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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33화 (333/760)

333화

“다들 왤캐 진지해요?”

조아라의 첫 키스 상대가 있다?

엄청난 관심이 집중되어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던 중, 신아름이 끼어들었다.

신아름은 취한 얼굴로 조아라에게 삿대질했다.

“딱 봐도 쟤 걍 거짓말하는 거예요.”

“아라가 거짓말을 왜 해?”

“왜긴요. 허세 부리는 거지. 없다고 말하기 창피해서 그러는 거예요. 쟤 약간 저런 면 있잖아요.”

신아름은 점쟁이라도 된 양 조아라의 심리 상태를 줄줄 읊었다.

“……하.”

조아라가 픽 웃었다.

반박이 이어질까 싶었는데, 조아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 맞다. 거짓말이었어.”

“그치? 그렇지?”

신아름은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했다.

조아라의 허세를 한 꺼풀 벗겨낸 게 참을 수 없이 즐거운 것이다.

“아니, 그게 뭐가 부끄럽다고 애처럼 거짓말을 하고 그러냐? 지인짜 넌 아직 어린애티를 못 벗었어 야. 자기 혼자 세상 센 척 다하면서 말야.”

“그래 그래, 알겠…….”

“푸하핰! 다시 생각해도 웃기네. 키스 해봤다고 거짓말을 해 어떻게!”

평소에도 조아라와 티격대면서 우정을 과시하는 신아름이다. 그런데 술이 들어가니 그 텐션이 말도 안 되게 높아졌다.

조아라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그리고 그녀는 ‘거짓말이다’라고 했던 게 거짓말이란 듯, 자신의 빈 잔에 스스로 술을 가득 채우고 한입에 들이켰다.

“야…….”

투쟁심을 불태우는 조아라.

그녀를 보는 가로 엔터 임직원들이 동시에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만해 아라야!’

더는 조아라의 추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청소년기에는 또래 집단의 인정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래의 인정을 받기 위해 거짓말을 꾸며내는 경우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근데 이건 너무하잖아!’

어른들은 부끄러웠다.

“거짓말 아니거든?”

“뭐? 방금 거짓말이라면서. 창피하니까 또 말 바꾸는 거야?”

“너 같은 애 있을까 봐 걍 말한 거거든?”

신아름은 점점 신나는 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이 얘기로 5년은 조아라를 놀릴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조아라의 술기운에 기대를 걸고, 훨씬 커다란 흑역사를 만들어줄 테다.

“그래? 그럼 어떤 느낌이었어?”

“……뭐?”

“난 몰라서 묻는 거야. 궁금하잖아. 어떤 느낌이었어?”

신아름이 임직원들을 한 번씩 훑었다.

심사 위원 역할을 해달라는 뜻인 듯했다.

“저기, 아름아.”

정지음이 조아라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 대화를 중지시키려 했다.

“질문은 진실 혹은 도전으로 하자.”

“아녜요. 이것도 게임의 일부죠. 조아라, 말해봐. 느낌이 어땠어?”

세상 단맛 쓴맛 다 본 어른들 앞에서 나올 거짓말이 얼마나 대단할지, 신아름은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레몬맛이었다?

부드러웠다?

과연 어떤 상용구가 나올 것인가.

“……했어.”

“뭐라고?”

신아름이 귀를 조아라 쪽으로 가져갔다.

“뭐라고 했냐?”

“……딱딱했어.”

“어?”

“딱딱했다고…….”

일동 침묵.

신아름은 조아라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건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딱딱했다고?

아니, 키스가 딱딱하다고?

“딱딱…… 해?”

“어. 뭔가, 말랑하긴 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부드럽진 않고. 그, 뭐랄까, 꾹꾹 밀려오는 느낌…….”

얼굴이 화산처럼 달아오른 조아라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냔 듯 잔에 가득 술을 부어 넣었다.

그러곤 창피를 달래기 위해 또 원샷했다.

“팀장님, 저거 맞아요?”

“음…….”

솔직히, 성필은 놀라는 중이었다.

조아라의 묘사는 정말 키스를 해본 사람이 아니고서야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드러냈다.

첫 키스에서 느끼는 당황.

분명 말랑하고 부드러워야 할 입술이, 그러니까 마시멜로 같은 감촉을 기대하고 맞추었던 입술이, 생각보다 부드럽지 않단 걸 깨닫는 것.

“그럴 수…… 있지.”

“에엑?!”

리카가 깜짝 놀라서 자신의 입술을 더듬었다.

“말도 안 돼요! 입술은 말랑하잖아요! 딱딱하지 않아요!”

“그게 좀, 거리감을 못 재면 입술끼리 부딪치고 그럴 수 있잖아. 그럼 얇은 피부 사이에 두고 이빨이 부딪치는 거랑 똑같으니까…… 딱딱하지. 어, 아라 표현이 맞아.”

“그치.”

손혜빈이 동감을 표했다.

“둘 다 서툴면 그렇게 되지. 막 의욕이 앞서고 그래서. 어지간히 조심스러워서 새처럼 쪽쪽 하는 게 아니고서야. 아니다, 한 명만 서툴러도 쉽게 그러지.”

“새처럼 쪽쪽…….”

연애 박사 백설하가 연신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자꾸만 검지로 입술을 꾹꾹 누르는 게, 조아라의 발언을 검증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뭐야, 그럼…….”

신아름이 불가사의한 얼굴로 조아라를 응시했다.

“진짜, 해봤다고……?”

“누가 아라쨩 입술을 뺏은 거야!”

리카가 조아라에게 달려들 기세로 상체를 쭉 뺐다.

“야, 그건 나 걸리면 물어봐야지.”

조아라는 자신의 발언이 어른들에게 인정받자 기세등등해졌다. 놀라서 쳐다보는 멤버들의 반응을 즐기는 듯했다.

“……그럼, 키스란 게 원래 기분이 안 좋은 건가요? 피부를 사이에 두고 이빨이 부딪치는 거면요. 그냥 입술로 하는 박치기 같은 느낌인가요?”

장하양이 학구열이 가득하여 성필에게 질문했다.

“어? 아니, 방법이…… 아하핰! 한 이사님 부탁해요!”

“예?!”

장하양의 시선이 한구인에게로 옮겨졌다. 그는 어린애를 상대하듯 우물쭈물했다.

“이, 입술을, 버, 벌렸, 다물, 방법이, 사장님!”

시선이 홍규헌에게로 옮아갔다.

“손 이사.”

홍규헌마저 바통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손혜빈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백설하가 마트에서 안주로 고른 사각 치즈를 집었다.

사각 블록 모양의 치즈를 검지 끝에 올려둔 그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얘들아 잘 봐. 이렇게 하는 거야.”

츄릅, 쮸웁, 쯔읍, 하읍, 츄읍.

잠시 후, 치즈가 사라졌다.

“어때, 느낌이 와?”

“…….”

소녀연맹 멤버들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무어라 말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 저렇게 하는 거구나.

머리로 이해한 게 아니다.

마음이 느꼈다.

“그, 그러면…….”

학구열 가득한 장하양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떤, 기분인가요? 그, 키스는요. 입술이란 건, 기분이 좋을 수 있는 부위가 아니잖아요.”

“하양이 얘 말하는 거 봐!”

손혜빈은 배가 찢어져라 웃었다.

“경섭아 들었어? 기분 좋은 부위가 아니래!”

“손 이사님 제 어깨 박살 나겠어요. 그만 때려주세요.”

“와, 나 전 기획사에 있을 때 직원들이 다 그랬었거든? 아이돌 매니지먼트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교육이라고. 우와, 이런 의미였구나. 진짜 무슨 선생님 된 거 같아. 그래, 그럼 1년 반 뒤 연애 금지 풀릴 때를 대비해서 다 가르쳐줄까? 경섭아, 말해줘.”

“제가요?”

“곧 새신랑이 될 수도 있는 경섭 님의 말을 들어라!”

손혜빈이 띄워주자 민경섭은 신중히 고민했다. 그는 몇 번 턱을 쓸더니, 검지를 척 들었다.

“짜릿하지.”

“짜릿……?”

장하양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듯 귀를 기울였다.

“하, 하지만 입술은…….”

“입술만이 아니야. 혀도 있어.”

“……!”

“설왕설래(舌往舌來)지. 그러니까, 내 생각으론 입술이랑 혀가 버튼 같아. 이 버튼이 다른 버튼으로 눌리면, 머리에서 엔돌핀 같은 게 막 나와서 행복해지는 거지.”

멤버들의 집중력이 아까와 비교할 수도 없이 높아졌다.

“이 정도면 잘 표현했나?”

“경섭아, 짜릿한 동거를 하고 있구나.”

“아 뭐래요.”

“그럼 다른 사람 얘기도 들어볼까? 지음아.”

정지음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저 연애한 적 없어요.”

“……어?”

“저 모솔이에요.”

정지음이 무릎 위에 둔 주먹을 쥐었다.

“모솔이라구요…….”

“…….”

성필이 정지음의 어깨를 쓸면서 위로해주었다.

“지음아, 인연은 필요할 때 찾아오는 거야.”

숙연해진 분위기 속, 성필은 손혜빈과 눈빛을 교환했다.

‘누나.’

‘알아.’

야유회가 끝나서 회사로 돌아가면, 이수연 작사가에게 곧장 사인을 보내야겠다.

이수연 작사가는 정지음에게 마음이 있다. 그런데 정지음은 그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직 이수연 작사가가 정지음에 대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은 움직여 봐야 할 것이다.

‘회사로 돌아가자마자 계획 시작이다.’

우당탕탕 정지음 솔로 탈출 계획!

그렇게 키스에 대한 주제는 막을 내렸다.

이어진 진실 혹은 도전에서, 신아름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조아라의 키스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기를 썼다.

하지만 조아라는 평소 맥주로 단련한 덕분인지, 술을 쉽게도 마심으로써 모든 위기를 모면했다.

“어, 박 이사님이다!”

다들 취하면서 게임의 룰도 바뀌어갔다.

질문을 정하고 병을 돌리는 게 아니라, 대상이 정해지고 나서 질문을 만드는 것이다.

병을 돌린 당사자인 리카가 고심을 거듭했다.

“아타시(저)는…… 아!”

“뭐 물어보려고 그렇게 고민해.”

“솔직히, 진짜 솔직히, 소녀연맹 멤버들을 이성적으로 느낀 적이……!”

“리카.”

홍규헌이 즉시 제지했다.

“그런 건 장난으로라도 물어보지 마. 애초에 그럴 리도 없고.”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대학교 MT나 평범한 기업 회식이었다면, 방금의 질문으로 분홍빛 기류가 생겨났을 수도 있다.

좋은 술자리 안주가 되었겠지.

하지만 엔터사에선 그럴 수가 없다.

“허.”

약간 경직된 분위기를 풀려고 성필이 일부러 비웃음을 날렸다.

“하아, 리카야 리카야.”

“하, 하이(네)?”

“너는 널 되게 과대평가하는구나?”

“손나(그런)!”

“새파랗게 머리에 피도 안 마…….”

“방금 팀장님 말투 윤상열이랑 되게 비슷했다. 역시 같은 회사에 있었어서 닮은 건가?”

“당장 그 말 취소해!”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점점 기력이 딸리는 사람이 나와서 자러 들어가기도 하고, 가만히 앉아 조는 사람까지 생겼다.

술게임도 끝나고, 다들 조금씩 술잔을 기울이면서 대화하게 되었다.

“우리가 그거 말씀드렸었나? 아름이랑 아라가 싸운 거.”

“아 쌤. 그 얘긴 왜 또 꺼내요오…….”

“뭔데 뭔데? 둘이 왜 싸워?”

“아무것도 아녜요 진짜로.”

조아라가 숨기려 하자 손혜빈은 더 구미가 동하였다.

백설하도 이야기를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아름이가 프라이버시에 민감하잖아요. 그래서 언젠가, 몇 개월 전이었지. 아름이가 커튼을 주문했어요. 바닥에 이렇게…… 옷 행거처럼 양쪽에 세워서 벽처럼 치는 거요.”

“아아, 그걸 애들 방 침대 사이에 놓으려고 했구나?”

“네. 그랬더니 막 아라가 화내는 거 있죠.”

“에이.”

조아라가 다 옛날얘기란 듯 손을 힘없이 저었다.

그녀는 진실 혹은 거짓에서 진실 방어를 위해 한없이 술을 들이켰었다.

그래서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 뭐 옛날얘기잖아요. 하지 마요…….”

“아라가 화를 내? 뭐, 방이 좁아져서?”

“아뇨, 아라가…….”

“아니이!”

조아라가 앙탈 부리면서 백설하의 이야기를 끊었다.

“그건 신아름이 잘못했지!”

“……뭐.”

신아름이 졸다 말고 게슴츠레 눈을 떴다.

“내가 또 뭐.”

“야 신아름 너는 어? 애가 왜 그렇게 각박하고 정이 없냐?”

“또 뭐 이년아…….”

“커튼, 그거 방 사이에 칠 거면 어? 우리가 왜 숙소에 같이 사는데?”

이야기를 듣던 이들이 움찔 놀랐다.

조아라가 울먹였기 때문이다.

“내, 내가 그렇게 싫냐? 우리 같이 살잖아, 같은 그룹 멤버인데, 그렇게 보기 싫냐고오…….”

“에휴.”

신아름은 비척비척 조아라의 옆으로 걸어가서,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내가 너를 왜 싫어해.”

“끄윽, 거, 거짓말하지 마아……. 맨날 나보고 뭐라고 하고, 화내고오…….”

“얘 내로남불 심한 거 봐라. 나만 너한테 화내? 너는?”

“나는 친하니까아…… 친하니까 그런 거란 말야아…….”

“나도 너 좋아해. 그땐 내가 미안했어.”

조아라는 신아름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거의 오열하다시피 울었다.

그녀가 코를 훌쩍이면서 물었다.

“지인짜? 지, 진짜야?”

“어. 내가 널 왜 싫어해.”

“아름아…….”

“근데 너 그때 진짜 심했어. 내가 바지 좀 입으라고 해도 죽어도 안 입고 다니고.”

조아라가 울다가 웃었다.

“리카가 나 자는데 벗기는 거라고오…….”

“아라쨩 우소츠키(거짓말쟁이)! 이사님 아라쨩한테 뭐라고 말 좀 해주세요!”

“너는 내 무릎에서 머리 좀 치워라.”

“으아앙 베개 돌려줘요!”

“내 무릎이야.”

성필은 조아라와 신아름의 우정을 보고 미소를 머금었다. 촬영까지 마친 후, 주변을 가볍게 훑었다.

“사장님, 이제 슬슬 파해야겠죠?”

“그래, 그러자……. 막잔하고 끝내.”

이미 정신을 잃거나 먼저 들어간 사람을 제외하고, 남은 사람들끼리 잔을 부딪쳤다.

“그냥 불 끄고 자자. 정리는 내일 일어나서 하고……. 그리고 설하야, 하양이는 제대로 눕혀줘.”

장하양은 양반다리인 채 상체만 앞으로 구부린 채였다. 그 상태로 자는 중이었다.

무슨 요가 자세 같았다.

“네……. 하양아, 눕힐게.”

“어, 언니. 언니?”

“응, 언니야.”

“언니, 나 키스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요.”

“그러니?”

“네.”

“자고 일어나면 가르쳐줄게.”

“궁금해요…….”

성필은 다들 뻗은 걸 확인하고 거실의 불을 껐다. 안쪽 방까지 가고 싶었지만, 시야가 흔들리고 속이 울렁거려서 도저히 불가능하다.

성필은 그냥 바닥이 철퍼덕 앉았다. 그리고 적당히 구석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러자 종아리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리카, 나 베개 아니라고…….”

“돌려줘요!”

“그래, 그냥 써라…….”

눈이 절로 감겼다.

* * *

성필은 어둠을 보았다.

정신은 깨어났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눈을 뜰 기력이 없었다.

‘어우, 속 아파.’

진실 혹은 도전 후반부에, 더 빠르게 간다면서 걸린 사람의 양옆에 있던 이들도 술을 마시게 룰을 바꾸었다.

덕분에 다들 엄청나게 술을 마셔야 했다.

‘내일 11시까지 펜션 비워야 하는데.’

술이 강하다고 자부하는 성필도 이 지경이면,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일어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몇 시지?’

제발 새벽의 끝자락이나 아침이길 바란다. 차라리 지금 일어나서 라면이라도 끓이게 말이다.

‘차라리 토할까. 머리가 너무 아픈데.’

성필은 힘겹게 눈을 떴다.

바로 앞에 조아라의 얼굴이 보였다.

창밖으로 비쳐오는 푸른 달빛에 비친 조아라의 얼굴이, 고작 십수 센티미터 떨어져 있었다.

“…….”

서로의 눈이 맞았다.

그리고 조아라는 아무 일 없었단 듯 눈을 스르르 감았다.

“야.”

“…….”

“왜 모른 척해.”

“뭔 귀신이야? 갑자기 눈 뜨는 게 어딨어요.”

“넌 뭔데. 왜 내 옆에 있어.”

“일어나니까 여기 있었어요.”

“근데 왜 안 떨어지고?”

“……아저씨가 자꾸 내 이름 부르니까.”

“어?”

“그래서 계속 보고 있었어요.”

“내가……?”

“네. 계속 ‘아라야 아라야’하는데, 신기해서 계속 보고 있었죠.”

어렴풋이 눈을 뜨기 전의 기억, 꿈이 떠올랐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기억하려 하니 꿈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조아라가 나왔던 것 같다.

지금의 조아라가 아니라, 전생의 조아라였다.

성필은 팔로 땅을 밀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어디 가요?”

“머리가 너무 아파서. 바람 쐬러.”

성필은 바닥을 더듬어서 근처에 놓아두었던 생수병을 찾으려고 했다.

누군가가 성필의 손에 닿았다.

눈에 신경을 집중하니, 암순응에 따라 어둠 속이 더욱 명확하게 보였다.

“박 이사님, 양로원을 떠나봤자 행복은 없어요……. 매정한 자식들은 잊고 여기서 여생을 보내요…….”

리카였다.

성필은 그녀가 넘어뜨린 생수병을 쥐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계곡 근처라 그런가, 여름밤이 쌀쌀했다.

성필은 물을 계속 마시면서 품을 더듬었다.

‘아, 담배 끊었지.’

머리가 찡하게 울린다.

“어후…….”

성필은 술기운이 일으킨 고통을 뱉어내듯 신음을 흘렸다.

그때 뒤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조아라가 비틀거리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저씨 땜에 깼잖아요.”

“나 때문이라고?”

“갑자기 사라진 애인 찾는 거처럼 부르면 잠이 깨죠. 무슨 꿈 꿨어요?”

“꿈은 무슨.”

“나 나왔죠?”

“나왔어도 네가 뭔 사고라도 쳤겠지.”

“쓰읍, 수상한데.”

“술 깼어? 너 아름이 붙잡고 오열…….”

“기억 다 나고 창피하니까 말하지 마요.”

성필은 은은하게 웃으면서 다시 물을 마셨다. 그렇게 속을 달래고 있자니, 조아라가 그의 손에서 생수병을 가져갔다.

“우윽.”

물을 마신 조아라가 헛구역질했다. 그녀도 속이 편치만은 않나 보다.

성필이 웃었다.

조아라가 그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남 아픈 거 보니까 기분 좋아요?”

“아니, 술 게임 생각나서. 너랑 키스한 분이 입술 박치기라도 했었어?”

조아라는 답하지 않았다.

“하기사, 마음이 앞섰을 만도 하지. 우리 회사 들어오기 전에 만난 사람이면 나이가 있지도 않을 거니까.”

조아라는 답하지 않았다.

“어떤 분이셔? 학원에 같이 다니던 사람? 아님 혹시 아이돌 하면서 만난 건 아니지?”

조아라는 답하지 않았다.

“누구야.”

너무나 간결하면서도 급박하고, 자칫 다른 사람이 들으면 질투심이 배어 있다고도 생각할 만한 말투였다.

성필도 그것을 깨달았다.

그는 곧바로 사족을 붙였다.

“아마 학생 때라고 생각하는데, 아이돌 하면서 만난 사람이면……. 뭐라고 할 생각은 없고. 만약 지금도 사귀고 있으면 나한테만 말해줘. 헤어지라곤 안 할게. 아이돌들이 안 들키고 연애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혼자 힘으로는 한계가 있거든.”

계속 사족을 붙였다.

“결국엔 사고가 터질 수밖에 없어. 업계 안에서든, 밖에서든. 나도, 우리도 대비는 해야…….”

“나 신의 있는 인간이에요.”

조아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밤이 내려준 어둠에 가려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조도 평온하여, 그녀의 표정이나 감정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프로 의식도 있고요.”

“……그래.”

그걸로 대답이 됐다.

연습생이 되기 전에 만났던 사람이란 뜻이겠지.

“그럼 됐…….”

“알고 싶어요?”

성필과 조아라 사이엔 금이 그어져 있었다.

산에 걸린 달빛이 뻗어와 무성한 나뭇잎에 걸러지고, 겨우겨우 도달한 한 줄기의 빛이었다.

조아라가 빛으로 그어진 금으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말해줄까요?”

금을 밟자, 달빛이 조아라의 얼굴을 비추었다.

창백한 빛을 받아 그녀의 안색은 희었다.

평소 대론지, 붉은지 구별할 길이 없었다.

“누군지…….”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자 성필은 말문이 막혔다. 드디어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조아라의 외모가 전생의 그녀와 같아졌음을.

성필이 처음 만났던 때의 조아라와 같았다.

마치 시간여행이라도 온 기분이다. 시간 축이 뒤틀려, 전생의 조아라를 만나는 듯했다.

“……말해줘요?”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반걸음 물러났다.

“아니, 괜찮아. 안 말해줘도 돼.”

자기도 모르게 물러난 것처럼, 그의 대답 또한 무의식적으로 나왔다.

“프라이버시…… 잖아.”

그러곤, 성필은 분위기를 바꾸려 화제를 돌렸다.

“아, 맞다. 아라야 그거 한 번 해주면 안 돼?”

“뭐요?”

“너 라디오에서 나보고 박성필 이사님이라고 불렀던 거 기억나?”

“아, 그거요. 라디오에서까지 아저씨라고 부르면 안 되잖아요.”

성필은 손을 내밀었다. 조아라가 성필에게서 가져간 생수병을 돌려주었다.

성필은 물을 전부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거 또 듣고 싶은데. 솔직히 계속 아저씨라고 부르는 거 지겹지 않아?”

성필은 생수병을 양손으로 잡아 찌그러뜨렸다. 그리고 쓰레기통을 찾으러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중, 자신의 팔에 붙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한 가닥 머리카락이었다.

“싫은데요.”

한 가닥 머리카락.

성필의 것이라기에는 긴, 하지만 긴 머리는 아닌.

“나는 아저씨한테 ‘이사님’이라고 부를 생각…….”

조아라가 술기운이 느껴지는 웃음을 뱉었다.

“절대 없어요.”

* * *

11시.

펜션을 비워야 하는 시간이다.

홍규헌은 미니 버스에 탄 인원을 점검하고, 리카가 없단 사실을 깨달았다.

“제가 찾으러 갈게요.”

성필이 펜션 안으로 들어가 리카를 찾았다.

리카는 화장실에 엎어져 있었다. 그녀는 자꾸만 ‘으어, 으어어’란 말을 반복하면서,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죽어요, 아타시(저) 죽어요…….”

“와, 너 진짜 심하게 마셨다. 아직도 취해 있네.”

“너무 아파요오……. 저 여기서 좀만 자고 갈게요오…….”

“조금만 걷자.”

“제가, 우웁, 알아서, 택시 타고 갈 테니까아…….”

“일단 토부터 하자. 그럼 훨씬 나을 거야.”

“토를 어떻게 마음대로 하나요오…….”

성필이 리카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검지를 펴게 했다.

“이사님……?”

성필이 리카의 검지를 그녀의 입으로 가져가게 했다.

“아, 안 돼! 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돌로서도 여자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끝나는……!”

잠시 후, 리카는 아까보다 확연히 멀쩡해진 채로 버스에 올랐다.

“아타시(나), 부활!”

“너 거의 죽기 직전 아니었어?”

“아직도 위장이 뒤틀리고 손발이 벌벌 떨리지만 정신은 멀쩡해!”

“뭔데. 팀장님이 숙취 음료라도 먹였어?”

“먹었다기보다, 뱉었지.”

“저런…….”

홍규헌이 버스에 비치된 마이크를 잡았다.

그녀는 어제 한 화장을 지우지도 못하고, 아침에 씻지도 못한 채 버스에 탔다.

다들 그렇지만, 그녀의 몰골이 가장 안 좋아 보였다. 직원들이 합심해서 그녀에게 술을 먹였기 때문이다.

“어…… 친애하는 가로 엔터 임직원 여러분. 고대하던 제1회 야유회가 끝났습니다. 다음부터는 더 노멀하게 놉시다……. 기사님, 출발해주세요.”

그렇게 가로 엔터의 첫 번째 야유회가 끝났다.

성필은 차창에 머리를 붙이고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런데 밖의 풍경이 아름다워 눈을 감지 못했다.

밖에 맞춰져 있던 초점은 차창에 반사된 얼굴로 향했다.

성필의 반대쪽 좌석에 앉은 조아라였다.

그녀는 리카의 재잘거림을 들으면서 무심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성필은 생각했다.

어쩌면 조아라도, 차창에 반사된 성필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박 이사님, 같이 들으시겠습니까?”

한구인이 이어폰의 한쪽을 내밀었다.

성필은 줄 이어폰을 볼 때마다 적응하기 힘들었다.

“한 이사님은 블루투스 이어폰 안 사세요?”

“아, 저는 약간…… 불신이 있다고 할까요. 음질이 더 낮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그런 생각이 보편적인 시대구나.

성필은 새삼스레 자신이 몇 년의 과거를 거슬러 왔단 게 체감됐다.

성필은 이어폰 한쪽을 받아 귀에 꽂았다.

눈을 감고 들으니 여러 악기가 느껴졌다. 피아노, 드럼, 콘트라베이스였다.

“이건 무슨 장르예요? 뉴에이지?”

“재즈입니다.”

“아, 재즈. 제목은요?”

“‘When I Fall in Love’입니다. 빌 에반스의 것이죠.”

‘내가 사랑에 빠질 때’라…….

“그러고 보니, 박 이사님은 음악사 시간에 재즈부터 다루시지 않으셨군요. 그게 의아했었는데, 재즈는 안 들으시나 봅니다.”

“예. 제 대중음악 지식은 록부터 시작해서요. 재즈 잘 아세요?”

“남들만큼은 압니다.”

성필은 한구인의 ‘남들만큼’이 재즈 애호가를 칭한단 것을 알았다.

‘재즈는 이제 클래식과 함께 순수 음악의 반열에 들어섰으니까. 한 이사님이 즐기신대도 이상하지 않지.’

성필에게 재즈는 막연히 어려운 음악, 시간을 내어 찾아들어야 하는 음악, 카페 같은 곳에서 트는 분위기 있는 음악이었다.

그런데 ‘When I Fall in Love’를 들으니…….

‘왜 수십 년간을 풍미했는지 알 거 같네.’

성필은 사랑에 빠졌던 순간이 떠올랐다.

전생이 떠올랐다.

성필은 재즈와 함께 추억을 곱씹으면서 버스의 흔들거림에 몸을 맡겼다.

* * *

성필은 생경한 경험을 했다.

자신의 집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다.

‘문을 바로 열면 소민이가 곤란한 상황일 수도 있으니까.’

이미 회사와 연락하여 돌아간 건 아닐까.

회사와의 불화를 최소화하려면 최대한 빨리 돌아가는 게 맞을 것이다.

성필은 차라리 그러길 빌었다.

‘그리고 문제가 계속되면…… 최소한 내가 상담은 해줄 수 있겠지. 전화가 있으니까.’

성필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문이 열리고 양소민의 얼굴이 빼꼼 나타났다.

“아, 팀장님. 오셨어요?”

“응. 다녀왔…… 하하, 이상하네.”

“네, 다녀오셨어요.”

성필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갔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나마 다른 건, 방금 설거지를 했는지 물기가 보이는 싱크대였다.

“밥은 먹었어?”

“네.”

양소민은 성필에게 답한 뒤, 바로 침대에 누워 태블릿을 보았다.

성필은 바닥에 앉아 메고 온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정리할 것을 차례로 꺼내며 양소민에게 말을 걸었다.

“체스 두고 있었어?”

“팀장님.”

“응?”

“계속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어떤 거?”

양소민이 태블릿을 돌려서 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성필과 신아름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성필의 얼굴이 굳었다.

양소민은 태블릿을 터치하면서 계속 사진을 넘겼다. 성필과 소녀연맹이 찍은 사진들이 계속 나왔다.

“윤상열 PD님한테 찍혀서 쫓겨난 게 아름이가 아니라 저였으면…… 하는 생각이요.”

“…….”

“사실 제가 쫓겨나는 게 맞았는데. 제가 제일 못했었으니까요. 아름이가 아니라, 제가…….”

“…….”

“그러면요.”

양소민이 한 사진에서 손가락을 멈추었다.

성필과 신아름의 사진이었다.

“여기 있는 게 아름이가 아니라, 저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들고 그러네요.”

성필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양소민이 헤실헤실 웃었다.

“그럴 리는 없겠죠, 그런데. 아름이가 아니라 제가 나왔어도, 저는 모자라니까…….”

“소민아.”

성필이 양소민을 위로하려 다가가려던 순간, 초인종이 눌렸다.

“아, 데리러 오셨나 봐요.”

“……데리러 ‘오셔’?”

존댓말.

상급자나 연장자에게 쓰는 말이다.

‘데리러 왔다면, 석세스 엔터 사람이겠지.’

매니저나 다른 직원,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런데 왜 자꾸만 이질감이 느껴질까.

“팀장님.”

양소민이 침대에서 폴짝 내려왔다.

“묵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팀장님 봐서 좋았어요. 옛날처럼…… 헤헤, 시간을 많이 보내진 못했지만요. 그거 하나만 아쉽네요.”

또 초인종이 눌렸다.

성필은 그제야 움직일 수 있었다.

그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문으로 다가가서, 열었다.

예상대로, 석세스 엔터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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