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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06화 (306/760)

306화

“아, 대화요. 죄송한데 제가 방금 깨어나서 어딜 갈 수 있는 몸이 아닙니다.”

성필의 칼 같은 답에 세이코는 실망하면서도 수긍했다.

“알겠어요. 미안하…….”

“누나, 얘들아, 잠깐 자리 좀 비워줄 수 있어?”

성필은 세이코를 물리는 대신 이미 병실을 차지하고 있던 이들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주길 요구했다.

몇몇 멤버들은 곧이곧대로 따를 기색이 아니었다.

“얘들아 가자.”

하지만 손혜빈이 멤버들의 등을 떠밀자 어쩔 수 없이 병실을 나가야만 했다.

장하양은 세이코의 곁을 지나면서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래서 세이코는 안 그래도 위축돼 있는데 눈을 깔아야만 했다.

왠지 모르지만, 포O몬 게임처럼 장하양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싸울 듯한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이 닫혔다.

“세이코 씨,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세이코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죄책감이 배인 미소와 함께 휠체어를 끌어 성필에게 다가갔다.

“밥은 잘 드시고 계세요?”

“힘들지만…… 노력하고 있어요.”

“병원이라 과자는 못 드시죠? 좋아하시는 거 같던데.”

세이코를 처음 보았던 어느 의류 브랜드 론칭 행사장.

미사토는 디저트를 한도 없이 삼키던 세이코를 보며 말을 잃었었다.

그래서 성필은 그녀가 밥을 못 먹을 뿐이지, 과자는 좋아한다고 여겼다.

세이코도 성필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눈치채곤 희미하게 웃었다.

“별로 좋아하진 않아요. 과자를 그나마 먹을 수 있던 건…… 몸에 좋은 영양이 없어서예요.”

영양분이 없으니,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음식이다.

성필은 대화 주제를 잘못 골랐단 것을 직감하곤 재빨리 말머리를 돌렸다.

“다리를 다치신 건가요?”

“별거 아니에요. 목발보단 휠체어가 편해서 타고 다니는 거니까요. 목발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병원 밖으로 걸어 나갈 수도 있어요.”

그에 비해 성필의 꼴은 처참하기까지 했다.

세이코는 도무지 그와 눈을 맞출 수 없었다. 그런데 곧 숙인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성필이 검지를 그녀의 턱에 대고 천천히 위로 올렸기 때문이다.

불안한 세이코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필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따로 상처는 없어서 다행이네요.”

그 순간 세이코는 훤히 드러난 자신의 팔이 부끄러워졌다.

‘상처가 없어서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자신의 삶을 이어준 인간에게 보여줄 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파쿠 이사는 언제 다 낫나요.”

“모르겠어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방금 일어난 거라서요. 뼈가 어긋난 건지, 부러진 건지, 부서진 건지도 모르거든요.”

“……미안해요.”

고작 말 따위로는 갚을 수 없는 빚이다.

그에 성필이 영문 모를 답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네? 어떤 게……?”

“‘왜 살렸냐’고 말하지 않아서요. 미안하다고 하시는 건, 살아갈 마음이 생기신 거죠?”

성필은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듯, 세이코가 다시 살아가게 돼서 정말 잘됐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 순수한 기쁨을 느끼자 세이코는 다가오는 경찰을 보는 도둑의 심정이 됐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뭘요?”

“목숨을요.”

목숨을 빚졌다면 어떻게 갚아야 하는가.

세이코는 그것을 배운 적이 없었다.

목숨을 빚진 인간, 부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삶을 받았다면, 그건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요? 적어도 저는 떠오르는 게 없어요…….”

그래서 세이코는 이곳에 왔다.

“삶의 대가를 말해주세요.”

절대 싸지 않을 존재의 값어치다.

세이코는 그 대가를 지불할 결심을 했다. 설령 인생을 저당 잡히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냥 계속 살아계시면 돼요.”

온갖 경우의 수를 계산하던 세이코의 머리가 텅 비었다. 완벽한 백지는 당황을 불러일으켰다.

“제가 세이코 씨를 감쌌던 이유는 뭔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세이코 씨가 살기를 바라서였어요. 그러니까, 만약 세이코 씨만 괜찮으시다면 계속 살아주세요.”

“…….”

“힘드시면 저도 도울게요. 제가 얼마나 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자살한 연예인의 유서들은 종종 인터넷에 공개되곤 한다.

보통 사람이 유서를 읽을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을 읽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충격에 빠진다.

인간의 고통이 절절히 느껴지는 문장은 어떤 문학 작품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그것들을 보아온 성필이기에, 다짜고짜 세이코에게 삶을 강요할 수 없었다.

최소한 회유라도 해야만 했다.

“그게 대가라면 대가겠죠.”

성필의 회유가 마음에 닿았던 것일까.

세이코는 울었다. 성필은 오늘만 해도 여자의 눈물을 벌써 7번이나 보았다.

손혜빈, 소녀연맹, 세이코.

사진까지 합치면 한구인과 민경섭의 눈물도 보긴 했었다.

“저는요, 세상에 제 편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험난한 삶을 살아온 이들이 ‘인생은 혼자야’란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혼자가 아니다.

인간에겐 언제든 등을 돌리지 않는 존재, 자기 자신이 있다. 설령 살인이란 대죄를 저지르고도 자신을 변호해줄 존재가 있다.

하지만 세이코는 오롯한 자신의 편이 없었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온전히 저를 위하는 사람은 없다구요. 그게 저 자신이더라도, 없어요…….”

성필은 문득 옛날에 홍규헌에게 들었던 위로가 떠올랐다.

소녀연맹의 데뷔곡 녹음일, 성필이 과로로 쓰러졌을 때였다.

홍규헌은 깨어난 성필에게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라’고 했었다. 힘들어하면 위로해주고, 아프면 쉬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세이코 씨는 극단적으로 자기애가 없어.’

그래서 가후(歌后)가 됐던 것이다.

본인을 싫어하기에, 쉬고 싶어 해도 쉬게 하지 않는다. 쾌락을 탐하고 싶어도 탐하게 두지 않는다. 원하는 게 있어도 허락하지 않는다.

허락된 유일한 유희는 노래뿐이었다.

집요하게 노래만을 탐했기에 노래의 여왕이란 수식어를 얻을 수 있던 것이다. 타인이 보기엔 광기라고 느낄 만한 노력을 통해서.

그런 노래마저 포기할 고통이란 게, 성필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저를 인정해주는 사람보다 욕하는 사람이 훨씬 많아요. 적어도 인터넷엔 그랬어요. 하루가 멀다 하고 욕하고…….”

세이코는 속에 담긴 이야기를 전부 털어냈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여겼어요. 제가 미움받는 이유요.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죽을 거 같고, 답답하고, 그래서어…….”

세이코는 이 거대한 찌꺼기를 털어낼 사람이 없었다.

미사토마저 그러했다.

세이코는 미사토를 엄마처럼 대한다. 하지만 진실로 그녀가 친부모처럼 온전한 사랑을 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이상한 거다.

세이코는 어른이어서, 그런 것쯤 이미 알았다.

“그런데, 근데…….”

희망이 보였다.

“나, 내가 살았으면 좋겠단 이유로 자기 목숨도 거는 사람이 있으며언…… 그러면요오…….”

자기 자신이 온전한 사랑을 받기 충분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비로소 나타났다.

“파쿠 이사 같은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더 있는 거겠죠? 저, 적어도 저에게 그럴 가치가 있는 거겠죠……?”

“진짜 오만방자하네요.”

“뭐, 뭐뭐, 뭐요?!”

“세이코 씨가 사랑을 못 받으면, 세상 사람 99.9%는 사랑 없이 자랐게요.”

세이코는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녀는 세계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하지만 믿지 않았다.

그 말을 하는 인간들은 세이코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필이 하는 말은 달리 들렸다.

“세이코 씨는 자신을 더 잘 알 필요가 있어요. 사랑받으려고 태어난 사람 그 자체잖아요.”

성필은 세이코를 구하기 위해 삶을 걸었던 사람이기에. 그의 한마디 한마디엔 전 지구의 사람들을 능가하는 무게가 있었다.

성필마저 믿지 못하면, 세이코가 세상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그래서 세이코는 성필을 믿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도 믿어보기 위해서.

“그, 그럼 파쿠 이사도 저를…….”

“국제결혼은 좀 그렇네요. 죄송합니다.”

“나 아직 말 안 끝났어요!”

“알겠어요, 계속하세요.”

“……됐어요.”

세이코는 죄책감이 모조리 사라진 것처럼, 옛날의 밝은 분위기를 되찾았다.

아니, 옛날보다 나은 듯했다.

옛날의 세이코는 고슴도치처럼 자기애의 가시를 세웠었으니까. 정작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갈게요. 제가 살아가는 걸로 빚은 없다고 했으니까, 저한테 뭐 한 푼 받아낼 생각하지 말아요!”

“의리가 없어도 너무 없네요.”

“어쩌란 거예요 대체!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라고요!”

세이코는 놀라운 솜씨로 휠체어를 돌리더니, 이마를 끓는 주전자처럼 붉게 물들이곤 문으로 향했다.

“세이코 씨.”

“또 뭐요. 제가 할 말은 다 했어요.”

“잠깐 이리 와보세요.”

“…….”

세이코는 툴툴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성필의 앞까지 휠체어를 끌고 왔다.

“제가 언제까지 세이코 씨를 곁에서 돌볼 수는 없어요.”

“제가 아기라도 되는 거처럼 말하지 마세요.”

“세이코 씨가 ‘응애응애 파파 나 힘들어’라고 말해도 제가 항상 달려갈 순 없단 뜻이에요.”

“당신 이런 성격이었어요?!”

“그러니까 마음에 새겨 두세요. 욕하고 평가하는 건 공짜라는 거요.”

“뭐요?”

“세이코 씨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전부 공짜예요. 키보드에 손 올리고 욕하는 거, 핸드폰 타자 두드려서 욕하는 거, 전부 다 공짜예요.”

“그건, 알지만요. 앨범 산 팬분이 하는 비판…….”

“앨범이 유료지 욕이 유료예요? 앨범 산다고 욕할 자격이 생겨요? 그럼 가수 명예 훼손한 사람들은 법정에 서서 앨범 구매 내역 인증하면 무죄겠네요?”

“…….”

성필은 세이코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기겁하면서 손을 빼려고 했지만, 정말 온 힘을 다하여 빼진 않았다.

게다가 이후 이어진 성필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기도 했다.

“뭐 하는 거예요.”

성필은 세이코의 중지만 빼고 나머지 손가락을 다 접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잡고 하늘 높이 치켜올렸다.

“따라하세요 ‘좆까라 평가’.”

“‘초카라 평카’가 뭔데요?”

“‘똥이나 먹어라 평가(쿠소 쿠라에 효카)’란 뜻이에요.”

“제가 그딴 천박한 단어를 말할 거 같아요?”

“빨리하세요. ‘좆까라 평가’!”

세이코는 입을 오물거리면서 불만을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성필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말했다.

“초, 초카라 평카.”

“다시, ‘좆까라 평가’!”

“쵸, 쵸카라 평카!”

“다시!”

“쵸카라 평카!”

“더 크게!”

“좆까라 평가!”

어느새 세이코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녀는 성필이 시키지도 않는데 중지를 하늘 높이 향하면서 거침없이 욕했다.

“좆까라 평가!”

웃음과 함께 눈물도 흘렀다.

슬프거나 후련해서는 아니었다.

순수하게, 너무 많이 웃어서 눈물이 난 것이었다. 이렇게 웃은 건 얼마 만일까.

적어도 세이코의 기억 중, 이만큼 웃은 적은 없었다. 인생에서 가장 웃긴 날, 이라고 불러도 되리라.

“파쿠 이사도 같이!”

성필은 어린아이처럼 웃는 세이코를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네, 그럼 마지막으로 동시에 해요.”

하나, 둘, 셋.

“박 이사님 무슨 일…….”

“좆까……! 어?”

성필과 세이코가 장하양을 향해 중지를 내민 채 욕설을 지껄였다.

그리고 그것을 본 장하양의 눈빛이 우주보다도 더 어두워졌다.

“네년이 박 이사님을……!”

“언니 과도 그거 내려놔요!”

사과가 깎인 접시와 과도를 동시에 들고 돌진하려는 장하양을 조아라가 힘겹게 말렸다.

성필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이 정도면 세이코와도 충분한 대화를…….

“‘좆까라’!”

세이코가 한국어의 무게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웃으면서 장하양을 향해 욕설을 날렸다.

마치 처음으로 ‘똥’이란 단어를 이해하고 포복절도하는 유치원생 같았다.

“‘까라’!”

“죽여버릴……!”

그날 성필은 처음 알았다.

장하양도 욕할 수 있단 사실을…….

* * *

“흐에엥, 성필이 회사 가기 싫어어.”

“누가 아저씨 좀 조용히 시켜.”

“하잇(넵)!”

조수석에 앉은 성필을 괴롭히려 바로 뒤의 리카가 마수를 뻗쳤다.

하지만 양팔을 회복한 성필을 막을 순 없었다. 리카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도 돌아갔다.

“다친 이사님일 때가 좋았어요! 그땐 아타시(제)가 다 이겼는데!”

“나를 그렇게 이기고 싶니. 이겨서 뭐 어쩌게.”

“박 이사님한테 위력(威力)을 행사할 거예요!”

“대체 왜…….”

운전석의 슈이치는 장난치는 둘을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성필이 요양을 취하는 4주간 멤버들을 따라다니며 전심전력으로 보조해왔다.

하지만 요 4주는 어딘가 비어 있는 기분이었는데, 성필이 돌아오니 허전함이 완전히 사라졌다.

“박 이사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저도 이제 건강하니까요.”

라고 말하는 성필의 다리엔 아직도 깁스가 있었다. 목발도 여전하고 말이다.

회복된 건 팔뿐이었다.

“더 쉬셔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제가 저한테 뭐라고 하거든요.”

“대단하십니다.”

“아니에요.”

성필은 회사에 출근하는 게 곧 즐거움이었다.

항상 멤버들의 활동을 잡지나 텔레비전에서만 보아 왔기에 몸이 더 근질거리는 것도 있었다.

그녀들의 광채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다들 잘 부탁해.”

성필은 뒤로 돌아보며 멤버들에게 말했다.

“난 일본 매니지먼트에 초짜니까.”

오히려 멤버들이 더 정통할 수도 있다.

소녀연맹의 데뷔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에 따라 소녀연맹은 여러 스케줄을 소화한바, 일본에 대한 성필의 이해도를 진작 따라잡았을 것이다.

“잘 부탁할게.”

“세상에, 프로듀서가 아이돌한테 매니지먼트를 부탁하네. 말세다 말세.”

조아라가 장난으로 툴툴거리자 신아름이 즉시 되받아쳤다.

“그래, 조아라 넌 팀장님 옆에 접근하지도 마라.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다 가르쳐드릴 거니까.”

“맘대로 하셔요. 난 아저씨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정장 입고 춤 안 춰준다고 삐치는 기간이 너무 긴 조아라.

성필은 점점 더 그녀가 두려워졌다.

아마 장난으로 삐친 티를 내는 거겠지…….

“근데 설하는 아까부터 전혀 말이 없네.”

성필이 섭섭한 투로 말하자, 창밖을 보던 백설하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아, 저요? 제가 왜요?”

“요즘 언니가 넋 놓고 있는 일이 많으세요.”

장하양은 백설하가 걱정된단 듯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병든 강아지의 머리를 쓸어주는 듯한 분위기였다.

“음, 그냥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어떤 생각?”

“제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던 것들이, 실은 엄청난 행복이었구나. 그런 생각이요.”

백설하는 성필이 다치고 나서 그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모두가 함께하는 일상이란 건 엄청 소중한 거였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괜히 풍경도 더 아름답게 보이고 그래요.”

“쌤 뭐예요. 팀장님 꼬셔요?”

“헤헤, 그렇게 들려?”

“……그 연애 아이튜브 채널 보는 거 진짜 효과 있나 본데? 쌤한테서 막 어른의 분위기가 나.”

“마아(뭐어), 24살은 어른이 맞으니끄악 켁! 쌔, 쌤 잘모태써요오……!”

“내 앞에서 나이 이야기를 꺼내는 인간은 죽음을 면치 못한다.”

“용셔어…… 용셔르을…….”

백설하에게 목이 잡혔던 리카는 빠른 사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어째서 생명을 ‘목숨’이라고 하는지 절절히 알 수 있던 기회였다.

“먼저 올라가십시오.”

웨벡스의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슈이치는 할 게 있다면서 잠시 차에 남기로 했다.

목발을 짚으며 천천히 나아가는 성필의 뒤를 멤버들이 따랐다.

“뭐 많이 바뀐 거 없지?”

“별로 없어요. 그냥 다들 좀 친절해지신 거 빼고요.”

성필은 안도했다.

그가 ‘뉴아사’ 출연 건으로 미래를 보았던 이유는 세이코 때문이었지만, 일단은 소녀연맹의 이익에도 연관되는 사건이었다.

‘히무라 실장님 말대로, 뉴아사 출연 자체가 소녀연맹에게 득이 된 거 같네.’

웨벡스의 직원들이 친절해졌음을 백설하가 보증했으니 믿어도 좋으리라.

성필이 보았던 미래에서 백설하는 소녀연맹을 지키려 미친년처럼 싸웠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하에서 출발한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멈췄다. 누군가 탈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까 싶어 조금 뒤로 물러났는데, 나타난 건 히무라였다.

“박 이사님, 기다렸습니다.”

“네?”

“나오시죠.”

“어, 음, 네.”

성필은 히무라의 인도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나왔다. 그러자 사방에서 시선이 그를 짓눌렀다.

“어?”

웨벡스 건물의 1층 홀은 3층까지 뻥 뚫린 천장을 가지고 있다.

2층과 3층 외곽의 난간에서 1층을 바라볼 수 있는 구조였는데, 그 난간에 빈 공간이 없이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건 1층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박 이사님.”

히무라가 인사하는 것과 동시에, 1층을 메우던 백수십 명의 틈바구니에서 한 인물이 나왔다.

웨벡스의 사장인 리히토였다. 그의 뒤엔 이젠 본부장이 된 미사토가 따라왔다.

“박 이사.”

리히토가 성필에게 허리를 숙이는 것과 동시에, 1층에서부터 3층을 채우던 직원들 전체가 허리를 굽혔다.

수백 명이 동시에 일치된 동작으로 움직이는 건 기괴하리만치 엄숙했다.

“세이코를 구해줘서 정말 고맙네.”

성필은 수백 명의 시선이 자신을 짓누르던 게 아니란 사실을 눈치챘다.

그들은 성필을 우러러보는 것이었다.

그를 짓누르는 게 아니라 하늘로 띄워 보내는 것이었다.

“내가, 웨벡스가 자네에게 감사를 전하네.”

성필은 얼떨떨하여 쉬이 답하지 못했다. 그나마 목발을 고쳐잡고 마주 허리를 숙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박 이사님.”

히무라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제가 전에 드렸던 말씀 기억하십니까?”

“어떤…….”

“‘충분 이상의 지원’이란 약속 말입니다. ‘뉴아사’에 출연해주시기만 하면 그리하겠단 약속이요. 그대로 지키진 않겠습니다.”

“예?”

“‘가족으로서의 지원’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래요!”

2층 난간의 정면에서 우렁찬 고음이 들려왔다. 며칠 동안 성필이 듣지 못했던 목소리, 세이코의 것이었다.

그녀는 난간을 손으로 쥐고 성필을 향해 상체를 뺐다.

그날의 사건 때문인지, 주변 사람이 전부 그녀의 팔이며 어깨를 잡고 더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하지만 세이코는 그딴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성필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몸을 더 앞으로 빼기만 했다.

“이제부터 웨벡스가 파쿠 이사 편이에요!”

세이코가 팔을 활짝 펼쳐서 사방에 늘어선 수백 명의 직원들을 가리켰다.

“마음껏 기뻐해도 돼요!”

성필은 황홀한 기분으로 시선을 올린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웨벡스의 홀이 이렇게나 넓었던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던가.

그리고 이렇게나 따뜻한 곳이었던가.

“이제 우린 가족이니까요!”

이제야 성필은 깨달을 수 있었다.

웨벡스가 소속 연예인을, 직원들을 가족이라고 칭했던 이유를.

그들의 가족이 된 이후에야, 웨벡스의 일치된 유대를 느꼈다.

“어서 와요, 파쿠 이사, 소녀연맹!”

일본의 3대 기획사, 웨벡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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