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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16화 (316/760)

316화

성필이 도전한 비프 웰링턴은 대실패였다.

레시피북을 그대로 옮겼다고 생각했건만, 정작 튀어나온 건 고깃덩어리인지 요리인지 모를 무엇이었다.

멤버들은 성필의 걸작품을 신나게 놀려대고, 그냥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다.

그렇게 한바탕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숙소에서, 멤버들은 성필의 앞에서 드러내지 못했던 주제를 꺼냈다.

“소유 언니가 왜 박 이사님한테 접근하시는 걸까요?”

회의의 주최자는 장하양이었다.

“우리끼리 얘기해도 답이 안 나오지 않을까.”

“언니, 최소한 상상이라도 할 수 있잖아요.”

“상상…….”

백설하의 상상은 급격히 불운한 쪽으로 휘었다. 그 옛날, ‘음악을 위한 동행’ 촬영 전 성필이 에리카를 만났을 때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매몰차게 등을 돌리는 성필이었다.

성필은 가지 말라며 애원하는 백설하를 돌아보지도 않으며 앞으로 향했다. 그 앞에는 활짝 웃는 진소유가 있었다.

“우…….”

상상만 해도 울 것 같다.

이토록 자극적이니 사람들이 아침 드라마를 보는 건가 싶기도 했다.

“언니, 뭐 떠오르는 거 있으세요?”

“아, 아니. 딱히 없어.”

백설하는 부끄러운 상상을 감추기로 했다.

이 망상 때문에 피를 봤던 적이 많았으니까.

“별일 없지 않을까요?”

리카는 담담하게 반응했다.

“아마 저희는 모르지만 박 이사님을 만나야 할 실용적인 이유가 있을 거예요!”

“실용적인 이유?”

“예, 저희는 모르는!”

“그런 게 어딨어.”

“그러니까 저희는 모르는 거예요!”

“나 놀리니?”

이야기가 평행선으로 가고 있다.

“야 리카. 연습생 때 소유란 사람 어땠어?”

“소유 언니?”

리카는 연습생 시절의 진소유를 떠올렸다.

쉬는 시간마다 질리지도 않는지 거울로 다가가 본인의 몸과 얼굴을 응시하는 진소유…….

안 그래도 연습생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던 그녀였다. 진소유의 이상행동은 가십거리로 삼기 딱 좋았었다.

“주변에 피해는 안 주시는…… 평범한 분이셨어!”

“그러고 보니 너 그 사람이랑 얘기 나눠본 적 별로 없댔지.”

“마아(뭐어), 그렇네.”

진소유는 소녀연맹에게도 미지의 인물이다.

그나마 장하양이 그녀와 가장 많은 교류를 했었긴 하다. 하지만 장하양도 진소유가 어떤 사람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아는 거라곤 성격이 나쁘단 것뿐.

“효민이한테 듣기로는.”

신아름이 의견을 보탰다.

“상종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던데요? 하양 언니도 비슷하게 말했잖아요.”

“그렇게까진 말 안 했어…….”

우효민이 말하길, 연말 특별 무대를 준비할 때 그렇게나 팀원들을 갈궜다던가.

“근데 또 하양 언니 도와준 거 보면 착한 사람 같기도 하고.”

“날 도와주셨다고?”

“트잇터요.”

“아.”

장하양이 자신의 가정사를 트잇터에 올렸을 적의 일이다.

‘인민’들은 장하양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녀를 응원하는 태그를 트잇터 실시간 트렌드에 띄우려고 했었다.

하지만 화력이 부족하여 좌절하던 당시, 진소유가 도움을 주었었다.

그리하여 당초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어 장하양도 감동하지 않았던가.

“뭐야. 언니 벌써 잊었어요?”

“음, 기억은 하고 있는데…….”

도저히 진소유의 선행과 태도를 일치시키기 어려웠다.

첫인상이 너무 강렬했었기 때문이다.

대뜸 사람을 붙잡고 ‘너 가정폭력 피해자니?’라고 묻는데, 좋은 인상이 생길 리 만무하다.

맞는 말이었단 게 더 기분 나쁘다.

“하양 언니는 한 이사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계신 거예요! 한 이사님이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잊지 말라고 하셨어요!”

“리카 너 갑자기 왜 한의사님 쓰레기로 만들어. 반대잖아.”

갑자기 침묵이 찾아왔다.

“한의사님 잘 지내고 계시겠지…….”

다들 가로 엔터가 그리웠다.

한 달도 안 되어 한국으로 돌아갈 테지만, 그래도 지금은 못 만나지 않는가.

슬슬 향수가 진해질 때가 됐다.

“근데 소유 언니를 가장 잘 아는 건 하양이 너 아니야?”

일동 침묵.

백설하는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싶어 괜히 움츠러들었다.

“다, 다들 왜 그래?”

“이에(아니), 쌤이 언니라고 말하는 거 들으니까 기분이 이상해서요!”

“…….”

“우, 우리한텐 쌤이 제일 언니잖아요! 그런데…….”

진소유는 백설하도 언니라고 부를 만큼 나이가 많다. 많다고 하여 겨우 한 살 차이인 25살이지만 말이다.

“소유 언니를 가장 잘 아는 건 저…….”

그렇다.

장하양이 맞긴 하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가 성필을 불렀는지는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KS 엔터가 성필을 빼간다는 설명 외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둘이 어색한 사이는 아니잖아. 전화라도 해보는 거 어때? 전에 생일 축하해드리니까 좋아하셨다면서. 이번에도 연락하면 좋아하실 거야.”

“……아니에요.”

“괜찮아? 신경 쓰이는 거 아니었어?”

“생각해보니까, 저희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닌 거 같아서요.”

무엇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성필의 마음이다. 그게 비록 케이어스라 하더라도.

* * *

브랜드 ‘후쿠요 히다카’의 팀장급 디자이너 회의는 한 가지 문제로 난항을 겪는 중이었다.

‘후쿠요 히다카’ F/W 시즌 패션쇼 오프닝 행사 인선 문제였다.

6개 디자이너 팀의 팀장들이 연예인 각 한 명씩을 추천하는 게 상례였던 이 회의는, 수십 년을 이어가면서 큰 충돌이 없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마하라.”

디자이너 2팀의 팀장, 이리에 아토무란 남자는 골치 썩는단 얼굴로 1팀장인 마하라 타츠야를 노려보았다.

“네가 물러나는 게 맞아.”

아토무는 타츠야와 함께 차기 ‘후쿠요 히다카’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인물이다.

시기심과 경쟁심이 강하여 평소 마하라와도 자주 충돌을 벌였었다.

충돌의 이유엔 시답잖고 의미 없는 것들이 많았으나, 이번만큼은 아토무의 의견이 옳았다.

“오프닝 쇼에 한국인을 두 명이나 둘 순 없어.”

1팀장 타츠야가 꼽은 인물은 케이팝 아이돌로 활동 중인 장하양이었다.

“한 명이 남아야 한다면…….”

그리고 2팀장 아토무가 꼽은 인물은.

“케이어스의 소유가 옳고.”

그 말에 다른 팀장들이 내심 동의했다.

케이어스는 현재 케이팝 아이돌 중 가장 뜨거운 그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기간에 거대한 팬덤을 확보했으며, 그 영향력은 아이튜브와 SNS, 세계 각지 인터넷에 넓게 뻗어 있다.

“소유는 우리가 일찍이 앰배서더 권유까지 한 인물이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도 파급력을 보아서 소유를 남기는 게 맞아.”

케이어스의 뮤직비디오는 조회 수 3억을 돌파했다.

데뷔곡인 ‘카오스’와 컴백곡인 ‘가이아’ 두 개 다 말이다.

대중문화의 정점이라는 미국의 팝스타들도 뮤비 조회 수가 1억을 넘으면 축포를 터뜨린다.

그러니 케이어스가 얼마나 영향력이 큰 그룹인지 가늠하기란, 케이팝에 관심 없는 이들에게도 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SNS인 스타그래프의 그룹 계정 팔로워 수는 1,000만을 넘었다.

아이튜브엔 별 시답잖은 영상만 올려도 조회 수가 100만은 우습게 넘어간다.

케이어스는 한국 시장을 공략하기에, 그리고 세계 시장에 어필하기에도 가장 좋은 파트너임이 틀림없다.

“오프닝 쇼에 한국인을 두 명 넣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타츠야가 오랜 침묵을 풀었다.

그 말에 아토무가 역정 내듯이 말했다.

“안 그래도 다른 애들이 전부 서양 쪽 애들 픽했어! 그나마 일본인은 하나고! 그런데 한국인이 두 명이어 봐! 심지어 둘 다 아이돌이고!”

“한국인 두 명을 두면 안 된단 법이 없다는 뜻으로 알지.”

“이해가 안 되는군.”

팀장급 디자이너들도 장하양의 영상과 사진을 미리 확인하긴 했다.

아름답긴 하다.

하지만 단지 아름다울 뿐.

타츠야가 이렇게나 감쌀 정도의 가치가 있는가 물으면, 쉽게 답하긴 어려웠다.

“하양이라는 아이돌한테 돈이라도 받았나?”

“아토무.”

50대의 수석 디자이너가 아토무의 발언을 지적했다.

아토무는 콧방귀를 뀌면서 시선을 돌렸다.

“아토무의 언행이 거칠긴 해도 영 이해 못 할 건 아니거든. 타츠야, 어떻게 해서라도 하양을 우리 쇼에 세워야겠어?”

수석 디자이너의 물음에 타츠야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하시모토 한국 총괄 매니저의 부탁이 있었어요. 간곡한 부탁이요.”

“하시모토?”

“그, 히라주쿠점을 맡았던 점장이요.”

“어바이비 쪽 사람인가.”

드디어 생산적인 대화를 할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타츠야는 어조를 더 부드럽게 다듬었다.

“저희 어바이비를 비롯한 후쿠요 히다카의 최근 숙원이 뭐였어요. 한국 진출이었잖아요.”

한국 명품 시장 규모는 세계 10위권 이내다.

많은 명품 브랜드들이 진출하지 못해서 안달하는 황금밭이다. 그래서 후쿠요 히다카도 조금씩 한국으로 발을 뻗으려고 간을 보아왔다.

“근데 백화점 입점이니 단독 매장 오픈이니, 별짓을 다 해도 불가능했어요. 어바이비도 비슷한 꼴이 되리라 여겼지만, 보세요.”

하시모토는 해냈다.

이 자리에 모인 디자이너들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하시모토는 무슨 마술을 부렸는지 유의미한 이익을 창출해내는 중이었다.

“어바이비가 순조롭게 자리 잡으면 저희도 다시 한국을 노려봐도 좋을 겁니다. 그리고 어바이비의 상황에 발판을 제공한 이들이 소녀연맹입니다.”

“소녀연맹?”

“하아양이 속한 그룹이요. 요즘 일본에서도 유명한데요.”

수석 디자이너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하기야, 50대 남자가 걸그룹의 이름을 외우고 다닐 리는 없으니.

“하아양은 한국 어바이비 공식 홍보 모델이에요. 유명세가 있죠. 그리고 이번…….”

“상업 모델로 활동한 인간을, 그런 아이돌을 우리 쇼에 세우자는 거야?”

아토무가 치고 들어왔다.

타츠야는 지긋지긋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쇼 모델 선정은 팀장급 디자이너의 고유한 영역일 텐데 왜 자꾸…….”

날카롭게 응수하던 타츠야는 곧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깨달았다.

다른 팀장급 디자이너들도 곱지 않은 시선을 타츠야에게 보내는 중이었다.

결국 타츠야는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명백한 적인 아토무를 상대하기보다 수석 디자이너를 노렸다.

“……하아양이 우리 쇼에 서면 한국에서 적잖이 화제가 될 거예요.”

“소녀연맹이란 그룹이 케이어스만큼 유명한가?”

“아니요.”

그건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쇼에선 케이어스만큼의 유명세를 발휘할 것이다.

아니, 소녀연맹과 케이어스가 같이 나가기에 한국의 이목을 집중적으로 모을 수 있다.

“소녀연맹의 하아양과 케이어스의 소유가 동시에 우리 쇼에 나온다고 생각해보세요. 한국에선 화제가 되지 않을까요?”

하시모토에게 듣기로는 ‘케이팝 아이돌이 일본 패션계를 제패하다! 한국을 질투하고 시샘하며 화나서 꼭지가 돌아버리기 직전인 일본인들!’과 비슷한 제목의 영상이나 게시글들이 범람할 거라든가.

“우리 ‘후쿠요 히다카’란 이름이 수만 명, 수십만 명에게 박힐 겁니다.”

명품 브랜드가 어느 시장에 진출하려면, 명품이란 게 알려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후쿠요 히다카는 명품 브랜드 중 하나구나’라고 생각하면, 그것 자체가 거대한 성공이다.

“‘후쿠요 히다카’는 한국인들 머릿속에서 명품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거예요.”

패션쇼의 목적 중 하나는 프로모션, 즉 알리는 것이다.

“한국에 진출하려는 저희 입장에서, 이보다 나은 프로모션은 없지 않나요?”

“일리가 있군. 그럼 하양을 쇼에 세우려는 건 오로지 마케팅적인 고려인 거군?”

“아니요. 그와 비슷하게…….”

타츠야는 엄지와 검지로 직각을 만들었다. 그 안에 장하양의 얼굴이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하아양은 엣지(Edge)가 있거든요.”

그 발언은 이 자리의 모두를 놀라게 했다.

타츠야 정도 되는 디자이너가 이렇게나 옹호할 정도라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은 확실했으니까.

“그럼 일단…….”

수석 디자이너는 태블릿에 장하양이란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지. 타츠야의 말이니 이번엔 믿어보겠어.”

“고마워요, 그랑 쿠튀리에.”

“오글거리는 호칭은 집어치워.”

2팀장인 아토무는 여전히 뚱해 있었지만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같은 반응이었다.

“이 주제로 너무 오래 시간을 끌었군. 다음 주제로 넘어가지.”

어차피 오프닝 행사.

연예인을 불러서 관심을 끄는 것에 불과한 이벤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곳에 나오는 이들은 최소한의 조건만 만족시킨다면 별다른 기대도 받지 않는다.

애초에 캣워크 위에서 연예인과 모델을 비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쉽게 넘어갔군.’

타츠야는 일이 본인의 뜻대로 됐단 것에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

어차피 쉽게 넘어갈 문제였다.

‘이게 메인 이벤트 인선(人選)도 아니고.’

아이돌이든 뭐든, 적당히 이익에 따라 가려 뽑으면 그만이니까.

다들 딱히 기대도 실망도 하지 않는다.

다만, 타츠야는 달랐다.

‘연예인에 이렇게 신경 쓰긴 처음이네.’

과연 하아양은 캣워크에서 어떤 아우라를 보여줄 수 있을까.

이건 일종의 실험이었다.

타츠야는 장난감을 받은 아이처럼 설렜다.

‘적어도 오프닝 행사에 나오는 6명 중에선 제일 눈에 띄려나.’

2팀장도 케이팝 아이돌인 진소유를 고르긴 했다. 하지만 타츠야 자신이 직접 보고서 고른 장하양이 진소유보다 모자라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뭐, 모자라면 어때.’

재밌는 놀이 한 번 했다 치면 끝이다.

* * *

성필 또한 멤버들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아니, 그녀들보다 더욱 혼란스러웠다.

진소유가 자신을 만나려는 이유가 감이 잡히지 않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유를 물어도 그냥 밥을 먹자는 거니.’

보통 밥을 먹자거나 술을 먹자고 하는 건 할 이야기가 있단 뜻이다.

친한 사이에서는 ‘밥 먹자’는 말만으로 충분하지만, 교류가 적은 사이에서는 아니다.

적어도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정도의 멘트는 필요하다.

하지만 진소유는 달랐다.

‘식사 괜찮으실까요?’

그게 진소유가 한 말의 전부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식사.

‘정말 식사가 목적이라면…….’

그건 아마 성필과 인간적인 교류를 쌓고 싶단 뜻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왜?

다른 기획사의 이사와 굳이 인간적인 교류를 쌓아야 할 이유가 있나?

‘진저 씨나 에리카 씨처럼 특별한 일이 있던 것도 아니고.’

성필은 이렇게나 혼란한 마음을 가지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슬슬 일본의 지리도 눈에 익게 된 터라, 장소를 찾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진소유는 충견 하치코의 동상 근처에 서 있었다. 알이 큰 선글라스에 모자까지 쓰고 있었지만, 그녀가 진소유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키가 174cm라고 했지.’

성필과 단 1cm 차이다.

진한 청색을 바탕으로 적, 녹, 황, 백, 갖가지 색의 꽃이 어지럽게 흩뿌려진 무늬의 원피스는, 진소유의 이상적인 체형과 합쳐져 사람 자체를 자연의 걸작처럼 만들어놓았다.

도저히 정체를 숨기려는 사람 같지 않았다.

‘나 여기 있어요’라고 광고하려는 거면 모를까.

‘사람들이 엄청나게 쳐다보고 있잖아.’

남자는 당연하고 여자들의 시선조차 진소유에게 빗발치고 있었다.

시선이 얽혀서 그물이 된 것만 같다.

그리고 성필은 저 그물을 넘어서 진소유에게 다가가야 한다. 자연스레 성필도 그물에 걸리게 될 테지.

관심을 즐기는 취향은 없지만…….

‘가야겠지.’

성필은 침을 꼴깍 삼키고 진소유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걸어갈수록 그녀가 점점 커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진소유가 성필을 알아볼 거리가 되자, 성필은 그녀가 크단 게 착각이 아니란 사실을 눈치챘다.

‘나, 나보다 크네?’

사람을 죽일 듯한 킬힐을 신고 있으니 성필을 내려다볼 수 있는 키가 됐다.

성필은 무심코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굽 있는 거 신고 올걸…….’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진소유는 성필을 발견하곤 한 걸음씩 다가왔다. 혹시 뛰어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시원한 워킹이었다.

“박성필 이사님 안녕하세요.”

“네, 소유 씨도 안녕하세요.”

“갈까요?”

거두절미하고 진소유가 길을 재촉했다.

둘은 미리 알아보았던 가게로 향했다.

‘큰일이다. 만나면 할 말들 정리해왔는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계속 입을 다물고 있으면 진소유가 지루해할지도 몰랐다.

성필은 다년간의 매니저 생활로 익힌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발휘하려 옆을 보았다.

그런데 진소유는 옆에 없었다.

“소유 씨?‘

진소유는 성필의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그녀가 정신이 아득해지는 찬란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옆에 설까요?”

“아, 아니요. 편하시면 뒤에 계셔도 돼요.”

아마 진소유는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는 상황에 익숙지 않을 것이다.

어딜 나가더라도 매니저가 옆에 있어서 그의 뒤만 따랐겠지.

성필은 그녀의 심정을 짐작했다. 비록 가는 동안 대화를 못 한다는 건 아쉬웠지만, 이해한다.

그래서 성필은 볼 수 없었다. 뒤를 따르는 진소유가 그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고 있단 사실을.

“아무거나라고 하셔서 호불호 없을 만한 곳으로 골랐어요.”

성필이 고른 장소는 정식집이었다.

“이곳 주인분이 모든 반찬이랑 요리를 수제로 만드신대요. 아이돌이시니까 영양소나 건강도 신경 쓰실 거 같…….”

성필은 맞은편에 앉는 진소유를 보고 숨을 흡 삼켰다.

‘어떻게.’

어떻게 사람이, 그냥 앉는 동작만으로도 이렇게나 고혹적일 수 있는 걸까?

진소유는 존재만으로도 에너지를 뿜어내는 것 같았다. 따스한 햇볕을 타고 흩날리는 꽃잎이 성필의 눈가를 어지럽혔다.

“딱히 영양은 신경 안 써요. 어차피 활동 준비하면서 전부 뺄 거니까요.”

“…….”

“여긴 메뉴를 주인이 정하나 보네요. 신기하네.”

“…….”

“선불이라는데요?”

“아, 네, 그래요.”

성필은 당연하단 듯이 본인이 계산했다.

딱히 그녀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아직 케이어스는 정산도 못 받았을 테니, 돈을 버는 쪽이 계산하는 게 맞…….

“여기요.”

자리로 돌아오니 진소유가 값에 딱 맞춰서 지폐와 동전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성필은 당연히 사양했으나, 진소유는 그럼 가게에 팁으로 주고 가야겠다며 응수했다.

결국 성필은 지갑에 돈을 넣어야만 했다.

그렇게 둘은 마주 보게 됐다.

“…….”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침묵만이 둘을 이어준 유일한 끈이 되어버렸다.

‘소유 씨는 말이 없으신 편이구나. 전에 술집에서 만날 때는 정 이사님이 계셔서 편하게 대해주신 건가?’

게다가 진소유는 부담스럽게도 성필을 응시했다. 성필은 자신이 죄라도 저지른 것만 같은 압박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런 느낌 있지 않은가.

소개팅을 나갔는데 대화가 이어지지 않아서 괜히 초조한 느낌.

“오늘 정말 밥만 먹자고 부르신 거예요?”

“네.”

“……아, 그렇구나.”

“…….”

뭐지.

고문하려고 부른 건가?

다행히 분위기가 더 어색해지기 전에 요리가 나왔다. 신선한 채소가 듬뿍 담긴 카레였다.

둘은 이제 침묵 대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됐다. 그러던 중, 성필은 또 앞에서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뭐, 뭐야. 진짜 내가 뭐 잘못했나?’

진소유는 밥을 먹으면서도 성필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성필의 얼굴에 새겨진 모공 하나하나까지 알아내려는 듯해서, 성필은 부끄러웠다.

성필은 살짝 목이 타서 컵의 물을 마셨다. 그리고 약 3초 후, 진소유도 물을 마셨다.

성필이 카레를 한 입 떠먹었다. 그러자 진소유도 카레를 떠먹었다.

‘어?’

그제야 성필은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소유 씨가 날 따라 하고 계시나?’

왜?

시험 삼아서 성필은 숟가락을 놓고 티슈로 입가를 옅게 닦았다. 그리고 3초 후, 진소유도 똑같이…….

“소유 씨, 왜 저 따라 하세요?”

“따라 하면 안 되나요?”

성필의 말문이 순식간에 막혔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따라 하시는 거면 이유가 있을 거니까요.”

“그냥 어떤 습관을 가지고 계시나 궁금해서요. 의외로 평범하네요.”

“밥 먹는 데 특이한 습관이 어딨…….”

그때 성필의 머리에 불현듯 어느 지식이 상기됐다.

상대를 따라 하는 건 상대의 관심을 끄는 대표적인 행동이다. 또한 본인의 마음을 어필하는 사인이기도 하다.

‘설마.’

이건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다.

‘데이트야!’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지.

진소유가 무엇이 아쉬워서 성필을 향해 이토록 은유적인 어필을 한단 말인가?

당장 ‘내 노예가 돼요’라고 말해도 성필은 개처럼 엎드리며 ‘예’라고 답할 텐데 말이다.

‘그냥 특이한 농담인가 보네. 하양이가 농담하는 것처럼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목적…….’

“혹시 팔뚝 만져봐도 돼요? 운동 열심히 하신 거 같아서요. 단단해 보이네요.”

성필은 확신했다.

‘오레(나), 유혹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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