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하양 언니의 패션쇼 데뷔인데 직접 못 본다니…….”
리카는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모니터 주위로는 멤버들이 옹기종기 모여, ‘후쿠요 히다카’의 패션쇼 생중계 영상을 보는 중이었다.
“하양이는 언제 올까.”
벌써 30분째 장하양은 입구 레드카펫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패션쇼에 초대된 세계 각국의 셀럽들이 우레와 같은 환호를 받으며 들어가는 모습은 그럭저럭 볼 만했지만.
그래도 빨리 장하양을 보고 싶었다.
“어? 이 사람 영화감독 아니에요? 거기, 프랑스 사람.”
조아라가 레드카펫에 들어선 서양인을 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그가 누구인지 생각하다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맞네 그 사람! 여고생이 도끼로 깡패들 찍어 죽이는 영화 만든 사람!”
“조아라 너 그런 거 보냐?”
“재밌거든? 액션 영화가 뭐 어때서. 억지로 눈물 뽑는 신파극 보는 너보단 내가 낫지.”
“옛날부터 알았는데, 넌 감수성이 너무 없어.”
신아름은 조아라에게 매우 감동적인 영화를 추천해준 적이 있었다.
신아름이 다섯 번이나 돌려봤으며, 볼 때마다 눈물을 홍수처럼 흘렸던 영화였다.
하지만 조아라는 시큰둥하기만 했었다.
“아니다, 그냥 넌 우리나라 영화 싫어하는 거지?”
“뭐? 아니거든.”
“괜히 힙스터 기질 있어서 우리나라 영화 안 보는 거잖아. 그럼 너 한국 영화 보고 운 적 있어? 감동받거나?”
“……‘올드보이’?”
“넌 총 쏘고 피 나오면 다 좋지?”
조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피와 살, 복수와 분노가 난무하는 액션 영화의 가치를 모르는 인간과 대화할 마음 따윈 없었다.
조아라는 포토 라인에 선 프랑스 감독을 보면서 작게 말했다.
“저런 사람도 앰배서더가 되는구나. 그냥 예쁘거나 멋지다고 되는 게 아니었네.”
무엇보다, 유명한 감독이 일본 브랜드의 패션쇼에 참석한 사실 자체가 신기하다.
아까부터 출석하는 셀럽들은 당연히 일본 사람이 가장 많았으나, 세계 각국의 인물들도 적은 수준이 아니었다.
“하양이가 저런 곳에…….”
백설하의 목소리에는 동생에 대한 자부심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장하양이 나타났다.
장하양은 웨벡스에서 제공해준 세단에서 나와, 성필의 팔을 잡고 레드카펫을 걸었다.
“다들 이거 봐!”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있던 실시간 채팅창이 이전보다 훨씬 더 큰 활기를 뿜어냈다.
채팅창에는 장하양의 이름을 연호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하트와 불꽃이 채팅창을 도배해서, 어떤 말이 적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다.
“하양 언니 엄청 유명해!”
“와, 이런 건 또 처음 보네.”
가로 엔터는 공식 스케줄표에 장하양의 패션쇼 참가 일정을 올렸다.
한국의 ‘인민’들에게도 이 생방송이 알려졌을 것이다. 그런데 채팅창에는 한국어와 영어가 비슷하게 등장했다.
특히 일본어는 한국어와 영어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보였다.
“진짜 우리 한국에서보다 일본에서 유명한 거 아니에요?”
“어, 으, 음, 그럴까……?”
일본의 3대 기획사인 웨벡스가 전폭적인 푸쉬를 해주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어쩌면 소녀연맹은 한국에서 계속 활동하는 것보다, 일본에 남아 있는 게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물론 상업적인 측면에서 그렇단 이야기다.
“헤헤, 언니 예쁘다.”
리카는 포토 라인에 선 장하양을 자랑스레 바라보았다.
장하양의 뒤에는 ‘후쿠요 히다카’란 브랜드명이 큼지막하게 써져 있었다.
뭔가 정말로 유명인을 보는 듯하다.
“아타시(나)도 나중에 언니처럼 될 거야!”
“어디 앰배서더 되고 싶은 브랜드라도 있어?”
“입생로랑이요!”
입생로랑의 물건은 루주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리카는 왠지 입생로랑에 애착이 갔다. 정산받으면 성필에게 입생로랑 티셔츠를 선물하기로 마음먹고 있기 때문일까.
‘아, 입생로랑 앰배서더가 되면 옷도 많이 받겠지? 그럼 이사님한테 따로 사줄 필요도 없는 거 아니야?’
리카는 입생로랑의 옷 무더기에 파묻혀 행복해하는 성필을 떠올렸다.
리카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행복회로를 태우고 있던 중, 레드카펫에 진소유가 나타났다.
“좀 너무하네.”
신아름이 헛웃음을 지었다.
“소유 언니가 왜?”
“아뇨. 하양 언니는 아이돌이니까 좀 아이돌틱하게 입고 왔잖아요. 근데 소유 저 사람은…….”
시상식장이라도 왔는지 고풍스러운 드레스로 전신을 휘감았다.
“매너가 아니지 않아요? 같은 한국 아이돌이 나오는데 특성 좀 살려서…….”
신아름의 입이 벌어졌다.
다들 왜 그러나 싶어 그녀의 시선을 따라 모니터 한 구석을 바라보았다.
채팅장이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수준으로 도배되었다. 그리고 곧.
“뭐, 뭔데.”
채팅창이 마비되어 글자가 전부 지워졌다.
“……이거 소유 때문이야?”
케이어스의 등장은, 다른 셀럽들과 비교할 수 없는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장하양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 * *
기자와 사람들이 쫙 깔린 길을 지나, 건물 입구 안으로 들어와서도 카메라 셔터 세례는 끝나지 않았다.
건물 안쪽에도 기자들이 있었다.
장하양은 무표정으로 성필의 팔만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그녀를 향해 핸드폰, 카메라 플래시가 폭포처럼 떨어졌다.
“하양 씨는 이쪽으로.”
스태프가 안내했다.
이젠 성필과 장하양이 헤어져야 할 때였다.
“하양아, 파이팅.”
장하양은 씩 웃기만 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기란 어렵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간단하게 답이라도 했을 텐데 말이다.
성필은 어색하게 미소 짓고, 그녀에게 가보라며 손짓했다.
“이사님.”
하지만 장하양은 바로 떠나가지 않았다.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 속에서 두 남녀가 마주 보았다.
“응.”
“저, 잘하고 올게요.”
그에 성필이 가볍게 답했다. 그녀의 부담감을 지워주려는 목적으로.
“잘 안 해도 돼. 즐기고 와.”
“…….”
장하양은 메마르게 올라간 입꼬리와 함께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스태프를 따라 사라졌다.
성필은 그녀가 안 보일 때까지 배웅하다가, 본인에게 정해진 좌석으로 향했다.
‘나만 와서 미안하네.’
패션쇼장에 들어올 수 있는 인물은 매우 한정적이다. 콘서트장처럼 수천 명을 수용할 크기는 아니다.
‘여기 올 수 있는 사람들은 유명인이나 패션 업계에서도 입김이 강한 사람들 뿐이랬지.’
하지만 성필은 타츠야의 배려로 자리를 하나 얻을 수 있었다.
그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성필이 아니었다면, ‘후쿠요 히다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업계인의 자리가 하나 났을 테니 말이다.
뒤숭숭한 기분으로 자리에 앉은 성필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슬쩍 보았다.
‘서양인이네.’
그의 앞에는 핸드폰과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그를 둘러싸곤 자꾸 플래시를 터뜨렸다.
그 서양인은 그게 기분 나쁘지도 않은지, 시큰둥하게 앉아 플래시를 전부 받아냈다.
‘대단하, 잠깐. 이 사람 그 사람이네?’
조아라가 좋아하는 영화의 감독이다.
전생에서 조아라가 항상 인생 영화로 꼽았던 것의 감독. 만약 조아라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기뻐서 기절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분도 오는구나.’
막연히 신기함만 느끼던 성필은,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 때문에 핸드폰을 꺼냈다.
성필은 프랑스어로 ‘사인’을 검색했다.
‘사인받아주면 아라가 좋아할 거야.’
영어로 Autograph를 검색하여 프랑스어로 변환했다. 그러자 Un Autographe로 바뀌었다.
‘뭐지? 영어랑 발음은 같나?’
‘음악을 위한 동행’ 촬영 때, 성필은 백설하를 따라 프랑스로 갔었다.
그때 호텔 직원에게 당연하단 듯 영어로 말을 거니 그가 불쾌해하던 게 기억에 남았다.
‘프랑스인들은 자기 언어에 자부심이 큰 거 같아.’
그러니 이 영화감독도 영어로 부탁하면 불쾌해하며 사인을 거부할지도 모른다.
성필은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고, 번역기의 ‘발음’ 버튼을 눌렀다.
[Un Autographe]
사방으로 기계적인 프랑스어가 크게 퍼졌다.
주변의 이목이 자연스레 쏠렸다.
성필 옆의 감독은 물론이요, 주변의 셀럽이나 패션계 관계자들, 그리고 유명인을 찍으러 모인 사람들까지.
전부 성필을 보았다.
“……크흨.”
누군가 힘 빠진 웃음을 내뱉자 주변에 은은한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성필은 창피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Autographe?”
감독은 실실 웃으면서 성필에게 물었다.
“우, 우이(예)…….”
성필은 항상 지참하는, 신아름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수첩과 펜을 그에게 주었다.
잠시 후, 멋들어진 프랑스어 사인이 성필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함께 사진까지 찍은 후에야, 성필은 창피함을 홀로 곱씹을 시간을 얻어냈다.
‘진짜 나도 바보 같다…….’
그래도, 이 사인을 받고 좋아할 조아라를 상상하니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성필은 방금 벌어진 창피한 상황을 잊기 위해 앞을 보았다.
아직 패션쇼장의 무대는 어두컴컴했다.
‘여기를 하양이가 걷는 건가.’
특이하게 런웨이는 관객석보다 위에 있지 않았다. 완벽히 관객석과 같은 높이에 있다.
게다가 성필은 바로 앞자리라, 모델들이 걸어오면 그들을 고작 1, 2m 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으리라.
‘하양이는 잘하겠지.’
아니, 잘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성필은 이 일을 얻게 해준 하시모토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함을 느꼈다.
패션쇼에 서게 되어 모델의 워킹과 포징을 본격적으로 배우면서, 장하양은 자신의 강점을 찾게 되었으니까.
‘하루키 씨한테 강의받은 첫날, 하양이는 기뻐 보였어.’
실제로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자신의 감동을 표현했었다.
항상 다른 사람보다 못난 점만 보아왔는데, 드디어 자신이 재능 있는 분야를 찾았다면서.
남보다 잘하는 게 한 가지 정도는 있다면서, 장하양은 눈물을 흘렸더랬다.
‘그래, 잘하는 게 문제가 아니야.’
장하양은 어쩌면, 오늘 처음으로 압박감만이 아닌 즐거움까지 찾을지도 모른다.
무대를 성공시키느냐 아니냐의 갈림길에서 떠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재능을 펼쳐 보일 수 있는 기쁨의 장을 찾을 수도 있다.
‘비록 아이돌 일과 크게 관계는 없지만.’
성필은 장하양의 노력을 3년 넘게 지켜봐 왔다. 때로는 말리고 싶을 정도였다.
연습의 정도가 과도하여 탈진하거나 쓰러지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까.
오직 하나의 목표, 최고의 아이돌을 위해서.
그리고 그건 성필의 꿈이기도 했다.
‘난 하양이에게 족쇄를 준 걸지도 몰라.’
아이돌로 살면서, 장하양은 족쇄 속에서만 만족을 느끼지는 않을까.
진정으로 자유로울 때가 있을까.
저렇게나 스스로를 몰아붙이면서…… 행복할까?
물론 장하양은 꿈을 위한 길이니 행복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필은 그녀가 진정으로 즐기는 순간을 찾길 바랐다.
‘모든 압박감과 기대에서, 본인에게 걸린 족쇄에서 벗어나서, 오로지 기쁨만 느끼는 순간을 찾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일부러 장하양에게 ‘잘해야 한다’거나 ‘기대하고 있다’, ‘믿는다’ 같은 말은 일절 꺼내지 않았었다.
성필은 자신의 그런 태도가 장하양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다.
* * *
“여기 아멜리아 어디 갔어!”
“걸어봐. 어, 거기서 걸으라고! 사람 말귀 좀 알아먹어!”
“아, 어쩌지? 이거 막상 보니까 꽝이네.”
패션쇼장 백스테이지는 난장판이었다.
디자이너와 스태프, 모델들이 좁은 공간에서 한데 뒤엉키면서 카오스를 자아냈다.
장하양은 커튼이 벽인 간이 탈의실 안에 있었다.
“바를게요.”
메이크업 스태프가 속옷 차림의 장하양에게 끈적한 로션을 발랐다. 그녀의 손이 장하양의 맨살 곳곳을 어루만지면서 윤을 냈다.
“이 사람 말고! 다른 몸 없어?!”
커튼 밖에서 들리는 고함에 장하양이 움찔했다. 그리고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픽 웃었다.
“여긴 올 때마다 정이 안 가요.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보다 그냥 ‘몸’이라고 부르거든요. 디자이너들은 모델을 사람으로도 안 보나 봐요.”
장하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로션을 다 바르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디자이너들이 옷을 가지고 들어왔다.
디자이너들의 숙련된 손길에 장하양은 금세 착장을 완료했다.
타츠야의 작품인 ‘검은 바다’를 입은 장하양은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방금 최종적으로 결정 났는데, 모자는 없어요.”
“안 쓰나요?”
런스루 리허설 때는 타츠야가 만든 베일과 같은 모자가 있었다.
“네. 방금 마하라 팀장님이 없애자고 하셨거든요.”
장하양은 15cm가 넘는 힐을 신고 나서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기다렸단 듯이 다른 모델이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탈의실을 쓰는 모델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많은 이들은 혼란 속에서 다른 이들의 눈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옷을 휙휙 벗어젖혔다.
아예 속옷만 입고 디자이너들에게 몸을 보여주는 모델까지 있었다.
“개판이네.”
어느새 장하양의 곁으로 다가온 진소유가 말했다. 장하양은 그녀를 쳐다보고, 순간 말이 막혔다.
진소유는 그 반응을 보곤 은은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어때, 언니 예쁘지?”
“네.”
평소였으면 반응이 무미건조하다면서 다른 말을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은 장하양의 표정만으로 충분한 칭찬이 되었다.
“따라와.”
“어디 가시게요?”
“동선 마지막으로 확인하자.”
진소유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장하양은 그런 진소유의 태도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손을 잡고 싶다면, 언제든지 당당하게 손을 낚아챌 사람처럼 보였는데.
“네.”
장하양이 손을 잡아주자, 진소유의 얼굴에 서린 미소가 아까보다 더욱 진해졌다.
둘은 포스터 보드 앞에 섰다.
모델들의 사진과 동선, 캣워크의 구조가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오프닝 행사라서 제일 먼저 나오네. 내가 1번, 하양이가 2번이야.”
그렇다, 장하양은 두 번째다.
어떤 일이든 첫 번째는 중압감이 강하기 마련이다.
두 번째는 그나마 낫다.
하지만 그나마 나을 뿐, 첫 번째와 크게 다르지도 않다.
‘그런데 왜…….’
장하양은 신기한 기분이었다.
중요한 일을 앞둔 여타 사람들처럼, 조금만 시간이 미뤄졌으면 좋겠다느니 걱정돼서 심장이 쿵쾅거린다느니.
그런 감각이 일절 없었다.
오히려 빨리 나가고 싶었다.
동시에, 공허했다.
‘잘 안 해도 돼. 즐기고 와.’
마지막으로 성필에게 들었던 말이 텅 빈 가슴을 퉁퉁 두드렸다.
그 울림이 마음을 더욱 공허하게 만들었다.
“하양아, 여기 봐. 재밌어.”
진소유는 캐스팅 보드에 붙은 어느 모델의 사진을 가리켰다. 그 사진의 아래에는 악필로 짤막한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18살. 다리 라인이 죽여줌. 섹시함. 가슴 작음. 유명 브랜드 패션쇼 경험 없음. 배꼽 모양이 이상함.]
‘후쿠요 히다카’의 전문가들이 모델을 평가한 내용이 노골적으로 적혀 있었다.
아래로는 모델이 입어야 하는 옷, 그 옷의 디자이너, 그리고 스태프 수행사항이 이어졌다.
장하양이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보이는 게 전부인 세계구나.”
장하양과 달리, 진소유는 즐거워 보였다.
“10분 전! 다들 스탠바이!”
스태프의 안내가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졌다.
곧 패션쇼가 시작된다.
그 전에, 장하양은 진소유에게 묻고 싶었던 걸 물었다.
“언니는 재밌으세요?”
“뭐가?”
“패션쇼에 서는 거요.”
“아직 선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그래도 분명 재밌을 거야.”
“다른 사람한테 자기를 보여주는 게 즐거우신 거네요. 인정받고, 관심받는 게…….”
타츠야는 순수하게 런웨이를 즐기라고 했었다. 안타깝게도, 장하양은 아직도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진소유가 부러웠다.
순수하게 본인을 드러내는 데 행복감을 느끼는 그녀가.
“딱히 인정은 필요 없는데.”
“네?”
“그냥 사람들이 감탄하는 거, 재밌잖아.”
그게 다인가?
“사람들이 다 나만 바라보고, 그게 너무 즐거워. 무대도 그래. 사람들 시선이 날 쫓고, 함성을 지르고 그러는 거. 피드백이 즉각적으로 보이잖아.”
“혹시 아이돌이 되신 이유가…….”
“관심받는 게 좋아.”
장하양은 허탈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정호환, 성필과 함께했던 술자리. 그때 진소유는 장하양에게 ‘아이돌에 소명 의식이 있나 보네’라고 했었다.
시비 거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아이돌을 하는 사람이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네…….’
순간적으로 쏟아지는 관심.
단지 그게 재밌을 뿐이다.
그 외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진소유에게 사람이란 자판기에 불과하다. 퍼포먼스를 보이면 감탄을 토해내는 자판기.
진소유는 팬이든 관객이든 행인이든 죄다 똑같은 기계로만 보이는 게 아닐까.
“하양아.”
진소유가 장하양과 잡은 손의 힘을 더 주었다. 온기가 더욱 강하게 전달되어 두 사람을 이었다.
그녀는 장하양을 부르고도 더 뜸을 들였다.
그리고 조금은 망설이듯 말했다.
“이기적이어야 해.”
이 말은 과거, 연말 특별 무대를 준비할 때도 들은 적이 있었다.
“이기적으로 살아. 타인을 위해서 살지 말고. 아니면…….”
“언니보다 못할 거라고요?”
장하양이 진소유의 손을 뿌리쳤다.
진소유가 놀라서 한 걸음 물러났다.
“알아요, 언니가 저 이상하게 보는 거요. 그런데 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에요.”
진소유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런 말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이제 확실해졌다.
장하양에게 성필이 어느 정도의 의미가 있는 인간인지. 그때의 술자리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하다.
진소유는 혼란을 지우고,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런데 어쩔까. 더 빛나는 건 난데.”
진소유가 장하양의 귓가로 입을 가져갔다.
“우리 시험 촬영하러 갔을 때 있잖아. 나랑 박성필 이사님이 복도에서 만났을 때. 그때 이사님이 나보고 그러셨지.”
장하양이 더 빛난다.
그곳이 런웨이 위더라도.
“너도 알겠지만, 그거 거짓말이야.”
진소유가 장하양에게서 떨어져 놀리듯이 웃었다.
“우리 하양이 어떡해. 네가 아이돌을 하는 이유인 분이 그러면.”
진소유가 거칠게 킬힐의 굽을 찍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장하양을 찍어 누르려는 듯, 진소유가 우월한 키로 장하양을 내려보았다.
“어떤 기분이야? 프로듀서의 동경이 네가 아니라 다른 그룹에 있다는 건?”
“……아하하.”
장하양은 헤어스타일리스트가 공들여 세팅한 머리칼을 거칠게 뒤로 쓸어넘겼다.
“맞아요. 박 이사님은 좀 어처구니없을 때가 있으세요. 항상 케이어스, 케이어스, 케이어스……. 근데 제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요.”
장하양이 진소유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뻣뻣이 세웠다.
“박 이사님은 후회하실 거예요. 진짜 다이아몬드를 앞에 두고, 흑연으로 만든 가짜 다이아몬드에 홀렸단 걸 알게 되면요.”
“……가짜 다이아몬드? 나?”
“언니, 오늘 집에 돌아가서 패션쇼 영상 꼼꼼히 확인하세요.”
내가, 장하양이 더 찬란히 빛나는 모습을.
“하.”
이 얼마나 당돌한 발언인가.
진소유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양아, 넌 옛날이랑 달라진 게 전혀 없구나. 여기까지 와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연말 특별 무대를 준비하면서 금과옥조 같은 조언까지 해주었는데.
장하양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믿지도 못한다. 그녀가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이유는 성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
진소유가 반문했다.
그에 장하양은 심장으로부터 전해지는 거센 떨림을 느꼈다.
‘내가 왜 이렇게 열을 올리지?’
굳이 경쟁심을 가지거나 드러낼 일이 아닌데.
앨범 판매량처럼 통계적으로 드러나는 승부도 아니다.
퍼포먼스의 수준처럼 직관적으로 판별되는 대결도 아니다.
아이돌과는 관계가 없는, 일종의 이벤트와 같은 일이다.
‘이사님이 기대하지도, 이사님이 뭐라고 한 적도 없는데.’
그런데도 장하양은 거센 투쟁심을 느꼈다.
“그렇구나.”
진소유는 굳이 말을 더하지 않고 스테이지 쪽으로 향했다.
이제 곧 쇼가 시작된다.
“그러면 봐. 가짜 다이아몬드가…….”
타인의 인정 따위 요구하지 않는, 홀로 빛나는 걸로 족한 보석.
“얼마나 빛나는지.”
진소유가 스테이지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진소유의 시야엔 런웨이를 둘러싼 수백 명의 사람이 잡혔다.
동시에, 그들이 전부 사라졌다.
진소유는 런웨이 위에 홀로 서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앞에 있는 건…….
‘보인다.’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뿐이었다.
진소유는 진한 미소를 머금고 거울을 향해 전진했다.
‘가짜 다이아몬드라고?’
다이아몬드에는 가짜고 진짜고 의미가 없다.
그 무엇이든 다이아몬드가 된 순간부터 중고 따윈 없는 영원함의 상징이 된다.
‘보아라.’
천년만년 영원히 아름답길 허락받은 보석.
진소유.
‘그리고.’
* * *
‘감탄해라.’
또각.
진소유의 힐이 런웨이의 끝을 강하게 두드렸다. 그로부터 쏘아진 청명한 소리와 힐에 반사된 빛이 사람들의 눈을 강타했다.
사방에선 소리 없는 감탄과 카메라 셔터 세례가 쏟아졌다.
진소유는 강렬한 조명을 받으면서 끝없는 고양감을 느꼈다.
‘너.’
진소유가 바로 앞의 거울을 보았다.
그 안의 친구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최고야. 느껴져?’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쏘아 박히는 시선의 파도가.
진소유는 힐을 축으로 삼아 뒤로 홱 돌았다. 그와 동시에, 신경 쓸 생각도 없던 관객석 내에서 한 명이 뚜렷하게 보였다.
성필이었다.
그의 눈에 담긴 황홀감을 보고, 진소유는 드물게도 개인적인 만족을 느꼈다.
‘아아, 그런데 하양아.’
진소유가 다시 백스테이지 쪽으로 워킹하는 것과 반대로, 2번 모델인 장하양은 이제 런웨이로 나온 참이었다.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보고 있네.’
장하양은 백스테이지에서 나오자마자 관객석의 성필을 찾아내어,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리고 동요하고 있다.
무엇보다, 방금 진소유의 워킹과 포징을 보곤 심적인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런 꼴이어서야, 자신감 따위 생길 리 없지.’
진소유와 장하양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둘이 마주치기 직전까지 장하양의 워킹은 기계적일 뿐이었다.
진소유보다 빛날 거라고 선언했던 것 치곤 초라하기 그지없는…….
‘어?’
진소유와 가까워지던 장하양이.
‘……웃어?’
도저히 못 참겠단 듯이, 웃었다.
이제 보니 성필도 웃고 있었다.
‘당신은 왜 웃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