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36화 (336/760)

336화

길게 늘어선 계단식의 대기석에 100명 가까운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프로젝트 포유 시즌2’의 출연자, 수많은 기획사에서 온 남자 연습생들이었다.

백수현은 깍지를 끼고 앉아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형.”

백수현의 옆으로 중학생 정도 되는 외모의 남자가 앉았다.

“어, 민규야.”

“여기 자리 있어요?”

“보면 알잖아. 없어.”

두 사람은 방송 시작부터 친해졌다.

흔히 10대의 세계에선 1살 차이도 굉장히 높게 느껴지곤 한다. 그래서 보통 같은 나이끼리 모이는 법인데, 민규와 백수현은 달랐다.

둘은 기획사가 없는 무소속 연습생이었다.

그 특징 때문인지 여러 번 말을 섞었고, 이렇게 친해지게 됐다.

“그럼, 첫 번째 미션…….”

프로젝트 포유 시즌2의 MC를 맡은 여배우가 큐카드를 보면서 진중히 말했다.

“커버 미션을 시작하겠습니다.”

대기석의 십수 미터 앞, 무언가를 덮고 있던 흰 천이 바닥으로 스르르 떨어졌다.

커다란 플라스틱 보드의 모습이 드러났다.

보드엔 총 15개의 커다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저 스티커 떼면 곡 이름 나오나 봐요.”

“그러게.”

백수현의 초조함이 더욱 진해졌다.

집안의 격렬한 반대를 꺾어버리고, 아니. 그냥 생떼를 쓰며 집을 나와 출연한 방송이다.

아직도 집 나오던 것을 말리던 둘째 동생의 외침이 선명히 떠오른다.

‘어이 어이, 형 이대로 나가버리면 돌아올 수 없다고! 야메로(그만둬)!’

아이튜브에서 소녀연맹 리카의 영상만 찾아보더니, 중학생의 튀고 싶은 자의식과 결합해 웬 혼종이 생겨버렸다.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동생은 진심이었다.

‘안 그래도 엄마가 집 나간 누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 계속 들으면서 지냈으니까.’

동생은 장녀에 이어 장남마저 나가버리는 상황을 진심으로 걱정했던 것이다.

‘……그만 생각하자.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자꾸 후회만 할 순 없어. 현재에 집중해.’

SNS에서 아이돌 퍼포먼스 커버와 타고난 미모로 유명세를 얻은 백수현은 어찌어찌 방송에 출연할 수 있었다.

누나가 백설하란 사실은 숨기고서.

‘엄마랑 대판 싸우고 학교까지 결근하면서 얻은 기회야. 꼭 우승해야 해. 반드시, 꼭…….’

다리를 떠는 게 더 심해졌다.

“저기요, 다리 좀 그만…….”

“아, 죄송합니다.”

앞의 연습생에게 지적을 당하고서야 정신 사나운 행동이 끝났다.

백수현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긴장될 때는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뱉는다. 들이마실 때는 숨이 어떤 경로로 지나가는지 느끼고, 내쉴 때는 근육의 이완을 느낀다.]

누나인 백설하의 노래 노트에 쓰여 있던 것을 그대로 했다.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진정된 마음으로, 백수현은 보드를 응시했다.

차례로 스티커가 떼질 때마다 연습생들이 과도한 리액션으로 경악하거나 환호했다.

백수현은 그러지 않았다.

‘카메라 한 번이라도 더 잡히려고 오버 떨고 싶진 않아.’

주목받는 건 무대만으로 충분하다.

아직 설익은 자존감이 그의 흥분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형.”

“……왜.”

백수현은 민규의 부름에 살짝 짜증을 섞어서 답했다.

긴장감이 극에 달해 있는 순간 누군가가 말을 거는 건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백수현의 기색을 느꼈음에도 민규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리는 시작 평가 순위가 낮으니까, 아마 곡 선택도 나중으로 밀리겠죠?”

“아직 룰은 안 나왔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지.”

백수현은 여태껏 방영되었던 모든 연습생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고 왔다.

순위가 낮은 건 곧 페널티로 이어지곤 했었다.

‘89위인 내 순위는 엄청 나중으로 밀리겠지.’

89위라니…….

그야 기획사에 속한 진짜배기 연습생들에 비하면 모자랄 테니, 백수현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였다.

‘하지만 연습하면 달라. 같은 곡으로 연습하면 안 져. 미리 준비해온 걸로 보여줬을 땐 순위가 낮았지만…….’

백수현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민규의 이름표에는 92위란 순위가 당당히 붙어 있었다.

아마, 백수현과 민규는 같은 팀에 속할 가능성이 높았다. 둘 다 후반에 곡을 고르게 될 테니까.

“어, 걸그룹 곡이다.”

14번째 스티커가 떼지자, 모두의 예상을 깨고 걸그룹 케이어스의 ‘가이아’가 나왔다.

민규가 기대감에 차서 말했다.

“저거 고르는 게 좋죠? 걸그룹 곡은 춤이 쉽잖아요.”

백수현은 민규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저런 말이 방송에 나가면, 민규는 당장 성차별주의자로 찍혀 댓글 폭격을 당할지도 모른다.

백수현은 눈을 부릅뜨고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민규는 알아먹지 못한 듯했다.

“왜 그래요?”

“……아니다.”

마지막 스티커가 떼졌다.

이번에는 백수현도 놀라움을 참지 못했다.

[소녀연맹 - 아라베스크]

백수현이 연습해봤던 곡이었다. 하지만, 절대 골라선 안 되는 곡이다.

“소녀연맹이랑 케이어스…….”

민규는 잠깐 고민하더니, 은근히 백수현에게 권유했다.

“아라베스크로 할래요?”

그의 권유에는 중소 기획사 소속인 소녀연맹을 은근히 낮춰 보는 뉘앙스가 있었다.

대형 기획사 KS 엔터 소속인 케이어스의 ‘가이아’가 당연히 소녀연맹의 ‘아라베스크’보다 어려울 거란, 아주 피상적인 판단이 깔렸다.

“너 아라베스크 본 적 있어?”

“뮤비는 한두 번 봤어요.”

“연습한 적은?”

“없죠.”

백수현은 한숨을 쉬고, 경쟁자인 민규에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저것만은 걸리면 안 돼.”

“네?”

“다른 거 다 괜찮은데, ‘아라베스크’는 걸리면 안 돼. 일단 걸그룹 퍼포먼스는 대부분이 모든 동작마다 무게 중심을 좌우로 바꿔. 그러니까, 골반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곡선을 살리는 거지.”

남자가 그걸 따라 하면 우스울뿐더러 쉽지도 않다. 남자는 여자만큼 골반이 넓지도 않고, 골반을 활용하는 능력이 떨어지니까.

“근데 춤은 제작진분들이 수정해주시지 않아요? 약간…… 걸그룹 특징 없애고?”

“그렇겠지. 그런데 무엇보다, ‘아라베스크’는 어려워. 내가 직접 연습해봐서 알아.”

그 무지막지만 체력 소모는 백수현이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안무를 완성시키는 건 고작 일주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아라베스크’만 피해.”

그에 민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라베스크만 피하란 거죠? 알겠어요.”

* * *

[어라?]

‘프로젝트 포유2’의 심사위원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남자 연습생들의 ‘아라베스크’ 퍼포먼스 때문이었다.

정말 지리멸렬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하이라이트에서 서로 팔짱을 끼고 행진하는 부분에선, 발걸음도 맞지 않고 저마다 동작이 상이했다.

“여기 수현이 보이지?”

성필이 대열 중앙을 차지한 백수현을 가리켰다. 성필의 손가락이 모니터 중앙을 가리켰으나, 백설하는 그것을 보지 않았다.

보지 못했다.

얼굴이 죄다 붉게 물들어서 시선을 피하는 데만 급급했다.

“뭐, 이래서 유명해.”

모니터 속의 백수현은 나라를 잃은 표정이었다. 퍼포먼스를 하면서도 ‘아, 이거 망했다’라고 생각하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SNS에서 짤로 되게 많이 돌아다녔어. 민규…….”

민규.

전생, 성필이 석세스 엔터에 있을 시절 마지막으로 매니지먼트했던 보이그룹의 리더다.

전생의 최후에서 보았던 수년 후의 미래에선, 민규만이 성필을 위로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와주기도 했었다.

성필은 옅은 씁쓸함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민규랑 수현이가 대화한 뒤에 심사위원이 ‘어라?’라고 하는 장면을 짤로 붙여놔서…….”

[백수현: ‘아라베스크’만 피해.]

[민규: 네, ‘아랍베스크’만 피하란 거죠? 알겠어요.]

[백수현 팀 ‘아라베스크’ 퍼포먼스]

[심사위원: 어라?]

“되게 히트했거든. 인터넷에선 ‘어라?베스크’라고 불리는데 아이튜브 클립 조회 수가…….”

“그, 그만해주세요…….”

백설하는 당장 사무실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둘이 이야기하는 도중,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웃음을 참지 못한 직원도 있었다.

비록 자신이 당한 창피는 아니지만, 동생이 인터넷에서 대대적으로 창피당하고 있다고 하니 버티는 게 힘들었다.

“뭐, 어쨌든.”

성필이 주먹을 불끈 들어 올렸다.

“동생이 잘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설하야!”

“그만 놀리시라구요오……!”

백설하가 사무실에서 도망쳤다.

그제야 사무실 사람들이 참고 있던 웃음을 피시시 뱉어냈다.

“설하가 몰랐던 게 의외네.”

손혜빈은 성필에게 가까이 다가와 같이 모니터를 보았다.

멈춰 둔 영상에서, 백수현은 여전히 나라 잃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회사 1층에서 스탠드 마이크로 춤췄을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컸네.”

“그러게.”

손혜빈은 백수현에게도 연락했었다.

하지만 그땐 이미 늦었었다.

백수현이 프로젝트 포유 시즌2에 참가하고 난 이후였으니까.

“우리 회사로 안 오고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먼저 나간 것도 신기해. 우리가 사인을 덜 줬나?”

“그런 것보단…….”

성필이 짧은 고민 후에 말했다.

“뭔가, 누나인 설하 빽으로 들어왔단 인상을 주기 싫었겠지.”

“누구한테?”

“설하한테. 그리고 회사랑 동료가 될 연습생들한테.”

성필은 모니터 속 백수현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거야.”

* * *

케이어스의 컴백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긴 시간의 트레이닝을 마치고 돌아온 숙소.

진저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구석에 세워져 있던 케이스에서 기타를 꺼냈다.

조율을 마친 후, 진저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기타 연주를 시작했다.

“흐흥, 흐흐흥…….”

소심하게 허밍하던 진저는 문 쪽을 보았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진저는 용기를 내어 가사를 읊었다.

“Harder harder never never give up…….”

원래 음정보다 한 옥타브는 낮았다.

다른 멤버들은 숙소에 와서까지 연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진저는 홀로 연습하는 게 창피했다.

컴백 앨범 작업이 들어간 후, 진저는 숙소에서도 조금씩 연습해왔다.

연습이 부족하다고 느껴선 아니었다.

‘재밌어.’

하지만 숙소에서 멤버들에게 연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부끄러웠다.

계속되는 연습에도 불구하고, 케이어스 내에서 보컬 실력이 가장 떨어지는 진저다.

모두의 안식처인 숙소에서 연습하는 건 왠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기분이다.

‘눈치 볼 필요는 없는데…….’

진저는 자신이 타인의 눈치를 심하게 살핀단 사실을 안다.

설령 이곳에서 열창하더라도, 멤버들은 진저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을 걸 알았다.

그리 생각하니 용기가 솟았다.

진저가 본래 옥타브로 음정을 맞추었다.

“출발점은 떠나온 지 오래…….”

이번 정규 앨범에 들어간 본인의 솔로곡을 열창하려던 순간.

“진저, 간식 먹…….”

“먼지 낀 다리를 움직일 때……!”

끼기긱.

진저가 울리는 현을 손으로 잡아서 급하게 멈추었다. 그러곤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문 쪽으로 향했다.

김민주가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간식 먹으러 오라고.”

“……알겠슴미다.”

진저는 우왕좌왕 기타를 정리한 후 거실의 식탁으로 향했다.

다른 멤버들은 이미 간식을 먹는 중이었다.

견과류 한 줌과 바나나 하나가 전부였다.

진저는 괜히 눈치를 보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허겁지겁 바나나를 까서 입에 넣으려던 순간.

“진저, 천천히 먹어야지.”

“아, 알겠슴미다.”

에리카의 지적에, 진저는 바나나의 끝부분만 살짝 씹었다.

트레이너가 밥을 먹을 땐 최대한 천천히 먹으라고 했었다. 급하게 먹는 습관을 들이지 말라고 말이다.

“노래 연습 열심히 하네.”

진소유가 말을 걸었다.

“첫 솔로곡이라서 마음에 든 거야?”

“……네?”

“응? 뭐가 ‘네’야?”

진소유는 고민했다. 방금 자신이 무언가 어려운 어휘라도 사용했는지 되짚었지만, 그런 건 쓰지 않았다.

곧 그녀는 진저뿐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인지했다.

김민주는 손에 들고 있던 바나나마저 놓친 마당이었다.

“다들 왜 그래?”

“아, 아니…… 아님미다.”

진소유가 다른 멤버에게 따로 관심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누구에게 ‘왜 그러냐’, ‘뭐 하고 있냐’, ‘요즘 어떠냐’ 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런 질문은 관심이 있을 때 나오는 거니까. 즉, 진소유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요즘 소유 언니가 이상해.’

일본에서 돌아온 뒤로 진소유가 바뀐 듯하다.

진저는 호두를 한 알 씹으면서 놀라움을 감추었다. 그리고 진소유의 물음에 답했다.

“그렇슴미다. 제 이름만 붙은 곡임미다. 애정이 감미다.”

케이어스의 전략은 무결점, 완벽성이다.

정호환은 케이어스의 컴백 기간을 매우 길게 잡는다.

팬들은 적당한 결과물만 나와도 케이어스를 찬양할 정도로 목 빠지게 기다리지만, 정호환은 ‘적당한 결과물’ 따위 허용하지 않는다.

결점 없고 완벽한 결과물로 히트를 이어간다.

그에 따라, 앨범 내에서 멤버 개인에게 하나씩 솔로곡이 부여된 건 매우 예상외의 결정이었다.

각자의 장점을 시의적절하게 발휘할 수 있는 그룹의 이점을, 솔로곡에서는 살릴 수 없으니까.

“완벽하고 싶슴미다.”

그 예상외의 결정에 진저는 반색했었다.

앨범 미팅 때 A&R 팀은 당연히 진저에게 댄스곡을 권유했었다. 하지만 진저는 ‘보컬곡이어도 괜찮다’고 했었다.

진저는 자신의 장기인 춤뿐 아니라 노래도 사랑하게 됐다.

‘박 이사님이 내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려주셨어.’

듣는 이를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실력이 썩 나쁜 건 아닐 터다.

진저는 울던 성필을 떠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그래? 열심히 해.”

“소유 언니는 솔로곡 마음에 드심미까?”

“보통.”

“보통임미까?”

“음, 보통 이하?”

“보통 이하임미까?!”

“내 느낌이 중요하진 않지.”

진소유의 솔로곡은 진소유보다 그녀를 잘 아는 사람들이 배정해준 것이다.

정확히는, 남들에게 보이는 진소유를 그녀 자신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다.

KS 엔터의 A&R 팀, 비주얼 팀.

앨범에 관해서 만큼은, 그들은 실수가 거의 없다.

“맞다, 어…….”

진소유는 에리카를 보다가, 미간을 좁히면서 김민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에리카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소유야. 자꾸 나 마음에 안 든단 티 내는 거 좀 그만해줄래?”

“내가 그랬던가? 민주야, 하나 물어볼게.”

“진소유 너 지금 에리카 싫어하는 티 팍팍 내고 있거든? 자기 객관화가 잘 안 돼?”

“여자한테 고백받으면 어쩔 거야?”

김민주가 오만상 찌푸렸다.

“거절하지.”

“음, 기분은 어떨 거 같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 고백받으면 당장 회사로 달려가서 숙소 따로 달라고 할 건데?”

“그렇구나.”

진소유는 타깃을 진저로 바꾸었다.

“진저는?”

“저, 저 말임미까?”

“응. ‘진저는’이라고 물었잖아.”

“아, 음, 으음…….”

진저는 진지하게 고민해주었다.

“그분은 제가 남자를 좋아한단 걸 암미까?”

“알지.”

“그럼 굉장한 용기를 내주신 거 아님미까.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일 검미다.”

“맞아 맞아.”

“최대한 예의 바르게 거절해야 하지 않겠슴미까.”

“너 없으면 죽겠다면서 울고불고 매달리면?”

“아…… 그래도, 받아들이는 게 실례 아님미까? 심리적으로도 생리적으로도 사랑할 수 없는 건데…….”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 아닐까?”

“네?”

“소유야, 그만해.”

간식을 다 먹은 에리카가 진소유를 제지했다.

“그런 거 대화 주제로도 좋지 않고, 괜히 사람 불쾌하게만 만들 뿐이잖아.”

“넌 사랑이 불쾌하니?”

“동성애에 관심 있으면 우리 팬픽이나 찾아봐. 거기 네가 좋아할 거 많아. 어쨌든 이 얘긴 그만해.”

진소유가 놀리듯이 입술을 부르르 털었다.

에리카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녀는 식사를 마치고 슬쩍 든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였다.

“소유야, 그 주제를 꺼낸 저의가 뭐야? 왜 우리끼리 사는 숙소 식탁에 동성애를 주제로 올려?”

“그러면 안 돼?”

“우리가 널 경계하게 만들려는 목적이면 아주 잘 꺼냈어.”

“너는 자아가 굉장히 강하구나? 편견도 깊고. 그럼 내가 복지제도 확대나 기업 규제 완화를 주제로 올리면 정치병자 취급할 거야? 아이돌로서 입에 올리면 안 되는 주제를 꺼냈으니까 이번처럼 꼽 주려고?”

“그만 아가리 털어.”

“그냥 잡담으로 꺼낸 얘기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네가 달고 있는 게 아가리겠지.”

“난데 콘나 야츠가(왜 이런 녀석이)…….”

“키미노 다라시나이사오 세메루 호가 이인쟈 나이(네 형편없음을 탓하는 쪽이 낫지 않아)?”

“난 간다.”

김민주가 자신의 접시만 들고 터덜터덜 주방으로 떠났다.

눈빛을 나누는 에리카와 진소유의 사이로 진저가 허겁지겁 끼어들었다.

“오늘 늦었슴미다! 팀장님이 빨리 자라고 하지 않았슴미까! 자, 에리카 언니, 소유 언니 제가 접시 치워드리겠…….”

“손대지 마.”

에리카의 차가운 어투에 진저가 움찔했다.

그에 에리카가 이성을 되찾고, 한숨을 토한 후 자리를 떴다.

진저는 에리카의 냉혹한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우두커니 서서 미세하게 떨었다.

그때 그녀의 어깨에 온기가 느껴졌다. 진소유가 진저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진저, 괜히 피해줘서 미안해.”

“……아, 아님미다.”

진소유가 다른 멤버를 위로해주다니, 이것도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진저는 놀라기보다 진소유의 따스한 위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소유 언니.”

“응.”

“에리카 언니도 앨범 작업이랑 컴백 준비 때문에 힘들어서 그럴 검미다. 네, 분명 그럴 검미다. 그러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고…….”

“나도 알아. 우리 다 그렇잖아.”

정규 앨범 작업은, 그녀들이 케이어스가 되고 난 후 겪은 가장 큰 파도였다.

맞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휩쓸려 버릴 듯 가혹했다.

아무리 멘탈이 당당한 사람이라도, 몇 개월을 그렇게 살면 무너질 게 뻔했다.

성격 좋은 에리카마저 그러하니까.

“뭔가, 소유 언니 달라진 거 같슴미다.”

“그렇게 보여? 달라졌지 그럼.”

“일본에서 무슨 일이 있었슴미까?”

“있었지. 포기하는 법을 배웠어.”

진저는 그게 패션쇼와 관련된 이야기일 거라고 짐작했다.

자신감 가득한 진소유도, 아이돌과 관련되지 않은 분야에선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아마 그런 의미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일본 얘기는 해준 적이 없었지. 애초에 물어본 사람도 없었고.”

“저, 저는 물어봤잖슴미까…….”

“그랬던가? 그랬던 거 같기도 하네.”

“언니가 얘기해주기 귀찮다고 했슴미다.”

“듣고 싶어?”

“듣고 싶슴미다.”

“그럼…… 아.”

갑자기 진소유가 한 발로 서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갑자기 펼쳐진 묘기에 진저가 당황했다.

하지만 진소유는 곧 두 다리로 섰다.

“역시 어렵구나. 볼 땐 쉬운 거 같았는데.”

“뭐가 말임미까?”

“박성필 이사란 분이 있는데, 그분이 목발 짚고 계셨거든. 그런데도 되게 잘 움직였었어.”

“……예?”

진저는 방금 에리카에게 차갑게 대해졌을 때보다 더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아, 맞다. 그분이 네가 최애랬는데. 너도 그분 알아?”

“목발을 왜 짚고 계셨슴미까?”

“차에 부딪혔댔나.”

교통사고.

그런데.

그렇게 큰 사고를 당했는데.

‘난 몰랐어.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셨어.’

친구라고 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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