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45화 (345/760)

345화

조아라가 영상을 촬영하는 데 쓰이는 배경은 집 한 채와 낡은 공장 안이었다.

‘아니’ 뮤직비디오와 마찬가지로, 폴란드와 국경을 맞댄 독일 도시인 괴를리츠에 왔다.

리카 때보다 상황이 나은 점이 하나 있는데, 건물을 통째로 빌리다 보니 스타일링 룸을 하나 지정하여 사용할 수 있단 것이었다.

“이런 옷 오랜만이네.”

스타일링을 마치고 나온 조아라는 그리운 손길로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아니’ 뮤직비디오 때 입었던 것처럼 클래식 정장이었다.

‘유이 씨 손을 한 번 더 타서 그런가, 훨씬 멋진 거 같네.’

당시엔 시대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투박한 차림이었지만, 이번엔 이유이가 옷에 아이돌리시함을 더 첨가하였다.

몸의 곡선을 따라 달라붙는 윤곽만 보아도 그러했다.

‘품이 넓은 것보다 더 매력적이야.’

성필이 뿌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때요?”

조아라가 똑똑히 보라는 듯 여러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성필의 옆에 있던 이유이가 ‘으흥……’이라며 작은 신음을 흘렸다.

“아라 너무 멋지다.”

“언니가 옷 잘 입혀줘서 그렇죠. 아니다, 원래 내가 멋지긴 하죠?”

“응…….”

이유이의 목소리는 유리 벽 하나를 건너 들려오는 듯 붕 뜬 느낌이 있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이유이는 성필의 질문에 골똘히 생각한 후 답했다.

“그냥, 제가 아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랬어요. 제가 스타일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라 너무너무 멋져요.”

“요새 들어본 칭찬 중에 제일 좋네요.”

조아라는 더 기가 살아서 어깨가 확 펴졌다.

“아저씨는 어떤데요?”

“동의합니다.”

“당연히 동의해야죠.”

조아라가 자신의 단발을 자랑하듯 쓸어 넘겼다.

그녀는 활동기가 끝난 후로는 적당히 머리를 길렀는데, 콘서트를 맞아 단발로 돌아간 참이었다.

“언니 그 얘기 들은 적 있어요? 나 데뷔하기 전에 단발로 잘랐었는데, 그거 보고 아저씨랑 한 이사님 막 바닥에 드러눕고 난리도 아니었거든요.”

“바닥에 드러누우셨다고?”

“뭐, 그만큼 내가 기막히게 매력적이란 거죠.”

“그러게.”

이유이는 마지막으로 조아라의 의상을 점검해주었다. 재킷의 접힌 부분을 펴거나 바지의 기장을 내려주거나 하면서.

“내가 어릴 때 미드를 많이 봤는데. 거기 커리어우먼 캐릭터들 자주 나왔었어. 깎아지른 거 같은 힐 신고 딱 맞는 정장에 서류 가방. 진짜 크면 저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이유이가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오직 편의만을 추구한 간편한 옷이 눈에 띄었다.

외국에 간다는 소리에 괜히 더 간단하게 입은 까닭도 있어, 그녀가 한국에서 입던 것보다 훨씬 캐주얼했다.

“지금은 이렇게 됐네. 나도 진짜 아라처럼 태어났으면 매일 이렇게 입고 다녔을 텐데.”

“언니도 예쁜데 왜 그래요.”

“아니, 난 강하게 보이고 싶어. 막 이렇게 눈도 부릅뜨고! 난 좀 유약한 인상이라서…….”

“내가 그렇게 세게 보여요? 막 주변 다 때려 부술 거처럼?”

“치, 칭찬이었어.”

“알아요. 나처럼 되고 싶단 게 칭찬이죠 그럼.”

그냥 칭찬도 아니고, 최고의 칭찬이다.

조아라는 아이돌이니까.

누군가 자신처럼 되길 바란단 건, 우상인 아이돌이 얻어야만 하며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평가임이 틀림없다.

“나 촬영 갈게요.”

조아라가 팬서비스로 포즈를 취했다. 이유이가 꺅꺅대며 좋아했다.

조아라가 떠나간 자리에서, 이유이가 여운이 담긴 한숨을 길게 뱉었다.

“리카가 왜 그렇게 아라한테 달라붙는지 알겠어요. 아라한테 하루 종일 옷만 갈아입혀 보고 싶네요.”

“아라가 들었으면 기겁했을걸요. 근데 아라처럼 되고 싶단 거 진짜예요? 외모적인 부분 말씀하시는 거죠?”

“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비주얼 롤모델은 사장님이에요.”

어떤 부분에서 롤모델로 삼고 싶은지 쉽게 추측됐다.

“사장님이 진짜 아우라가 독보적이긴 하시죠. 기업물 드라마에서 튀어나오신 분 같아요.”

“그쵸!”

이유이가 격렬하게 반응했다.

마치 덕질하는 드라마 배우의 이야기가 나온 여고생처럼 활기가 약 1.1배 더 돌았다.

“어떻게 1년 365일 정장만 입고 계실까요? 컨셉에 잡아먹힌 걸 넘어서 컨셉 그 자체가 된 거 같으세요!”

“칭찬 맞죠……?”

“저희 회사 분위기가 개방적이잖아요? 의상도 딱히 터치 없고요. 근데, 그은데도 막 계속 정갈한 복장 유지하시면서 와……. 말투는 또 어떠시고요? 조곤조곤 선명한 목소리가…….”

저러다가 나중엔 팬레터까지 보내겠다.

‘어릴 때 미드에서 커리어우먼 캐릭터를 동경했다고 했었지.’

그 성향이 어른이 돼서까지 이어진 게 아닐까 싶다.

홍규헌에 대해 말하는 이유이의 눈빛은, 사실상 아이돌에 대해 말하는 팬과 별로 다르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외모적인 이상형은 아라고요. 아, 정말 아라 얼굴 얘기 시작하면 하루도 모자란데…….”

“유이 씨도 사장님이나 아라 못지않게 매력 있으세요.”

“……제가요?”

이유이는 다시금 자신의 차림을 확인했다.

패션이란 자아를 표현하는 것인데, 이유이의 패션에는 자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적당한 스파 브랜드의 여름철 셔츠와 바지만 보일 뿐.

“제가 이쪽 업계 있으면서 생각한 건데, 예술하는 사람들은 다들 고유한 아우라 같은 게 있어요. 뭔가 일반 회사 다니는 사람들이랑 달라요.”

“저도 굳이 말하면 일반 회사원인데요…….”

“가로 엔터의 비주얼리스트시잖아요. 회사원이시긴 해도 창조적 직업에 종사하시고, 예술하는 사람 맞죠.”

“비주얼 디렉터도 아니고 비주얼리스트는 뭐예요.”

이유이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기대감을 언뜻 숨기고서 물었다.

“저어…… 그럼 제 아우라는 어떤데요?”

이유이는 과거 스케치 연습을 할 때 유명인의 인물화를 많이 그렸었다.

마이클 잭슨. 코코 샤넬. 비트겐슈타인. 쳇 베이커. 이세이 미야케. 빌 에반스 등등.

그들을 그릴 때마다 느낀 거지만, 창조적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외모에서부터 자아가 보이는 듯했다.

‘혹시 나한테도……?’

소녀연맹의 비주얼리스트(성필이 방금 붙임)인 이유이 자신에게도 그러한 아우라가 있을까?

“휴게실에서 커피 타는 뒷모습만 흘끗 보고도 유이 씨인 거 알 정도.”

“그 정도 아우라는 누구든 다 가지고 있잖아요! 아니, 아우라가 아니라 그냥 외모잖아요!”

“왠지 침울하게 어깨 내려가 있고, 커피 마시면 자동으로 한숨이 나오고, 출근 인사 때는 미소 억지로 짓고.”

이유이는 점점 소름이 돋았다.

성필이 그녀 자신을 이토록 자세히 보고 있는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었다.

설마, 성필은 이사로서 직원들의 업무 태도를 평가하는 중인 걸까? 그래서 일부러 더 자세히 보고 있었나? 회의 때 수첩에 낙서하던 것도 들켰나?!

“유이 씨 말씀처럼 유약한 인상이 얼굴뿐 아니라 태도에서부터 확 느껴지고…….”

“이, 이제 됐어요. 그만해주셔도 돼요…….”

“그런데 펜을 잡고 종이를 보면 사람이 확 변해요.”

“……변해요? 제가요? 어떻게요?”

“별이 뜨는 거 같죠.”

이유이는 펜을 쥐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인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싸던 어두운 공기가 전부 사라지고, 사방으로 에너지가 선선한 바람처럼 흐른다.

“패션이라는 밤하늘이 내려오면 유이 씨란 별이 뜨는 거예요.”

이유이는 멍하니 성필을 보기만 했다.

“대답이 됐을까요?”

“와, 진짜구나.”

“네?”

“애들이랑 이사님 얘기하면요, 다들 이사님 말빨에 한 번쯤 다 홀려봤다고 했거든요. 이런 식으로 애들을 회사로 데려오셨어요?”

“홀리다니…….”

‘꿈에 감화되었다’란 좋은 말이 있는데 왜 굳이 ‘홀리다’란 말을 쓰는지 모르겠다.

“하루 이틀 단련해서 될 게 아닌데. 솔직히 말하세요. 그 혓바닥으로 몇십 명의 사람을 자빠뜨리신 거예요?”

“혀가 아니라 ‘진심’입니다.”

이유이가 겨우 웃음을 참았다. 참은 게 비웃음은 아니었다.

둘은 잡담을 마치고 촬영 현장에 집중했다. 이야기하면서도 카메라 안에 담기는 씬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지만 말이다.

곧 휴식 시간이 다가올 즈음, 성필이 노파심에 말했다.

“유이 씨. 혹시 케이어스 관련해서 뜬 기사 보셨어요?”

“아, 네. 사전 예약 판매량 말씀이시죠?”

이유이는 기획사 선배(경리팀 권아인)의 조언으로 연예 뉴스 알람을 설정해두었었다.

시답잖은 뉴스들이 많긴 했지만, 온갖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엔터계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라가 그걸 봤는지 안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되도록 그 주제는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촬영하는 동안 멘탈이 흔들리면 안 되니까.

‘아라는, 아니. 우리 애들은 케이어스를 라이벌로 생각해.’

처음엔 단순히 쓰러뜨려야 할 상대로 인식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저마다 성숙해진 정신으로 새롭게 라이벌상을 그려냈다.

‘설하는 에리카 씨를 존경하는 동료 아이돌로. 아름이는 민주 씨를 함께 나아가는 경쟁자로. 하양이는…… 하양이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그냥 진소유가 싫다고 했었다.

그게 발전적인 라이벌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첫인상에서 변화했으니 아무튼 그렇다.

‘내 추측이지만, 아라는 아직도 진저 씨한테 열등감을 가지고 있어.’

천성적인 자질의 차이 때문인 듯했다.

즉, 조아라에게 진저는 노력만으로 꺾을 수 없는 라이벌인 것이다.

그런 종류의 라이벌을 세우는 건, 조아라에게 떨쳐버리기 어려운 부담감을 줄 터였다.

‘이 상황에서 케이어스가 하루 만에 역대급 예약 판매량을 달성했단 게 알려지면…….’

아마 조아라는 촬영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울 것이다.

“안 말할게요. 다른 스타일링 스태프분들한테도 전달해둘까요?”

“네, 그렇게 해주실…….”

“아라야 이거 봤어?”

조정훈은 촬영 휴식 시간이 시작된 지 십수 초 만에 조아라에게 접근했다. 그의 얼굴에는 감탄과 흥미가 섞여 있었다.

“뭔데요?”

간이 의자에 앉아 땀을 식히는 중인 조아라는, 그가 내민 핸드폰으로 손을 가져갔다.

성필과 이유이가 경악하면서 그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케이어스 예판량 KS 엔터에서 공개했거든? 나 이런 거 처음 봐.”

성필과 이유이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조아라는 조정훈의 핸드폰을 받고 기사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말도 안 되지 않냐? 일주일 예약량이면 몰라도 예약받은 지 하루 만에 10만이래.”

남들에게 밝히지 않았지만, 조정훈은 예약 구매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앨범 내용물도 모르고 왜 사려는 거야?’가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물건을 사는데 물건의 가치도 모르고 사는 꼴 아닌가.

심지어 케이어스는 이제 고작 곡이 두 개인데, 그 두 곡만으로 앨범을 예약 구매하는 10만 명이 생겼단 게 믿기지 않았다.

“KS 엔터 이름값이 높긴 한가 봐.”

“음…….”

조아라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조정훈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성필과 이유이는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기다렸다.

“뭐, 많이 팔았네요.”

“더 팔리겠지?”

“그렇겠죠.”

조아라의 반응은 그게 끝이었다. 이후 이어진 촬영에서도, 멘탈이 흔들릴 수도 있단 걱정과는 다르게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케이어스의 폭발적인 성공을 듣고도 감정적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촬영이 끝나고, 그녀는 땀 때문에 찝찝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성필에게로 걸어왔다.

“아저씨, 바로 숙소 가요?”

“그래야지.”

“내일 짧게 촬영 한 번 더 있고?”

“응. 관광하고 싶으면 한 이사님한테…….”

“아녜요. 오늘은 푹 자서 컨디션 조절할래요.”

“그럴래?”

성필은 조아라를 데리고 숙소로 향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위로해야 할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란 듯 가볍게 이야기해야 할까.

성필은 끝끝내 케이어스에 관련된 주제를 꺼내지 못했다.

* * *

‘아니’ 뮤직비디오 촬영 당시 신세를 졌던 숙소에, 다시금 조정훈의 촬영팀이 묵게 됐다.

인구 5만이 될까 말까 한 작은 도시의 숙소는 한적했다. 하지만 헤진 붉은 소파 여럿이 중앙을 향해 늘어선 2층의 휴게 공간, 그곳은 한적하지 않았다.

소파의 가장 안쪽 자리를 차지한 한구인에게로 몇 명의 시선이 쏠려 있었다. 아니, 아예 모든 주의가 그에게로 향해 있었다.

“양인지 염소인지, 어떤 네발짐승이 밟으면서 다져놓은 연녹빛의 들판에 서서 저는 지평선을 바라보았습니다. 지평선 너머 오기로 했던 그녀를 기다렸습니다. 들판에 누워 명상을 하기도, 하늘의 구름을 세기도, 멍하니 풀잎 사이의 개미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밤의 커튼이 내려왔고, 저의 첫사랑도 지게 됐습니다. 예상대로 그녀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억지로 억눌렀던 기억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스, 네가 날 기억하고 있다면 다시 찾아와줘’. 밤이 푸르렀던 들판을 창백하게 비추었습니다.”

“흐끅…….”

한구인의 첫사랑 이야기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탄식과 울음이 퍼졌다.

그가 쓰게 웃으면서 좌중을 둘러보았다.

“예, 이게 제 첫사랑입니다.”

그가 독일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어느 소녀가 말했었다.

다음에 돌아올 때도 마음이 바뀌지 않았다면 이 들판을 찾아달라고.

하지만 한구인은 한국에서 독일로 돌아왔을 때, 시차와 달력 계산에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날짜를 하루 착각했다.

한구인은 하루 늦게 그 들판을 찾았다. 밤이 되도록 소녀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연락처는 몰랐나요?”

조정훈이 해피엔딩을 찾아 헤매듯 절박하게 물었다.

“예. 학교에서 가끔 얼굴이나 보던 사이라서.”

“한국으로 갈 때 번호 안 받으셨어요?”

“저는 그때 독일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웬만해선 독일과의 연을 전부 끊고 싶어 했죠. 전화번호 하나조차도 말입니다. 제게 남은 건 말로 이어진 약속 하나였습니다.”

“한 이사님 바보 멍청이…….”

성필이 기어코 눈물을 떨어뜨렸다.

메말랐다고 생각했던 연애 세포가 샅샅이 살아나는 기분이다.

“그리 말씀하셔도 할 말이…….”

“쓰레기, 한량, 한심한 놈…….”

“……?”

아무튼 소녀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어쩌면 한구인이 왔던 전날에도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왔을지도 모른다.

서로 닿지 못한 사랑 이야기는 너무나 애처롭게 다가왔다.

“학교 동창들한테 물어보는 건요?”

“조 감독님, 굳이 그래야 할…….”

“첫사랑이잖아요!”

“예, 첫사랑입니다. 아시겠지만 이뤄지는 경우가 극히 드문 일 아닙니까. 게다가 벌써 세월이 10년도 넘었으니, 사실상 남입니다. 만나도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땐 못 가서 미안해’ 정도가 최선이겠죠. 아니면 ‘너 직장 어디 다녀?’라거나 ‘결혼은 했어?’.”

“……아, 갑자기 현실감 드네.”

안타깝고도 감동적으로 끝난 로맨스 소설의 에필로그를 작가에게 듣는 기분이다.

당연히, 작가에게 두 사람의 에필로그를 샅샅이 듣게 되면 감동이 식는 법이다.

사람들이 바라는 건 10년의 세월마저 뛰어넘는 로맨스이지, 실제로 만나서 어떤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눌지가 아니었다.

특히,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 ‘그때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 같은 투로 말한다면 더 듣고 싶지 않다.

“그럼 두 번째 사랑 얘기해주세요.”

“또 저입니까?”

한구인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왜 멤버들이 한구인의 강의를 좋아하는지 여실히 알겠다.

성필과 다른 이들은 기어코 세 번째 사랑 이야기까지 들은 후 각자의 방으로 떠나갔다.

성필은 씻고 침대에 누워서도 한구인의 이야기가 쉽사리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연애 얘기일 텐데.’

말하는 방법의 문제일까? 한구인의 연애 이야기는 세상에 다시 없을 로맨스 소설 같았다.

기승전결이 완벽하며, 사람의 애를 태우거나 행복감에 젖게 할 파트를 적절히 삽입했었다.

‘……한 이사님한테 아이튜브 해보라고 할까?’

한구인의 얼굴을 섬네일로 박아놓고 제목으론 ‘사랑은 아픈 겁니다’라고 적어놔도, 순식간에 구독자를 끌어모을 수 있을 듯하다.

소녀연맹 채널에 올린 리카가 한국사를 배우는 시리즈에서도, 심심찮게 한구인의 팬을 자처하는 이들이 몰려오곤 하니까.

‘나중에 가로 엔터가 성장하면 MCN 쪽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건…….’

됐다.

성필은 먼 미래에 대한 망상을 집어치우고 조명을 껐다. 그리고 편안히 누워 잠을 청했다.

“…….”

잠이 안 온다.

‘아라는 뭐 하고 있을까.’

어쩌면 방 안에서 케이어스만 검색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한구인의 첫사랑 이야기도 들으러 오지 않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그녀의 상태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성필은 그녀에게 연락해볼까 하다가, 괜히 물집을 건드리는 기분이라 그만두었다.

대신 뷔라이브를 켰다.

소녀연맹의 라이브 머신인 리카가 방송 중이었다. 그녀는 연습실을 배경으로 팬들과의 소통에 열을 올렸다.

[이번에 저희가 진짜 진짜 큰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어요! 기대해도 좋아요!]

‘콘서트 한다고 아예 광고를 해라.’

딱히 숨겨야 할 일은 아니지만, 계획이 유출되는 건 기획자 입장에서 달갑진 않다.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게 계획이다.

설레발 떨면서 ‘이 시기에 한다!’라 했다가 못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면 정확한 타이밍을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획사는 팬들로부터 욕먹게 되는 것이다.

[아아, 저희 공백기가 길긴 하죠! 최대한 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할게요! 저도 인민이들 빨리 보고 싶어요! 아, 지금도 보고 있네요! 뽀뽀 쪽!]

성필은 화면으로 다가오는 입술을 보고 피시시 웃었다.

원래 리카가 스포일러성 발언을 하면, 매니지먼트팀이 응급 구조 요원처럼 달려와서 그녀를 막곤 했었다.

그런데 이젠 하지 않는다.

아마 카메라 앵글 밖에선 민경섭과 다른 매니저가 심드렁히 앉아 있지 않을까 싶다.

[아.]

청산유수처럼 말하던 리카의 입이 멈췄다. 채팅창에서 어떤 질문을 보아서였다.

[라이트포워드: 케이어스 예판량 보셨나요?]

어느 아이돌의 라이브에 들어와서 다른 그룹을 언급하는 건 매너가 아니다.

심지어 앨범 성적을 언급하는 건, 더더욱 매너가 아니다.

평소 같았으면 리카도 무시했겠지만, 케이어스란 글자를 도저히 보고 넘기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그냥 다른 채팅을 읽어주었다.

[뒤에 귀신 있다고 하는 거 식상해요! 저도 제 화면 볼 수 있다구요!]

그렇게 말한 주제에, 리카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성필은 리카의 라이브를 조금 더 보다가, 도저히 가만있기가 어려워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방을 나서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바람을 쐬고 싶었다.

‘케이어스가 더 빠르게 성장했어.’

아마, 전생과는 다른 컴백곡인 ‘가이아’ 때문일 것이다.

케이어스는 데뷔 2~3년 차까지는 케이팝의 문법에 충실한 곡을 만든다. 그 이후에 본격적으로 서구권을 노리고자 팝의 스타일을 대폭 채용한다.

이미 아시아는 정복한 거나 다름없으니, 아예 서구를 노렸던 것이다.

‘그런데 가이아는 뭐랄까…… 훨씬 세련되고 팝적이었지.’

KS 엔터의 대표적인 아이돌이 될 케이어스.

그녀들은 소녀연맹의 ‘아라베스크’에 워터 멜론 차트 1위를 빼앗긴 적이 있었다.

케이어스와 KS 엔터의 팬덤을 고려하면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다.

‘가이아는 한국에선 대중적으로 어필하기 어려웠지만 해외는 달랐던 건가.’

전생에선 그룹의 초반기를 철저히 아시아에 맞추었던 케이어스가, 현재엔 그야말로 글로벌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것도 내가 바꾼 미래…… 겠지?’

무엇이 트리거였을까.

어쨌거나, 성필이 격발시킨 트리거는 케이어스를 더욱 거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성공은…….

‘우리 애들한테 훨씬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어.’

최고의 아이돌. 그건 성필이 멤버들에게 박아 넣은 강박감의 이름이었다.

너무나 고맙게도, 소녀연맹 멤버들은 진심으로 최고를 노리고 있다. 그래서 좌절과 실망이 여타 아이돌보다 훨씬 깊을 것이다.

‘최고의 아이돌이 될 수 있다고 독려하는 데도 한계가 있을 거야.’

성필조차 그걸 확신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시점에, 하루 만에 예판량이 10만이라고? 말이 돼? 정규 앨범이란 걸 고려해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녀연맹이 그만한 팬덤을 형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데뷔 3년 차? 5년 차?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태생적인 백그라운드의 차이가…….’

무시하려고 해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소녀연맹과 케이어스의 발밑에 놓인 발판의 높이는, 그녀들이 경기장에 들어설 때부터 달랐다.

케이어스가 훨씬 높이 서 있다.

‘앨범을 더 많이 판다고 더 좋은 가수인 건 아니지. 그런데, 그렇긴 한데…….’

그건, 최고의 아이돌을 만들겠단 목표를 가진 인간이 하기엔 너무 궁색한 변명 아닌가?

‘그래, 할 수 있어.’

배경의 차이가 무언가.

이 업계의 승리자는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드는 쪽이다. 시장은 반드시 더 나은 쪽에 반응하게 되어 있다.

대기업의 것이든 중소기업의 것이든 가리지 않고, 대중은 더 좋은 쪽에 열광한다.

성필은 대중을 열광케 할 것이다.

“음?”

옥상 문을 열었더니 사람이 있다.

조아라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난간에 팔을 걸치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거 백설하가 서 있던 곳에 그대로 서 있다.

“아라야?”

성필의 목소리가 절로 떨려왔다.

세이코에게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였다.

그에 희미한 웃음이 돌아왔다.

“왤캐 말을 떨어요. 나도 세이코처럼 할까 봐요?”

세이코가 떠오른 건 맞지만, 조아라의 발언은 문제의 소지가 매우 많았다.

‘나도 세이코처럼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릴까 봐요?’는, 누가 들어도 그녀를 멸시하는 기색이 강했다.

성필이 즉각적으로 혼내려 하던 순간.

“아, 잘못했어요. 생각해보니까 할 말이 아니었네.”

조아라가 뒤로 돌아 성필과 마주하며, 그보다 빨리 사과했다.

성필은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서서히 그녀의 옆으로 갔다.

“왜 혼자 분위기 잡고 있어?”

“관광이에요.”

“피곤하다면서.”

“아저씨,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거 굉장히 기분 안 좋거든요? 사람 마음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할 수도 있지.”

“설하도 여기서 너처럼 야경 봤었는데.”

“뭐야. 또 둘이서만 분위기 잡고 하하호호 웃고 떠들었어요?”

성필은 조아라의 기분을 파악하려 애썼다. 아마 케이어스의 일로 심란할 텐데, 그녀는 평소와 같았다.

오히려 더 여유가 보이기도 했다.

‘일부러 꾸며내는 건가.’

성필은 신중하게 말을 골라 그녀를 위로하려 했다.

“신경 안 써요.”

그런데 성필이 뭐라고 하기 전에 조아라가 말했다. 마치 그의 생각을 훤히 꿰고 있단 투였다.

“케이어스 그거 말하려는 거죠? 아저씨 뜸 들이는 게 딱…….”

“너 단발 생각보다 안 어울린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뭐요?”

“역시 어릴 때만 어울렸던 건가. 리즈 시절이 벌써 지나버렸네.”

“하여튼…….”

조아라가 어린애에게 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기 싫어하는 게 걍 애네. 아니, 지기 싫어하는 게 걍 리카네.”

어린애와 리카를 이음동의어로 사용하는 조아라였다.

리카가 있었으면 ‘아타시(나)는 어린애가 아니야!’라고 외쳤을 것이다.

“케이어스 얘기하려던 거 맞잖아요.”

“……어, 맞아.”

“어른이 이러면 안 되죠.”

“네가 ‘다 안다’는 거처럼 말하는 게 열받아서 그만…….”

성필은 타인이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

타인에게 읽히고 싶지 않다.

타인에게 묶이고 싶지 않다.

조아라에게 구속당하기 싫…….

……어쨌든 그렇다.

“진짜 신경 안 쓰여?”

“뭐, 완전히 안 쓰인다고 하면 거짓말이고요. 옛날만큼은 아니에요.”

진심인 듯하여, 성필은 마음이 놓였다.

조아라에게선 여유가 물씬 풍겼다.

아이돌 생활이 길어지면서 스스로 멘탈을 관리하는 법을 터득한 듯했다.

열등감이 몸을 태우도록 두는 대신, 바람에 날려 흩어지도록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조아라가 이야기를 이었다.

“타고난 배경 차이인데.”

“……어?”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니까, 뭐어,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성필은 말문이 막혔다.

이 기분을 스스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진득한 어둠이 가슴을 타고 혈관 곳곳에 퍼지는 기분이다.

‘아, 그거구나.’

성필은 아버지의 기분을 느꼈다.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아버지의 기분을.

다른 집 자식은 온갖 호화스러운 배움이나 놀이를 누리는데, 자신은 사정 때문에 그렇게 해줄 수가 없다.

자식이 그런 애들을 들먹이며 화내는 시기가 지나가고,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게 됐다.

인정해서, 이렇게 말한다.

“신경 안 써요.”

어차피 바꿀 수 없으니까.

성필의 몸 전체에 진득한 무력감이 퍼졌다.

‘내가 바란 건…….’

성필이 바란, 열등감을 극복한 멤버들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어, 응, 어쩔 수…….”

심한 감기에 걸리기라도 한 듯 목이 턱턱 막혀온다. 숨 한 번 쉬는 데도 큰 힘이 들었다.

성필은 겨우겨우 말을 마쳤다.

“어쩔 수 없지, 응…….”

대형 기획사의 아이돌이 중소 기획사의 아이돌보다 더 주목받으며, 더 빠르게 성장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전통 있고 거대한 브랜드의 제품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은 것처럼 말이다.

업계를 뒤흔들 신흥 강자가 나타났다고 해도, 사람들은 전통적 브랜드를 향한 충성심을 유지한다.

‘게다가 큰 회사는 이름값에 걸맞은 결과물을 내니까.’

승자는 승리에 익숙해진다는 건, 단순히 감각적인 면을 말하는 게 아니다.

승자는 승리함으로써 노하우를 축적한다.

KS 엔터가 그러했다.

1세대 아이돌을 출발시킨 그들은 물론 쓰디쓴 실패를 수없이 맛보았었다. 하지만, 그만큼 남들보다 앞섰기에 많은 성공을 축적해왔다.

‘사람들은 그 성공을 믿는 거야.’

그래서 케이어스의 팬덤이 그토록 빠르게 커진 것이다. 또한 팬덤이 커질 정도의 퍼포먼스 퀄리티를 보여주기도 했다.

‘어쩔 수 없다…….’

조아라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하지만 성필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녀가 지레짐작 자신의 한계를 결정짓고, 패배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게 아닌가 해서.

더 끔찍한 건, 자신이 어떻게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사실이었다.

‘희망적인 소리를 해봤자, 아라는 씩 웃으면서 적당히 답하겠지…….’

성필은 신아름을 위해 20대부터 따로 교육 서적을 많이도 읽었더랬다. 그래서 현재의 조아라를 표현하는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자식에게는 부모가 더 이상 슈퍼맨으로 보이지 않는 시기가 찾아온다.

부모가 보통 사람과 다름없단 걸 깨닫는 순간, 자식은 세상에 순응한다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고들 한다.

세상이 자신을 때려도 구해줄 슈퍼맨은 없으니까. 파도에 뺨을 맞고도 태연한 법을 배우는 것이다.

“아저씨, 중소 회사에서 톱을 찍는단 건 엄청 어려운 거죠?”

성필은 조아라를 마주하는 게 힘들었다.

연습생을 만든단 건, 어린아이를 붙잡아 규제와 통제 속에 넣는 행위다.

성필은 적어도 그 어린아이에게 꿈을 꾸게 해주고 싶었다.

인간이 미쳐버리기 십상인 제약 속에서 사는 연습생, 아이돌에게 꿈이라도 한없이 꾸게 해주길 바랐는데…….

“어렵, 지…….”

그 어린아이는 꿈이란 하늘에 천장을 만들었다. 자기가 딛고 선 땅에 비해 너무나 높은 하늘을 보는 게 괴로워서.

“그래도 아라야 너희는…….”

“그래도 아예 없는 일은 아니고요.”

조아라가 성필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딱 한 번 있었다고 했잖아요.”

WTP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젠 조아라가 모델로 삼기엔 너무나 커다란 그룹이다.

처음 성필이 가로 엔터로 들어왔을 때, 홍규헌은 ‘WTP만큼만 돼도 좋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소녀연맹이 WTP만큼만 되면 홍규헌이 물구나무를 서서 발로 박수칠 것이다.

‘역사상 딱 한 번 일어났던 기적.’

성필이 고개를 끄덕여 조아라의 질문에 긍정해주었다.

“아저씨.”

“응.”

“내가 방송에서 다른 아이돌들이랑 얘기할 때마다 물어보는 게 있어요. 뭐냐면, 목푠데요. 다들 음방 1위 하면 좋겠다, 차트 1위 하면 좋겠다, 대상 받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해요. 아니, 진짜 신기한 게…….”

조아라는 다섯 살이 공룡에 대해 말하듯 흥미를 잔뜩 담아 이야기했다.

“단 한 명도 그룹 자체로 탑을 찍겠다, 최고가 되겠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아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차트 1위나 음방 1위는 훨씬 현실적이니까, 할 수 있고.”

“아라야, 너는…….”

“네, 최고의 아이돌이 될 거라고 믿어요.”

조아라가 싱그럽게도 웃어서, 성필은 숨을 삼키면서 입을 다물었다.

여름의 야경이 순간 자리를 비켜 그녀만 세상에 남길 정도로 아름다웠다.

진정한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데 있다.

그녀의 눈동자에 꿈이 비쳤다. 세상 무엇보다 아름다운, 형태가 없는 보석이.

“다른 아이돌들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 진짜 신나거든요? 내가 얼마나 신나는지 모르죠?”

“신나?”

조아라의 눈에 박힌 보석이 더 찬란히 빛났다.

“최고를 꿈꾼다는 게. 당당하게 최고가 되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게. 그리고 케이어스처럼 당연히 자기들을 최고라고 여기지 않는 게. 그게, 나는 아저씨한테 참 고맙고 그래요.”

처음 만났을 땐 성필을 꿈에 부푼 소리만 하는, 연습생에게 허황된 미래만 늘어놓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가축을 좁은 우리에만 가둬두면 스트레스 때문에 폐사하는데, 그것을 막으려고 사료에 조금씩 환각제를 섞여 먹이는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제 와선 그에게 감사한다.

“진짜, 고마워요. 아저씨 꿈을 같이 꾸게 해줘서요.”

성필은 더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웃긴 게, 성필은 감동하여 울면서도 변명을 떠올렸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감수성이 예민해졌네. 아까 한 이사님 첫사랑 얘기 들었을 때도 그렇고.’

성필은 코를 훌쩍이면서 눈물을 닦았다. 훌쩍임에 웃음이 담겨 있었다.

“아 뭔데.”

조아라가 성필을 배려해선지, 분위기를 익살스레 바꾸려 목소리를 쾌활하게 높였다.

“뭔 말을 못 하겠네. 아저씨가 눈물 흘릴 입장이에요? 몸 써서 힘든 건 우린데.”

“응…… 연습하느라 많이 힘들지……?”

“그쵸. 아아, 아저씨가 양복 입고 시에이스 춤춰주면 기운 날 거 같은데.”

성필은 이번엔 눈물 대신 웃음을 참지 못했다.

‘18살 때보다 엄청 많이 컸구나. 사람을 그럴듯하게 위로할 줄도 알고.’

그래, 어린애가 위로해주는데 계속 눈물만 뽑아낼 수는 없다.

성필은 눈가를 훔쳐내고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안 해줘. 나 진짜 너무 멋져서 너 반한다고. 그러면 큰일이잖아.”

“뭐, 그럼 어쩔 수 없고요.”

“웬일로 쉽게 포기하네. 우리 아라, 드디어 어른이 됐어?”

“반하면 큰일이라면서요.”

조아라가 다시금 훈훈한 미소를 품었다.

“그쵸,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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