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뭐, 그렇다네.”
성필은 되도 않는 리카 흉내를 그만두었다.
“앗, 하양 언니인가요! 언니!”
리카가 성필과 얼굴이 맞닿을 듯 다가와 카메라 앵글 안에 본인을 구겨 넣었다.
그녀가 반갑다며 손을 마구 흔들었지만, 영상 통화가 아니라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에에, 영통이 아니네요! 언니 얼굴 보고 싶어요! 영상으로 바꿔도 되나요!”
[이제 끊을 거야.]
“매정해!”
[리카, 과음하지 마.]
“아타시(저)를 뭘로 보는 건가요! 저는 어른이라구요! 주량 정도는 조절…….”
[야유회.]
“그거느은…….”
리카는 자고 일어나서까지 취해 있었다. 때문에 억지로 토까지 하고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그때 누가 너 업어가도 몰랐을걸? 조심해.]
“하, 하이(네).”
왠지 장하양의 말투가 위압적이었기에, 리카는 자기도 모르게 주눅 들어 답했다.
[술 다 마시면 사진 찍어서 나한테 보내. 멀쩡한 거 인증 안 하면 계속 전화 걸 거야.]
“그렇게까지?! 저는 얼마나 신용이 없나요…….”
[아하하, 농…….]
“……농담?”
[농담 아냐.]
통화가 끝나고, 리카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녀가 애처로이 투정 부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멤버들이 저를 못 믿는 거 같아요……. 어린애 같은 말투가 문제일까요……?”
“일단 못 믿는 거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못 믿는 거 맞고. ‘어린애 같은’이 아니라 어린애야.”
“히도이(너무해)!”
리카가 울상을 지으면서 성필의 어깨를 토닥였다. 하지만 곧 기운을 차리고, 홀로 들어왔을 때처럼 위풍당당하게 스카치위스키 두 병을 흔들었다.
“스코틀랜드에서 마시는 스카치위스키예요! 원산지라구요!”
“아, 스카치가 스코틀랜드란 뜻이었어?”
“스카치 자체가 스카치위스키를 뜻하는 말이에요!”
리카는 한구인에게 배운 영어를 설명할 기회가 오자 콧대가 더욱 높아졌다.
“스코틀랜드를 뜻하는 형용사는 스코티시예요! 스카치를 ‘스코틀랜드의’란 의미로 쓰면 실례예요! 또 다른 형용사는 스콧…….”
“와아, 리카 너무 똑똑해.”
“좀 들어주세요! 제 공부의 성과를 인정해달라구요!”
“정말 똑똑하단 뜻이었어. ‘이코노미스트’ 구독한 보람이 없지 않은데?”
딱히 이코노미스트 구독과는 상관없었다.
단지, 옛날에 ‘아니’ 촬영 때 한구인에게 들은 지식이었다. 스코틀랜드인에게 실례를 범하지 말라면서 한구인이 가르쳐주었었다.
“……당연하죠! 저는 똑똑해요!”
하지만 리카는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이코노미스트’ 60만 원 구독으로 더럽혀진 명예를, 이렇게나마 조금씩 씻고 싶었기에.
“그런데 갑자기 술은 왜?”
“스카치의 원산지에 왔는데 안 먹으면 손해잖아요! 자자, 빨리!”
리카는 성필의 등을 그의 방이 있는 2층으로 떠밀었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분위기를 살폈다.
“1인실이라…… 호화스럽네요!”
“남는 방이 없다는데 어떡해.”
“이럴 때는 아티스트를 배려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럼 여기 네가 쓰고 내가 유이 씨랑 한방 쓸까?”
“불순해요!”
리카가 스탠드 조명의 조도를 조절하면서 최대한 그럴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려 노력했다.
방을 이곳저곳 뛰어다니는 리카를 보자니, 성필은 집 안을 뽈뽈 돌아다니는 소형견이 떠올라 무심코 웃음을 띠었다.
“됐어요!”
리카가 세팅을 완료했다.
메인 형광등이 꺼진 방 안에는 은은한 주황색 조명만이 사방을 밝히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엔틱한 의자가 작은 원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어떻게 위치를 알았는지, 리카는 찬장에서 위스키 잔 두 개를 꺼내어 테이블에 두었다.
“안주도 없이 술만 마셔?”
“제가 다 준비했죠!”
리카는 뒷주머니에서 작은 다크 초콜릿 박스를 꺼냈다.
“한 이사님이 초콜릿은 스카치에 어울린다 손나 바카나(그런 바보 같은)?!”
박스를 까보니 초콜릿은 죄다 녹아 있었다.
여름날, 리카의 바지 뒷주머니에 들어 있던 초콜릿은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녹아버린 것이다.
“내 완벽한 계획이…….”
“그냥 그거 먹자. 녹은 게 더 맛있잖아.”
성필이 녹은 초콜릿을 하나 꺼내서 입 안에 넣었다. 당연하게도 손에 끈적하게 묻어버렸다.
티슈에 닦을까 하다가, 성필은 그냥 핥아서 먹었다.
“엣찌(음란)!”
“별게 다 엣찌하다.”
둘은 마주 보고 앉아 서로의 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잔을 부딪치자마자 리카가 원샷으로 스카치를 위장 안에 들이부었다.
“우억, 으윽…… 이게 본토의 맛인가요!”
“진짜 명 줄이려고 작정했네.”
누구한테 배운 것인지, 리카는 술을 무조건 한입에 마셨다.
아무리 도수가 높은 양주 스트레이트도 거리낌 없이 털어 넣는다.
참으로 미래가 걱정된다.
성필은 스카치를 천천히 음미했는데, 딱히 맛있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리카, 이거 얼마야?”
“한 병에 2만 원이요!”
“이런 건 한국에서도 마실 수 있겠다…….”
나름 비싼 걸 골랐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싸구려 중에서도 싸구려였다.
“내가 지갑 줬잖아. 이왕 외국에 왔으니까 좋은 걸로 사지.”
“나중에 정산받으면 다 갚아야 하잖아요! 한 이사님이 신용카드를 흥청망청 쓰는 사람은 좋은 꼴을 못 본댔어요!”
“아하, 내가 신용카드구나?”
“그리고…….”
리카는 스스로 잔에 술을 따라 다시금 원샷했다. 그녀의 뺨이 벌써부터 분홍빛을 띠기 시작했다.
“술값이 문제인가요! 같이 마시는 사람이 문제지!”
“오, 너답지 않게 그럴듯한 말을 하네?”
“같이 마시는 사람이 ‘문제’라구요!”
성필이 크게 웃었다.
“너 정말 일본인 맞아? 한국어로 언어유희도 아무렇지 않게 하네.”
“별거 아니에요! 한국에서 4년 넘게 살았으니까요!”
자신만만히 자신의 외국어 구사력을 자랑하던 리카는, 갑자기 기쁨이 끊긴 듯 표정이 굳었다.
“4년을 넘었네요…….”
성필은 잔을 비우고 병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리카가 더욱 빨라서, 어느새 성필의 잔을 채웠다.
“괜찮은데.”
“저도 채워달란 뜻이에요!”
“리카, 상담할 거라도 있어?”
“……헤헤.”
리카는 일단 헐거워진 웃음으로 답했다. 그리고 팔짱을 끼면서 짐짓 고민하는 티를 냈다.
어차피 이 방에 들어오기 전에 상담 내용을 정해뒀을 거면서 괜히 시간을 끈다.
“음, 이사님!”
“응.”
“팬분들은 콘서트에서 저희한테 어떤 걸 바랄까요!”
“너희를 직접 보는 거지.”
팬들이 콘서트를 왜 가겠는가?
항상 텔레비전이나 아이튜브, 라이브 방송에서만 보던 아이돌을 실물로 보기 위해서다.
원본의 아우라를 느끼기 위해서.
“그것뿐인가요?”
“다른 게 있어?”
“저희는…… 아티스트잖아요.”
창작물로써 대중을 만족시키는 직업이다.
그러니, 아티스트는 대중이 기대하는 퀄리티 이상의 물건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쯤에서 성필은 리카의 고민을 잡아낼 수 있었다.
“네 퍼포먼스가 팬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걱정하는 거야?”
“……하이(네).”
“정확히는, 리카 네 솔로 디제잉 무대?”
리카는 아틀라스 조진만 사장과의 미팅에서 적극적으로 디제잉 무대를 주장했었다.
무려 일본 앨범에 포함되어 있던 카와이 베이스 곡 ‘러브 미러’로 말이다.
그에 조진만이 정색하며 답했었다.
‘리카 씨, 카와이 베이스는 여타 EDM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현대의 EDM은 독자적인 장르로서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지 오래이다.
하지만 온전히 예술 장르로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다. EDM이 생겨난 근원적인 이유는, 누가 뭐라 해도 클럽에서 몸을 흔들기 위한 것이니까.
‘춤을 추기 위해 만들어진 게 EDM입니다. 그에 비해 카와이 베이스는 감상용이죠. 콘서트에서 하기엔 위험부담이 클 겁니다. 무엇보다, 카와이 베이스를 스테이지에서 관객에게 시연하는 건 전대미문…….’
이라고 말하는 조진만에게, 리카는 카와이 베이스를 디제잉하는 퍼포먼스 영상을 보여주었었다.
‘이게 왜 있냐……?’
리카가 보여준 건 미국의 코믹콘이라는 행사였다. 그곳에 초대된 카와이 베이스 DJ가 관객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디제잉을 하고 있었다.
그 뒤로도 리카는 난색을 표하는 조진만과 가로 엔터의 프로듀싱 팀원들을 열렬히 설득했었다.
‘정말 세상은 제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넓군요…….’
해탈한 표정으로, 조진만도 결국엔 세트리스트에 ‘러브 미러’를 넣는 걸 허락했었다.
당시의 리카는 뛸 듯이 기뻐했었지만…….
“이제 와서 무서워진 거야?”
“…….”
리카는 대답하지 못했다.
왠지 성필이 다그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히, 성필은 리카를 다그치거나 비꼬는 게 아니었다.
“네가 하고 싶잖아. 아티스트로서의 네가 그 퍼포먼스를 보이고 싶은 거잖아. 확신이 있는 거 아니야?”
“……저도 어느 정도 믿음은 있어요.”
리카가 도리질 쳤다.
“믿음이 있어요!”
그녀는 우울했던 분위기를 날려버리고 다시금 텐션을 높였다.
용기를 위해선지, 성필이 잔에 따라준 것보다 술을 더 따라서 또 원샷 했다.
“인민이들은 저희의 음악을 좋아해 주시기도 하지만, 저희 자체를 좋아하는 거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아이돌은 콘서트나 팬 미팅에서 본인의 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코너를 꼭 집어넣는다.
동물 잠옷을 입고 귀여운 춤을 춘다던가.
본인의 캐릭터성을 완전히 뒤집은 의상을 입는다던가.
‘그건 아이돌이 일관된 태도가 요구되는 아티스트와는 다른 지점이지.’
막말로, 팬들은 아이돌이 무대 위에서 십수 분 동안 만담만 떨어도 자지러지며 좋아할 수 있는 이들이다.
“맞아, 인민이들은 리카가 뭘 하든 좋아할 거야.”
“하지만, 그런데요, 그렇게 생각해서 무대에 오르는 건…….”
너무 무르지 않은가?
아이돌로서는 어떤지 몰라도…….
“아티스트가, 본인의 성과에 확신과 고민 없이 무대에 오른다는 건…….”
카와이 베이스 디제잉으로 솔로 무대를 꾸민다. 아이돌로서는 꽤 성공적인 퍼포먼스가 될 터였다.
하지만 아티스트 이시카와 리카는 그 무대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
“아타시(저)는 가끔 생각해요. 제가 분수에 맞지 않는 너무 큰 사랑을 받아서, 혹시 머리가 훽 돌아버린 게 아닌가 하구요…….”
“리카…….”
“그렇잖아요!”
리카는 본인을 희극의 주인공으로 만들기라도 하려는 듯, 괜히 더 우습단 티를 냈다.
“케이팝 아이돌인데 카와이 베이스를 만들고 있어요! 그걸 앨범에 넣었어요! 내가 만든 곡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녀요! 장르가…… 제가 좋아하지만…… 호응은 별로 없을 장르를…….”
요컨대, 리카는 자신의 취향과 대중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밀어붙여서 카와이 베이스 디제잉이라는 희대의 무대를 따냈지만, 정작 선보일 날이 다가오니 자신감이 없어져 버렸다.
‘두렵겠지.’
막상 디제잉을 하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고 벙찐 관객들의 표정을 상상하면.
침묵이 돌아오는 게 너무나 무서울 것이다.
소수의 인원만 모아두고 디제잉을 했던 팬미팅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어쩌면 제가 하려는 일은요. 케이팝 페스타에 재즈 세션이 출연한다던가, 재즈 페스티벌에 록밴드가 나오는 거랑 비슷하지 않을까요…….”
“케이팝 페스타에 나오게 된 재즈 밴드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네?”
“어떻게 나오게 된 걸까?”
리카의 눈동자에 의문이 마구마구 떠올랐다.
“왜 나왔을까. 그리고, 왜 거절하지 않았을까?”
“…….”
“아마 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겠지. 재즈로, 자기들이 사랑하는 그 음악으로, 설령 원치 않는 관객들이 객석에 쭉 깔려있다고 해도…….”
음악으로 마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만큼 자신의 음악을 믿고 있으니까.
그에 리카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리카 네가 전에 ‘러브 미러’ 만들고 나서 그랬잖아. 그 곡엔 너의 코코로(마음)와 인텐시티가 들어 있다고. 정호환 이사님이랑 엘릭 씨도 너한테 말씀해주셨는데, 벌써 잊었어?”
“음악은 마음과 의지를 전달하는 거…….”
“맞아. 마음과 의지는 전해지고 싶어. 그래서 음악이란 형태를 입고 태어난 거야. 어쩌면 글일 수도 있었고, 그림일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엔 음악으로 태어났어.”
리카가 그러길 바랐으니까.
“네가 낳은 자식을 부끄러워하면 안 되지.”
“안 부끄러워요!”
“그럼?”
“자랑스러워요! 제가 만들었단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래, 자랑스러우니까…….”
성필이 대답을 요하듯 말을 끌었다. 리카는 아까보다 훨씬 자신감에 차서 답했다.
“보여주고 싶어요!”
“무대에서 하기 부끄러운 곡이었으면, 과거의 네가 앨범에 넣자고도 안 했을 거야. 나도 허락 안 했을 거고. 자자, 마지막으로 이미지 트레이닝해보자!”
리카는 술을 너무 빨리 마셨기 때문인지 눈이 게슴츠레 풀려 있었다.
성필이 손뼉을 짝짝 쳐서 리카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리카, 네가 록 페스티벌에 나가게 됐어. 아무튼 나가게 됐어. 사람들이 엄청 많아. 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으음…….”
“사람들이 욕하면 어떡하지? 돌을 던지거나 야유를 퍼부으면 어떡하지? 괜히 나왔나?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그렇게 생각해?”
“아니요!”
절대 그러지 않는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이라면, 리카의 머릿속엔 단 하나의 결심밖에 없을 것이다.
“완벽한 퍼포먼스를 펼칠 거예요!”
처음부터 자신의 곡을 믿고 있을 것이기에, 문제는 그 곡을 퍼포먼스로 완벽히 펼칠 수 있느냐이다.
“우리 리카, 아티스트 다 됐네.”
“중요한 건 무대가 아니에요! 설령 전쟁터의 한복판이라도 사람들의 마음에 닿을 퍼포먼스를 보여줄 거예요! 총알을 무서워해선 퍼포먼스에 집중할 수 없어요!”
“전장의 아이돌이네. 그래, 그런 마음가짐이야.”
소녀연맹의 팬이니까 무엇을 하든 귀엽게 봐줄 것이다. 리카는 그런 무른 마음가짐으로 무대에 오를 생각이 아니었다.
무대에 오른 이상 관객들을 완벽히 만족시킨다. 그럴 각오며, 그런 확신으로 디제잉 퍼포먼스를 준비했었다.
“박 이사님은 진통제 같아요! 박 이사님이랑 얘기하면 불안이 없어지니까요!”
“스카치를 한 병이나 비우니까 불안이 없어지지.”
“에헤헤, 으헤, 헤헤헤.”
불안에 더해서 정신도 없어진 듯했다.
어쨌거나, 성필은 자신의 상담이 효과가 있는 듯 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첫 콘서트니까 부담이 될 만도 하지.’
솔로 무대는 부담을 멤버들과 나눌 수도 없다. 심지어 그곳에서 선보이는 게 자작곡이며, 본인이 직접 디렉팅한 퍼포먼스와 무대라면.
모든 짐은 리카 홀로 지는 것이다.
무거운 짐이지만, 그렇기에 책임감 강하게 더욱 노력하게 된다.
“근데 좀 걱정이긴 하다.”
“뭐가 말인가요!”
“초콜릿이랑 술을 이렇게나 먹으면 살찔 텐데.”
“아앗! 사람 신체에 관한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프로듀서로서 하는 말이지. 칼로리가 얼마야.”
“저는 말이죠오!”
리카가 풀어진 혀로 강력히 주장했다.
“모든 아이돌 중에서 가장, 가장 가장 관리를 열심히 하는 편이라고 생각해요! 보세요!”
갑자기 리카가 티셔츠 끝을 잡고 위로 확 올렸다.
그녀의 탄탄한 배가 확 드러났다.
성필이 놀라서 시선을 피할 새도 없었고, 딱히 시선을 피할 필요도 없었다.
리카의 배야 그녀가 아이돌리시한 복장을 입을 때마다 항상 노출하던 것이었으니까.
“이 어중간한 11자가 보이시나요!”
“어중간하긴 하네.”
“앨범 비활동기에 이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구요!”
“곧 콘서트니까 유지해야지.”
“트레이너님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어요! 선명하게 11자 복근이 강조된 게 아니고, 배꼽 주위랑 아랫배에 볼록한 볼륨감이 살아 있고, 잘 단련된 근육이 살집을 지탱해줘서 말랑…….”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해.”
“신이 내린 몸이라구요! 특히 치골 라인은 제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네.”
성필이 헛웃음이 뿜었다.
리카의 현재 모습이 어떻게 보이냐면, 막 운동을 시작해서 주변에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 같다.
본인의 노력과 변화를 어필하면서 칭찬을 갈구하는 모습 말이다.
‘물론 리카는 자랑할 만하지.’
엄청난 노력과 의지를 기울이는 것도 맞다.
다만, 술 취해서 이러는 모습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질 뿐이다.
‘평소에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으면…….’
만약 리카가 일반인 사이에 껴 있었다면 입이 마르게 자랑하고 다닐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카는 아이돌이다.
같이 지내는 멤버들만 해도 단련의 결정체나 다름없으니, 본인의 특별함을 느낄 순간이 적었을 것이다.
성필은 그녀의 욕망에 부응해주기로 했다.
“리카 정말 열심히 했구나. 장하다. 자랑스러워. 가로 엔터의 역사에 남을 거야.”
그에 리카는 기가 더욱 살아서, 정말 자신의 치골까지 보이려 했다.
“스포츠웨어 화보 모델로 선정될 아타시(저)의……!”
“거기까진 안 돼!”
성필이 간신히 리카를 진정시키고 의자에 앉혔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가 인상을 팍 썼다.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생각해보니까 불공평하네요. 왜 저만 제 신체를 노출했죠?”
“네가 스스로 했잖아.”
“이사님도 배 보여주세요!”
“나 2, 3달 뒤에 바디 프로필 찍어. 그때 보여줄게.”
“앗, 촬영장에 가도 되나요!”
절대 안 알려줘야겠다.
대화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리카는 나중엔 아예 부담감을 털어버린 모습으로 참 많이도 웃었다.
“멤버들끼리 가끔 이런 논쟁을 해요! 과연 누가 가장 남자에게 인기가 많을까?”
“솔직히 취향 차이지.”
“…….”
“왜 그래?”
“……누가 가장 다른 사람에게 인기가 많을까!”
“리카 너 자기검열이 점점 심해지는 거 같아.”
자신을 좋아하게 될 사람이 여자일 것도 감안해서, 굳이 ‘남자’란 발언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었다.
“만약 이사님이 저희 중의 한 명이랑 결혼해야 하면 누군가요!”
그 질문에 잔을 잡던 성필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하지만 성필은 동요한 티를 내지 않고, 어디까지나 농담이란 듯 쾌활한 어조를 만들어냈다.
“바로 결혼까지 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안 되겠는데.”
“에에, 그럼 나이는 같다고 치고요!”
“난 20대야? 아님 30대?”
“으음, 20대요!”
리카는 술 때문에 목이 타는 듯 혀로 입술을 적셨다.
시야가 빙빙 돌고 흐릿함에도, 어째선지 청각만은 또렷했다.
이 상태면 공기의 흐름마저 소리로 들을 수 있을 듯했다.
짧은 사이 술기운으로 다시 목이 텁텁해졌다.
목을 축이고, 또 흔들리는 시야를 진정시키려 술을 마시려던 찰나.
“설하지.”
성필이 고민도 없이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