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스코틀랜드에 오는 건 두 번째였다.
성필과 조정훈 감독의 팀, 그리고 가로 엔터에서 부른 스태프팀이 함께였다.
‘아니’ 촬영 때와 다른 점은, 한구인과 멤버들이 없으며 대신 이유이가 동행했단 것이었다.
“한 이사님이 있으셨으면 가이드처럼 설명해주셨을 거예요!”
버스 안.
이유이와 함께 앉은 리카는 창밖을 보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외국에 왔단 게 그리도 좋은 것일까. 정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여기는 올드 타운이라고 해요! 19세기에 대화재가 나서 재개발했대요!”
“리카는 많이 아네. 영국 좋아해?”
“스코틀랜드예요! 음, 좋아하냐 싫어하냐고 물으면…….”
갑자기 리카의 표정이 싹 식었다.
“영국의 제국주의적 역사는 옹호할 수 없겠네요.”
“……어?”
“영국만이 아니에요! 유럽의 많이 나라들은 반성 없이 번영을 구가하고 있어요! 은근슬쩍 넘어가는 건 신사답지 못해요!”
“그, 그래?”
버스 안의 모두가 리카의 처절한 일장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그중에서 성필만 관심이 없었다.
‘역시 한 이사님의 제자라고 해야 하나.’
어째선지 한구인은 프랑스를 싫어했었다.
성필은 한구인이 독일인이라 그런가 보다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그냥 모든 민족 국가에 반감을 가졌던 것이었다.
고향인 독일도 포함해서 말이다.
‘세계시민이라고 하셨던가.’
그 제자인 리카도 세계시민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구인이 의도적으로 리카를 그렇게 가르쳤다기보다, 리카가 한구인을 지적인 롤 모델로 여기기 때문에 닮아가는 것이었다.
“……래서 세계는 민족의 개념을 넘어서 인류 공동체로 발돋움해야 해요!”
“그렇구나…….”
이유이는 리카의 장황한 이야기에 당혹감을 겨우 감추었다.
그녀는 리카가 유럽의 흑역사를 말할 때 ‘일본은?’이라고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었다.
비꼬려는 의도보다는, 순수하게 리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아무튼 버스는 착실히 에든버러의 북쪽 파이프(Fife)에 무사히 도착했다.
“여긴 달라진 게 없구나.”
오랜만에 본 파이프의 풍경은 옛날처럼 화사하고 다채로웠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연녹색의 식물과 거대한 계곡과 바위가 여기저기 자리했다. 괜히 많은 판타지 영화의 배경이 스코틀랜드인 게 아닌 듯했다.
정말 지구가 아닌 이세계(異世界) 같다.
“배우들 태운 버스는 먼저 도착했대요. 성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답니다. 스태프분들은 리카 스타일링 최대한 빠르게 부탁드려요.”
이유이의 감독으로 스타일링이 진행됐다.
다른 이들은 전부 나간 버스 안쪽이 탈의실과 메이크업 룸으로 사용됐다.
성필은 기다리는 동안 조정훈과 버스 근처에서 대화했다.
“촬영은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요. 넉넉잡아 6시간 이상은 필요할 거 같네요. 찍어봐야 알겠지만 영상 길이는 5분 정도가 될 거 같고요.”
‘아니’에서 리카가 찍었던 장면은 귀족들과 협의한 후 갑옷을 입은 채 말에 타서 적진으로 돌격하는 것이었다.
이번 영상엔 귀족들과의 회의, 그리고 명예혁명에 대해 고뇌하는 리카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거기에 더해서, 현재와의 연결점을 만들어야죠.”
사실, 리카는 이번 대본을 보고 놀랐었다.
‘역시 시간여행이었네요!’
드디어 밝혀진 사실!
그녀들의 뮤직비디오는 ‘롱 포’를 제외하곤 과거에서 활약하는 모습들을 그려왔다.
워낙 시대가 다양해서 멤버들도 소녀연맹이 시간여행을 한단 건 감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VCR 영상으로 세계관이 확정된 것이다.
“진짜 최종편 찍는 기분이네요.”
성필이 담담하게 여기까지 오게 된 감회를 표현했다.
최종편…….
그 단어에 조정훈이 시원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콘서트 VCR로만 공개하는 게 아쉽긴 하네요. 왜, 아이튜브에 찾아보면 소녀연맹 뮤비 해석이 되게 많잖아요. 제가 뮤비 여기저기에 상징을 뿌려두긴 했는데, 팬들이 그걸 다 찾는 게 정말 신기했었죠. 콘서트 VCR이 그 해답들인데…….”
“이왕이면 아이튜브에 공개해서 전부 다 봤으면 좋겠죠?”
“그런 바람이 없잖아 있죠.”
그게 창작자로서의 욕망일 것이다.
수만 명이 보는 것보다 수천만 명이 봐주는 게 훨씬 좋을 테니까.
조정훈은 아쉬운 듯하면서도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소녀연맹 콘서트는 DVD로 발매하실 거죠? 그럼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겠네요.”
“시간이 더 흐르면 아예 아이튜브에 공개할 수도 있고요.”
“네? 그래도 괜찮아요?”
“다른 그룹들도 그러고 하니까요.”
3년, 4년이 지나면 볼 사람은 다 봤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기획사들은 아예 아이튜브에 콘서트 풀버전을 올려주기도 한다.
‘아니면, 팬이 은근슬쩍 아이튜브에 올린 걸 모른 척하거나.’
아무래도 아이돌 그룹은 연차가 쌓일수록 히트곡이 늘어갈 수밖에 없다.
콘서트 세트리스트도 더욱 풍성해진다.
예를 들어 히트곡이 풍성한 5년 차의 콘서트 DVD 대신, 히트곡이랄 게 얼마 없는 2년 차의 콘서트 DVD를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드는 꼴이에요. 그러니까 그냥 풀어버리는 거죠.”
“아, 그렇게도 하는구나. 아이튜브에 콘서트 풀버전 같은 걸 검색한 적이 없어서 몰랐…….”
그때 조정훈의 폰이 울렸다.
고성(古城) 안쪽에서 대기하던 스태프의 연락이라고 한다. 그는 간단간단하게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그게 뭔 말이야?!”
조정훈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그가 전화를 끊자 성필이 불안하게 질문했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아니, 그게, 문제는 아닌데요…….”
“문제가 아니면요?”
“귀족이, 왔대요.”
“……네?”
“영국 귀족이요. 저희가 촬영하게 될 성의 주인, 아니, 주인의 아들이…….”
조정훈이 흥분하여 침을 삼켰다.
“혹시 자기가 엑스트라로 나올 수 있겠냐고…….”
* * *
고성의 앞에서 영국 귀족이란 남자와 리카네 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귀족의 목적은 리카를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 두 사람이 마주하는 것을 보며, 이유이가 옆에 있는 성필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유이 씨?”
“리카가 어떻게 행동할까요?”
버스에서 리카는 영국 제국주의의 비인륜적인 행태를 마음껏 부르짖었었다.
그리고 현재는 당시 제국주의의 선봉이었던 영국 귀족, 그 후예를 마주하게 됐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유이 씨 신나 보이시네요.”
“엄청 궁금해요!”
과연 리카는 언행일치의 인간일 것인가!
“애초에 리카가 퉁명스레 굴 리가 없잖아요. 저분이 제국주의 시대 사람도 아니고요.”
당연하게도 리카는 미소로 자신의 팬을 맞이했다. 한구인에게 배운 영어를 한껏 발휘했다.
“안녕하세요!”
“오, 소녀연맹!”
그 귀족은 밝은 금발을 지닌 30대의 쾌활한 남자였다.
이 여름에 정갈한 와이셔츠와 슬랙스를 입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뮤직비디오에 레이디 이시카와가 등장하는 부분을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저희 가문의 땅을 아주 아름답고 웅장하게 표현해주셨더군요.”
레이디 이시카와?
그 호칭에 리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자신을 부르는 것이긴 하지만, 평생 익숙해질 수 없을 듯한 호칭이었다.
“귀족 같았나요!”
“그럼요 그럼요. 당신의 기품과 표현은 엔터테인먼트 이상이었습니다. 아, 소개가 늦었군요. 사우씨스크 백작 존 카네기입니다.”
그는 친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허리를 숙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일본이나 한국의 인사법을 알아본 듯했다.
“저는 이시카…….”
“제 아버지는 파이프의 공작이시며 그레이트 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왕위 계승 서열 81위이십니다.”
“…….”
리카는 할 말을 잃었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서나 보던 대사를 직접 듣게 되니 여간 혼란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건 지켜보고 있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이가 넋이 나가서 물었다.
“박 이사님, 방금 저분이…….”
“저분의 아버지가 영국 왕위 계승 서열 81위라고 하셨어요.”
“여기 현실 맞죠?”
“네…….”
진짜 귀족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비현실적으로 탈바꿈했다.
어쩌면 그의 뒤에 거대한 고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저, 저는…….”
리카는 존의 장엄한 자기소개 후 거대한 압박감을 받았다.
그와 격을 맞추려면 자신을 뭐라고 소개하는 게 좋을까?
‘그래!’
리카가 목청을 가다듬고 공손히 드레스의 옆 자락을 잡았다. 그녀는 중세 영화에서 기품 있는 레이디들이 하듯이 하늘하늘 몸을 숙였다.
“저는 일본국(日本國) 이시카와 가문의 리카입니다!”
“……크흨.”
존이 갑자기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사실 전의 인사는 농담…… 으로 한 거여서.”
“네?”
“제가 귀족이라지만,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인사할 때 그렇게 구구절절 늘어놓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그걸 그대로 받아주시니까…….”
“손나(그런)!”
최대한 예의를 살려서 인사를 돌려준 거였는데!
“예, 일본국 이시카와 가문의 여식이신 리카 씨. 환영합니다. 만나 봬서 영광이었습니다.”
존은 리카에게서 등을 돌리고 감독인 조정훈에게 다가왔다.
“저의 참여를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조정훈이 드문드문 영어로 답했다.
“저, 그런데 왜 저희 영상에 보조 배우로 출연하고 싶으신지…….”
“소녀연맹의 ‘아니’ 뮤직비디오를 봤습니다. 한국 아이돌에 관심은 없었습니다만, 어느 순간에선가 성의 관광객이 늘어나서요.”
촬영지인 성은 ‘아니’ 뮤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아무래도 리카가 등장하는 씬의 주요 배경이었으니, 계속해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소녀연맹의 팬들이 성을 알아보고, 흔히 말하는 성지순례를 온 것이다.
다들 그럴듯하다고 여겨 고개를 끄덕이는 중, 성필은 문득 이질감을 느꼈다.
‘……잠깐, 관광객이 늘어나?’
성의 주인 아들이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성필은 그의 말을 쉽사리 믿기 힘들었다.
만약 그의 말을 믿는다 치면…….
‘영국에도 유의미한 숫자의 소녀연맹 팬이 있단 거잖아?’
성필은 남다른 감동을 받았다.
존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느 날엔 이 성에 계속 있으면서 관광객분들께 계속 물었습니다. 이곳으로 온 특별한 이유가 있냐고요. 소녀연맹의 뮤직비디오라고 답하더군요. 사실 이곳이 가끔 영화 촬영지로 쓰여도, 그 영화 때문에 관광하러 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신기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존은 소녀연맹의 뮤비를 보고, 케이팝 아이돌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리고 앨범을 살 정도의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렇게 됐습니다. 소녀연맹의 콘텐츠에 잠깐이나 나올 수 있으면…….”
존이 귀족이란 명칭에 걸맞지 않은 헐거운 웃음을 보였다.
“팬으로서 더없는 행복이겠죠. 아, 옷도 따로 가져왔습니다.”
존의 뒤에서 기다리던,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캐리어를 가져와 열었다.
캐리어 안에 든 것을 본 이유이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반응에 존이 만족했다.
“집에 있던 옷입니다. 제가 맡을 역할이 귀족이라고 들었는데, 잘 어울립니까?”
잘 어울리다마다.
이유이는 차마 존에게 묻지 못하고 성필에게 대신 질문했다.
“저, 저거 정말 수백 년 전 옷 아니겠죠……?”
“여쭤볼까요?”
“아뇨!”
이유이는 저런 옷을 박물관의 특별 기획 전시전 같은 곳에서밖에 못 봤다.
만약 존이 가져온 옷이 역사성 있는 진품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 그가 역사적 의상의 보존을 등한시하고 직접 입는 모습은 못 참을 것 같았다.
“물어보면 안 돼요!”
“이미 진품이라고 확신하고 계시는 거죠?”
“아뇨!”
이유이는 보조 배우들을 위해 공수한 귀족 복장이 너무 싸구려 같이 보일까 걱정일 정도였다.
그렇게 촬영이 시작되었다.
촬영은 예상보다 길어졌고 더뎠다. 조정훈의 완벽주의 때문이었다.
“좀 쉬었다 할까요?”
성은 아버지의 것이라지만, 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조정훈은 존을 신경 써서 물었다. 그러자 그는 피곤해하는 기색임에도 밝게 답해주었다.
“아니요. 이런 종류의 촬영은 처음이라 재밌군요. 계속 몰아치셔도 됩니다.”
촬영은 원래 예정되어 있던 6시간도 넘어섰다. 넉넉잡아서 대절한 것이었는데, 시간을 넘었으니 내일도 촬영해야 할 판이었다.
리카가 실망했다.
“이러면 내일 관광을 못 하잖아요!”
“촬영이 안 됐는데 그게 문제니?”
“박 이사님 지갑 찬스 쓸 생각에 어제 잠도 못 잤다구요!”
“날 지갑이라고 부르는 게 너무 익숙하지 않냐. 이젠 화낼 기력도 없다.”
“원하신다면 더 쓰셔도 됩니다.”
존이 그리 말하자 다들 당황했다.
조정훈이 저자세로 다가갔다.
“아, 그러면 혹시 시간당…….”
“무료로 해드리겠습니다.”
노블 블러드 만세!
조정훈만큼이나 리카가 좋아했다.
“이러면 내일 지갑을 마음껏 쓸 수 있겠네요!”
“이젠 ‘박 이사님 지갑’도 아니고 그냥 지갑이라고 부르는구나.”
“에헤이, 정산받으면 다 갚는다고요!”
“네가 ‘이코노미스트’만 구독 안 했어도…….”
“그 얘긴 하지 마세요오오오!”
* * *
“여기 뭔가 이상해요.”
게스트하우스의 1층 홀.
조정훈이 통유리 벽에 쳐진 커튼을 살짝 들추어 밖을 보았다.
한여름 밤은 을씨년스러웠다. 예로부터 괴담이나 공포 이야기에 어울리는 계절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떻게 공동묘지 옆에 게스트하우스가 있어요? 촬영 때문에 외국 자주 다녀보긴 했는데, 이런 데는 또 처음이에요.”
“검색해보니까 낮에 저기서 일광욕하는 사람도 있대요.”
“묘지에서요?”
묘지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넓고 잔디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아마 이곳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묘지의 느낌은 동양과는 다를 수도 있겠다 싶다.
‘한 이사님이 계셨으면 물어봤을 텐데.’
아니, 조금 있다가 연락해볼까?
미국에 있는 장하양과 함께 있는 한구인은 현재 쨍하게 뜬 해를 보고 있을 것이다.
연락해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이상한 점 있어요.”
“뭔데요?”
“여기 이름은 게스트하우스인데 시설은 호텔이잖아요. 명당 100,000원 이상이고요.”
조정훈이 어색한 침묵을 자아냈다.
“꺄아아아아악!”
그러곤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정말 잘 논다.
그는 성필이 반응해주지 않자 조금 시무룩한 기색을 보였다.
“뭐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촬영을 마친 후, 성필은 어째선지 저기압이었다. 아니, 기분이 안 좋다기보다 생각이 많아졌다고 해야 할까.
조정훈은 예상 가는 게 하나 있었다.
“혹시 귀족분이 신경 쓰이세요?”
“네?”
“그게, 오늘 온 것도 그렇고…….”
조정훈은 존이 리카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라 여겼다.
팬이기에 소녀연맹의 영상에 관심을 가지고 엑스트라 촬영까지 자처한다고? 팬이면 그럴 수 있겠다만, 존의 목적은 그게 아닌 듯했다.
“SNS에서 서로 팔로우도 했고. 나중에 따로 연락한다거나 그러지 않을까요? 지금도 리카가 관광한다면서 나갔는데, 혹시…….”
“무슨 소리세요.”
성필은 그럴 리가 없다면서 웃어넘겼다.
“리카 근처에 마트 간댔어요. 유이 씨랑 같이 갔고요.”
“아, 그렇구나.”
“그리고 제가 아까 존 씨 스타그래프 계정 찾았는데요.”
성필이 조정훈에게 존의 계정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의 눈이 큼지막하게 뜨였다.
“팔로워가 100만……?”
스타그래프 팔로워가 100만이면, 소녀연맹의 계정보다 팔로워가 높다.
“셀럽이더라고요. 여기 최신 글 보면…….”
존이 직접 가문에서 챙겨온 고풍스러운 옷을 입은 사진이 여러 장 걸려 있었다.
그중엔 촬영 스태프와 함께 찍은 것도 있었으며, 그는 소녀연맹 리카와 만난 것을 한껏 자랑하는 중이었다.
말미에는 소녀연맹의 곡을 추천하기도 했다.
“정말 순수하게 팬이신 거 같아요.”
조정훈은 이 상황이 잘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가 영국 왕위 계승 서열 81위인, 백작 작위를 간단하게도 자신의 이름에 붙이는 인물이 소녀연맹의 팬이라니.
“문화엔 국경이 없단 말이 진짠가 보네요.”
“그렇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한국으로 따지면…… 어디 명문가 사람이 해외 팝스타 좋아하는 정도일까요.”
“비유가 그럴듯하네요.”
결국 조정훈은 성필이 저기압인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는 은근슬쩍 아까 거절당했던 제안을 다시 주었다.
“내일 좀 피곤하긴 할 텐데, 저희 팀끼리 근처 술집에 가기로 결정했거든요. 가까워요. 안 오실래요?”
“오늘따라 몸 상태가 좀 그래서요. 모처럼 권해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조정훈은 어쩔 수 없단 듯 어깨를 으쓱이면서 홀을 빠져나갔다.
정적에 잠긴 홀, 소파에 앉아 성필은 몸의 긴장을 풀었다.
‘진짜 콘서트가 다가왔네.’
VCR 영상 촬영은 콘서트에 도달하기 위한 아주 작은 걸음에 불과하다.
그런데 성필은 그것만으로도 중압감을 말도 안 되게 받았다.
‘콘서트야, 콘서트. 진짜 콘서트를 열게 됐어.’
성필은 불안하게 손깍지를 꼈다. 계속해서 자신의 손바닥에 신경을 집중하여, 온기나 촉감을 선명히 느끼려고 노력했다.
감각에 집중하지 않고선 생각에 신경이 쏠려, 부담감에 익사할 것 같다.
‘정말로 콘서트를…….’
콘서트란 뮤지션이 도달할 수 있는 최종 스테이지다. 뮤지션이 지닌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팬을 만족시키고 다시금 매료시키는 꿈의 세계.
게임으로 따지면 최종 보스다.
성필은 프로듀서로서 콘서트를 총괄하는 단계까지 왔다.
‘석세스 엔터를 나온 지 거의 4년.’
성필은 꿈속에서 살고 있다.
그가 프로듀싱한 소녀연맹은 거대한 성공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 성공의 정도를 가늠할 마지막 단추인 콘서트가 다가왔다.
성공할까 실패할까.
매진이 될까.
어떤 평가를 받을까…….
그런 것 때문에 부담을 받는 건 아니었다.
‘나는 팬들을 만족시키는 콘서트를 만들 수 있을까?’
성필은 아이돌 콘서트를 많이도 다녔었다.
실망스러운 것도, 3시간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황홀하며 흥미롭고 행복한 것도 있었다.
성필이 갈망하는 건 당연히 후자였다.
아이돌 프로듀싱을 꿈꿔왔던 성필의 최종 목표는, 말할 것도 없이 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완벽한 콘서트를 만드는 것이었다.
‘콘서트는 아이돌 산업의 알파이자 오메가…….’
음악계 수익의 70%가 공연에서 발생한다.
즉, 뮤지션의 역량을 평가하는 최종 콘텐츠가 콘서트인 것이다.
그에 마주한 프로듀서 성필은, 소녀연맹의 데뷔 때와 같은 중압감을 매시간 마주했다.
“……따라갈걸 그랬나.”
술이라도 마시면 좀 나을 텐데.
성필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무료함과 부담감을 죽였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미국과의 시차를 계산한 뒤 장하양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발신음이 세 번도 되지 않아 장하양이 전화를 받았다.
성필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모든 불안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어, 하양아. 안전 교육은 다 받았어?”
[네. 재밌었어요.]
“와이어 달고 날아보니까 어때? 잘할 수 있을 거 같아?”
[아하하, 공중에서 ‘에피타프’ 부르니까 강사분들이 신기하게 보셨어요.]
“신기해서 본 게 아니라 네가 멋져서 본 걸 거야. 어떻게 안 보겠어?”
[나중에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시더라구요. 노래 찾아서 듣겠다고요.]
“또 팬을 늘렸네. 잘했어.”
[이사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성필이 움찔했다.
쾌활함을 잘 꾸며냈다고 생각했는데, 목소리에서 감정이 새어 나간 걸까.
“아니야. 무슨 일이 있긴. 그냥 하양이가 잘하고 있나 걱정돼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오늘 하루 지내고 오지?”
[네. 아직 한낮인데, 이럴 거면 그냥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나았겠어요.]
“시차 때문에 힘들 텐데 그건 안 되지. 몸 다 상할 거야. 하루 쉬어. 그럼 뭐, 한 이사님이 가이드해주신대?”
[아하하.]
장하양의 웃음이 어쩐지 음흉했다.
[놀라지 마세요. 한 이사님이 저 어디 데려간다고 하신 줄 아세요?]
“어딘데?”
[클럽이요.]
“한구인 이사아아아아!”
성필의 외침이 장하양의 귀를 벗어나 울려 퍼졌는지, 한구인의 당황한 음성이 바로 찾아왔다.
[박 이사님?]
“하양이를 클럽에 데려간단 게 무슨 말이에요?! 노, 놀러요? 뉴욕의 개방적인 문화를 체험시키려고요?!”
[아, 아닙니다. 재즈 클럽입니다…….]
“……아.”
성필이 급격히 안정을 찾았다.
“재즈 클럽이면, 그런 거죠? 재즈 아티스트들이 무대에서 연주하는. 재즈바요?”
[예, 재즈바입니다. 뉴욕은 재즈의 발상지로서, 즉흥 연주에 뮤지션들이 프리로 참가할 수 있는 잼 세션이 가능한 바가 즐비…….]
대충 재즈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장소란 뜻이었다.
한구인은 장하양이 아티스트로서 영감을 받으면 좋겠단 생각에 재즈 클럽을 추천했던 것이다.
“뉴욕이 재즈의 발상지였다니, 몰랐네요.”
[정확히는 뉴올리언스지만…….]
약 1분간 한구인의 재즈 역사 강의가 이어졌다. 그렇구나, 뉴올리언스의 흑인 관악대와 장례 행진곡으로부터 재즈가 시작됐구나…….
[그 유명한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 마일스 데이비스도 이곳 뉴욕에서 잼을 이뤄 비밥이라는, 재즈를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장르를 창조…….]
“아, 그, 네, 알겠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흥분했나 보군요. 역사적인 장소로 갈 생각에…….]
이 정도면 한구인이 장하양을 억지로 끌고 견학시키려는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성필은 한 박자 간 쉬고, 자그마한 걱정을 담아 말했다.
“재즈바잖아요. 혹시 술 드시나요?”
[어……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 재즈바면 안 먹을 리가 없지.
성필은 그게 걱정이었다.
‘한 이사님이랑 하양이가 둘이서 술을 마신다…….’
남녀 사이에 술과 밤이 있는 한 친구 관계는 없단 말이 있다.
게다가 재즈란 보통 그런 이미지 아닌가. 낭만적이어서 연인과 와인을 마실 때 듣는다던가.
갑자기 성필의 머리에서 한 재즈곡이 재생됐다. 야유회에서 버스를 타고 돌아올 때 들은, 빌 에반스의 ‘When I fall in love’란 곡이었다.
상상만 해도 로맨틱함이…….
‘내 머리에서 나가 조아라!’
아무튼, 곡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주변이 분홍색으로 물드는 기분이다.
‘둘이 재즈를 들으면서 알코올에 몸을 맡기다가 혹시나…….’
한구인의 프로 의식을 믿는 성필이지만, 술의 효능 또한 믿었다.
그래서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구인은 성필이 생각하기에도 매우 매력적인 남자였으니까. 웬만한 여자는 한구인이 분위기 잡고 작업을 걸자마자 넘어갈 게 틀림없다.
“으음, 그게…….”
[어? 박 이사님 질투하세요?]
어느새 전화를 장하양이 받아 간 듯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엔 장난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질투는 무슨…….”
[어조가 딱 그러신데요?]
장하양은 왠지 모르게 신난 것 같기도 했다.
[저랑 한 이사님한테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하시는 거죠?]
“아냐. 설마 그럴…….”
[질투한다고 인정하시면 술 안 마실게요.]
“질투 아니라니까.”
[한 이사님, 거기서 제일 도수 센 술이 뭐예요?]
“아, 아니, 그냥 좀 우려 섞인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고 할까…….”
장하양이 낮게 웃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한구인의 어처구니없단 듯한 읊조림도 들려왔다.
[박 이사님 저를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지금 한 이사님 엄청 실망하고 계세요. 표정을 직접 보셔야 하는데.]
“아니 저는 한 이사님이 워낙 완벽한 분이니까 혹시나! 진짜 정말 혹시나 그런 일이 있을까 한 거죠! 왜, 남녀가 둘이서만 술을 두고 있단 게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알겠어요 이사님.]
장하양의 목소리엔 여전히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성필은 자신이 이런 말을 꺼냈단 게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영상 통화가 아니라 다행이다.
얼굴이 보이기라도 했으면 장하양에게 대차게 놀림당했을…….
“박 이사님!”
리카가 현관에서 홀로 힘차게 들어왔다. 그녀가 양손에 위스키를 들고 외쳤다.
“스카치위스키 사 왔어요! 도수가 무려, 헤엑! 40도! 무려 40도가 넘어요! 방에서 조명 켜두고 분위기 있는 음악이랑 같이 마시다 죽는 거예요!”
“…….”
성필은 리카를 보다가, 핸드폰으로 다시 주의를 돌렸다.
장하양의 헛웃음이 들렸다.
[이제 제가 박 이사님 걱정해야겠죠?]
[박 이사님, 실망스럽군요.]
잠깐의 침묵 후.
성필이 본인의 결백함을 증명하려는 듯 진지하고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한 이사님, 저를 그렇게 생각하세요?”
[박 이사님은 안 그러셨습니까?]
“에헷!”
성필이 만화처럼 자신의 머리를 콩 때렸다.
“아앗! 아타시(저) 따라 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