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남자 에이전트는 미아를 향해 더욱더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패션위크 다가왔다고 흐트러진 거야? 그 꼴로 비하인드에 서면 디자이너들이 잘도 옷을 입혀주겠다!”
“1주 안에 1cm 더 줄일 거예요.”
미아는 짜증 난단 투로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자꾸만 시계를 확인하는 모습이, 장하양과 한 약속을 신경 쓰는 듯했다.
“그래, 줄여야지! 오디션 때랑 다른 몸이 됐으니까! 그러게 내가 굶으랬잖아! 그 모습 네가 통과한 브랜드 스태프들 앞에 보여주면 바로 다른 바디(Body) 찾을 거라고!”
성필은 거기서 또 놀랐다.
거리낌 없이 사람을 보고 ‘바디’라고 표현하는 것에 강렬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인격을 철저히 배제한 그 호칭은, 정육점에 매달린 고기를 보면서 ‘한 근’이라고 부르는 것과 차이가 없었다.
“겨우 1cm는 금방 줄인다고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보내줘요.”
“하아, 너는…….”
모독을 이어가려던 에이전트는 근처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눈치챘다.
그는 성필을 보더니 갑자기 안색을 펴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비록 그는 모델을 관리하는 에이전트이지만, 웨벡스의 은인인 성필을 알아보지 못할 순 없었다.
“저 약속 있다고 했잖아요. 봐요, 데리러 오셨네.”
“뭐, 뭐? 약속이란 게 박 이사…….”
“네. 그럼 이제 가도 되죠? 하루키, 가자.”
미아와 한 칸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 모델, 하루키가 일어나 미아의 뒤를 따랐다.
미아는 성필의 앞에 서자마자 아까의 짜증스러운 태도를 전부 지우고 애교를 입에 담았다.
“죄송해요. 이렇게 직접 오시고, 너무 죄송해요. 어쩌죠?”
“아, 아니에요.”
성필은 아직도 남자 에이전트가 퍼부었던 폭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미아는 신경도 안 쓰는 듯했다.
“이쪽은 하루키, 옛날에 모델로 활동했어요.”
“안녕하세요!”
하루키는 성필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와 악수하면서 성필은 우습게도 그가 굉장히 여성적이라고 생각했다.
목소리에 미묘히 담긴 콧소리와 움직임 하나하나에 들어간 곡선 때문이었다.
“15분 지각이네. 수업 시간을 15분 더 늘릴 수 있을까 하루키 군?”
“에에에, 나도 바쁜데.”
“하루 강의로 2만 엔이나 받아놓고서 그렇게 말하지 마.”
“부우우, 푼돈으로 사람 시간 막 쓰려고 하지 마.”
“불만 있으면 웨벡스에 따져. 아, 죄송합니다 박 이사님. 빨리 가요!”
세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장하양이 있는 연습실로 향했다.
가는 도중, 성필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미아에게 질문했다.
“아까 그분이 한 말씀, 조금 심하지 않았나요? 괜찮으세요?”
“아아, 뭐, 괜찮은 편이죠. 자주 있는 일이라.”
“자주 있는 일이요?!”
성필이 기겁하자, 미아는 그가 이 업계에 문외한이란 사실을 단숨에 캐치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설득으로는 웨벡스의 모델 에이전시 부서를 옹호해줄 수 없을 듯했다.
그래서 본인의 사정을 조금 들려주기로 결심했다. 친구인 장하양의 프로듀서라니까, 이 정도는 괜찮다.
“이쪽에서 흔히 쓰는 말이 있어요. ‘23살이 되기 전에 보그(Vogue) 화보를 찍지 못하면, 앞으로도 영원히 찍을 수 없다’는 거요. 저는 이제 22살이고요.”
미아의 말은, 그녀의 에이전트도 노파심 때문에 조금 강경히 말했단 것이었다.
“보그, 아세요?”
“네. 들어는 봤죠.”
이유이에게 들었던 적이 있다.
전 세계의 패션 업계 사람들이 성전(聖典)처럼 보는 잡지라고 했었다.
이유이의 집에도 이탈리아판, 영국판, 미국판, 프랑스판, 일본판 보그가 수백 권 쌓여 있다던가.
“저도 늙다리가 다 돼서, 회사 쪽도 필사적으로 도와주려고 하죠.”
“느, 늙다리요?”
“미아쨩 불쌍해.”
하루키가 불난 듯 보이는 집에 장작을 때려 부어 넣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토했다.
“나도 20대 초반엔 세상 다 망하는 줄 알았지 뭐야. 젊은 애들이 자꾸 치고 들어오는데 내 몸은 점점 더 늙어가고. 하아, 정말 버티기 어려웠어. 그에 비해 미아쨩은 대단하네. 프레셔 안 받는 거 같아.”
“왜 안 받겠어. 나도 서양 ‘보그’나 ‘데이즈드’, ‘아이디’에 나와서 인생 쭉 펴면 좋겠다. 유명 브랜드 패션쇼도 패션위크마다 수십 개씩 돌고.”
“올해가 마지막 기회네에.”
“죽는다 너.”
성필은 두 모델의 이야기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건 둘째치고, 일단 모델에게 나이가 그렇게 중요한지도 몰랐다.
‘우리나라 예능에는 20대 후반이나 30대 유명 모델도 나오고 해서, 모델은 나이에 영향을 많이 안 받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닌 듯했다.
장하양의 강의는 예정보다 20분 늦게 시작됐다. 예상에 따르면 2시간에서 3시간 정도 강의를 진행할 것이라고 한다.
“잘 부탁해요 하양!”
“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장하양과 하루키가 마주 보면서 인사했다. 그리고 악수나 하겠지 싶었는데, 성필은 기겁했다.
하루키가 갑자기 장하양을 포옹한 것이다.
갑자기 포옹당한 장하양도 영문을 모르겠단 듯 눈만 꿈뻑이고 있었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성필이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의자에서 일어나니, 하루키가 화들짝 놀라면서 장하양에게서 떨어졌다.
“에에, 예?”
“갑자기 왜 하양이를 안아요!”
“이, 인사한 거였는데…… 요……?”
하루키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미아를 힐끔거렸다. 그에 미아가 답했다.
“아이돌한테 포옹으로 인사하면 어떡해. 민감한 부분이라구. 하루키 군이 잘못했어.”
“그, 그런 거야? 죄송합니다…….”
하루키는 장하양과 성필에게 번갈아 인사했다.
과하다 싶을 만큼 허리를 숙이는 모습에, 성필은 머리끝까지 올라왔던 분노도 사라졌다.
하루키에겐 흑심 따위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포옹이란 인사법에, 동양인들이 흔히 가지는 거리낌이 없는 듯했다.
“……터치는 조심해주세요.”
“네, 네에.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양도 미안해요.”
“아니요…….”
성필은 왠지 자신이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찝찝한 기분으로 벽면의 자리로 돌아왔다.
“하루키 군 20대엔 해외에서 오래 활동했었어요. 그때 그쪽 문화에 많이 적응했고 또…….”
미아는 마지막 말은 삼켰다.
“저도 사과드릴게요. 미안해요. 미리 하루키 군한테 일러뒀어야 했는데.”
“아뇨, 문화라고 하니…….”
“실력은 확실해요. 패션위크마다 명품 브랜드 쇼에 뻔질나게 불려 다녔으니까요.”
지금은 시간당 1만 엔 정도 받고 강의를 해주면서 살고 있지만 말이다.
성필은 그것도 충분히 많이 버는 거라고 여겼지만, 미아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일단!”
하루키가 손뼉을 쳤다.
“하이힐로 갈아 신을까요?”
“네.”
장하양이 하이힐로 갈아신자마자 하루키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가 땅을 한 번 크게 차자 자세가 곧게 펴졌다. 마치 그가 서 있는 곳이 런웨이인 것처럼, 빈틈없이 정제된 모습이었다.
“먼저 말씀드릴 게 있는데, 좌절하지 말란 거예요. 재밌는 거 알려드릴까요? 모델이 되고 싶어서 되는 사람은 20% 이하예요. 다들 모델이란 직업에 선택됐어요. 구체적으로는, 캐스팅 매니저가 해보라고 해서 시작한 사람이 80% 이상인 거죠.”
심지어는 뽑힌 지 10일 만에 패션쇼에 오르는 사람도 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가르쳐봤어요. 다들 제 지도를 따라선 그럭저럭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고요. 적어도 모델이라고 부를 수는 있는 수준까지는 올라왔죠. 하양도 그럴 거예요. 먼저!”
하루키가 한쪽 어깨를 올리고 반대쪽 엉덩이를 쭉 뺐다.
“저를 따라 해볼래요?”
장하양이 같은 자세를 취했다.
“어떤 느낌이 드나요?”
“어…… 그냥 어깨가 올라가고 엉덩이 빠졌다, 정도요.”
“바로 그거예요. 제가 오늘 가르쳐드릴 건 이 두 부분이 연결되어 있단 감각이에요. 전혀 다른 두 파트가 몸속에서 이어진 감각, 그걸 알아야 해요. 그 감각이 바로 몸무게고, 그걸 명료하게 깨닫는 게 워킹의 기본이에요.”
하루키는 워킹의 시범을 보였다.
걷는다는 동작은 인간에게 너무 일상적이다. 아기마저도 가르침이 없더라도 저절로 할 수 있게 될 만큼, 걷기는 인간의 본능에 새겨진 동작이다.
그렇기에 ‘걷는다’고 인지하는 사람은 없다.
“모델은 그 ‘걷는다’는 행위를 예술까지 발전시켜야 해요. 보세요.”
그리고 이어진 하루키의 워킹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우아함과 화려함이 배 있었다.
그저 걷는다.
그뿐이지만, 더없이 멋졌다.
“그럼 따라 해볼까요? 명심하세요. 어깨와 엉덩이가 무게로 연결된 감각을.”
장하양은 하루키를 따라서 워킹을 선보였다.
본인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그건 성필이 보기에도 살짝 웃겼다.
“하양! 방금 거울 봤어요?”
“아, 아니요.”
“오른손은 권총 뽑으려는 카우보이처럼 멈춰 있고 목은 뻣뻣하고 엉덩이만 이상하게 좌우로 살랑거렸어요. 무게 중심을 걸음마다 옮겨야 해요! 자, 다시!”
하루키의 강의는 시간당 1만 엔의 가치가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쓸데없는 전문 용어 설명도 없이, 하루키는 핵심만 쏙쏙 뽑아서 장하양에게 노하우를 전수했다.
“으흠, 으흠, 굿, 좋아요.”
워킹이 어느 정도 완성되자 하루키는 다른 강의를 시작했다.
장하양은 벽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다 멈추지 않고 부딪치거나, 무게 중심을 엉덩이에 두고 벽을 쿵쿵 밀기도 했다.
“수업의 목적을 기억해요. 몸이 무게를 어떻게 옮기는가. 그 무게는 어떻게 몸의 각 부분을 이어주는가. 그걸 깨달아야 해요.”
하루키의 수업은 약속된 3시간을 넘었다.
학생인 장하양은 물론 강사인 하루키마저 옷이 땀으로 흥건했다.
“하루키 씨, 시간 다 됐어요.”
“아하, 벌써요? 죄송한데 시간 좀 더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하양에게 시간이 더 있다면요. 돈은 더 안 받아도 돼요!”
하루키는 만족스레 장하양을 살폈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네요. ‘후쿠요 히다카’에 오프닝 행사로 나간다고 했죠? 그럼 최고를 노려야죠! 어떤가요?”
말해서 무얼 하는가.
성필은 고맙게 하루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장하양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지만, 이 수업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오프닝 행사의 최고.’
소녀연맹은 더 이상 케이어스를 신경 쓰지 않는다. 그 말은 절반만 맞다.
이전에는 케이어스가 꺾어야 할 명백한 적이었다면, 이젠 승산이 어느 정도 보이는 라이벌이었다.
장하양은 성필을 슬쩍 살폈다.
‘내가 더 빛날 거야.’
더 빛나서, 성필의 눈을 멀어버리게 할 것이다. 엄한 곳은 볼 엄두도 내지 못하게.
영원히 그의 눈을 자신의 빛으로 채워버릴 것이다.
“자자, 최종 점검입니다!”
강의 시간 6시간 경과.
이젠 연습실 밖으로 구경하는 인파까지 생겨났다. 그중엔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온 소녀연맹 멤버들도 있었다.
“으흠, 좋아요, 아아주 좋아요!”
장하양은 걸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엣지(Edge)가 넘치는 걸음걸이였다.
호기롭게 나서는 다리는 바다를 가르는 모세의 지팡이와 같았다.
팔은 몸에 붙어 덜렁거리는 게 아닌, 명확한 의지를 가지고 빛을 뿜어냈다.
그녀가 하이힐의 또각 소리를 낼 때마다 소리의 빛이 난반사를 거듭하여 연습실을 밝혔다.
“진짜 진짜 최종 점검! 실전이라고 생각해요!”
하루키는 갑자기 성필에게 다가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성필이 당황하여 밀쳐낼 새도 없이, 하루키는 성필을 연습실 중앙에 세웠다.
“하양! 패션은 유혹이에요. 유혹하지 못하는 옷은 아무런 가치도 없어요! 그리고 모델은 그런 패션의 가치를 정점까지 끌어올리는 사람! 자, 유혹하듯이 다가오세요!”
하루키가 물러나고 성필이 멀거니 섰다.
장하양은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놀란 눈치였지만, 곧 입꼬리를 올리면서 배운 것을 써먹었다.
장하양이 첫발을 내디딘 순간, 성필은 자동차가 다가오는 것만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이곳에 계속 서 있다간 죽을 수도 있겠다, 그 정도의 압박감이었다.
‘아우라.’
성필이 맨정신으로 가만히 서 있는 것마저 불가능하게 만드는 기세의 파도.
‘겨우 몇 시간 배운 것만으로,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나?’
모델의 걸음이란 이런 거였나?
연습실 밖의 사람들도 확연히 달라진 장하양의 기세에 감탄을 토했다.
“하양 언니 세쿠시(섹시)!”
“아아, 저건 남자를 죽이는 걸음이다.”
“아라쨩 오따꾸!”
또각.
장하양이 성필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상체를 살짝 기울여 성필에게 가까워졌다.
“유혹, 당하셨…….”
“노우 노우 노우 노우 노우!”
장하양이 필살의 대사를 외우기도 전에 하루키가 펄쩍 뛰었다.
“하양! 무슨 전차(戰車)예요?”
“……네?”
“유혹하랬지 들이박으라곤 안 했어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아, 워킹이 잘못됐나요……?”
“그래요! 그렇게 전투적이어선 이미 넘어온 남자도 뒷걸음질 치겠어요! 박 이사님은 이미 한 걸음 물러나기도 했고요!”
사실이었다.
성필은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살짝 물러난 상태였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고칠게요.”
“이건 동작보다 감각의 문제예요. 조금 릴렉스 해보세요. 사자는 사냥할 때 몇 시간이나 기다리잖아요? 다시!”
장하양은 자신감이 살짝 사라져서, 아까보다 기세를 죽인 채 성필을 향해 워킹했다.
“아까보단 낫네요. 하지만 아직도 부족해요. 남자를 물러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메두사를 본 것처럼 굳게 만들어요. 조금 느려도 괜찮겠네요. 이미지 트레이닝에 쉽게 대사도 정하죠. ‘술 사주실래요?’로 해요.”
“……?”
“부드럽게, 유혹하는 거예요.”
장하양은 최종 점검을 열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르러선 그녀의 숨이 꽤 거칠어져 있었다.
피로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정신은 어느 때보다도 벼려져 있었다.
마지막 워킹. 그녀는 이렇게나 집중한 적이 무대뿐이라고 생각할 만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워킹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성필의 앞에 도달한 장하양은 숨이 차 신음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저한테에…… 술, 사주실래효오……?”
약 3초의 정적.
하루키가 발을 쾅 구르면서 박수 쳤다.
“에우나 피니투라 메나빌로사(화려한 마무리야)!”
그에 연습실 밖에 있던 이들도 휘파람과 박수, 환호를 합쳐 장하양을 축복해주었다.
“자, 대답!”
하루키의 요구에 성필이 즉답했다.
“몇 잔이든.”
“박 이사님 다이탄(대담)!”
“아저씨가 아니라 하양 언니가 대담한 거지.”
환호가 더 거세졌다.
* * *
연습을 마치니 벌써 밤이었다.
장하양은 쓰라린 다리를 주무르며 휴게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밑에선 성필이 장하양의 발에 반창고를 붙여주는 중이었다.
“제가 해도 되는데…….”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이미 발은 씻었지만, 장하양은 성필에게 발을 맡기는 게 부끄러웠다.
성필은 그녀의 발을 샅샅이 살펴 까친 부분을 찾았다.
장하양은 수 시간에 걸친 연습으로 한 걸음 떼는 것도 어려워했다. 걸을 때마다 신발이 아킬레스건을 훑어 까진 상처를 더 깊이 팠다.
“많이 힘들었지? 하이힐 신고 몇 시간이나 걸었으니까.”
“안 힘들었어요.”
“강한 척 안 해도 돼.”
“정말이에요.”
장하양의 어조는 기쁨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저요, 이사님.”
“응?”
“저, 처음으로 소질을 발견한 거 같아요.”
하루키는 몇 번이나 장하양의 습득력이 빠르다며 칭찬해주었다.
돈을 받은 강사가 다음 강의를 따내기 위해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하루키는 정말 장하양의 잠재력과 능력을 높이 산 것이었다.
“처음이라니. 하양이는 아이돌…….”
반창고를 붙이던 성필의 손이 멈추었다.
아주 작지만, 장하양의 흐느낌이 들렸기 때문이다.
고개를 드니 코를 찡그리며 울음을 참는 그녀가 보였다.
“뭐든, 남들보다 느렸는데, 이건 잘했어요. 잘됐어요. 다른 사람이 칭찬해줘서가 아니라, 제가 잘했다고 느꼈어요.”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마침내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보다 특출난 부분이 있단 것을 알게 됐다.
그게 기뻐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저는 제가 바보고,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계속 생각했는데…….”
“하양아.”
“알아요. 아이돌로서의 저도 대단하단 거요. 이사님이 인정해주셔서,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그런데, 저는 자랑거리를 가지고 싶었어요.”
소녀연맹이 데뷔하기 전, 리카는 랩에 도전하려던 장하양을 위로하려 ‘언니는 예쁘잖아요!’라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장하양은 예쁜 건 다들 똑같다면서, 그녀답지 않게 차갑게 반응했었다.
“저만의 자랑거리요.”
성필이 아이돌로서의 장하양을 인정해준단 건 기쁘다. 그러나 아이돌로서의 인정은 장하양 외에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받은 것이었다.
소녀연맹 멤버들.
케이어스.
다키스트.
성필이 인정하는 아이돌이란 그렇게 많다.
장하양의 자랑거리는, 그녀가 생각하기에 흔한 것이었다. 자랑하기엔, 멤버들도 다 가지고 있어서 자랑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제가 이것만은 남들보다 잘한다고,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걸, 계속 찾았어요.”
그리고 이번 기회에 발견했다.
워킹이라는, 아이돌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기술이긴 하지만.
장하양은 그게 기뻤다.
“이사님.”
장하양은 코를 훌쩍이곤 물었다.
“저, 잘했나요? 빛났나요? 오늘만큼은, 다른 분들보다 더?”
성필은 고개를 천천히 내리고, 그녀의 발목에 바르던 반창고를 마저 붙였다.
“하양이는 언제나 빛났지.”
“…….”
그건 곧, 오늘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단 뜻이었다. 인정은 인정이지만, 옛날과 다름없는 수준의 인정이었다.
장하양의 눈꼬리가 서서히 떨어지려던 때.
“그런데 오늘은 태양이었어.”
“……네?”
“나는 하양이가 달이라도, 별이라도, 하다못해 달동네의 가로등이어도 좋아. 언제든지 너를 보면 나방처럼 달려갈 거야. 그런데 오늘은…….”
태양처럼 빛났다.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빛보다 따스하고 화려하며 장엄한 별.
“적어도, 오늘은 하양이랑 비교할 사람을 떠올릴 수 없었어. 하양이가 최고였어.”
실망이 언뜻 스쳐 갔던 장하양의 얼굴에 감동이 깃들었다.
성필은 미소로 그녀의 감동에 확신을 더해주곤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양이는 윤수 형한테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었지.”
한국에서 모델 에이전시를 운영하는 성윤수. 그는 성필과 장하양을 연결해준 가교였다.
그가 없었다면 장하양을 만날 일은 없었겠지.
“윤수 형 안목이 맞았던 걸지도 모르겠네. 어쩌면.”
모델로 사는 편이…….
“이사님. 제가 오늘 기뻤던 건 다른 이유도 있어요.”
“응?”
장하양은 어느새 손등으로 눈물을 감춘 채였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그를 대했다.
“박 이사님이랑 땀 흘리면서 밤을 보내는 건, 상상보다 훨씬 더 즐거웠어요.”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진짜. 이런 거에 웃으면 안 되는데…….”
“아하하, 재밌으셨어요? 재밌으셨으면 아라한테 농담 통제 좀 풀어달라고 말씀해주세요.”
“정확히는 낮부터 저녁까지 보낸 거지. 나만 있던 것도 아니고. 땀도 너만 흘렸잖아.”
그리고, 피도.
성필은 장하양의 발목을 감싼 여러 개의 반창고를 부드럽게 엄지로 쓸었다.
벌써 피가 배어 나와선 반창고의 겉면을 붉게 물들였다.
“꼭 하이힐로 연습해야 하나?”
“저희 무대 준비랑 똑같죠.”
“……그러게.”
“피 좀 흘리면 어때요.”
모든 건 완벽한 쇼를 위해서.
장하양은 오늘 하루키의 수업으로 믿음을 얻었다. 드물게도, 성필에게서 얻은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깊이서 생겨난 믿음이었다.
‘이길 수 있어.’
진소유보다 빛날 수 있다.
* * *
‘후쿠요 히다카’ 본사의 내부 스튜디오에선 촬영 준비가 한창이었다.
패션쇼의 오프닝 행사를 위해 출연자의 이미지를 미리 촬영하고 분석하는 자리였다.
넓은 촬영 스튜디오엔 스태프만 스무 명이 넘었다. 그중에는 디자이너 1팀을 맡은 마하라 타츠야와 2팀의 이리에 아토무도 함께였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후쿠요 히다카의 디자이너들도 여럿 모였다.
“이 스튜디오 쓰는 게 아이돌 둘이지?”
“케이어스 소유랑 소녀연맹 하양이었나.”
두 디자이너는 팀장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구석에서 담화를 나누었다.
왜 들리지 않는 자리에서 하냐면, 다른 이들이 들어서 좋은 게 없는 주제였기 때문이다.
“이해가 안 돼. 아니, 케이어스는 이해가 돼. 소유는 ‘후쿠요 히다카’ 앰배서더가 되기로 했으니 상징성도 있고. 그런데 소녀연맹의 하양이는 그렇지 않나?”
“맞지. 솔직히, 한국 진출이 목적이더라도 급이 안 맞잖아.”
중소 기획사의 아이돌에게 명품 앰배서더를 맡기다니.
‘중소 기획사’는 이름만 들어도 곰팡내가 난다. 비록 실적이 있더라도, 이미지를 우선하는 명품 브랜드가 뽑을 만한 모델이 아니었다.
아무리 오프닝 행사더라도 말이다.
“마하라 팀장님이 회의에서 했단 말 들었어? 하양이란 애가 엣지(Edge)가 있대.”
“뭔……. 모델도 아닌 인간을 너무 띄워준다. 안목이 의심돼.”
“파격이란 말로 봐줄 건이 아니지.”
디자이너는 그러한 수사를 최대한 아껴야만 한다. 패션계는 평판의 뒷세계인 소문에 좌우되는 경향이 크니까.
유명 인플루언서의 한마디는 곧 업계 전체에 퍼지고, 좋은 평가를 준 모델에게 관심이 모인다.
“다른 클라이언트들이 마하라 팀장님 얘기 듣고 하양을 썼다가, 나쁘면?”
인플루언서의 한마디로 모델로 채용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패션계는 언제나 유행의 선두에 있어야 하니까.
검증될 때까지 기다리다간 언제나 뒤처질 뿐이다. 하지만 막상 써봤더니 결과가 안 좋으면, 마하라의 평가는 금세 떨어질 것이다.
패션계는 ‘인포메이션 캐스케이드’가 지배한다. 정보가 너무나 많아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의견보다 다수의 흐름에 편성하는 것이다.
그 다수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게 마하라와 같은 유명인들이다.
“설마 그렇겠어. 결국 아이돌이잖아. 뭐, 괜찮은 상업 광고 정도는 출연할 수 있겠네.”
“영상으로 보나 사진으로 보나 고전적으로 미인이니까.”
고전적으로 미인이다.
즉, 눈이 크고 턱선이 갸름하며 입술도 매혹적이고 뺨도 발그레하며 콧대가 높다.
아름답고, 뻔하고, 지겹다.
“예쁜 게 다지.”
“안녕하세요 소녀연맹 하양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은 잘 부탁드립니다.”
“말도 안 되게 예쁜데……?”
장하양의 실물이 스튜디오에 등장하자, 뒷담을 나누던 디자이너들의 눈이 솥뚜껑보다 더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