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아아,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성필은 반가움을 띠면서, 동시에 사무적으로 들리는 어투를 구사했다.
철저한 임기응변이었다.
성필이 방 안을 가리키자, 멤버들은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 침묵을 지키면서 줄줄이 들어왔다.
“어쩐 일로 전화 주셨어요?”
[……아, 음.]
성필은 시각과 청각을 완전히 분리하고 있었다. 눈으로는 멤버들을 쫓고, 귀로는 진저에게 집중했다.
일단 멤버들에겐 의심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휴일에도 업무 전화를 받는다고 생각하여 성필을 동정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진저는.
[어쩐 일…….]
목소리의 구석구석, 사이사이마다 섭섭함이 넘쳐흘렀다.
반가움을 표하지만 동시에 사무적으로 대하는 성필의 말투에 실망한 게 분명했다.
[저는…….]
“죄송한데 잠시만요.”
성필은 핸드폰을 음소거 모드로 만들었다.
“얘들아 나 잠깐 전화하고 올게. 적당히 자리 잡고 있어.”
“사축(社丑)은 안타깝네요…….”
“리카, 난 사축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노동자야. 포스트 포드주의 세대가 바라는 이상적인 노동자상이지.”
“‘화성인 지구 정복’이란 영화 추천드릴게요!”
리카와의 한담을 마친 성필은 집 밖으로 나왔다.
* * *
성필이 나간 방에서 멤버들은 침대며 바닥, 의자를 차지하고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진짜 케이어스 브로마이드 다 사라졌구나.”
조아라는 신기하단 눈빛으로 성필의 방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아이돌 덕후인 성필의 방엔 소녀연맹의 브로마이드와 포스터밖에 없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침대 위였다.
“저건…… 좀 깨네.”
소녀연맹의 ‘아니’ 때 구성품이던 브로마이드가 침대 위의 천장에 붙어 있었다.
성필은 자려고 침대에 누울 때마다 멤버들을 보게 될 터이다.
“아니, 깨는 게 아니라 조금 소름도 돋네. 다들 기분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장하양이 순진무구한 말투로 반문했다.
“아니, 우리가 아는 사람이 우리 사진을 벽에 붙이고 있잖아요.”
“박 이사님이시잖아.”
“그렇긴 한데…….”
“우릴 아끼시는 거 같아서 난 좋은데?”
그리 말하는 장하양은 침대 위 천장을 보고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옛날에 아이돌 콘서트 블루레이를 보기 위해 그녀 혼자 성필의 집으로 왔을 때, 그녀가 성필을 설득해서 브로마이드들의 위치를 바꾸었었다.
그때의 위치는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흐음.”
조아라는 어딘가 마음에 안 든단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리카가 벌떡 일어났다.
다들 그녀의 행동에 집중했다.
리카가 갑자기 성필의 컴퓨터 전원을 켰다.
“리카?!”
백설하가 깜짝 놀라면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바, 박 이사님 물건을 마음대로 만지면 어떡해…….”
“갑자기 검색해보고 싶은 게 생겼어요!”
“스마트폰 있잖아…….”
“큰 화면으로 보고 싶어요!”
거짓말인 게 딱 눈에 보였다.
“리카, 그만하고…….”
“쌤은 안 궁금한가요!”
“응?”
“박 이사님의 컴퓨터 바탕화면에 뭐가 있는지요! 진짜 잠깐만, 아주 잠깐만, 바탕화면만 보고 끄는 거예요!”
성필의 컴퓨터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확실히 궁금하긴 하다.
청춘 드라마 같은 곳에서도 익숙한 클리셰가 아닌가.
여주인공이 우연히 남주인공의 집에 가게 되어 컴퓨터 내용물을 본다던가.
‘궁금해…….’
특히 혼자 사는 집의 컴퓨터이니, 성필의 바탕화면에는 가식이 없을 것이다.
백설하는 호기심과 도덕 사이에서 고민했다. 아니, 누군가 리카를 말려주길 바라면서 자신은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후후, 다들 동의한 거네요!”
리카가 씩 웃으면서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
“에?”
비밀번호가 걸려 있다.
“손나(그런)! 혼자 사는 집에서 쓰는 컴퓨터인데 비밀번호라니!”
“아저씨 되게 조심스럽네. 안에 보통은 아닌 게 들었겠는데.”
보통이 아닌 게 들었으면 뭐 하는가.
비밀번호가 걸렸으면 볼 수도 없는데.
“이, 이제 그만하면 됐지?”
백설하는 차라리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만약 그대로 켜졌다면, 백설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모니터로 다가갔을 것이다.
“박 이사님 오실 수도 있으니까 빨리 끄고…….”
“잠만, 나 예상 가는 번호 있어.”
다들 신아름을 보았다.
그녀는 위풍당당하게 컴퓨터 앞으로 다가가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조아라가 의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뭐 치려고? 아저씨 생일?”
“내 생일인데?”
“푸하하핰!”
조아라는 세상이 떠나가라 웃었다.
신아름을 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의표를 찌르는 답이었기 때문이다.
웃기다.
왜 웃기냐고?
“그게 말이 되냐? 네가 뭐 얼마나 예쁘다고 네 생일을 비번으로 설정해?”
“허.”
신아름도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녀 자신이 말하고도 말도 안 된단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난스레 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비번이 생일이려면 가족쯤은 돼야지.”
조아라의 태클에도 아랑곳 않고 신아름의 자신의 생일을 입력했다.
“아님 여친이거나…….”
“어?”
신아름이 당황한 기색으로 움찔했다.
다들 후다닥 모니터 앞으로 모여들었다.
“……뭔데?”
열렸다.
멤버들이 신아름을 쳐다보았다.
신아름의 얼굴이 더는 없을 정도로 붉게 달아올랐다.
* * *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걸음이 급했다. 스스로 깨달은 게 아니라, 평소보다 크게 울리는 계단 복도의 걸음 소리를 듣고 알았다.
‘내가 진짜 어지간히 놀란 게 아니구나.’
설마 멤버들이 오는 시점에 딱 진저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다니. 예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멤버들이 건물 입구로 들어오고 나서 바로 온 전화라, 당연히 집 문을 열어달란 연락인 줄 알았건만.
‘하긴, 내 집 앞에 왔으면 초인종을 누르거나 노크를 했겠지. 왜 전화를 걸겠어.’
어쨌거나, 진저는 왜 갑자기 전화한 걸까?
옥상으로 올라온 성필은 핸드폰 액정을 보았다. 그리고 등골에 섬찟한 감각이 내달렸다.
‘음소거가 아니라 스피커폰 모드로 돼 있잖아?’
그 말은, 진저가 성필과 멤버들이 같이 있단 걸 알았다는 뜻이다.
담당 아이돌과 너무 격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나 싶어 살짝 부끄러웠다.
“진저 씨?”
[얘기 끝나셨슴미까?]
“네에……. 처음에 딱딱하게 말씀드린 거 죄송해요. 정말 깜짝 놀랐어서요.”
[아님미다. 신경 안 씀미다.]
신경 안 쓴다면서, 진저는 삐친 티가 가득했다.
사람과 연락을 유지한단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끊임없는 관심을 쏟고 지속적인 만남과 대화가 필요하다.
‘아마 진저 씨도 그런 맥락에서 연락해주신 거겠지.’
그런데 모처럼 마음먹고 연락했더니, 사무적인 말투의 답이 돌아오면 기분이 상할 만도 하다.
성필은 재빨리 수습을 시도했다.
“아시겠지만, 제가 케이어스 팬이거든요. 하하, 웃기죠. 아이돌을 프로듀싱하는 사람이면서, 담당 아이돌한테 다른 그룹을 좋아한단 걸 들키는 게요. 그래서, 저희 애들이 제가 케이어스 분들 얘기하는 걸 좀…… 그으…….”
성필은 ‘싫어한다’와 ‘거부감’을 대체할 단어를 머릿속에서 뒤졌다.
“질투…… 하는 경향이 있어요. 진저 씨한테 연락 오자마자 저희 애들이 나타나서, 그걸 들키면 저 정말 죽을 수도 있거든요 하하…….”
[……그렇슴미까?]
설득되는 기미가 보인다. 성필은 목소리에 더욱 생기를 불어넣었다.
“네네! 사실 팬심이란 게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잖아요? 제가 신경 쓴다고 쓰는데, 은근슬쩍 케이어스를 사랑하는 마음이 자꾸 드러났나 봐요. 그래서 애들이 괜히 좀 민감해지고…….”
[질투함미까?]
성필은 자신의 단어 선택이 적절하지 않았단 사실을 깨달았다.
‘질투’는 ‘싫어한다’와 ‘거부감’보다 딱히 나을 게 없었다.
하지만 말을 되돌릴 순 없었다.
“……네.”
[알겠슴미다.]
진저의 목소리는 평상시로 돌아갔다. 그에 성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랜만에 연락해서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일은 간신히 넘길 수 있었다.
‘내 부탁에 소녀연맹 자체 예능에도 출연해주신 분이야.’
진저는 가로 엔터 신규 채용 홍보 영상에 기꺼이 출연해주었다.
티어급 아이돌이 타 회사의 영상에 출연하는 데 얼마나 큰 고민과 고려가 있었을지, 성필은 굳이 그녀가 얘기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큰 빚이야.’
그리고 기꺼이 그 빚을 지게 해준 진저에게, 성필은 감사한 마음뿐이다.
혹여라도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요. 잘 지내시죠?”
[조금 피곤함미다.]
“네? 왜요?”
[이건 비밀인데, 저희가 컴백을 준비 중입니다.]
그게 비밀인가?
케이어스의 활동 공백이 9개월에 이르렀으니, 컴백 준비를 하고 있단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케이어스 팬덤인 유스 내에선 ‘케이어스 1년 주기설’이 퍼지고 있다.
‘케이어스가 1년마다 컴백한단 가설이지.’
데뷔곡인 ‘카오스’ 다음 ‘가이아’가 나오는 데 딱 1년이 걸렸다.
다음 컴백도 1년 정도 걸리리라고 예상 중이며, 이는 사실일 터였다.
‘전생에선 1년보다 짧았지만…….’
‘카오스’ 다음으로 컴백하는 주기는 9개월이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성필 자신이 무언가를 바꾸었는지, 케이어스는 컴백 주기도 밀리고 컴백곡마저 바뀌어버렸다.
[컴백 준비로 하루하루 너무 힘듬미다.]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하지만 기다려주시는 팬분들이 있으니까 힘들지 않슴미다.]
“힘들단 거예요 안 힘들단 거예요?”
[복잡함미다. 죽을 거 같으면서도, 팬분을 떠올리면 힘이 남미다. 저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기…….]
“……기?”
[기, 기쁨미다…….]
성필은 진저와 처음 대면했을 때를 떠올렸다.
술에 취해 무심코 들렀던 연습실.
그곳에서 성필은, 전생의 최애였던 진저의 속내를 들을 수 있었다.
‘진저 씨는 압박감이 대단했었지.’
그녀는 팬을 거의 적으로 인식했었다.
그녀가 고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원인, 아니. 원흉으로 알고 진득한 분노와 원망까지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팬 덕분에 힘을 낼 수 있다니. 성필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박 이사님도 기대하고 계심미까?]
“그럼요. 매일 케이어스 SNS 확인하는걸요.”
[왜 소녀연맹분들이 박 이사님한테 뭐라고 하는지 알 거 같슴미다.]
“하하, 그렇죠. 그래도 숨기는 게 잘 안 되네요.”
무언가를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니까.
어쩌면 성필은 연애를 하지 않는 대신, 그 사랑을 아이돌로 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 이사님.]
화기애애한 대화가 끝나고 진저가 살며시 어조를 낮추었다.
[일본에서 교통사고 당하셨다고 들었슴미다.]
“교통사고요?”
성필은 금시초문이었다.
[깁스도 하셨다고…….]
아, 세이코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네, 그랬죠. 인연도 없는 목발 짚고 다니느라 얼마나 고생했던…….”
[왜 말씀 안 해주셨슴미까?]
“네?”
[그렇게 큰일이 있었는데, 왜 저한테는 안 말해주셨슴미까?]
“어, 아니…….”
딱히 알릴 만한 일이 아니니까.
성필은 아픈 사실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사람이라 근황을 알릴 수 있는 게 아니고서야. 아픈 사실을 말하는 건 사실상 병문안을 오라는 압박이나 다름없으니까.
“굳이 말씀드릴 일은 아닌 거 같아서요.”
[……그렇슴미까.]
성필은 진저가 섭섭해한단 걸, 아주 섭섭해한단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라도 알 것이다.
[박 이사님이…… 옛날에 제가 드렸던 말씀을 단순한 체면치레라거나…… 그냥 한 말이라고 생각하시는지도 모르지만…….]
진저는 마른 풀을 쥐어 짜내 물을 뽑아내려는 것 같았다. 손이 아릴 때까지 풀을 짜서, 그녀는 마침내 목소리란 물방울로 만들었다.
[제가 은인이라고 말씀드렸던 건 사실이었슴미다. 계속, 계속 말씀드렸슴미다……. 그런데…….]
“젠따오 니 워 예 헌 까오씽(저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션머(네)? 아, 아니, 네?]
“이허우 짜이찌엔(나중에 또 만나요). 시왕 징창 지안 다오 니(자주 만나면 좋겠습니다).”
[어, 어?]
성필이 낮게 웃었다.
“기억하고 있어요. 제가 미국 떠날 때, 진저 씨가 새벽에 배웅해주시며 하던 말씀이요.”
[관화(官话) 할 줄 아셨슴미까?!]
“아뇨. 계속 마음속에 되새기다가, 저희 회사 한 이사님이란 분한테 여쭤봤어요. 그리고 받아적어서 계속 외웠어요.”
[…….]
“저는 솔직히…… 네. 진저 씨의 은인이란 말씀을 가볍게 생각했어요.”
사람은 살면서 많은 은인을 만난다.
하지만 그 은혜를 갚거나 오래도록 되새기는 경우는 드물다.
학창 시절을 추억하면서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의 이야기를 즐겁게 하면서도, 스승의 날엔 한 번도 찾아뵌 적 없는 사람처럼.
은인이란 추억 속에서 잊히기 마련이다.
성필은 진저의 마음도 그것과 비슷한 선상에 있으리라 여겼었다.
“오히려 제가 진저 씨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진저 씨가 결국엔 부담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아니, 아님미다, 전혀 아님미다…….]
“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연락해주신 거 보니, 더 진지하게 생각해도 되는 거죠?”
[네!]
“그럼, 자주 만나요.”
성필은 진저의 배웅 인사를 한국어로 돌려주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 이사님도 제가 다치면 걱정해주셔야 함미다.]
“저야 뭐, 유스로서 항상 걱정하죠.”
성필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20분이나 지나 있었다.
“진저 씨, 이것도 비밀인데요.”
[뭠미까?]
“저희 애들이 콘서트 준비하고 있어요. 조만간 할 텐데, 시간 있으시면 보러 오세요.”
[아, 콘서트! 꼭 감미다! 가겠슴미다!]
진저는 조아라의 팬이라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꼭 보고 싶겠지.
“네. 저도 케이어스 앨범 기대할게요.”
[정규 앨범임미다! 곡이 엄청 많이 들어감미다! 그, 그리고 제 솔로곡도 있으니까 꼭 듣고 감상 말해주십시오!]
성필은 그녀와의 전화를 마치고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종종걸음을 밟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내려가는 걸음이 점점 빨라지다가 결국엔 뜀박질로 변했다.
기분이 너무나 좋아서 힘이 주체가 안 될 지경이다.
쿵쾅대며 문 앞에 선 성필은 숨마저 살짝 거칠어진 마당이었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매우 빠르게 누르고 힘차게 집 안으로 돌입했다.
“얘들아 나 왔……!”
우당탕탕!
멤버들이 성필의 컴퓨터 앞에 모여 있다가 이리저리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다들 도망간다고 도망갔지만, 의자에 앉아 마우스를 쥐고 있던 장하양은 제때 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장하양이 불안하게 고개를 돌려 성필을 바라보았다.
“……뭐야.”
성필이 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왜 비밀번호가 풀려 있어? 아, 아니, 어떻게 풀었어?!”
성필이 멤버들을 둘러보자, 신아름이 머쓱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제, 제 생일요…….”
“…….”
성필은 다시 모니터를 보았다.
그곳에 뜬 건 성필의 보물이었다.
케이어스 에리카의 움짤.
그녀가 엔딩 포즈를 취하면서 고개를 완벽한 각도로 쳐들었다. 그녀의 주위로 반짝이는 꽃가루가 하늘하늘 흩날렸다.
“…….”
성필이 황망하게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러자 멤버들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변명을 시작했다.
먼저 장하양이었다.
“리카가 먼저 켜보자고 했어요. 남자 집에 왔으면 꼭 컴퓨터를 검사해야 한다면서요.”
리카가 변명했다.
“다들 동의한 거예요! 저만 보자고 한 거 아니에요! 애, 애초에 비밀번호가 걸려서 아타시(저)는 포기하려고 했어요! 아름이가 짐작 가는 거 있댔어요!”
신아름이 격렬하게 대응했다.
“나도 설마 내 생일일 줄 몰랐다고! 팀장님 진짜예요! 그냥 장난으로 입력한 건데 열렸다고요! 그, 근데 이건 팀장님 잘못이잖아요!”
신아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생일 같은 걸로 비밀번호를 설정해두니까 막 아무한테나 뚫리는 거예요! 누, 누가 알았나? 하 참나! 남들, 남들이 모르는 걸로 하지 왜 내 생일로오……. 그리고 또, 그리고 그리고 조아라가 찾아보자고 했어요!”
조아라가 변명을 시작했다.
“나는 진짜 이렇게까진 안 하려고 했거든요? 인터넷 검색 기록 보는 건 너무 잔인하니까 내부 파일만 보자고 했어요!”
“아라쨩 그것도 충분히 심해!”
“넌 쫌 닥……! 어휴, 아니, 파일 탐색기 누르면 최근에 연 폴더 보이잖아요? 쪼, 쪼끔 훑어보니까 ‘GIF’란 폴더 있길래애…… 그…… 살짝 궁금해서어……. 진짜 이걸로 아저씨 약점 잡고 그 약점으로 춤춰달라고 하거나 정장 입으라고 할 생각은 하나도 없었어요! 딱 파일 목록만 보고 무덤까지 가져가려고 했는데, 쌤이! 쌤이 되게 과학적인 이유를 들면서……!”
“맞아요.”
백설하가 당당하게 수긍하자 멤버 전원이 눈을 크게 떴다.
“‘케이어스’ 폴더가 있어서, 궁금했어요. 박 이사님은 어떤 이미지와 움직임에서 영감을 얻으실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다 시켰어요.”
백설하가 눈동자에 결연한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니까…….”
백설하가 무릎을 팍 꿇고 석고대죄했다.
“죄송합니닷!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애들 말릴 생각도 못 했어요! 정말 정말 죄송합니닷! 파일 몇 개만 보고 끌려고 했는데! 사진이랑 움짤 조금만 보고 끌려고 했는데! 도저히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어요!”
“…….”
성필이 침묵을 지키자, 멤버들도 하나둘씩 백설하의 곁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다행이다.’
성필은 짬짬이 시간을 내어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공부해왔다.
그 능력을 발전시킬 겸, 부족한 실력으로나마 케이어스 라이브 방송이나 미디어 방송을 모아 팬 영상을 만들었었다.
케이어스 멤버들이 연출하는 가슴 따뜻하고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장면만을 편집하여 모은 수십 기가의 결과물.
그건 들키지 않아서 다행…….
“‘찐사랑 모먼트♥’랑 ‘멤버 케미 하이라이트♥’랑 ‘우리 케랑둥이들♥’도 진짜 안 보려고 했는데……”
“프라이버시 침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앗!”
박성필, 실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