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22화 (322/760)

322화

옷 감상이 끝나자 타츠야는 눈에 띄게 지친 기색을 드러냈다.

“타츠야 씨 괜찮으세요?”

타츠야가 화들짝 놀라면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뭐, 뭐야. 왜 내 이름을 불러……?”

“이름? 아. 죄송합니다. 한국에선 이름만 부르는 경우가 흔해서요.”

“……그래.”

타츠야는 선반에 준비된 후쿠요 히다카의 하이힐들을 진중히 바라보았다.

“괜찮아. 약간 피곤한 거뿐이야. 패션쇼 끝나면 건강검진도 받고, 운동도 다시 시작하고, 여가도 즐길 거야. 매년 이러지.”

“너무 힘들어 보이셔서 그래요.”

“젊은 인간이 높은 자리에 있으려면 그만큼 노력을 해야지.”

타츠야는 하이힐을 하나 집어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름다움을 얻으려면 산봉우리 같은 하이힐에 서야 하는 것처럼. 고통과 자리를 교환하는 거야. 그래도 당신 덕에 조금 낫네.”

“저요?”

“‘타츠야’라고 불러서 잠이 다 달아났거든.”

그녀는 성필을 향해 싱긋 웃곤 손짓으로 장하양을 불렀다. 그리고 그녀에게 직접 하이힐을 신겨주었다.

“아토무 녀석이 한 말이라 마음에 안 들지만, 15cm 이하인 힐은 힐이 아니지. 자아, 됐다.”

장하양의 키가 15cm 이상 높아져서 성필을 훌쩍 뛰어넘었다.

“설 만한가?”

“네, 네. 조금 익숙해져야겠어요.”

“미(美)를 쥐어 짜내는 도구야. 오래 쓰지는 마. 몇 년 뒤에 척추가 뒤틀려 있을걸. 정말 필요할 때만 써. 돋보이고 싶을 때나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러 갈 때. 패션쇼는 전자(前者)지. 걸어봐.”

장하양이 몇 걸음 걸었다.

처음엔 뒤뚱거리듯 움직이던 장하양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었다.

“좋네. 태어날 때부터 힐을 신고 태어난 사람 같아.”

“……정말요?”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네.”

그럭저럭 괜찮다.

타츠야의 그 발언에 장하양이 결심을 굳혔다. 그녀는 의지를 다지려 가슴 위에 불끈 쥔 주먹을 두었다.

“햇(Hat)이 고민이군. 볼륨을 줄까 늘어뜨릴까. 확신이 서질 않아.”

“디자이너님.”

“음.”

타츠야의 나른한 눈동자 안에는 생리적인 고통이 만들어내는 짜증과 피로가 가득했다.

옛날부터 생각했지만, 장하양 자신을 바라보는 타츠야의 눈빛은 어딘가 이상했다.

장하양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보는 듯했다.

‘아마 그건, 박 이사님일 거야.’

타츠야는 예술품이 아니라 그 안에 자리한 예술가를 본다.

아이돌이 아니라 프로듀서를 보고 있다.

극단적으로, 타츠야는 장하양에게 말을 걸 때조차 그녀와 대화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타츠야는 장하양의 가슴 안에 자리한 성필과 대화한다.

그런 타츠야를 향해, 장하양이 과감히 말했다.

“제 워킹이랑 포징을 봐주실 수 있을까요? 계속 연습하는데 혼자선 감이 안 잡혀서요.”

예술품이 의지를 드러냈다.

타츠야는 싱겁게 답했다.

“런스루 리허설 때 질리도록 볼 거야.”

말 그대로 보기만 할 것이다.

딱히, 진짜 모델처럼 세세한 부분을 잡아주거나 수정을 요구하진 않을 것이다.

장하양이 타츠야의 수준에 맞도록 따라와 줄 능력도 없을뿐더러, 필요한 일은 더더욱 아니니까.

“잠시라도 괜찮아요. 아주 자그마한 조언이라도 좋아요. 그러니까…….”

성필이 타츠야와 장하양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이런 상황을 옛날부터 꽤 겪어왔기 때문에,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고 있었다.

‘말하는 거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마하라 씨가 좋게 받아들이진 않을 거야.’

석세스 엔터가 작았을 시절, 성필은 유명한 작곡가들을 만나러 발품을 팔며 돌아다녔다.

그들에게 우리 애들을 한 번만 봐달라.

사진만이라도 좋아.

딱 한 번만.

그리고 결정해달라.

그런 부탁을, 그들에겐 떼쓰는 걸로 들릴 말을 수도 없이 해왔었다.

‘나한테는 한 번인 부탁이지만, 그 사람들은 그런 부탁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들어. 어쩌면 수십 번.’

당연히 그런 걸 한도 끝도 없이 들어줄 수는 없다. 옛날에는 호의로 받아들였을지라도, 점점 지위가 높아지면 그럴 수가 없다.

한 번 받아들이면 계속 들어줘야 하니까.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유명한 사람들은 마음의 장벽을 세운다. 아무리 간단한 부탁이라도, 정해진 일이 아니면 해주지 않는다.

“흐음.”

타츠야도 그러했다.

그녀는 장하양의 부탁에 싫증 난 어투로 다시 답했다. 장하양이 상처받지 않도록 조심했지만, 그 목소리에 서린 짜증을 읽지 못하는 건 어려웠다.

“시간이 없어.”

“1분이라도…….”

“하아양. 내 스케줄은 분 단위로 쪼개져 있어. 우리의 만남에도 한계가 있고. 런스루 리허설 때 봐준다고, 분명 말했어.”

“10초요.”

타츠야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의욕이 많은 건 좋지만, 패션쇼를 잘 해내고 싶은 마음도 알지만, 조금 그렇군. 왜 이렇게까지 하지?”

“소유 언니보다 빛나고 싶어요.”

“소유, 아. 그 인간이군.”

“네. 어떻게 보면, 소유 언니는 디자이너님의 상대기도 하…….”

“그래, 그 인간을 이겨 먹어서 어쩌게?”

장하양의 말문이 막혔다.

타츠야의 얼굴에 타이머가 뜬 거 같았다. 그녀는 대답을 고민하는 고작 몇 초조차 봐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래서 장하양은 본능적으로 답했다.

“박 이사님한테 인정받으려고…….”

타츠야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태도는 모델인데 멘탈은 모델이 아니군. 최악의 답이야. 뭐, 어쩔 수 없나.’

예술품이니까.

타츠야가 책상 모서리에 엉덩이를 대어 기댔다. 그리고 고갯짓했다.

‘해보라’는 사인이다.

‘하양아.’

성필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타츠야는 딱 봐도 탐탁지 않아 했다.

보통 사람들은 기분이 성격이 된다.

백설하는 천성이 착하고 친절하지만, 자다가 도중에 깨면 세상 날카로운 인간이 되는 것처럼.

‘하양이 워킹을 봐도 좋은 말은 절대 안 나올 거 같은데…….’

장하양은 십수 걸음 물러난 후, 뒤로 돌아 타츠야에게 다가갔다.

왕년의 유명 모델이었던 하루키의 집중 강의를 들은 만큼, 장하양은 기본이 잡혀 있었다.

또한 옷과 장하양 본인의 아우라 때문인지, 걸음 하나마다 꽃이 피는 상쾌함이 감돌았다.

하지만 동시에, 옷이 표현하고자 하는 자연의 장엄함은 사라졌다.

바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아직, 장하양은 모델로서 부족하다.

“끝, 이에요.”

장하양이 타츠야 앞에서 멈춰 섰다.

그녀와 성필이 동시에 침을 꼴깍 삼켰다.

타츠야는 여전히 나른한 눈으로 장하양을 바라보다가, 성필에게 말했다.

“당신, 잠깐 나가 있겠어?”

“네? 어, 왜요?”

“하아양에게 할 말이 있어.”

“하실 말씀이 있으면…….”

“당신이 있을 땐 못하는 거야.”

“타츠야 씨, 귀중한 시간을 빼앗은 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하양이는…….”

“하아양이 그렇게 원하는 걸 가르쳐주려고 해. 소유란 인간을 이기고 싶다고? 말해주지.”

타츠야가 검지와 중지를 폈다.

“못 이기는 이유 두 개.”

성필이 움찔했다.

타츠야는 장하양이 진소유보다 빛나지 못 하리라고 확신하는 말투였으니까.

“이사님, 죄송한데 자리 비켜주세요.”

“하양아…….”

“듣고 싶어요.”

“…….”

성필의 발이 앞뒤로 삐걱거리다가, 곧 힘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가 나간 방 안에서, 타츠야는 아직도 손가락을 펴고 있었다.

“못 이기는 이유 두 가지, 알려주세요.”

타츠야가 약지와 소지를 더 폈다.

“더 알려주지. 이길 수 있는 방법 두 개.”

“……!”

타츠야는 책상 모서리에서 엉덩이를 떼고 장하양의 앞에서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발등을 손으로 문질렀다.

“연습을 얼마나 한 거야?”

“하루에 여섯 시간 이상이요.”

“순수하게?”

“네.”

“바보같이.”

타츠야는 한숨을 푹 뱉었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어. 아마 처음이겠군. 패션쇼 오프닝 행사에 나온다고 이런 식으로 연습한 인간은.”

집무실 내의 내선 전화가 울렸다.

타츠야가 그것을 받으니, 비서가 10분 후 다음 스케줄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오늘 스케줄 다 캔슬해.”

[다른 건 다 할 수 있지만, 2시간 후의 전체 회의는 할 수 없습니다.]

“해.”

[……총괄 디자이너님이 재석(在席)하십니다.]

총괄 디자이너, 히다카 후쿠요 본인이 온다.

타츠야는 전화선을 꼬면서, 감출 수 없는 흥분을 담아 말했다.

“더 재밌는 일이 생겼어.”

약 5초 후, 수화기 너머 비서의 짙은 한숨이 전해졌다.

[알겠습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곧 ‘후쿠요 히다카’의 차기 수석 디자이너가 선정될 것이다.

그룹의 오너 중 한 명인 히다카 후쿠요에게 평소보다 잘 보여야 할 때이다.

한순간이라도 눈 밖에 나서는 안 된다.

[깊은 사려와 판단이 동반되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래, 잘 말해줘.”

중차대한 회의를 스킵한 타츠야가 다시 장하양에게 몸을 돌렸다.

“하아양, 아이돌이지?”

“네.”

“아이돌을 하는 이유는?”

“…….”

“성필을 위해서?”

장하양은 오랫동안 감춰온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기준점이 그 사람이군. 너 자신을 위한 게 아니야.”

“저는…….”

“사소한 스케줄 하나마저도, 프로듀서의 인정을 받기 위해 한다. 그게 지상의 가치이다. 타인의 인정 따위는 필요 없다. 그 정도인가?”

이것에 동의하면, 장하양은 어떤 인간으로 보일까. 그게 걱정이었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장하양의 바닥을 들여다본 질문이었다.

대답이 없자 타츠야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다른 사람의 발가벗은 몸을 본 적 있나?”

무슨 질문이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던 장하양의 말문이 막혔다.

“괜한 걸 물었군. 당연히 있겠지.”

없는데…….

“하지만 난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야. 연인의 몸이나 어릴 적 본 부모님의 몸 따위가 아니라, 타인의 적나라한 나신을 응시(凝視)한 경험이 있는가.”

“……없어요.”

“그렇겠지.”

타츠야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

“옷이란 인간의 약점을 감추기 위한 것. 그리고 수치심을 억제해주지.”

타츠야가 상의를 모두 벗고, 보통의 것과 달리 앞에 달린 후크로 손을 가져갔다.

“왜 수치심을 느낄까.”

손가락이 후크를 튕기자 브래지어가 간단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장하양이 고개를 돌렸다.

“그건,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상적이지 않기 때문이야. 자기 자신조차 눈을 돌리고픈 거지.”

타츠야가 바지를 벗었다.

“그런 몸을 타인에게 보여주고픈 마음은 더더욱 생기지 않아. 그래서 옷으로 가린다.”

얇은 천이 타츠야의 다리를 타고 내려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시선을 피한 장하양의 귀를 파고들어 왔다.

“하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타인의 나체를 직접 보면 미추를 판단하기 힘들어해. 하아양, 봐.”

“…….”

“고개 돌려.”

장하양은 겨우겨우 시야를 정면으로 향하고, 흔들리는 초점을 맞춰 타츠야의 나신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몇 초나 되었을까.

장하양은 자신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또 고개를 돌렸다.

“왜 미추를 판단하지 못하는가 하면, 압도당하거든. 화장과 옷으로 필사적으로 감춰져 있던 나신에는 힘이 있어. 인간을 몸만큼 잘 드러내는 것도 드물지. 거짓말로 장막을 두를 수 있는 정신보다 훨씬.”

타츠야가 장하양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하아양, 봐.”

“…….”

“인간을 응시해본 경험이 있는 모델과 없는 모델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타츠야가 장하양의 목깃으로 손을 가져갔다. 장하양이 움찔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타츠야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몸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은 모델은, 관찰한 모델과 비교조차 할 수 없지.”

“…….”

장하양이 몸의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타츠야의 손길과 몸이 옷으로부터 탈출하는 감각이 장하양의 머리를 전부 휘어 감았다.

타츠야가 손을 몇 번 움직이자, 장하양은 빠르게도 서늘함을 느꼈다.

몸이 공기를 있는 그대로 맞고 있다.

“하아양, 눈 떠.”

흐읍.

장하양이 눈을 떴다.

그리고 보인 건, 밝은 조명을 받은 자신의 나신이었다.

그 무엇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발가벗은 몸.

타츠야가 장하양의 쇄골을 검지로 훑었다. 그리고 쇄골에 자리한 그림자를 매만졌다.

“대학 1학년 때, 누드 크로키 수업이 있었어. 디자이너는 인체를 잘 알아야 하니까. 책 따위로는 배울 수가 없는 게 있지. 남자 모델이 온댔어. 친구들이랑 난 들떴지. 좋은 구경 한다면서. 그런데, 정작 본 수업에 들어가고 나선 그럴 수 없었어.”

타츠야는 인간의 나신에 압도당했었다.

연인의 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만질 수 없단 것만으로도, 자세히 봐야 한단 것만으로도 인간의 몸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냈었다.

“난 수업 도중에 도망갔어. 복도로 나와서 울먹였지.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전도유망한 학생들은 고작 몸 하나를 눈에 담지 못하고 도망가길 택했었다.

타츠야의 손이 장하양의 몸을 타고 내려와 배꼽과 골반에 이르렀다.

장하양이 가늘게 떨었다.

“인간의 몸만큼 아름다운 게 있을까. 인간은 왜 이렇게 생겨 먹었는지 이해할 수조차 없는 구조. 그럼에도 완벽한 구조와 아름답기 그지없는 음각(陰刻)과 양각(陽刻)이 돋보여. 인간이 창조물이라면, 창조자는 인간을 만들었단 이유만으로 신이라 불릴 자격이 차고 넘쳐.”

이런 창조물을, 자신의 몸을, 인간은 죽을 때까지 외면한다.

거울을 흘끗 보면서 ‘나 정도면 괜찮네’라고 생각하는 게 전부일 뿐. 자세히 들여다본 경험 없이 죽는 인간이 태반이다.

“하아양, 눈을 돌리지 마.”

거울 속에 비친 장하양의 얼굴은 너무 붉어서 폭발하는 게 아닌가 싶은 수준이었다.

이렇게 강렬한 조명 속에서 자신의 나신을 본 경험은 처음이었다.

너무 창피해서, 타츠야가 없었다면 당장 거울에서 눈을 돌렸을 것이다.

“자세히 봐. 팔꿈치 관절에 새겨진 주름 하나, 도드라진 뼈를 타고 내려온 그림자, 허리는 얼마나 들어가 있는지, 엉덩이는 얼마나 나와 있는지. 곡선이 있다면 어떤 모양으로 흐르는지. 전부 다 눈에 새기는 거야.”

타츠야가 장하양을 거울 바로 앞으로 밀었다.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을 해. 뼈는 어떻게 붙어 있으며 관절은 어떻게 움직이고 굴곡은 어떻게 펼쳐지고 음각과 양각은 어디 어디에 존재하는지. 머릿속으로 대충 그리지 말고 진실된 네 기록을 봐.”

장하양은 숨을 거칠게 쉬었다.

자신의 몸을 직시하는 건, 타츠야의 나신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고됐다.

“자신의 몸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 그게 모델의 첫 번째 조건이야. 그리고 여기서 99.9%는 탈락해. 0.1%로 올라가는 건,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직시한 경험이 있는 자들 뿐.”

이게 장하양이 진소유에게 지는 첫 번째 이유이자, 이기는 첫 번째 방법이다.

“옷을 걸치지 않은 맨몸을 수용하는 것. 인생 처음으로 자기 자신과 마주 보는 경험.”

장하양의 턱선을 따라 땀이 흘러내렸다.

워킹 6시간보다, 자신과 진실되게 마주 보는 6분이 훨씬 더 힘들다.

“어때, 깨닫는 게 있나?”

장하양은 마른침을 삼키고, 감격에 차서 답했다.

“네, 이해했어요.”

촬영 때, 진소유가 어떻게 그토록 완벽한 피사체가 될 수 있었는가.

진소유는 모델이면서 사진사였다.

예술품이면서 예술가였다.

그녀는 자신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

“제가 왜 소유 언니보다 못한지, 이해했어요.”

“좋아.”

타츠야는 어느 방으로 들어가 몸 전체를 가릴 숄과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두터운 모자를 가져왔다.

반대 손에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도 함께였다.

타츠야는 그것을 장하양에게 넘겼다.

“두 번째 이유와 방법을 보러 갈까. 들키지 않게 둘둘 감싸고 가자고.”

“여, 여기서 하는 게 아닌가요?”

이젠 자기 자신을 직시하자면서 길거리에서 전시회라도 하겠단 거 아닐까?

장하양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동시에 타츠야란 예술가가 무서워졌다.

“여기선 보여줄 수 없어.”

“그럼 어디로…….”

“내 사업장.”

“……클럽이요?”

타츠야가 검지를 저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새겨진 새(鳥) 문신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듯했다.

“그냥 클럽이 아니야. 패션 클럽이야.”

* * *

성필은 어두운 복도의 사방을 끊임없이 관찰했다. 아무도 없는 걸 이미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도저히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그의 앞에는 숄과 모자로 몸을 둘둘 감아,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성필마저 누군지 모르고 넘어갈 차림의 장하양이 있었다.

“성필, 걱정 안 해도 돼. 여기 디자인이랑 인테리어 다 내가 했어.”

가장 앞서가던 타츠야가 말했다.

“건축도 배우셨어요?”

“건축가랑 몇 달 동안 얘기하면서 정한 거지.”

“정말…….”

“괜찮다니까.”

타츠야가 긴 복도 끝의 문을 열었다.

오페라 극장의 VIP석처럼, 3층 벽의 튀어나온 난간에 사람 몇 명 들어갈 공간이 있었다.

아래로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맞춰 춤추는 클럽 손님들이 보였다.

성필이 놀라서 물었다.

“이런 데를 왜 만드신 거예요?”

“특등석이지.”

“뭘 위한…….”

“패션쇼.”

타츠야가 말하자마자 DJ 옆에 있던 MC의 우렁찬 고함이 퍼졌다.

[노블레스 이브닝 웨어입니다!]

DJ석의 앞, 중앙으로 툭 튀어나온 은빛의 무대에 한 여자가 올라갔다.

그를 보자 성필과 장하양은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고, 다른 손님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을 뱉었다.

여자는 근대 배경의 유럽 사극에나 나올 법한 귀족적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요일을 정해서 1, 2시간씩 이런 이벤트가 있지. 베스트 드레서에겐 룸 무료 이용권이랑 비싼 주류를 상으로 줘.”

“저거, 여기서 협찬이나…… 따로 제공해주는 옷인가요?”

“아니. 직접 가져온 거지. 패션이잖아.”

귀족 차림의 여자는 부채까지 준비해 와서 코 아래를 가리면서 한껏 교태를 부렸다.

[마담, 어쩌다 프랑스에서 일본까지 오셨나요? 아아, 드라마 베르사유 촬영장에라도 온 거 같군요!]

MC는 여자가 포징을 취할 때마다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그것을 따라 환성이 자연스레 퍼졌다.

그리고 무대에 올라간 여자는, 정말이지 행복해 보였다.

“하아양, 저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행복해, 보여요.”

“왜 그럴까?”

“……자기가 되고 싶은 모습,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옷이라서?”

“맞아.”

패션은 인간을 드러내는, 자아를 무엇보다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다.

무대에 서는 이들은 패션으로 자기 자신의 소망과 꿈, 자아를 이룬다.

“진정한 자신이 되는 거지.”

패션이란 그런 것이다.

‘패션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다.’

폴 스미스.

‘옷은 당신이 어떻게 여겨지고 싶은지 말해주는 의식의 잠재언어다.’

랄프 로렌.

‘패션은 라벨도, 브랜드도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무언가다.’

등등, 수많은 디자이너는 패션을 ‘자아’라고 규정했다.

그저 입어야 해서 입는 게 아니다.

[다음은 하이패션 스트리트웨어 할렘 스타일입니다!]

젊은 남자가 품이 큰 옷을 둘둘 두르고 무대 위로 올라왔다.

껄렁한 자세를 잡으면서 사방으로 중지를 펴고, 주변을 사납게 노려보기도 했다.

[뉴욕의 방탕아가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빨리 도망가세요! 품에서 총이 나올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건 코스튬 아닌가요?”

자신이 되기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이 아닌 무언가가 되기 위해 입는 옷이 아닌가?

그 물음에 타츠야가 픽 웃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는 자기가 정하는 거야. 정체성은 자신이 선언하는 거지, 누가 규정하는 게 아니야. 물론, ‘나는 핵폐기물을 먹어야 하는 고질라다’라고 하는 건 곤란하겠지만. 그거까지 인정해주느냐는 정치의 영역이지.”

“…….”

“저기 쟤, 아까 MC가 소개했던 하이패션 스트리트웨어 할렘 스타일이란 이상한 말 붙였던 쟤. 저 녀석 소프트뱅크 펀드매니저야.”

전 세계적으로 100조가 넘는 돈을 굴리는 투자회사의 직원이다.

“평생 공부만 했고, 아침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나올 법한 따분한 삶을 살았지. 나한테 묻더라고. 바뀌고 싶다고.”

그래서 타츠야는 언더 디자이너들의 디자인 하우스를 소개해주고, 그의 열망을 끄집어내 주었다.

“저기 봐, 이젠 아예 무대 위에 드러누워서 엿 날리고 있네. 행복해 보이지?”

“네.”

“준비해 온 걸까?”

“아니요.”

“하아양은 패션쇼에서 저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장하양은 멈칫하더니, 몸에 두른 숄을 살짝 여몄다.

“연습하면…….”

“연습으로? 농담하지 마.”

저 남자와 같은 생의 환희를 연습으로 재현할 수 있을 리 없다.

“연습에 연습을 더해도, 그건 결국 준비된 거야. 하아양, 프리스타일 랩이라거나 대단하지 않아? 그 자리에서 즉흥으로 한단 건.”

즉흥이기에 더욱 생동감 있다.

준비된 창조물이 아니라, 삶 자체를 느낀다.

“만약 연습으로 완벽에 다다른 움직임이 즉흥처럼 느껴진다면, 그게 퍼포머로서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위치겠지. 연습한 삶이 아니라, 미칠 듯이 맥동하는 거칠고 날 것의 삶을 드러낼 수 있으면. 저렇게…….”

타츠야는 아래를 가리켰다.

무대 위에서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이 웃는 소프트뱅크의 펀드매니저를.

“저 녀석처럼 삶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누구나 홀리는 게 당연하지.”

장하양은 아까부터 멍하니 무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대에 올라선 인간들은 모두 환희에 젖어 있었다.

“어떻게, 할 수 있나요?”

“캣워크에 설 때, 자신을 위해서 서.”

타츠야는 성필을 흘끗했다.

“너 자신을 위해서.”

“하지만…….”

“별거 아니야. 즐겨. 즐거워서 못 참겠단 듯이.”

그 말을 듣는 순간, 성필의 머릿속에는 진소유가 떠올랐다.

진소유는 미(美)를 드러내는 게 본능이라고 했다. 그녀는 본능에 따르기에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워킹과 포징에서 삶의 환희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아우라가 나올 수 있었다.

“한 번쯤 모든 걸 놔도 괜찮아.”

“…….”

장하양은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레 고개를 뒤로 돌려 성필을 바라보았다.

즐긴다, 라…….

장하양 자신이 그럴 수 있을까?

‘내가 아이돌을 했던 건 박 이사님 때문.’

세상 모든 기준이 성필이다.

그런데 그것에 초연하고 즐긴다는 게 가능할까? 장하양이 즐기는 건 성필의 인정과 칭찬뿐일 터인데.

“이게 내가 가르쳐 줄 두 번째 이유, 그리고 두 번째 방법. 저걸 보여주고 싶었어.”

세 사람은 다시 아래를 보았다.

베스트 드레서로 선정된 소프트뱅크 직원이 싸구려 금속 트로피를 들고 환성을 내질렀다.

마치, 옛날에 투자했던 고위험 주식이 연일 상한가를 치는 것처럼. 그래서 승진이 내정된 사람처럼.

고작 싸구려 트로피 하나로, 그는 세상을 전부 가졌다.

“하양아, 마하라 씨 말이 맞는 거 같아. 런웨이에서는 즐겨 봐. 너인 채로 있어.”

성필이 장하양을 격려했다.

역설적이게도, 그건 격려가 아니었다.

성필은 단 한 번도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무대를 앞두고 ‘즐겨’라고 한 적 없다.

그게 성필의 태도를 드러냈다.

‘런웨이는 중요성이 없다. 아이돌 일에 큰 영향은 없으니까. 그러니까, 즐겨도 된다는 뜻…….’

성필에게 기대받지 못하는 무대.

장하양이 원동력으로 삼아왔던 연료가 없는 곳에서, 그녀가 즐기는 게 가능할까?

아이돌로서의 삶 전부 성필을 위해서만 살아왔는데.

솔직히, 성필의 말에 힘이 빠진다.

하지만.

“네, 즐길게요.”

장하양은 여느 때와 같이 미소를 지었다.

타츠야의 조언은 마음을 울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그래도 성필이 기대해주길 바랐었다.

성필이 기대해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피가 나도록 워킹과 포징을 연습했으니까.

‘그런데, 뭘까.’

성필의 기대가 없단 사실을 깨닫자마자 텅 빈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차오른다.

그건 인간의 형태였다.

그 형태를 명확하게 인지하자마자 장하양이 조금 놀랐다.

‘소유 언니?’

왜 그녀가 떠오르는지, 장하양은 알 수 없다.

* * *

진소유는 호텔에서 아침을 맞았다.

이곳에서 지낸 지도 시간이 꽤 되어, 이제는 집처럼 느껴진다.

애초에 ‘집처럼 느껴진다’는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운 진소유이긴 하지만, 이곳이 편해졌단 것만은 확실했다.

“후.”

진소유는 눈을 뜨자마자 상체를 일으켰다.

아무리 부지런한 사람이라도 이불 속에서 몇 초 정도는 뒹굴기 마련이다. 하지만 진소유에게 그런 망설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진소유는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음.”

진소유는 한동안 아침의 멍함을 지니고 거울 속의 자신을 살폈다.

대충 훑기만 하던 시선은 곧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핥기 시작했다.

배의 피부를 집어보기도 하고, 팔을 들어 올려 빛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자의 윤곽을 살피기도 했다.

“예쁘네.”

예쁘지만, 어쩐지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다.

진소유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거울 속의 자신을 수십 분 동안 살핀다.

처음 케이어스 멤버들과 동거를 시작했을 땐, 다들 웬 미친년이 있단 듯 바라보곤 했었지만 이젠 그렇게까지 대해지진 않는다.

누군가의 시선 때문에 고칠 습관이 아니다.

‘내 몸 맞지?’

이 습관은 장장 10년을 넘었다.

그리고 아침마다 자신의 몸을 볼 때마다 새롭고 신기하다.

관절에 새겨진 주름 하나, 매끈하게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쇄골 라인, 부드럽게 솟아오른 허리 라인의 정상처럼 위치한 골반뼈.

무엇 하나 새롭지 않은 게 없다.

‘내 몸…… 맞아.’

그 상태로 수십 분을 있으면 생경한 감정이 사라지고 심신이 일치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비로소 자신이 자신의 몸을 소유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아니, 몸 자체가 자신이란 것을 깨닫는다.

“아름답네.”

진소유는 거울 속의 자신을 칭찬해준 후,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포즈를 취했다.

살짝 들어 올려 노출되는 겨드랑이를 시작으로, 안쪽으로 부드럽게 들어간 허리를 타고 이어져 엉덩이와 허벅지에서 매끄럽게 끝나는 선.

이 선이야말로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지만, 동시에 만인의 감탄을 자아낼 아름다움의 극치임이 틀림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답, 하아.”

진소유는 나른한 한숨을 토해내고 기지개를 쭉 켰다. 그녀는 캔커피를 가져와 전신 거울 앞의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거울을 향해 커피를 건배하듯 내밀었다.

“오늘도 잘 부탁해.”

진소유는 친구에게 인사했다.

이 세상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친구와 아침의 따사로운 시간을 보냈다.

차가운 커피를 홀짝이며 친구를 바라보던 중, 그곳에 친구가 아닌 사람이 나타났다.

장하양이었다.

진소유는 거울에 장하양이 아른거리자 미간을 좁혔다.

“곤란한데…….”

이렇게 깊숙이 들어오면 곤란한데.

‘최고란 이름은 하양이한테나 어울려요!’

그리고 웬 이상한 남자가 나타났다.

아니, 이상한 남자가 아니라 성필이었다.

그는 치어리더라도 됐는지 거울 속에서 아른거리는 장하양 주위를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계속해서 장하양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양이한테나 어울린다고요!’

진소유는 피식 웃었다.

“나도 동의해요. 하양이는 최고죠.”

거울 속 성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는 더욱 자신감에 차서 외쳤다.

‘그게 설령 런웨이 위라도요!’

그 얼굴을 향해 진소유가 커피를 쏟았다.

불투명한 액체가 거울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근데, 그 말은 나를 보고 나서 할 건 아니죠. 거짓말인 건 알지만, 듣고 싶지 않아요.”

커피가 거울을 한 번 훑자, 다시 그 안에는 진소유의 오랜 친구가 자리 잡았다.

오랜 친구의 얼굴은, 어째선지 묘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 친구를 위로하려 진소유가 말했다.

“그래, 최고는 너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아야 할 사람.

누구도 진소유에게서 이보다 더 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진소유는 다시 아침의 커피 타임을 즐겼다. 그녀는 커피를 홀짝이곤 혼잣말했다.

“내일이네.”

내일…….

* * *

‘후쿠요 히다카’ F/W 시즌 패션쇼, 당일.

후쿠요 히다카 본사의 입구로는 기자 수십 명과 셀럽을 보러 온 수백 수천 명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입구까지 이어진 레드카펫의 끝으로 검은색 세단이 멈춰 섰다.

그곳에서 정장을 입은 성필이 먼저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나온 문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양!”

“하양이다!”

“이쪽 봐줘요!”

아이돌리시한 복장의 장하양이 성필의 손을 가볍게 잡고 차 밖으로 나왔다.

레드카펫을 장하양의 힐이 밟았다. 그리고 바닥에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자…….

‘여기가 오늘의 무대.’

세계의 이목이 모이는 도쿄 패션위크의 중심.

일본의 패션 제국, ‘후쿠요 히다카’의 본사.

‘나의…… 전장(戰場).’

전장을 향해, 장하양이 걸음을 내디뎠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하양’이란 연호와 함께, 아이돌은 아우라를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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