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이런 사태의 대본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경찰은 결연한 장하양을 상대로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수갑을 안 가져오셨나 보네요. 그럼 경찰서까지 제 발로 가면 될까요.]
장하양에게서 느껴지는 기백은 일상에선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종류였다.
본인의 죄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인간을 본 적이 있는가?
애초에 한국이나 일본처럼 치안이 정교히 확립된 나라에서 범죄자란 일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통계적으로도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아, 그, 본인이, 하양 씨가 향응을…… 박성필 이사한테 사주…….]
[네, 제가 시켰어요.]
그 극히 소수의 범죄자가, 죄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인간이 눈앞에 있다.
장하양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기백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부족했다.
‘죄와 벌’에서 최후의 순간, 본인의 죄를 고백하는 라스꼴리니꼬프 정도가 현재의 그녀와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온갖 문학적 수사를 가져다 붙여야만 장하양의 결심을, 그녀의 의지를 표현할 수 있으리라.
“……이사님.”
리카가 망연히 성필을 불렀다.
“어.”
성필도 넋이 나가 답했다.
“이거, 지금 안 나가면 수습 못 해요.”
“너도 느꼈니?”
“이사님도?”
성필과 리카는 상황실을 뛰쳐나가 장하양을 찾았다.
경찰과 장하양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둘은 촌극이나 다름없는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빨리 체포하라고요! 내가 범인이에요! 배후라고요!”
“아, 아니, 체포, 어떻게…….”
경찰 역은 성필이 나타나자 구원자라도 본 것처럼 표정이 밝아졌다.
“이사님……?”
반면 장하양의 얼굴엔 절망이 서렸다.
대체 무슨 오해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바로잡아야만 했다.
성필이 있는 힘껏 외쳤다.
“구속영장을 발부한다!”
“아?”
“내 마음의 구속영장!”
“…….”
리카가 장하양에게 뛰어가 그녀의 팔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연호했다.
“몰래카메라!”
“…….”
“성공!”
“…….”
“몰래카메라!”
“…….”
“대성고오으아으악!”
성필은 단죄당하는 리카를 바라보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바들바들 떨며 구석으로 뒷걸음질 치는 것도 한계에 다다라, 성필은 벽에 등을 대고 멈춰 섰다.
그 위로 야수의 그림자가 졌다.
“이사님?”
장하양이 성필을 굽어보았다.
“으, 으응, 하양아, 나야아…….”
“1년 뒤에 봬요.”
“으, 응?”
“이사님은 병원에서 1년, 저는 교도소에서 1년.”
* * *
장하양의 몰래카메라는 방송에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 회사와 프로듀서의 범죄 사실을 뒤집어쓰려는 아이돌이 어디 있겠는가.
PD도 난색을 표했다.
“이건 하양 씨가 초반부터 몰래카메라를 눈치챈 걸로 해야겠네요.”
그리 말하는 PD는 귀신이라도 보는 듯 장하양을 힐끔거렸다.
물론 장하양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을 보는 눈이었다.
성필도 충격받았으니 PD의 태도를 이해했다.
“하양아.”
성필은 상황실로 오자마자 말했다.
“그게,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면 안 돼.”
“저도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장하양이 담담하게 인정했다.
“제가 법은 잘 모르지만, 왠지 공범자가 있다고 하면 이사님 죄질이 낮아질 거 같아서. 형량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줄여서 뭐 하려고……. 네 인생이 중요하지.”
장하양은 싱긋 웃었다.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 거 같긴 하다.
하긴, 담당 프로듀서가 관계자들에게 접대함으로써 소녀연맹의 이익을 얻어왔다는데 혼란스럽지 않은 쪽이 이상하겠지.
‘이거 몰래카메라 기획만 봤을 땐 주제가 가벼워서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성필과 제작진은, 멤버들이 기껏해야 뻣뻣이 굳어서 고개만 끄덕일 줄 알았었다.
기대했던 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겁에 질린 멤버들이었지만, 정작 나타나는 반응은 너무 딥했다.
“다음 차례는 아름이에요!”
스튜디오로 들어오는 신아름이 보였다.
장하양도 언제 화냈냐는 듯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영상을 살폈다.
“어, 그러고 보니 슈이치 오빠는 어디 가셨나요? 아까부터 안 돌아오시던데.”
리카의 매니저로 따라왔던 슈이치는 경찰 역 배우에게 잡혀간 뒤로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쉬고 계시겠지.”
“으음, 앗! 아름이가 경찰분 만났어요!”
신아름과 경찰이 독대했다.
성필의 범죄 사실을 들은 신아름은,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핸드폰부터 꺼냈다.
“이사님한테 연락하려나 봐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성필의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경찰이 회유하는 듯 압박하는 듯 신아름을 구워삶던 중, 갑자기 신아름이 날카롭게 답했다.
[여기 인터폴 검색해봤는데요, 체포권이 없네요.]
[예?]
[그냥 각국 수사 협력 기구고요. 그럼 뭐 딱히 강제할 방법도 없는 거죠?]
경찰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리고 일본 경찰분이시고. 일본도 속인주의(屬人主義) 채택하고 있죠? 한국도 그렇고요. 그럼 한국 경찰도 아니시고, 제가 딱히 계속 붙잡혀 있어야 할 이윤 없네요?]
[아니, 저는 인터폴…….]
[그래서요. 체포권도 없는데 뭐 어쩌려고요. 나 갈게요.]
신아름이 쿨하게 방을 나섰다.
상황실의 세 사람도 예상치 못한 사태에 화면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제작진은 더 당황했을 것이다.
“와.”
장하양이 감탄했다.
“이래서 사람이 법을 배워야 하는구나. 아름이 똑똑하다.”
“스마폰으로 검색한 거지만요!”
“그래도 대단하잖아. 경찰 만났는데 검색할 생각부터 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대단하긴 해요! 아타시(저)는 스마폰으로 아이튜브랑 SNS 하는 게 다거든요!”
그때 성필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 속에서는 복도에 나온 신아름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핸드폰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성필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전화를 받았다.
[팀장님 방금 저한테 경찰 왔었어요! 그거 진짜예요? 팀장님이 뭐 무슨, 아 씨 기억도 안 나네. 뭔 범죄 저질렀다던데요? 그거 진짜예요?]
아직 몰래카메라는 끝나지 않았다.
멤버들이 성필에게 전화를 거는 상황은 대본으로도 준비되어 있으니까.
성필은 목청을 가다듬고 우울한 어조를 지어냈다.
“응, 아름아, 미안. 그거 진짜야…….”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
그리고 내쉬는 소리.
그엔 짜증과 물기가 반씩 섞여 있었다.
[팀장님 어디에요? 도주 중이라던데.]
“……아름아 정말 미안한데, 지금 경찰이랑 같이 있어? 다 듣고 있는 거야?”
[엄마 걸고 아니에요.]
어머니를 이런 데 걸면 안 되지!
성필은 겨우 튀어나오려던 말을 삼키고 침착하게 답했다.
[아, 근데 또 모르겠다. 나 도청당하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막 우리나라 뉴스에서도 톡이나 문자 사찰한다고 그러잖아요. 일본에서도 그러나?]
신아름이 실시간으로 국가 망신을 시키고 있었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던 건 맞지만 일본 방송에서 말하면 안 되는데.
[팀장님 지금 어디예요? 빨리 말해줘요.]
“아름아 나 도망갈 거야. 한국 말고 외국…….”
[그러니까 빨리 말해달라고요! 그래야 내가 갈 거 아니에요!]
만약 이곳이 만화 속 세상이라면 성필의 머리 위에 물음표와 느낌표가 100개는 떴을 것이다.
“너, 너너, 무슨, 뭔, 소녀연맹은 어쩌고!”
[일단 확신이 먼저예요.]
“확신?”
[팀장님이 있는 곳을 내가 갈 수 있단 확신이요. 외국 어디에, 내가 찾아갈 수 있단 거요. 이, 이 번호도 언제까지 쓸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신아름의 목소리에 물기가 깃들었다.
[평생, 못 만나게 되면, 연락도 안 되고, 그럼 어떡하는데요…….]
그러니 일단 성필의 거처를 눈으로 확인해두겠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아이돌로 활동하는 건 그다음이다.
신아름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빨리 어딨는지 말하기나 해요. 아, 아니면 나 놔두고, 가려고요……?]
“…….”
그때 리카가 성필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쳐다보니, 그녀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지금 밝혀야 해요.’
동의한다.
성필은 상황실을 뛰쳐나갔다.
그와 동시에 신아름과 마주쳤다.
신아름이 나와 있는 복도는 성필이 있던 상황실과도 이어져 있었으니까.
약 10m의 간격을 두고 성필과 신아름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팀장님?”
“몰래카…….”
신아름이 성필에게 뛰어와 팔을 붙잡았다.
“나 데려가려고 기다리고 있던 거죠? 그죠? 아, 아, 다행이다. 아니, 저기 방에 경찰 있어요! 빨리 가…… 아?”
신아름은 성필의 뒤에 있는 리카와 장하양을 보곤, 놀라움을 못 이겨 평소보다 눈이 두 배는 더 커졌다.
리카와 장하양이 애매하게 외쳤다.
“모, 몰래카메라 성공!”
“아름아 축하해.”
장하양이 뭘 축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일단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신아름은 성필과 멤버들을 번갈아 보더니, 주먹을 꽉 쥐고 성필을 팔을 팍팍 때렸다.
“진짜 언제 철들래요! 보니까 회초리 맞아야 되는 건 내가 아니라 팀장님이야!”
“미안…….”
* * *
PD는 이번에도 곤란한 얼굴이었다.
“아름 씨는…… 방을 나가는 부분까지만 방송에 내보낼게요. 방 나가서 ‘몰래카메라 성공’이라고 말하는 부분만 다시 찍을 수 있을까요?”
어쩔 수 없다.
프로듀서가 죄를 저질러 도망간다는 소식을 듣곤, 함께 도망가겠다는 아이돌을 방송에 내보낼 수는 없으니까.
PD는 이젠 아이돌 당사자가 아니라 성필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성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름아.”
상황실로 오자마자 성필이 말했다.
“나는 너 놔두고 어디 안 가. 설령 사라지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보러 올 거야.”
“그냥 지금 멀리 사라져요.”
“미안…….”
“……진짜 가진 말고요.”
그러면서 신아름은 또 성필의 팔을 팍 쳤다.
성필은 헤헤 웃으면서 팔을 문질렀다. 그리고 다음 차례인 조아라를 눈에 담았다.
화면 속의 그녀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싱글벙글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아라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아라쨩 얼마 전에 무슨 댄스 크루 사람들이랑 친해졌댔어요! 광장에서 댄스 배틀도 했대요!”
“오, 그래?”
조아라는 전생에서도 댄스 싸이퍼를 좋아했다.
학원 사람들과 자주 무작위 음악을 틀어두곤 영상으로 찍었었다.
“아라도 친구를 사귀었구나.”
스트레스를 풀 곳이 생겼으니 좋은 일이다.
“근데 조아라 쟤는 별로 재미없을 거 같은데요.”
“그런가?”
“네. 조아라는 걍 인상 찌푸리면서 비협조적으로 대응하는 게 다일걸요.”
신아름이 꽤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 장하양도 가세했다.
“나도 그럴 거 같아. 아라가 기가 세잖아. 약간, 강도를 만나도 침착하지 않을까.”
“아라쨩은 멋지니까요!”
리카는 눈을 반짝이면서 경찰과 독대한 조아라를 바라보았다.
“걸크러쉬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거예요!”
걸크러쉬 조아라는 경찰과 만난 후부터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리고, 경찰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고개를 주억였다.
누가 보아도 겁먹은 태도였다.
“…….”
“…….”
“…….”
“…….”
“……이게 걸크러쉬? 내가 지금까지 봤던 걸크러쉬는 대체?”
성필이 조아라를 놀렸지만 리카는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멤버들은 예상치 못한 조아라의 태도에 아예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다.
그토록 자기주장이 강한 조아라가 경찰 제복만 보고도 몸을 웅크린 땃쥐처럼 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라 씨, 정말 몰라요?]
[네…….]
[어디 짐작 가는 곳은?]
[모르, 모르겠어요…….]
[하아,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제대로 말씀해주세요!]
[죄, 죄송합니다…….]
이게 제작진이 당초에 기대했던 모습이었다.
시종일관 당황하는 태도 말이다.
비록 앞서 찍은 세 명 모두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반응을 보여주어 제작진의 대본이 전부 휴지 조각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후반에 가선 제작진의 의도에 따라주는 멤버가 나왔다.
그런데.
“아라쨩이 불쌍해요…….”
리카의 말에 다들 동의했다.
그 당찬 조아라가 저자세를 유지하는 건, 그녀를 아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아라가 원래 이런 애긴 하지.’
전생의 조아라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녀는 어릴 적의 트라우마 때문에 경찰관을 무서워한다고 한다.
초등학교 1학년, 조아라는 하굣길에 불량식품을 샀다. 포장을 뜯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린 즉시, 길가에 대어둔 순찰차에서 고함이 들렸다.
그날 경찰관의 기분이 안 좋았는지 어땠는지는 몰라도, 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게 범죄라면서 조아라를 심하게 혼냈다는 모양이다.
그걸 조아라는 울면서 계속 들었고.
‘주변에 경찰차만 지나가도 마음 졸이는 애인데.’
직접 경찰을, 그것도 인터폴이란 사람을 대면하고 있으니 얼마나 무서울까.
“지금 나가주셔야 할 거 같습니다.”
제작진은 몰래카메라의 끝을 고했다.
조아라는 제작진이 정성 들여 준비한 서프라이즈 상황들에 전부 ‘네’라고 답할 뿐이었다.
본인이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만 주억이니 몰래카메라에서 기대하는 반응이 나오지도 않았다.
성필은 멤버들과 제작진을 뒤에 두고 조아라가 있는 방을 찾아갔다.
안쪽의 상황을 파악한 뒤 타이밍에 맞게 문을 열었다.
“어쩔 수 없군요. 아라 씨, 서까지 동행해주셔야겠습니다.”
경찰이 성필의 등장과 맞물려 그리 말했다.
조아라는 어깨를 움찔 떨며, 자신의 뒤에서 문이 열린 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겁먹었다.
“구속영장을 발부한다.”
성필이 연기 톤으로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면서 말했다.
조아라는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내 마음의…….”
조아라가 고개를 완전히 뒤로 돌렸을 때, 성필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잔뜩 겁에 질린 조아라의 표정은 너무나 애처로웠고, 무심코 포옹하여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성필은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다.
“내, 내 마음의 구속영장!”
“……?”
“서까지 동행해주셔야겠습니다!”
이어서 멤버들과 카메라를 든 제작진이 조아라가 우르르 몰려가 폭죽과 환호성을 터뜨렸다.
“몰래카메라 성공!”
그제야 조아라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아 뭔데! 뭐 하는 건데에에에!”
“아라쨩 무서웠어? 이제 우리가 왔으니까 걱정하지 마! 범죄자 이사님은 우리가 처리했어!”
“진짜 뭐냐고! 뭔데! 왜 사람 놀리고 그러는데에에에!”
조아라는 자신이 보였던 태도가 한 번에 기억나기라도 했는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창피해했다.
처음으로 몰래카메라다운 마무리였다.
* * *
상황실은 처음보다 훨씬 북적였다.
“조아라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 겁 많네?”
“야, 나도 뭐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 좀 몰래카메라 같긴 했어.”
“또 허세 부리네. 너 어땠는지 영상 감아서 보여줄까?”
“다 상황 맞춘 거라고. 거기서 내가 대놓고 반항하기라도 할까? 경찰이라잖아.”
“‘경찰이라잖아’.”
신아름이 우습게 조아라의 성대모사를 했다.
“진짜 웃겨 죽겠네. 조아라 너 앞으로 출근할 때 어른 손 잡고 같이 와라. 중간에 불량배들 만나면 돈 다 뜯기겠어.”
“그만해라.”
조아라는 정말 분노가 머리끝까지 이르기 직전이었다. 그것을 안 신아름은 헤실헤실 웃으면서 딱 장난을 멈추었다.
“아라야, 내가 범죄 저질렀단 거 듣곤 어땠어?”
“아저씨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우리 아라 아직도 허세 덜 빠졌네.”
“……근데 아저씨가 뭐 했댔죠?”
패닉이 오긴 했었나 보다.
성필이 뭘 했다고 듣지도 못할 만큼 충격받았던 모양이니.
“설하 보면 알 거야. 거짓말은 다 비슷하거든.”
“아니 근데 내 반응이 현실적인 거 아니에요? 정황도 정확히 모르는데 뭐라고 할 순 없잖아요.”
“알겠어 아라야.”
“어린애 부르듯이 하지 마요.”
“어른 아라야, 알겠으니까 더 포장 안 해도 돼.”
“아저씨 내가 괴롭히고 도망가면 어쩌려고 그러는데요. 뭐 다리가 다 낫기라도 했나?”
조아라가 성필의 깁스를 톡톡 두드렸다.
고슴도치가 두려움에 몸을 마는 것만 같아서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근데 신아름이랑 하양 언니는 어떻게 반응했어?”
“아름이는 이사님이랑 한낮의 도피를 벌이려고 했고 하양 언니는 이사님의 죄를 뒤집어 쓰려고 했어!”
“가르쳐줄 마음 없으면 없다고 하지 왜 또 거짓말이야. 안 그래도 몰래카메라 당해서 기분 더러운데.”
“진짠데?!”
“그럼 너는?”
“난 당당하게 안 믿는다고 했지! 난 가로 엔터를 믿으니까!”
조아라는 세 사람의 반응을 믿지 않는 듯했다.
직접 보았던 성필도 믿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쌤 왔다.”
조아라는 언제 억울해했냐는 듯 누구보다 화면 가까이로 다가왔다.
마지막 희생양인 백설하는 아무것도 모르고 스튜디오 내부로 들어왔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허리를 90도로 숙이면서 인사하는 건 기본이었다. 그녀는 스튜디오로 들어오자마자 스태프들에게 자그마한 간식도 돌렸다.
“쌤 저거 뭐예요. 아저씨가 시켰어요?”
“아니, 설하가 저러는 건 나도 처음 보는데.”
백설하와 동행한 매니저도 익숙하게 음료와 간식을 스태프들에게 주었다.
멤버들의 일본 활동 중엔 그룹이 아닌 멤버별로 맡은 것도 있다. 이번 몰래카메라의 속임수 스케줄도 그러했다.
“역시 따로 다니니까 연륜이…… 아니, 노하우가 드러나네.”
지금은 해체했지만, 백설하는 소녀연맹 전에도 아이돌로 활동했었다.
그때 배운 것인지 스태프를 향한 소소한 선물과 친절한 태도에 몸에 배 있었다.
“내가 네 번째라 다행이네요. 쌤이 앞 순서였으면 실망했을걸요.”
“아라 너 되게 애가 못됐다.”
“이 스케줄 받아들인 아저씨가 제일 인성 문제 있거든요?”
아무튼, 백설하의 몰래카메라가 기대된단 사실에 반기를 드는 멤버는 없었다.
소녀연맹 공인 귀여움 천재 백설하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여줄 것인가.
다들 화면 속의 백설하에게 주목했다.
[이, 이사님이요……?]
성필이 음원 사재기를 했단 소식에, 기대대로 백설하는 깜짝 놀랐다.
[예. 협력 부탁드립니다. 짚이시는 부분이…….]
[이거 몰래카메라죠?]
상황실의 전원이 화들짝 놀랐다.
지금껏 이렇게 직접적으로 몰래카메라임을 자신한 멤버는 없었다.
“역시 20대 중반! 우리랑은 연륜이 비교가 안 돼!”
“역시 나이엔 뭔가 있구나.”
“하양 언니가 그런 말 하면 안 되죠. 쌤이랑 한 살 차이인데.”
“아하하, 그래도 언니가 눈치가 빠르긴 한…….”
[몰래카메라, 맞죠, 그렇죠……?]
백설하의 물음에 슬픔이 잔뜩 서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방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녔다.
한순간은 카메라가 설치된 곳을 만지기도 했지만, 워낙 교묘히 숨겨둔 터라 못 보고 지나쳤다.
[거짓말이야.]
백설하는 정신줄을 놓은 사람처럼 한동안 방 안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경찰이 뭐라고 해도 묵묵부답이다.
[거짓말이잖아…….]
카메라를 찾지 못한 백설하는 방 중앙에 우두커니 서곤, 갑자기 허물어졌다.
무릎을 꿇은 그녀는 실 끊긴 인형처럼 쳐져서 눈물만 뚝뚝 흘렸다.
[거짓말이라고 해줘요…….]
백설하는 오열했다.
어째서 우는지, 상황실의 모두가 순식간에 이해했다.
그녀는 성필이 음원 사재기를 했단 사실이.
소녀연맹이 만든 업적이 실은 조작이란 것에.
그녀들이 걸어온 길이 거짓이었단 것을.
[거짓말이잖아아…….]
도저히 견딜 수 없던 것이다.
자신을 비추었던 스포트라이트가 성필이 만든 거짓이란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운다.
이 현실을 직시하면 죽을 것만 같아서, 사탕을 찾는 어린아이처럼 조른다.
차라리 이 세상이 거짓이길 요구한다.
[거짓마알……!]
사실 백설하는 인정한 것이다.
경찰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인정했기에 더욱 서럽게 운다.
부디, 이 비참한 현실을 뚫고 기적처럼 누군가 거짓말이라고 말해주기를.
처참하게 무너진 자신을 붙잡아 일으켜 이 모든 게 장난이라고,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하다고 말해주기를.
눈물로써 세상에 호소한다.
절대로 닿을 리 없는 호소를 이어간다.
“…….”
“…….”
“…….”
“…….”
“…….”
제작진 또한 무너진 백설하를 보고 어떻게 촬영을 이어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경찰 역의 배우는 백설하의 감정에 압도되어 본인의 임무마저 잊어버리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그리고 상황실의 모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방을 뛰쳐나갔다.
촬영장 문이 벌컥 열어젖히고 성필과 멤버들이 동시에 외쳤다.
“몰래카메라!”
실 끊어진 인형이었던 백설하는, 여전히 오열하면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억지로 화사하게 미소 짓는 성필과 멤버들을 보곤.
“아, 흐윽, 끅, 흐, 헤헤…….”
백설하는, 웃었다.
뒤늦게 제작진도 카메라를 들고 들어와 몰래카메라임을 밝혀주었다.
* * *
“…….”
촬영이 끝나고, 밴을 타고 돌아가는 길.
멍하니 있던 리카가 갑자기 차창을 쾅 때렸다.
“몰래카메라 하나도 재미없어요!”
리카는 어찌 보면 이 몰래카메라 기획 최대의 수혜자였다. 굴욕적인 장면도 없이 다른 멤버들이 속는 장면을 전부 볼 수 있었으니까.
“이런 걸 대체 왜 하는 건가요!”
그런데, 리카는 촬영이 끝나고 좋은 기분이라곤 남지 않았다.
아이돌로 활동하면서 이렇게나 찜찜했던 적은 처음이다.
“차라리 뺨 때리고 그냥 도망가는 게 더 재밌겠어요!”
차 안의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백설하의 촬영이 끝날 때까지, 경찰의 ‘기다려달라’는 말만 듣고 초조하게 다른 방에서 쭉 기다리고만 있던 슈이치도 그러했다.
슈이치는 불안하게 조수석의 성필을 곁눈질했다. 그 시선을 느낀 성필은 다시금 사과를 전하려 고개를 뒤로 돌렸다.
“얘들아 왜 그래.”
그때 백설하가 붙임성 좋게 웃으면서 리카의 손을 잡았다.
“예능 찍고 나서 분위기가 이러면 어떡해. 나는 괜찮았어. 어차피 다 장난이었구.”
“설하야 미안해.”
“이, 이사님 또 왜 그러세요! 방송이었잖아요! 저도 장난 좋아해요!”
기획만 보았을 때는 성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가볍게 하기 좋은 주제 같았으니까.
문제는, 멤버들의 마음가짐이 너무나 깊었단 것일까.
회사에 대한 것이든, 아이돌로서의 의식에 대한 것이든.
“그러니까 이제 사과는…….”
“언니.”
장하양이 백설하의 손을 꼭 쥐었다.
“앞으로 제가 지켜드릴게요.”
“으, 응?”
“맞아요.”
맨 뒷좌석에 있던 신아름은 뒤에서 백설하의 어깨를 껴안았다.
“쌤 울리는 사람 앞으로 전부 다 저희가 처리할게요.”
“아, 고, 고마워…….”
“그리고 쌤은 남 의심하는 버릇 좀 들여요.”
조아라는 백설하의 어깨를 꾹꾹 주물러주었다.
“쌤 만약 남친이 아무 말도 말고 돈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줄 거예요?”
“남친이……? 어, 그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빌려줘야 하지 않을까……?”
“돈이 없으면요?”
“대출…….”
“쌤 남자 사귀면 우리한테 검사 맡고 사귀어요. 알았어요?”
“어?!”
“그래 설하야. 나랑 상견례 꼭 한 뒤에…….”
“아저씨는 조용해요.”
성필이 쭈그러들었다.
“쌤!”
리카가 백설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백설하는 멤버 전체에게 안기고 잡힌 모양새가 되었다.
몸 곳곳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백설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론 저희만 믿으세요! 험난한 길이지만, 아무것도 쌤한테 상처를 줄 순 없으니까요!”
“으, 으응…….”
그렇게, 몰래카메라의 성과는 소녀연맹의 굳은 단합으로써 드러났다.
“그으, 그런데 이사님. 저만 몰래카메라에서 운 건 아니죠?”
“…….”
성필은 입을 다물곤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보자 백설하는 안심하여 해맑게 웃었다. 자신만 울었으면 살짝 창피할 것 같았기에.
하지만 안타깝게도 멤버 중에선 백설하만큼 운 사람이 없었다.
‘내가 울었지.’
성필은 백설하의 오열을 보고는 눈물을 찔끔 흘렸었다. 그러니, 그녀에게 아예 거짓말을 한 건 아닐 터다.
“설하야.”
“네?”
“내가 꼭 행복하게 해줄게. 최고의 아이…….”
“아저씨 오늘은 고백 통제예요. 아저씨가 제일 잘못했어요.”
“손나(그런)!”
“속죄하고 싶으면 한의사님 레시피 별 다섯 개짜리 요리로 보상해요.”
한구인 레시피 별 다섯 개면 성필에게도 상당히 버거운 과제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그럼 오늘은 다 같이 식사라도 할까?”
그래, 그래야겠다.
적어도 오늘의 일을 찝찝함으로 남겨둘 수만은 없다.
함께 유대를 다지며, 다시금 서로가 얼마나 서로를 위하는지 되새겨보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슈이치 씨도 오세요.”
“아닙니다.”
“슈이치 오빠도 오세요! 오늘 네 시간이나 몰래카메라 당했잖아요!”
슈이치는 리카의 몰래카메라가 끝나고도 소식을 전달받지 못했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방에서 무려 4시간을 보내야만 했었다.
어찌 보면 그도 몰래카메라의 피해자였다.
“괜찮습니다.”
“슈이치 오빠 우리랑 너무 거리 두는데?”
“맞아 맞아!”
“아니, 그…….”
슈이치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희미하게 붉혔다.
“오늘, 여자친구랑, 그…….”
“에, 슈이치 오빠 여자친구 있으셨나요! 일본에?”
“예, 예.”
“불쌍해……. 일본에 여친을 두고 한국으로 오신 거였네요……. 혹시 오랫동안 못 만나서 불화아아악?!”
리카는 조아라에게 맞곤 머리를 문질렀다.
“실례잖아.”
“미, 미안…….”
아무튼, 슈이치는 몰래카메라의 숨겨진 희생자임에도 저녁 식사엔 불참하기로 했다.
성필과 멤버들은 몰래카메라의 악질적이었던 부분을 되새기고, 또한 성필의 잔악무도함을 욕하면서 웨벡스로 돌아왔다.
“촬영은 잘되셨습니까?”
“예, 대충요.”
히무라는 성필의 낌새가 이상한 것을 깨닫곤 바로 사과를 입에 담았다.
“죄송합니다. 역시 한국 아이돌에게 하기엔 어울리는 플롯이 아니었나 보군요. 괜히 출연의 건의한 거 같아 죄송합니다.”
“제가 받아들였는걸요 뭘. 괜찮아요.”
“……혹시 멤버분들의 마음이 크게 상했다거나. 그런 일이 있으셨습니까?”
“그냥…….”
다음부터 이런 예능은 죽어도 받지 않겠단 다짐이 생겼을 뿐이다.
성필은 그와 대화를 마치고 멤버들이 있는 연습실로 향했다.
그녀들은 오늘 성필에게 어떤 요리를 요구할지 활기차게 토론하는 중이었다.
“박 이사님 이거 만들어주세요!”
소녀연맹이 숙소로 들어갈 때 받았던 한구인의 레시피북은 일본까지 따라왔다.
리카가 펼친 부분은 난이도 5짜리 ‘비프 웰링턴’이었다. 한구인이 요리 과정을 사진으로 찍고 자세하게 글로 기록해두었다.
“이게 뭐야? 고기를 빵으로 감싼 건가.”
대강 판단하건대, 성필도 어느 정도는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이거 만들어줘?”
성필이 자신만만히 대답하자 멤버들이 낮게 웃었다.
“아저씨 이거 진짜 어려워요. 우리가 다 도전해봤는데 전부 실패했었어요.”
“그런 걸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부탁이 아니라 명령인데요? 실패하면 벌칙 있어요.”
“그래, 사과의 의미도 있으니까 도전해볼게. 근데 벌칙은 뭐야?”
“정장…….”
“진짜 엔간히 해라.”
“아직 말 다 안 끝났는데.”
저녁 식사에 대한 기대로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던 중, 성필의 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일본에서 모르는 번호로 연락을 받은 적은 손에 꼽기에, 성필은 살짝 찝찝한 기분으로 그것을 받았다.
[박성필 이사님?]
그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하는 데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성필은 첫 음절을 듣자마자 주인을 떠올렸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소유 씨?”
멤버들이 크게 놀랐다.
갑자기 진소유가 성필에게 전화를 걸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만약 있더라도 정호환이나 KS 엔터를 통하면 되지, 어째서 직접 걸었지?
“예, 예, 알겠습니다.”
전화가 끝나자마자 장하양이 득달같이 물었다.
“소유 언니예요?”
“응.”
“뭐라고 하셔요?”
“같이 밥 한번 먹자고.”
“……둘만요?”
“그, 그런가 봐.”
멤버들처럼, 성필도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케이어스의 진소유가 성필에게 식사를 제안했다.
타 회사의 아이돌과 프로듀서가 따로 만나 할 이야기란 게 있을 리 없다. 업무적인 연락이라면 회사를 통해도 충분했을 테니까.
혹은.
‘남들에게 못하는 얘기?’
그런 게 과연 무엇일까.
성필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설마 진소유가 KS 엔터에서 나올 테니 가로 엔터로 넣어달라고 할 리도 없고 말이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소유를 받을 순 없지.’
도의적인 문제 이전에 돈이 걸린다.
KS 엔터가 진소유에게 쏟은 돈만 10억을 가뿐히 넘어갈 것이다.
가로 엔터가 진소유를 데려가려면 그 돈의 2배, 3배를 위약금으로 물어야 한다. 당연하게도, 가로 엔터가 그 돈을 내면 당장 회사가 망한다.
“가실 거예요?”
장하양의 질문이 되지도 않는 망상에 빠져 있던 성필을 건져 올렸다.
그러자 성필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다섯 명의 시선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가시는 건 아니죠?”
다시금 되풀이되는 질문.
그에 성필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눈을 꾹 누르던 손바닥을 아래로 천천히 내렸다. 마치 가면을 쓰듯이.
그리고 나타난 성필의 눈동자에는 기묘한 열기가 일렁였다.
“오레(나), ‘유스’가 된다.”
“우라기리모노(배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