 밑단에 집중했다. 그것을 잡아당겨 끈처럼 길게 쥐곤, 갈비뼈 아래에서 고정되도록 매듭지었다.
“오오.”
성필이 감탄했다. 오버핏 티셔츠를 묶어서 크롭티로 만든 것이다.
“어때요, 훨씬 낫죠?”
“크롭티만 입히면 아이돌답다고 생각하시는 유이 씨의 사고방식, 잘 알았습니다.”
성필은 한구인에게 달려들려고 하는 이유이를 간신히 잡아 말렸다.
“물론, 잘 어울립니다.”
한구인이 아까의 이유이처럼 뒤늦게 자신의 말을 주워 담았다. 아니, 원래 그럴 생각이었던 것이다.
장하양은 자신의 차림을 둘러보곤,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박 이사님은 어떠세요?”
“여름 화보 찍으러 온 거 같아.”
“아하하, 지금 여름 맞잖아요.”
“배경이 바다였어도 어울렸을 텐데.”
“비키니 입고요? 다음 여름엔 수영복 화보라도 찍어야겠네요.”
장하양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성필이 ‘비키니는 좀 그렇지……’라며 쓴웃음 지을 걸 예상하고서.
“비키니라…….”
그런데 성필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뭐, 하양이가 원하면 얼마든지.”
꽤 긴 시간 동안 걸그룹에겐 비키니 수영복이 금기시되었다.
입더라도 래시가드를 허리에 두르거나, 위에는 티셔츠를 한 겹 더해야만 했다.
무대 위라면 배든 다리든 드러내어도 되지만, 다른 때는 안 된다. 정숙하지 않으니까.
그런 보이지 않는 사회의 압력이 만들어낸 제약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뭐…….’
여전히 꺼려 하거나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시선은 많이 줄어들었다.
걸그룹의 주류 컨셉이 변화를 거듭한 결과였다.
“아니다, 수영복이 뭐야. 속옷 광고도 해볼래? 막 전광판에 커다랗게 뜨는 걸로.”
성필은 멤버들의 욕구나 자아가 사회의 시선에 갇히길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말은 순수하게 해석되지 않았다.
“박 이사님 진심이십니까……?”
한구인이 도저히 믿지 못할 것을 들었단 듯 말했다.
“다, 담당 아이돌을 본인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 쓰시면 안 되죠!”
이유이가 장하양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즉각 반발했다.
한구인과 이유이는 아까까지 서로에게 달려들려 했단 것도 잊은 듯, 성필의 마수에 대항하여 공동 전선을 펼쳤다.
“아니, 그, 하양이가 원하면 말이에요.”
“그게 하라는 거랑 뭐가 달라요!”
“그 말이 강요랑 뭐가 다릅니까!”
두 사람은 아예 벌벌 떨면서 말했다.
만약 메인 프로듀서 성필이 진심으로 그런 프로젝트를 밀자고 한다면, 그리고 익히 알려진 그의 말빨이 사용된다면, 홍규헌이 허락할 것만 같아서였다.
정작 성필은 가볍게 제안한 건데 말이다.
‘1년인가 2년 뒤에 탑티어 걸그룹 멤버가 속옷 광고 찍었지. 그게 뉴욕 대형 간판에 걸리고…….’
굉장한 화제였으며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준 사건이었다.
성필은 그런 논지에서 제안한 거였지만, 미래를 모르는 두 사람이 순순히 듣고 넘어갈 리 없었다.
그리고 그 상황을 보던 장하양은.
“…….”
문득 익스 이블이 떠올랐다.
옛날에 성필이 보여주었던 익스 이블의 영상. 그곳에 나왔던 익스 이블 멤버들의 의상.
리카가 ‘수영복이나 다름없다’고 했던 그 의상…….
‘아라가 우리들한테 이런 거 입히고 싶느냐고 물었을 때 박 이사님은 아니라고 하셨지만…….’
어쩌면, 입히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네, 기회가 오면 할게요.”
장하양의 충격 선언에 한구인과 이유이의 입은 닫힐 줄 몰랐다.
“이제 촬영 들어갈게요!”
조정훈이 세팅을 마치고 배우들을 불러 모았다. 장하양은 성필의 멱살을 사이좋게 잡고 흔드는 한구인, 이유이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곤 촬영장으로 향했다.
“스읍, 후우…….”
카메라 앞에 선 장하양은 숨을 골랐다. 그녀의 곁에는 많은 배우들, 68혁명의 동료들이 있었다.
“여기요.”
스태프가 장하양에게 꽃을 한 송이 주었다.
장하양이 특별히 부탁한 보라색 튤립이었다. 그녀는 정면의 카메라를 보고, 그 뒤에 있는 조정훈에게 싱긋 미소 지어주었다.
조정훈도 미소 지었다.
‘어제 잠들기까지 계속 조 감독님이랑 의논했어.’
어떻게 해야 영상미를 강화할 수 있을지.
답은.
‘몰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얻은 건 있었다.
영상 촬영 자체에 몰입하는 경험이었다.
더 나은 촬영을 위해 몇 시간을 논의하고, 연습하며, 이미지 트레이닝 했다.
마땅한 결론은 없었지만 그 몰입의 경험이 장하양을 날카롭게 벼려냈다.
“Set.”
조정훈의 외침이 촬영장 사방으로 퍼져갔다.
“Here we go.”
장하양은 눈을 감고 상황에 빠져들었다.
“Ready.”
68년.
굳어버린 세계.
전쟁이 끝나고 태어나 성인이 된 젊은이들은 경직된 공기 속에서 살고 있다.
“And.”
어른들은 규칙과 질서만을 강조한다.
나치 독일, 비시 프랑스, 파시스트 정권에 협조하고 부역했던 이들은 여전히 사회의 요직에 앉아 있다.
그들은 젊은이들에게 집단적인 망각을 강요한다. 그땐 어쩔 수 없었다고, 살자고 한 짓이라고, 과거는 지우고 미래만 보자고 말한다.
그들은 대학의 강단에, 회사의 관리자급에, 정부의 고위직에 앉아 있다.
그들이 바라는 건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건 올바른 세계가 아니야.
“Action!”
바꿔야 한다.
장하양이 눈을 뜨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시위를 제압하기 위해 포진한 중무장의 경찰 앞에 선다.
작은 소녀가 든 것은 꽃 한 송이였다.
그녀는 웃으면서 총구를 향해 꽃을 내민다.
꽃과 총.
소녀는 자신을 찢어발길 수도 있는 검은색의 금속 앞에, 한없이 가련하고 나약하며 아름다운 꽃을 가져다 댄다.
죽음의 아가리에 꽃을 꽂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함께 나아간다.
그들의 손에 들린 건 오직 꽃뿐이다.
민중이 평화와 자유를 외친다.
소녀가 선언한다.
우리는 전 세계에 수선화 지뢰를 심을 것이다.
우리는 전 세계에 민들레 철조망을 두를 것이다.
우리는 전 세계에 튤립 폭탄을 터뜨릴 것이다.
오직 꽃의 힘으로, 너희들과 싸울 것이다.
“어…….”
조정훈은 카메라의 바로 뒤, 즉 장하양을 정면에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장하양의 얼굴과 마주하고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감정적 격류를 다스리기 힘들 정도였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게…….’
장하양의 표정에는 온화함만이 있었다.
혁명의 선두에 선 자 특유의 투쟁심이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리카나 조아라와 비교하면 유약하기까지 하다. 소녀연맹의 구호인 투쟁과 해방을 연상할 수가 없다.
‘내가 생각했던 게…… 아니지만…….’
상황, 배경과 너무 잘 어울려서 황홀할 지경이다.
장하양은 그녀가 내민 꽃과 같았다.
싸워 이길 순 없지만, 시선을 끌 수 있다.
무기로 쓸 순 없지만,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다.
타인을 상처입히지 않고, 깨닫게 한다.
장하양은 미소 지으며 이리 말하는 듯하다.
‘꽃이 더 필요하시지 않나요?’
그녀에 비하면, 총을 들고 선 경찰은 얼마나 초라해지는가.
타인을 죽이고 상처입히는 힘이란 건, 얼마나 많은 재앙을 불러일으켰고 얼마나 거대한 슬픔을 만들었는가.
장하양은 조정훈으로 하여금 이 모든 성찰과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투쟁과 해방은 없지만, 그럼에도 장하양에겐 승리가 있다.
“컷…….”
조정훈이 황홀히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가 작았던 터라 다들 감독의 컷 사인을 듣지 못해서, 촬영장은 침묵에 잠겨 있어야만 했다.
아마 들었어도 비슷했을 것이다.
* * *
파리는 이유이의 홈그라운드였다. 그녀는 무려 3년 동안 파리에서 유학했으니 말이다.
그런 이유이가 추천한 관광지는…….
“식물원에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성필과 장하양이 파리 식물원의 입구를 넘었다. 처음 이유이가 식물원을 추천하기에 반신반의했던 둘은,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우와…… 장관이네.”
좌우로 대칭을 이룬 채 배열된 길. 그 사이사이로 군대가 열을 이루듯 직사각형의 정원이 저 끝까지 이어져 있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온갖 꽃과 풀들이 여름 햇빛을 받아 더욱 싱그럽게 피어 있었다.
“아직 유이 언니가 추천해준 곳엔 가보지도 못했는데…….”
장하양은 눈을 빛내면서 식물원의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벌써 만족했어요…….”
“그러게, 유이 씨한테 고맙다 진짜.”
최대한 많은 식물을 보겠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오지는 않았다.
둘은 느긋하게 길을 걸으면서 식물이며 풍경을 구경했다.
“한 이사님은 루브르 박물관 가셨죠?”
“응. 방금 연락 왔는데, 사람이 너무 몰려서 움직이기 힘들다고 하시더라.”
“아하하, 여기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한구인의 열렬한 설득에 넘어가 같이 루브르 박물관으로 간 조정훈만 불쌍하게 됐다.
소문으로는 모나리자 한 번 보려면 몇 시간을 서 있어야 한다던데. 뭐, 모나리자 말고도 볼 게 흘러넘치는 게 루브르 박물관이지만.
“아.”
여러 식물 사이에 구획된 아주 자그마한 사각형의 공간.
그 안에는 어떤 종류의 튤립만이 자라나 있었다. 장하양은 그것을 보자마자 어린아이처럼 달려가 쪼그려 앉았다.
그녀는 쪼그린 상태로 성필을 보곤 포즈를 잡았다.
“이사님 저 사진 찍어주세요.”
“그래. 어, 잘 못 찍겠네.”
“제 폰 드릴까요?”
“아니, 폰 문제가 아니라…….”
성필이 피식 웃었다.
“어느 게 꽃이고 하양이인지 잘 모르겠어. 헷갈린다.”
“아하하.”
“어때, 나 좀 잘…….”
“그 말 리카한테도 하셨던 거잖아요.”
“……너희들 뭐 모여서 내가 어떤 말 했는지 기록하고 그래?”
“‘너는 식물원에 가지 마. 꽃이랑 헷갈려서 못 찾을……’.”
“미안하다 그래…….”
“그렇게 멘트 돌려쓰면서 여자 꼬셨던 거예요? 양심의 가책도 없으세요?”
“하아.”
성필은 한숨을 쉬고 사진을 찍었다.
“마음 있는 여성분한테는 이런 말 못 하지.”
“……네? 그럼요?”
“주접떠는 건 너희들한테만이야.”
“그럼 마음 있는 여성분한테는 어떡하시는데요?”
“그게 궁금해?”
둘은 식물원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느 정도 걷자, 사방이 녹음으로 뒤덮인 정원이 나왔다.
나무가 지붕처럼 하늘을 막아, 따가운 햇볕도 들어오기 힘들었다.
“안 믿을지도 모르겠는데, 나 좀 그런 면에선 숙맥이야. 뭐랄까…… 음…… 모르겠다.”
“전혀 안 믿겨요.”
“네가 그러면 사람들이 내가 되게 카사노바인 줄 알겠다.”
“하나도 안 믿겨요.”
“…….”
장하양은 웃으면서 커다란 나무로 뛰어갔다. 그녀는 나무를 등지고 또 포즈를 지었다.
성필이 사진 찍었다.
“막 고백할 때도 목소리 떨고 그러세요?”
“나는 고백해본 적이 없어.”
“네?!”
아니다, 한 번 있었지.
성필은 눈을 질끈 감으며 당시의 흑역사를 잊으려 노력했다.
죽을 때까지 안고 가고 싶은 기억이다.
성필은 평정을 가장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다 고백받아서 사귀었던 거라.”
“그, 그럼 안 좋아하시는 분이랑도 사귀고 그러셨어요?”
장하양은 계명을 받아낸 모세, 중력을 발견한 뉴턴, 언어의 의미를 깨달은 비트겐슈타인마냥 전율했다.
성필은 어쩐지 아련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그랬던 경우도 있지. 뭔가 난 분위기에 약한 거 같아. 뭔가 뭔가…… 흐름에 저항하지 못하는…….”
“절조가 없으시네요.”
“어처구니가 없네. 하양이 넌 꼭 네가 먼저 고백해서 사귀어라. 고백받고 사귀기만 해 아주 그냥. 바로 절조 없다면서 욕한다.”
“네, 그럴게요.”
“바로 인정해서 뭐라고 할 수도 없네…….”
둘은 글래스 하우스로 들어왔다.
밖보다 확연히 더웠다. 그런 만큼 쉽게 볼 수 없는 식물이 가득했다.
둘은 연못을 가로지른 다리 위에 서서 담소를 나누었다.
“이사님, 골든 레코드 약속 있잖아요. 제가 그걸 이룰 때가 오면요, 그땐 케이어스를 이겼겠죠? 50만 장이나 판 거잖아요.”
“으음…….”
성필은 쓰게 웃었다.
미래의 케이어스는 기어코 케이팝 걸그룹 꿈의 영역, 앨범 판매 100만 장에 도달하니까.
골든 레코드로는 케이어스를 이길 수 없다. 플래티넘 레코드 인증까지 가야 한다.
“꼭 안 이겨도 괜찮아. 엔터 업계가 실적 줄 세우기로 돌아가긴 하지만, 판매량이 가장 높아야만 최고의 아이돌인 건 아니니까.”
물론 성필도 판매량에서 정점을 찍으면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하양에게 과도한 부담이 될 게 싫어, 자신의 마음을 감추었다.
“그거 알아? 모차르트랑 살리에리 얘기. 지금은 모차르트가 훨씬 훨씬 훨씬 유명하지만, 둘이 살아 있었을 땐 살리에리가 훨씬 유명했었대.”
성필이 바라는 건 일시적인 성공이나 한 세대를 휩쓰는 바람이 아니었다.
역사가 새겨주는 이름을 원한다.
“그러니까…….”
“실패에 변명 붙이지 마세요!”
“어?”
“저는 이기고 싶어요. 1등을 꺾을 거예요.”
장하양은 성필의 양어깨를 붙잡고 자신을 똑바로 보도록 만들었다.
그녀의 눈썹이 날카롭게 세워졌다가, 얼마 안 가 부드럽게 풀렸다.
“저의 ‘최고’는 승리를 포함해요. 소녀, 연맹, 투쟁, 해방, 그리고?”
“……승리.”
“네, 그러니까 지켜보고 응원해주세요.”
장하양이 성필의 어깨를 놓았다. 그리고 다리를 따라 유유자적 반대편으로 건너갔다.
성필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옛날이랑 많이 바뀌었네.’
성필이 처음 그녀에게 아이돌을 권했을 때, 그녀는 ‘경쟁이 싫다’면서 거부했었다.
‘아마 자존감이 낮아서였겠지. 부족한 자기가 남들보다 나을 게 없는데, 어떻게 이기겠냐고…….’
하지만 지금의 장하양을 보라.
그녀는 당당히 1등을, 승리를 얻어내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승리를 믿고 있다.
스스로, 믿을 수 있게 됐다.
“이사님 빨리 오세요!”
“어, 지금 가.”
성필은 가벼운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 * *
“응, 다녀올게.”
백설하는 캐리어를 끌고 숙소를 나섰다.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에선 어느 정도 평정을 유지했으나, 땅을 밟곤 그럴 수 없었다.
백설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흥겨운 걸음을 밟았다.
‘여행이다.’
갑자기 멈춰선 백설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여, 여행이 아니라 일이지.’
일을 위해 프랑스에 간다.
들뜨면 안 된다.
어디까지나 프로로서…….
“…….”
백설하는 다시금 경쾌한 스텝을 밟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여행이다! 프랑스에 간다!’
백설하의 이야기가, 지금 시작되려 했다.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