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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17화 (317/760)

317화

“소유 씨.”

상대한테 마음도 없으면서 ‘팔이 탄탄해 보이시네요 만져봐도 되나요?’라고 말하는 여자가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소녀연맹 제외).

그러니 성필은 진소유가 자신을 유혹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제가 착각하는 걸 수도 있겠는데요.”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성필은 백설하처럼 망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망신당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물론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게 센스 없는 일이란 것은 안다. 그래도 묻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혹시 저한테…….”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른다.

진소유를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정신력의 대부분을 쓰고 있다.

거기에다가 창피하기 그지없는 질문까지 던지려니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하다.

성필은 용기에 용기를, 의지에 의지를 겹쳐서 겨우 말했다. 그녀의 깊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향해, 말해버렸다.

“저한테, 이성적인 호감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성필의 시야가 밝게 뜨였다.

어딘가 싶었는데, 이 풍경을 보니 예상가는 곳이 있었다.

흰 구름이 깔린 것으로 짐작하건대 천국이 확실했다. 구름 위로 아기천사들이 날아다니며 성필을 놀리듯이 나팔을 부는 중이었다.

그래, 그렇구나.

‘나는 이렇게 죽었구나.’

사인(死因), 수치사(羞恥死).

셰익스피어가 ‘뜻대로 하세요’란 연극을 통해 이리 말했었다.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남녀는 배우다.

그렇게 착각 많은 한 남자의 이야기는 막을 내렸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희극도 비극도 아니었다.

성필은 자신의 인생을 부조리극이라고 명명했다.

어쩌면 이곳, 천국에는 사무엘 베케트도 있을지 모른다.

그와 함께 부조리극에 관해 토론하다 보면, 지상에서 쌓은 수치가 조금이라도 씻길지도 모를 일이다.

“흐음.”

진소유의 목소리가 성필을 천상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팔을 조물조물하는 부드러운 손끝이 느껴졌다.

진소유가 성필의 팔을 쿡쿡 찌르거나 주무르고 있었다.

성필은 얼굴이 화악 달아서 팔을 뺏다.

“좋은 사람이시네요.”

진소유는 성필의 망언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문득 그리 말했다.

“좋은 사람이요?”

“그렇게 보여요.”

아, 창피를 감춰주려는 거구나.

성필은 셰익스피어를 다시 불러왔다.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남녀는 배우. 그리고 성필은 다시금 무대에 섰다.

아까 일이 없었단 듯 연기를 이어갔다.

“제가 좋은 사람이긴 하죠.”

“그러게요. 이해가 가요.”

무엇이 이해가 간다는지 모르겠지만, 진소유는 입에 발린 칭찬을 하는 게 아닌 듯했다. 그녀에게선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서 성필은 어이가 없었다.

“팔뚝이 단단하면 좋은 사람인가요?”

“좋은 사람을 판단하는 제 나름의 기준이 있죠. 팔뚝이 단단하고 아니고는 기준에 포함 안 되긴 한데, 가끔은 고려 대상이기도 하죠.”

성필은 드디어 대화다운 대화가 이어지는 것 같아 조금 기뻤다.

“그럼 기준이 뭐예요?”

“외모요.”

“그리고요?”

“끝이요.”

“……오로지 외모요?”

“네.”

진소유는 여전히 성필 따라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가 식사를 하지 않으니, 그녀도 가만히 앉아 성필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제 외모가, 소유 씨가 판단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을 넘었나요?”

“처음 봤을 땐 아니었는데, 자세히 보니까 그러네요.”

“……제 얼굴이, 그러니까, 소유 씨의 합격점이라는 얘기죠?”

“얼굴만이 아니에요. 말 그대로 외모(外貌)예요.”

얼굴만 잘생겼으면 나머진 아무래도 좋아. 이런 기준을 가진 사람을 흔히 ‘얼빠’라고 한다.

잘생겼으니 무엇이든 용서해줄 수 있다는 사람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사랑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성필은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어, 음, 제 외모가 소유 씨 기준으로 어느 정도는 준수하니까. 그래서 좋은 사람이라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왜 계속 물으세요? 아, 제가 인정해주니까 못 믿으시는 거죠? 이해해요. 제 인정은 아무나 못 받는 거긴 하니까요.”

“이상해서 그래요. 아, 아니, 사람의 기준에 이상함이란 건 없죠. 죄송합니다, 실언이었네요.”

다만, 성필은 진소유와 같이 당당히 ‘외모가 전부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외모가 1순위고 마음이 2순위야’처럼 본심을 조금이라도 감추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당황한 성필을 향해 진소유가 간결히 답했다.

“외모는 순수하고 솔직해요. 거짓말로 휘감을 수 있는 정신보다는 훨씬 믿을 만하죠.”

“그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요.”

“저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아요. 정신, 영혼, 마음, 전부 볼 수도 측정할 수도 없는 거니까요.”

그에 비해 몸과 얼굴에 새겨진 기록엔 거짓말이 존재할 수 없다.

진소유는 그리 주장했다.

“저는 피상적인 미추(美醜)만 말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의 얼굴이나 몸을 보면, 그 사람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알 수 있어요. 외모는 절대 영혼보다 못하거나 가벼운 게 아니에요.”

성필은 잠깐 넋을 놓곤,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소유 씨는 정말 단어 그대로 외모지상주의자시네요.”

“외모는 많은 걸 드러내요. 저는 습관이 정신이 아니라 몸에 깃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절제를 모르고 살아온 인간과, 절제로 점철된 인간의 몸은 다른 법이니까요.”

진소유가 약간은 활기차졌다고 느낀 건 성필의 착각이 아니리라.

그녀는 마치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못 배기겠단 기색이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믿음을 타인에게 말하고 싶어 하지.’

성필은 진소유의 나이대다운 자의식을 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조금은 그녀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인간이 아니라 현세에 강림한 신적 존재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럼 소유 씨는 잘생기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을 좋아하시겠네요?”

“누가 그런 사람을 안 좋아하겠어요? 못생기고 운동 안 하고 자기관리도 안 하는 사람보다야 1조 배 낫죠. 음, 그런데 그런 거랑은 또 다른데.”

“다르다뇨?”

“저는 그러니까, 물론 인위적인 습관도 기준이 될 수 있지만, 외모에 새겨진 인간의 순수한 기록을 본단 거예요.”

“개성 말씀하시는 거죠?”

“개성…… 그렇네요.”

진소유가 드디어 성필과 다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카레를 한 입 떠먹고는, 아까보다 생기 있는 투로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도, 저는 역시 아름다운 사람한테 정이 가더라고요. 얼마 전부터 절절하게 느껴요.”

“오, 좋아하는 사람이 계세요?”

성필은 진소유의 마음을 빼앗은 남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상상해보았다.

이제까지 진소유가 했던 말로 판단하건대, 그야말로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왕자님 같지 않을까 싶다.

상상만 해도 질투가 솟아오르는 그런 인간.

성필의 눈앞에 나타난다면 죽음을 피하기 어려우리라.

“음…… 사랑이란 의미로 물으면 아닌 거 같아요.”

다행히 성필은 미래의 범죄자 신세를 면했다.

“그냥 목소리 듣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문득 떠오르고, 그 정도?”

그게 사랑이란 건데.

성필은 그녀의 애매한 답에 픽 웃었다.

‘보기엔 어른스러워도, 아직 애긴 애구나.’

25살 진소유.

성필보다 8살 아래다.

‘나도 소유 씨 나이대엔 감정에 솔직해지는 법을 잘 몰랐었지.’

예상외로, 성필은 진소유와의 식사를 편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어느 정도 말이 트인 성필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곧 패션위크네요. 혹시 시간 있으시면 ‘후쿠요 히다카’ 패션쇼에도 오세요. 하양이가 오프닝 쇼에 나올 거예요.”

“네, 갈 거예요.”

“정말요? 아, 맞다. 패션쇼 보시고 앰배서더가 될 브랜드 선택하신다고 하셨죠.”

“저 앰배서더 될 브랜드 이미 정했어요.”

“어딘데요?”

“‘후쿠요 히다카’요.”

“……진짜요? 왜요?”

“하양이가 패션쇼에 나와서요.”

농담이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에 저도 후쿠요 히다카 오프닝 행사에 나가요. 거기 하양이도 나오는 거 맞죠?”

농담이 아니었다.

“아마 다음엔 거기서 뵙겠네요.”

진소유가 이전과 마찬가지로 경쾌하게 악수를 청했다. 아니, 그때보다는 더 친근함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웃음기와 함께였으니.

“오늘 즐거웠어요, 박성필 이사님.”

* * *

성필은 연습실 벽에 기대고 앉아 핸드폰 화면을 곧게 응시했다.

그곳엔 진소유와 만났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분명 내가 뒤에 서서 찍었는데.’

그래도 성필의 얼굴이 더 크게 나왔다.

성필은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역사적인 케이어스 진소유와의 셀카에 본인의 얼굴이 크게 나왔단 것 때문은 아니었다.

‘대단했지.’

진소유는 성필의 습관과 행동을 따라 했던 게 어떤 인간인지 살피기 위함이라고 했었다.

상대를 탐색한 건 진소유만이 아니었다. 성필도 그녀를 주의 깊게 관찰했었다.

전생의 성필이 걸그룹의 정점이라고 생각했던 케이어스 멤버를.

‘만약 소유 씨가 가로 엔터의 연습생이었으면, 나는 그룹에 안 넣었을 거야.’

진소유의 거대한 아우라는 직접 본 사람이 아니고서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먼발치에서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그녀의 기세는 보통이 아니었다.

인간이 아우라를 인위적으로 단련할 수 있다면, 그녀는 티베트 고승(高僧)과 버금갈 경지에 오른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야말로 별.’

연예인을 향해 ‘스타’라고 표현하는 건 오래된 어법이다. 그런데 진소유는 진실로 ‘별’이란 비유가 어울렸다.

밤하늘에 떠 있기만 해도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별이지만, 다른 별 사이에 있을 수 없어.’

진소유는 서늘한 백색광을 뿜어내는 별 사이의 붉은 별이었다.

홀로 과하게 튄다.

그룹이란 카테고리에 넣기엔, 진소유의 아우라가 너무나 거대하다.

‘그런데도 소유 씨를 그룹에 넣은 게 정호환 이사님의 대단한 점이지.’

정호환은 진소유를 융화시킬 방법을, 그리고 진소유와 조화될 멤버들을 기어코 골라낸 것이다.

그렇게 해서도 메이크업과 의상을 최대한 무난하게 하여 튀지 않게 만들어야 했지만.

정호환은 진소유를 케이어스에 넣고도 조화를 이루어냈다.

‘나라면 안 했을 거야.’

정확히는, 못했을 것이다.

1년에 공개 오디션, 글로벌 오디션, 영상 오디션으로 수십만 명의 연습생 지원자를 받는 KS 엔터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KS 엔터는 수년 동안 수백만 명의 연습생을 대조, 교차, 비교하여 케이어스 4인을 완성한 것이다.

‘전생에서 윤상열이 그랬었지. KS 엔터는 완성품만 낸다고.’

아이돌을 물건 취급하는 어투에 성필이 즉각 대들고 싸웠었지만, 지금에선 완성품(品)의 의미를 절절히 깨닫는다.

완성품이란 평가는 윤상열 입장에서 최고의 찬사였다.

“이사님 뭐 보세요?”

연습실 중앙에서 몸을 풀고 있던 장하양이 성필의 앞으로 다가왔다.

성필이 급히 핸드폰을 꺼서 진소유의 사진을 치워버렸다.

“네이버 뉴스 보고 있었어.”

“뒤에 거울로 뭐 보고 있는지 다 보였거든요.”

성필이 기대고 있는 벽은 그냥 벽이 아니었다. 퍼포먼스 연습을 위한 전신거울이었다.

“아, 소유 기사가 나왔길래 보고 있었어.”

“기사에 이사님이랑 소유 언니가 같이 찍힌 사진이 올라왔어요? 열애설 기사인가요?”

“……그냥, 소유 씨 사진 보면서 생각 좀 했어.”

또 장하양에게 한 소리 듣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장하양은 추궁 대신 따스함을 보였다.

“이사님이 케이어스에 관심 가지는 거, 굳이 저희한테 숨기실 필요 없어요.”

또 미끼 질문인가 싶었는데, 장하양은 진심임을 증명하려는 듯 화사한 미소를 띠었다.

“이젠 옛날의 저희가 아니니까요.”

옛날의 소녀연맹.

케이어스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질투와 좌절을 품었던 그녀들.

“저흰 소녀연맹이에요. 케이어스를 이긴, 비록 한 번뿐이지만, 그런 그룹이에요.”

그러니 옛날처럼 성필이 케이어스의 팬이란 것에 박탈감을 맛보거나 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사님 마음속에선 제가 훨씬 대단하고 예쁘고 귀엽고 아름답잖아요?”

“아…….”

“고민하시는 거예요?”

“아니 아니! 새삼 옛날이랑 달라졌다 싶어서 그랬어.”

옛날 같았으면 당장 장하양이 멤버들 단톡방에 해당 사실을 알린 후, 성필에게 응징이 떨어졌을 것이다.

“하양이 말이 맞아. 만약이지만, 내가 케이어스 프로듀서였으면 소녀연맹 덕질했을걸?”

아이돌은 원래 가까이 있지 않을 때 동경하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케이어스 멤버분들한테 욕먹으시구요?”

“하하, 그럴 수도 있겠다.”

은근히 기발한 상상이다.

성필은 자신의 처지를 뒤집어 보았다.

만약 KS 엔터에 입사해서 쭉 입지를 쌓아간 뒤, 케이어스가 기획될 즈음 프로듀싱 팀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됐다면…….

‘얘들아, 소녀연맹이란 그룹 곡 들어봤어? 진짜 대단하더라.’

‘박 실장님, 지금 한눈파시는 검미까?’

성필은 본인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또.”

장하양은 성필의 웃음에 힘을 얻었는지 농담을 이어가려는 듯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소유 언니보다는 제가 더 아이돌리시하지 않아요?”

“어?”

“네?”

“뭐라고?”

“네, 네?”

“으엉?”

“아, 아닌가요……?”

“아니…… 하양이 네가 누구랑 비교하면서 자랑하는 건 처음인 거…… 같아서…….”

신아름이 ‘김민주 그년보다 내가 더 낫죠’라고 하는 건 자주 들었었다. 그런데 장하양이 이럴 줄은 예상도 못 했었다.

“노, 농담이었어요…….”

장하양이 풀이 죽은 듯하자, 성필은 온기가 서린 손길로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아냐. 맞는 말이야. 하양이가 더 아이돌리시하지.”

“……정말요?”

“그럼. 아이돌리즘 그 자체야.”

“어떤 면에서요?”

“역으로 물으면, 하양이는 어떤 면에서 네가 소유보다 더 아이돌답다고 생각해?”

“글쎄요, 얼굴?”

“하하.”

“웃어요?”

장하양도 웃었다.

“모르겠어요. 그래도 소유 언니보다…….”

왠지 모르게 장하양 자신에게 친절하고, 가끔 도움도 주지만.

그래도 사람과의 관계에 철저한 계산으로 임하는 인간보다는.

“제가 낫다고 믿어요.”

“그런 자세 좋아.”

“박 이사님이 그렇게 믿어주시니까요. 그렇죠?”

“음…….”

“안 속아요.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잖아요.”

이젠 믿음을 강요하고 있다.

물론, 성필은 언제나 장하양의 편이다.

“그런데…… 미아가 늦네요.”

“그러게.”

오늘 장하양이 연습실에 있는 이유는 ‘미아’란 모델이 어느 모델과 수업을 주선해주었기 때문이다.

미아는 장하양이 일본에서 사귄 친구였다.

나이는 22살로, 미아가 먼저 장하양에게 말을 걸어서 친해졌단 듯하다.

장하양이 ‘후쿠요 히다카’ 패션쇼에 나가게 되어서 고민이라고 하니, 흔쾌히 웨벡스를 통해 강의를 주선해주기까지 했었다.

“전화도 안 받고.”

“내가 4층에 갔다 올게. 하양이는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웨벡스의 4층은 모델 에이전시가 있다.

4층의 대부분은 모델과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는 장소였다.

가는 동안 성필은 후쿠요 히다카의 오프닝 행사가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해보았다.

‘하양이랑 소유 씨가 동시에 나오다니.’

비록 패션쇼의 의미나 매력은 모르는 성필이지만, 이번 행사가 무척 기대됐다.

‘한국에서도 난리가 나겠지.’

케이어스와 소녀연맹의 친분, 그리고 대립 구도는 한국에서 유명한 주제였다.

소녀연맹은 중소기획사란 배경 때문인지 언더 도그마 효과를 누리는 중이었다.

두 그룹이 팬이 아닌 이들도, 소녀연맹과 케이어스가 모종의 이유로 격돌한다고 하면 은근히 소녀연맹을 응원하는 것이다.

‘약자가 이기길 바라는 심리인 거지. 우리가 약자로 인식되는 게 좀 쓰리긴 하지만.’

아이돌의 무대에 승패는 없는 법이지만, 대중은 워낙 편 가르고 싸움 붙이길 좋아하니까.

조아라가 ‘뉴아사’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누구보다 더 빛나는 게 아니라 저마다의 색으로 빛난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현대인은 경쟁에 길들어 있으니까.

심지어 시합이 아닌 곳에서도 경쟁을 찾는다.

‘이번 패션쇼 오프닝 행사도 그렇게 화제가 되는 건 아니겠지. 누구누구가 씹어 먹었네 어쩌네 하면서.’

아무튼 화제가 될 건 확실하다.

그게 좋은 일이란 것도 논쟁의 여지가 적다.

다시 조아라의 말을 빌리자면, 아이돌은 아티스트면서 엔터테이너니까.

‘좋은 승부가…….’

무의식적으로 ‘승부’란 단어를 떠올린 성필이 흠칫하여 멈춰 섰다.

자기도 모르게 패션쇼를 경합의 장으로 인식했다는 게 놀라웠다. 그리고 그 감정은 놀라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는, 하양이랑 소유 씨를 비교하고 있던 건가?’

소녀연맹과 케이어스의 대표적인 비주얼 멤버.

그 둘의 만남을, 성필은 승부라고 인식했으며 동시에 자연스레 비교하고 있었다.

“…….”

성필은 세차게 고개를 젓곤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성필은 4층에 내려서 미아가 소속된 에이전시 B팀 사무실을 찾았다. 그리고 보인 건, 흔히 생각하는 파티션과 책상으로 나뉜 사무실의 풍경이 아니었다.

‘카페 같다.’

십수 개의 테이블이 곳곳에 있었고, 에이전트들은 저마다의 용무에 따라 홀로 있거나 여럿이 짝지어 있기도 했다.

젊은 IT 기업을 보는 듯한 감탄도 잠시, 곧 성필의 귀에 신경질적인 고함이 내리꽂혔다.

“대체 넌 엉덩이 사이즈가 언제 36 밑으로 떨어질 건데!”

자연스레 성필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성필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방금 고함을 지른 사람은 남자였고, 그 앞에 있는 건 여자 모델인 미아였기 때문이다.

“통통한 엉덩이랑 허벅지가 마음에 들면 그냥 그라비아 모델이라도 해! 그딴 엉덩이로는 파리나 밀라노는커녕 동네 시골 패션쇼도 못 서겠다!”

성필은 정신이 가출할 듯했다.

‘뭐, 뭐야 이게.’

성희롱으로 고소되고 당장 가정이 파멸할 정도의 욕설.

인간을 마치 정육점에 걸린 고기처럼 대하는 듯한 말투.

그런데.

‘아무도 신경을 안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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