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28화 (328/760)

328화

성필은 이 순간이 오리라고 직감했었다.

뭐라고 답할지도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거쳤다. 그녀의 품위와 위엄을 존중해주면서도 거절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선, 그딴 계획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성필은 꾸며진 모습이 아니라 진심을 드러내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세이코 씨의 마음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자그마한 여지도 주지 않는 거절이다.

혹여나 ‘기쁘다’거나 ‘놀랐네요’라고 먼저 말해서, 그녀에게 순간이나마 기대감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물론 기뻐요. 세이코 씨의 마음은 굉장히 기뻐요. 그런데 저는 받을 수 없어요.”

세이코의 얼굴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테이블 모서리를 부여잡은 손짓이,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알려주었다.

심장이 사슬로 쥐어짜이는 기분.

성필도 아는 감정이다.

“제가 싫나요?”

“아니요. 어떤 남자가 세이코 씨 같은 분을 싫어하겠어요.”

“그럼 다른 이유가 있나요?”

세이코가 바닥을 보며 숨을 토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1년에 몇 번 만나지도 못한다거나, 국적이 다르다거나, 그런 이유요? 어떤 남자도 나 같은 여자를 안 싫어한다고 했죠. 그게 사실이면, 받아들여 주면 안 될까요? 제가 더 자주 만나러 갈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으면 제가 맞춰서…….”

성필은 세이코의 이야기를 담담히 들었다.

그녀의 약속이 천장 가까이 쌓여만 갈수록 성필의 가슴이 더욱 깊이 짓눌렸다.

자신을 이렇게나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자신은 그 사랑에 보답해주지 못한다. 그만큼 사랑할 수 없다.

죄송스럽기까지 한 기분이다.

“안 되나요? 조금씩 블록을 쌓듯이 맞춰 나가는 건, 안 되나요?”

세이코의 이야기가 끝났다.

성필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 애들이…… 소녀연맹이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 저는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수 없어요.”

“……소녀연맹?”

둘 사이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로 갑자기 소녀연맹이란 애들이 끼어 들어왔다.

“저는 그 밸런스를 맞출 수 없어요.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세이코 씨를 만나는 중에도 애들이 생각날 거예요. 지금도 그래요. 1년 365일 깨어있는 매 시간, 저는 애들을 생각합니다. 애들한테 집중하고 싶어요. 꿈속에서도요.”

“…….”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실례라고 생각해요.”

진심이었다.

성필은 가끔 손혜빈과 장난으로 결혼을 입에 올린다.

손혜빈도 그에 맞춰준다. 40살이 지나도 짝이 없으면 자기가 데려가겠다고.

그럼 성필이 반색하면서 좋아한다.

성필은 아는 것이다.

소녀연맹이 정상에 오를 동안, 성필이 나이를 먹어가는 동안, 자신의 인생에 동반자가 생길 일은 없으리라고.

그래서 장난인 줄 알면서도 손혜빈의 장난을 달갑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짓은…… 못 해요.”

세이코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히무라 말이 맞네요.”

“네?”

“남자가 거절하는 이유는 대체로 일이라고…… 자기 일이라고…… 하더라구요……. 가장 편한 변명이라고…….”

세이코는 참고 있던 눈물을 흘렸다.

성필이 눈물을 닦아주려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가 손바닥을 들어 제지했다.

“알아요. 파쿠 이사가 그 애들한테 얼마나 진심인지 잘 알아요. 그냥 변명이 아니란 것도 알아요. 아는데…….”

너무 아프다.

아까 세이코는 왜 인간이 남을 미워하는지 의문을 품었었다.

그런데 이제 알겠다.

타인에게 거절당하는 경험이 모든 악의 근원임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사람이 괴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이거 하나 약속해줘요.”

세이코는 손등으로 거칠게 눈물을 닦았다. 더는 울음기가 보이지 않았다.

“5년 뒤에 다시 만나요.”

“세이코 씨…….”

“5년 뒤에 사귀어달라는 어린애 같은 부탁 아니에요. 그냥, 5년 뒤에 만나서 같이 식사해요.”

5년 후, 소녀연맹은 7년 계약이 끝난다.

그때쯤이면 성필에게도 여유가 있을 것이다.

“식사만 하는 거예요.”

“…….”

“알아요 저도. 그때면 파쿠 이사한테도 나보단 못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애인이 있을 수도 있죠. 어쩌면 배은망덕하게 이미 결혼하고 애까지 있을 수도 있고요. 그런데…….”

세이코가 활짝 웃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5년 후에 만나면 이 집에 저만이 아니라 남편이나 애들이 있을 수도 있어요. 아니면 기타 치면서 세월을 보내는 꽃미남 밴드맨이 침실 한가득 들어있을 수도요!”

“…….”

“5년 후에 다시 여기 와서, 제가 만든 요리를 먹고, 그리고 저는 또…… 물어볼 거예요.”

좋은 와인이 있어요.

“둘 다 ‘그땐 젊었지’라며 웃고 끝낼 수도 있겠죠. 좋은 추억이었다면서 식사만 하고 헤어질 수도 있고. 아니면 분위기를 타고 침실로 직행하거나, 서로 파트너가 있는데도 밤의 아방튀르를 떠날 수도 있어요!”

5년 후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중에,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들러줘요. 다시, 다시, 5년 뒤에 다시…….”

세이코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사이로 울음과 눈물이 하염없이 새어 나왔다.

성필은 그녀에게 다가가 손바닥을 걷어내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아주었다.

“파쿠 이사, 그러니까, 알겠죠? 5년 뒤에요. 그때까지 파쿠 이사는 한국 최고의 프로듀서가 돼 있는 거예요. 가후 세이코를 거절하고 일에 전념하기로 했으면 그 정도는 돼야죠. 안 그래요?”

“맞아요. 한국 최고의 프로듀서가 돼서, 시가 총액 1위의 엔터테인먼트사 이사가 되고, 글로벌적으로 성공한 그룹과 아티스트를 산만큼 키워낸 채로, 여기 다시 올게요.”

“하하…….”

세이코는 코를 훌쩍이며 목멘 소리로 말했다.

“그 정도는 돼야 저랑 겸상할 수 있겠네요…….”

“지금은 너무 초라하긴 하죠?”

“아니요…….”

초라한 인간에게 세이코가 반했겠는가.

* * *

소녀연맹 멤버들은 숙소 현관문을 살짝 열어두고, 성필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렸다.

“박 이사님 언제 돌아오실까?”

리카는 현관에 앉아 지루한 듯 턱을 괬다.

그 옆에 말동무로 앉은 신아름은 핸드폰 게임에 열심이었다.

“몰라. 잘되면 안 돌아올 수도 있겠지.”

신아름이 갑자기 인상을 팍 썼다.

“상상하니까 재수 없네. 리카 너 왜 그런 말로 사람 기분 잡치게 하냐?”

“내가 안 말했어! 아름이가 멋대로 상상했잖아!”

이젠 핸드폰 게임도 재미없다.

신아름은 아무렇게나 핸드폰을 던지고 현관 복도에 드러누웠다.

“제에발 세이코 씨가 이상한 짓 해서 팀장님 정 오만가지로 다 떨어져라.”

“어떤 짓?”

“밥 먹는 데 입 벌리고 쩝쩝 소리 낸다거나.”

“천년의 사랑도 식겠어!”

킥킥대며 웃고 있자니, 계단 아래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리카와 신아름이 귀를 쫑긋 세웠다.

계단 아래에서 점점 위로 불이 켜져 온다.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두근거리면서 지켜보던 때, 성필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사님!”

리카가 신발도 신지 않고 뛰쳐나가 성필을 계단 아래에서 맞았다.

“겨우 2시간밖에 안 걸리……!”

껴안을 듯 달려드는 리카에게, 성필이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내밀었다.

맛있는 냄새를 맡은 리카는 성필 대신 봉지에 달려들어 빼앗았다.

“치킨!”

“팀장님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성필은 5층에 오를 때까지 말이 없었다. 그리고 다 올라와서야 신아름에게 다가가 뒷머리를 쓸어주었다.

“아름이 보고 싶어서 빨리 왔지.”

“세이코 그 인간이랑 밥 먹어보니까 견적 딱 나오죠?”

“너 말투가 그게 뭐야!”

“아무 일 없었죠?”

성필은 어이가 없어서 허허 웃었다.

“없었다 그래. 아름이 이 녀석이, 아주 그냥 나 좋은 꼴은 못 보지? 망했냐 안 망했냐만 묻고 있네.”

“저 보고 싶어서 왔다면서요. 그럼 더 웃어요.”

“아름아 이거 봐! 치킨이 엄청 많아! 어디서 사셨나요!”

“신오오쿠보. 너희들 내일 돌아가잖아. 사장님한테 안 들키게 여기서 많이 많이 먹고 돌아가자.”

리카가 치킨을 머리 위에 이고 숙소 안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성필은 그 모습을 뿌듯하게 보곤, 자신의 숙소 쪽으로 향했다.

“팀장님은 같이 안 먹어요?”

“나는 먹고 왔잖아. 너희끼리 먹어.”

“어른이 사 온 건데 어떻게 저희만 쏙 먹어요. 와서 분위기라도 내요.”

“내가 무슨 도우미야? 너희 밥 먹는 데 흥이나 내고 있게?”

“마지막 날이잖아요! 아 빨리!”

“알겠어, 나 옷 갈아입고 갈게.”

“그냥 그렇게 와도 되는데.”

신아름은 성필의 완전 무장을 아쉽단 듯 쓱 보곤, 먼저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성필도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신의 숙소로 들어갔다.

어두운 방이 반겨주자, 성필은 한숨을 푹 내쉬고 거실까지 들어가 드러누웠다.

어둠 속에서, 성필은 세이코가 선물로 주었던 향초를 종이백 안에서 꺼냈다.

“…….”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필은 벌떡 일어나 형광등을 켜고 향초를 꺼냈다.

향초의 설명서를 확인한 뒤 불을 붙였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은 세이코의 집에서 나던 향과 같았다.

‘우디향이에요. 냄새는 인간의 기억에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된 감각이래요. 앞으로 파쿠 이사한테 우디향은 저, 저한테 파쿠 이사는 우디향이에요.’

부드럽게 코를 맴도는 텁텁하면서 상쾌한 나무의 향.

“정말이네.”

정말 향을 맡으니 세이코가 떠오른다.

성필은 엄지와 검지로 심지를 잡아 불을 끄고,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소녀연맹의 숙소를 찾았다.

“이사님 빨리!”

군침을 줄줄 흘리는 리카가 현관에서부터 성필의 손목을 잡고 이끌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치킨을 가운데에 두고 둘러앉은 소녀연맹 멤버들이 보였다.

성필의 얼굴이 펴졌다.

“오늘 먹고 죽자!”

“팀장님 밥 먹었다면서요.”

“또 먹지 뭐!”

“아앗, 이사님 닭 다리 먹지 마세요!”

“내가 사 왔는데 진짜 너무하다.”

“리카, 어른한테서 음식을 뺏으면 어떡해.”

“아야!”

“이사님 죄송해요. 리카가 너무 들떠서…….”

“아니야 설하야. 그럴 수도 있지 뭐.”

“으, 쌤이 그렇대요. 이거 드세요.”

“네 손때 묻은 거 안 먹어.”

“손나(그런)!”

“아하하, 리카 바보 같아.”

“그렇게 직설적으로?! 하양 언니 요즘 성격이 너무 달라졌어요! 옛날엔 더 친절했는데!”

“바아보, 머엉청이.”

“그런(손나)!”

“야 신아름, 왜 너 감자만 빼먹어.”

“감자만 먹어주면 좋은 거 아냐? 닭은 너 많이 먹어.”

“아니 별로 없는 건데 계속 먹으니까 문제지! 나도 좀 먹자고!”

“팀장님 조아라 쟤 식탐 많은 거 좀 봐요. 저러니까 다리에 살이 찌지.”

“아저씨 쟤한테 뭐라고 좀 해…….”

멤버들의 말이 뚝 멈추었다.

성필이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웃었다. 어찌나 우스우면 눈물까지 찔끔 흘리면서, 계속 웃었다.

* * *

출국 당일.

성필과 소녀연맹 멤버들은 슈이치가 운전하는 밴을 타고 공항 앞까지 왔다.

성필이 손을 내밀자 슈이치는 얼떨떨해하면서도 착실히 악수했다.

“슈이치 씨, 3개월간 정말 수고하셨어요.”

“꼭 못 볼 사람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슈이치는 하루 더 있다가 바로 가로 엔터로 돌아올 것이다.

“오빠.”

조아라가 슈이치의 등을 툭툭 두드리는 것을 시작으로, 멤버들이 그의 어깨며 팔을 두드려서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했다.

“우리 없어도 잘 살아요.”

“다들 왜 그러십니까……. 서, 설마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습니까? 저는 더 이상 가로 엔터에 있으면 안 되는 겁니까?”

“이러니까 놀리는 걸 못 그만두지.”

슈이치가 동태눈을 뜨자 다 같이 웃었다.

그 또한 피식 웃고,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밴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슈이치의 밴 뒤로 어떤 차가 주차했다.

“저런 매너 없는……!”

차에서 히무라와 미사토가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실장님, 본부장님!”

슈이치가 차 밖으로 헐레벌떡 뛰어나와 두 사람에게 허리를 숙였다.

두 사람은 슈이치에게 손 인사로 간단히 답해주고, 성필과 소녀연맹 앞에 섰다.

“박 이사님 죄송합니다. 미사토 본부장이 화장하는 데 시간이 걸려서요.”

“저거 거짓말이에요. 늦은 핑계로 여자 화장을 대면 된다는 거 너무 고리타분한…….”

“아무튼 늦어서 죄송합니다.”

“딱 맞춰 오셨어요.”

성필과 히무라가 굳게 손을 맞잡았다.

“히무라 실장님, 감사합니다. 우리 애들한테 신경 많이 써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어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은혜란 말은 제가 써야지 않겠습니까.”

또 시간만 잡아먹는 공치사 시간이 될 듯하여, 성필은 미소로만 화답해주었다.

다음으로 성필은 미사토와 악수했다.

“박 이사님, 정말, 정말로, 이렇게 떠나보내는 게 죄송할 만큼이나…….”

“알겠어요. 말로 안 해도 알아요.”

미사토는 울음기가 섞인 채 웃었다. 하긴, 감사는 성필에게 차고 넘치도록 했었다.

더 해봤자 지겨울 뿐이겠지.

미사토가 손을 떼려던 때, 성필이 그녀에게 살짝 다가가 속삭였다.

“세이코 씨한테 들었어요.”

“뭘요?”

“미사토 씨 남자친구요.”

미사토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나중에 뵐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네.”

성필이 손을 뗐다. 그리고 히무라와 미사토를 번갈아 보다가, 그들이 타고 온 차로 눈을 돌렸다.

“세이코는 안 왔어요.”

성필은 그러리라고 예상했다.

마음을 거절당한 상대를 굳이 다음날 또 볼 용기는, 어느 사람이건 쉽게 가지기 힘드니까.

“피트니스 센터에 운동하러 갔어요.”

“네. 그럼 세이코 씨한테 안부…….”

“정말이에요.”

미사토가 씨익 웃었다.

“이번에는 정말 운동하러 갔어요.”

성필에게 용건을 전할 용기가 없거나, 갑자기 소녀연맹 멤버들이 나타나서 도망가거나.

그런 때 흔히 대던 변명이 아니었다.

“규칙적으로 ‘살아야 한다’면서요.”

“아…….”

미사토가 전해준 그 말이, 세이코와 직접 나눈 작별 인사보다 훨씬 더 기뻤다.

한 달의 병원 신세, 또 한 달 가까운 기간의 목발 신세가 헛되진 않았구나 싶다.

아니, 그런 것보다 세이코 같은 가수가 다시 삶의 열정을 되찾은 게 기뻤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성필과 소녀연맹 멤버들이 두 사람에게 허리를 숙인 후, 공항 청사 쪽으로 향했다.

그때 뒤에서 히무라의 고함이 들렸다.

“여러분! 이번에는 합동 콘서트로 부도칸이었지만, 다음에는 여러분만으로 부도칸에 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반드시!”

웨벡스의 이름을 걸고.

말뿐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더욱 기쁘게 다가오는 선언이었다.

성필은 다시 히무라를 보고 말했다.

“다음에 올 땐 지금보다 훨씬 성장해서 돌아올게요. 소녀연맹을 매니지먼트해서 다행이다, 그렇게 느낄 정도로 돈방석에 앉게 해드릴 테니까. 기다려요!”

두 사람은 활기차게 손을 흔들며 서로를 배웅했다.

성필이 다시 앞을 보자, 멤버들은 두 남자의 뜨겁고도 창피스러운 대화를 들을 자신이 없었는지 저만치 나아가 있었다.

리카만이 어깨를 감싼 채 부르르 떠는 중이었다.

“스포츠 만화 다 찍으셨나요!”

“이게 인생이지.”

“빨리 가요! 곧 비행기가 뜬다구요!”

몇 걸음 갔을까, 리카는 성필의 다리를 보곤 아쉬운 투로 말했다.

“박 이사님 다리가 나으니까 아쉽네요.”

“내 인생에서 들어본 가장 끔찍한 말 베스트 10 안에 들겠네. 내가 나아서 싫어?”

“아타시(저)한테 의지하는 게 좋았어요!”

“네가 억지로 나 부축한 거잖아. 그걸 의지라고 부르진 않아.”

“앞으로도 얼마든지 의지해주세요!”

“언제나 의지하고 있어.”

리카가 뿌듯하게 웃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책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이사님, 선물!”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문고본이다.

성필은 문득 히무라와 대화했을 때 보았던 미래가 떠올랐다. 아마 이 순간이 그때 보았던 미래와 같은 시간대일 것이다.

그 미래에서도 리카가 똑같은 선물을 주었었다.

‘지금보다 우울한 얼굴로.’

현재 성필의 앞에 있는 리카는 이슬을 머금은 선인장처럼 얼굴 곳곳에 행복이 보였다.

성필은 감사히 ‘도련님’을 받았다.

“친구를 이해하는 첫걸음은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는 거예요! 한 이사님이 문학만큼 좋은 게 없다고 했어요!”

“난 이미 리카를 많이 아는데?”

“그럼 말씀해보세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음…….”

성필은 잠깐 고민하곤 가볍게 답했다.

“리카는 꽃 같아.”

“진부하네요! 여자를 꽃에 비유하는 건 너무 시대착오적이에요!”

“너는 식물원이나 꽃밭에 가지 마. 다른 꽃이랑 헷갈려서 못 찾을 거니까.”

“……나쁘지 않을지도?”

“아무튼 선물 고마워. 잘 읽을게. 옆에 한자 사전 껴두고 읽어야겠다.”

“열심히 해주세요! 나중에 귀화 시험 보셔야죠!”

리카는 여느 때처럼 당당히 귀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런데 갑자기 활기찬 분위기가 뚝 그치더니, 그녀답지 않게 소심히 물었다.

“일본은…… 어땠나요?”

“일본?”

공항 청사로 들어가기 직전.

성필이 문 앞에 발을 들이밀자 자동문이 열렸다. 일본과 한국의 경계, 공항과 바깥의 경계에서 멈췄다.

그는 뒤로 돌아 외쳤다.

“일본 최고다아아아!”

성필은 정호환의 인터뷰를 전부 읽어왔다.

그래서 그가 처음 아이돌을 만들었을 때의 심정도 안다.

아이돌을 만들어 성공하니, 그는 문득 깨달았다고 한다.

한국 음악 시장은 너무나 작다고. 여기서 성공해봤자 대기업은 될 수 없다고.

그래서 정호환은 일본 진출을 꾀했었다.

세계 음악 시장 규모 2위. 저곳에만 진출할 수 있다면, 한국의 아이돌 산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하리라고.

진실로 그러했다.

성필이 직접 느꼈다.

“꼭 다시 돌아올게에에!”

일본에서 거둔 소녀연맹의 괄목할 성적은, 그녀들이 한층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상업적으로는 거의 2배 이상 성장했다.

한구인이 탭댄스를 추고 백 텀블링을 돌 만한 성적이다.

이런 나라를 어떻게 안 좋아할까?

“이 정도. 어때, 만족해?”

리카는 성필의 기행 때문에 부끄러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성필을 청사 안으로 끌어들였다.

“알겠으니까 빨리 들어오세요!”

“그래그래.”

둘은 청사 안으로, 한국으로 이어진 길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점점 더 작아졌다.

그때 갑자기 리카가 뒤로 홱 돌아 검지를 앞으로 뻗었다.

“이겼다! 제3부 끝!”

“리카, 창피하게 왜 그래.”

“이사님이 방금 한 건 생각 못 하시나요?! 좋아하는 만화 대사라구요! 꼭 해보고 싶었어요!”

“너무 뜬금없는데. 3부부터 시작하는 게 어딨어. 1부랑 2부는 어디 가고?”

“에에…… 데뷔하기까지가 1부고, 본상 받을 때까지가 2부 아닐까요!”

“리카, 인생은 만화가 아니야. 연예인으로 사니까 인생이 만화 같이 느껴지는 건 이해하지만.”

“그냥 기분 좀 맞춰주세요! 어제 이사님이랑 이거 할 생각 때문에 잠도 못 잤다구요!”

“에휴.”

성필은 손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리카와 동시에 앞으로 뻗었다.

“이겼다! 제3부 끝!”

성필이 배실배실 웃으면서, 서부의 총잡이처럼 검지 총구에 입바람을 불었다.

“막상 해보니까 재밌죠?”

“아니, 3부 안 끝났단 생각이 들어서.”

“하이(네)?”

리카가 의아해하자 성필이 말했다.

열망과 야망을 담아서.

“콘서트, 해외 투어가 남았잖아.”

“……그렇네요.”

리카가 다시 검지를 앞으로 뻗었다.

“우리들의 싸움은 앞으로도 계속된……!”

“아니 둘이 꼴값 그만 떨고 빨리 좀 와요!”

조아라의 고함에 두 사람이 쭈글거리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제 돌아간다, 한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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