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포징을 연습하던 장하양은 입구로 눈을 돌렸다. 성필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그가 손을 내밀고 ‘놀러 가자’고 권해주는 영상이 흐릿하게 현실 속에 남아 있었다.
장하양은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아하하, 나 뭐 하는 거지.”
성필, 리카와 함께 가는 축제는 분명 재밌을 것이다.
권해주어서 기뻤다.
꼭 가고 싶었다.
그런데, 장하양은 거절했었다.
‘거짓말까지 하면서, 나는 왜…….’
‘후쿠요 히다카’의 앰배서더가 될 기회 따위는 저 멀리 가버렸다.
장하양이 얼마나 노력하든 그 사실은 바뀔 리 없다.
진소유가 후쿠요 히다카의 앰배서더를 받아들였으니까.
‘비슷한 케이팝 아이돌을 둘이나 앰배서더로 받을 순 없겠지. 나도 알아.’
그렇다면 왜, 이런 아이돌 일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걸까?
장하양은 하루에 여섯 시간 이상, 10cm가 넘는 하이힐을 신고 워킹과 포징을 반복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연습해도 나아지는지 알 수 없는, 수도사의 고행과 같은 연습의 시간.
아름다움을 대가로 하이힐이 선사하는 지긋지긋하고 강렬한 고통.
장하양은 마음과 몸 전부 깎아버리고 있다.
심지어, 성필과 놀러 가는 기회마저 차버리고서.
‘내가 서는 곳은 무대가 아니야. 아이돌 퍼포먼스와 달리 완성도를 가늠할 수 없어. 내가 잘하더라도 그건 결국 자기만족에 불과할 거야.’
알아주는 이 없는 결과를 위한 고통이다.
프로듀서인 성필 또한 런웨이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관심만 두지 않을까? 기대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건 아이돌과 관련된 일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장하양은 이 일에 전심전력으로 뛰어들고 있다.
‘나는 왜…….’
지금껏 장하양이 해왔던 건 성필이 잡아준 일이고, 성필이 좋은 결과를 내길 기대했던 일이었다.
성필의 꿈이 장하양의 꿈이기에, 그렇게 살아가기로 결심했기에.
장하양은 어떤 고통도 감내할 수 있었다. 또한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우악스럽게 전진할 수 있었다.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이 일은…….
‘그저 우연히 잡은 기회. 박 이사님조차 기대를 걸고 있지 않은, 아이돌과는 관련 없는 세계의 일인데…….’
장하양의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몸이 멋대로 움직인다.
생각을 그만하라고 본능이 소리친다.
‘다시.’
장하양은 양 손바닥을 바깥으로 보이며 얼굴을 가렸다.
‘더 고유하게.’
그녀가 꽃이 피어나는 것을 형상화하듯 손을 좌우로 벌렸다.
‘더 엣지(Edge)있게.’
손바닥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눈엔 신선한 꽃잎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포즈.’
안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간단한 동작.
거기서 장하양은 이해 못 할 만족감을 얻었다. 가슴 속에 청량하고 시원한 파도가 몰아친다.
그리고.
“으아아아!”
장하양은 바닥에 드러누워 아기처럼 뒹굴뒹굴 굴렀다.
그녀는 연습실을 몸으로 청소라도 할 것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더니, 벽에 부딪히곤 몸을 축 늘어뜨렸다.
“축제 가고 싶었어……. 이사님이 먼저 권유해주신 건데에…….”
얼굴을 가리고 발을 동동 구르던 장하양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거울로 다가갔다.
‘다시, 포즈.’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성필을 찾으러 온 세이코였다.
문에 난 유리로 눈만 빼꼼 내밀어 들여다보던 세이코가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저 여자, 미친 게 분명해!’
세이코의 판단은 은근히 객관적이었다.
그렇게, 장하양의 하루가 또 저물어갔다.
* * *
성필과 리카는 축제를 즐기겠단 목적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손혜빈과 유우토를 추적하는 것에 바빴다.
함께 금붕어 잡이를 하는 둘을 바라보면서, 리카가 이를 갈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가, 감히 내 동생을! 손 이사님이라도 용서 못 해!”
“……리카, 아직 정해진 것도 아닌데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야?”
손혜빈이 성필의 병문안을 왔을 때, 그녀는 일본에 체류하는 이유가 신인개발팀 업무라고 했었다.
“설마 정말 누나가 유우토한테 무슨 마음이 있어서 저러겠어? 역으로 유우토가 마음이 있을 수도 있고.”
“하이(네), 그게 문제예요.”
“뭐가?”
“유우토 또래의 남자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민경섭 매니저님…….”
리카가 도리질했다.
“민 팀장님이 그러셨어요! 말하자면 유우쨩은 아픈 거예요!”
“사춘기를 그렇게 표현하면 어떡해.”
“손 이사님은 아픈 애를 이용하는 거라구요!”
리카는 남동생이 띠동갑 이상의 어른에게 노려지는 것에 상당한 위기감을 가진 듯했다.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는데도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진다.
‘그런데 동생 일에 왜 이렇게 신경 쓰지?’
남매일지라도 각자의 인생이 있는 것 아닌가. 서로 존중해주면서 받아들이면 안 되나?
성필은 이해하기가 힘들어서, 신아름이 띠동갑의 남자에게 작업 걸리는 상상을 해보았다.
‘죽, 인, 다.’
이해 완료.
“아무튼, 리카 너 과하게 걱정하는 거야. 그냥 둘은 내버려 두고, 우리는 우리끼리 놀자. 누나는 아마 유우토를 연습생으로 들이려고 설득하는 걸 거야.”
“……그럴까요?”
그때 유우토가 금붕어를 한 마리 잡았다.
손혜빈이 뿌듯해하면서 유우토의 목덜미를 주물러주었다. 격려와 칭찬의 뜻이 담긴 제스처였다.
유우토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것을 본 리카가 이상을 잃었다.
“저 너구리가……!”
리카가 달려 나가다가 뚝 멈춰 섰다.
분명 성필이 잡아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 때문이다.
뒤를 보니 성필도 충격받은 듯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누나, 40살 넘으면 결혼하기로 한 거 다 거짓말이었어? 나 데려가기로 했으면서……!”
“순애보가 너무 긴데요?! 이제 이사님도 제 마음을 이해하셨죠!”
“……그래도.”
성필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끼어들 각은 안 보인다. 내가 나중에 따로 누나한테 물어볼게.”
“저걸 그냥 둔다구요?! 잘못하면 오늘 유우쨩이 어른의 계단을 넘게 생겼어요! 아타시(저)보다 먼저요! 그건 용서 못 해요!”
그걸 용서 못 하는 거였나…….
아무튼 성필은 두 사람의 관계가 친밀하게 보이는 걸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손혜빈 정도의 친화력이라면 단기간에 저렇게 되는 게 당연하다.
‘나도 옛날에 유우토 같은 시절이 있었지.’
손혜빈은 같이 지내는 사람들한테 굉장히 친절하다. 그 친절을 관심이라고 오해한 경험이, 성필에게도 있었다.
‘때마침 좋은 기회네.’
성필은 이 기회로 리카에게 어느 사실을 가르쳐주려고 결심했다.
“리카, 네가 가족이라서 과민반응하는 거야.”
“아타시(제)가요? 이의를 제기합니다!”
성필이 팔을 내밀었다.
“부축해줄래?”
“에, 드디어 목발 리카를 버리고 진짜 리카를 택하신 건가요? 후후, 좋아요! 그깟 나무랑 금속 덩어리보다 제가 훨씬 낫다구요!”
리카가 거리낌 없이 성필과 팔짱을 꼈다.
“봐봐, 아무것도 아니지?”
“에? 뭐가 말인가요?”
“우리 팔짱 꼈잖아. 유우토랑 누나도 그런 거야. 알겠지?”
리카는 눈을 크게 뜨고, 이어진 자신과 성필의 팔을 바라보았다.
곧 그녀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저, 드디어 이해했어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리카가 유우토와 자신의 팔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랑 이사님의 관계가 이상하게 보이는 거네요! 지금까지는 저희의 각별한 친구 사이를 음해하는 걸로 생각했는데!”
“연습생 때부터 말했는데 그걸 이제 깨달았어?”
“과연, 그렇군요…….”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던 리카가 성필을 흘끗 곁눈질했다.
왜 그러는지 몰라 성필이 멀뚱히 있던 순간, 갑자기 리카가 그의 반대 손에 들려 있던 목발을 뺏었다.
“앗, 나의 리카쨩이!”
“결심했어요! 박 이사님과 저의 관계는 오히려 과시되어야 해요! 순수하지 못한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풍파에 맞서 싸워야 해요!”
“내 리카쨩을 돌려줘!”
“그래요, 이건 제2의 68혁명, 인식의 혁명이에요! 진정으로 세계를 바꿀 세 번째 혁명을 시작하는 거예요!”
리카는 성필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팔짱이 마치 사슬과 같아서, 성필은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박 이사님의 말씀이 옳아요! 유우쨩과 손 이사님도 분명 그런 거겠죠! 자, 그럼 저희도 질 수 없어요!”
리카가 성필을 끌고 갔다.
언뜻 보기엔 거칠지만, 리카는 성필을 배려하여 그의 걸음을 맞춰주고 있었다.
“혁명은 오늘부터 시작이에요!”
성필은 불안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리카가 변장을 했다지만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걱정되어서였다.
하지만 이율배반적이게도, 성필은 두근거리는 설렘을 맛보았다.
옛날에 어느 친구가 익스트림 스포츠를 같이 하자며 억지로 성필을 끌고 갔을 때처럼.
걱정되고 또한 새로운 경험을 한단 생각에 두근거리는 기분.
“뭐 먼저 해볼까요?”
자신을 지탱하는 아이, 아니.
친구의 미소에 성필도 미소로 답해주었다.
“솜사탕 먹고 싶어.”
“그럼 박 이사님 지갑은 제가 맡아둘게요!”
“언제 가져갔어?!”
“오늘은 아타시(제)가 쏘니까 맘껏 드세요!”
“내 지갑 돌려줘!”
목발과 지갑을 동시에 뺏긴 성필은 울상을 지었다.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손혜빈과 유우토를 곁눈질했다.
둘은 등을 돌려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유우토의 어깨가 쳐져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옆의 손혜빈은 의지와 영감이 가득하여 유우토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 * *
“유우토.”
손혜빈이 부르자 유우토가 움찔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거지? 네가 일본에서 가수를 준비하는 거나 댄스 학원에 다니는 건, 그냥 젊을 때의 치기라고.”
“네, 네……. 해볼 수 있으니까, 그냥 도전해보는 거요…….”
“으음, 서클 활동으로 전국 대회에 도전하는 그런 느낌?”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미래에 좋은 추억거리로 남을 만한 도전.
유우토가 댄스 학원에 다니고 밴드부를 하며 가수가 될 연습을 하는 건, 결국 그 정도 의미다.
“그럼, 유우토는 그게 아니면 뭘 할 거야?”
“뭘 할 거냐고요……?”
“현실적인 길을 말하는 거야. 유우쨩의 마음이 가장 기울어져 있는 곳.”
“그야 뭐…….”
유우토는 실없이 웃으면서 말했다.
“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대기업을 노리거나, 변호사도 해보면 좋겠고, 의사라거나…….”
공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유우토는 선택의 폭이 넓었다.
현재의 성적보다 조금만 더 나아갈 수 있다면, 그는 원하는 과를 골라서 가는 게 가능했다.
“오오, 유우쨩 예상은 했는데 정말 대단하네.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게 쉽지가 않은데 말야. 대기업 사원, 의사, 변호사, 다 멋져.”
유우토는 칭찬을 받자, 은근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공부에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으니까. 돌아오는 칭찬이 기쁘지 않을 리 없다.
“그런데.”
갑자기 손혜빈의 목소리가 돌변했다.
걸음도 멈추었다.
어느새 둘은 축제 거리에서 벗어나 있었다.
고요함을 배경으로, 유우토의 눈에는 손혜빈만이 들어왔다.
“1등을 노려본 적 있어, 유우쨩?”
“1등……?”
“공부로 1등.”
“학교에선…….”
“학교가 아니야. 전국에서.”
노려본 적 없다.
전국 모의고사 1등?
유우토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적이 없다.
“유우쨩은 2만 등. 1만 등. 5,000등. 1,000등. 그 정도에서 만족하고 있을 거야. 물론 그것도 대단해. 상위 1% 안이란 건 어느 분야에서든 대단한 거야. 그런데, 조금 속 쓰리지 않아?”
“네……?”
손혜빈이 유우토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자신의 얼굴 가까이 이끌었다.
유우토는 갑자기 손혜빈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우자 심장이 북처럼 쾅쾅 울렸다.
하지만, 그보다 손혜빈의 눈에 아른거리는 불꽃이 더 눈에 띄었다.
그 불꽃은 유우토의 가장 소중한 소망을 막고 있던 현실의 벽을 불태우는 것만 같았다.
“1등을 한 번도 꿈꿔본 적 없는 삶이란 건, 어쩐지 허무하잖아.”
“…….”
“아이돌을 시작하면 1등을 꿈꾸게 해줄게.”
심장을 두르고 있던 차가운 금속의 벽.
현실이 제멋대로 지어둔 벽이.
“전국에서 1등이 아니라, 세계에서 1등을.”
무너졌다.
“처음으로 꿈꾸게 해줄게.”
그리고.
“이뤄줄게.”
그러니.
“가로 엔터로 와.”
손혜빈의 눈에 떠오른 불꽃이 그대로 유우토의 망막에 비쳤다.
“아이돌이 돼라, 유우토(勇人).”
* * *
나날이 얼굴에 찌든 피로가 늘어만 가는 타츠야다. 며칠 새에 아예 딴사람이 된 듯해서, 성필은 그녀를 보자마자 놀랐었다.
“하아양은 잠시 밖에서 기다려.”
“네.”
장하양은 집무실 한편의 회의 공간에서 기다리고, 성필과 타츠야만이 어느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어둠이 반겨주었다.
“조명 켠다.”
밝아졌다.
타원형으로 내려오는 빛 아래에 옷이 있었다.
아니, 바다가 있었다.
성필은 그 옷을 바다라고 느꼈다.
‘바다……?’
옷은 검은색이었다. 웃기지만, 성필은 끝을 모를 검은 빛으로부터 바다를 연상했다.
더 가까이 다가갔다.
시스루 재질의 원단이 옷을 입은 마네킹의 무기질 피부를 비추었다.
시스루 드레스.
한 올 한 올 정교하게 원형으로 꼬인 실이 옷을 이루었다. 도저히 기계로 만들었단 생각이 들지 않는, 장인의 손길이 뻗친 원단이었다.
옷을 이룬 천은 간단하면서 정교했다.
성필의 눈이 위에서 아래로 향했다.
얇게 일렁이는 천의 파도는 가슴에 이르러 주름이 잡혀, 훤히 보여주던 것을 갑작스레 감추었다.
가슴 부근에서 거세게 몰아쳤던 파도는 배에 이르러선 잠잠해졌다가, 골반에서 높이 솟아올라 소용돌이쳤다.
시스루, 드레스.
옷으로 형상화한 검은 바다였다.
“합격이군.”
타츠야가 말했다.
그녀는 성필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뚜렷한 빛을 토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의 눈빛 안에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장하양이 들어섰다.
그는 이 옷을 입은 장하양을 매우 뚜렷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상상만으로도 프로듀서, 예술가는 황홀해진 것이다.
타츠야는 그것을 알았다.
“합격이요?”
성필이 멍한 투로 말했다.
“제 판단이 중요했나요?”
“당신은 누구보다 하아양의 매력을 먼저 알아낸 사람이야. 그리고 누구보다 오래 그 아우라를 살려왔겠지. 당신의 판단이 필요했냐고? 적어도 건물 안전 점검 수준으로는 필요했지.”
일부러 장하양을 배제하고 성필에게 먼저 이 옷을 보여주었다.
모델이 곁에 있으면, 그녀를 만족시키려 괜한 만족감을 꾸며낼 수도 있으니까.
“하아양.”
타츠야가 부르자 장하양도 의상실로 와서 드레스를 보았다.
장하양은 옷이 시스루 재질인 것을 보곤 흠칫했지만, 전체적인 구조를 확인하곤 납득했다.
그녀는 홀린 듯이 옷의 끝자락을 매만졌다.
“입어봐도 되나요?”
장하양은 살면서 처음으로 옷에 홀렸다.
옷가게나 백화점에 가도 시큰둥하기만 했었다. 아무리 커다랗게 광고하고 예쁜 모델이 입은 사진이 걸려 있어도, 그것을 입은 자신을 상상하지 않았다.
옷이란 적당히 꾸미는 정도면 되는 물건이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거 때문에 아름이한테도 여러 소리 들었었는데.’
타츠야의 옷은 달랐다.
장하양은 처음으로 옷에 대해 소유 욕구를 느꼈다.
흔히 사람들이 가게에서 어느 옷을 보면 ‘내 거다’란 생각을 하곤 한다. 마치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처럼.
현재 장하양의 기분이 그것과 같았다.
빨리 입어보고 싶었다.
“당연히 입어봐야지.”
타츠야가 명품임이 분명한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답했다.
타츠야는 초조한 투로 장하양을 탈의실로 안내했다. 그녀 본인이 장하양의 착장을 도와주려는 것이다.
“하아양.”
집무실 구석에 커튼 형식으로 배치된 탈의실에서, 예상보다 훨씬 선명하게 타츠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성필은 흠칫 놀랐다.
두꺼운 커튼은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으나, 탈의실에서 목소리가 다이렉트로 꽂힌단 게 묘한 감정을 자극했다.
“네.”
“나는 그런 옷을 꿈꿔. 사람들이 볼 때 옷에 놀라는 게 아니라 사람을 보고 놀라는 옷.”
“죄송한데, 이해가 잘…….”
“인간 그 자체를 보여주는 옷을 말하는 거야. 옛날 동화에도 있잖아, 착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옷. 발가벗은 거나 다름없지만, 그렇기에 인간을 드러내는 거지.”
“옷이란 걸 인식하지도 못하는…….”
끈을 조이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하게도, 불가능하지. 옷은 투명하지 않으니까. 불가능한 꿈이야.”
“꿈이요?”
“그래, 꿈. 모든 예술은, 테크닉은 극에 이르면 개념으로 갈 수밖에 없어. 춤, 노래, 디자인, 테크닉을 넘어서서 사상과 철학을 반영하고 싶어지지.”
“…….”
“이해가 안 되나?”
천이 장하양의 몸을 스륵스륵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뇨, 대강은 이해가 돼요. 제 그룹에도 아라라고, 춤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던 멤버가 있거든요. 뭔가…… 사람의 생각을 부수는 춤? 아라는 새로운 춤이라는 의미로 한 거 같긴 한데요. 굉장히 거창했어요.”
“실력이 뛰어난가 보네. 테크닉에 매진하는 걸 넘어서 더 위를 보는 거니.”
타츠야의 손가락이 장하양의 피부를 덮은 천을 더듬는 소리가 퍼졌다.
“이사도라 던컨이란 댄서를 예로 들었었어요. 아세요?”
“알지. 최초의 창작 무용가. 창작 무용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인간. 여자의 몸엔 죄악이 배어 있다, 란 기독교적 세계관을 박살 낸 댄서지.”
타츠야가 옅게 웃었다.
“그 사람에겐 나도 감사하고 있어. 던컨이 없었으면 요즘 나오는 여자 수영복 같은 것도 없었겠지 아마. 죄다 발레 타이즈처럼 생겨 먹었을 거야. 그런데 그 아라란 친구, 목표가 굉장히 높네.”
커튼이 걷혔다.
“나도 거기까진 못 닿을 거 같은데.”
검은 바다를 휘감은 장하양이 성필의 눈에 잡혔다.
그리고 성필은, 타츠야가 이야기했던 인간 자체를 드러내는 옷이란 개념을 이해하게 됐다.
이 옷이 주는 감동을 명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성필은 설명을 대신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 이사님?”
성필의 눈에서 작은 방울이 흘렀다.
그는 절벽 위에서 거친 바다를 대면한 인간이었다. 자연이 주는 무한한 숭고함과 거대함, 인간이 대적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체험한다.
장하양은 검게 소용돌이치는 바다였다.
인간의 몸과 옷만으로 자연을 구현해냈다.
“조금은 닿았을까.”
그 순간만큼은, 타츠야도 피곤을 지우고 해맑게 웃었다.
하이패션.
디자이너의 사상과 철학이 드러나는 옷.
팔기 위한 옷이 아닌, 존재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옷.
“이게 ‘후쿠요 히다카’다. 그리고…….”
타츠야가 장하양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패션쇼에선, 하아양이 ‘후쿠요 히다카’인 거야.”
후쿠요 히다카 Fall/Winter 시즌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컬렉션 7번.
복명(服名), 검은 바다.
모델, 장하양.
“내 디자이너팀이 하아양을 평가했던 걸 들려준 적 있었지. 한 녀석이 ‘룩이 옷을 잡아먹을 거다’라고 했었는데.”
타츠야가 성필에게 물었다.
“당신이 보기엔 어떻지? 하아양의 룩이 옷을 잡아먹나? 아니면 옷이 룩을 압도하나?”
성필은 영감이 가득한 눈빛을 띤 채 입을 막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면서 간결히 답했다.
“옷이 하양이의 룩(Look) 자체예요.”
그야말로 오트 쿠튀르.
장하양의 맞춤복이다.
“그렇군.”
미래의 그랑드 쿠튀리에르가 만족스레 웃었다.
장하양은 두 사람의 반응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거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거울 안에 있는 건 생소한 자신.
동시에 의심할 나위 없는 자기 자신이었다.
‘나는 이 모습으로…….’
나흘 후, 진소유와 나란히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