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19화 (319/760)

319화

여성 속옷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브랜드인 빅토리아 시크릿이나 백화점에 입점한 브랜드 등, 상업 광고에 모델로 쓰이는 이들을 향한 업계인의 평가는 이러하다.

‘말 그대로, 예쁘다.’

상업 광고 모델은 여자들이 선망하며 남자들이 좋아할 외모가 필수적이다.

누구나가 가지고 싶어 하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지는 못한, 아름다움 말이다.

하지만 업계인들은 또 말한다.

‘예쁘면, 그저 예쁜 사람 중 한 명.’

상업 광고 모델에겐 고유성이 없다.

애초에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할 외모만 고르니 당연하다.

아름답단 건 인정해도, 아름다움 이상의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방가르드 패션이 원하는 건 대체불가능한, 고유한 아우라다.

그리고 대중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아이돌이 이런 아우라를 갖출 수는 없다. 아이돌도 상업 광고 모델처럼 그저 예쁠 뿐일 테니까.

하지만.

“아름다운 것도…….”

어느 디자이너는 장하양을 바라보는데 집중한 나머지, 그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삼킨 말은 ‘아름다움도 극에 달하면 고유성이 된다’였을 것이다.

“성필.”

타츠야가 포옹으로 성필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성필은 예상치 못한 환대에 놀랐지만, 곧 평정과 함께 마주 포옹했다.

“잘 왔어. 하아양도.”

타츠야는 장하양과도 포옹했다.

그러곤, 뒤에서 눈만 크게 뜨고 있는 아토무에게 두 사람을 소개해주었다.

“이리에 아토무예요. 오늘은 잘 부탁해요.”

악수와 함께 나오는 아토무의 젠틀한 말투에 타츠야가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저쪽으로 가면 스태프가 오늘 입어야 할 옷 줄 거야. 하아양은 거기서 옷 갈아입고 돌아오면 돼.”

“네.”

장하양이 떠나가자 성필은 자그마한 걱정을 담아 타츠야에게 질문했다.

“혹시 하양이가 입을 의상 디자인이 나왔을까요?”

성필은 인터넷으로 하이패션을 접해왔다.

괴상하게만 보이는 하이패션은 커뮤니티에 올라와 대중의 조리돌림을 당하기 딱 좋았다.

물론 성필도 패션을 모르는 대중 중 하나로, 하이패션을 난해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하양에게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옷이 주어지지 않을까 걱정됐다.

“아직은 시안만 있어. 기본적인 형태는 드레스일 거 같아. 하아양을 보니까 떠오르더라고. 왜, 내가 이상한 거라도 입힐까 봐 걱정인가?”

“설마요. 궁금해서 그러죠.”

정곡을 찔렸지만 모른 척했다.

그때 스튜디오가 소란스러워졌다.

입구를 보니 진소유가 매니저와 함께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녀의 외모는 장하양과 마찬가지로 스태프들 사이에서 격한 반응을 자아냈다.

“한국 아이돌은 다 저런 건가?”

아토무 또한 실물로 진소유를 보는 게 처음이었다.

안 그래도 장하양을 보고 놀랐는데, 진소유까지 2연타로 들어오니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었다.

“둘이 특출한 거예요.”

“……하긴, 저런 사람이 그룹을 만들 정도로 넘치진 않겠죠.”

아토무는 진정하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곤, 쾌활함을 가장하곤 진소유에게 다가갔다.

둘은 후쿠요 히다카의 디자이너와 앰배서더로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당신.”

타츠야가 진소유에게 정신이 팔렸던 성필을 짧게 불렀다.

“네?”

“지금은 시안이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옷을 직접 만드는 단계에 접어들 거야. 그때 내 작업실로 와서 도움 좀 줄 수 있을까?”

“제가 도움을 드릴 게 있을까요?”

“당신은 이 업계에서 누구보다 하아양을 오래 본 사람이니까. 하아양의 프로듀서고. 내 옷을 보고 설명을 들으면 느끼는 게 있을 거야.”

“부담되네요.”

“사소한 의견이라도 좋아. ……의견이 아니군.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건 사고(思考)가 아니라 감정이야.”

옷을 보자마자 느끼는 직관. 그게 타츠야가 성필에게 바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성필은 웨벡스에선 업무도 그다지 없는 터라 선선히 수긍했다.

“박성필 이사님.”

아토무와 대화를 끝낸 진소유가 자연스럽게 성필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소유 씨.”

“네. 하양이는 어디 갔나요?”

“하양이는…….”

스튜디오 내부 간이 탈의실의 문이 열리고 장하양이 등장했다.

그녀를 본 성필과 진소유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뜨였다.

“이사님, 하하, 이거…….”

장하양은 검은색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었다.

몸의 라인에 달라붙고 발목에 이르러 바다처럼 퍼지는 그 드레스는, 결혼식장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물건이었다.

장하양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기도 하고, 너무 잘 어울리고, 너무 예뻐서, 성필과 진소유는 넋을 놓아버렸다.

“어울리나요? 이런 옷은 결혼식 때나 입을 줄 알았는데.”

타츠야 선생님, 감사합니다.

당신이 진정한 미래의 그랑드 쿠튀리에르입니다. 감히 누가 반박할 수 있겠습니까?

패션계의 미래를 이끌 진정한 단 하나의 인재.

마하라 타츠야.

“하양아 너어무 예쁘다.”

진소유는 아까보다 텐션이 몇 배는 올라가서 장하양의 주위를 돌아다녔다.

“만져봐도 돼?”

“안 돼요.”

진소유의 간곡한 청을 물리친 장하양은 다시금 성필에게 답을 요구했다.

성필에게 다른 할 말이 있을까?

“예쁘다.”

“아하하.”

“그리고 아쉽네.”

“……네?”

“앞으로 하양이 네가 이런 옷 입은 모습은 몇 년 뒤에나 다시 볼 수 있을 거 아니야.”

결혼식장에서 말이다.

아마 장하양이 결혼식을 올리면, 성필은 하객석에서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홍수처럼 흘리지 않을까 싶다.

만약 그녀가 원한다면 아버지 역으로 같이 손을 잡고 신랑에게까지 걸어가 주고 싶다.

“오늘은 하양이한테 눈 떼면 안 되겠다.”

“그렇게 좋으세요?”

장하양은 자신의 드레스 차림을 이리저리 내려다보았다.

코스프레라도 한 기분이 아닐까.

“마하라 씨, 하양이한테 이 옷 직접 골라주신 건가요? 정말 잘 어울려요. 역시 디자이…….”

“그냥 창고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가져온 거야.”

“네?”

“내가 만들 옷이랑 비슷한 윤곽을 가진 옷으로. 딱히 어울리고 말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어.”

“아…… 역시 디자이너시네요! 아무렇게나 집은 옷도 모델한테 딱 어울려요!”

“당신 내 말 안 듣고 있지?”

이어서 진소유도 아토무가 준비한 옷을 입고 스튜디오로 나타났다.

재킷의 기장을 늘려 원피스처럼 만든 언밸런스 타입의 미니 원피스였다.

아토무는 타츠야와 마찬가지로 진소유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고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토무는 그 차림만으로도 진소유를 만족스레 보았다.

“하양아, 나 어때?”

“예쁘세요.”

“감정이 너무 없는 거 아니야?”

“정말 예쁘세요.”

“엎드려 절받기지만 기쁘긴 하네.”

착장을 마친 두 모델은 촬영을 준비했다.

일본의 패션 제국이란 명칭에 걸맞게, ‘후쿠요 히다카’ 측은 일류 포토그래퍼를 준비해주었다.

타츠야가 설명했다.

“저 사람 화보에 한 번 등장하려고 줄 선 모델이 수백 명이야.”

“그런 분을 시험 촬영 사진가로 부르신 거예요?”

“최대한의 매력을 포착해야 하니까. 우리가 못 보고 넘기는 이미지를, 저 사람은 순간이나마 캐치할 수 있어.”

뭐, 그것보다는.

“패션쇼는 패션 기업 최대의 행사야. 브랜드의 차후 6개월이 패션쇼에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 괜히 돈을 아끼면 안 되지. 모든 분야에 최고가 필요해.”

촬영은 원활하지 않았다.

일류 포토그래퍼이기 때문일까, 그녀는 장하양을 몰아붙이는 것처럼 촬영에 임했다.

“아니, 거기서 더 시선을 강하게! 눈만 부릅뜨지 말고! 그러니까, 시선을 강하게 하란 건……!”

보고 있는 성필이 다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카메라 앞에 선 장하양의 얼굴은 평정을 유지했지만, 마음은 그러지 못할 것이다.

성필이 자식의 운동회를 지켜보는 부모처럼 조마조마한 티를 내자, 옆에 있던 타츠야가 말했다.

“저 사람, 그래도 평소보단 유한 편이야.”

“평소엔 어떻길래…….”

“평소 촬영은 다 자기 돈으로 진행하니까 신경이 훨씬 날카롭거든. 그렇잖아, 몇십몇백만 엔을 써서 세트랑 스태프 다 갖춰놨더니 모델이 안 따라와 주면 얼마나 화나겠어. 그대로 허공에 돈 날리는 건데.”

그에 비해, 오늘 저 포토그래퍼는 ‘후쿠요 히다카’ 측으로부터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이다.

덜 날카롭다고 프로 정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평소보다 유해지는 게 당연했다.

그 유하단 게, 성필이 보기엔 지독한 고문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어떻게, 더 해볼까?”

촬영이 한두 시간 정도 이어졌을 때쯤, 포토그래퍼는 타츠야에게 그리 물었다.

타츠야는 작업물을 확인하곤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그만해도 되겠어.”

“좋아, 30분 쉴게. 다들 괜찮죠?”

휴식이 선언되자마자, 장하양은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 스튜디오 외곽의 의자에 앉았다.

성필은 그녀에게 물을 주면서 땀이 식도록 열심히 부채질했다.

“하양아 고생했어. 많이 힘들었지?”

“아니에요. 재밌었어요. 그런데, 제가 갔던 화보 현장들이랑은 다르네요.”

소녀연맹은 일본의 여러 잡지에 인터뷰와 화보를 실었다.

촬영 현장 경험이 많다면 많은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 장하양은 꽤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촬영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처럼은 되지 않았다.

“다른 곳에선 이렇게 몰아붙여지진 않았는데. 역시 패션 회사라서 그런가 뭔가 다르네요.”

“그러게.”

성필은 뜨거운 현장의 분위기를 눈에 담았다.

테이블에 다리를 꼬고 앉아 팀원들과 상의하는 타츠야는 물론, 이 자리의 전원이 최고란 결과를 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장하양의 말마따나, 이전에 겪었던 현장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소유 씨 촬영 시작합니다!”

30분 휴식이 끝나고 스튜디오는 다시 불꽃이 붙었다.

장하양과 성필도 진소유의 촬영을 더욱 가까이서 보기 위해 다가갔다.

“후우.”

포토그래퍼는 30분을 쉬고도 지치는지 한숨을 푹 뱉었다.

조명의 열기로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팔뚝으로 닦은 뒤, 그녀가 일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그럼 갑니다. 시…….”

시작, 이라고 외치기도 전에 진소유가 포즈를 잡았다.

포토그래퍼는 진소유의 포즈를 보곤 한동안 말없이 카메라 셔터만 눌러댔다.

진소유는 계속해서 포즈를 바꾸었다.

침묵 속에서 시간이 5분쯤 지나자, 포토그래퍼는 자신이 디렉션을 한 번도 주지 않았단 사실을 깨달았다.

“미, 미소. 환희…….”

그 단어만 듣고도 진소유는 포토그래퍼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냈다.

진소유는 막 바닷가에서 놀이를 마치고 모래사장으로 올라오는 사람 같았다.

온몸을 시원한 바다가 휘감고 있어 기분이 좋고, 또한 따스한 햇볕이 몸을 말리는 나른함에 취한 듯한 모습이었다.

“…….”

포토그래퍼는 묵묵히 셔터를 눌렀다.

‘베테랑 모델 같아.’

진소유는 조명의 각도, 그림자가 지는 범위, 포토그래퍼의 눈이 향하는 곳, 카메라의 앵글, 렌즈에 의해 왜곡되는 자신의 상(象)을 전부 머릿속에 넣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계산적인 것일까?

‘아니야.’

포토그래퍼는 아닐 거라고 믿었다.

그것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화보 모델로 수년, 수십 년을 살아야만 한다.

데뷔한 지 이제 겨우 2년 차인 아이돌이 그만한 노하우를 손에 넣기란 불가능하다.

즉, 진소유는 직감에 따르는 것이다.

‘다 알고 있어. 자신의 몸에 그림자는 어떻게 내려오는지, 몸의 라인은 어떻게 해야 가장 뚜렷해지는지. 전부 알고 있어.’

마치 매일 거울만 몇 시간이나 바라본 사람처럼. 진소유는 몸이 빛과 시선으로 받는 영향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디렉션이 없어도, 카메라에 비칠 자신의 매력을 이토록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 베테랑 모델이란 말이 딱 맞아.’

경험이 본능으로 이어지는 경지.

사진이란 셔터 한 번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세계이다.

화보 모델은 셔터 한 번의 그 순간, 찰나의 시간 속에서 완벽에 이르러야 한다.

아주 사소한 실수 한 번조차 용납되지 않는 일. 그렇기에 자연스레 모두의 신경이 잘 벼린 칼처럼 서늘해질 수밖에 없는 업계.

그러나 그 서늘한 분위기 속, 오직 완벽만을 연출하는 모델들도 있다.

베테랑, 혹은 천재…….

“끝.”

포토그래퍼가 카메라를 놓았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끝이에요.”

촬영이 겨우 10분을 지났을 때였다.

이의를 제기하는 스태프는 없었다.

고용주나 마찬가지인 이리에 아토무도 납득했다. 이 이상의 촬영은 무의미하다.

‘뭐야.’

감탄 섞인 정적 속에는, 성필의 침묵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빨리?’

믿기가 힘들 지경이다.

장하양을 2시간이나 몰아붙였던 게 짓궂은 장난이 아니었나 싶을 만큼, 진소유의 촬영은 매우 단시간 내에 끝났다.

당연히, 성필은 그 이유를 이해한다.

진소유의 물 흐르는 듯한 포징은, 사진에 대해 잘 모르는 성필이 보아도 대단한 것이었으니까.

“이쪽으로.”

이제 촬영 시간은 끝났다.

타츠야와 아토무는 각자의 모델과 팀을 이끌고 스튜디오를 나섰다.

성필은 급히 타츠야를 따라잡아 물었다.

“어디 가는 겁니까?”

“내 집무실. 거기서 해야 할 게 더 많아.”

타츠야는 집무실로 향하면서도, 방금 포토그래퍼에게 전송받은 장하양의 사진을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사람의 키보다 1.5배는 높은 거대한 문.

비서가 타츠야를 앞서서 문을 열었다.

성필은 시야를 메운 집무실의 풍경에 순간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크다.’

이게 정말 홀로 쓰는 방인가 싶다.

그나마 좁은 성필의 식견으로 비교할 만한 공간은, 미디어에서 보던 대통령 집무실 정도였다.

널찍한 공간의 한쪽에는 기다란 탁상이, 다른 한쪽에는 여유롭게 배치된 소파가, 또 다른 곳에는 원단을 수십 종류나 재워둔 선반, 그리도 또 설명하지 못할 만큼 많은 물건이 있다.

“자아, 하아양.”

타츠야는 익숙한 듯 원목 테이블 위에 걸터앉곤, 피곤한 기색으로 손바닥을 마사지했다.

“먼저 물을게. 남자들이 네 몸을 보는 것에 거부감이 있나?”

장하양은 타츠야를 둘러싼 디자이너 팀 중 남자들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어느 정도로…….”

“속옷 차림. 보통 바디 모델들은 그렇게 입고서 작업하니.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아도 이해해. 하아양은 모델이 아니니까.”

모델이 아니다.

그건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장하양은 은근히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다.

평소라면 느끼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쩌면 방금 진소유의 묘기 같은 촬영을 봤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이 과정이 패션쇼에 영향을 미친다면, 부족함을 만들고 싶진 않아.’

부족함을 만들고 싶진 않지만…….

장하양은 성필을 흘끗하곤, 자그맣게 말했다.

“남자분들한테 보이는 건 좀…….”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당연한 거니까.”

타츠야가 손가락을 튕기며 주변에 말했다.

“미안하지만 남자들은 다 나가줘. 간이 커튼 안쪽에 설치하고.”

남자 디자이너들이 방을 나섰다. 멀뚱멀뚱 서 있던 성필 또한 그들을 따라갔다.

나가기 전, 성필은 장하양과 눈을 마주하고 입 모양으로 ‘파이팅’이라고 말해주었다.

장하양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저기…….”

성필은 함께 나온 남자 디자이너 중 한 명에게 질문했다.

“혹시 보통은 남자 디자이너분들이 있는 걸 신경 안 쓰거나 그러나요?”

오프닝 행사에 등장하는 건 연예인, 즉 유명인들이라고 들었다.

여태껏 후쿠요 히다카의 오프닝에 등장했던 이들도 이와 같은 상황을 겪었을 것이다.

일면식 없는 이성에게 속옷 차림을 보여주는 건 그야 창피하고 꺼림칙한 일이겠지만…….

‘다들 전문가시니까. 의사한테 몸 보이길 거부하는 거랑 비슷한 일 아니었을까.’

이쪽 문화를 잘 모르는 성필로선, 남자 디자이너를 내보내는 게 실례는 아니었을지 걱정했다.

그에 디자이너가 쾌활히 말했다.

“당연히 신경 쓰죠! 특히 연예인분은 더요. 하양 씨가 특이한 게 아니에요.”

“아, 그렇군요.”

다행이다.

성필은 안심하며 복도의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 있자니 묘한 흥분이 감돌았다. 이 얇은 문 너머 속옷 차림의 장하양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소유 씨 대단했었지.’

성필은 소녀연맹 이전에도 화보 현장을 경험한 일이 많았다.

포토그래퍼의 앵글 안에 들어온 아이돌은 포즈를 잡는 데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소유 씨는 굉장히 자연스러웠어.’

심지어 포토그래퍼의 디렉션이 없다시피 했다.

진소유는 사진사의 머릿속에 든 이미지를 완전히 꿰뚫어 본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사진사의 의도를 넘어선 것이다.

‘자기가 어떻게 해야 가장 아름답게 보일지 알고 있는 거겠지…….’

진소유의 활약을 떠올리니 케이어스의 팬으로서 뿌듯함이 생겼다.

하지만 그에 비례하여 실망감, 혹은 불쾌함도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 감정은 케이어스의 팬이 아닌 소녀연맹의 프로듀서로서 느끼는 것이었다.

‘하양이는 후쿠요 히다카의 앰배서더가 못 되겠지. 소유 씨가 있으니까.’

장하양이 진소유보다 떨어진다는 소리는 아니다. 단지, 진소유가 먼저 앰배서더가 되었기 때문에 장하양에겐 기회가 없다.

‘같은 국적, 같은 케이팝 아이돌이라는 지위, 그리고 비슷한 포지션.’

외모는 저마다 개성적인 차이가 있지만, 두 사람은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

후쿠요 히다카 입장에서 이미 진소유가 있는데 장하양은 또 앰배서더로 임명할 이유가 없다.

중복 투자가 될 테니까.

‘그래도, 히무라 실장님이 이번 오프닝 행사로 다른 브랜드들의 앰배서더 제안이 올지도 모른다고 하셨으니까.’

성필은 그걸 위안으로 삼으며, 조용히 장하양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박 이사님, 길어질 텐데 어디 가서 쉬시죠.”

“아니요.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성필은 디자이너들의 권유를 받고도 자리를 고수했다. 웬만하면, 그녀가 일을 끝냈을 때 바로 앞에서 맞아주고 싶었다.

우스운 비유긴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말이다.

‘어쩌면, 하양이가 소유 씨의 촬영을 보고 주눅 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격의 차이, 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다만 소녀연맹 멤버들은 과도하게 케이어스와 자신들을 비교하는 경향이 있다.

혹여나 움츠러들었을지도 모르는 장하양을 위해 뭐라도 해주고 싶은 기분이다.

‘자기가 일하는 동안 쉰 거보다, 일하는 동안 기다려주는 게 더 기쁘겠지.’

그런데 1시간이 지나도 안쪽에선 나올 기미가 안 보였다.

바닥만 차면서 복도를 어슬렁거리던 성필은, 이왕 온 김에 층의 다른 장소도 탐색해보자고 생각했다.

성필은 타츠야의 집무실에서 너무 떨어지진 않고 주변 복도를 돌아다녔다.

‘……왜 소유 씨는 후쿠요 히다카 앰배서더가 되신 걸까.’

하고 많은 브랜드 중에서 왜 하필?

진소유는 ‘하양이가 있어서’라고 답했었다. 대체 그게 무슨 뜻일까.

‘하양이가 있어서, 방해하고 싶어서?’

혹여나 장하양이 앰배서더 직을 얻을지도 모르니, 아예 그게 불가능하게 만들겠단 소리일까?

‘……말도 안 되지.’

진소유에게 그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성필은 자신이 ‘유스’란 것도 잊고 자그마한 분노를 키웠었다.

그녀가 후쿠요 히다카 앰배서더가 되면, 성필이 희망차게 전망했던 장하양의 앰배서더 선정이 매우 곤란해질 테니까.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하양이가 있으니 뭔가 친밀감을 느꼈던 거겠지.’

……그래도 조금 괘씸하다.

다음 케이어스 팬사인회에선 진소유에게 살짝, 아주 사알짝 퉁명스레 굴어야겠다.

그리 생각한 순간 복도 저 멀리서 진소유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성필이 움찔했다.

‘머, 먼저 인사해도 되겠지?’

성필이 슬쩍 손을 들어 올리던 순간.

진소유의 뒤를 따라오는 아토무의 디자이너 팀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걷는 진소유의 주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거나, 수첩에 무언가를 기록하고, 혹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뭐 하는 거야?’

신종 괴롭힘인가?

그리고 거리가 더 가까워졌을 때, 성필은 진소유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워킹.’

진소유는 널찍한 후쿠요 히다카 건물을 배경으로 워킹을 하는 것이다.

마치 이곳이 런웨이 위인 듯이.

진소유는 여러 색과 모양의 천을 핀으로 이은, 직설적으로 말해 누더기를 입고 있었다. 그 때문에 벌어진 천 사이로 속옷처럼 보이는 것이 언뜻언뜻 드러나기도 했다.

디자이너들이 옷의 본판을 만들기 전, 천 조각들만 덧대어 완성본의 대략적인 형태와 색감을 파악하는 방법이다.

‘어떻게…….’

그런데, 어떻게 저런 누더기를 입고도 저렇게나 당당하게 빛날 수가 있을까?

진소유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두려움도 없었다.

넘치는 건 오직 환희.

그녀는 존재 자체로 생의 환희를 표현했다.

또각.

투명한 하이힐의 끝이 바닥을 경쾌하게 내리치고, 조명을 어지럽게 뒤섞여 쏘아냈다.

주인처럼 강렬하고 대담한 빛을.

진소유가 다가올수록 그녀는 더욱 커졌다.

원근에 따라 가까운 물체가 커 보이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진소유의 존재감이 그녀를 거대하게 만들었다.

‘무대 같아.’

성필은 콘서트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받았다.

분명 뒷열에 있어서 아이돌이 면봉보다 작게 보일 텐데, 무대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그들이 바로 앞에 있는 듯 선명한 것처럼.

또각.

청량한 하이힐의 소리와 동시에, 성필은 마침내 진소유의 기세에 잡아먹혔다.

그녀가 자신의 코앞에 있는 듯 느껴진다.

“박성필 이사님.”

이제 보니, 정말 코앞에 있었다.

진소유의 뒤로는 그녀의 워킹이 멈추자 무슨 일인가 싶어 성필을 쳐다보는 디자이너들이 있었다.

그들도 진소유에게 정신이 팔렸다가, 겨우 복도를 가로막은 성필의 존재를 알아챈 것이다.

“너무 뚫어져라 보시네요. 눈빛으로 저를 막으시려고요?”

“아, 아…….”

성필은 뒤늦게 고개를 꾸벅이며 길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진소유는 워킹을 이어가는 대신 성필 쪽으로 몸의 방향을 돌렸다.

“어떠셨어요?”

“어음…….”

성필은 진소유가 걸친 누더기를 살폈다.

그나마 핀으로 고정되어 옷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어떤 모습이 될지 연상할 수 있었다.

아마 이게 아토무가 만들고픈 의상이겠지.

“제가 하이패션은 모르지만, 좋은 옷인 거 같아요. 소유 씨한테 어울려요.”

“옷을 칭찬하고 싶은 게 아니지 않아요?”

진소유가 확신하듯 말했다.

그리고 어서 원래 하려던 말을 하라는 듯,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깊은 눈동자로 성필을 응시했다.

저항할 의지도 없이, 성필이 답했다.

“제가 봤던 워킹 중 최고였어요.”

“박 이사님……?”

성필이 화들짝 놀라 뒤를 보았다.

일을 마쳤는지, 장하양이 있었다.

그녀의 눈은 성필과 진소유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움직일 때마다 수심을 가득 떨어뜨렸다.

“하양아 들었어?”

진소유는 달려드는 꼬마를 상대하는 것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내가…….”

“하양이보다는 못했지만요!”

“……?”

성필은 망설임을 지우려 눈을 지그시 감은 후, 얼핏 열받는 미소를 지었다.

친구는 닮는다더니, 그의 미소는 자신만만한 리카와 소름 돋게 똑같았다.

“이제 확실히 깨달았어요. 최고란 이름은…….”

성필이 무대에 오른 연기자처럼 과장된 제스처로 장하양을 가리켰다.

“하양이한테나 어울려요.”

여유만만했던 진소유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성필은 눈을 부릅뜨며 선언했다.

“설령 런웨이 위라도, 하양이가 훨씬 빛날 거예요!”

박성필, ‘유스’에서 탈퇴합니다.

케이어스의 모두, 지금까지 즐거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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