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홍규헌은 저 멀리서 날아오는 비행기를 시야에 담았다.
아직은 작게만 보이지만, 얼마 안 있어 귀가 찌르르 울릴 만큼 커다란 소음과 함께 다가올 것이다.
“저거지?”
“예.”
한구인은 벌써 눈물이 나려는지 콧잔등을 꾹 집었다.
3개월 만의 제대로 된 재회이니 그의 심정이 이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멤버분들이 얼마나 자라셨을지…….”
“한 몇 년 떨어져 있던 것도 아닌데 자라긴 뭘 자라.”
홍규헌이 코로 숨을 들이켰다.
시원한 아침 공기가 폐까지 뻗어갔다. 외국의 공기처럼 새로운 느낌이다.
감정적인 한구인과 다르게 내내 시니컬한 태도를 유지하는 홍규헌도, 실은 격렬한 기대감을 누르기 힘들었다.
“도착했다.”
두 사람은 터미널 입국장으로 향했다.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의 틈바구니 안에서 그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방금 한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홍규헌은 쉽게도 성필과 소녀연맹 멤버들을 발견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장님! 한 이사님!”
성필은 만면 가득 반가움을 박아 넣고 쪼르르 달려갔다.
“다녀왔어요!”
“잘 오셨습니다.”
한구인이 성필과 악수했다.
굳게 맺어진 손으로 반가움을 전달했다.
오랜만에 보는 한구인은 옛날과 다름없었다. 단지 재회가 기뻐서 참을 수가 없는지, 표정 곳곳에서 활기가 화산처럼 뿜어졌다.
“익숙지 않은 외국에서 힘 많이 쓰셨습니다. 정말, 정말…….”
한구인은 멀쩡한 성필의 다리를 보자 눈물샘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오랜만에 봤는데 왜 울고 그래요!”
성필은 한구인을 격하게 포옹해주곤, 그의 눈물샘을 더 터뜨릴 요량으로 멤버들 앞으로 끌었다.
“민나(다들) 봐! 독일인이야!”
“와, 진짜 독일인이네. 일본인이랑 별로 다르게 생기지도 않았는데?”
한구인이 울면서 웃었다.
그와 멤버들의 재회를 뿌듯하게 바라보던 성필은 이제 홍규헌과 마주했다.
둘은 잠시 처음 만난 사람처럼 서로를 탐색했다. 그리고 먼저, 성필이 픽 웃으면서 말했다.
“사장님 저 안 보고 싶으셨어요?”
홍규헌은 검지와 엄지를 모아 원을 만들었다.
이 원의 크기만큼 보고 싶었단 뜻이다.
성필이 다 안다는 듯 말했다.
“안 속아요. 그거 제외한 전부만큼 저 보고 싶었단 뜻이죠?”
“아주 홍규헌 박사가 다 됐네.”
홍규헌이 팔을 펼쳤다.
두 사람이 포옹했다.
“잘 왔어, 박 이사.”
“다녀왔습니다.”
* * *
“다들 너무 반갑다!”
아침.
김수희 매니저가 숙소로 소녀연맹 멤버들을 데리러 왔다.
멤버들은 그녀와 차례로 손깍지를 끼고 반가움을 마음껏 표현했다.
그리고 전부 다 밴에 탑승하자, 김수희의 얼굴에 전문가다운 긴장감이 서렸다.
“출발할게.”
목적지, 가로 엔터.
운전자, 프로 로드 매니저 김수희.
멤버들은 오랜만에 한국인의 운전으로 회사로 출근했다.
“언니, 저희 스케줄 다른 거 있어요?”
“아니. 아직 들은 거 없어.”
백설하는 소녀연맹의 리더로서 멤버들을 관리한다.
그룹의 일정을 가장 먼저 듣는 것도 그녀였지만, 아직은 마땅히 정보가 없었다.
소녀연맹은 귀국일에 쉬었기 때문이다.
‘박 이사님은 아침에 바로 출근하셨다지.’
백설하는 성필이 걱정됐다.
깁스는 풀었다지만 다리가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닐 텐데. 한국으로 온 하루 정도는 더 쉬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돌아가면 박 이사님이 말씀해주실 거야.”
“매니저님.”
“응, 아름아 왜?”
“우리 회사에 남자 연습생들 들어왔죠?”
김수희의 표정이 굳었다.
“어…… 그렇긴 한…….”
“몇 명이나 왔어요?”
“지금은 일곱…….”
“많아!”
리카가 화들짝 놀랐다.
“3개월 만에 그렇게 모은 건가요!”
“으, 으음, 여러 방법으로 오디션 봤으니까.”
“차기 그룹은 무조건 7인조 이상이네요!”
“아마…… 그건 아닐걸?”
“에, 어째선가요?”
“떨어지는 연습생도 있을 테니까.”
리카의 사고가 잠시 정지했다.
“떨어지는……?”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처음 뽑은 연습생을 데뷔조까지 가져가는 경우 자체가 드문 법이다.
KS 엔터도 그렇지 않았던가.
연습생 기간이 8년이나 됐던 이는 탈락하고, 1년도 안 됐던 진저는 케이어스가 됐었다.
연습생이란 본래 그런 법이다.
‘그러네, 우리가 특별한 거였구나.’
소녀연맹은 초기 멤버가 곧 데뷔조였다.
지금 와서 듣기로, 최대한 그룹을 오래 이어나가기 위해 초기 비용을 줄이려고 했다던가.
하지만 아이돌 프로듀싱의 정석은 최대한 많은 연습생 가운데서 데뷔조를 선발하는 것이다.
“그럼 혹시 유우토란 연습생 있나요!”
“모르겠어.”
“곧 들어올 예정이라거……!”
“저기, 미안 리카.”
김수희가 단호히 답했다.
“나는 그냥 로드라서 그런 거까지는 몰라.”
알아도 말하면 안 된다.
매니지먼트팀 팀장인 민경섭이 신신당부한바, 소녀연맹과 남자 연습생들끼리는 사소한 정보교환조차 이뤄져선 안 된다.
‘석세스 엔터에서도 그러셨다니까.’
사랑은 전장에서도 꽃 피운다던가.
기획사라고 그러지 않을 리 없다.
한창 꽃다운 나이인 애들을 모아두는 곳 아닌가. 심지어 전부 선남선녀다.
“……그런가요.”
리카는 살짝 토라졌다.
가로 엔터에 도착하고, 멤버들은 입구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3개월 만에 온 고향의 향취를 느끼기 위함, 은 아니었다.
“이거 비밀번호가 뭐였지?”
“48…… 4로 시작했던 건 맞는데.”
“제가 해볼게요!”
“야 아니잖아. 이거 몇 번 틀리면 막 격벽 내려오고 그런 거 아냐?”
그녀들이 못 들어갔던 건 단순히 비밀번호를 잊어먹은 까닭이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처음 보는 남자가 나타났다.
“아, 감사합니다…….”
백설하가 대표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나타난 남자는 20대와 30대 사이에 자리한 외모였다. 그는 소녀연맹을 보곤 눈을 크게 뜨더니, 너무 과하지 않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와, 직접 보는 건 처음이죠? 와, 와아, 진짜 소녀연맹. 아, 죄송합니다. 신인개발팀 신준성입니다. 반가워요.”
“네, 반갑습니다.”
멤버들은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뒤를 흘끔댔다.
신준성은 멤버들이 사라질 때까지 배웅할 생각인 듯, 굉장한 텐션으로 팔을 흔들고 있다.
“신인개발팀이 생겼구나.”
가로 엔터의 직원이 늘어났다더니, 설마 들어오자마자 그 편린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모르는 사람이지만, 같은 가로 엔터의 식구라고 하니 묘하게 꺼려지지 않았다.
조아라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신준성이 아직도 팔을 흔들고 있었다.
“쌤, 저분 신인개발팀이랬죠?”
“어, 응.”
“저 사람 그럼 보컬리스트예요 댄서예요? 아니면 그냥 기획자?”
그걸 백설하가 어떻게 아는가.
“몰라요?”
“모, 모르지 나는…….”
“쓰읍, 고수끼리는 기(氣)로 느낄 수 있다던데. 절정의 경지인 쌤이 못 느끼는 거면 저 사람 수준도 상당하겠네요.”
“…….”
조아라의 머릿속에서 백설하 자신은 대체 어떤 이미지이지?
‘그냥 놀리는 거지? 절정…… 의 경지란 말도 그렇고.’
백설하가 부끄러워하는 단어란 걸 알아서 계속 쓰는 것이다.
어쨌든, 신인개발팀이라.
‘수현이도 아이돌이 되고 싶댔지. 혹시 가로 엔터로 왔을까?’
어쩌면 이 건물 안에 이미 있는 게 아닐까.
2층으로 올라가는 길.
“어?”
멤버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랐다.
항상 닫혀 있어 왕래가 없던 3층에서 누군가가 내려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상당히 젊은, 10대 후반의 남자였다. 그는 생수를 마시면서 터덜터덜 내려오다가, 소녀연맹을 보곤 우뚝 멈췄다.
“저기…….”
백설하가 입을 열자, 그는 생수병을 찌그러뜨릴 것처럼 꽉 쥐고는 3층으로 황급히 뛰어 올라갔다.
“……뭔데, 우리가 무슨 괴물이야?”
조아라는 진심으로 빈정이 상한 듯했다.
사람을 보자마자 거의 네발짐승처럼 계단을 짚으면서 도주했으니 기분이 나쁠 만도 했다.
“신경 쓰지 마.”
신아름이 조아라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잖아.”
“내가 아니라 너 보고 도망간 거 아님?”
“흐, 네 얼굴 보고 도망간 거 아니면, 경섭 오빠가 따로 남자 연습생들한테 통보했겠지.”
“뭘?”
“우리랑 말도 섞지 말라고. 안 그럼 쫓아낸다거나. 석세스 엔터에서도 남녀 그렇게 갈랐거든. 걸리면 징계받고.”
“……근데, 진짜 있구나.”
소녀연맹 미래의 후배들이, 정말 가로 엔터 안에 있었다.
“얘들아 오랜만이다!”
연습실엔 민경섭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멤버들과 한 번씩 가볍게 포옹하면서 반가움을 표했다. 멤버들도 오랜만에 본 그의 모습에 반색했다.
“오빠 언제까지 살찌려고요?”
“뭐 얼마나 쪘다고 그래 아름아…….”
“새언니가 밥 잘 챙겨주나 보네. 근데 턱시도 잘 어울리려면 관리 좀 해요.”
민경섭은 우울하게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았다. 티가 안 난다고 생각했건만, 정말 살이 찌긴 하는 모양이다.
다른 사람도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너희 앞으로 스케줄 내가 알려줄게.”
“박 이사님이 안 해주시고요?”
“형은 회의 있어서.”
“임원 회의 월요일 아닌가?”
“아라는 우리 회사를 되게 잘 아는구나.”
“짬밥이 얼만데요.”
“뭐, 이제 막 일본에서 온 참이니 매일 해도 부족하지. 어쨌든,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콘서트야.”
멤버들의 눈에서 장난기가 전부 사라졌다.
일본 데뷔라는 빅 이벤트를 치르고 돌아온 그녀들에게 주어진 과업.
콘서트.
“확정된 나라는 별로 없어. 일본, 미국, 대만, 인도네시아.”
대부분 멤버들이 납득할 나라들이었다.
“칠레…….”
“칠레?!”
그런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나라가 끼어 있었다. 심지어 고려 중이란 것도 아니고 확정되었다고 한다.
“치, 칠레에서 저희가 콘서트를 할 수 있나요……? 칠레에서 케이팝이……?”
“어? 아니, 자세한 건 모르는데 할 수 있다던데? 아마 많게는 아니고 1,000석 조금 되는 규모로?”
1,000석이 어딘가.
지구 반대편의 나라에 소녀연맹의 음악이 닿았단 건, 앨범 판매량 같은 것과는 다른 의미로 감동이 있었다.
“확정된 곳은 그래. 다른 나라들이 앞으로도 더 추가될 거야.”
“질문!”
“그래, 리카.”
“왜 중국은 없나요?”
중국은 큰 나라가 아닌가.
케이팝을 소비하는 집단이 꽤 있을 만하다.
그런데 소녀연맹의 콘서트 계획에는 껴 있지 않았다.
“야 리카, 너 아저씨 수업 시간에 졸았냐?”
“에, 뭐 있었어? 박 이사님이 중국을 싫어한다던가?! 인종차별이야!”
민경섭이 실없이 웃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한한령(恨韩令) 때문에 못 하는 거야.”
“아, 한한령…….”
리카는 성필에게서 들었던 음악사 수업이 새록새록 기억나기 시작했다.
전략 무기 배치로 이어진 갈등은 중국의 대대적인 규제 보복으로 이어졌었다.
때문에 케이팝은 중국이란 거대 시장을 잃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케이팝이 세계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어, 케이팝이 글로벌화 되는 본격적인 발판 역할을 했었다.
리카가 두 눈에 정열을 불태웠다.
“저희의 역할이 막중하네요! 소녀연맹이 현대의 스콜피온즈가 돼서 이념의 벽을 허물어야 해요!”
“스콜피온즈 분들은 아직도 활동하고 계셔.”
“그럼 제2의 스콜피온즈예요!”
“오, 당찬데? 제2의 스콜피온즈라니. 그렇게 될 수 있어?”
“꿈은 높아야 하니까요!”
민경섭은 허허 웃을 뿐이었다.
제2의 스콜피온즈란 별명이 붙으려면, 싱글 앨범 하나를 1,000만 장 이상 판매한 기록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지, 앨범에서 음원으로 시대가 넘어갔으니까 기준이 다르겠지.’
한 곡의 스트리밍 횟수가 20억, 30억 회를 초과하면 제2의 스콜피온즈라고 불려도 될까?
그렇게만 되면 민경섭은 물론 가로 엔터 이사진 전원이 더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소녀연맹을 데리고 상장하기만 해도, 가로 엔터가 한국 기업 시가총액 30위권 내에 진입할 테니까.
민경섭은 행복한 상상을 끝내고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아무튼, 너희들은 그때까지 콘서트 세트리스트를 완벽히 익혀야 해.”
총 20곡.
한 명당 맡는 곡의 수는 아마 10곡 내외.
그것을 전부 퍼포먼스로 보일 수 있어야 콘서트란 이벤트가 성립한다.
“새로 익혀야 할 안무나 퍼포먼스가 많아. 앨범 수록곡들도 보컬적으로 완벽해져야 하고. 힘들 거야. 힘들겠지만, 뭐…….”
민경섭이 신뢰를 담아 말했다.
“할 수 있지?”
“네!”
멤버들이 단합되어 외쳤다.
그 즉시, 다들 오래되고 그리운 감각을 느꼈다. 앨범을 준비할 때마다 찾아왔던 일치감.
언제나 그녀들을 더 높은 단계로 이끌었으며, 혼자서는 갈 수 없는 장소까지 데려다주었던 유대감.
이번에도 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콘서트까지 했으면 진짜배기 아이돌, 진짜 뮤지션이야. 아이돌로서 서야 할 스테이지는 전부 한 발짝씩 내디뎌본 거지. 파이팅이다.”
민경섭의 설명이 끝나고, 백설하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멤버들이 그녀의 손에 손을 겹쳤다.
당연하단 듯 구호가 나왔다.
“투재……!”
“잠깐!”
“애애앵……?
민경섭이 그녀들을 제지했다.
“콘서트 준비만 쳐도 뼈가 갈리도록 힘들겠지만, 또 해야 할 일이 있어.”
이 일은 민경섭이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매니지먼트 팀장으로서, 이 일들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이사들에게 열렬히 어필했다.
‘비록 시간과 기력을 꽤 뺏기겠지만.’
민경섭은 목청을 가다듬고 일부러 텐션을 높였다.
“너희 예능이나 라디오 출연 제의가 진짜! 엄청! 많이! 들어왔거든.”
“네? 왜요?”
“설하야, 너흰 지금 너희가 얼마나 유명한지 잘 감이 안 오지?”
“어음, 그, 한국에선 활동 안 한 지 8개월 정도 됐으니까요…….”
소녀연맹 사상 최장 공백기를 달성하기 직전이다. 그동안 한국엔 얼굴도 비추지 않았으니, 인기가 엄청 많아졌다는 설명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먼저 ‘뉴아사’ 덕분이야. 세이코란 사람을 이기고 우승했잖아?”
“아, 그거……. 일본 방송인데 한국에 알려졌나요?”
“일본 방송이니까 알려진 거야! 일본 방송에서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 중 한 명을 이겼으니까!”
그제야 멤버들은 감이 잡혔다.
‘뉴아사’에서 이긴 후, 그녀들은 일본에서 온갖 방송이나 잡지 인터뷰, 지방 거대 행사에 불려 다녔다.
그땐 ‘뉴아사 덕에 우리가 유명해지긴 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래, 유명해졌다고 마음 깊이 느꼈다.
아이돌이 되고 나서 처음 느끼는, 과분하리만치 주목받는 기분을 여실히 받을 수 있었다.
이게 진짜 스타의 삶일 거라고 여겼다.
“혹시…….”
일본에서의 유명세가 한국에도 전해진 걸까?
민경섭은 그 질문에는 ‘아니’라고 답했다.
“나도 너희 일본 얘기는 들었거든? 진짜 눈 튀어나올 정도로 유명해졌다면서. 그 정도는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관심을 받고 있어. 방송 쪽에서 전부 너희들 언제 돌아오냐고만 물었다니까?”
민경섭이 출연 요청이 온 예능의 목록을 멤버들에게 주었다.
그녀들이 눈이 휘둥그렇게 튀어나왔다.
“이, 이거, 전부 다요……?”
“그래.”
웬만한 방송국 황금 시간대 예능이 전부 들어가 있다.
이런 곳에, 소녀연맹이 원하면 골라잡아 출연할 수 있다니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경연에서 이긴 걸로…….”
“그것만이 아니야. 하양아.”
장하양이 물음표를 띄우며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네가 ‘후쿠요 히다카’ 패션쇼 나간 것도 화제가 됐어.”
정확히는, 진소유와 함께 나갔기 때문에 화제가 됐다.
한국인이 일본 명품 브랜드 패션쇼의 오프닝 행사를 맡았단 건 단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한국인, 아이돌, 그것도 두 명이나 동시에.
“‘뉴아사’에서의 승리, 하양이의 패션쇼. 이 두 개로 먼저 인터넷에서 반응이 왔어. 그게 미디어까지 전해진 거야.”
뉴미디어의 발흥으로 레거시 미디어가 힘을 잃기 시작한 흐름은, 이제 와선 일반인도 느낄 정도로 가시적인 현상이다.
콧대 높은 텔레비전 방송국이 인터넷 밈이나 유머, 유행을 수입하는 게 당연시되었다.
이번 소녀연맹의 유명세도 그런 흐름 덕분에 발생한 것이다.
“너희가 봤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너희 별명이 이거거든?”
국뽕연맹.
“구려!”
“그치? 이상하지? 근데 세상 어떤 아이돌 그룹이 자기네 이름에 ‘국뽕’이란 단어를 박아 넣어진 적이 있겠어! 나도 너희가 세이코 이겼을 때 바로 일어나서 애국가 4절까지 불렀다 진짜! 너희 진짜 대단해!”
“아앗, 민 팀장님! 한 이사님이 애국심은 인간을 손쉽게 지배하려고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라……!”
“난 지배당할래! 너희들이 이렇게 자랑스러울 수 있으면 수십 번이고 지배당한다!”
신아름은 리카를 흘끗 보곤 웃음을 참았다.
일본인이 포함된 그룹의 별명이 국뽕연맹이라니. 심지어 일본의 유명 가수를 꺾고, 일본 유명 브랜드 패션쇼에 서서 얻어낸 별명이다.
리카는 어떤 기분일까?
“어쩔 수 없네요! 마음껏 취하세요!”
그다지 생각이 없나 보다.
세계시민 리카는 애국심을 극복한 지 오래다.
오직 애향심만이 남아 있을 뿐.
“제안 들어온 곳에 다 나가려면 꽤 피곤할 거야. 그래도 너희가 나갔으면 좋겠어.”
“박 이사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1주 남짓 콘서트 연습해보고, 너희들이 버텨낼 수 있는 정도를 스스로 정하래. 그리고 방해되지 않을 만큼은 나가도 된다고 하시더라.”
민경섭은 마음 같아선 모든 방송에 내보내고 싶었다.
그의 생각으로, 콘서트는 상품이다.
자고로 상품을 팔려면 홍보가 필요하지 않은가? 수많은 텔레비전 방송은 충분한 홍보가 될 것이다.
멤버들에게는 모든 방송이 ‘제의가 왔다’고 했었지만, 그중엔 민경섭이 직접 발품 팔아 가져온 일들도 많았다.
그의 판단으로, 지금이 노를 저어야 할 때다.
“그럼 지금 정할 건 아니네요?”
“그렇지. 천천히 정해도 돼.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알아달라고 지금 말해준 거야.”
“어떤 거요?”
민경섭이 과장되게 팔을 펼쳤다.
“이제 소녀연맹의 세상이야!”
아이돌 그룹이 성공과 실패의 기로에 서는 게 3년 차라고 하던가?
그런데, 소녀연맹은 이미 성공했다.
성공의 궤도에 올라서, 더는 떨어질 걱정 따위 안 해도 괜찮다.
“고생했다, 얘들아. 앞으로 쭉쭉 나갈 일만 남았어!”
매니지먼트 팀장, 민경섭.
그는 진심으로 성필에게 감사했다.
자신을 석세스 엔터에서 빼 와 소녀연맹을 맡겨주어서, 이 감동을 맛보게 해주어서, 정말로 감사한다.
“그럼 이제…….”
백설하 또한 흥분에 차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멤버들이 그에 손을 겹치고, 이번에야말로 구호를 외쳤다.
“투재……!”
“잠깐!”
“애애앵……?”
“민 팀장님 아까부터 뭔가요! 왜 자꾸 저희의 구호를 방해하는 건가요!”
“또 말해야 할 거 있어. 야유회.”
“야유회?”
“회사 차원에서 다 같이 1박 2일로 놀러 갈 거야.”
민경섭이 과장되게 신난 티를 냈다. 그런데 멤버들은 그다지 호응해주지 않았다.
소녀연맹의 질문 머신, 조아라가 손을 들었다.
“응, 아라야 뭐든 물어봐!”
“우리 바쁘다면서 놀러 가도 돼요? 콘서트 연습 때문에 예능이나 라디오도 다 안 나간다면서요.”
“놀 때 노는 것도 중요하니까.”
“안 가도 되죠?”
민경섭이 무릎을 꿇고 멤버들에게 매달렸다.
“얘들아 제발 가주라……! 너희들까지 안 가면 가는 사람이 10명도 안 된단 말야……!”
신아름은 어이가 없었다.
“오빠, 우리 회사 이제 직원이 20명 넘는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야유회 참가자가 10명을 안 넘어요?”
“……자율.”
“네?”
“주말, 참가는 자율, 이렇게 하니까…….”
전부 안 가겠다고 했다.
“90년대생이 왔어! 정말 왔어! 회사 소속감보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세대가 찾아왔다고!”
“……그럼 누가 가요?”
“사장님이랑 이사진, 나랑 지음이.”
“그냥 간부 야유회잖아요.”
“내 말이!”
멤버들이 다 함께 피식거렸다.
그리고 소녀연맹의 질문 머신, 조아라가 다시 손을 들었다.
“어디 가는데요?”
“바다랑 산 중에 택1.”
“답은 이미 나왔네요!”
리카가 엄격하고 근엄하게, 동시에 쾌활하게 선언했다.
“여름은 바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