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장하양은 모델 강사인 하루키와 함께 슈퍼 모델들의 워킹 영상을 보았던 적이 있다.
솔직히, 그들의 워킹이 평범한 모델들과 어떤 부분이 다른지 알 수 없었다.
그에 하루키가 말했다.
‘직접 안 보면 몰라요.’
장하양은 납득했었다.
아이돌의 퍼포먼스 또한 영상으로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게 확연히 다르니까.
현장감은 영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장하양은 슈퍼 모델에게서나 느껴질 법한 아우라를 느꼈다.
진소유의 워킹으로.
‘사람이 어떻게…….’
진소유는 자신감의 집합체였다.
그녀의 단단한 자아는 수천 명의 군중이 함께 외쳐대는 함성보다 강한 힘이 있었다.
인간은 혼자 확신하길 두려워하는 동물이다. 최소한 한 명 이상의 인정과 동조가 있어야, 자신의 주관을 강화할 수 있다.
인간이 군중이 될 때 맹목적으로 변하는 이유다.
‘그런데 소유 언니는 그런 게 없어.’
혼자 완벽할 수 있다.
개인이면서 군중이다.
무엇에도 상처 입지 않는 자아는 걸음 한 번마다 강렬한 자신감과 아우라를 뿜어내게 만든다.
갑자기 백설하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튜브에서 봤는데, 연애할 때는 자신감보다 섹시한 게 없대.’
또 백설하가 연애 아이튜브 채널을 보고 속았는가 싶었는데, 이제야 그 말이 이해됐다.
자신감은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미(美)의 종류다.
진소유가 그것을 증명했다.
“소유 씨가 턴할 때 바로 나가시면 돼요.”
무대 감독이 긴장한 어조로 말했다.
장하양은 마른침을 삼켰다.
진소유가 런웨이의 끝에서 정점을 찍고 뒤로 돌았다.
그리고 하필, 하필 그때 장하양은 성필을 발견했다. 그가 진소유를 홀린 듯 보는 것을 발견해버렸다.
“지금.”
장하양은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런웨이로 나갔다.
겨울철에 단단히 여미고 있던 코트를 벗듯이, 장하양은 따스한 어둠에서 차가운 빛무리로 향했다.
런웨이의 조명이 쏟아졌다.
‘아.’
진소유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정면에서 보니 더욱 잘 알겠다.
‘나는 저렇게 할 수 없어.’
장하양은 런웨이의 끝으로.
진소유는 백스테이지를 향해.
두 사람이 교차할 순간이 다가온다.
장하양은 진소유와 가까워질수록 압도당하여 움츠러들었다.
도저히 어깨를 펼 수가 없을 지경이다. 작은 짐승이 큰 짐승으로부터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몸을 마는 것처럼.
‘박 이사님도 아실 거야. 바로 옆에 있으면 비교될 거야. 내가…….’
내가…….
내가.
……내가, 왜 이렇게 진소유를 신경 쓰는 거지?
‘왜 백스테이지에서 언니를 도발했지?’
수도 없이 성필에게 들었다.
런웨이 위는 경기장이 아니라고.
이건 승부도 뭣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즐기라고.
‘그런데 왜 난 계속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이게 음악 방송 컴백 무대인가?
앨범 판매량으로 성적이 나타나나?
방송 점수 집계로 상이 주어지나?
그 무엇도 아니다.
그렇기에 성필도 즐기라고 했던 것이다.
‘박 이사님이 기대하지도 않는 일에…….’
* * *
“즐기고 있나?”
성필의 비어 있던 옆자리로 타츠야가 다가와 앉았다.
“어, 백스테이지에 안 계셔도 돼요?”
“우리 팀원이 알아서 할 거야. 내가 심혈을 기울인 쇼인데 안 즐기면 억울하지. 그래서, 좀 어때?”
“이제 막 소유 씨 나왔는데요 뭐.”
성필의 앞으로 진소유가 당당한 워킹을 선보이며 지나갔다.
성필과 타츠야가 절로 입을 벌렸다.
“내가 아이돌에 관심은 없지만, 저 인간 춤추고 노래하는 건 꼭 보고 싶군.”
“케이어스 데뷔곡은 ‘카오스’고 후속곡은 ‘가이아’인데 저는 개인적으로 ‘카오스’ 퍼포먼스를 좋아하…….”
“나중에 내가 알아서 찾아볼게.”
시무룩한 성필을 무시하며, 타츠야는 런웨이 출구 쪽의 장하양을 보았다.
백스테이지의 어둠 속에 덮여 있음에도, 장하양이 긴장한 게 훤히 보였다.
“모델이 몇 명이나 있어요?”
“60명 넘어.”
“시간이 꽤 걸리겠네요.”
진소유가 런웨이의 끝을 찍고 뒤로 돌아왔다. 동시에 장하양이 런웨이로 나섰다.
그것을 보면서 타츠야가 침음을 삼켰다.
“내 조언이 큰 효과는 없었나 보네.”
“음, 제 눈에는 괜찮은데요.”
“효과가 있었으면 훨씬 괜찮았을 거야.”
성필은 타츠야의 말을 이해했다.
타츠야는 디자이너답게 모델에 대한 각별한 심미안이 있을 테니까.
성필이 아이돌을 보는 눈이 남다른 것처럼 말이다.
“여전히 자기 몸에 대한 자신감도, 무대를 즐기는 마음가짐도 없어.”
“그게 보이나요?”
“보이지.”
성필이 씩 웃었다.
타츠야는 의아해하며 질문했다.
“왜 웃지?”
“저렇게, 보이나요?”
타츠야는 성필에게서 장하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숨을 헛삼켰다.
고작 몇 초 눈을 돌렸던 것뿐인데, 장하양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그래, 저렇게…….”
* * *
성필의 꿈, 그렇기에 장하양의 꿈.
그것에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에, 장하양 자신은 왜 이렇게나 신경 쓰는 걸까?
5m.
진소유와 장하양과의 거리.
그쯤에서, 장하양은 진소유의 얼굴을 보았다. 오만함과 자신감, 그리고 장하양을 향한 연민이 가득한 표정.
그것을 보자 장하양은 머리로 피가 쏠리는 게 느껴졌다.
‘……그래, 이기고 싶어서야. 그래서 신경 쓰는 거야.’
성필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케이어스의 멤버이니까.
최고의 아이돌이 되려면 뛰어넘어야 하는 그룹이니까.
그딴 게 아니었다.
‘난 소유 언니가 싫어.’
자신을 향해 대뜸 ‘너 가정 폭력 피해자니?’라고 했을 때부터, 장하양은 그녀를 싫어했다.
심지어 사과조차 받지 못했다.
장하양의 가정사를 트잇터에서 보고 위로해줬다고? 그래서 뭐?
‘언제나 오만하고, 다른 사람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막무가내로 나한테 다가오고, 실례되는 말이란 말은 전부 다 지껄이고.’
그래서, 장하양은 진소유를 이기고 싶다.
그녀의 콧대를 꺾어버리고 싶다.
모든 합리적인 이유를 뛰어넘는 개인적인 적대 의식. 그게 장하양이 패션쇼에 그토록 목숨을 걸듯 연습했던 이유였다.
‘지고 싶지 않아. 심지어 이곳에서.’
진소유와 장하양이 교차했다.
진소유는 뒤로, 장하양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장하양을 억누르던 조명이 모두 튕겨 나갔다.
그녀의 기세가 사방으로 뿜어졌다.
‘이곳, 내가 재능을 인정받은…… 아니.’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인정한 공간에서는, 특히 지고 싶지 않다.
처음으로 자신에게도 무언가 재능이 있단 것을 깨달았다.
기뻤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다.
‘이제야 설하 언니랑 아라가 이해돼.’
에리카를 보고 자격지심을 느꼈던 백설하.
진저와 마주하고 패배감을 맛보았던 조아라.
장하양은 그들을 보고, 부족하면 연습하면 되지 않나 하고 간단히 생각했다.
‘아니야. 누구든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일에선 지고 싶지 않은 거야.’
장하양이 잘하는 일.
장하양이 좋아하는 일.
‘나는 왜 아이돌이 됐지?’
성필이 권유해서.
‘왜 아이돌을 계속하지?’
성필이 바라니까.
‘그럼, 난 박 이사님이 사라지면 아이돌을 그만둘까?’
일본 데뷔로 부도칸에 오르기 전, 장하양은 성필의 위중한 상태가 걱정되어 제정신이 아니었었다.
그의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서 무대에 오르지 못하겠다고 말했었다.
아이돌 일 따위 그만두고 성필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아니야, 난 무대에 올랐을 거야.’
그리고 성필이 시키지 않아도 계속 무대에 오를 것이다.
장하양이 계속 아이돌을 할 이유는…….
‘……재밌으니까.’
장하양은 배우를 꿈꿨었다.
하지만 실은,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았을지도 모른다.
초등학생 때 했던 연극에서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반 애들이 추켜세워줬을 때.
장하양은 무대에 오르는 즐거움을, 관심받는 기쁨을 깨달았다.
‘그런데, 내가 배우로 성공하지 못했던 게 당연해.’
가정에서 사랑다운 사랑을 받지 못하고 폭언만을 듣고 자랐던 그녀는, 자신이 사랑받을 사람이란 걸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연기든 뭐든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관심받고 싶어 무대에 서지만, 정작 자신을 보여줄 용기가 없었다.
자신이 관심과 환호, 사랑받을 자격이 있단 걸 믿을 수 없었으니까.
‘이젠 아니야.’
한없이 자신을 믿어주는, 부모와 같은 사랑을 주는 성필이 있으니까.
장하양은 고치를 깨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마침내 자신을 믿고 세상에 내보일 수 있게 됐다.
성필은 장하양이란 작품을 찾아낸 조각가였다. 하지만, 그가 없었던들 장하양이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장하양이란 걸작은 이미 대리석 안에 들어 있었으니까.
“나를 봐.”
장하양이 입술을 살짝 열고 읊조렸다.
그에 대답하듯 사람들의 시선이 갑자기 장하양에게로 확 끌렸다.
‘난 아름다워.’
이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다.
나를 사랑하고 싶어서, 나를 사랑해서, 사랑받기 위해 조각해낸 나의 몸.
몸을 타고 환상적으로 흘러내리는 허리의 곡선을.
그리스의 신전 기둥과 비견되는 숭고하고도 아찔하게 뻗은 다리를.
무엇보다, 신이 혼신이 다해 빚은 이 얼굴을.
봐라.
그리고.
‘감탄해라.’
또각.
장하양의 힐이 런웨이의 끝을 밟았다.
그녀의 걸음이 멈춤과 동시에 관객석에 침묵이 휘몰아쳤다.
다들 장하양의 다음 동작에만 시선이 집중됐다.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듯, 인간의 신경과 정신을 빨아들인다.
‘이게 나의 기쁨.’
무대 위에서 받는 시선은 장하양에게 총알과 같은 중압감을 선사해왔었다.
하지만 이젠 오랜 시간 이어지는 애무처럼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찌이익, 찌익.
구긴 종이를 찢는 것처럼 경쾌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이게 나의 삶.’
장하양이 한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펼친 손가락이 왕관처럼 뻗어나갔다.
조아라에게 배운 댄스, 보깅(Voguing)의 포징.
무언가가 계속 장하양의 몸에서 뜯겨 나온다.
허물이다.
‘이게 나의 아우라.’
보그(Vogue) 표지 모델과 같은 포징과 아우라에 사방에서 플래시가 빗발치듯 들어왔다.
허물이 빛을 받아 한 겹 두 겹 벗겨진다.
장하양이 빛무리 속에서 힐을 꺾어 가볍게 뒤로 돌았다.
‘이게…….’
그녀의 뒤로 카메라 플래시가 후광처럼 비추었다.
‘나의 아이돌리즘.’
탈피(脫皮).
이 순간, 장하양은 드디어 아이돌이 됐다.
한 명의 사랑을 추구하는 인간이 아니라, 만인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아이돌이 됐다.
* * *
진소유는 우직하게 백스테이지 입구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이쪽으로 돌아오는 장하양에게 꽂혀 있었다.
‘아름…….’
생각의 목구멍 안에서 그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 타인을 상대로 이 단어를 꺼내도 괜찮을까, 계속해서 고민되었다.
하지만 막힌 둑이 터지듯, 진소유는 생각이 아니라 입으로 그 단어를 읊조렸다.
오직 자신에게만 허락될 말을.
“아름다워…….”
런웨이가 끝나는 지점, 백스테이지의 입구.
그곳에 들어서자 조명이 힘을 잃고, 장하양의 머리 위로 어둠이 내려왔다.
워킹은 끝났다.
장하양은 긴장으로 젖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면서 미소 지었다.
‘하양이도 알고 있어.’
드디어 장하양이 깨달았다. 진소유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아름다우며, 런웨이 위에서 그 미(美)를 가감 없이 드러냈노라고.
옛날, 그리스의 시민 법정에 서서 오직 아름다움으로만 자신의 무죄를 증명했던 프리네처럼.
이 순간 장하양은 미의 화신이 되었다.
그녀의 자신감이 미를 완성시켰다.
‘하양아.’
진소유는 감격에 겨워 장하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가 알기로, 스탕달 신드롬이란 게 있다고 한다. 예술 작품을 보고 느끼는 격렬한 황홀감.
진소유는 그것을 느꼈다.
“하양아…….”
전신의 혈류가 기쁨으로 끓어올랐다. 핏줄 곳곳으로 환희가 몰아쳐 신경을 때린다.
마치 태양의 품에 안긴 것만 같았다.
주체할 수 없는 열기가 전신을 데웠다.
황홀의 폭풍 속에서, 진소유는 마침내 눈을 떴다.
그녀가 알지 못했던 감정을.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수고했…….”
애처롭게 뻗은 진소유의 손을 장하양이 비켜 지나갔다.
“언니, 제가 이겼어요.”
“……응?”
장하양은 이제껏 보여준 적 없던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선언했다.
“다른 사람들이 뭐래도, 제가 이겼어요.”
장하양 스스로가 승리를 확신했다.
타인의 인정 따위는 필요 없다.
이번 승리의 기준점은 타인이 아니라, 장하양 자신의 만족이었다.
후련했다.
“아…….”
진소유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팔이 완전히 내려오자,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진소유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네.”
장하양은 간략히 고개를 숙이고, 다른 모델이나 스태프에게 방해되지 않기 위해 저 멀리로 물러났다.
진소유는 멀어져가는 장하양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그래, 여기까지.’
내 마음은 여기까지다.
그리고 영원히 마음으로만 남을 것이다.
절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마음만이 남았다. 피우지 못하고 져버린 꽃만이.
‘네가 이겼어, 하양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예상했던 고통을 곱씹고 있자, 그녀의 주변으로 성필의 목소리가 퍼졌다.
‘최고란 이름은 하양이한테나 어울려요!’
성필이 어지럽게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진소유의 귓가에 외쳐댔다.
‘하양이가 훨씬 빛날 거예요!’
진소유는 고개를 끄덕여 성필의 입을 막았다.
“어떻게 아니겠어요.”
* * *
“케이팝 아이돌이 유명하단 말은 많이도 들었지만 말야.”
후쿠요 히다카의 패션쇼는 아이튜브로 생중계되었었다. 타츠야는 그 기록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나 차이가 날 줄은 몰랐어. 소녀연맹이라고 했었지. 대단한데?”
“저희 애들이 많이 대단하죠.”
성필은 소녀연맹을 자랑하면서 가슴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실시간 방송을 채운 시청자 수만 명은 케이어스 팬일 것이다.
해외 아이돌 팬들은 사실상 케이팝 전체의 팬이나 마찬가지다.
‘멀티―팬덤’이란 이름의 해외 팬덤이 가장 떠받드는 건 한국의 3대 기획사 출신 아이돌들이다.
즉, 후쿠요 히다카 패션쇼 생방송의 최대 기여자는 진소유다.
‘하지만 그걸 속 쓰리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장하양이 진소유와 함께 패션쇼에 나왔다.
이 이벤트는 해외의 케이팝 잡덕들에게 소녀연맹이란 이름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될 터였다.
“트잇터 하세요?”
“딱히.”
“지금 하양이 트잇터에서도 꽤 화제예요.”
’Who_is_Second_Woman’이란 해시태그가 실시간 트렌드에 올랐다.
패션쇼에서 두 번째로 나온 여자가 누구냐는 건데, 장하양을 뜻하는 것이었다.
장하양을 모르는 이들이 그녀의 눈이 돌아갈 미모를 사진으로 영접하고 누군지 찾는 것이었다.
“알고 있긴 했지만, 하양이 룩이 대단하긴 하나 봐요. 벌써 움짤만 몇 개인지…….”
“옷 얘기는 없어?”
성필이 당황하여 트잇터의 글을 마구잡이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타츠야는 피곤이 베인 웃음을 지으며 성필을 만류했다.
“됐어. 어차피 오프닝 행사는 옷보다 사람한테 관심이 쏠리니까. 많이 겪은 일이야.”
“왠지 죄송하네요.”
“뭘. 그래서, 애프터 파티는 안 와? 유명인들 엄청 모일 텐데.”
성필이 고개를 저었다.
“하양이가 쉬고 싶대요.”
“아쉽네. 일주일 안에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네. 이제 일본 스케줄은 다 끝났거든요.”
“언제 시간 나면 내 클럽에 와. VIP룸에서 연예인들이랑 술 마시게 해줄게. 소녀연맹 프로듀서라고 하면 다들 만나보고 싶어할걸?”
와, 정말 구미가 안 당기는 조건이다.
“그래, 어차피 가봤자 당신이 모를 인간들 뿐인데 오고 싶을 리가.”
“아, 아뇨 저는…….”
“얼굴에 ‘관심없다’고 써져 있구만 뭘.”
“저는, 이왕이면 마하라 씨랑 회포를 풀고 싶어서요.”
타츠야가 픽 웃었다.
“오랫동안 봤잖아요. 같이 전장을 헤쳐온 전우 같은 느낌? 하양이한테 신경도 많이 써주셨고요. 가기 전에 술이나 밥이나 같이 해요.”
“그래. 가기 전에 한 번 들러. 당신 혼자면 매몰차게 떠나진 않겠지?”
성필은 타츠야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곤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요. 근데 저는 조용한 분위기가 좋아서요. 시끌벅적한 건 좀.”
“알아. 당신 덕에 좋은 경험 했으니…….”
타츠야는 런웨이 위의 장하양을 떠올리곤 짙은 만족감에 젖었다.
“융숭하게 대접하지.”
“기대할게요.”
“박 이사님.”
휴게실로 장하양이 들어왔다.
메이크업과 머리칼에 붙인 장식을 떼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장하양이었다.
“어, 하양이 왔어?”
“네. 마하라 디자이너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타츠야는 대답할 기력도 없는지 손만 저었다.
“그럼 가볼게요.”
“그래, 둘 다 잘 가.”
성필과 장하양은 허리를 숙이면서 휴게실을 나섰다. 조용해진 방 안에서, 타츠야는 천천히 소파에 등을 뉘었다.
‘하시모토 그 인간, 촉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
장하양이 화제가 된 건 진소유 덕이었다.
아니, 둘이 있었기에 시너지가 발휘되었다.
방금 타츠야는 비서로부터 패션쇼가 대성공이란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총괄 디자이너인 히다카 후쿠요도 타츠야를 칭찬했다는 모양이다.
‘이제까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SNS에서 화제가 됐다던가.’
그놈의 케이팝 팬덤이 뭐기에.
아무튼, 덕분에 후쿠요 히다카는 새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진출, 가능하겠어.’
먼저 어바이비가 갔다.
다음은 후쿠요 히다카다.
‘케이어스랑 소녀연맹이 라이벌이라 그렇게 화제가 됐단 거지?’
그럼, 라이벌이 같은 브랜드의 앰배서더가 되면 어떨까.
‘소유랑…….’
장하양이 후쿠요 히다카 앰배서더로 동시에 발표된다면.
‘그럼 한국에서 후쿠요 히다카의 이미지는 소유랑 하아양으로 굳혀지는 건가.’
둘의 이미지가 ‘후쿠요 히다카’가 된다, 라…….
타츠야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입가엔 미소가 감돌았다.
‘나쁘지 않군.’
F/W 시즌 패션쇼, 끝.
* * *
“하양 언니, 저녁 드…….”
장하양이 속옷만 입고 전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자기 자신에게 반해서 거울 안으로 빨려들 것만 같은 기세였다.
리카가 충격받아서 주먹을 물었다.
“드디어 연애 금지 조약을 타파할 방법을 찾은 건가요!”
“아, 리카.”
“하지만 그 방법은 너무 쓸쓸하잖아요! 그만하고 옷 입으세요!”
장하양은 입꼬리를 올리고, 리카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단 듯 섹시한 포즈를 취했다.
“리카, 나 예쁘지?”
“에에, 뭔가요. 하양 언니가 말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아하하, 너무 공주병 같나?”
“물어봐서 뭐 하나요! 하양 언니 바라보는 이사님 눈빛만으로 다 설명이 되잖아요! 자, 그만 옷 입고 나오세요!”
“알겠어.”
방 밖으로 나간 리카가 ‘하양 언니가 자기 자신이랑 사귀기 시작했어!’라며 소리쳤다.
장하양은 웃으면서 옷을 입었다.
그리고 방을 나서려는 찰나, 책상 위에 올려진 보라색 튤립 한 송이가 눈에 띄었다.
“…….”
장하양은 그것을 바라보다가 방을 나왔다.
3일 연속으로 식사 당번을 자발적으로 맡은 리카는, 역시나 오늘도 일본 가정식을 내왔다.
“또 톤지루야? 질린다 정말.”
“후후, 아름이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 맛을 그리워할 거야! 이미 아름인 일본의 맛에 중독됐다구!”
“그래, 독(毒)이지. 김치 안 남았어?”
“히도이(너무해)!”
신아름은 불평하면서도 맛있게 리카의 요리를 먹었다.
리카는 싱글벙글 멤버들이 일본 요리를 먹는 걸 바라보았다.
콘서트까지 마치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
이 주제가 소녀연맹의 식탁에 올라왔다.
“나는 춤 더 배우려고요.”
“아라쨩 어디까지 강해질 작정이야! 더는 백민정 쌤도 아라쨩한테 가르쳐줄 게 없을 거라구!”
“백 쌤한테 안 배울 거야.”
“그럼?”
“민시화 쌤. 그니까, 쌤의 쌤이지. 쌤쌤.”
소녀연맹이 ‘아라베스크’를 준비할 당시, 조아라가 소녀연맹의 기량을 훨씬 넘는 안무에 매달렸던 적이 있었다.
그때 백민정이 민시화를 불러와서 조아라에게 팩트 폭행을 날렸었다. 그게 조아라에겐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었다.
“근데 민시화 선생님은 댄스 스포츠 전공이라고 하지 않으셨어?”
“어떤 춤이든 배울 가치가 있어요. 민시화 쌤 같은 사람이면 안 배울 이유가 없죠. 뭐…….”
조아라는 백설하에게 부러움 섞인 시선을 주었다.
“쌤이야 이미 절정의 경지에 올랐으니까 배움 따윈 필요 없겠지만요.”
“왜, 왜 야한 말 쓰구 그래…….”
“네?”
“어?”
“뭐가요?”
“어, 어어?”
백설하가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았다.
자신이 이상하지 않은 인간이란 것을 확답받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백설하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쌤…….”
조아라가 질린단 듯이 말했다.
“티비에서 사조영웅전이나 의천도룡기 영화 해주는 거 안 봤어요?”
“으, 으응? 그게 뭔데……?”
“무협 영화요. 어릴 때 안 봤나 보네요. 절정의 경지란 거, 야한 뜻이 아니라 그냥 제일 쎈 무인이란 뜻이에요.”
“…….”
백설하가 홍당무보다 붉어진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가 밥을 깨작이는 소리가 부끄러움을 더욱 키워주었다.
신아름이 백설하의 흑역사를 지워주려 질문을 던졌다.
“쌤도 선생님 있었죠? 조아라한테 백민정 쌤 정도 되는 사람요. 옛날에 들었던 거 같은데.”
“으, 응! 있었어!”
백설하가 과하게 활기차게 답했다.
“보컬 학원에 계셨는데, 성악 하시던 분이었어.”
“그게 돼요? 실용 음악이랑 성악은 다르잖아요.”
“그렇긴 한데, 조금 작은 학원이어서. 아무나 받았다면서 계시더라구. 그, 그런데 실력은 확실하셨구…….”
백설하는 성악가용 교재인 콘코네로 발성을 연습했었다.
그땐 실용 음악과 성악의 차이도 몰랐던 터라, 백설하는 콘코네만 죽어라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태양을 삼켜라. 그리고 빛을 노래해라’라는, 백설하가 어릴 때 금과옥조로 여겼던 말을 가르쳐준 것도 그였다.
“지금은 팝페라 가수로 활동하고 계셔.”
“팝페라가 뭔데요?”
“……그러게?”
아무튼 팝페라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연락하지 않은 지는 꽤 시간이 지났지만. 그래도 백설하는 그 선생에게 배운 것을 참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아름이 너는 선생님…… 아, 스승이 더 어울리겠다.”
백설하에게는 그 팝페라 가수가, 조아라에게는 백민정이 스승이었으니까.
선생이란 단어로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인물이다.
“아름이한테는 그런 분 계셔?”
“아뇨.”
“아, 그렇구나…….”
백설하는 은근히 자신의 이름이 나오진 않을까 기대했었다.
“저는 석세스 엔터 있었을 때도 보컬쌤을 여럿 거쳤거든요. 꾸준하게 배울 기회가 없었어요.”
노래란 기술은 보컬 트레이너마다 가르치는 방법이 매우 다르다.
감에 의존해서 설명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인간의 목 내부 구조 모형을 가져와서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아름이의 발성이나 호흡들이 뒤죽박죽인 거구나.’
그냥 안 좋은 트레이너에게 배웠다고 생각했었는데.
“엣헴.”
리카가 헛기침했다.
신아름은 그녀를 흘끗 보곤, 이야기를 이었다.
“춤도 딱히? 스승이라고 할 만한 분은 없었어요. 그냥저냥 거쳐 가는 사람이었지. 굳이 말하자면, 모든 아이돌이 내 스승이랄까.”
“토 나오네.”
조아라가 ‘우웩’하며 토하는 시늉을 했다. 신아름이 그녀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엣헴!”
“리카 왜.”
드디어 관심을 끈 리카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내 스승도 물어봐 줘!”
“누군데?”
“‘누구신데’라고 해! 내 스승님들을 모욕하는 건 용서 못 해!”
“누구신데.”
리카가 기대하란 듯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세 개 폈다.
“지음 오빠! 엘릭 오빠! 그리고, 무려 KS 엔터의 정호환 이사님! 이 세 분에게 사사(師事)한 아타시(나)는 무적이라구!”
“와아, 정호환 이사님 이제 큰일 났다. 제자란 애가 카와이 베이스 만들고 있네.”
“카와이 베이스가 어때서?!”
“꼭 미디어에 나가서도 밝혀. 정호환 이사님이 인정해주는지 아닌지 궁금하다.”
리카가 예능에 나가 ‘정호환은 나의 스승’ 같은 말을 한다고?
정호환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서 ‘사실무근’이라 발표할지도 모른다.
“아타시(나)는 정 이사님한테 작곡가로서의 코코로(마음)와 인텐시티를 배웠다구! 기교는 지음 오빠한테 배운 거야!”
“그럼 지음 오빠가 큰일 났네.”
“아름이 히도이(너무해)!”
리카가 장난스레 울상을 지으면서 신아름의 어깨를 토닥였다.
신아름은 장난이었다며 리카의 머리를 부드럽게 헝클였다.
“리카 너 대단하긴 해. 여돌 중에 자기가 쓴 곡 당당하게 앨범에 넣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그치? 대단하지?”
“그래 그래, 리카 대단해.”
“에헤헤.”
다음 시선은 자연스레 장하양에게로 흘렀다.
“하양 언니는 스승 있어요?”
“스승…… 글쎄. 노래는 설하 언니, 춤은 아라일까.”
갑자기 언급된 백설하와 조아라가 부끄러운 웃음을 뱉었다.
“그리고 박 이사님?”
“팀장님이요? 팀장님이 왜요?”
장하양이 음흉하게 웃었다. 그녀는 엄지와 검지로 직각을 만들고 턱에다 가져댔다.
“내 아름다움을 발견해주셨으니까.”
“……와아, 진짜 언니한테 이런 말 할 줄 상상도 못 했는데. 좀 재수 없어요.”
“내 엣지(Edge)를 찾아주셨어.”
“하양 언니 에찌(음란)!”
“리카는 이해하네.”
“에찌!”
장하양이 대견하단 듯 리카의 턱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주었다. 리카가 헤헤 웃으면서 그녀의 쓰다듬을 반겼다.
그것을 보던 신아름이 툭 던졌다.
“근데 리카도 만만찮게 예쁘지 않아요? 조아라 안 그러냐?”
“뭐래, 내가 여기서 제일 예쁜데. 봐, 내 엣지(Edge)를.”
조아라가 보깅을 추었다. 손과 팔의 각을 살려 자신의 미모(조아라의 주장)를 한껏 부각했다.
“아라쨩 에찌(음란)!”
“야 리카, 너 박쥐처럼 이리저리 가지 말고 확실히 해. 나랑 하양 언니, 누구야?”
“으음, 아라쨩이 제일 에찌하지.”
조아라가 눈썹을 올리면서 자신의 미모를 과시했다.
“언니, 들었죠? 미모 대법관 리카가 그렇대요.”
장하양이 젓가락을 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감히 내 얼굴을 모욕해……?”
“나랑 비교되는 게 모욕이에요?!”
“아하하, 농담! 아라 예쁘지.”
“…….”
“농담 통제 안 해?”
“……내가 예쁘단 게 농담이란 거잖아요.”
“이걸 안 걸리네.”
“하양 언니 패션쇼 후로 좀 이상해졌어요.”
다들 동의했다.
뭐랄까, 많이 밝아졌다.
자신감이 생겼다고나 할까.
“그럴 만하지. 하양이 유명해졌잖아.”
후쿠요 히다카 패션쇼를 출처로 한 짤과 움짤이 계속해서 SNS에서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한국 커뮤니티들에서도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심심찮게 ‘소유 vs 하양, 영혼의 대결’이란 글이 올라오곤 하니 말이다.
“좀…… 하양이만 많이 유명해진 거 같기도 하구…….”
장하양은 유일하게 해외에서 별명을 획득한 멤버가 되었다.
패션쇼에서 보여준 모습이 너무나 강렬하여, ‘세컨드 우먼’이 그녀의 타이틀이 됐다.
성필은 그 의미를 이상하게 여겨 탐탁지 않아 하긴 했지만, 장하양이 해외에서 유명세를 얻었단 건 좋은 일이다.
“언니 질투하세요?”
장하양이 백설하의 어깨를 쓸면서 살살 달랬다.
“제가 아니라 언니가 나가셨어도 다들 주목했을 거예요.”
“그…… 그런가……?”
“솔직히, 제가 남자면 저희 중에서 설하 언니를 제일 좋게 볼 거 같아요.”
“헤, 진짜?”
“네. 너희들도 그렇지?”
리카, 조아라, 신아름이 묵묵히 밥을 먹었다.
“…….”
백설하도 묵묵히 밥에 집중했다.
* * *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장하양은 책상 위에 둔 보라색 튤립을 들고 숙소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직 한여름이라 밤은 덥다.
그녀는 여름의 열기를 느끼면서 난간으로 걸어갔다. 떨어지지 않도록 난간 틈에 고정된 재떨이가 보였다.
꽁초 몇 개가 버려져 있었다.
‘박 이사님이 피우시는 담배는 없네.’
담배를 끊었단 게 사실일까.
장하양은 재떨이에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튤립을 난간 밖으로 내밀었다.
‘내 스승…….’
성필.
인생의 스승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장하양은 성필 덕에 자신을 믿는 법을,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건 성필이 있어야만 성립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박 이사님, 감사합니다.’
장하양은 본인이 꽃집에 들러 샀던 보라색 튤립을 난간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건 졸업식이다.
인생의 의미가 성필뿐이었던 자신과의 졸업.
‘이젠, 저 혼자라도 해낼 수 있을 거 같아요.’
성필이 없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성필이 없으면 아이돌을 그만두리라고 생각했다.
성필이 없으면, 성필이 없으면, 자신의 존재 가치도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이사님이 찾아주신 저의 가치는, 이사님한테 있는 게 아니라 저한테 있는 거니까요.’
성필의 ‘믿는다’는 말은 무조건적으로 믿음을 준다는 뜻이 아니었다.
장하양이 지닌 힘을 믿는단 뜻이었다.
‘제 꿈은 아직도 최고의 아이돌이에요. 하지만, 저만의 길을 찾아볼게요. 저만의 이유를요.’
그 길은 성필의 기대와 믿음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장하양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로 가득 채워져서, 그녀 자신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이번 패션쇼처럼, 성필이 기대해주지 않더라도 영혼을 불태우고픈 길이겠지.
“일단 제 아이돌리즘은…….”
세상에 장하양이란 존재를 드러내는 것.
성필이 찾아준 가치를 곱게 다듬고 벼려내어 만인의 사랑을 끌어낼 것이다.
“하아.”
졸업식을 마친 장하양은 후련한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녀는.
“……역시 안 돼!”
장하양은 황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5층, 4층, 3층, 2층, 1층.
숙소 밖으로 뛰쳐나온 장하양은 바닥을 이 잡듯이 뒤졌다.
쪼그려 앉아 입구 주변을 20분 정도 돌아다닌 끝에, 바람에 멀리 날아갔던 튤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으…….”
장하양은 찌그러진 튤립의 잎을 세심하게 손으로 문질렀다. 그곳에 묻은 흙먼지를 전부 털어낸 후, 튤립을 가로등에 비춰보았다.
조금은 찌그러졌어도, 깨끗하다.
“못 버려, 이건…….”
비록 성필이 사준 건 아니지만.
장하양에게는 어떤 보라색 튤립이든 깊은 의미가 있었다.
그녀는 튤립을 들고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가선, 책상 위에 꽂힌 만화책을 집어들었다.
‘유리구두’ 1권.
그것을 펼치니, 처음 성필에게 받았던 튤립의 줄기가 곱게 말려 있었다.
관리를 잘하지 못한 탓에 잎은 전부 말라 떨어졌지만, 줄기만은 어떻게든 보존할 수 있었다.
“이건 이사님 꽃.”
그 옆에 찌그러진 튤립을 나란히 두었다.
‘이건 내 꽃.’
성필의 꽃은 이미 말라 줄기밖에 남지 않은 튤립이지만, 그 아름다움은 싱싱한 꽃보다 더 나았다.
장하양의 꽃은 5층에서 떨어진 탓에 찌그러졌지만, 묘하게 생기가 넘쳤다.
나란히 놓인 전혀 다른 형태의 튤립 두 개.
그것을 바라보자 장하양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성필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성필이 한 걸음 비켜나 절반의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남은 절반에는 장하양 자신이 들어갔다.
‘이제 반반.’
세상 모든 게 성필이었기에, 그에게 집착하고 매달릴 수밖에 없던 정신적인 유아기가 끝났다.
이제 장하양의 마음속엔 자기 자신도 들어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반이나 들어갔다.
장하양은 두 튤립을 보면서 나른히 턱을 괴었다.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하양 언니! 오늘은 하양 언니가 설거지예요! 10시 전에는 꼭 하세요!”
“아, 미안. 지금 갈게.”
장하양은 급히 책을 덮었다.
그녀가 나간 방.
창밖으로 여름의 훈풍이 불어와 만화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튤립이 놓인 페이지가 펼쳐졌다.
다시 한번 바람이 불어, 한 튤립이 느긋하게 밀려 다른 튤립과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