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웨벡스로 직접 발걸음한 마하라 타츠야는 비서와 함께였다.
성필과 하시모토, 장하양은 1층에서 그녀를 직접 맞이했다.
‘오늘의 복장은 저번에 만났을 때랑 다르시네.’
그땐 ‘와 역시 패션 디자이너다’ 싶은, 길거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패션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적당히 멋을 낸 수준에서 그쳤다.
그 시선을 알아챈 타츠야는 별거 아니란 투로 말했다.
“전에 만났을 땐 친구들 보여주려고 입었던 옷이었어. 내가 모델도 아니고, 항상 파격적인 옷만 입진 않아.”
“아, 그런 의미로 본 건 아니었습니다. 오늘 입으신 옷도 굉장히 개성 강하고 멋지십니다.”
인간관계론의 철칙 1번, 상대를 칭찬하라.
언제 어디선지 먹히는 성필의 필승법이다.
“당신도 멋지네.”
의외로 칭찬이 돌아왔다.
성필은 아래를 보아 자신의 차림을 살폈다.
딱히 특별한 복장은 아니었다.
평소에 즐겨 입는 세미 정장 스타일.
그나마 조아라가 좋아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눈에 띄진 않는다.
“칭찬 감사합니다.”
“빈말 아니야. 몸에 인간의 흔적이 새겨지는 것처럼 옷도 그렇거든. 옷이 살짝 바랜 게 당신의 삶을 나타내줘. 과하지 않게 꾸몄으면서도 살짝 닳은 옷.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상징이지. 멋져.”
디자이너이기 때문일까. 그녀의 칭찬은 성필의 가슴을 울리는 구석이 있었다.
“나라면 닳은 옷은 입지 않겠지만.”
시비 거는 건가?
성필의 표정이 살짝 굳자, 역으로 타츠야는 씩 웃었다.
“하지만 당신이 말한 대로, 개성이 나타나는 옷이 좋은 옷이지.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개성이 있어.”
“하하, 이런 옷에 개성이랄 게 있을까요.”
“모든 복장엔 개성이 있어. 물론 편의점 갈 때 적당히 입은 옷 같은 건 빼고. 음, 하시모토 매니저.”
대화의 상대는 하시모토로 빠르게 바뀌었다.
“한국 총괄 매니저가 됐다더니 은근히 일본에 자주 보이네. 히라주쿠의 매출 신화는 어디 가고 이렇게 개인적인 일에 얼굴을 비춰? 임원까지 올라갈 생각이 사라진 거야?”
“어느 때보다 열망이 가득하죠.”
“으음.”
타츠야는 새삼스레 성필과 장하양을 훑었다.
방금 하시모토의 발언은 이 두 사람이 한국 매장에 뒤지지 않는 중요도를 가진단 뜻이었다.
하시모토가 성필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 자리의 중요도가 몇 배는 올라간다.
“샐러리맨 신화, 응원할게. 재고를 정리하던 말단 직원부터 어바이비 임원까지.”
“감사합니다.”
다섯 사람은 상층의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후쿠요 히다카’의 팀장급 디자이너가 온단 소식에 히무라가 특별히 마련해준 곳이었다.
큼지막한 소파들이 여유롭게 배치된 응접실엔 미리 다과와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타츠야가 입을 뗐다.
“자, 그럼. 그쪽이 말했던 것처럼 ‘배려’가 담긴 ‘무례하지 않은’ 환경이 조성되었으니 대화를 시작해볼까?”
“따로 자리와 시각을 맞춰주셔서 감사합니다.”
“체면치레는 됐어.”
타츠야는 만남 이후 처음으로 장하양에게 눈길을 주었다.
“먼저 확인부터. 이름이 하아양?”
“네, 소녀연맹 하양입니다.”
“누가 널 캐스팅했지?”
“박 이사님입니다.”
“혹시.”
“네, 옆에 계신 분이요.”
“좋네(이이네). 널, 그러니까, 대중에게 보일 모습으로 만드는, 그런 사람은?”
“박 이사님이요.”
“좋네, 좋아. 생각도 못 한 좋은 자리가 마련됐는걸.”
이 자리의 누구도 타츠야가 한 말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에 신경 쓰지 않고, 타츠야는 확인을 마친 뒤 성필을 응시했다.
성필도 그녀를 보았는데, 중간에 팽팽한 실이 걸린 것처럼 긴장감이 흘렀다.
“난 나만의 아집이 있어. 선입견과 편견도 있지. 그 때문에 실수도 꽤 하는 편이고. 같은 예술가로서 당신의 아집과 선입견, 편견을 한 번씩은 봐줄 수 있어. 이번에 봐준 건 편견이야.”
성필은 그녀의 장황한 어법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예술가’라고 부른 것보다 놀라진 않았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예술가라고 불러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당신도 내 편견을 봐줬으면 좋겠는데. 주고받자는 뜻이야.”
“어떤 편견을?”
“내 지위와 이름을 들으면 어떤 것이든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알았다, 란 이야기지. 설령 아이돌을 클럽으로 부르는 행위더라도 말야.”
성필은 조금 겸연쩍은 기색을 보였다.
‘이미 이야기가 끝난 거 아닌가?’
그 클럽에서, 성필과 타츠야는 각각 무례를 저질렀다. 그리고 다시 만난 시점에서 그 무례는 사라진 게 됐을 터다.
화기애애하게 인사도 마치지 않았는가.
그런데 타츠야는 굳이 그 이야기를 수면 위로 끌고 온 것이다.
“솔직히 하시모토 매니저도 문제였지.”
하시모토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 나를 만나고 싶어서 미칠 거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거야. 서로 다른 파트에 속해 있는데도 자꾸 내 주위에 얼쩡거리면서 새처럼 짹짹거렸거든. 심지어 한국에 있어야 할 인간이 말야.”
하시모토는 대체 홀로 어떤 싸움을 하고 있던 걸까.
“어떤 시간도 좋고, 어떤 장소라도 좋댔어. 그냥 부르면 오겠다니……. 어때, 내 편견을 봐주고 싶은 생각이 좀 들었나?”
어째선지, 타츠야는 클럽에서 있던 일을 완벽히 무위로 돌리고 싶은 듯했다.
아예 0에서부터 시작하자는 것처럼.
성필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냥 서로 오해가 쌓였었네요. 그럼 저희 이제 쌓인 거 없는 거죠?”
“그런 셈이지.”
이제 성필과 타츠야의 관계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 모두 서로가 저지른 무례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 직후, 타츠야의 분위기가 변했다.
어딘가 여유롭고 멍한 태도는 사라지고, 방금 불에 지진 바늘 끝처럼 열기가 일렁이는 듯했다.
“‘룩’이란 단어를 알아?”
“예. 고향에 모델 에이전시를 하는 형이 계셔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룩’이란 패션계에서 쓰이는 용어다.
그렇다고 특별한 뜻은 없고, 단어 그대로 보이는 것(Look)을 뜻한다.
“하아양의 룩을 말해볼 수 있을까? 그냥 예쁘다, 아름답다 같은 건 안 돼. 네가 하아양을 캐스팅할 때 보았던 직관적인 룩을 최대한 언어로 벼려내서 말해봐.”
쉽게 말해서, 성필이 장하양을 처음 봤을 때 그녀에게 느꼈던 아우라를 언어로 설명하란 것이다.
혹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읊으란 것이거나.
어느 쪽이든 남에게 들려주긴 부끄러운 말이다. 당사자가 바로 옆에 있으니 더욱 부끄러울 것이다.
“단순히 ‘예뻐서’가 이유면 실망할 거 같은데.”
하지만 성필은 부끄러움 따윈 느끼지 않는다.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식을 자랑하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부모가 없는 것처럼.
“안 떠올라?”
성필은 오래도록 답하지 않았다.
“……안 떠오른 게 아니라.”
하지만 성필이 답하지 않은 이유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따위가 아니었다.
너무도 길고 많은 답이 있어서였다.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고민한 겁니다. 너무 많아서요. 일단 해보겠습니다.”
성필은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했다.
“하양이는 외줄이 가른 두 세계의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고전적인 미(美)를 지니면서도 기이한 분위기를 풍겼고, 친숙한 미인상이면서도 대면하면 처음 본 오로라처럼 경이롭고도 낯설었습니다. 이 경계 속을 하양이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아 제 시선을 계속 끌었습니다. 재주꾼이 외줄을 탈 때, 관중들이 그 아슬아슬함을 즐기는 것처럼요. 저 또한 그랬습니다. 하양이는 보면 볼수록 질리지가 않아요. 아슬아슬하게 미의 경계를 넘나들며 저를 매료시켜요. 네, 말하다 보니까 알겠는데 이 단어로 정리가 되네요. 하양이는 ‘아슬아슬’해요.”
하시모토는 성필이 미친놈이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았다.
‘이딴 답은 아무리 순발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바로 생각할 수 없어.’
성필은 정말 장하양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그가 했단 말 중 장하양을 꾸미려 괜히 더한 수사(修辭)는 없었다.
모든 게 성필의 진심이면서, 또한 그가 계속 생각해왔던 것이다.
‘미리 생각해두지 않았으면, 계속 생각하면서 이미지와 언어를 갈고닦지 않았으면 내놓지 못할 답!’
이 무슨 변태 같은 인간인가?
설령 연인이더라도 상대를 볼 때 저토록 장대한 언어를 구축하여 애정을 품진 않을 것이다.
“…….”
장하양도 하시모토와 비슷한 마음인 듯, 귀신에게라도 홀린 듯 성필을 보고 있기만 했다.
정작 그 주인공인 성필은 당당함을 유지하는데도 말이다.
“아, 말하다 보니 더 생각났는데…….”
“이제 됐어.”
마하라가 옆에 앉은 비서에게 눈짓했다.
“자, 내가 어제 하아양의 영상이랑 사진을 동료들이랑 공유했었거든. 걔들이 뭐라고 했냐면.”
“상업 광고 모델로는 무겁다.”
비서가 태블릿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룩이 옷을 잡아먹는다.”
“그나마 향수는 분위기를 상품에 그대로 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전형적 미인상인 것 같기도 해서, 런웨이 모델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다.”
“기이(Weird)한 오오라가 모자라다.”
“눈을 사로잡는 구석이 있다.”
비서가 읊는 여러 의견들에선 뚜렷한 합의가 나지 않았다.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타츠야는 비서의 입을 손짓 한 번으로 다물게 만들고, 성필을 향해 애매한 미소를 보였다.
“맞네, 아슬아슬.”
타츠야가 엄지와 검지를 직각으로 세워 그 안에 장하양의 실루엣을 담았다.
“그렇지만 확실히 말하지. 엣지(Edge) 있어.”
그 말에 하시모토가 놀라움을 표했다.
‘엣지’ 또한 패션 용어다.
상업 광고 모델이 아닌 캣워크를 걷는 진정한 패션의 아방가르드들, 런웨이 모델을 향해 흔히 쓰이는 말이다.
강렬하고 놀라우며 고유한 동시에 특이한.
그런 이들이 런웨이에 오르며, 흔히 업계인들에게 ‘엣지 있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리고 ‘후쿠요 히다카’의 팀장급 디자이너가 장하양을 ‘엣지 있다’고 평한 것이다.
“물론 하아양은 아름답지. 아름답기만 한 건 지겹단 뜻이야. 그런데.”
지금껏 웃어도 입꼬리만 움찔거리는 게 전부였던 타츠야의 얼굴이, 마침내 부드럽게 풀렸다.
“하아양은 그냥 아름다운 게 아니야. 기괴할 정도로 아름다워. 이 자리에서 권유하지.”
타츠야는 장하양이 아닌 성필에게 물었다.
예술품이 아니라 예술가에게 권유했다.
“‘후쿠요 히다카’의 런웨이에 세울 생각이 있을까?”
미래의 그랑드 쿠튀리에르가, 권유했다.
“8월의 도쿄 패션위크에서.”
* * *
만남이 끝나고부터 하시모토는 뺨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성필이 생각하기에 기뻐서 그런 듯했다.
‘하시모토 매니저님은 계속 하양이를 주시해왔었으니까.’
홍보팀 강지혜에게 듣기로, 하시모토는 장하양의 브로마이드를 보자마자 거의 눈으로 핥듯이 했다던가.
하시모토는 장하양의 ‘룩’에 대단한 확신이 있던 것이다. 그녀가 하이패션(대중패션과 대비되는, 디자이너의 철학이 담긴 고급패션)도 소화할 수 있는 인재라는 확신이.
‘그 확신이 타츠야 씨한테 인정받았으니 기쁠 수밖에.’
하시모토는 매장 매니저지만, 그 또한 패션 업계 종사자다.
본인의 안목을 인정받고픈 욕망이 있을 것이다. 인정을 주는 상대가 대단한 디자이너라면 더욱 좋을 것이고.
“하시모토 씨 또 그러다가 넘어지겠어요.”
그를 웨벡스의 지하 주차장까지 바래다주는 길, 몇 번이나 위태로운 상황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죄송합니다. 그게, 열병이라도 걸린 것 같군요.”
“그렇게 좋으세요?”
“좋다마다요. 미래의 ‘후쿠요 히다카’ 수석 디자이너가 하양 씨를 인정해준 겁니다.”
즉, 하시모토의 안목이 인정받았다.
이는 어바이비 내에서도 그의 평판을 올려줄 기제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패션계나 어바이비 내부 사정에 문외한인 성필로선, 이 일이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박 이사님, 다시 마하라 님을 만나겠다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니,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걸 압니다.”
“뭘요. 하양이도 좋다고 했으니까요.”
“하양 씨께도 감사드립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매니저님께 더 감사드리죠.”
하시모토는 클럽에서의 사건이 있고 난 후, 장하양에게 죄책감을 가졌었다.
좋은 기회가 될지 모른다 하여도, 본인의 욕심 때문에 무리한 약속을 잡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장하양의 미소는 이미 그런 일 따위는 잊은 듯하여, 하시모토에게 적잖이 위로가 됐다.
“두 분 다 감사드립니다. 마음 같아서는 식사라도 함께하고 싶습니다만, 키무 쿤이 제발 매장에 좀 붙어 있으라고 성화여서 빨리 돌아가 봐야겠군요.”
성필은 그 키무 쿤이란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현재 굉장히 힘들어한단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게 중간관리자의 슬픔이겠지.
“그럼 패션위크 때 뵙겠습니다. 배웅 감사드립니다.”
하시모토는 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 열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성필이 다 기뻐졌다.
“제가 아슬아슬해요?”
성필의 옆에 있던 장하양이 뜬금없이 물어왔다.
“응?”
“보면 볼수록 안 질리나요?”
장하양이 짙은 미소를 품었다.
성필은 얼떨떨하다가, 곧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아아, 내가 아까 한 말이구나. 기분 별로 안 좋았어?”
누군가가 자신의 외모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건 그다지 달갑진 않을 것이다.
설령 아름다운 사람이더라도 말이다.
표현에는 평가가 들어가기 마련이니까.
‘퍼포먼스를 평가하는 거랑은 질이 다르지.’
외모란 인간이 바꿀 수 없기에, 평가로 받는 감정적 동요나 불쾌가 더 큰 편이다. 그게 칭찬일지라도 충분히 스트레스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장하양은 그런 평가를 면전에서 한마디도 빠짐없이 들었으니, 불쾌하더라도 이해…….
“아까 제 얼굴, 외모…….”
장하양이 자신의 턱선을 검지로 아슬아슬하게 쓸었다.
“표현하려는데 할 말이 너무 많다고 하셨잖아요. 그거 전부 말해주실 수 있으세요?”
“…….”
물론!
성필은 장하양과 엘리베이터로 가면서 그녀의 외모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바쳤다.
있지도 않은 말을 짜내는 게 아니라 어렵진 않았다. 오히려 계속해서 떠오르는 영감을 언어로 정제하는 게 어려웠다.
엘리베이터에 도착했을 때의 장하양은 너무 몰입했는지 문에 이마를 박기까지 했다.
“하양아 괜찮아?”
“네.”
“괜찮구나.”
“네.”
“괜찮은 거 맞아?”
“네.”
엘리베이터 안에 탄 후 장하양은 성필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여 보였다.
“이제 앰배서더로의 길이 한 걸음 더 가까워졌네요.”
“그러게. 정말 가능할지도 몰라.”
“마하라 디자이너님이 저한테 홀딱 반하게 만들게요.”
“응.”
대답하면서, 성필은 묘한 찜찜함을 느꼈다.
오늘 만남에서 정작 장하양은 한 일이 없었다. 타츠야는 아예 그녀에게 관심이 없는 듯하기도 했다.
‘오히려 나랑 제일 대화를 많이 했었지.’
원래 패션계는 모델보다 모델 에이전트와의 관계가 더 중요한 걸까?
그렇게 따지면 성필은 매니저 역할이니, 타츠야가 성필에게만 집중적으로 질문했던 것도 이해가 간다.
“저번에 시부야 갔던 거요, 좋지 않으셨어요?”
“좋았지. 한국이랑은 또 다른 느낌으로 번화한 게 새롭더라. 아무 곳이나 들어가도 여행 기분이야.”
“저도요. 오늘도 가면 좋겠네요.”
장하양이 딴청 피우는 흉내를 냈다.
괜히 바닥을 차거나 휘파람을 불면서, 정말 대놓고 성필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
“하양아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
“네? 뭐가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가자’라고 안 말하고 ‘가면 좋겠네요’라고 하는 거 말야.”
연애에서 흔히 관계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할 때 사용하는 어법이다.
‘가자’라고 말하면 자신이 가고 싶어서 무언가를 하게 된다.
하지만 ‘가면 좋겠다’라고 하면 상대가 ‘그럼 갈까?’라고 말하여, 상대가 먼저 권하는 모양새가 된다.
자신이 무언가를 요구했다는, 남녀관계에서 생기는 미묘한 부채(負債)를 없애는 방법이다.
“날카로우시네요.”
장하양은 딴청을 그만두고 헤헤 웃었다.
“설하 언니가 보는 아이튜브 영상 같이 봤어요.”
“설하는 질리지도 않나 보네…….”
대체 얼마나 연애가 하고 싶은 거야 백설하!
이러다가 나중에 연애하게 되면, 아이튜브로 배운 연애 기법을 엉망진창으로 사용하다가 놀림거리나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어떠세요?”
“난 별로.”
“가요. 가고 싶어요.”
“그래.”
성필은 주도권을 확보하여 만족했다. 물론 장하양도 목적을 이뤘으니 만족했다.
다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버튼을 누른 순간, 두 사람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폰을 확인했다.
성필은 나타난 이름을 보고 꽤 놀랐다.
[정호환: 안녕하십니까 박 이사님…^^ 요즘 잘 지내고 계신지요? ㅎㅎ 저도 일본입니다만… 온 김에 시간이 괜찮으시면 회포라도 풀까 합니다….]
정호환이 일본에 왔다고?
‘아니 뭐, 올 수도 있지.’
여행이든 일이든, 정호환이 일본에 있을 이유야 차고 넘치도록 댈 수 있다.
성필은 바로 답장하려다가, 장하양과의 시간이 우선이란 생각에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와 동시에 장하양도 폰을 뒷주머니로 밀어 넣었다.
“엄청난 우연이네. 둘이 동시에 연락을 받고.”
“그러게요.”
“누구…….”
“아, 나는…….”
“저는…….”
장하양은 부드럽게 눈가를 휘더니, 별거 아니란 투로 말했다.
“케이어스 소유 언니요. 일본에 일이 있어서 오셨다고 만나자고 하셔서요.”
“……소유?”
성필은 방금 정호환에게서 연락받았다.
그렇다면, 정호환과 진소유가 동시에 일본으로 왔다는 뜻이다.
그때 장하양이 단호히 손가락을 좌우로 저었다.
“설마 하는데, 안 돼요. 저 붙잡고 소유 언니랑 미니 팬미팅하려는 거면…….”
“나는 정호환 이사님한테 연락 왔었어. 일본에 왔는데 시간 있으면 만나자고.”
“아.”
“케이어스에 무슨 스케줄이 있었나 봐.”
성필이 은근한 투로 물었다.
“궁금하지 않아?”
“……그럼.”
장하양이 성필 쪽으로 천천히 상체를 기울여 다가왔다.
상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볼 수 있을 만한 거리에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더블 데이트예요?”
“…….”
성필이 침묵을 지키자 장하양이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
“농담…….”
“오케이 소유 보러 빨리 가자!”
더블 데이트, 결……!
“안 돼요.”
“……정 이사님 보러 빨리 가자!”
“그래야죠.”
더블 데이트,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