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37화 (337/760)

337화

콘서트 계획을 위해 가장 먼저 확정해야 할 게 무엇일까.

연출? 장치? 무대 구조? 좌석 배치? 이펙트? 세트리스트?

전부 중요하지만…….

“어디서 공연할지, 내일까지 정해야 해.”

가장 중요한 건 공연 장소 그 자체다.

장소가 정해져야 설치할 무대의 구조나 장비 등도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가로 엔터는 그 결정을 한계가 임박한 순간까지 미뤄왔다.

“자, 오늘이야말로 정하자.”

아침의 임원 회의.

홍규헌은 회의실 안쪽으로 향해 화이트보드를 중앙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커다랗고 선명하게 두 단어를 적었다.

[올림픽홀 vs 올림픽 핸드볼 경기장]

“오늘 안에 결론이 나와야 해.”

회의에 재석한 인원은 사장인 홍규헌과 성필, 손혜빈, 한구인이었다.

최종 결정권은 사장인 홍규헌에게 있다.

하지만 이사진의 수는 홀수이기에, 그들끼리만 투표해서도 유의미한 다수결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

“이미 질리도록 얘기했지만, 쟁점을 다시 짚어보자. 신중하게, 천천히. 먼저 올림픽홀부터 볼까. 박 이사.”

“예.”

성필은 조진만에게 받은 올림픽홀 공연장의 자료를 훑었다. 온갖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하나뿐이었다.

좌석 수.

“올림픽홀은 대략 3,000석입니다. 조 사장님의 말로는, 무대 구조에 따라 늘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무대인 A스테이지 외에, 관객석으로 이어진 돌출 무대인 B스테이지를 만들면 관객석을 떼어내야 한다.

거기서 관객과의 거리감을 줄이기 위해, 돌출 무대 끝에 또 다른 좌우 돌출부 C스테이지를 만들면 관객석은 더더욱 줄어든다.

이런 식으로 객석의 수와 무대의 크기는 반비례한다.

“관객의 만족감과 저희의 수익을 교환하는 거죠. 아무래도 스테이지가 크면 저희 애들이 보여줄 수 있는 퍼포먼스의 폭이 확대됩니다.”

일단 관객들이 소녀연맹을 가까이서 볼 수 있을 테니, 공연의 만족도가 급상승할 것이다.

“조 사장님은 돌출 무대인 B스테이지 제작까지 보고 계십니다. 상황에 따라 C스테이지도 고려할 수 있다고 하시고요. 지금으로선 3,000석 이하로 보는 게 맞겠죠.”

“3,000석…….”

한구인이 작게 읊조렸다.

티켓값을 100,000원으로 책정한다면, 공연 한 번으로 3억의 매출을 얻는다.

“박 이사님, 보통 이 정도 규모로 시작합니까?”

“아니요. 중소 걸그룹으로선 이례적인 첫 콘서트 규모예요. 걸그룹은 관객 응집력이 낮거든요.”

그래서 소녀연맹의 선배 걸그룹들은 작게는 500석 규모의 공연장에서 첫 단독 콘서트를 열기도 했었다.

케이어스의 선배인 KS 엔터의 전 세대 걸그룹은 올림픽 홀에서 첫 콘서트를 열었을 정도이니, 그것만으로도 소녀연맹의 성공이 어느 정도 수준에 달했는가 파악하긴 어렵지 않았다.

“물론 몇 년 전이랑 현재를 같은 선상에서 파악하면 안 되겠지만, 올림픽 홀은 콘서트 데뷔 장소로서 과분하기까지 한 느낌이 있죠.”

“하지만, 소녀연맹 분들은 걸그룹 중에서도 독보적인 성적을 거두고 있지 않습니까?”

정규 앨범 사전 예약 판매량 12만 장.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치다.

걸그룹이 10만 장 이상을 팔면 초초초대박인 게 업계의 실정이었다.

3대 기획사의 걸그룹이 아니고선 꿈도 꾸지 못할 수치다.

“그렇긴 한데, 온전히 저희 덕은 아니거든요.”

“온전히 소녀연맹 분들의 덕이 아니란…… 무슨 뜻입니까?”

“우리 애들의 실력이 좋고, 저희 회사의 프로듀싱 전략이 먹혀들어 간 것도 성공의 중요한 이유겠지만. 시류에 잘 올라탔단 걸 부정하면 안 돼요.”

3세대 걸그룹 선배들이 남겨준 유산.

케이팝의 세계화와 팬덤화.

현 시기부터, 새로 등장하는 걸그룹들은 선배들의 유산을 마음껏 누리게 된다.

걸그룹은 대중성만이 살길이다.

그 전제를 깨부수고, 걸그룹 또한 보이그룹처럼 충성도 있는 팬덤을 거느리게 된다. 물론 여전히 보이그룹의 팬덤엔 상대도 안 되지만.

“소녀연맹의 성공을, 3세대 초창기 걸그룹과 같은 선상에 놓고 파악하면 안 돼요. 만약 저희가 몇 년 전에 나와서 이 성적을 거뒀으면 세상이 발칵 뒤집혔겠지만, 지금은 아니거든요.”

“아직은 과도기란 거군요.”

“예. 앨범 판매량이 관객 응집력으로 연결될지 파악하긴 어려워요.”

전생을 겪었던 성필이지만, 소녀연맹의 티켓 파워를 예상할 수는 없었다.

앨범 구매량과 콘서트 파워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계속해서 보아왔으니까. 소녀연맹도 그런 꼴이 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솔직히 시작부터 올림픽홀을 찜한 것부터가, 저는 불안하거든요. 안전하게 2,000석 이하 규모 블루스퀘어에서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어요.”

하지만, 소녀연맹의 눈부신 성공은 성필의 조심스러움을 한 꺼풀 벗겨내었다.

올림픽홀부터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왔고, 결국 후보에 올림픽홀이 포함되었다.

“결국 제 말은 자만하지 말란 거지만, 올림픽홀을 안전빵으로 고른 것부터가 자만 같긴 하네요.”

성필이 겸연쩍게 웃자 손혜빈이 바통을 받았다.

“올림픽홀 경쟁자가 핸드볼 경기장이니까, 자만하는 게 맞지.”

올림픽 핸드볼 경기장.

좌석 수 약 5,000석.

매진되면 매출 5억.

“우리가 고려할 건 이거 같거든.”

손혜빈은 화이트 보드 쪽으로 걸어가서, 홍규헌이 쓴 공연장 이름 아래에 주석을 붙였다.

판서를 끝낸 그녀가 마카를 탕 내려놓았다.

[올림픽홀]

“그나마 매진에 가까운 성적을 내서 체면치레를 하느냐.”

[핸드볼 경기장]

“소녀연맹이 대세임을 각인시키기 위해 도전을 해볼 테냐.”

소녀연맹이 첫 콘서트를 핸드볼 경기장에서 연다는 소식이 퍼진다? 그럼 아이돌판은 진실로 소녀연맹의 파워를 체감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대세에 편승하고픈 마음이 있다.

언더를 응원하거나 힙하게 보이고 싶은 심리 이상으로, 자신이 대세이길 바란다.

“고작 2년 차 걸그룹이, 중소 기획사 걸그룹이 핸드볼 경기장에서 첫 단독 콘서트를 연다? 어마어마한 일이거든.”

소녀연맹의 팬이 아닌 이들도, 소녀연맹의 성장세를 보고 팬이 되길 바랄 수도 있다.

고작 2년 차에 이 정도 성적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그 기적 같은 여정에 자신도 함께 동참하고 싶다.

그런 심리가 반드시 작용한다.

“대신 이익 면을 포기해야겠군요.”

“맞아요. 핸드볼 경기장을 빌리는 게 당연히 더 값이 드니까요. 더 넓으니까 무대도 더 크게 설치해야 하고, 조명도 더 많고, 장치도 더 많고. 매진시키지 못하면 출혈이 크죠. 설령 올림픽홀의 관객 수인 3,000명 정도를 동원하더라도, 핸드볼 경기장에서 그 정도 관객만 부르는 건 이익도 뭣도 아니에요.”

“……멤버분들도 마음이 편친 않으시겠군요.”

만약 핸드볼 경기장 관객석의 2/3가 찼다고 친다면, 멤버들은 무대에 섰을 때 어떤 마음일까?

관객석의 1/3이 비어있는 걸 보면 얼마나 상심할까.

“보이그룹이 우리 애들만큼 앨범 팔았으면 그냥 바로 핸드볼 경기장 찍는 건데.”

홍규헌은 답답함에 그리 말했다.

그녀의 한탄엔 임원 모두의 근심이 담겨 있었다. 차라리 속 편히 고를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좋았을 거란 근심이.

“조 사장님이 그러셨지 않습니까.”

한구인이 말했다.

“게임으로 따지면, 한국은 소녀연맹의 본진이라고 말입니다. 본진에서의 성세가 다른 나라에서 뒤질 순 없는 노릇이라고요.”

케이팝 비즈니스가 사업적으로 수요를 예측할 때 국내 지표만 보던 시절은 끝났다.

국내와 세계를 같이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글로벌 인기가 많다 하더라도 본진인 한국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반대인 경우도 있지만, 한국에서의 인기가 세계에 반영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그러니 무리를 해서라도 핸드볼 경기장으로 잡는 게 어떻습니까? 저희가 근심하는 게 바보 같을 만큼 큰 성과를 거둘 수도 있습니다.”

“도박이라. 한 이사답지 않네.”

“비이성적이란 건 알지만, 기대를 걸어보고 싶습니다.”

한구인은 5,000석이 가득 채운 팬의 바다를 상상했다. 상상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찌르르 울렸다.

“일단 한국에선 명예를 챙기는 겁니다.”

“초대권을 많이 뿌리더라도?”

“……그렇습니다.”

객석이 전부 차지 않으면 어떡할까?

초대권을 이벤트로 뿌린다.

협찬사나 협력사의 이벤트로 콘서트 티켓을 배부해주고 관객을 끌어모으는 방법이다.

여러 아이돌 그룹이 이러한 방법으로 본인의 역량을 초과한 콘서트 집객률을 기록하곤 했다.

“해외에선 현실을, 한국에선 이상을 택하는 게 좋아 보입니다. 왜,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 데는 홍보 또한 중요하지 않습니까.”

신년 사업 설명회에서 CEO가 춤을 춘다거나, 아니면 기묘한 프레젠테이션을 한다거나.

보통은 정상적으로 사업 설명을 한다지만, 어떻게든 관심과 호응을 끌기 위해 발악하는 건 거대 기업이라고 다르지 않다.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가로 엔터는 일반 기업보다 평판이 더 중요하다.

“첫 콘서트로 핸드볼 경기장. 이 기록은 영원히 소녀연맹의 역사에 남을 겁니다.”

중소 기획사 소속으로선 믿지 못할 기록이 역사에 남아 소녀연맹을 밝힐 것이다.

“개인적으론 안전빵이 좋다고 생각하지만요.”

손혜빈이 한구인의 이상에 찬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한구인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옹호하지 않았다.

기업의 미덕은 도전이지만, 기업의 목적은 생존이다. 어떻게든 생존하는 게 중요하기에, 기업은 안전을 택하는 게 당연시된다.

대기업이 망하지 않는 이유는 도전보다 안전을 택하는 비율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박 이사는?”

홍규헌이 물었다.

“저는…….”

전원의 이목이 집중되는 상황.

성필은 진지하게 굳히고 있던 표정을 풀고 허허롭게 웃었다.

“오늘 안에 결정이니까,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될까요?”

“아직 답이 안 나왔어?”

“예.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어. 그럼 오후에 조진만 사장 올 때까지만 결심해 둬.”

“알겠습니다.”

“박 이사만이 아니야.”

홍규헌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둘은 이미 결정한 것 같지만, 최후의 최후까지 모든 사항을 고려해 둬. 계속해서 자기 생각을 뒤집고, 반박하고, 그래도 흔들리지 않을 때 선택하는 거야.”

그녀는 이사로서의 자세를 말하고 있었다.

회사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앉은 게 이사다. 그들은 평사원보다 권력도, 책임감도 크다.

자신의 결정에 책임감을 가지고, 그 결정이 실패했을 때의 보험도 준비하며, 끝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홍규헌은 이번 선택에서 이사들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길 바랐다.

“회의 끝.”

결정까지 4시간.

* * *

“응, 고생했어.”

응접실.

성필은 맞은편에 앉은 남자 연습생을 향해 친근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오늘은 계속되던 연습생 상담이 끝나는 날이었다. 마지막 차례였던 연습생은 상담을 마치자 곧게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그래. 연습 열심히 해.”

연습생은 등을 보이지 않으며 문을 향해 물러났다. 누구에게 배웠는지 몰라도, 18살이란 나이답지 않게 과한 예의를 보였다.

성필은 쓰게 웃으면서 나가는 그를 보다가 황급히 불러 세웠다.

“사무엘아.”

김사무엘이 문을 열다 말고 뒤로 돌았다.

“예, 이사님.”

“그러고 보니 이걸 안 물었었네. 왜 우리 회사에 들어오기로 했었어?”

“홍규헌 사장님께서 권해주셨습니다.”

김사무엘은 한구인이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가는 보육원에 속해 있다.

그래서 막연히 한구인이 권했겠구나 생각했었는데, 홍규헌이 직접 설득했다니.

성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김사무엘은 다시 과하게 예의를 차린 인사를 보내고 응접실을 나섰다.

‘18살에 아이돌 연습생을 시작하다니.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김사무엘은 평균적으로 연습생을 시작하는 나이에 비하면 꽤 나이가 많다. 홍규헌도 그걸 알 테지만, 김사무엘의 재능을 보곤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말도 안 되게 잘생겼어.’

수많은 아이돌이 성공과 실패를 거듭한 현재. 일반적으로 팬몰이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얼굴이 있다.

아이돌 최적화형 미남 말이다.

여러 기획사는 상품성을 보고 정형화된 타입의 미남을 뽑는다.

하지만, 김사무엘은 그런 정형화된 외모와는 다르면서도 빛이 날 만큼 잘생겼다.

‘만약 사무엘이 데뷔하면, 새로운 비주얼 스테레오타입이 될 수 있겠네.’

다들 김사무엘 같은 얼굴을 찾으려 혈안이 될지도 모른다.

성필은 마지막으로 연습생들의 프로필을 확인한 후, 서류를 추리고 응접실을 나가려 했다.

그런데 그때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들어온 건 리카였다.

“이사님밖에 없나요?”

“어, 나뿐이야. 왜 그렇게 조심스럽게 들어와?”

“남자 연습생이랑 말 섞으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아타시(저)는 징계받기 싫어요!”

리카는 성필의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당돌하네. 감히 가로 엔터 이사님의 시간을 마음대로 뺏으려고 해?”

“아티스트의 면담 요청이에요! 순순히 받으세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아니, 친구로서의 대화 요청이에요!”

“말해봐.”

리카가 느와르 영화의 깡패처럼 껄렁이는 자세를 잡았다. 다리를 꼰 그녀가 나른한 눈빛으로 성필을 응시했다.

“우리 리더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들었어요!”

말투는 전혀 느와르가 아니라, 성필은 무심코 웃어버렸다.

“내 집에 오는 거?”

“네! 비합리적인 결정이에요! 자고로 아이디어를 얻는 덴 선배들의 결과물을 보는 게 가장 좋댔어요!”

“오늘 선배들 콘서트 블루레이 잔뜩 가져왔거든. 줄 테니까 숙소 가서 다 같이 봐.”

“숙소의 오래된 테레비론 안 돼요! 박 이사님이 할부까지 껴서 산 커다란 테레비가 필요해요!”

“할부 안 꼈어.”

“에엑?! 몇백만 원을 일시불로 산 건가요!”

“살면서 차 외엔 할부로 사 본 경험이 없거든.”

“오오, 예상외의 금전 감각! 살림은 문제없겠네요! 친구 점수 10점 추가예요!”

“만점이 몇 점인데?”

“5점이요! 이미 절친을 넘어선 실버타운 메이트잖아요!”

“오늘따라 혓바닥이 기네. 아무리 부탁해도 내 집에 오는 건 안 돼.”

“히도이(너무해)!”

리카가 성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앙탈을 부리면서 마구 흔들었다.

“이사님 집을 탐방하겠단 가벼운 마음으로 부탁드리는 게 아니라구요! 저희는 최고의 콘서트를 위한 최고의 경험을 원해요! 선배님들의 빛나는 업적을 망막에 생생히 새기고 싶다구요!”

“와, 리카 너 한국어 진짜 잘 쓴다. ‘망막에 생생히 새기고 싶다’는 말 한국인한테서도 들은 적이 없는데. ‘이’ 모음으로 라임 맞추는 거 미쳤다. 랩 진지하게 배워볼래?”

“에, 그런가요? 흐흥, 마음껏 감탄하 말 돌리지 마세요!”

리카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애플 신제품을 프레젠테이션하는 스티브 잡스처럼 시선을 모았다.

“아시겠나요 이사님! 아타시(저)는 당연하고 다른 멤버들도 거의 콘서트를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콘서트 첫 경험을 애매한 성능의 스크린이랑 스피커로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첫 경험은 중요한 거니까요!”

“한국어 잘한다는 말 취소다.”

“생생한 경험이 필요해요! 콘서트의 열기를 최고로 즐기고 싶어요! 저희의 프로페셔널한 퍼포먼스를 위해서라도요!”

리카는 굉장한 달변이었으나, 성필의 마음을 돌리기는 힘들었다.

성필은 차라리 집에 있는 TV를 떼어내어 운송 업체에 맡겨 숙소로 전달하는 상상까지 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으로, 콘서트의 생생함과 열기는 작게 보든 크게 보든 상관이 없었다. 에너지는 매체를 불문하고 전달되는 법이니까.

“리카, 네가 그렇게 말해도…….”

하지만, 곧 성필의 생각이 바뀌었다.

“팬분들의 사랑을 받으려면 먼저 사랑받는 모습을 봐야 하니까요!”

사랑.

그 단어가 성필의 뇌리에 깊게 박혀,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전류 하나하나에 색채를 부여했다.

“……사랑?”

“하이(네)! 저는 어떨 때 팬분들이 좋아하는지 보고 싶어요! 사소한 환호나 감탄이라도 느끼고 싶어요! 그리고 선배님들의 모든 노하우를 흡수해서…….”

사랑받을 것이다.

콘서트장을 가득 채운, 소녀연맹만을 보고 소녀연맹만을 사랑하는 팬들에게, 끝도 없이 사랑받고 싶다.

“쌤이 그랬어요! 사랑하는 법만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랑받는 법도 중요하다구요! 그러니까…….”

“응, 그렇네.”

“네?”

성필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그가 자리를 뜨려 하자 리카는 적잖이 당황했다.

“이, 이사님?”

“난 가볼게.”

성필이 응접실을 떠나갔다.

그리고 리카는.

“…….”

충격받았다.

여태껏 그가 리카와의 대화에 질려 노골적으로 자리를 떴던 적은 없었다.

‘내, 내가 너무 몰아붙인 건가……?’

성필이 장난스럽게 ‘그만 좀 귀찮게 해!’라면서 도망갔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방금처럼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사라졌던 적은 없다.

‘내가…… 정말 귀찮게 했어……?’

리카는 한동안 우두커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

* * *

가로 엔터의 3층이 개방됨에 따라 자연스레 옥상까지 뚫렸다.

덕분에 흡연자들이 건물 밖의 흡연 구역까지 걸어갈 수고를 덜었다.

“후우.”

성필은 옥상을 찾았다.

담배는 끊었으니, 담배를 피우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는 점심을 먹은 후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나름 조용한 장소를 찾았다.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가끔 올라오는 직원들에겐 친절하고 간단히 인사한 후, 다시 난간에 팔을 걸치고 밖의 풍경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수십 분을 서 있으니 대강 갈피가 잡혔다.

“박 이사님.”

익숙한 목소리, 조진만이다.

성필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미팅까지 20분이나 남았는데, 일찍 오셨네요.”

“미리 도착하는 게 제 미덕이죠.”

조진만은 성필의 곁에서 담배를 태웠다.

어느 정도 침묵이 오고 간 후, 조진만이 은근한 투로 말했다.

“저희 아틀라스는 핸드볼 경기장을 추천합니다.”

“5,000석이요.”

“예. 안전한 집객을 위해선 초대권을 남발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얻을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했습니다. 즉각적인 상업성보다, 미래의 평판이요.”

“그런가요.”

“박 이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진만은 미팅에 들어가기 전, 의결권을 가진 이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에 성필은 간단히 답했다.

“저는 올림픽홀이 낫다고 생각해요. 아니, 올림픽홀로 해야 해요.”

“……어째서요?”

“조 사장님, 첫 콘서트예요.”

성필이 보는 풍경이 변했다.

넓게 펼쳐진 콘크리트 숲 대신, 무대 위에서 소녀연맹이 보게 될 관객석이 시야를 메웠다.

그녀들은 그곳에서 수천 명의 팬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 팬들과 만나야 해.’

첫 번째 콘서트.

영원히 소녀연맹의 기억에 남을 이벤트다.

“저는 애들한테 온전히 사랑받는 기분을 알려주고 싶어요.”

“온전히…….”

“네. 무대 위에서 무슨 짓을 해도, 설령 넘어져도 지지하고 좋아해주고 격려해주는 분위기요. 오직 사랑만 받는, 비유하자면 유아기 부모에게 받는 무조건적인 사랑을요.”

그렇기에, 관객석엔 초대권으로 앉은 사람들이 많아선 안 된다.

웬만해선 모두 제값을 주고 좌석에 앉은 이들만이, 소녀연맹의 팬만이 존재해야 한다.

소녀연맹을 향해 줄 것이 사랑밖에 없는 이들만이 필요하다.

“그 경험은 애들이 어떤 고난과 역경, 고통을 받아도 이겨나갈 힘이 될 거예요. 자신을 그처럼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환경이, 세계가 있단 걸 알게 되면요.”

그러니, 이건 회사와 팬이 소녀연맹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

영원히 가슴 속에 남아 죽을 때까지 보물로 간직하게 될 선물이.

성필이 난간 밖에서 조진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성필의 얼굴을 보고, 조진만은 생각했다.

“저는 애들한테 사랑을 주고 싶어요. 절대 지워지지 않을 사랑요.”

성필의 웃음이 참으로 맑노라고, 조진만은 생각했다.

“조 사장님이 저희 애들 팬미팅 만드실 때 그러셨죠? 어떤 일이든 첫 번째는 중요하다고요. 영원히 그 일의 첫인상을 결정하니까요. 제가 애들한테 줄 콘서트의 첫인상은,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온전하고 격렬한 사랑이에요.”

* * *

리카는 자신이 성필의 설득에 실패했단 사실을 알렸다. 그에 더해 너무 성필을 몰아붙인 나머지, 성필이 응접실을 매정히 떠났단 이야기도 했다.

“그러게 내가 하지 말랬잖아.”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백설하는 탓하는 듯하면서도 리카의 등을 쓸며 따스하게 위로해주었다.

“아저씨가 그랬으면 좀 심각한 거 아니야?”

리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아라야, 그런 얘긴 하지 말자.”

“아니, 언니는 아저씨가 리카 얘기처럼 한 거 본 적 있어요?”

“……아니.”

“심각하잖아요.”

“에휴, 내가 너 언제 사고 칠 줄 알았다.”

신아름이 리카의 뒷머리를 쓸었다.

“얼마나 귀찮게 했으면 팀장님이 그러셔?”

“펴, 평소대로 했는데에…….”

“실버타운 메이트라면서 나댔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리카, 잘 들어. 팀장님이랑 너랑 띠동갑이야. 벽이 없대도 없을 수가 없잖아.”

“에, 에? 없어, 없을, 어, 없단 뜻이야 있단 뜻이야?”

“벽이 있다고.”

“아…….”

“찐친처럼 대하면 그야 팀장님도 곤란하시겠지.”

“우…….”

리카가 우중충히 고개를 숙였다.

동갑 라인이 리카에게 통렬한 일침을 가하는 데 비해, 언니 라인은 끊임없이 리카를 위로했다.

“아름아 그럼 난 어떡하면 좋아……? 어떻게 사과해……?”

“일단, 지금까지 너무 격 없이 대해서 죄송하다고 해야지. 선 넘지 않…….”

“얘들아!”

문이 쾅 열리면서 성필이 나타났다.

“너희 토요일에 시간 되지? 그때 내 집 와서 콘서트 볼래?”

“……에?”

리카와 함께 다른 멤버들은 깜짝 놀랐다.

아니, 어이가 없었다.

방금까지 성필이 화가 났니, 드디어 리카의 오만방자함을 참지 못하고 본성이 드러났니, 석세스 엔터의 악마가 돌아왔니 하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서, 성필이 화났다던 이유인 집 방문 얘기를 꺼내는 것이다.

“일단 내가 고른 건 이거 두 개인데.”

심지어 그는 손에 콘서트 DVD와 블루레이까지 들고 있었다.

“하나는 걸그룹 거고 핸드볼 경기장에서 했던 콘서트야. 너희들이 설 무대랑 그나마 비슷한 규모로 골랐어. 다른 하나는 보이그룹 다키스트 거, 쿄세라 돔 콘서트. 처음부터 끝까지 콘서트 흐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아저씨 화 안 났어요?”

“어? 내가 왜?”

다들 리카를 쳐다보았다.

리카는 멍하니 있다가, 만화처럼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콩 때렸다.

“에헷!”

“에헷은 뭔 에헷이야!”

신아름이 리카를 밀어 넘어뜨렸다. 그리고 조아라가 가세해서 리카의 이곳저곳을 찔러댔다.

“하여튼 얘는 호들갑밖에 못 떨어 진짜.”

“흐헿! 그만, 그마아아안!”

“앞으로 네 말 절대 안 믿는다.”

“어째서어엇! 아타시(나)는 간지럼 따위 안 탈 텐데엣! 왜 간지러운 거야아앗!”

함께 숙소에서 지낸 지 3년, 신아름과 조아라는 리카의 약점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금강불괴로 여겨졌던 리카도 약점이 있었다.

리카는 두 사람에 당해 연습실 중앙에 비닐봉지처럼 널브러졌다.

“어…… 무슨 일 있었어?”

언니 라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리카가 오해했던 걸 말해주면, 그녀가 성필에게 또 놀림받을 듯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 소녀연맹 공식 외교관은 저예요!”

어느새 리카가 기력을 회복하고 위풍당당하게 일어났다.

“설하 쌤보다 제가 박 이사님한테 더 먹히나 보네요!”

“리카가 박 이사님 너무 귀찮게 해서 미움받았다면서 눈물 찔끔했어요.”

백설하가 곧바로 실토했다.

역시, 성필은 그 얘기를 듣고 크게 웃었다.

“리카 너 가끔 의미 해석이 너무 과해.”

“이사님이 너무 무신경한 거예요!”

“저, 이사님.”

백설하는 아까 성필이 했던 말 중 걸리는 게 있었다.

“그거 DVD 설명하시면서 저희가 설 무대랑 비슷한 걸로 고르셨다고…….”

“아, 맞네. 결정 났어.”

“어딘데요?”

“올림픽홀!”

백설하가 화들짝 놀라서 몸을 떨었다.

“사, 삼천 분이나 오세요?”

“우와, 우리 진짜 성공하긴 했나 보네요.”

멤버들이 서로 손을 잡고 꺄악꺄악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보며, 성필은 이사진끼리 고민했던 게 바보처럼 느껴졌다.

멤버들이 좋아하는 걸 보니, 그저 성필도 행복하기만 했으니.

* * *

토요일.

성필은 아침 일찍 일어나 대청소를 시작했다.

회사의 노예인 성필은 야근한 뒤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한 후,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온다.

기본적인 청소 외엔 쏟을 기력이 적다. 그래서 주말에 몰아서 청소하는 편이다.

‘오늘은 더 꼼꼼히 해야지.’

콘서트를 보기 위해 소녀연맹 멤버들이 성필의 집을 찾는 날이다.

청소를 마치고, 성필은 자신의 좁은 방을 둘러보았다. 눈대중으로 보기에 멤버들이 저마다 앉을 곳은 있지만, 아무래도 좁긴 하다.

문득 이 얘기를 홍규헌에게 해주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녀는 눈을 게슴츠레 뜨곤, 뭔가 포기한 듯이 말했다.

‘그래…… 애들한테 교훈적인 시간이 됐으면 좋겠네…….’

성필도 안다.

이게 일반적인 프로듀서와 아이돌의 거리감이 아니란 건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이렇게 가까워져 버렸는데.

그렇다고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차기 그룹 애들이랑은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해야 할까.’

옛날의 성필은 소녀연맹과 자신의 거리감이 너무 가깝단 사실에 깊은 고민을 가졌었다.

감정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그녀들을 대하는 심리적 피로도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조금씩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몇 년이 지난 현재엔 더 가까워지기만 했다.

‘……그래도.’

나쁜 일은 아니다.

프로듀서와 아이돌 사이의 유대감은 프로듀싱의 윤활유가 되니까.

그때 성필의 전화가 울렸다.

[이사님, 저희 문 앞에 왔어요.]

“어, 열게.”

성필은 인터폰 옆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이걸 누르면 건물 1층의 문이 열린다.

성필은 마지막으로 방의 상태를 확인하곤 현관에 섰다.

그때 또 전화가 걸려 왔다.

‘애들이 문 앞에 도착했나 보다.’

성필은 전화를 받으면서 문을 열었다.

“얘들아 안녀…….”

[안녕하심미까, 박 이사님.]

“이사님 안녕하세요.”

“아저씨 타이밍 기막히게 맞추네.”

“문에 귀 대고 듣고 계셨던 거 아니에요?”

“도청이얏!”

문밖의 소녀연맹 멤버들이 동시에 저마다의 방법으로 반가움을 표했다.

그리고.

[진저임미다.]

성필의 귓가엔 케이어스 진저의 목소리가 울렸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