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34화 (334/760)

334화

“세라야.”

문을 열자 나타난 건 글로브의 멤버인 위세라였다. 그녀는 성필이 보이자 흠칫했으나, 곧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다시 고개를 든 위세라에게선 예의로 갖춘 미소조차 볼 수 없었다.

그녀와 직접 대면한 지는 몇 년 만이니, 성필의 기억 속에 있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외모보다 분위기가 그러했다.

‘바뀌었어.’

아이돌이 되겠다면서 목포에서 서울로 올라왔던 당찬 중학생이었던 위세라.

그녀는 가족과 떨어진 환경에서도 쉽게 웃음을 잃지 않았었다.

위세라에게 웃음이란 옷과 같았다. 항상 입고 있는 것 말이다.

하지만 현재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소민이 있죠? 여기 있다고 했는데요.”

성필이 느끼기에, 위세라는 쇠약하기라도 한 듯했다. 신체적으로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기력 자체가 빠져나간 기색이었다.

웃음 한 번에도 마음을 써야 하기에, 그게 힘들어 표정을 지워버린 사람 같았다.

“……어, 응. 있어.”

달라진 그녀를 보고 멍해졌던 것도 잠시.

성필은 양소민을 불렀다. 하지만 양소민은 대답도 하지 않고, 현관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위세라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듯했다.

“……들어올래?”

“실례하겠습니다.”

위세라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성필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위협적인 발걸음으로 양소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 꿇은 양소민의 앞에 서서 고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너 뭐야.”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성필의 걸음이 굳었다. 옛날의 위세라라면 절대로 내지 못했을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뭐 하는 애냐고.”

“……언니, PD님 화 많이 나셨어요?”

“너 같으면 화 안 내겠니?”

갑자기 회사를 뛰쳐나가서 며칠 동안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겨우 연락한 게 바로 몇 시간 전이었다.

“정신이 제대로 박혔으면 내가 아니라 회사에 연락했어야지. 그래도 무섭긴 한가 봐?”

“PD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됐고, 빨리 일어나.”

“나한테 뭐라고 하신 말씀은 있으셨어요?”

“양소민 너…….”

“말해줘요.”

위세라의 표정이 아까보다 훨씬 딱딱해졌다.

분노를 표현하듯 머리칼을 위로 쓸어넘기고, 그녀는 간결히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하셨어. 우리한테도, 회사 사람들한테도.”

“아무 말도?”

“……어.”

윤상열은 양소민에 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글로브의 연습을 잠시 참관하거나, 작업실에 틀어박혀 프로듀싱에 골몰할 뿐이었다.

“하, 하하.”

양소민은 회로가 잘못된 인형처럼 삐걱삐걱 웃었다.

“언니, 내가 뭘 잘못한 걸까요? 그래서 윤 PD님이 날 싫어하는 걸까요? 언니는 뭔지 알…….”

“알지 그럼. 네가 우리 중에서 제일 실력이 떨어지니까.”

“세라야!”

직설적인 위세라의 폭언에 성필이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위세라는 그만두지 않고 성필을 향해 표독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왜요? 하지 말라고요? 친하게 지내라고요? 근데, 팀장님은 저한테 그런 말 할 자격 없으세요.”

위세라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우릴 버리고 갔으면서…….”

버렸다.

그 단어 선택에, 성필은 정말 반박할 여지가 하나도 없어졌다.

‘버렸다?’

그렇다.

성필은 글로브를 버렸다.

석세스 엔터를 버렸다.

‘내 꿈을 위해서.’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필은 자신이 택한 미래의 부산물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편치 않은 수준이 아니라, 말 못 할 우울감이 배를 가득 채워갈 지경이었다.

‘이렇게까지…… 변했구나.’

성필이 없는 석세스 엔터는 이렇게까지 변해버렸다. 윤상열의 왕국에서, 글로브는 안식을 찾지 못하고 스스로를 갉아먹는 중이었다.

변한 위세라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전생에선 힘든 일도 슬픈 일도 많았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던 그녀였다.

‘부대표님, 저는 석세스 엔터로 들어와서 정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재계약은…… 으음, 부대표님이 직접 매니지먼트 해주시면 생각해볼게요, 히.’

글로브의 7년 계약이 끝난 후, 성필과의 면담에서 속 시원히 그리 말했던 위세라가 떠올랐다.

그때의 모습과 현재의 위세라가 도저히 겹치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아니에요.”

위세라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한 번 훔치곤, 목소리에서 흔들림을 지워버렸다.

“팀장님도 팀장님 인생이 있죠. 우리들 아빠도 아니고, 상황 맞춰 어디든지 가는 게 당연하니까. 죄송해요, 괜히 화풀이해서.”

“세라야…….”

그녀는 성필의 부름을 무시하고, 다시 양소민을 바라보았다.

“윤 PD님이 널 싫어하는 이유는 간단해. 네가 PD님의 요구에 못 닿아서 그래. 그럼 더 열심히 해야지, 도망을 가? 너 애야? 어린애야?”

“하지만 나는…….”

“너 혼자 만족할 거면 우리 회사에 트레이너랑 기획자가 왜 있어? 넌 네가 행복한 줄 알아야 해.”

“……행복?”

“우리 연차에 이만큼이나 성공한 걸그룹이 어디……!”

위세라는 성필을 흘끔 하곤 말을 바꾸었다.

“이만큼 성공한 걸그룹이 역사상 얼마나 있었어! 이건 그냥 기적이야! 넌 기적 속에 사는 거야! 조금 힘들다고 도망간단 거 자체가 다른 아이돌들을 모욕하는 거라고!”

“…….”

“소민아, 우리 소민이.”

위세라가 양소민을 안아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돌아가자. 돌아가서 더 열심히 하자. 우리가 도와줄게. PD님한테도 잘 말해줄 테니까, 돌아가자.”

양소민은 힘없이 위세라를 따라 걸었다.

성필을 스쳐 가며, 양소민은 입을 열지 않고 고개만 꾸벅 숙였다.

위세라는 직접 양소민의 신발까지 신겨주었다. 그리고 성필의 집을 나가려던 순간, 위세라가 짧게 말했다.

“팀장님, 축하드려요. 아이돌 직접 프로듀싱하시게 된 거요.”

위세라의 몸이 나아갈 듯 앞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이내 결심한 듯 뒤로 돌아 성필을 보았다.

성필은 몇 년 만에 위세라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여전히 밝고 아름다우며, 세상을 밝게 만드는 보물을.

“이걸 제일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네요. 정말 축하드려요. 안 믿으시겠지만, 저도 기뻐요. 꿈을 이루셔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위세라는 이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지금도 마음이 하지 말라면서 말리고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저희랑 함께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문이 닫혔다.

성필은 얼마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위세라의 목소리가 머리를 떠나지 않은 상태로 방을 둘러보았다.

양소민의 흔적이 보였다.

침대 위에 놓인 태블릿엔 아직도 성필과 신아름의 사진이 떠 있었다.

성필은 태블릿을 집어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 사진 속의 성필은, 세상 누구도 의심할 여지 없이 행복해 보였다.

“…….”

성필은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 사진에서 빠져나왔다.

갤러리에 저장된 수천 개의 사진 목록이 보였다.

그중엔 성필이 야유회에서 찍은 사진도 자동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1박 2일간, 양소민은 계속 업로드되는 사진들을 보아왔던 것이다.

“…….”

기기끼리의 동기화를 해제하려던 순간, 성필이 알지 못하는 사진이 눈에 띄었다.

성필의 방에서 찍은 양소민의 사진이었다.

그녀는 책상에 놓인 탁상 액자 속 성필의 전역 사진과 함께 셀카를 찍어 놓았다.

수줍게 치켜든 양소민의 손가락 V와 굳은 성필의 경례가 한 공간에 있었다.

두 사진의 시간대만큼이나, 성필과 석세스 엔터는 멀어졌다.

* * *

양소민은 윤상열의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무미건조한 공간이다.

삭막하게 놓인 음향 기기들의 향연.

그 가장 안쪽에 윤상열이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었다. 그는 양소민이 들어왔음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노트북만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다.

“죄송합니다.”

양소민이 사과했다.

대답이 없었다.

사람을 죽일 듯한 침묵이 양소민의 목을 감아왔다. 그렇게 1분을 있었을까, 드디어 윤상열이 입을 열었다.

“하.”

비웃음이었다.

“나가서 연습해.”

그것으로 끝이었다.

윤상열은 그게 양소민에게 가장 상처가 된단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녀의 자존심을 깎으려 폭언을 퍼붓거나, 어린애처럼 도망간 것을 비난하는 것보다, 그저 비웃음 한 번이 훨씬 큰 상처가 된단 사실을.

윤상열은 너무도 잘 알았다.

“……PD님.”

양소민은 나가지 않았다.

만약 윤상열이 그녀를 보고 있었으면, 그녀의 변화를 알아챘을 것이다.

양소민은 이전의 유약했던 모습을 지워버리고, 눈동자에는 소름 끼치는 독기를 품었다.

“제가…… 부족한가요?”

마우스가 딸깍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얼마나…… 부족한데요?”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돌아왔다.

“얼마나 더 연습하고, 얼마나 더 잘해야, PD님이 만족하시는데요?”

세상 모든 짜증을 담은 듯한 한숨이 돌아왔다.

윤상열은 의자를 빙글 돌려 양소민과 마주했다. 그는 깍지를 끼고 느긋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그렇게 3분이 지났다.

“나는…….”

윤상열이 침묵을 깼다.

“나는 말이다. 꽃밭에서 살았어.”

“…….”

“사방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꽃밖에 없었지. 그런데 그 꽃들은 내 게 아니었어. 나는 정원사였지. 꽃이 잘 자라게 지켜보고 다듬어주는 게 내 일의 전부였어. 그렇게 되니까, 내 꽃밭이 갖고 싶더라고. 내 마음대로 심고 자라게 할 수 있는 내 꽃밭.”

KS 엔터에 있었던 시절을 뜻하는 것이었다.

양소민은 그의 이야기를 단숨에 이해했다.

“뭐, 가지게 됐지. 내 꽃밭. 내 마음대로 심고 다듬을 수 있는 꽃밭. 나는 씨를 심고 기다렸어. 상상이 가? 땅에서 새싹이 나오길 기다리는 두근거림이. 새싹이 정말 나왔을 때의 설렘이. 너는 이해가 될까?”

그리고, 마침내 꽃봉오리가 맺혔다.

일곱 개의 탐스러운 꽃봉오리가.

“그런데 피지 않아.”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리 애정을 주고 지켜봐도, 아무리 혼신을 다해 다듬어도.

“피지 않는다고. 꽃봉오리인 상태일 뿐이야. 자, 이것도 이해가 가나?”

양소민의 시선은 어느샌가 바닥으로 가 있었다. 윤상열은 감히 자신이 말하는 중인데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단 이유로 혼내지 않았다.

대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게나 기다렸던 꽃봉오리가 열리지 않는 기분. 아주 조금이라도, 정말 아주 조금이라도 좋거든. 이해할 수 있나?”

“…….”

“그렇지. 이해할 수 없겠지. 이해했으면 도망가는 일 따윈 없었을 테니까.”

윤상열이 문 쪽을 가리켰다.

“나가. 과제 확인은 오늘 저녁이다.”

양소민이 작업실을 나갔다.

윤상열은 다시금 찾아온 정적을 즐기면서 작업에 몰두했다.

찾아온 직원들의 보고를 듣고, 프로듀싱 팀과 회의를 하고, 서류를 검토하고, 또 작곡에 힘을 쏟길 몇 시간이었다.

알람이 울려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양소민 과제 체크]

윤상열은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고 드디어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쑤신 몸을 이끌고 작업실 밖으로 나섰다.

그답지 않게, 잡념이 생겼다.

‘내가 이상한가?’

윤상열은 바보가 아니다. 글로브가 자신에게 적대심을 가진단 걸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윤상열은 양소민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아, 안녕하세요! 양소민입니다! 꿈은, 그러니까, 목표는, 아이돌로 세계 최고가 되는 겁니다!’

세계 최고가 되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윤상열은 싱그러운 바람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한 가지 확신하는 게 있다.

인생을 살면서 ‘세계 최고가 되겠다’란 말을 육성으로 들어본 인간은, 인류 중에서도 극히 소수에 불과할 거란 사실이다.

‘세계 최고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인간을 만날 기회가, 보통 사람에겐 살면서 몇 번이나 찾아올까?

아마 영원히 없을 수도 있다.

‘내가 이상한가.’

자신만만하게 세계 최고가 될 거라고 선언하는 인간을 도와주고 싶다는 감정이.

‘그렇게나 이상한가?’

윤상열은 그때 결심했다.

이 감정을 영원히 간직하자고.

그건 아마, 프로듀서가 품어야 할 가장 고귀한 감상일 테니까.

“시작해.”

연습실로 온 윤상열이 말했다.

양소민은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윤상열은 그녀의 퍼포먼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뜯어보면서도, 동시에 잡념에 휩싸였다.

‘세계 최고가 목표라고?’

‘네, 넵!’

‘그래, 세계 최고…… 크흨.’

‘너, 너무, 좀, 주제넘었나요……?’

양소민은 꽃봉오리였다.

그런데 좀처럼 피지 않는다.

그래서 윤상열은 결단을 내렸다.

억지로 봉오리를 쥐고, 잡아서 벌리고, 그토록 숨기고 있는 싱그러운 꽃잎을 드러내 주겠다고.

강제로 찢어서 피게 할 것이다.

‘아니, 주제넘긴. 그렇게 될 거다.’

‘가, 감사합니다!’

양소민이 퍼포먼스를 마쳤다.

“끄, 끝입니다. 봐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꽃잎이 보인다.

억지로 잡아 뜯어서 너덜거리고 형체가 망가졌지만, 보기 싫은 녹빛의 봉오리를 뚫고 화려한 잎의 빛깔이 살포시 드러났다.

아직은 아주 조금 보일 뿐이지만, 드러나긴 했다.

윤상열은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고 연습실을 나갔다.

잡념 또한 사라졌다.

‘내가 이상하진 않지.’

이상한 건, 언제 필지도 모를 꽃봉오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들이다.

* * *

가로 엔터 회의실.

성필, 손혜빈, 이유이, 소녀연맹 멤버들이 조진만이 오길 기다렸다.

소녀연맹이 귀국한 후 처음 갖는 공식적인 콘서트 관련 미팅이었다.

“다들 야유회 마치고 나서 괜찮았어?”

성필이 묻자 멤버들이 실없이 웃었다.

“돌아가자마자 잤어요.”

“설하는 그럴 거 같더라.”

“저, 저만 잤단 게 아니라 다 같이 잤다구요…….”

다들 이만저만 피곤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멀쩡히 앉아 있다가 잠들 수준으로 술을 마셨으니, 컨디션이 괜찮을 리가 없다.

“재밌었겠다. 저도 가고 싶었는데.”

“유이 씨, 면피용으로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요. 나중에 비수로 돌아올 수도 있어요.”

“정말이에요. 친구 결혼식이라서 어쩔 수 없었단 말이에요.”

“다음엔 꼭 같이 가요.”

가고 싶었단 게 거짓이 아닌 듯, 이유이는 들뜬 기색으로 동의했다.

“장기자랑 같은 것도 하셨어요? 그건 진짜 보고 싶었는데. 박 이사님은 어떤 거 하셨어요?”

“장기자랑은 안 했어요.”

“네? 그럼 뭐 하고 노셨어요?”

“술게임요.”

“술게임…….”

이유이는 잘 상상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30대 중반인 성필과 손혜빈이 술게임으로 노는 장면이란 게, 듣기만 해선 떠올리기 힘든 법이다.

“아, 맞다.”

손혜빈이 능글맞게 웃으면서 백설하를 보았다. 백설하는 알 수 없는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그녀와 마주 미소 지어 주었다.

“설하야, 그거 어떻게 됐어?”

“어떤 거요?”

“하양이 재울 때 네가 말했었잖아. 하양이가 키스는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다니까, 나중에 알려준다고.”

“아, 아아, 그거요…….”

당연히 장하양을 순순히 재우려고 한 말에 불과했다. 진심으로 그럴 리가 없잖은가.

“그렇네요.”

장하양의 어투가 진지함을 담았다.

“지금 가르쳐주실래요?”

“어?!”

“언니가 알려주신다면서요. 궁금해요. 가르쳐주세요.”

장하양이 천천히 다가오자 백설하는 바들바들 떨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를 조아라가 막았다.

“하양 언니 농담 통제라고 했잖아요. 자꾸 그러면 곤란해요.”

“농담 아닌데?”

백설하, 룸메이트 교체 긴급 요망!

“누나.”

“왜?”

“여자끼린 남자보다 스킨십이 더 활발한? 그런 경향이 있잖아. 정말 친하면 뽀뽀까지 가능해?”

“가능하겠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럼 어느 정도까지 하고 그래? 역시 손잡는 데까진가?”

“음…….”

손혜빈은 백설하를 물끄러미 보더니 쾌활하게 답했다.

“엉덩이 꽉 쥐는 정도?”

“그것도 하면 안 돼요!”

백설하, 상사 교체 긴급 요망!

“근데 유이 언니 프랑스에서 대학 다니셨댔죠?”

신아름이 물었다.

“응. 대학이라기보다는 전문학교지. 파리 의상 조합 학교.”

“프랑스에선 뽀뽀로 인사하지 않아요? 그럼 막 남자들한테 뽀뽀하고 뽀뽀받고 그랬어요?”

“볼에 뽀뽀하는 게 아니라 허공에 하는 거야. 그리고 뽀뽀도 아니고 뺨 맞대는 거구.”

“아…… 좀 실망이네.”

“뭘 기대했길래?”

“팀장님. 우리 프랑스에선 남자랑 볼 뽀뽀로 인사해도 돼요? 거기 문화니까, 가능?”

“네 볼에 뽀뽀하려면 나랑 상견례랑 3회 연속 면담 거쳐야 해.”

“에잇!”

리카가 신아름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신아름이 기겁하면서 뺨에 묻은 리카의 침을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리카 너 죽을래?!”

“전례를 만들어야 이사님이 나중에 딴소리 못 해! 미리 프랑스 문화에 익숙해지는 거야!”

“리카 넌 나중에 나랑 따로 면담 3회 한다.”

“손나(그런)!”

손혜빈은 리카와 투닥대는 성필을 보면서 이질감을 느꼈다.

‘얘가 오늘따라 좀 억지로 텐션을 높이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아니면 역사적인 첫 공식 콘서트 미팅이라 분위기를 띄우는 걸까.

그때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고 아틀라스사(社)의 조진만 사장이 들어왔다.

“투쟁 해방 소녀 연맹 승리! 콘서트로 세계를 제패한다! 소련 만세!”

“…….”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조진만이 성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첫 회의니까 분위기 좀 억지로 끌어 올려 봤습니다.”

조진만의 뒤를 따라오는 아틀라스사 직원이 부끄러움에 젖어 허리를 꾸벅꾸벅 숙였다.

조진만은 서류 가방에서 자료를 꺼내면서 평소대로의 침착한 분위기를 되찾…….

“하지만 제 마음은 억지가 아니란 것! 이 콘서트를 시작으로 훗날에는 일본의 돔에! 한국의 올림픽 경기장에! 미국의 스타디움에! 영국의 웸블리에! 전 세계에 소녀연맹의 이름을 새겨 넣는 겁니다!”

“우, 우오오!”

리카가 조진만을 덜 부끄럽게 해주기 위해 팔을 높이 치켜올렸다.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아 부끄러움은 리카의 것이 됐다.

하지만 조진만은 신경 쓰지 않고 싱글벙글 준비해 온 자료를 돌렸다.

“찐 찐 찐 찐막 찐찐막 최종 콘서트 세트리스트입니다.”

“……몇 번이나 수정된 거예요?”

“아름 씨 질문에 꼭 답해드리고 싶지만, 안 셌습니다. 앞으로도 수정될 거 같아서……. 이게 마지막이길 바랄 뿐이죠.”

조진만의 눈빛이 일변했다.

장난스러운 기색을 전부 치워버리고 전문가로서의 기세를 사방으로 뿜어냈다.

“가장 먼저 논의하고픈 건 무대 연출 측면보다는 의상…….”

“잠깐만요!”

백설하가 조진만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조진만이 나눠준 종이를 떨리는 손으로 집은 채,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이, 이거, 진짜예요? 오프닝에…….”

[오프닝 메들리

아니 - 팅글 - 아라베스크]

“이, 이거 세 개를 연속으로 한다고요? 쉬는 텀이 얼마예요?”

“휴식 시간은 없는 걸로 생각 중입니다. 여러분이 세 무대를 연속으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것들 하나만 해도 힘들, 히, 힘들…….”

백설하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힘들어요, 이건…….”

“……아.”

조진만은 그제야 깨달았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말씀을 잘못 드렸군요.”

멤버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식 시간은 없습니다. 세 무대를 연속으로 해주셔야 합니다.”

멤버들이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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