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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08화 (308/760)

308화

“제가 드릴 건 권유에 불과합니다.”

응접실로 들어온 하시모토는 그리 말함으로써 성필이 품은 기대치를 낮추었다.

굉장한 비즈니스적 제안이라고 운을 떼긴 했다만, 결국엔 권유일 뿐이라고 말이다.

“모처럼 일본에 오셨으며, 일본 활동에 전력하시는 중이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가 아이돌의 비즈니스는 잘 모르지만, 이런 권유가 딱히 좋게 보이진 않으란 건 알고 있습니다.”

“점점 기대가 되네요.”

“예?”

“딱히 좋게 보이지 않는 권유인데도, 어바이비 한국 총괄 매니저이신 하시모토 씨가 직접 오셨으니까요.”

하시모토 같은 인물이 직접 일본으로 날아와 성필에게 할 권유가 무엇일까.

적어도 성필은 이 시점에서 상상할 수 없었다.

‘내가 전에 봤던, 소녀연맹이 뉴아사에 나가지 않았던 미래. 거기선 어바이비의 도움으로 일본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고 했었지.’

성필이 미래를 바꿨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 어바이비는 소녀연맹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지는 않았다.

소녀연맹이 한국 어바이비 홍보 모델이란 점 덕분에 잡지에 출연한 게 전부였다.

‘만약 어바이비 쪽의 미래가 크게 뒤틀리지 않았다면, 소녀연맹으로 올 이익이 남아 있을 거야.’

성필은 하시모토의 입에서 그 이익이 튀어나올 거라고 예상했다.

“음, 제가 도리어 기대를 키워드렸군요.”

하시모토는 곤란하단 투로 녹차로 입을 적셨다.

“무례하다 싶어서 가로 엔터나 웨벡스에 먼저 연락하지도 않았습니다.”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기고 싶지 않단 뜻이다.

“제 권유는, ‘마하라 타츠야’ 님을 만나달란 것입니다. 하양 씨가요.”

“……하양이가 마하라 타츠야란 분을 만났으면 좋겠단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저 만나달라는 것.

‘혹시 마하라 타츠야라는 사람이 하양이 팬인가? 무슨 대기업의 자제라서 사적으로 하양이를 만나고 싶다던가.’

당연하게도 그런 제안은 무례한 게 맞다.

아이돌을 사적으로 이리 와라 저리 가라 하는 건, 깊게 생각지 않아도 무례의 극치를 달리는 것이다.

‘무슨 깡패 영화에서처럼 연예인 앉혀 놓고 노는 재벌도 아니고.’

확실히 하시모토가 말하길 저어했던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성필은 아직 마하라 타츠야란 사람을 모른다.

“어떤 분이죠?”

“이미 아시겠지만, 어바이비는 크게 두 종류의 회사로 나뉩니다.”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기성복 스파 브랜드, ‘어바이비’.

그리고 어바이비 창립자 중 한 명이자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명품 브랜드 ‘후쿠요 히다카’.

“‘후쿠요 히다카’는 여러 개의 디자인 팀으로 나뉘어 있고, 팀마다 팀장급 디자이너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들 모두를 통솔하는 게 수석 디자이너(그랑 쿠튀리에/그랑드 쿠튀리에르)입니다.”

“수석 디자이너가 히다카 후쿠요 님인가요?”

“아니요. 히다카 님은 총괄 디자이너십니다. 그러니까 수석 디자이너는 히다카 님의 바로 아래의, 브랜드 ‘후쿠요 히다카’에서 디자이너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직위죠.”

“설마 마하라 타츠야란 분이…….”

하시모토는 고개를 저었다.

“마하라 님은 디자이너 1팀의 팀장이십니다. 하지만, 현재 4대 수석 디자이너로 가장 유력시되는 분이죠. 아마 큰 이변이 없고선 그분이 수석 디자이너가 되실 겁니다.”

“그분이 하양이를 만나고 싶다 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아무런 형용사 없이 ‘만나고 싶다’가 전부였습니다.”

만난다고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모른다.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마하라 타츠야는 마치 길거리에 나다니는 강아지를 만지고 싶단 듯 ‘하양이를 보고 싶다’고 했단 것이다.

“최악의 경우, 하양 씨의 얼굴만 슬쩍 보곤 그냥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무시요?”

“예. 기껏 찾아갔더니 손을 저으면서 나가라고 한다거나. 아니, 아예 말도 걸지 않고 고개를 돌리실 수도 있습니다.”

뭐 그딴 사람이 다 있어?

“어떤 기분이실지 이해합니다. 물론 그분이 강력하게 ‘하양 씨를 보고 싶다’고 한 건 아닙니다. 그런 적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동종 업계에서 일하시다가 상대 회사의 아이돌이 유명하단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누구 얼굴 한번 보고 싶네.

그리 가볍게 이야기한 적이, 성필에게도 있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말을 했다고 성필에게 그 아이돌을 소개해주려 하진 않을 것이다.

지나가듯이 한 말이니까.

만약 상대가 정말로 그 아이돌을 데려오면 오히려 성필이 당황할 것이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을 수행할 겁니다. 제 독단입니다.”

“어째서죠?”

“만약, 만약의 경우입니다만, 하양 씨가 마하라 님의 마음에 들기라도 하면…….”

단순하고도 단발적인 관심에 불과할지라도.

마하라의 관심을 순간적으로라도 끌 수만 있다면, 그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박 이사님과 하양 씨의 감정을 배제하고 말씀드리자면, 저는 굉장히 상황 좋은 도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찾아가서 얼굴 한 번 비추면 끝. 실패하면 헛걸음한 게 전부고, 성공하면 반드시 이익이 있을 겁니다.”

겨우 하루.

그리고 하루의 몇 시간.

아니, 고작 수십 분일 수도 있다.

“수십 분으로 하양 씨에게 이익을 가져다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시모토는 정중하게 손을 모았다.

“이 권유를 드립니다. 만나보시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미래의 그랑드 쿠튀리에르.

마하라 타츠야.

“부디…….”

“알겠어요.”

“어, 네, 정말요?”

하시모토는 너무도 놀라 특유의 극존칭마저 전부 잊어버린 듯했다.

“아니, 진짜 괜찮아요? 아니 아니, 괜찮습니까?”

“네. 실패해도 헛걸음 수십 분이라면서요. 가까이 계시는 거죠?”

시간 내서 가보는 편이 이득 아닌가.

오랜 격언인 ‘밑져도 본전’이란 말에 딱 들어맞는 상황이다.

“너무, 무례한 제안이었던 건 아닌지.”

성필이 쉽게도 받아들이자 하시모토가 역으로 혼란이 왔다.

하시모토는 현재 일본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소녀연맹의 멤버를,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오라 가라 한 것이다.

소녀연맹은 행사 한 번이 아쉬워서 여기저기 직접 인사 다녀야 할 급도 아니다.

“정말 괜찮으신…….”

“그럼요. 매니저님이 노력해주셨잖아요.”

노력이란 말에 하시모토가 눈을 크게 떴다.

“저는 팀장급 디자이너란 분이 얼마나 바쁜지는 모르지만요. 아마 하루에도 모델이나 모델 사진을 수십, 수백 장씩은 보시겠죠? 그게 아니더라도 일이 많겠죠?”

패션 업계는 연차가 쌓여서 승진할 수 있는 부류의 업계가 아니다.

높은 위치에 앉아 있으려면 그만한 노력과 능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마하라 타츠야가 받는 업무 강도는 보통 수준은 아닐 것이다.

“청탁이나 소개도 많이 받으실 테고요.”

즉, 마하라 타츠야의 곁엔 비즈니스적인 회유와 청탁, 제안, 유혹이 가득할 것이다.

우리 원단을 써보라고.

우리 단추나 장식을 써보라고.

우리 모델을 한 번만 만나달라고.

그런 종류의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을 들을 게 분명하다.

그 벽을 뚫고서, 하시모토는 해낸 것이다.

“그 와중에 ‘하양이를 보고 싶다’고 말씀하실 정도면, 매니저님이 힘을 쓰신 게 아닌가요?”

장하양의 브로마이드를 면전에서 종일 흔드는 수준은 아니겠지만.

어떻게든 마하라 타츠야의 눈에 장하양이 들어가도록 노력했던 게 틀림없다.

“매니저님이 그렇게 노력하셨는데, 보상이 확실하지 않다거나 무례하단 이유만으로 무를 순 없죠. 어바이비랑 가로 엔터는 협력사잖아요.”

어바이비와 가로 엔터는 협력사.

그러니 성필과 하시모토는 협력자가 된다.

“……그렇군요.”

하시모토는 살짝 허탈하게 웃었다.

성필이 짚은 게 모두 정확했다.

자신의 노력을 알아주길 바랐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눈치채 주니 기쁘긴 하다.

“결행은 이틀 뒤입니다.”

“진짜 작전 같네요.”

“장소는 그날이 올 때까지 알 수 없지만, 시간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저녁 7시 이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이틀 뒤, 가능하십니까?”

성필은 머릿속의 스케줄을 뒤져보고 간단히 답했다.

“네, 가능해요.”

이후 두 사람은 신뢰를 가득 담아 악수했다.

“공허한 약속을 드리고 싶진 않지만, 확신합니다. 마하라 님의 눈에 띈다면 놀랄 만한 기회가 찾아올 겁니다.”

“기대할게요.”

과연 미래의 수석 디자이너는 장하양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성필은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의 대화가 끝났을 땐 장하양이 다음 스케줄을 준비할 시각이었다. 적어도 느긋하게 디저트 카페나 갈 시간은 없었다.

“이야기는 잘 끝나셨나요.”

왠지 분위기가 내려간 장하양에게, 성필은 하시모토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혹여나 불쾌해하면 어쩔까 걱정했지만.

“헛걸음하면요.”

“응?”

“그날 저녁은 쭉 일이 없는 거죠?”

“아마 그렇게 되겠지?”

“그럼 그때 가면 되겠네요.”

성필이 어이가 없단 듯 웃었다.

“하양이 너 정말 디저트 카페 가고 싶구나?”

“네, 가고 싶어요. 계속 기대했어요.”

“그래, 꼭 가자.”

* * *

웨벡스가 내어준 소녀연맹의 숙소엔 방이 두 개 있다.

현관 옆에 사람 하나 겨우 누울 법한 작은 방이 있긴 하지만, 용도를 알 수 없어서 그냥 두었다.

원래 멤버들은 한국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방을 배분하려 했었지만.

“새로운 나라에선 환경도 새로운 게 재밌지 않을까요!”

리카의 제의로 멤버 구성을 다르게 하기로 결정했다.

가위바위보에서 이기는 두 명이 한 방을, 나머지 셋이 남은 방을 쓰는 것이다.

장하양은 두 명이 쓰는 방을 얻었다.

한국 숙소와는 달리 개인용품이 적어 살풍경한 방 안에서, 장하양은 창가에 턱을 괴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리카 너 팀장님 좀 작작 놀려.”

“놀린 게 아니라 장난친 거야!”

“그거나 그거나.”

신아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툴툴거리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2명이 쓰는 방의 멤버 구성은 장하양과 신아름이었다. 왠지 모르게 어색한 두 사람이 같은 방을 쓰게 된 것이다.

“아름이 왔어?”

“네.”

“박 이사님은 어떠셔?”

리카와 신아름은 다리가 아픈 성필을 돕는단 명분으로 자주 그의 숙소로 갔다.

화려한 목발 컨트롤을 습득한 성필에게 필요한 도움이라곤 그나마 샤워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샤워를 도울 수는 없는 터라, 멤버들은 성필을 돕는다 하더라도 시간만 때우다 오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그냥 놀다 오는 것이다.

“똑같죠 뭐.”

“다행이네.”

장하양은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신아름은 오늘 성필의 숙소에서 있던 일을 들려줄까 고민하다가, 그냥 하지 않았다.

성필은 일본에까지 장하양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었던 목도리를 챙겨 왔었다. 그런데 그것을 오늘 리카가 발견했던 것이다.

‘팀장님 진짜 필사적이셨지.’

지금은 한여름이다.

그런데도 그 목도리는 자주 사용하는 양 옷걸이에 정갈히 걸려 있었다.

리카는 대체 이걸 무엇에 쓰냐며 성필을 놀렸다. 그리고 목걸이를 흔들면서 사방을 쏘아 다녔다.

당연히 성필은 그런 리카를 붙잡으려고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두 다리가 멀쩡한 리카를 잡을 수는 없었다.

‘되게 웃겼지.’

만약 상대가 백설하나 조아라였다면, 신아름은 친구에게 어제 있던 일을 가볍게 던지는 투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장하양이라 하지 않았다.

‘웃겼는데…….’

성필은 대체 무엇에 쓰려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리고 얼마나 소중히 여기기에 한여름에 그 목도리를 가져온 것일까.

과거에도 질리도록 느꼈던 불안감이 뜬금없이 신아름의 밑바닥부터 차올랐다.

언젠가 성필의 주변에는 장하양이나 다른 멤버들이 준 선물로 가득하게 되고.

성필이 신아름이란 존재를 기억하고 추억하고 회상할 수 있는 건…….

‘엄청 옛날에 줬던 수첩 하나.’

신아름이 성필의 머릿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줄어드는 게 아닐까.

성필이 항상 차고 다니는, 장하양이 선물로 준 목걸이처럼 점점 그의 몸을 다른 인간의 향취가 차지하게 돼서…….

“아름아.”

신아름이 멍하니 양말을 반쯤 벗은 상태를 약 3분쯤 유지하고 있었을까.

장하양이 부름으로써 신아름은 자기도 모르게 빠져든 감정의 바닥으로부터 빠져나왔다.

“왜요?”

“세이코 씨 어떻게 생각해?”

갑자기 그 인간 이름이 왜 나오지.

‘아니, 나올 수도 있지.’

원래 대화의 서두는 맥락이 없지 않은가.

“세이코 씨…… 음, ‘씨’를 붙이고 싶지도 않은 사람?”

드물게도, 장하양이 킥킥 소리를 죽여 웃었다.

그게 신아름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평소 장하양이 보여주는 웃음과는 질이 다른 듯해서였다. 방금 웃음은 장하양이 진심으로 웃겨서 웃는 것만 같았다.

“언니?”

“세이코 씨 싫어하는구나.”

“……그렇게 물으면 좋아하진 않죠.”

신아름은 빨래 바구니에 넣을 옷을 분류하면서 답했다.

“진짜 믿기지가 않았다니까요. 팀장님이 본 지 한 달도 안 된 섬나라 년…….”

신아름이 본인의 입술을 찰싹 때렸다.

“일본 여자 구하려고 떨어졌잖아요. 뭐예요 그게. 내가 제대로 보고 있나 했죠.”

“너는 이사님을 이해해?”

“이해는 하죠.”

장하양은 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아름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팀장님은 뭐랄까, 후회하는 삶을 싫어해요. 옛날부터 말버릇이었는데 나한테도 ‘아름아 후회할 거 같으면 그냥 질러버려’라고 곧잘 말했거든요. 창피는 순간이라면서요.”

그리고 성필이 사람이 눈앞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면, 후회할 게 자명했다.

‘혹시 그때 달렸으면 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며 자책했겠지.

“그런 게 싫었을걸요. 애초에 사람을 구할 수 있으면 구하는 게 당연한 거고요.”

그래도 성필의 행동이 심하긴 했다.

세이코가 떨어질 것 같으니 다짜고짜 그녀를 감싸서 함께 떨어지다니.

성필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온 신아름마저도 그 당시의 행동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언니도 세이코 싫어해요?”

“모르겠어.”

“또 나만 나쁜 년 만들어!”

신아름이 툴툴대면서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챙겼다.

“거짓말하지 마요. 언니 저번에 병원에서 세이코한테 과도 들고 달려들려고 했었잖아요.”

“아하하, 그냥 과일 깎느라 들고 있던 거잖아.”

“됐다. 나 샤워하러 가요.”

신아름이 나가자, 장하양은 다시 창가로 다가가 달을 바라보았다.

‘여기보다 더 높았었지.’

성필이 세이코를 구했던 풍경은, 이곳보다 달이 조금 더 가까이 보였었다.

그럼에도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는 무리가 없는 높이였다.

‘나는 박 이사님한테 약속받았어.’

만약 장하양이 아이돌로서 실패한다면, 그 노력의 시간을 돈으로 보상해주겠노라고.

억이 넘을 게 분명한 그 돈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성필이 장장 수년 이상 매일 8시간 장하양을 위해 일하는 것에 상응하는 것이다.

물론 최저시급으로 따지자면 말이다.

‘사장님이 그러셨지. 돈은 마음이라고.’

돈은 마음이고, 시간이고, 노동력이다.

성필은 막대한 마음과 시간과 노동을 장하양에게 약속한 것이다.

그건 절대 평범한 믿음으로 행해질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장하양은 그의 거대한 믿음에 보답하려 노력해왔다.

이런 표현은 뭐하지만, 그 약속은 장하양의 자랑거리였다.

누군가에게 자랑한 적은 없어도, 그녀의 자존감을 이루는 커다란 부분이었다.

‘내가 나를 믿어도 된다는 증거.’

성필의 무조건적인 호의는, 장하양이 자신을 믿을 수 있게 하는 이유였다.

성필이 준, 세상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가장 거대할 게 분명한 호의.

그런데.

“세이코 씨.”

장하양은 조용히 그 이름을 불렀다.

“세이코 씨.”

장하양은 주먹을 쥐었다.

“세이코 씨.”

그 주먹으로 창틀을 툭, 툭, 툭, 쳤다.

“세이코 씨이…….”

장하양은 마음에 쌓인 더럽도록 무거운 덩어리를 주먹에 담아 털어내려는 듯, 온 힘을 다하여 창틀을 내리쳤다.

내리치려 했다.

주먹은 창틀 바로 위에서 멈추고, 장하양은 스르륵 손을 풀었다. 그리고 파괴될 운명이었던 창틀 위로 부드럽게 손을 올렸다.

“박 이사님.”

그래, 신아름이 했던 말이 맞을 것이다.

사람을 구하는 데 이유는 없다.

즉, 성필이 세이코를 구한 건 무언가 커다란 신뢰나 호감이 바탕으로 있는 게 아닐 터다.

우물에 떨어지려는 아기를 구하는 것처럼 무의식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세이코는 비교 대상도 아니다.

그러니 아직까진…….

‘내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어.’

* * *

성필은 장하양을 데리고 하시모토와 만났다.

하시모토가 둘을 데려온 곳은 시부야였다. 시부야는 밤에도 어디든지 빛나는 법이지만, 하시모토가 데려온 곳은 그중에서도 더욱 빛났다.

번쩍이는 이국의 풍경을 홀린 듯 바라보는 성필의 앞에서, 하시모토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입니다.”

어느 건물의 뒤쪽이었다. 그곳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 있었다.

“앞으로 들어가면 시간 꽤 잡아먹힐 겁니다. 마하라 님께는 오늘 하양 씨를 보여드리고 싶다고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운이 좋게도, 마하라 님이 ‘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곳으로 오면 된다고도 말씀하셨고요.”

“여기 뭐 하는 곳이에요?”

하시모토는 잠시 뜸을 들이고 짐짓 쾌활하게 답했다.

“보시면 압니다.”

지하로 가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 문을 열자마자, 굳이 보지 않고도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 알 수 있었다.

복도를 거세게 때리는 EDM이 성필의 추측에 무게감을 실어주었다.

‘설마 여기…….’

에이, 설마.

성필은 본인의 추측을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비상구 문을 열자마자, 성필의 추측은 사실임이 판명됐다.

자홍색의 조명이 난반사되는 넓고 거대한 공간. 수족관을 채우듯 어지러이 움직이는 사람의 떼. 그리고 귀를 때리듯이 파고들어 오는 감각적인 EDM.

“이쪽입니다, 가시죠.”

하시모토가 더욱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마치 이 장소와 자신은 무관하다고 어필하는 듯했다.

그가 어째서 마지막까지 이 장소의 정체를 숨겼는지 알 수 있었다.

성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마하라 타츠야.’

아이돌을 클럽으로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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