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그냥 걸으면 되죠?”
“어.”
조아라는 대본을 본 후, 조정훈이 지시한 거리를 쭉 응시했다.
이유이가 스타일링한 평상복 차림의 조아라는, 사람이 적당히 돌아다니는 대낮의 거리를 그저 걸으면 된다.
그 뒷모습을 조정훈이 촬영할 것이다.
“잠만요, 다시 확인할게요. 이 장면이 내가 정장 입고 걸었던 거랑 오버랩되면서 화면 전환되는 거죠?”
“어. 과거랑 현재가 바뀌는 거지.”
장면이 러시아 혁명에서 현대로, 수채화에 물을 떨어뜨리듯 번져가며 변할 것이다.
조아라가 바꿔낸 과거로, 현재는 일상을 구가하게 된다.
물론 이곳은 러시아가 아니지만, 영상을 보는 누가 알겠는가? 아무튼 서구권 도시니.
“그럼 내가 전에 찍었던 거랑 똑같이 걸어야 해요?”
“아냐, 자연스럽게 걸어. 신이 내린 편집 기술로 어떻게든 살려줄게.”
“감독님, 나 프로거든요? 요구할 거 있으면 뭐든지 팍팍 시켜요.”
“정말 딱 맞출 필요 없어서 그래. 자연스러움이 제일 중요해.”
“음, 뭐, 그래요.”
조아라는 조정훈의 지시대로 거리 중앙에 섰다. 주변엔 보조 배우들이 조정훈의 사인을 기다리면서 거리에 멈춰 서 있었다.
사인을 주자마자 평범한 행인처럼 이리저리 움직일 것이다.
“Set, Here we go, ready, and, action!”
슬레이트가 경쾌하게 내려왔다.
시간이 움직이고, 조아라가 앞을 향해 나아가는 뒷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성필과 한구인은 조정훈의 뒤에 서서 카메라에 어떤 광경이 담기는지 보았다.
“크흡…….”
갑자기 한구인이 입을 막고 울컥했다.
“한 이사님 왜 그러세요?”
“옛날이 떠올라서…….”
한구인은 조아라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부터 현재까지, 육아일기에 붙인 사진들이 넘어오듯 빠르게 페이지가 흘러갔다.
“아라 씨도 많이 자라셨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가 18살이었죠.”
“예. 그땐 햄스터처럼 볼살도 있으셨는데, 지금은 얼굴에도 각이 사시고. 예, 어른 같으십니다.”
“어른 같은 게 아니라 어른 맞아요.”
“정말 잘 자라주셨습니다.”
아마 멤버들의 바른 성장엔 한구인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정신적으로도 그렇지만, 그가 연습생 시절부터 손수 챙겨주었던 영양 음식도 지대한 역할을 했었다.
‘한 이사님은 애들을 마음만으로 키운 게 아니라, 정말 부모처럼 교육과 음식으로 키우셨네.’
그저 예상일 뿐이지만, 한구인의 환갑잔치엔 소녀연맹 멤버들도 전부 참석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가족사진에 끼어 촬영할 수도 있고 말이다.
“아저씨, 한의사님.”
촬영을 마친 조아라가 둘의 앞으로 뽈뽈 다가왔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완벽을 확신했지만, 굳이 물어보았다.
“어땠어요?”
성필과 한구인은 서로를 본 후.
“최고였습니다.”
“자랑스럽다 아라야.”
“당연하죠.”
조아라가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인 단발을 부드럽게 쓸었다.
“내가 누군데.”
성필, 한구인, 행복해서 기절.
* * *
“어, 저쪽으로 가서 타면 돼요.”
“알겠습니다.”
장하양은 로드 매니저 안이상과 함께 비행기를 타야 하는 장소를 점검했다.
비행기에 오르는 건 장하양 혼자였으므로, 떠나기 전까지 혹여라도 착오가 없도록 만전을 기해야만 했다.
장하양은 몇 번이나 출국 장소를 점검하고 난 후에야 안심했다.
‘혼자 비행기 타는 건 처음이네.’
프랑스에 내리면 성필과 한구인이 반겨줄 거란 건 알지만, 혼자 비행기에 오른단 사실은 꽤 큰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아라베스크랑 보라색 튤립 촬영하러 갈 때 떠올려보자…….’
그때 비행기에서 어떻게 했지?
옛날에 리카가 해주었던 조언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비행기에 오르면 신발부터 벗어야 해요!’
장하양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 신발은 안 벗고 탔었어.’
좌석은 어떻게 찾았더라? 번호가 새겨져 있었나? 아니면 안내해줬었나?
큰일이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말소되어 있다.
“매니저님.”
“네, 하양 씨.”
“비행기에 타면 자리를 어떻게 찾나요?”
“저, 저도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요…….”
“못 찾으면 어떡하죠……?”
“어, 어, 회사에 연락해볼게요.”
안이상은 민경섭에게 연락하여 비행기에서 어떻게 자리를 찾으면 되는지 물었다.
[……너 진심으로 묻는 거 아니지? 뭐 다른 할 말 있는 거지?]
바보 취급받았다.
“의자 위쪽이나 의자 뒤에 보면 적혀 있을 거래요, 하하…….”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안 좋은 말 들으시고.”
“아녜요. 아티스트의 필요를 채워주는 게 매니저 아니겠습니까!”
안이상은 창피해 죽을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숨겼다.
장하양은 탑승 시간이 될 때까지 내부의 카페에서 시간을 죽였다. 팬에게서 온 DM을 쭉 둘러보던 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하양 언니 저 이번에 수능 쳐요 ㅜㅜ]
‘벌써 수능 볼 시기가 됐구나.’
요즘 들어 연습실이 살짝 시원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계절이 바뀌려는 징조였던 모양이다.
곧 완전히 가을로, 이후엔 겨울의 초입에 들어설 것이다.
[인생이 걸린 시험이 다가온다고 생각하니까 공부도 잘 안 되고 너무 긴장돼서 힘들어요. 망치면 어떡하지 해서 밥도 잘 안 넘어가요. 언니는 큰 시험 같은 걸 앞둘 때 어떻게 하시나요? 꼭 알고 싶어요….]
장하양은 그 DM을 누르고 답을 적어 내려갔다.
모든 DM은 아니지만, 그녀는 가끔 팬의 메시지에 답장해주곤 했다.
그 때문인지 장하양은 여타 멤버들에 비해서 DM을 훨씬 많이 받는 편이었다.
인터넷엔 ‘장하양 답장 모음’이란 글이 심심찮게 떠돌아다니곤 했다.
‘어디 보자, 나는 수능 때 어땠더라.’
사실,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장하양의 목표는 공부에 있지 않았었으니까.
수능장에 가서도 그냥저냥 있다가 왔다. 기억나는 거라곤, 도시락을 가져가지 않아서 배를 곯았던 정도였다.
‘수능…… 큰 시험…….’
장하양으로 따지자면, 그건 데뷔나 컴백이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케이어스가 떠올랐다.
데뷔나 컴백이 시험이라면, 케이어스는 입학 커트라인과 같은 것이겠지.
‘그럼 나는 재수한 건가.’
케이어스와 같은 시기에 컴백해서 확실하게 케이어스를 이긴 적이 없었으니까.
자, 그럼 다시 생각해서.
케이어스를 상대로 한 컴백일 때, 당연히 긴장될 것이다. 그 긴장과 불안을 없애는 법…….
[긴장과 불안이 없을 순 없어요.]
그렇다면 멘탈 관리가 가장 중요하다.
[반드시 원하는 점수를 얻을 거라고 믿으세요.]
반드시 케이어스를 이길 거라고 믿어라.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 목표에 도달할 거라고 다짐하세요.]
언젠가 케이어스를 이길 것이다.
[긴장과 불안을 각성제로 쓰세요.]
케이어스에게 패배할 때.
그랬을 때 가로 엔터의 식구들, 멤버들, 성필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할 수 있는 건 노력밖에 없어요.]
닿을 거라고 믿으면서, 스스로를 갈고 닦는 수밖에 없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하면 세상이 끝난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래, 모든 게 무너져내린다는 심정으로.
[도전하세요.]
꿈을 위해 정진한다.
꿈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승리하세요.]
이루지 못한 것에 의미는 없다.
“하양 씨, 이제 가셔야 해요.”
비행기 전광판만 보던 안이상이 말했다.
때마침 장하양도 쓰고픈 내용을 전부 썼던 터라,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다녀오세요.”
“네, 다녀올게요.”
프랑스로 간다.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돌리려는 순간, 그녀의 폰이 울렸다.
진소유였다.
[하양아 우리 앨범 나오니까 보내줄게]
[주소 알려줄래?]
[따로 주문하면 받을 때까지 시간 엄청 오래 걸릴 거야]
[주소 알려줄래?]
[구주소 말고 신주소로 알려줘]
“…….”
장하양은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넣고 비행기를 타기 위해 나아갔다.
‘오래 걸려봤자 며칠이겠지.’
마음은 고맙지만, 주소를 알려주는 건 왠지 아닌 듯했다.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 알려주지 말라고 외치는 중이었다.
‘프레싱이 밀려서 재고가 부족하기라도 한가?’
장하양은 다시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에 케이어스를 검색했다.
‘어차피 안 살 거긴 하지만. 뭐 얼마나 오래 걸린다…… 고오……?’
이게 말이 돼?
* * *
“우어, 우오, 우어어…….”
장하양의 VCR 영상 촬영이 이뤄지는 배경 중 하나. 어느 건물의 지하 주차장.
어두운 보라색의 조명 아래에는 잘 빠진 붉은색의 슈퍼카가 하나 놓여 있었다.
한구인은 그 앞에서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우오, 우오오…….”
“한 이사님 차 좋아하셨구나.”
이유이는 한구인에 대한 환상이 조금은 없어진 듯했다.
“한 이사님 취미 중 하나가 자동차 견적 맞춰보시는 거예요.”
“뭔가…… 제가 상상하던 한 이사님이랑 다르네요. 전기차 타고 계시기에 탄소 중립이랑 환경 보호에 관심 많으신 줄 알았는데. 기름차도 좋아하셨다니.”
“멋지잖아요.”
“이상한 한 이사님 관찰 그만하시고 배경 확인 좀 해주세요.”
조정훈의 요청에 이유이와 성필이 잡담을 끝냈다. 둘은 앵글 안에 잡히는 세트와 배경을 철저히 점검했다.
성필은 그 안에 담길 장하양의 모습을 상상하며 홀로 미소 짓기도 했다.
“우오, 우워어…….”
한구인은 그냥 미소만 주야장천 짓는 중이고 말이다.
차를 빌려주기로 한 차주가 이 광경을 보면 아주 살짝 소름 끼쳐 할 수도 있겠다.
“한 이사님, 이제 가셔야 해요.”
장하양을 데리러 갈 시간이다.
“아…….”
한구인은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이었다.
사탕 가게에서 형형색색의 사탕을 구경하다가, 부모가 돌아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이 같다.
성필과 한구인은 택시를 잡고 공항으로 향했다.
“내게만 보이는 별. 웃음을 만드는 유일한. 내 행복의 이유.”
한구인이 작게 노래하자 성필은 하늘이 뒤집히듯 놀람을 표했다.
그 큰 반응을 한구인이 놓칠 리 없었다. 그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제가 노래 부르는 게 그렇게 놀라우십니까?”
“노, 노래 부르는 게 놀랍진 않죠…….”
놀라운 건, 그가 부른 게 케이팝이란 사실이었다. 콧노래를 불러도 항상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 같은 걸 하던 사람이, 무려 케이팝을 부르는 것이다.
누가 놀라지 않을까.
‘슈퍼카를 보시더니 기분이 너무 좋아지신 건가?’
성필은 한구인이 걱정되기까지 했다.
“그으, 그 노래가 마음에 드시나 봐요?”
방금 한구인이 부른 건 소녀연맹 정규 1집 수록곡 중 하나인 ‘온리 스타’였다.
“예. 이상하게 가장 귀에 박히더군요.”
“한 이사님은 스탠더드한 아이돌 곡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온리 스타’는 2세대 아이돌의 청량 컨셉을 가져온 곡이다.
2세대 아이돌은 케이팝의 대중적 어법을 확립했다고도 평가받는다. 즉,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패턴을 그때 정립한 것이다.
‘대중적인 스타일은 정말 다 먹히는구나.’
한구인 같은 클래식 애호가조차도 가장 좋다고 하는 걸 보니 말이다.
‘뭐, 듣기 편하니까 당연한가. 단순하고, 기억에도 잘 남고.’
한구인은 자신의 감상을 더 들려주었다.
“멤버분들을 떠올리면 가사가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소녀연맹의 곡 중에선 드문, 전형적인 사랑 노래가 아닙니까.”
“저희 애들한테 사랑을 대입했다고요? 그래서 마음에 와닿는다고요? 무슨 짓이에요!”
점점 성필이 리카의 말투와 어조를 닮아가는 건, 한구인의 착각일까.
“가사가 팬분들께 드리는 말씀이니까요. 아무래도 저희가 콘서트 준비 중이니…….”
한구인은 흥분을 담은 숨을 오래도록 쉬었다.
“이 곡을 직접 들으시는 팬분들을 생각하니 고양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이돌이 팬을 향해 하는 노래를, 팬이 현장에서 직접 듣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감동이 있군요.”
“아, 그렇죠. 원래 노래란 게 스토리를 알면 더 가슴을 울리는 면이 있죠.”
성필은 한구인이 조금이나마 케이팝을 즐기게 되어 기뻤다. 지금까지 그에게 많이도 케이팝을 영업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케이팝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이, 택시는 공항에 닿았다.
둘은 입국장으로 가서 장하양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도처럼 나오는 무리 사이에 장하양이 보였다.
사람이 콩나물처럼 모여 있지만, 장하양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마 장하양으로 ‘월리를 찾아라’ 같은 책을 만든다면, 난이도가 너무 쉬워서 팔리지 않을 게 분명하다.
‘아니다. 굿즈로 만들기 괜찮겠는데? 책 이름은 하양을 찾아라 같은 걸로.’
자신의 생각이 재밌고, 또 장하양을 오랜만에 본 게 기뻤던 터라 성필은 미소를 지으면서 외쳤다.
“하양아!”
장하양이 성필과 한구인을 알아보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모든 멤버들이 그러하지만, 성필은 장하양을 볼 때마다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그녀가 자신에게 건네줄 인사, 지어줄 미소, 손짓과 몸짓 하나하나 상상하면서 행복에 젖어 드는 것이다.
성필의 꿈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니 당연…….
“은능흐스으.”
장하양이 고개를 대강대강 숙이면서 성의 없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성필의 꿈이, 왠지 모르게 조금 불량해졌다.
“하양 씨,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
“느에.”
“…….”
한구인이 남몰래 마음의 눈물을 훔쳤다.
‘사춘기가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