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40화 (340/760)

340화

“하아, 하아…….”

세 곡을 연달아 추느라 거칠어진 호흡임에도, 백설하의 얼굴엔 행복이 서려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수천 명의 관객을 보곤 기쁨을 감추기 힘들어했다.

눈동자에 파문이 번져갔다.

고작 오프닝인데 이래선 안 된다.

리더의 눈에서 울음이 나오기 직전, 장하양이 한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애정 어린 격려를 전했다.

“언니, 이제 시작이에요. 벌써부터 우시면 어떡해요.”

“하하, 응. 그러네.”

‘그렇다’는 대답이 무색하게도 백설하는 눈가를 손가락으로 슬쩍 훔쳤다.

“쌤 자꾸 그러면 아타시(제)가 멘트 가져갈 거예요!”

“으, 응, 빨리할게. 어…… 멘트가 뭐였지?”

“하야쿠(빨리)!”

팬들이 웃음에 휩싸인다.

신아름이 질렸단 듯 귀에 건 인이어를 매만졌다.

“아까부터 무대 감독님이 빨리 토크 들어가라고 성화예요. 우리 무대 보여줄 시간도 없잖아요.”

“야 신아름.”

조아라가 장난스레 그녀를 어깨로 밀었다.

“첫 콘서트인데 감상에 잠길 수도 있지. 너도 아까부터 울먹이다가 겨우 추스른 거잖아.”

“아니거든?”

“목소리 떨리는 거 봐라.”

신아름은 조아라가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다가, 무대 위라서 참는단 듯이 한숨을 쉬었다.

이어서 모든 멤버들의 시선이 백설하에게 모였다. 그녀는 여전히 오프닝 메들리의 열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더는 시간을 끌어선 안 됐다.

백설하는 마이크를 양손으로 꼭 쥐었다.

그리고 마주한 빛의 파도, 응원봉이 내뿜는 빛으로 이루어진 무수한 별자리를 향해 외쳤다.

“인민이들! 와줘서 고마워요!”

거대한 환성.

그에 백설하의 눈에 다시금 거대한 파문이 번져가…….

“잠깐, 되짚어보자.”

가슴에 ‘백설하’란 이름표를 붙인 조진만이 근심 걱정을 다 담아서 숨을 토했다.

그러자 가슴에 저마다 소녀연맹 멤버들의 이름표를 붙인 나머지 네 명의 직원들이 자리에 쪼그려 앉거나 아예 드러누웠다.

조진만은 직원들과 함께 쓴 대본을 뚫을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 위에는 빨간펜이나 형광펜으로 수정하고 다듬은 내용이 어지러이 적혀 있었다. 원본을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여기, 이 부분.”

조진만이 대본의 한 곳을 가리키자, 직원들이 힘겹게 다가와 그곳을 바라보았다.

“아름 씨가 대답하는 거기. 아름 씨가 여기서 ‘아니거든?’이라고 말할까? 살짝 어색하지 않아?”

“어색하긴 뭐가 어색해요. 아름 씨는 딱 그렇게 말하실 거 같구만.”

“아냐, 뭔가 있어…….”

답한 직원이 입술을 꾹 물었다.

대체 대본 시연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한 100번을 넘었던가?

그는 조진만에게 말했다.

“사장님을 좀 믿어요. 우리 거의 소녀연맹 멤버분들 빙의한 수준이라니까요?”

소녀연맹의 거의 모든 뷔라이브 방송을 보고. 그녀들이 출연한 미디어 예능을 점검하고. 직원회의까지 해서 그녀들의 성향과 성격, 평소 행실이나 말투까지 파악한 마당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대중에게 보이는 소녀연맹을 가장 잘 알지도 모르는 이들이, 바로 아틀라스사의 직원들과 조진만이었다.

“쓰읍…….”

조진만은 대사를 볼펜으로 휙휙 그어버렸다.

“이거 어때? ‘어쩌라고’. 이게 더 아름 씨한테 맞지 않나? 아니다, 이것도 어색해…….”

“같은 대본만 백 번 넘게 읽으니까 어색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이거!”

조진만의 완벽주의엔 직원들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설령 대작가라도 본인의 글을 백 번이나 읽으면, 어느 부분이든 전부 어색하게 보일 게 틀림없다.

게슈탈트 붕괴라고 하던가.

어느 순간 익숙하게 여겨지던 것이 의미 불명의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조진만이 딱 그랬다.

“‘어쩌라고’가 왜 ‘어쩌라고’지? 왜 그런 발음일까. 아니, ‘어쩌라고’의 뜻이 내가 아는 게 맞나?”

“어쩌라고.”

“내가 아는 게 맞네.”

“……사장님.”

부하 직원이 부르는데도, 조진만은 대본에 눈을 박아 넣고 볼펜만 움직였다.

“어, 왜?”

“너무 공들이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 공들이는 게 나쁘단 건 아니지만. 이건 과도한 느낌이 없잖아 있어서…….”

조진만이 펜을 놓았다.

“다들, 내가 소녀연맹 일 맡을 때 했던 말 기억해?”

기억하다마다.

너무 강렬해서 잊을 수가 없다.

“우린 소녀연맹으로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투어 오브 더 이어’도 받을 거고. 유서 깊은 영국의 주간지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에서 ‘뮤직 모멘트 오브 더 이어’에도 선정될 거야.”

“올림픽홀 공연으로요?”

“당연히 아니지.”

조진만이 소년같이 상쾌한 웃음을 보였다.

“공연마다 3만 석 이상인 해외 투어로.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그 미래를 향한 한 걸음이야. 분명, 우리의 걸음은 거기로 이어져 있어.”

확신이 담긴 선언에, 직원들은 오랜 업무로 지쳤음에도 조진만에게 무어라 하는 걸 그만두었다.

무어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조진만이 직접 뽑고 모은 직원들은 술자리 때마다 그에게 어떤 말을 듣는다.

‘보통 사람들은 꿈을 무서워해.’

정확히는, 타인이 반짝이는 꿈을 이루는 걸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꿈을 이루지 못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니까.

‘그래서 제발 색안경을 벗으라거나 현실성을 들이밀면서 꿈꾸는 사람을 비난하지. 그런데, 그 사람들은 말릴 때 최소 1분은 생각하고 말리는 걸까?’

절대 아니다.

그냥 생각 없이 ‘그게 되겠어?’라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다정한 어투라도, 거기엔 위선과 사려 없음이 섞여 있다.

‘결국에 꿈을 이룬 사람에게, 말렸던 인간들은 그때 자기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아. 와, 정말 했구나라면서 초라한 박수나 치지. 그 정도일 뿐이야.’

그러니 주변에서 뭐라고 하는 건 조금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우리의, 아틀라스의 꿈을 진지하게 1분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의 비판 따위 고려할 가치도 없다.

그리고 직원들은 안다.

그 말이 아틀라스 외부의 인물이 아니라, 아틀라스 직원들에게 향하는 말이란 걸.

조진만의, 아틀라스의 장황한 꿈을 비웃기 전에 적어도 1분은 생각해보고 입을 열라는 뜻이었다.

“미래 3만 석 이상 투어의 첫걸음이니까 당연히 공을 들이지.”

직원들은 수긍했다.

조진만이 돈을 주는 사장이라서 ‘그게 되겠어요?’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안 던지는 게 아니었다.

“알겠어요.”

아틀라스의 직원들은 조진만의 꿈을 진지하게 몇 시간, 수십 시간, 수백 시간 함께 생각해 온 이들이었다.

고민의 해답은 ‘안 될 텐데?’가 아니라, ‘해 볼 만한데?’였다.

“저는 처음 했던 대로 ‘아니거든?’이 나은 거 같아요.”

‘신아름’ 이름표를 붙인 직원이 말했다.

조진만이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아, 역시 그렇지?”

“오늘 안에 오프닝 멘트 끝내야 해요. 언제까지 이것만 붙잡고 있으시게요? VCR 촬영도 곧 들어가야 하는데.”

“…….”

“사장님?”

조진만이 쪼그렸던 다리를 확 폈다.

“맞다, VCR!”

“……설마, 아니죠?”

“조정훈 사장이랑 미팅 언제지?!”

“내일…….”

“빨리 관련 자료 다 가져와!”

“이미 해 두신 거 아니었어요?!”

“비서라도 고용해야겠어! 진짜 큰일 났다!”

아틀라스는 오늘도 평화롭다.

* * *

소녀연맹의 모든 뮤직비디오를 맡으며 가로 엔터와 돈독한 관계를 다져온 조정훈 감독.

그가 오랜만에 가로 엔터로 왔다.

“되게 낯서네요.”

조정훈은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면서, 가로 엔터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성필의 설명을 들었다.

“저희랑 처음 일할 때는 사장님 포함해서 직원이 다섯 명이었던가? 그랬었잖아요.”

“생기가 넘치죠?”

“이야, 소녀연맹이 성장했단 게 확 느껴져요. 제가 다 뿌듯하네요.”

“다 조 사장님의 멋진 뮤비 덕분이죠.”

성필은 진심으로 조정훈에게 감사했다.

소녀연맹의 데뷔곡인 ‘아니’ 뮤직비디오는 그야말로 역작이었다.

뮤직비디오의 비주얼만으로도 화제가 됐을 정도이니, 그가 초창기 소녀연맹의 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하하, 그래요? 거참, 쑥스럽네요.”

“겸양이 없으시네요.”

“사실이잖아요?”

두 남자가 크게 웃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뮤비 찍느라 정신이 없었죠. 최근엔 번아웃이 온 거 같아서 일을 좀 쉬고 있어요. 회사 직원들도 잠시 소소한 일로 빼고요.”

“그런데도 저희 일 맡아주신 거예요?”

“그럼요! 소녀연맹이 사실상 제 토양이나 다름없는데요. 진심으로 ‘아니’ 만들 땐 저도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 정도 규모는 처음이었거든요. ‘롱 포’랑 ‘아라베스크’는 어떻고요?”

조정훈에게 소녀연맹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된 계기였다.

번아웃이든 뭐든, 가로 엔터가 일을 맡겨준다면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매달려서라도 하고 싶었다.

“암튼, 계속 아틀라스랑만 미팅하다가 직접 박 이사님 얼굴도 보고 하니까 좋네요. 박 이사님은 잘 지내시죠?”

“어휴, 저야 꿈에 살고 있죠.”

“어쩐지, 저랑 다르게 세월의 직격탄을 피하고 계시네요. 똑같이 꿈에 살고 있는데 뭐가 다를까요?”

“술이랑 담배죠.”

“아…… 너무 정석적인 답이네요.”

“그래도 포기 못 하시죠?”

“그거 없으면 인생 왜 살아요?”

조정훈이 호탕하게 웃었다.

사실, 성필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노화가 더딘 건 전생의 지식 덕이었다.

전생의 조아라에게서 전수받은 피부 관리 비법과, 그녀가 죽어라 가라고 해도 괜한 자존심 때문에 안 가던 피부과를 정기적으로 들른 결과였다.

‘전생의 아라야, 고맙다 정말로…….’

이게 회귀의 진짜 장점이지.

주식? 돈? 명예? 다 필요 없다.

오직 외모뿐…….

물론 소녀연맹과 만난 게 가장 행복하다.

“아무튼, VCR 영상 기획은 다 나왔습니다.”

아틀라스는 가로 엔터와의 협의로, 콘서트 도중 관객에게 보여줄 VCR 영상의 윤곽을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조정훈의 회사에 의뢰했다.

조정훈은 대략적인 영상 윤곽에 디테일을 더했고, 그 결과물이 성필의 손에 들어왔다.

성필은 그것을 찬찬히 읽으면서 조정훈의 설명을 들었다.

“멤버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거랑, 그리고 나머지는…….”

조정훈이 가슴 벅찬 투로 말했다.

“소녀연맹의 세계관이죠.”

소녀연맹은 뮤직비디오로 한 시리즈의 서사를 완결했다. 하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팬들은 콘서트에서 그 미완의 조각을 확인하게 될 터다.

“콘서트 이름도 세계관 따서 지으셨기에, 힘 좀 들였습니다.”

“네.”

성필은 영상 계획서에서 눈을 뗐다.

“이거 좋네요.”

* * *

장하양이 가사를 쓴 곡인 ‘에피타프’는 콘서트 세트리스트에 포함됐다.

애초에 볼륨 있는 콘서트를 위해선, 여태까지 소녀연맹이 발매했던 모든 음원을 넣어야 하긴 하지만.

어쨌건 장하양은 솔로곡인 ‘에피타프’ 무대를 어떻게 꾸며야 할지, 가로 엔터의 A&R 팀, 비주얼 팀과 고민하게 됐다.

그러던 도중 성필이 권유했다.

“제가 하늘을 난다구요?”

듣기만 해도 어이가 털리고 헛웃음이 나올 아이디어였다.

와이어 네 개를 몸에 달고 전후좌우상하로 움직이면서 노래를 불러?

무섭다…….

“하양이 너 완전 천사처럼 보일 거야! 아니, 지금도 천사이긴 한데 진짜 천사일 거라니까! 조진만 사장님한테 이 아이디어 들은 이후부터 나 진짜 잠도 설치고 그래! 하양이가 막 하늘에서 하늘하늘한 옷 입고 ‘에피타프’ 부르면 나 그 자리에서 바로 묫자리 파고 황홀해서 기절…….”

“할게요.”

장하양은 성필을 믿었다.

어쩌면 세상에서 장하양을 가장 자세히 보며, 그녀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알아줄 사람의 말을 믿기로 했다.

‘직접 말할 순 없지만…… 나랑 천사는 잘 어울리는 거 같기도 하고…….’

연애 박사(자칭 X, 타칭 O) 백설하가 말했었다.

아름다움은 무기라고.

지금은 고전적인 메타포이긴 하지만, 여자의 아름다움으로 무너진 나라며 국가, 영웅이 얼마나 많이 있던가?

그리고 또 연애 박사 백설하가 말했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감은 무기를 더 날카롭게 하는 연마석이라고.

‘어차피 보컬에 집중한 곡이야. 내 보컬 호소력으론, 가만히 서서 노래 부르는 것으론 충분한 결과를 내기 어려워.’

그럴 바엔, 차라리 날아다니면서 비주얼 임팩트를 주는 쪽이 낫겠지.

이번 콘서트엔 케이어스가, 진소유가 올지도 모른다.

어중간한 ‘에피타프’ 무대를 보여줄 바에야, 그녀들의 눈이 튀어나오도록 만들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두세 시간 교육을 들어야 한다고요?”

“응. 하루 만에 다녀올 수도 있을 거야. 아, 그건 좀 아니네. 미국 가는 데만 10시간 넘게 걸리니까. 하루 있다가 와야겠다.”

“…….”

장하양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분명, 조아라가 홀로 미국에 갔다가 미아가 된 적이 있었다. 성필이 그런 사태를 일어나게 둘 리가 없다.

“그럼 혹시 미국에 박…….”

“제가 따라갑니다.”

한구인이 스윽 나타났다.

어디서,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를 만큼 은밀한 등장이었다.

“느슨하게 쳐서 10개 국어 구사자인 저만 믿으십시오.”

“……안심이에요.”

“왠지 달가워 보이시지 않는군요.”

“아니요. 한 이사님과 함께면 관광도 문제없겠어요. 석사를 미국에서 따셨지 않나요? 첫 직장도 미국이셨고요.”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미국 시절의 친구들과 만날 수도 있겠군요.”

“친구가 있으셨어요?”

“……?”

“아하하, 농담!”

“하하하!”

한구인이 웃자 오히려 장하양이 당황했다.

“그, 그런데 한 이사님이 오셔도 괜찮으세요? 한국에서 일도 있으신데.”

“안타깝게도, 가로 엔터에는 가용한 영어 구사자가 저뿐입니다. 직원분들은 토익 점수만 있지, 직접 영어로 대화하니 쉽게도 말문이 막히시더군요. 소중한 소녀연맹 멤버분들에게 완벽한 해외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제가 가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한구인과 장하양의 미국행이 결정됐다.

고작 1박 2일 정도겠지만, 한구인과 함께라면 안심이다.

“아, 맞다. 리카!”

점심시간을 이용해 신아름과 막간 보드게임을 하고 있던 리카가 성필의 부름에 응답했다.

그녀는 손에 있던 카드를 전부 내팽개치고 성필을 향해 달려왔다.

“리카 너 질 거 같으니까 파하는 거지!”

“박 이사님이 부르셨어!”

“내기는?”

“에, 무슨 내기?”

신아름이 검지를 들었다.

그것을 본 리카가 움찔하면서 자신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비굴한 표정으로 헤헤 웃었다.

“기, 기억하고 있지 모찌론(당연)!”

“얘기 끝나면 바로 돌아와. 처신 잘해, 알겠어?”

“하이잇(네엡)!”

리카가 신아름에게서 성필에게로 몸을 홱 돌렸다.

“박 이사님, 바쁜 저를 왜 부르신 건가요!”

“일 있으니까 불렀지. 아름이랑 무슨 내기 했어?”

“지는 사람이 하루 동안 매일 1층에서 물 가져오는 거예요! 저희 연습할 때요!”

그럭저럭 괜찮은 내기다. 혹시나 돈을 걸고 있지는 않은가 걱정했었는데.

“참고로 아타시(제)가 2연패 했어요!”

“그럼 그만둬야지.”

“다음은 제가 꼭 이길 거예요!”

불쌍한 리카.

헛된 꿈을 좇느라 다리가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있구나.

“다른 게 아니라, 너희 VCR 영상 찍는 거 알지?”

“하이(네)!”

“리카, 넌 다시 스코틀랜드로 가줘야겠다.”

“……하이(네)?”

“나중에 다 말해줄 텐데, 영상이 소녀연맹 세계관을 담고 있거든.”

그러니까, 리카는 다시 스코틀랜드에서 귀족이 되어 영상을 찍어야 한다.

‘아니’의 시점에서 말이다.

다른 멤버들도 그럴 것이다.

“해외여행이네요!”

리카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한구인에게 듣기로, 일본인은 영국을 대체적으로 좋아한다고 한다.

영국에 호감을 품는 국민이 80% 이상이라던가. 리카도 왠지 모르게 영국에 좋은 인상을 품고 있는 듯했다.

“이번에도 다 같이 가나요!”

“아니.”

성필이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랑 같이 간다.”

“어?!”

놀란 건 장하양이었다.

“하양아 왜?”

“……아뇨, 아니에요. 그, 이사가 둘이나 회사를 비우는 게 될까 싶어서요.”

“어쩔 수 없지. 한 이사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가로 엔터 가용 영어 구사자가 정말 적어. 리카가 조정훈 감독님네 팀이랑 같이 간다고 해도, 매니지먼트 인원 한 명은 있어야지 않겠냐.”

“…….”

“축제와 고성의 도시를 마음껏 즐기는 거예요!”

“어, 몇 시간 정도밖에 여행 시간은 못 주겠지만.”

“그게 어딘가요!”

리카와 성필이 정답게 손뼉을 맞추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리카의 눈동자가 우수에 젖어갔다.

“또 만날 수 있겠네요…….”

“어, 누구? 거기서 친구라도 사귀었어?”

리카가 그리움을 담아 픽 웃었다.

“네.”

성필이 판단하기로 저건 보통 눈빛이 아니었다. 마치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헤어진 연인을 그리는 듯한 눈빛이 아닌가.

“누군데?”

“박 이사.”

‘박 이사’란 호칭에 성필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뜨였다.

리카가 그 호칭을 입에 담은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조아라가 라디오에서 성필을 ‘박성필 이사님’이라고 불렀을 때처럼.

“뭐, 뭐라고?”

“박 이사요!”

그때, 성필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아른거렸다.

흰색의 커다란…….

“말?”

“하이(네)!”

리카가 ‘아니’ 뮤직비디오에서 탔었던 백마다. 리카가 멋대로 ‘박 이사’란 이름을 붙였던…….

“너 아직도 말을 내 이름으로 불러?!”

“박 이사님도 목발에 아타시(저)의 이름을 붙였잖아요! 피장파장이에요!”

둘이 친근함을 담아 투닥거렸다.

그것을 보며 한구인이 짙게 미소 지었다.

“두 분은 사이가 정말 좋으시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양 씨?”

“……네.”

장하양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왠지 모르지만…….

‘오늘따라 작사가 더 잘될 거 같은 기분이야.’

정지음에게 괜찮은 곡을 하나 달라고 해야겠다. 이 감정적 격류를 예술과 문장으로 승화시키고 싶다.

장하양이 감상에 빠져 있는 동안, 어느새 리카와 성필은 전대물의 주인공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기다려라!”

“축제와 고성의 도시!”

에든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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