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07화 (307/760)

307화

단란한 이시카와네 가족의 주말 저녁.

켄타로, 에미, 유우토는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다.

한 주말 예능 프로그램엔 소녀연맹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들은 그다지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자 마음껏 드세요.]

아이스크림 가게 주인이 환히 웃으면서 명물인 와사비 아이스크림을 멤버들에게 주었다.

카메라가 백설하를 근접해서 잡았다.

[자, 잘, 잘 먹겠습니다아…….]

백설하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미소 지었다.

[마, 마히혀효오…….]

[이딴 게 맛있겠냐!]

조아라가 격한 분노를 표하며 가게 주인을 몰아붙였다.

[우리 리더 우는 거 안 보여?!]

[하하, 이런 맛으로 먹는 거죠.]

[알면서 팔았다고……?]

“근데 쟤는 말투가 왜 저런대냐.”

“응, 누나가 일본어 가르쳐줬대. 놀리려고 가르쳐줬는데 일본 데뷔가 잡혀서…….”

아버지인 이시카와 켄타로는 텔레비전 속의 조아라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엄마는 저분이 마음에 드네.”

이시카와 에미가 백설하를 가리켰다.

백설하는 가게 주인에 대한 성의인지,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기어이 아이스크림을 완식했다.

다른 멤버들이 뜯어말려도 말을 듣지 않았다.

감동한 가게 주인이 아이스크림을 또 주려 하자, 백설하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망가진 웃음을 뱉었다.

“눈빛이 선해.”

“설하 누나 착해.”

“맞다. 유우쨩은 직접 누나네 회사에 갔었지?”

“응…….”

백설하와는 고작 몇 마디 주고받은 게 전부였지만, 그녀의 인성을 알아보긴 모자람이 없었다.

비록 부끄러워서 눈도 못 마주쳤지만 말이다.

소녀연맹 멤버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계속 질문하는데, 맨정신인 남자가 있을 리 없다.

“올해에도 가는 건 어때?”

“한 번 갔으면 됐지.”

“그게, 회사에서 누나를 이렇게나 신경 써주고 있잖니.”

소녀연맹은 요즘 일본 방송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멤버들의 케미는 어떤 플롯에 가져다 두어도 제 역할을 다했다.

그야말로 예능 블루칩이었다.

“다시 감사드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으응, 뭐어, 생각해볼게.”

“그래, 이번에도 다녀와라.”

아버지 켄타로마저 가세했다.

유우토는 가시방석에 앉은 듯했다.

“그 손 이사님도 요즘 자주 들르시잖니. 우리 리카를 맡겨줘서 고맙다면서 자꾸 선물도 주시고. 우리 가족도 답례를 드리는 게 맞는 거 같다.”

아버지의 말마따나, 손혜빈은 자주 이시카와네로 찾아온다.

명분은 일본에 온 김에 리카를 맡겨준 감사를 듬뿍 하겠단 것이다. 하지만 유우토는 손혜빈에게 다른 의도가 있단 사실을 알았다.

‘유우쨩! 이 누나랑 올라가서 진득이 얘기나 할까아?’

이시카와 유우토, 고등학교 2학년.

처음으로 방에 들인 여자는 30대 중반의 손혜빈이었다.

나이를 빼고 보면, 유우토는 미녀를 본인의 방에 끌고 들어왔다는 위업을 달성한 게 된다.

하지만 방에서 벌어지는 일은 유우토에게 꽤 스트레스를 주었다.

‘우리가 보이그룹을 기획하고 있거든? 근데 하, 내가 생각해도 진짜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와. 진짜 대박 난다니까? 연습생 기간 합쳐서 딱 9년만 고생하면 9년 뒤엔 그냥 바로 막 돈방석에 앉는 거거든!’

스트레스…….

‘한국어도 못하는데 어떻게 한국에 가서 연습생을 해요…….’

‘에이, 뭘 모르는 소리야. 대형 기획사에도 한국어 못하는 일본인이랑 중국인이 널리고 널렸어! 원래 언어는 생존하려고 배우는 거라잖아? 한 3개월만 한국에 살면 한국어는 껌이지!’

‘그래도…….’

‘아하, 언어가 걱정이구나? 그럼 유우쨩, 누나가 개인 과외 해줄까?’

‘괘, 괜찮아요.’

‘으음, 그럼 홍 사장님한테 해달라고 할까?’

‘…….’

‘오, 방금 고민했어?’

‘안 했어요!’

항상 대화가 그런 식으로 이어진다.

‘난 누나가 아니라고…….’

한국으로 갈 때의 리카는 귀신에 씌인 인간 같았다.

대체 어떻게 일본인이 한류 배우가 된다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리카는 되겠다고 했었다.

그래 놓고서 아이돌로 활동 중이다.

“올해는…….”

“저 올라갈게요.”

유우토는 아버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2층의 방으로 올라갔다.

부모님은 유우토의 버릇없는 태도에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흔한 사춘기 현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침대에 누운 유우토는 그날 쉽게 잠들지 못했다.

‘드디어 돈 모았네.’

댄스 학원에 용돈을 가져다 바친 지 어언 한 달이 지났다. 이번 달도 학원에서 계속 수업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유우토는 돈을 야금야금 모아 취미 생활에 쓸 돈을 마련했다.

‘소녀연맹 앨범 사야지.’

유우토는 특히 이번 앨범의 수록된 곡인 ‘롱 포’가 기대된다.

듣자 하니 소녀연맹이 데뷔 쇼케이스에서 ‘롱 포’를 직접 밴드 악기로 연주했다던가.

그야말로 유우토의 취향을 직격한 곡이었다. 밴드 사운드 아이돌…… 누가 이걸 싫어할까?

“유우토, 오늘 밴드는…….”

“난 오늘 패스. 선배님들한테 말 좀 해줘.”

“여친이라도 생겼냐?”

“아니.”

“넌 진짜 얼굴이 아깝…….”

유우토는 친구의 비아냥을 넘기고 흥분된 기색으로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의 등에는 영원한 친구(가 될 예정)인 일렉 기타가 함께였다. 오늘 집에서 ‘롱 포’를 연습해 볼 생각이었다.

‘헤에, 프로모션이 굉장하네.’

유우토가 온 곳은 일본 최고의 음반 판매점, ‘타워레코드 시부야’였다.

케이팝 코너의 입구부터 천장에 달린 소녀연맹의 플라스틱 현수막이 그를 반겨주었다.

‘앨범이 잘 팔리나 보다. 타워레코드 시부야에서 이렇게 광고를 걸어줄 정도니.’

웨벡스의 영업력이 빛을 발한 거지만, 유우토가 그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소녀연맹의 앨범들은 객관적으로 잘 팔리기도 했다.

전설적인 데뷔 쇼케이스 무대와 방송가를 종횡무진 누비는 소녀연맹의 행보. 또한 여러 잡지에도 꾸준히 얼굴을 비추는 게 그녀들이었다.

무엇보다 ‘뉴아사’에서의 우승이 큰 역할을 했다.

조금 과장이지만, 현재 일본에서 소녀연맹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초동판매량이 10만 장 넘었다고 했었지.’

소녀연맹의 일본 데뷔 앨범은 오리콘 앨범 데일리 차트 1위를 4연속으로 차지하다가, 마침내 앨범 위클리 차트 1위까지 차지했었다.

‘예전에 케이 무슨 그룹 이후로 이렇게 뜬 케이팝 그룹은 또 오랜만이네.’

유우토는 케이팝 코너로 발을 들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중, 소녀연맹의 앨범이 진열된 곳을 쉽게도 찾았다.

‘단독 섹션이 있네?’

소녀연맹의 입간판을 걸어둔 앨범 단독 코너가 존재했다. 덕분에 직원에게 물어보는 수고 없이 소녀연맹의 앨범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있다 마스터 에디션!’

유우토가 타워레코드 시부야까지 먼 길을 온 이유가 있었다.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품절’이란 단어만 뜨는 소녀연맹의 일본 데뷔 앨범 마스터 에디션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유우토가 싱글벙글 그쪽으로 가려 했을 때.

“오오 이시카와!”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에 유우토의 걸음이 굳었다.

뻣뻣한 목을 돌리니, 예전에 같이 노래방을 가서 친해진(상대의 생각) 타 학교 밴드부의 여학생이 있었다.

이름이 나카노 이로하였던가.

“안냥!”

“아, 어, 으응, 안녕…….”

“에에, 반응이 시원치 않은데에. 안냥!”

“아, 안냥…….”

하필 이곳에서 지인을 만나다니.

일본에서 걸그룹의 인식은 대체로 이러하다. 소수의 남자 오타쿠만이 즐기는 마이너 문화.

일본은 아이돌이 점령하다시피 한 한국 음악계와 달리 많은 장르가 병존한다. 그중에서 걸그룹의 취급은 좋지 않았다.

‘하필 소녀연맹 데뷔 앨범 마스터 에디션을 사려고 할 때 만나다니!’

그나마 케이팝 걸그룹은 여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어서 취급이 나은 편이지만, 그래도 남자가 걸그룹 앨범을 산단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유우토는 서점에서 라이트노벨을 사려다가 다른 학교의 지인을 만난 상황인 것이다.

“헤에, 이시카와 케이팝 듣는구나.”

“으, 으응, 뭐어, 조금…….”

“어떤 그룹 좋아해?”

유우토는 소녀연맹 외의 케이팝 그룹 따윈 모른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주변을 훑었다.

제발 정상적인 그룹의 이름이 눈에 띄길 바라면서.

“앗 잠깐만 내가 맞춰볼게! 으음, 세븐데이 맞지?”

3대 기획사에서 프로듀싱한 밴드 아이돌이다.

당연히 유우토는 그런 건 모른다.

‘그, 그런데 나카노가 내가 들을 거 같다고 생각했으니까 괜찮은 그룹이겠지?’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낚시를 걸 정도로 이로하가 성격파탄자는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3대를 저주할 거다.

“으, 응. 맞아. 세븐데이 좋아해.”

“여억시 그치! 뭔가 기타에 소울이 있어!”

이로하는 등에 멘 베이스를 고쳐 매고 에어 기타를 연주했다.

그 모습을 보고 유우토는 세븐데이가 밴드 아이돌이란 사실을 간파했다.

“마, 맞아. 밴드 좋지, 하모니가.”

“앨범 사러 온 거야?”

“으응.”

잠깐의 침묵.

유우토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럼 가볼게.”

그는 소녀연맹 코너에서 멀어졌다.

이로하가 볼일을 마치고 떠나면 소녀연맹 앨범을 살 생각이었는데.

“……저기.”

“응?”

“왜 따라와?”

“그? 냥.”

“…….”

“세븐데이 앨범 저쪽에 있어.”

“아, 아아, 그래?”

“이리로 컴온!”

유우토는 울고 싶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면 울먹였을 것이다.

유우토는 어지러운 걸음으로 이로하를 따랐다. 그때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왠진 모르겠지만, 유우토는 불안해졌다.

‘……나 뭐 하는 거지?’

왜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굳이 타인을 속이는 거지?

들키면 뭐 어때서?

‘이건 록 스피릿 위반이얏!’

현대까지 이어지는 록의 대주제는 ‘네가 누구인가’, ‘진실된 너는 무엇인가’가 아닌가.

유우토는 오랜 음악 선배들로부터 그 정신을 이어받아 본인의 욕망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

안 그러면 앨범을 못 살지도 몰라!

“저기 나카노, 실은…….”

그때 화려한 사운드가 소녀연맹 코너로부터 터져 나왔다.

판매대 위의 텔레비전 스크린에선, 일본 앨범에 포함된 리카의 카와이 베이스 곡 ‘러브 미러’의 풀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가 나왔다.

“응?”

유우토가 불러서 돌아본 이로하의 시선도 자연스레 시끄러운 카와이 베이스에 끌렸다.

이로하는 ‘러브 미러’의 풀 애니메이션 뮤비를 3초 정도 보더니.

“에에.”

‘에에’가 뭐야 ‘에에’는?!

누나(리카)가 드라마타이즈한 뮤비라고!

누나가 만든 곡이란 말야!

그딴 반응을 보이면 3대를 저주할지도 모를……!

“아, 여기네.”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소녀연맹 코너에서 앨범 마스터 에디션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본 유우토가 마음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나카노 이로하 네년의 3대를 저주하겠다! 이건 절대로 바뀌지 않을 서약이며 맹세다! 영원히 변치 않을 저주 속에서 평온한 일생을 이어갈 수 있을 거 같으…….’

“아, 뺏겼네.”

“……응?”

이로하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쓸었다.

“아아니, 나 원래 소녀연맹 앨범 사려고 왔었거든.”

“어?”

“여기 마스터 에디…… 음, 이러면 모르겠구나. 한정판이 있대서. 근데 뺏겼네.”

“……나카노 너.”

그럼 사야 할 물건이 있는데도, 유우토가 세븐데이를 좋아한단 말을 듣고 코너까지 안내해주려 했던 건가?

초를 다투는 한정판 쟁취의 상황에서?

‘나카노, 미안. 저주한단 말 취소할게. 이시카와가(家)의 이름을 걸고 네 인생을 축복할게…….’

그리고, 밝힌다.

“사, 사실 나도 소련(쇼렌, 쇼죠렌메의 줄임말) 앨범 사려고 왔었어……. 마스터 에디션…….”

이로하는 큰 눈을 꿈뻑이더니, 입을 가리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손나) 거짓말(우소)! 진짜? 이시카와 소녀연맹 좋아해? 쩐다(야베)! 거짓말 아니지?”

“내가 왜 거짓말 해……. 여기 마스터 에디션 있대서 온 거야…….”

“왜 말 안 했어!”

“네, 네가 이상하게 볼까 봐…….”

“소녀연맹이 어때서 그래!”

이로하는 어찌나 기뻐하는지 유우토의 손을 붙잡고 붕붕 휘두르기까지 했다.

낯선 사람과의 접촉을 좋아하지 않는 유우토지만, 이로하가 ‘인민’이라 생각하니 이유 모를 친밀감이 막 샘솟았다.

어쩌면 손 정도는 줘도 좋을지도…….

“최애는 누구?”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미성(美聲)에 유우토가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마스터 에디션을 가로채 간(유우토의 생각) 선글라스를 낀 여자였다.

처음 그녀를 직시하자마자 보이는 건,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몸매와 비율이었다.

게다가 선글라스로 가려져 눈은 볼 수 없음에도, 미인이란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네, 네?”

“최애(사이아이)는 누구?”

“아, 저, 저요? 그게, 설하…….”

그녀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음에도 인상을 찌푸렸단 게 확 느껴졌다.

눈으로 보이는 기분이 아니라, 그녀의 행동만으로도 분위기란 게 풍긴다.

“그쪽은?”

이로하는 자기도 모르게 각을 잡고 말했다.

“하, 하양이요…….”

여자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고개를 주억였다.

“그쪽은 뭘 아네.”

여자가 선글라스를 슬쩍 올렸다.

“사인해줄까?”

“그런(손나)!”

이로하가 놀란 나머지 메고 있던 베이스까지 떨어뜨렸다. 그러고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쇼유!”

“소유야. 간장(쇼유)이 아니라. ‘유스’에다가 하양이가 최애면 사인해줄 수도 있어.”

“앨범 샀어요!”

“좋아. 거기 남자애는 저리 가렴.”

케이어스의 진소유가 나타났다.

* * *

회복하고 나서 웨벡스로 돌아온 성필은, 솔직히 고백하자면 딱히 일이 없었다.

‘내가 없는 동안은 혜빈 누나가 애들 관리했다고 했었지.’

그래서일까, 이미 소녀연맹의 스케줄은 빽빽이 차 있었다.

텔레비전 출연, 잡지 촬영, 각종 행사 등.

거기에다 앨범 일본판 특전인 사인회까지.

‘내가 뭘 건들 수 있는 부분이 없는데.’

딱히 터치할 구석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끔 일이 새로 잡히면 히무라가 성필에게 상담을 요청한다. 그러고서 이 일을 받는 게 어떠냐고 물어본다.

그런데 성필에게까지 올라올 정도의 일이라면 히무라 선에서 거르고 거른 것일 터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성필이 뭐라 할 수 있을 리 없다.

척 보아도 이상한 일은 아닌 데다가, 한국이었으면 시켜만 주면 당장 뛰어갈 만한 종류의 업무들이었으니까.

웨벡스가 소녀연맹에게 쏟는 지원은 전폭적이란 말로 부족하다시피 했다.

‘이 정도면 소녀연맹이 뜬 건 우리 애들 실력이랑 웨벡스 덕이 거의 반반일지도…….’

설령 소녀연맹의 곡이 형편없는 성적을 거두었어도, 웨벡스가 마케팅으로 띄웠을 수준이다.

그렇게 성필은 어쩐지 무료하기만 한 일본 생활을 맛보고 있었다.

“후후, 어떤가요? 저도 이제 살이 많이 붙었어요. 예전처럼 깡마르지 않아요. 여기 봐요, 근육.”

가끔 세이코가 오면 놀아주는 것 외엔, 성필의 일이랄 게 없었다.

성필은 세이코의 강권에 못 이겨 그녀의 등 근육(세이코가 근육이라고 주장함)을 검지로 꾹꾹 눌려보면서, 병원에 있을 때보다 더한 향수병에 시달렸다.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어때요, 감탄이 나오죠?”

“정말 그러네요.”

“진심이 담기지 않았단 건 파쿠 이사를 보고 하는 말이군요. 됐어요, 곧 피트니스 대회에 나가도 무방해질 제 몸을 보고 놀라게 될…….”

두 사람 밖에 없는 휴게실로 장하양이 들어왔다.

장하양이 방 안을 훑자 세이코가 급하게 가방을 챙겼다.

“피트니스 대회를 위해 운동하러 가야겠네요. 그럼 이만.”

세이코가 눈을 내리깔며 장하양의 옆을 쭈굴쭈굴 지나갔다.

그렇게 휴게실엔 다시 두 사람, 성필과 장하양이 남게 됐다.

“박 이사님, 뭐 하고 계셨어요?”

“나야 뭐 매일 똑같지.”

“케이어스 SNS 탐방이요?”

어떻게 알았지?!

“에이, 내가 뭘 그래. 그냥 잠깐 세이코 씨 말동무해드리고 있었어.”

말동무란 단어는 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성필이 퇴원한 후, 성필과 세이코의 관계는 재정립됐다.

이전의 이유 모를 반감만이 가득했던 때를 넘어,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거기서 성필은 세이코와 자신의 관심사가 놀랍게도 겹치지 않는단 사실을 깨달았다.

‘대화가 맞물리지가 않지.’

어쩌면 국적의 차이로 발생한 어색함일지도 모른다.

물론 어색함을 느끼는 건 성필밖에 없었다.

세이코는 무엇이 그리도 할 말이 많은지, 성필을 붙잡고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쉬지도 않고 했었으니 말이다.

“박 이사님이 책임감 안 가지셔도 돼요.”

“응?”

“약간…… 이런 식의 말은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박 이사님이 세이코 선배님한테 사후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고 계시는 거 같으세요.”

사후 관리 서비스.

상품 구매자에게 판매자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뜻한다.

전자제품 무상AS 같은 거 있잖은가.

“이젠 대등한 인간으로 바라봐주시는 게 세이코 선배님한테도 도움이 될 거예요.”

성필은 장하양의 이야기를 듣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자신은 저렇게 비치는 것일까 싶어서.

‘확실히 내가 괜한 책임감으로 세이코 씨랑 어울려드리는 거…….’

그런 건가?

아니다.

“하양아 그건 아니야.”

“아닌가요.”

“그냥, 세이코 씨랑 있으면 재밌어.”

옛날의 리카를 보고 있는 기분이다.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성필과 함께 있으면 분위기도 생각 않고 주절주절 본인의 관심사만 말하던 리카 말이다.

처음엔 그것도 꽤 피곤했지만, 얼마 안 가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꾸 말을 건다는 건 친해지고 싶단 뜻이니까.’

사람이 타인에게 받는 호의가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대화란 게 관계 초반엔 엇갈리기 마련이다.

세이코랑도 언젠간 리카처럼 막역한 사이가 될지도 모르고.

“무려 삶이 얽힌 사이잖아. 그치?”

“…….”

“난 세이코 씨가 어떻게 살고, 앞으로도 어떻게 살아갈지가 궁금…….”

“저번에 했던 약속이요.”

장하양이 성필의 말을 끊었다.

이런 적은 드문 터라 성필이 조금 당황했다.

“어, 약속?”

“네. 멤버들이랑 가기로 했던 카페 사전 답사요.”

“그 분홍색 카페 말하는 거구나…….”

“지금 가실래요?”

성필은 멤버들의 스케줄을 모두 외우고 있다.

현재 시간으로, 장하양을 제외한 멤버들은 다들 열심히 각종 업무를 수행 중이다.

“아, 갑자기 가자고 하면 곤란하시겠네요. 이사님이 일이 있으실 거니까요.”

‘아냐, 나 일 없어’라고 말하려던 성필은, 본인이 월급 잡아먹는 식충이로 보일까 싶어서 말을 아꼈다.

“아니야. 하양이가 가자면 일이 있어도 빼야지.”

그에 장하양은 만족한 듯 깊은 미소를 띠었다.

둘은 휴게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장하양은 SNS로 알아본 그 디저트 카페의 평가에 대해 계속 말했다.

“많이 기대되나 보네?”

“네. 그런 데는 가본 적이 없어서요. 디저트가 회전 초밥처럼 돌아간다고 해요.”

“그건 신기하긴 하네. 그렇다고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된다?”

“아하하, 적당히 먹을게요.”

장하양은 민소매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팔이 훤히 드러났는데, 성필은 그녀의 매끈한 팔을 보곤 말을 바꾸었다.

“아니다. 하양이는 많이 먹어도 되겠다.”

“네?”

“하양이는 지방이 너무 없는 거 같아. 그렇게 계속 지내면 힘들지 않아?”

장하양은 체지방률이 매우 낮다.

그게 눈으로도 드러나는데, 그녀의 배꼽엔 손가락도 안 들어갈 정도다.

그저 안 먹어서 마른 거라면 복부의 피부가 그토록 팽팽할 수는 없다.

즉, 장하양의 신체 상태는 거의 만전 상태에 접어든 운동 선수 수준인 것이다.

“맛있는 거도 자주 사먹고 그래. 설하처럼.”

“걱정해주시는 거예요?”

“걱정되지 그럼.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네, 자주 먹을게요.”

“그래. 인생을 좀 더 즐겨.”

“으음.”

장하양이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런데, 저는 자기관리가 너무 철저해서 잘 못 할 거 같아요.”

재기발랄한 대답에 성필이 옅게 웃었다.

“이사님이 도와주시면 잘 될 거 같은데. 그럼 맛있는 거 많이 먹을 수 있는데.”

“요즘 애들이 나를 점점 지갑 취급하는 거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네.”

“안 도와주실 거예요? 10번에 0.01번은 제가 살게요.”

“1000번에 한 번?!”

장하양, 털어먹으려고 작정했다!

뭐 어쩌겠는가.

하양이가 턴다면 털려야지.

“그래.”

“아하하, 농담이…….”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그리운 얼굴이 나타났다.

“아.”

성필과 상대는 서로를 보고 흠칫했다.

“……하시모토, 매니저님?”

어바이비 한국 총괄 매니저, 하시모토였다.

그 또한 성필처럼 당황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평정을 되찾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이곳에 온 목적이 성필인 것처럼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박 이사님. 그리고.”

하시모토는 장하양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어바이비의 뮤즈, 하양 씨도 안녕하십니까.”

“네, 매니저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덕분입니다.”

하시모토는 장하양의 사진을 보고 소녀연맹을 어바이비 서울 지점의 광고 모델로 기용할 것을 결심했었다.

비록 장하양이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인지는 몰라도, 하시모토는 외모만으로도 그녀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리고 짧은 인사로도 알 수 있었는데, 장하양은 인성도 바른 듯했다.

“일본엔 어쩐 일이세요 매니저님.”

“박 이사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웨벡스에 따로 연락하여 오늘 따로 일이 없는 걸 확인하고 왔습니다. 깜짝 놀라게 해드릴 생각이었는데.”

하시모토가 머쓱한 웃음을 머금었다.

“일이 이렇게 되는군요. 박 이사님 혹시 지금 시간 되십니까?”

그 순간, 하시모토는 갑작스레 맹수가 노려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등골이 오싹하여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내 착각인가?’

“시간이요. 어떤 일인지 간단하게라도 들을 수 있을까요?”

“소녀연맹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비즈니스적 제안, 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하양아, 미안한데 오늘은…….”

그 순간 하시모토는 맹수 수십 마리에게 둘러싸인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황급히 뒤를 보았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바, 박 이사님. 왠진 모르겠지만 여기 터가 안 좋은 거 같습니다. 일단 위로 올라가서 대화를 이어가도 될까요?”

“아, 네. 당연하죠.”

“그런데 하양 씨랑 일이 있던 건 아닌지.”

“업무적인 건 아니어서요.”

“하양 씨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니에요. 일이 먼저죠.”

결국, 하시모토는 그날 느꼈던 불길함의 정체를 끝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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