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장장 5시간을 넘는 콘서트 정주행이 끝났다.
성필은 불을 켰다. 그러자 멤버들이 찌뿌둥하게 기지개를 켜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다들 예외 없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귀엽게 보였다.
“아흐, 드디어 끝났다.”
조아라가 좌우로 고개를 뚝뚝 꺾자 성필이 발작하듯 외쳤다.
“드디어 끝났다?!”
“또 뭐요.”
“이 마스터피스들을 보고 어떻게 피곤한 티를 낼 수가 있어! 너희들이 본 거 200,000원어치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곤 못할망정 ‘드디어 끝났다’라고?!”
“내가 잘못했어요.”
조아라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뭐, 나도 너희들이 푹 빠져서 볼 거라곤 생각 안 했어.”
“나보고 어쩌란 건데요. 이럴 거면 왜 화냈어요.”
원래 콘서트란 팬을 위한 콘텐츠다.
아는 게 있어야 더 즐거운 법이다.
하지만 오늘 보았던 두 개의 콘서트 영상 중, 멤버들이 아는 곡은 손에 꼽았다.
거의 50곡이나 모르는 노래였으니, 퍼포먼스에 감탄할지언정 팬처럼 즐길 수는 없었다.
마치 마블의 이전 시리즈를 띄엄띄엄 보고서 어벤져스 최종편을 관람하는 느낌이었겠지.
“그런데 보고서 그냥 끝내면 레퍼런스로 삼는 게 아니지. 다들 돌아가면서 감상이라도 얘기해볼까? 먼저 ‘드디어 끝났다’고 말한 아라부터.”
“이걸로 언제까지 우려먹을지 감도 안 오네.”
조아라는 볼을 긁적이면서 할 말을 찾았다.
“음…… 일단 다키스트부터 말하면요. 오프닝이 굉장했어요. 솔직히 지금 와선 오프닝 메들리밖에 안 떠올라요.”
“그럴 수 있지. 오프닝에 있는 건 아라도 다 아는 곡이었지?”
“네. 뭐, 초등학생 중학생일 때 유명했잖아요. 학교 쉬는 시간이나 거리에서 계속 나오고. 워터멜론 TOP 100 재생하면 껴 있어서 듣기도 많이 들었고.”
오프닝 메들리는 다키스트의 타이틀급 히트곡들만 모아 두어서, 조아라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조아라의 눈에서 빛이 아른거렸다.
“진짜 멋졌어요.”
오프닝엔 총 세 곡이 나왔었다.
곡이 진행되면서 다키스트 멤버들이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였다. 힘에 부친단 뜻이 아니다.
그들은 땀범벅이 되어서 퍼포먼스를 했다.
그 에너지와 강렬함, 기세와 열정은 다키스트를 모르는 사람이 보았어도 감탄했을 것이다.
“우리 무대 보고 인민이들도 나 같은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뭐, 다키스트는 이 정도고요. ‘레이어드’는…….”
성필이 보여주었던 두 편의 콘서트 영상 중 하나의 주인공 걸그룹이다.
“좀 매가리가 없다고 할까…….”
“선배님들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아니, 진짜 솔직한 감상이거든요. 퍼포먼스 자체보다 연출에 집중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니까…… 선배님들이 ‘우리 이 정도야!’라고, 퍼포머로서 뭘 보여주는 게 아니라. 컨셉에 충실하게 ‘우리 귀엽지?’라고 말하는 느낌…….”
레이어드는 청순함과 상큼함, 청춘의 발랄함으로 광풍을 일으켰던 대형 기획사의 걸그룹이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티어급 아이돌이며 현재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중이다.
“그게 나쁘단 건 아니고요, 나랑은 안 맞다고요. 다키스트랑은 지향점이 다른 느낌이요.”
“그냥 청순 컨셉이 싫다고 해.”
“싫어요.”
“보이그룹이 좋다고 해.”
“그건 아닌데요.”
“아무튼 OK. 여기서 아라가 꾸미고 싶은 콘서트의 모습이 하나 나왔네.”
“내가요?”
“아라는 소녀연맹이 퍼포머로서 인정받길 원하는 거지? 컨셉이 아니라 정체성으로, 캐릭터가 아니라 퍼스널리티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조아라는 원래부터 이런 성격이었다.
자신이 가진 걸 보여주고 싶어 하지, 억지로 다른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하진 않는다.
성필을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음 사람을 보았다. 리카였다.
“아타시(저)는 레이어드 선배님들 무대가 제일 좋았어요! 특히 눈 펑펑 내릴 때요!”
“‘함박눈’ 부를 때?”
“네! 우주 명곡이에요!”
성필도 동의한다.
레이어드 보컬 라인 멤버들의 매력을 한껏 살린 곡이다.
여느 아이돌 앨범 수록곡처럼 대중에겐 찬밥 신세지만, 이 곡만으로도 그녀들의 실력을 짐작하기엔 어렵지 않았다.
“선배님들이 하얀 옷 입고 나와서 계속 의자에 앉아 계시잖아요! 그런데도 눈을 못 떼겠어요! 진짜 요정 같았어요!”
리카는 조아라와 달리, 아이돌이 무대에서 보여주는 캐릭터성에 긍정적이었다.
콘서트 무대에서만 보일 수 있는 연출. 그건 일반적인 퍼포먼스로는 뽐낼 수 없는 매력을 드러낸다.
“그리고 다키스트 서유선 선배님 솔로 무대가 기억에 제일 남아요!”
“‘윈투어’ 말하는 거지?”
퇴폐미를 극대화한 곡이다.
“‘딩동댕 묵찌빠’요!”
서유선이 유치원생 옷을 입고 나와 방실방실 웃으면서 율동했던 무대다.
“이야, 역시 프로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까지 본인을 버릴 수 있다뇨! 아이돌의 귀감이에요!”
“그으, 그래?”
놀라운 사실, 성필은 다키스트 팬미팅에 간 적이 있다.
원래 ‘딩동댕 묵찌빠’는 아동 방송 오프닝으로, 서유선이 이벤트성으로 커버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반응이 너무 좋아 콘서트 세트리스트에도 포함시켜 버렸다.
‘팬미팅에서 팬들이 해달라고 부탁하니까 거의 울려고 했었지…….’
하지만 서유선은 프로였다.
퍼스널리티보다 캐릭터를 우선할 수 있던 그는, 방실방실 웃으면서 ‘딩동댕 묵찌빠’를 보여주었었다.
트루 아이돌 서유선…….
“저는 평소엔 보여드리지 못했던 모습을 콘서트에서 보여드리고 싶어요!”
“예를 들면?”
“가죽옷을 입고 채찍을 든다던가?”
“캐릭터성이 너무 과하잖아.”
“에에, 보통인데요!”
“애초에 소녀연맹 곡 중에 그런 컨셉은 없어.”
“어쩔 수 없네요! 지금부터 콘서트에 맞춰 만드는…….”
“아름이는 어땠어?”
“히도이(너무해)! 박 이사님은 방금 제 아티스트십을 죽였어요!”
신아름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가볍게 말했다.
“리카나 조아라처럼 이러고 싶다, 그런 건 없고요. 감상만 말하자면…… 다들 대단해요.”
“어떤 점이?”
“3시간이나 집중력을 유지한다는 게요.”
아이돌이 콘서트에 서기 위해선 외울 게 많다.
음방 무대보다 훨씬 큰 무대의 몇 시간 치 동선을 외우고, 중간중간 토크 타이밍과 대사를 외우고, 무엇보다 퍼포먼스를 전부 익혀야만 한다.
약 3시간에 가까운 대본을 체득하는 것이다.
“제가 아이돌이라서 그런가, 엄청 대단해 보이고 그래요. 제가 잘할 수 있을까도 걱정되고…….”
“레이어드도 데뷔 1년 조금 넘어서 저 무대를 만든 거야. 아름이도 할 수 있어.”
“……1년 조금 넘어서? 그, 그런데 핸드볼 경기장에서 단콘(단독 콘서트)을 열었어요?”
“대형 기획사니까.”
“1년…….”
신아름은 레이어드가 1년 만에 단독 콘서트를 열었단 데서, 새삼스레 백그라운드의 차이를 의식하진 않았다.
“겨우 1년을 채웠는데도 그렇게나…….”
신아름은 그저 감탄했다. 자신이 데뷔 1년 차를 끝냈을 때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햇병아리나 다름없던 시절이다. 그런데 레이어드는, 신아름이 햇병아리일 시점에 단독 콘서트를 완벽히 수행해낸 것이다.
같은 아이돌로서 존경심마저 느낀다.
성필은 신아름이 좋은 자극을 받은 것 같아 뿌듯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장하양을 보았다.
“하양이는 어땠어?”
“이미 나올 이야기는 다 나온 거 같아서요. 승패의 관점으로 얘기하고 싶어요.”
“……응? 승패?”
“네.”
“잠깐만요 언니!”
리카가 불안한 기색을 띠며 장하양을 말리려 했다.
“무대에 승패가 어딨나요! 저마다의 색으로 빛나는…….”
“다키스트 선배님들이 이겼어요.”
다른 멤버들이 굳어서 성필을 보았다.
아이돌 예찬자인 성필이, 무대로 승패를 따지는 장하양의 발언을 곱게 들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의외로 성필은 무덤덤했다.
“레이어드 선배님들은 말 그대로 인형 같으셨어요. 시킨 걸 그대로 수행한다는 분위기요. 그에 비해 다키스트 선배님들은 정말 아티스트…… 처럼 보였어요.”
장하양은 다키스트의 콘서트를 보면서 깨달았다. 성필이 그렇게도 말하는 아티스트의 아우라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고.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비교가 안 됐어요.”
“왜 그럴까?”
성필이 역으로 질문했다.
장하양은 이미 답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즉답했다.
“연차 같아요. 다른 무대는 안 봐서 몰라도, 노련함이라든가…….”
“그렇지. 똑같은 퍼포먼스라도 연차에 따라 느껴지는 게 전혀 달라. 무대 장악력이나 존재감, 수치로 표현할 수 없는 아우라를 갖추게 되는 거야.”
“저희의 콘서트에서도, 팬분들이 제가 느꼈던 걸 느끼실까요?”
완벽하지만 어딘가 쫓기는 듯하고 여유가 느껴지지 않는 감각.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데 급급한 기운.
그걸 팬들도 느끼게 될까?
“당연하지.”
“없애고 싶어요.”
장하양의 목소리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성필이 듣기에, 그녀의 요구는 당돌하며 오만하기까지 했다.
대형 기획사에서 거르고 걸러진 보석.
거기에 섬세하고 격렬한 세공까지 마친 이들도 숨기지 못한 미숙함을 없애겠다니.
“할 수 있을까요?”
“하양아, 꿈이 너무 높은데?”
“…….”
“방법이 없진 않지. 진짜 자다가도 깨우면 정해진 무대 동선 다 밟으면서 퍼포먼스 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하는 거. 몸은 저절로 움직이고 머리로는 다른 생각까지 할 수 있는 경지.”
그 정도 수준까지 오면, 정해진 퍼포먼스에 다른 것을 채워 넣을 수 있게 된다.
‘해야 해’에서 ‘이렇게 해볼까?’가 되는 순간, 아이돌은 벽을 하나 넘는 게 된다.
“응원할게.”
“네.”
장하양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비장미 서린 답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열기가 가득할 것이다.
‘응원한다고 하긴 했지만.’
성필은 기대하지 않았다.
세상엔 연습만으로 채울 수 없는 게 존재한다. 무대 장악력과 존재감, 아우라와 여유가 그것이다.
오직 경험으로밖에 쌓을 수 없는 영역이다.
만약 경험 없이 무대를 여유롭게 휘어잡을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을 천재라고 부르는 것이겠지.
“그럼 마지막으로.”
백설하.
“어땠어?”
백설하는 당황한 눈치였다.
아까부터 그러했었다.
“저어, 저는 그냥…… 재밌었어요…….”
“응, 그리고?”
“……재밌었어요.”
“…….”
“아, 아니, 저는 그냥 재밌게 봤어서…….”
백설하가 부끄러운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는 멤버들이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심장이 철렁였었다.
‘다들 의식 수준이 너무 높은 거 아니야……?’
무대 레퍼런스를 얻기 위해 왔다지만, 백설하는 그냥 처음부터 콘서트를 즐겼었다.
분석이나 참고 따위는 없었다.
“그냥…… 재밌었어요…….”
백설하는 ‘다들 너무 대단하시고’라거나 ‘저희도 이런 무대를 꾸몄으면 좋겠네요’란 사족을 붙였으나, 이미 밑바닥이 드러난 뒤였다.
“네, 재밌었어요…….”
“오케이, 다들 저녁이나 먹을까?”
“실망한 티 너무 내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노력하는 사람보다 즐기는 사람이 낫다잖아. 소녀연맹의 리더 백설하, 아이돌로서 최고의 자질을 가졌어! 저녁 뭐 먹을까?”
“……헤헤.”
백설하는 그저 웃었다.
뭔가 멤버들보다 감상의 깊이가 덜하다는 게 살짝 부끄럽기도 했고, 진지하게 대응하면 더 놀림 받을 거 같아서였다.
백설하는 즐기는 자가 되기로 했다.
* * *
다들 왁자지껄 수다를 떨며 성필의 집에서 나왔다. 성필이 태워준다는 걸 간신히 말리고 나오는 길이었다.
“더 놀고 싶었는데!”
리카는 여섯이서 함께 보드게임을 하고 싶어 했지만, 즐기는 자 백설하가 성필의 휴일을 보장해주자면서 돌아가기로 했었다.
“이사님도 휴일이 있으시잖아.”
“친구랑 노는 게 휴일을 보내는 법 아닌가요!”
“이사님 자꾸 시계 보시는 거 안 보였어?”
“에? 진짜요? 혼또니(정말로)?!”
리카는 자신이 성필을 방해한 건가 싶어 심란해졌다. 그때 신아름이 그녀의 걱정을 없애주었다.
“그거 헬스 때문에 그런 거예요.”
“헬스를 못 가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신다고……?”
“팀장님이 연초에 사장님이랑 한 이사님이랑 바디 프로필 찍기로 약속했던 거 알죠? 근데 우리 일본행 때문에 계획이 틀어졌었잖아요. 팀장님 생활 패턴이 좀 뒤틀려서 만족할 몸 상태가 아니래요.”
성필은 초조한 상태인 것이다.
홍규헌, 한구인과 함께 바디 프로필을 찍기로 한 시간을 한참 초과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박 이사님…….”
장하양이 자신의 가슴 위 허공을 쓸었다.
흉근을 표현하려는 거 같았는데, 어딘가 손짓에서 불순함이 느껴졌다.
“몸이 옛날보다 더…… 좀 그렇게 되셨던데? 그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니야?”
“하양 언니 엣찌(음란)!”
“팀장님은 마음에 안 들겠죠. 아, 그것도 봤죠? 팀장님 찜닭 먹으면서 버릇처럼 계속 ’맛있다…… 맛있다……‘라고 하는 거.”
“으, 응. 나 그거 좀 무서웠어…….”
백설하는 성필의 옆에 있었는데, 자꾸만 성필이 혼잣말을 하니까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어딘가 망가진 인간 같았으니까.
“요즘 계속 간 안 된 나물이나 닭가슴살만 드셔서 그래요.”
“아, 우리 연습생 초기 때랑 비슷한 상태시구나.”
소녀연맹이 막 연습생이 됐을 땐, 다들 매일 제정신이 아니었다.
강렬한 조미료에 중독되었던 입에 간이 거의 안 된 음식들만 주야장천 들어갔으니까.
떡볶이라도 한 입 먹는 날엔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다.
“되게 빈틈없이 사신다.”
백설하는 묘한 동질감을 가지고 말했다.
아이돌의 생활이란 규제의 연속이다.
먹는 것부터 자는 시간, 일어나는 시간,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할지까지도 정해져 있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아이돌에 비하면 한없는 자유를 누리고 있으니 솔직히 배알이 꼴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박 이사님은 우리랑 비슷하시니까…….’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문득, 백설하는 처음 성필의 집에 발을 들였을 때가 떠올랐다.
“그것도 불쌍하시더라. 우리 들어오니까 어디 거래처에서 연락 오신 거. 주말인데…….”
멤버들이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아라를 제외하고.
“그거 진저예요.”
“진저? 케이어스 진저 씨?”
“네. 목소리 들렸어요.”
다들 눈을 크게 뜨고 조아라를 쳐다보았다.
반신반의하는 눈빛이었다.
“아저씨가 우리한테 안 들키려고 일부러 더 딱딱하게 말한 거예요.”
“……말이 돼?”
신아름의 물음이 모두의 생각을 대변했다.
“휴일에, 사적으로, 케이어스 멤버랑, 연락한다고?”
정말로 말이 안 된다.
가로 엔터의 이사인 성필이 케이어스 멤버인 진저와 사적으로 무슨 연락을 할 게 있다고?
역으로 KS 엔터의 아이돌인 진저가 타 회사의 이사와 나눌 이야기가 무엇이 있을까?
심지어 연락은 진저 쪽에서 걸려 왔었다.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
조아라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녀에게선 다른 멤버들이 느끼는 당혹감이 보이지 않았다.
“진저 걘 그냥 아저씨가 KS 엔터에 둔 리카야.”
“아타시(나)는 대체불가능이야! 자, 봐봐!”
리카가 조아라의 앞에서 눈부신 미모를 자랑했다.
조아라는 관심이 없자 리카가 축 늘어졌다.
“……박 이사님은 왜 진저랑 친해? 친해질 일이 있었어? 아라쨩은 알아?”
“미국에서 얘기 나누다가 친해졌다더라. 정확히는 몰라.”
“손나(그런)……. 나랑 박 이사님은 장장 4년의 세월 동안 관계를 쌓았는데……. 이러다가 내가 가로 엔터의 진저가 되겠어…….”
리카는 언제까지고 친구일 수밖에 없는 여사친의 기분을 체험했다.
남사친에게 그의 이상형이 접근해오자, 남사친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게 여사친은 수를 쓸 새도 없이 남사친을 잃는다.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란 스토리였죠 쌤?”
“으, 응.”
얼마 전 백설하와 함께 보았던 상황극 아이튜브 채널의 영상 내용이었다.
요즘 배우들은 아이튜브를 등용문으로 쓸 수도 있구나 해서 신기했던 게 기억난다.
“그거 되게 슬펐지.”
백설하가 씁쓸하게 읊조렸다.
영상을 볼 때는 여사친 역에게 ‘제발 그냥 네 마음을 밝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상대의 체급이 훨씬 크니 싸울 마음을 지레짐작 접어버리는 것이다.
에리카를 떠올리니 왠지 감정이입이 더 잘되는…….
“아 씨 짜증 나!”
갑자기 조아라가 소리치자 다들 깜짝 놀랐다.
“아, 아라야?”
“저희 일 한번 내볼래요?”
“박 이사님 납치할까?”
“하양 언니, 뭔 농담을 그렇게 진지하게 해요.”
“…….”
“왜 농담이라고 안 해요.”
“아하하.”
“끝까지 안 하네?”
조아라가 제시할 건 당연히 성필 납치 따위가 아니었다.
“다들 케이어스에 친한 멤버 한 명씩 있죠?”
“난 김민주랑 안 친한데?”
“김민주라고 한 적 없는데?”
“……걍, 안 친하다고.”
“하양 언니는요?”
“나 김민주랑 안 친하다고.”
“알겠으니까 좀 조용해 봐.”
아무도 신아름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나도 소유 언니랑은 딱히……. 가끔 연락만 하는 정도고.”
“그 정도만 해도 돼요. 설하 쌤은 에리카랑 친하죠?”
“응, 연락 자주 하구. 가끔씩 만나기도 하구…….”
백설하는 그게 자랑스러운지 뺨까지 살짝 붉어졌다.
“우리, 케이어스 멤버들한테 콘서트 표 줘요.”
“어?”
“우리 언제까지 걔네 얘기만 나오면 전전긍긍하고 있어야 하는데요? 막말로 걔네 꼴랑 이제 곡 두 개고, 회사빨로 인기 얻는 거 아녜요? 이참에 우리 클래스 보여줘요.”
우리는 콘서트를 열 규모까지 성장했다.
우리의 실력이 이 정도다.
너희가 밟지 못한 땅을 우리가 지금 밟고 있다.
아마 너희가 1, 2년은 밟지 못할 땅을.
“맨날 맨날 우리만 패배감 느끼는 거 지겹지도 않아요?”
“아라쨩 패배감 느꼈어?”
“……아니. 어쨌든 내 말은, 우리만 계속 궁상떠는 거 싫다고. 걔네도 나름 아이돌이면 우리 콘서트 보고 느끼는 게 있을 거 아녜요? 거의 동시에 데뷔한 그룹인데, 우리가 고작 2년 차에 콘서트 완벽하게 하는 거 보면요.”
확실히 그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어찌 보면, 소녀연맹은 항상 케이어스에게 맞고 살아왔다.
운수도 지지리 없지, 데뷔와 마지막 컴백 시기를 케이어스와 맞춰버려서 음방 1위도 몇 번 하지 못했다.
만약 케이어스와 만나지 않았다면 십몇관왕을 달성하여 신인 걸그룹의 전설로 군림했을지도 모를 일인데 말이다.
그런데 케이어스보다 앞서 나가는 분야가 있고, 그걸 케이어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좋네.”
장하양이 동의했다.
그러자 조아라가 씨익 웃고 또 다른 제안을 꺼냈다.
“표는 우리 돈으로 사요.”
회사에 부탁해서 공짜 초대권을 보내주진 않겠다.
“우리가 직접 산 표를 보내는 거예요.”
그건 곧 소녀연맹 멤버들의 자신감과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초대권이 프린트한 도전장이라면, 그녀들의 돈으로 산 표는 직접 쓴 도전장이다.
멤버들은 저마다의 통장 잔고를 계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게 더 비장미가 있을 것이다.
조아라가 손을 내밀었다. 다른 멤버들은 그 위에 손을 겹쳤다.
“투쟁!”
“해방!”
“소녀!”
“연맹!”
“승리!”
멤버들이 구호를 외치면서 전의를 다졌다.
그 가운데, 소외된 사람이 있었다.
리카였다.
‘난 누구한테 보내지?’
…….
……!
‘정호환 이사님한테 보내야겠다!’
리카, 라이벌 선언!
“케이어스 애들 다 온다고 생각하면요. 원래도 대충하면 안 되지만, 진짜 팬분들 눈이 뒤집힐 정도로 좋은 무대 꾸며봐요. 과감한 아이디어도 팍팍 내고.”
조아라는 대결 분위기로 흐르자 갑자기 기운이 확 살아났다.
“과감한 아이디어면, 어떤 거?”
“음, 하양 언니는…… 하늘을 난다던가?”
“아하하.”
“그건 농담이고요. 현실성 갖춰서 진짜 못 잊을 무대 만들어봐요.”
* * *
한구인이 조진만이 가져온 연출 계획서를 읽으면서 난색을 표했다.
“조 사장님, 3D 와이어 플라잉은 뭐기에 이렇게 비쌉니까?”
“그거요? 네 개의 각을 기준으로…… 예를 들면 사각형의 꼭지에 와이어를 달고 그 중앙에 사람을 두는 겁니다. 그럼 각 점의 와이어 길이를 조종해서 사람을 자유롭게 날게 할 수 있습니다.”
“아…… 이게 왜 필요합니까?”
“하양 씨가 ‘에피타프’를 부르면서 나실 겁니다. 하얀 옷을 입고요. 천사 같지 않겠습니까? 이미 천사시지만 말이죠, 하하.”
한구인은 다시 연출 계획서를 보았다.
그리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정중히 말했다.
“이건 한 무대에 쓰기엔 과도한 비용…….”
“이건 안 하는 게 손해네요! 사장님한테 꼭 말씀드릴게요!”
“하이잇(네에엣)!”
성필과 조진만의 티키타카에 한구인이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틀라스사(社)의 직원은 당연한 의문을 떠올렸다.
‘저런 인간이 어떻게 이사 자리에 앉아 있지?’
가로 엔터와 아틀라스의 콜라보레이션은 환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