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31화 (331/760)

331화

성필이 양소민을 보고 가장 처음 먼저 느낀 감정은 당황이었다.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 것과 비슷한 기분이리라. 웬만한 계기가 없고서야 만날 일 없다고 생각해왔던 상대와의 만남.

다음으로 느낀 건 반가움이었다.

성필이 가장 익숙하게 떠올릴 수 있는 연습생 때와의 외모와는 많이 달라졌다.

이젠 제법 어른인 티가 난다.

자란 그녀를 다시 보니 확실히 기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가 났다.

‘석세스 엔터는 뭐 하는 거야?’

양소민의 행색을 보아하니 성필의 집 앞에서 꽤 긴 시간을 기다린 듯했다.

성필을 보자마자 반갑게 다가온 것부터가 그러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올 만한 반가움이었다.

‘뭔 짓을 했으면 애가 숙소도 빠져나와서 이러고 있어?’

화가 난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산더미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그럼 밥부터 먹자. 나 저녁을 못 먹어서. 소민이는 밥 먹었어?”

먹고 오는 길이지만, 양소민은 사소한 일로도 부채감을 느끼는 아이다.

대뜸 밥을 주겠다고 하면 미안해할 테니, 성필도 못 먹었다고 거짓말했다.

과연 양소민은 그래도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성필이 식사 전이란 사실에 자그마한 안도감을 드러냈다.

“아니요. 아직…….”

“들어가자.”

성필은 비밀번호를 누르고 입구를 열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성필은 그녀가 뒤따라오는 소리를 들었다.

* * *

양소민에게는 여벌의 옷을 주고 원한다면 씻으라고 했다.

성필은 일이 생겨서 한 시간 정도 자리를 비운다고 말한 후 집을 나섰다.

적당히 동네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곤 들어갔다. 양소민은 성필이 준 옷으로 갈아입은 후였다. 머리칼에선 옅은 물기가 보였다.

“체스 안 하고 있네?”

성필이 기억하던 양소민이라면, 시간이 남으면 체스 앱을 켜서 바로 대국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양소민은 바닥에 다소곳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핸드폰을 받았구나.’

마지막으로 양소민과 연락했을 땐, 아직 글로브가 핸드폰을 회사에 맡겨둔 상태였었다.

‘글로브가 잘돼서 준 걸까?’

성필은 글로브의 성장세에 깊은 감명을 느끼고 있었다.

최근의 컴백으로 초동 판매량 79,000장을 달성하고, 음방 1위도 다수 찍었었다.

‘전생보다 성장세가 가팔라.’

성필이 느끼는 쾌진격을 윤상열도 못 느낄 리 없으리라.

예상을 뛰어넘을 성공 때문에, 그답지 않게 조금 유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성필은 상념을 끊고 다시 양소민에게 집중했다.

“체스, 질린 거야?”

양소민이 우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성필은 그녀의 옆에 놓인 핸드폰으로 눈이 갔다. 아무렇게나 놓인 핸드폰의 화면이 검었다.

손대지 않고 가만히 두면 시간이 떠오르는 기능이 달린 기종인데도 그러했다.

‘꺼져 있네.’

배터리가 다 달았으면 충전하지 않았을 리 없다. 의도적으로 꺼두고 있는 것이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양소민의 눈동자에 빛이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꺼졌다.

“아뇨. 살찌니까…….”

“그래.”

굳이 더 권하진 않았다.

아이돌로서 유혹을 뿌리친 게 대견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딱히 성필이 그녀를 살찌게 할 생각이 있던 건 아니다.

‘소민이는 아이스크림 좋아했으니까.’

여름이기도 하고.

성필은 에이컨의 온도를 살짝 낮추고 그녀의 앞에 앉았다.

“숙소에 안 돌아가도 돼?”

“…….”

“휴가는 아닐 테고.”

“…….”

“무슨 일이야?”

“……도망, 왔어요.”

도망.

성필은 그 단어가 가출 정도의 어감으로 들리지 않았다.

회사 무단결근 수준쯤 될까.

‘소민이의 심정을 생각하면 이런 건 묻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물어야겠지.’

“스케줄은?”

“없어, 없을, 제 기억으로는 없어요. 주말엔…….”

부정확한 답이지만, 아마 사실일 것이다.

양소민도 정신줄을 전부 놓고 도망간 건 아니었다. 앞뒤를 잴 정신은 남아 있었다.

“소민아. 우리 집엔 며칠이고 머무르게 해줄 수 있지만, 사정을 들어야 해. 차갑게 들리겠지만 소민이는 사회인이잖아.”

“……네.”

“부당한 이유로 태업하면 안 돼. 계약서에도 명시된 부분이고, 추후 불이익받을 수도 있어.”

“…….”

“그리고 약속할게.”

죄인처럼 바닥만 보던 그녀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어떤 이야기가 나와도, 난 소민이 편을 들어줄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

“……흐끅.”

양소민은 울먹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글로브에게 약 일주일의 휴식기가 주어졌다. 의도적으로 만든 게 아닌, 우연히 스케줄이 배치되다 보니 생겨난 황금휴일이었다.

하지만 양소민에겐 그것을 즐길 권리가 부여되지 않았다.

“쉬려고?”

윤상열이 양소민에게 한 말은 그게 전부였다. 가타부타 설명이 붙지도 않았다.

하지만 양소민은 ‘쉬려고?’에 담긴 뜻을 모를 수가 없었다.

‘연습과 과제에 매달려도 모자란데, 시간이 주어졌다고 탱자탱자 놀기부터 하려고?’란 뜻이었다.

“아니, 아니요…….”

윤상열이 내준 과제가 있었다.

그는 항상 글로브 멤버들에게 개인적인 과제를 하나씩 내주곤 한다.

앨범 활동기에도 예외가 아니다.

멤버마다 과제를 하나씩 받아 윤상열에게 OK 사인을 받아야 하는데, 아직 양소민만이 과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래야지.”

“……가보겠습니다.”

윤상열은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는 그녀를 보지도 않았다.

그저 책상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사운드 모듈과, 모니터 위에 뜬 작곡 인터페이스에만 눈을 박아넣고 있을 뿐이었다.

“후우.”

양소민은 연습실로 돌아와 거울 앞에 섰다.

그녀의 과제는, 글로브의 최신 컴백곡인 ‘플래인 라이트(Plane light)’의 안무 시안으로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이었다.

당연히, 춤추면서 노래 부를 수 있도록 그리고 아이돌에 알맞게 개선된 완성본보다 시안(試案)이 더 난이도 있다.

안무가들이 아이돌의 퍼포먼스를 고려하여 시안을 내놓는다고 해도, 그들은 노래까지 같이 부르는 감각을 완전히 알 수는 없으니.

‘시안으로 우리 퍼포먼스를 해야 하는 거지…….’

괜찮다.

다른 멤버들도 모두 저마다의 과제를 통과하지 않았는가.

양소민과 같은 과제를 받았던 멤버인 ‘세라’도 해냈던 것이다.

‘나도 할 수 있어.’

양소민은 거울을 보면서 연습했다.

그리고 밤, 윤상열이 점검을 위해 연습실로 들어왔다.

양소민이 공손히 인사했다.

“해.”

윤상열은 연습실 안쪽으로 더 들어오지도 않았다. 팔짱을 끼고 문 옆에 서서 무미건조한 시선만 보내올 뿐이었다.

양소민은 몇 주간 연습했으며, 오늘도 종일 연습했던 퍼포먼스를 펼쳤다.

1분이나 지났을까.

“그만.”

아직 음악이 나오는 중이다.

양소민은 엉거주춤 멈춰 섰다.

팽팽한 긴장감 속, 글로브의 경쾌한 곡이 연습실을 눈치 없이 울렸다.

“내일 다시 본다.”

윤상열은 그 말을 끝으로 그냥 나가버렸다. 아무런 피드백도 없었다.

양소민은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스피커로 터덜터덜 다가가 전원을 껐다.

‘아직 괜찮아.’

휴일은 6일이나 남았다.

심장 안에 검은 찌꺼기가 바닥을 채웠지만, 곧 사라질 것이다.

여름의 햇볕이 더우면 더울수록, 땀을 많이 흘리면 흘릴수록, 휴식 때 먹는 아이스크림 한 입이 훨씬 달콤해지는 법이다.

‘내일은 될 거야.’

양소민은 숙소로 돌아갔다.

웬일로 숙소에는 활기가 넘쳤다.

힘든 활동기를 끝내고 보낸 첫 휴일이니, 멤버들의 기분이 좋은 게 당연했다.

“아, 소민이 왔어?”

리더인 라희는 거실에 앉아 다른 멤버와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양소민이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반갑게 다가와 포옹해주었다.

“고생했어. 과제는?”

양소민이 고개를 젓자 포옹이 더 강해졌다.

“내일은 윤 PD님이 통과시켜줄 거야. 솔직히 오랜만에 연습이랑 활동이 없는 기간인데, 윤 PD님도 눈치가 있으면 적당히 커트해주시겠지.”

윤상열에게는 그 눈치가 없단 게 문제였지만, 라희가 들려주는 희망찬 예측은 귓가로 달콤히 들어왔다.

“그랬으면 좋겠다.”

“조금만 더 연습하면 될 거야. 아님 세라 언니한테 도와달라고 해봐. 세라 언니도 너랑 같은 과제 받았잖아.”

“아냐. 나 혼자서 할게.”

타인의 조언으로 완성할 수 있는 과제였다면 진즉 달성했을 것이다.

세라와 같은 과제였으니, 양소민은 그녀와도 연습을 했었기에.

‘모르겠어.’

자신이 세라보다 무엇이 부족한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분명 내가 부족한 부분이 있을 거야.’

그것만 해결하면 된다.

이틀째.

“다시.”

양소민의 기대 어린 눈빛이 무색하게도, 윤상열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PD님, PD님 저기…….”

심장에 쌓인 찌꺼기가 무거워 바닥 아래로 잡아당겨지는 듯하다.

하지만 양소민은 휴일이 또 하루 줄었다는 실망감보다는, 자신의 무엇이 부족한지가 궁금했다.

“어어, 어디를 고치면 될까요……?”

“그것도 몰라?”

안다.

안무 시안을 가지고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이다. 호흡이 가파르고 동작은 원본을 따라가지 못하고 음정도 플랫되기 일쑤다.

하지만, 그건 세라도 그러했었다.

“내가 아니라 트레이너한테 물어봐. 넌 학교 다니면서 선생한테 시험 문제가 뭐냐고 물어봤어?”

“……죄송합니다.”

심장의 표면이 검게 변색되어 간다.

그래도, 아직 괜찮아.

사흘째.

“아니, 다시.”

어김없는 불허.

‘……반이나 남았어.’

휴일은 반이나 남았다.

내일은 통과할 것이다.

‘내가 부족한 거야.’

연습을 더 열심히 하자.

오늘 부족했던 부분을 복기하자.

나흘째.

“후우, 됐다. 그만.”

심장에 들어찬 찌꺼기의 수위가 절반을 넘었다. 걸을 때마다 불쾌하게 찰랑거려서, 자칫하면 쏟아질 것만 같다.

닷새째.

“나 간다.”

찌꺼기가 굳어 덩어리가 됐다.

“어, 오늘도……?”

숙소로 들어가자 멤버들의 표정도 안 좋았다. 그녀들은 양소민을 보고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양소민은 다들 왜 이러나 싶었다.

5일간 똑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이제 와서 호들갑 떤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다.

양소민은 현재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었기에.

엿새째.

“그만.”

심장이 검어졌다.

윤상열은 아쉽거나 안타깝고, 혹은 화내는 기색조차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으로 그리 말한 뒤, 여느 때와 똑같이 연습실을 미련 없이 떠나려고 했다.

“왜…….”

양소민의 작은 목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윤상열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지레짐작 말했다.

“이미 말했는데, 나한테 물어보지 마라. 트레이너나 멤버들한테 물어봐. 네가 왜 안 되는지. 꿈을 판다는 인간이 한 사람의 니즈도 못 맞춰?”

그의 말대로다.

그는 양소민이 ‘제발 뭐라도 가르쳐달라’고 부탁해도 똑같이 말했었다.

그런데 양소민은 그딴 말을 위해 입을 연 게 아니었다.

“왜, 어째서어…….”

양소민이 온몸을 배배 꼬면서 주먹을 쥐고 어금니를 까득 물었다.

“대체 왜…….”

이 감정을, 입이 아니라 온몸을 통해 내보내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입으로 부족하게나마 감정을 토해낸다.

“왜, 왜애, 어째서, 대체, 나한테 왜 도대체 왜!”

양소민이 고함을 내질렀다.

윤상열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양소민은 그에 너무나도 화났다.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자신의 분노로는 그의 눈썹조차 움직일 수 없단 사실을,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견디기 힘들었다.

“왜 나한테만 이래요 항상 항상 매일 계속 항상 매일 왜 매일 나한테만 왜 대체에에에!”

석세스 엔터에서 윤상열은 왕이다.

신이다.

누가 부정하겠는가?

이제 2년 차에 들어선 걸그룹의 앨범 초동 판매량을 80,000장 가까이 끌어올린 인간이다.

활동기가 끝난 지금에선 총판매량이 100,000장도 넘었다.

그것뿐인가?

석세스 엔터의 모든 아이돌 그룹과 아티스트들은 윤상열의 프로듀싱을 받으며, 이전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는 중이다.

정말, 신이다.

그래서 반항하는 인간조차 없다.

“나한테 뭘 바라는 건데요 대체! 아니, 그냥 나를 싫어하죠? 싫어하잖아! 그래서 이러는 거잖아!”

양소민은 자신의 반항이 더 참혹한 대가로 돌아올 것임을 안다.

하지만 심장 안에 가득 찬 검은 덩어리를 깨기 위해선 이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반항이, 신을 향한 반란이 효과가 있길 바랐다. 적어도 그의 눈썹 정도는 까딱일 수 있기를 원했다.

최소한 자신의 가치가 그 수준은 되어야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을 듯했다.

“그냥 날 싫어한다고 해요 과제 핑계 대면서 괴롭히지 말……!”

“내가…….”

신이 입을 열었다.

“너를 싫어해서 이러는 거 같냐?”

양소민의 목구멍이 턱 막혔다.

“어이가 없네. 넌 본인을 되게 고평가하고 있구나? 네가 나한테 뭐라도 되는 줄 알고.”

“…….”

“악기가 제소리를 못 내면.”

윤상열이 기계를 만지는 시늉을 했다.

“고쳐야지.”

양소민이 윤상열을 향해 뛰쳐나갔다. 하지만 목표는 그가 아니었다.

양소민은 그의 옆에 있는 문을 거칠게 열고 연습실을 나갔다.

“양소민, 와라.”

문이 닫히는 사이로 윤상열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라고.”

양소민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양소……!”

연습실의 문이 닫혔다.

양소민은 석세스 엔터 건물 밖으로 나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심장을 채우던 검은 덩어리가 녹았다.

* * *

“소민아, 밥할 줄 알아?”

“네.”

성필은 자신의 집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그녀가 1박 2일간 홀로 지낼 수 있게 안내해주었다.

새벽의 푸른 햇볕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방을 밝히는 중이었다.

“수건, 세면용품, 여벌 옷은 여기 두기로 하자.”

“네.”

또 필요한 게…….

성필은 곧 필수품까지 생각이 닿았다.

지갑에서 사용 빈도가 적은 신용카드 하나를 꺼내어 양소민에게 주었다.

“필요한 건 이걸로 사.”

“딱히 필요한 건 없어요. 그냥 있는 걸로도…….”

“혹시 모르잖아.”

성필은 그녀의 손에 카드를 쥐여주었다.

“혹시 모르니까 하루 한도는 낮춰둘게. 소민이가 나 몰래 비싼 거 사면 안 되니까.”

“아, 안 그럴게요…….”

“농담이야.”

농담이라고 하자, 양소민이 웃어주었다.

웃겨서 웃는 게 아니었다.

농담이라고 하니 웃은 것이었다. 마치 명령어를 받은 프로그램처럼.

성필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컴퓨터인데, 마음껏 써. 체스 하루 종일 둬도오…….”

“팀장님?”

성필은 급하게 컴퓨터 전원을 켰다.

그리고 비밀번호 설정을 완료한 후, 애물단지로 전락해 있던 태블릿을 서랍에서 꺼냈다.

“컴퓨터 말고 이걸로 해. 와이파이 연결돼 있으니까 뭐든 해도 괜찮아.”

“컴퓨터가 편한데.”

“바이러스 걸리면 어떡해.”

“체스닷컴만 들어갈 거예요.”

“어허! 어른이 말하면 들어!”

양소민이 배시시 웃었다.

성필이 이러는 이유가 짐작돼서일 것이다. 성필은 평정을 가장하면서,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당부했다.

“나 가고 나서 마음이 조금 안정되면, 핸드폰 켜봐. 다들 너 찾고 있을 거야.”

“…….”

양소민은 반응이 없었다.

딱히 반응을 바란 건 아니었다.

성필은 옛날 버릇으로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다가 갑자기 손을 뗐다.

“아, 미안. 소민이 이제 학생 아니었지 참.”

그러고 보니 정말 많이 컸다.

처음 봤을 때는 또래보다 더 작은 키에다가, 초등학생으로 오해받을 만큼 앳된 티가 강했었는데.

“갔다 올게.”

성필은 커다란 백팩을 등에 메고, 자신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두고 있는 양소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양소민은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머리에서 손을 떼곤 성필처럼 손을 흔들었다.

성필이 나간 방은 조용했다.

양소민은 성필이 준 태블릿 전원을 켰다. 배터리가 5% 남았단 표시가 즉각적으로 떠올랐다.

그녀는 태블릿을 충전기에 꽂고 벽에 기대어 앉았다.

‘오랜만에 시간이 났네.’

인터넷 창을 켜려던 때, 알림이 떴다.

[‘고글’에서 다른 기기에 저장된 미디어 파일을 자동으로 동기화했습니다.]

태블릿은 성필의 핸드폰과 컴퓨터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곳에 저장된 사진들은 태블릿에서도 보는 게 가능했다.

알림창에는 어제 찍은 여러 사진 중 하나가 대표 이미지로 떠 있었다.

성필과 신아름이 웃긴 표정으로 같이 찍은 셀카였다.

뒤엔 가로 엔터의 직원들이나 소녀연맹 멤버들이 보였으나, 양소민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성필과 신아름만이 보인다.

“…….”

검은 찌꺼기가, 다시 쌓여간다.

* * *

성필이 미니버스의 짐칸을 닫으면서 땀을 닦았다. 계곡 근처에 지어진 펜션은,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콘크리트로 지어졌다.

‘겉이라도 나무로 하면 안 되나.’

뭐, 중요한 건 내면이니까.

“짐 다 내렸지?”

“네.”

홍규헌은 다시 짐칸을 열어 확인을 마쳤다. 성필은 뒤에 서서 그녀의 차림을 새삼스레 보았다.

고작 산장에 놀러 온 거라곤 믿을 수 없는, 고기능 익스트림 스포츠 웨어 차림이다.

‘역시 재벌인가. 평범한 트레이닝복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시는군.’

고기능 익스트림 스포츠 웨어, 라고 표현은 했지만, 그냥 밝은색의 타이트한 등산복 형태다.

“그런데 저희 뭐 해요?”

펜션으로 향하면서 성필이 물었다.

사실 그는 자그마한 불만이 있었다.

아침 겸 점심을 휴게소에서 해결했단 것이다. 모처럼 야유회이니, 점심도 저녁만큼 신경 쓰면 좋았을 텐데.

“점심 준비도 안 했으니까, 시간이 많이 남잖아요.”

“목소리에서 불손함이 느껴지네. 돈까스 맛있게 먹어놓고 왜 그래.”

“제가요? 전혀? 안 그런데요?”

“어처구니가 없네.”

펜션 거실로 들어갈 때까지 홍규헌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거실엔 물품 정리를 끝낸 소녀연맹 멤버들과, 휴일마저 반납하고 자리해준 가로 엔터의 중역들이 있었다.

홍규헌이 그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거실 안쪽에 섰다. 그녀는 목청을 가다듬은 후 미소를 띠었다.

“오늘은 다들 신나게 놀자!”

하필 홍규헌의 뒤에 소주가 두 박스 쌓여 있어서, 왠지 그 말이 신뢰가 갔다.

“일단은 야유회를 기획해준 홍보팀에게 박수!”

다들 손혜빈을 향해 박수를 쳐 주었다. 그녀가 시상식장에 오른 배우처럼 허리를 꾸벅꾸벅 숙였다.

“홍보팀장 손혜빈입니다. 야유회는 홍보팀 전원이서 기획했지만, 저만 왔네요.”

“안타깝네.”

“그런 의미에서 사장님한테 제안이 있습니다!”

“말해봐.”

“다음 분기 보너스는 없는 걸로! 이 인간들 너무 괘씸해!”

홍규헌이 한구인에게 눈짓했다.

“매우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손나(그런)!”

방금은 정지음이 말했다.

“뭐어, 그렇게 됐네. 우리끼리라도 재밌게 놀아야지 어쩌겠어. 그러니까.”

홍규헌이 민경섭을 가리켰다. 그는 품 안에 숨겨두고 있던 선글라스를 썼다.

“오늘 이벤트 진행을 맡은 매니지먼트팀 팀장 민경섭입니다. 소녀연맹 멤버분들은 제비를 뽑아주시길.”

언제 준비해뒀는지, 그는 주머니에서 다섯 개의 제비를 뽑았다.

멤버들은 하나씩 뽑았다.

“펼쳐서 이름을 말해주세요.”

가장 첫 번째 차례는 리카였다.

“한구인…… 한 이사님이에요!”

한구인이 리카의 곁으로 슬쩍 다가갔다.

그것을 보자 백설하는 깨닫는 게 있었다.

“서, 설마 이거…….”

“설하는 뭐야?”

“소, 손혜빈, 언니…….”

손혜빈이 곧바로 백설하에게 달려가 안겼다.

“설하야 사랑해!”

“끼아아아악!”

백설하의 예상대로 이건 팀이었다.

멤버들과 임직원들이 팀을 이루어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아직 팀이 다 밝혀지지도 않았건만, 민경섭은 혼자 흥분해서 말했다.

“팀끼리 무얼 하느냐, 바로.”

보물찾기!

무대는 펜션 근처 계곡 전체다.

“상품이 뭔가요!”

“하아, 성미가 너무 급한데? 하지만 먼저 밝히는 게 더 재밌을 거 같아서 밝히겠습니다! 너희들이 가져온 아이스박스에 답이 있다!”

리카가 바로 달려가서 주방에 놓인 아이스박스를 가져왔다.

그걸 열자.

“끼에에에에엑!”

리카가 기겁하면서 뒷걸음질 쳤다.

야유회를 기획한 손혜빈과 진행자인 민경섭을 제외하고, 다들 박스로 몰려와서 리카를 기겁시킨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랍스터……?”

“다 살아있잖아?!”

“네, 상품은 활(活)랍스터입니다! 그리고 이것!”

민경섭이 숨겨두던 기다란 박스를 꺼냈다. 포장을 뜯으니 와인이 한 병 나왔다.

그것을 본 한구인이 눈을 부릅떴다.

“샹볼 뮈지니……!”

엘리트 한구인이 놀라자, 다들 침을 삼키면서 와인을 바라보았다.

설마, 엄청난 고가의 와인인가?

“한 이사님, 저거 설마 엄청 유명한……?”

“10만 원 중반대입니다.”

비싸긴 한데, 애매하게 비싸다.

한구인이 놀랄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가 놀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랍스타에 샹볼 뮈지니를 같이 사자고 한 분이 대체 누굽니까?”

손혜빈이 슬쩍 눈을 피했다.

와인을 안 마시는데 뭐 어떡하라고…….

그냥 빈티지 와인샵에 가서 가격대에 맞춰 대강 고른 것이다.

“아무튼.”

민경섭이 다시 분위기를 잡았다.

“우승한 팀에게는 랍스터와 고가의 와인을 선물로 드립니다! 오붓하게 승리를 만끽하십쇼!”

그에, 장하양이 손에 꽉 쥐고 있던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땀에 젖어 잉크가 번져 나왔다.

그녀는 기대감을 잔뜩 껴안고 종이를 펼쳤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쿵쾅거린다.

그리고.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장하양, 혼절.

그녀가 쥐고 있던 종이가 팔랑거리면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홍규헌.]

“……내가 그렇게 싫어?”

홍규헌,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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