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장하양도 처음 접한 클럽의 분위기에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꼈는데도 당황이 전해질 정도다.
“하시모토 씨.”
“안쪽에 룸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가시면…….”
“아이돌을 이런 곳으로 부르면 어떡합니까? 솔직히 저의가 의심되는데요.”
“그건 걱정하실…….”
“평소에도 여기 계시는 겁니까? 아니면 하양이를 만나는 날이니 이곳으로 잡은 겁니까?”
하시모토는 올 게 왔단 얼굴로 차분히 말했다.
“적어도, 약속을 했으니 인사라도 나누는 게 어떻습니까? 박 이사님의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이대로 가시면 실례가 될 겁니다.”
“……하아.”
그래, 실례.
만나겠다 해놓고 돌아가면 실례긴 하지.
성필은 장하양에게 팔을 내밀었다.
“잡아.”
“네, 네.”
장하양은 쭈뼛쭈뼛 성필의 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어린아이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 부모를 잡고 다니는 모양새였다.
“갑시다.”
“예, 감사합니다.”
성필은 하시모토를 따라 클럽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분명 평일일 텐데도 플로어는 한 걸음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사람이 가득했다.
성필은 불안하게 장하양의 낌새를 살피는 동시에 하시모토도 쫓아야만 했다.
드디어 사람이 없는 외곽으로 나왔다 싶자, 하시모토는 또 벽을 쭉 돌아 검은색 문으로 다가갔다.
“Stop.”
왠지 모르지만 거구의 백인 가드가 그 문을 지키고 있었다.
하시모토가 이런저런 설명을 하자, 가드는 무전기를 통해 누군가에게 연락했다.
영어로.
‘뭐지? 클럽 컨셉인가?’
힙하긴 하다.
잠시 후 가드가 문을 열어주자 세 사람은 검은 문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
장하양은 살짝 놀란 듯했다.
밖은 귀가 찢어질 만큼 시끄러웠는데, 안쪽으로 들어오니 옆집이 부부싸움 하는 정도로 소음이 줄어들었다.
매끈한 진홍색 복도에는 문이 여러 개 나 있었고, 하시모토는 그중 하나로 들어갔다.
“하시모토 매니저입니다.”
방 안엔 사각 롱테이블을 U자형 소파가 감싸고 있었다.
방 안쪽 유리벽으론 플로어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밖에선 안을 볼 수 없는 매직미러였다.
‘사람은 다섯 명.’
여자 넷에 남자 하나.
‘저 남자가 마하라 타츠야?’
성필의 예상보다 훨씬 젊었다.
게다가 차림새도 은근히 깔끔하고 평범했다.
도저히 외모만 봐선 ‘후쿠요 히다카’의 차기 수석 디자이너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마하라 님, 말씀드렸던 분입니다. 박성필 이사님과 소녀연맹의 하양입니다.”
하시모토는 둘을 마하라에게 보이려고 슬쩍 옆으로 물러났다.
일반적인 상황이었으면 성필과 장하양은 마하라에게 다가가 인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필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장하양이 그의 팔을 쥔 채 불안히 응시하자, 성필이 말했다.
“박성필입니다. 이쪽은 하양입니다. 그리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성필이 마하라를 향해 허리를 숙이자 다들 굳었다.
설마 오자마자 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던 거겠지.
“제가 마하라 님을 뵀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이런 곳’에서는 아닙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아이돌이 있어서 될 만한 곳이 아닙니다.”
이렇게나 사람이 많다.
얼굴을 가리더라도 장하양임을 추측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곳이 밀폐된 룸이더라도 마하라의 일행 중 호기심으로 녹음이나 녹화를 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리스크를 만들지 않으려면 여기서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야 해.’
미래의 수석 디자이너인 마하라를 만나는 것보다, 일단 여기서 나가는 게 급선무다.
“마하라 디자이너님, 얼굴만 비추고 떠나게 되어 죄송합니다.”
하시모토는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 떨기만 했다. 성필은 그에게 나가겠단 뜻으로 눈짓한 뒤 미련 없이 등을 돌렸…….
“편견이 상당한 사람이네.”
그 목소리는 여자의 것이었다.
성필이 뭔가 싶어 뒤로 돌아보자, 마하라의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서 있었다.
한국에선 찾아보기 힘든 원블럭컷에 옛 고대 로마의 토가를 현대식으로 개조한, 동시에 현대적인 액세서리를 가미한 옷을 입은 여자였다.
“편견…… 이요?”
클럽으로 사람을 불렀단 것을 지레짐작 불순한 의도로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하지만 아이돌을 이런 곳으로 부른 게 정상적인 사고방식은 아니…….
“내가 마하라야.”
여자가 말했다.
아니, 마하라 타츠야가 말했다.
“……예?”
“내가 마하라 타츠야라고. 남자 이름 같았나?”
하시모토를 포함한 좌중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졌다.
성필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역린을 건드렸나?’
확실히, 성필은 ‘타츠야’라는 이름만 듣고 당연히 그가 남자겠거니 생각했다.
게다가 룸으로 들어오자마자 남자 한 명에 여자가 넷이었으니, 남자인 타츠야가 여자들을 불러 노는 중이라고 여겼었다.
타츠야가 ‘편견이 상당한 사람이네’라고 했던 건 일말의 거짓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곳’이라고 했지. 뭐, 이런 곳에 부르면 안 되나?”
“……착각한 건 사과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성필은 빠르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아까 인사할 때보다 더 깊이 허리를 숙였다.
솔직히 창피해서 죽고 싶었다.
성필은 조명이 붉은빛이라 다행이라 여기면서, 최대한 달아오른 얼굴을 진정시키기 위해 차분한 어투를 꾸며냈다.
“하지만 약속 장소를 클럽으로 잡은 건 아이돌이란 사회적 지위…….”
“미안하네 ‘이런 곳’이라서. ‘이런 곳’을 운영하는 사장으로서 잠재적 고객일 수도 있는 분께 미안하기 그지없어.”
“…….”
“어쩌지? 인테리어가 실패했나? 저기, 듣고 싶은데. ‘이런 곳’에 초대받는 건 불쾌한가?”
마하라 타츠야는 이 클럽의 사장이었다.
즉, 성필은 그녀를 이름만으로 남자라고 오해했으면서 그녀의 사업장을 ‘이런 곳’이라고 부르는 실례를 저질렀다.
“불쾌한가 물었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그래, 불쾌했나 보군. 들을 것도 없겠어. 거기, 나가.”
타츠야는 새(鳥) 문신이 그려진 검지를 뻗어 문을 가리켰다.
성필은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타츠야의 지시에 따라 방을 나서려 했다. 그를 따르는 하시모토는 계획이 초장부터 망하자 잔뜩 좌절한 기색이었다.
“잠깐, 보여주기로 한 사람은 보여줘야지.”
장하양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시모토의 눈동자에 또다시 희망이 깃들었다. 비록 상황이 안 좋게 굴러가긴 하지만, 마하라에게 장하양을 보여줄 기회 자체는 얻어냈다.
“마하라 씨.”
그런데 대답한 건 성필이었다.
“하양이가 아이돌이란 건 아셨습니까?”
“알았지. 케이팝 아이돌이라고…….”
“마하라 씨에게 무례를 저지른 점은 지금도 면목이 없습니다만.”
문을 향했던 성필이 뒤를 돌아 마하라와 마주 보았다.
“그러더라도, 이곳이 아이돌이 있을 만한 장소가 아니란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는 아이돌이 클럽을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사회적 물의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문화적 차이라고 이해하겠지만.”
당연하게도 그렇진 않다.
“하양이가 아이돌임을 아셨음에도 만나는 장소를 이곳으로 잡으신 건, 배려가 부족하신 거 같습니다.”
똑바로 말해서, 무례한 일이다.
마치 본인의 권력을 과신하며, 권위를 보이기 위해 일부러 약속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듯하지 않은가.
그러고도 아무 일이 없으리라고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이런 일로 뭐라고 한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권력과 권위에 중독된 이들은 본인의 무례를 참아주는 게 당연한 예의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성필은 그런 예의에 따라줄 생각이 없었다. 장하양이 당한 무례이니 더욱더.
“내가 그쪽은 나가라고 했었는데.”
“예, 나가겠습니다. 다만 저 혼자는 아닙니다.”
성필은 장하양을 끌고 방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가는 건 금방이었다.
조금 빠른 걸음이었는지, 뒤따라오던 하시모토는 숨을 헉헉댔다.
한여름인지라 들어올 때 시간은 저녁이어도 아직 해가 남아 있었는데, 이젠 끝자락마저 숨기고 완전히 달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계단을 타서 지상으로 오자마자 성필이 말했다.
“왜 마하라 디자이너님이 여성분이라고 안 말해주셨어요! 엄청 실례했잖아요!”
성필의 편견 때문이긴 했지만, 미리 하시모토가 언질을 주었으면 실례 하나는 덜 저지를 수 있었다.
물론 마하라 타츠야를 만나기 전 인터넷에 그녀를 검색해보긴 했지만, 별다른 정보는 나오지 않았었다.
“말씀드렸지 않았던가요?”
“안 했어요!”
“미래의 수석 디자이너, 그랑드 쿠튀리에르라고 말씀드렸던 거 같은데요…….”
“……‘후쿠요 히다카’ 수석 디자이너는 여자만 될 수 있나요?”
“그랑드 쿠튀리에르는 여성형 명사입니다. 남성형은 그랑 쿠튀리에고요.”
“…….”
성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자신의 이마를 팍 때렸다.
“프랑스어를 조금 배웠어야 했는데. 제가 실수했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제 잘못이 맞으니까요. 타츠야가 여자 이름일 수도 있죠.”
“마하라 님은 그 부분에 굉장히 민감하십니다.”
하긴, 한국에서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 단골로 놀림당하는 이유가 이름 아닌가.
남자가 여자 같은 이름을 가졌다거나, 여자가 남자 같은 이름을 가졌다거나.
타츠야가 그에 트라우마가 있더라도 이상한 건 아니다.
“아무튼…….”
하시모토가 우울하게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좋은 기회를 놓쳤군요. 아니, 놓쳤단 건 어폐가 있겠군요.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하시모토는 마하라가 있는 곳이 클럽이란 것을 알았다. 아이돌이 갈 만한 곳이 아니란 사실도 알았고.
하지만 언제 또 마하라의 시간을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성필과 장하양에겐 무례한 처사가 될 것을 충분히 인지했음에도 오늘의 약속을 강행해버렸다.
심지어 목적지를 성필에게 숨기면서까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성필은 하시모토의 반응이 의외였다.
왜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았느냐면서 성필의 융통성을 탓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보통 사회생활에선 그러는 경우가 많으니까.’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란 것을 알면서도, 서로가 눈감으면 확실한 이익이 보장되는 상황이 있다.
작게는 회식에서 상사의 눈살 찌푸려지는 술주정을 참는 것부터, 크게는 비위(非違)를 눈감아주는 것까지.
사회생활의 이익이란 대개 본인의 자아와 자존심을 죽여 얻는 것들이다.
‘매니저님도 높은 지위에 올라온 만큼 그쪽 부분에선 관대할 줄 알았는데.’
오늘 약속을 강행한 것만 해도 그러하다.
하지만 하시모토는 성필의 뻣뻣함을 탓하기보다 죄책감을 가지는 쪽을 택했다.
“아니에요, 괜찮. 괜찮지는 않죠 솔직히.”
만약 한국에서 어느 기업 관계자가 장하양을 클럽으로 부르는 일이 있었다면, 성필은 앞뒤 안 가리고 욕부터 박았을 것이다.
일본이라서, 혹시나 성필이 모르는 문화 풍토가 있을 것이라 여겨 평소보다 성질을 죽였을 뿐이다.
“죄송합니다. 그, 하양 씨께도 사과드리겠습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나쁜 마음은 없으셨잖아요.”
하시모토는 장하양의 위로를 듣고 그나마 마음이 편해졌는지 애매한 미소를 보였다.
“웨벡스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저희는 시부야에 일이 있어서요. 그리고 매니저님은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셔야죠.”
하시모토는 한국 총괄 매니저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장하양과 성필을 위해 시간을 내어 일본에 머물렀었다.
이미 충분한 호의를 받았으니, 더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그 호의가 불의의 사태로 종잇조각이 되었으니.
“그렇군요.”
하시모토도 성필의 의중을 알아챘다.
“제가 없는 동안 키무 쿤이 고생했을 겁니다. 빨리 돌아가서 일을 덜어줘야겠군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아니요, 저희가 감사하죠.”
하시모토는 성급했을 뿐, 성필과 장하양에게 이득이 될 만남을 주선했단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하시모토와 헤어진 성필은 그가 사라질 때까지 배웅하곤, 장하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이 이렇게 돼서 참…….”
성필은 장하양의 눈치를 살폈다.
혹여 그녀가 ‘좋은 제안이 올 수도 있는데 장소쯤은 참을 수 있지 않나’라고 생각할까 걱정됐다.
“일찍 끝났네요.”
그런데 장하양은 마하라를 만났던 일은 전부 잊었는지 쾌활하게 말했다.
오히려 오늘 중 그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럼 갈까요?”
“응? 어디?”
장하양이 오늘 중 그 어느 때보다도 표정이 안 좋아졌다.
“농담이야. 디저트 카페 맞지?”
“이사님 농담 통제예요.”
“참나, 내로남불도 이런 내로남불이 없네.”
“이번만 봐드릴게요.”
“너 그거 가스라이팅이야. 빨리 가자.”
성필이 길 찾기 어플을 켜고 카페를 향해가려던 때, 장하양이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왜 그런가 싶어서 돌아보니, 장하양이 쑥스러운 듯 말했다.
“여기 사람 많은데, 팔 안 내주실래요? 클럽에서처럼요.”
“하양아 자꾸 이러면 네가 나를 유혹하는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
“저 길 잃어버리면 어쩌시게요? 저 스크램블 교차로에서 목놓아 울면서 이사님 찾을 수도 있어요.”
“우리 하양이 다섯 살이야?”
“응애.”
성필이 픽 웃자, 장하양은 배시시 웃으면서 성필을 앞질러 갔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너무 신난 나머지 부모를 앞질러 뛰어다니는 어린아이처럼.
“빨리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