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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05화 (305/760)

305화

불꽃은 오른손 검지 끝에서 생겨났다.

따스한 기운은 검지를 타고 올라 손 전체에 퍼지고, 이내 팔을 타고 올라갔다.

반대쪽 팔까지 순환을 마친 온기는 배와 다리를 뛰어다니더니 기어코 심장에 이르렀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박동이 되찾은 기억처럼 선명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머리.

‘……음?’

꿈인가.

몸이 둥둥 떠 있는 것 같다.

아니다.

꿈이 아니야.

기억이 재생됐다.

마지막으로 받아들였던 청각 신호가 머리를 어지럽게 울렸다.

‘내 포르쉐가아아아아아아아!’

그 고함을 떠올린 순간, 성필이 눈을 떴다.

동시에 모든 감각이 제자리를 찾았다.

병원 침대 특유의 단단함이 등을 괴롭히고, 얇은 이불은 여름인지라 체온을 보존하여 불쾌감을 더했다.

“일어났냐.”

성필은 너무나 쉽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손혜빈이 보였다. 그녀는 성필에게 선물로 온 듯한 과일을 우걱우걱 씹는 중이었다.

“누, 누나…….”

“맞아, 혜빈 누나야. 반갑지?”

“애들 쇼케이스는?”

“진짜 초인은 너를 보고 하는 말인갑다.”

손혜빈은 테이블 캘린더를 성필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X 표시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자, 여기가 네가 떨어진 날. 그리고 여기가 오늘이야.”

“마, 말도 안 돼…….”

1, 1, 1…….

“일주일이나 잠들어 있었다고?!”

“10층에서 떨어졌는데 1년이 아닌 게 어디야.”

“너무 오래 잤잖아! 빨리 돌아가야…….”

일어나려던 때, 성필은 팔과 다리의 이물감을 느꼈다. 왼팔과 오른 다리에 깁스가 되어 있다.

“너 이거 수리비야.”

부자유스러운 몸을 보고 침통해있던 성필에게 손혜빈이 일본어로 적힌 문서를 내밀었다.

“수리비?”

“너 포르쉐 위로 떨어졌어. 웨벡스 본부장님 거라더라.”

“아, 그 비명이 본부장님이었구나. 그런데 수리비는 가로 엔터에서 내주지?”

“다른 회사 아티스트 도와주려다가 다쳤는데 가로 엔터가 왜?”

“홍규헌 사장님 나빠!”

“웨벡스가 이미 내줬어.”

“리히토 사장님 좋아!”

“너 진짜 멀쩡하구나?”

“이게 어떻게 멀쩡해.”

가끔 추락 사고 기사를 보면 기적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극악한 확률을 뚫고 차 위로 추락한 이들은, 차가 충격을 흡수하여 경상만 입고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정말 차 위로 떨어지는 게 효과가 있구나. 얼마 전인가, 아파트에서 불륜 저지르던 여자가 베란다에서 하다가 떨어졌대. 근데 차 위에 떨어져선, 절뚝거리면서도 이웃들한테 안 들키려고 도망쳤단 거야. 그 여자가 초인인가 싶었는데, 그냥 운이 좋았던 거였네.”

성필도 세이코를 구하기 위해 보았던 미래 중에서, 1층에 차가 대어져 있던 것을 확인했었다.

그냥 세이코를 안고 떨어져봤자 둘 다 찌그러질 게 분명했으니 차를 노리고 떨어졌었다.

“근데 의외네.”

“뭐가.”

“세이코란 사람이 어떻게 됐는진 안 묻잖아. 역시 다른 회사 사람보단 애들이 먼저지?”

그야 추락하고 꺼져가던 의식 속에서 세이코의 목소리를 들었었으니까.

세이코는 살아 있단 확신이 있었…….

“세이코 씨 또 자살하려고 하거나 안 했지?!”

생각해보니, 자살 희망자를 무턱대고 살려봤자 나중에 또 시도하면 끝이 아닌가.

“빨리 찾아 봐야…….”

“봐서 어쩌게?”

“설득해야지!”

중요한 건 세이코를 살리는 게 아니라, 그녀에게 살아갈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다.

성필이 평생 그녀를 따라다니며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옆방에서 잘 지내고 계시니까 걱정하지 마.”

“아, 그래?”

“응. 밥도 잘 드신대. 정신과 진료도 받으셨고. 약 먹으면 막 헤헤거리면서 엄청 행복해지셔.”

“무섭네……. 근데 누나밖에 안 왔어?”

성필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그에 손혜빈이 간단히 답했다.

“어.”

“가로 엔터,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내가 온 것만 해도 어디야? 어때, 나 잘했지? 막 나한테 고마워 죽겠지? 일도 내팽개치고 일본으로 달려올 사람 나밖에 없다 이거야.”

“고마워 누나…….”

“농담이고, 다들 왔었지. 사장님이랑 한 이사님, 경섭이 다 왔었어.”

이럴 수가.

손혜빈이 와 준 데 너무 감동한 나머지 인생을 책임지는 것으로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결심하던 와중인데!

“너 수술 끝나는 거까지 다 보고 갔어.”

“수술? 나 수술받았어?”

“응. 뭐 다리에 쇳조각이 들어갔댔…….”

“토할 거 같으니까 그만 말해줘.”

“다리에 휘어진 차체 쇳조각이 파고 들어갔대. 구급 대원들이 그거 현장에서 빼내느라고 어찌나 고생했는지 몰라.”

“누나 사이코패스야?!”

손혜빈이 세상 떠나갈 듯 크게 웃었다.

성필이 꿍해 있자, 어느새 그녀의 웃음에 물기가 서려갔다.

“누나……?”

“이 새끼 다 나았네! 아 씨, 괜히 걱정했잖아!”

그러고 보니, 손혜빈이 아직도 이곳에 있단 건 장장 일주일을 성필 곁을 지켰단 뜻일 터다.

한국에서의 일도 바쁠 텐데 계속…….

“누나 울어? 다 큰 어른이 울어? 지인짜 꼴불견이다.”

“의사가 너 반드시 산다고 장담할 때 수술실에 난입해서 죽였어야 했는데. 천추의 한이다.”

둘은 서로를 보면서 또 크게 웃었다.

손혜빈은 악동처럼 웃고는 핸드폰 갤러리를 뒤져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이거 봐라, 사장님이다.”

홍규헌은 병상에 누운 성필의 손을 양손으로 잡고, 신에게 기도를 올리듯 고개를 떨어뜨린 모습이었다.

“사장님 이러고 3시간 동안 주문 같은 거 외우고 나서야 돌아가셨어.”

“와.”

“막 감동이 와?”

“나 사장님 이마 만졌었네.”

“변태 새끼.”

“누나 이런 건 왜 찍었어?”

사진만 보아도 심각한 분위기란 게 느껴진다. 그런데 손혜빈은 어떻게 사진이란 걸 찍을 생각을 했을까.

“왜 찍었긴. 너 멀쩡히 일어나면 다 흑역사 될 거니까 찍었지. 이거 사장님한테 보여주고 놀리면 진짜 칼 들고 쫓아오실걸?”

“나한테 톡으로 보내고 다른 사진도 보여줘.”

다음은 한구인이었다.

“이건 우승 후보네…….”

한구인은 손등으로 눈가를 닦으면서 어린애처럼 질질 짜고 있었다.

이런 비유는 어울리진 않지만, 놀이공원에서 부모님을 잃어버린 아이 같았다.

“어때, 죽이지?”

“누나가 감정이 없단 가설에 힘을 실어주네. 한 이사님 이러는 거 보고도 사진이 찍고 싶었어? 나 정신 잃은 거 보면서도?”

“어쩌라고.”

손혜빈, 사이코패스 확정!

“다음은 경섭인데.”

아주 역동적인 사진이었다.

민경섭이 손혜빈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려는 듯 달려오는데, 어찌나 빠른지 잔상이 남아 있었다.

“나 경섭이한테 혼났어. 그럴 생각이 드냐고.”

“혼나야지 그럼.”

“아주 너랑 성격이 빼다 박았더라. 특히 더 고지식한 거 같아. 그래서 뭐…….”

손혜빈이 아쉽단 기색으로 핸드폰을 책상 위에 엎었다.

“그 뒤로 애들이 너한테 하는 건 못 찍었지.”

“우리 애들?”

“진짜 소련이들이 하이라이트였는데, 못 찍은 게 아쉽네.”

성필은 딱히 아쉽지 않았다.

어차피 멤버들은 울었을 것이고, 성필은 멤버들이 슬퍼서 우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래도 흔적이 남긴 했어.”

손혜빈이 아까부터 책상 위에 얹어져 있던 종이를 성필에게 내밀었다.

“애들이 너 깨어나라는 의미를 담아서 쓴 거거든.”

“오, 편지야?”

“너 깨어나면 청구해야 할 정당한 빚이래.”

“이런 거 보면 깨어나도 안 깨어난 척하겠다.”

종이는 대부분이 여백이었다.

글자도 삐뚤빼뚤한 게, 정상적인 상태에서 적은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 쓰다가 말았구나.”

“어, 중간에 아름이가 이거 무슨 저주 같다면서 그만 쓰자고 했거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빚은 저주가 맞지.”

그럼 어디 볼까.

[리카

일본 데뷔에 동행하지 않는다고 거짓말함으로써 친구 계약 1조를 위반한바, 소원을 1회 들어줘야 함.]

‘초장부터 세게 나오네.’

성필이 잊고 있던 계약까지 끄집어 왔다.

친구 계약 1조는 ‘거짓말은 없다’다.

그런데 성필이건 리카건 밥 먹듯이 서로에게 거짓말이나 장난을 치기에, 사실상 효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하는 조항이다.

‘그래 뭐, 소원 정도는 들어주지.’

[조아라

정장 입고 춤 안 춰 줌]

“내가 왜 춰야 하는데?!”

“네가 약속했다던데?”

“그거 다 거짓말이야!”

“그런 거 치곤 기억하는 사람이 많더라.”

“어? 누구?”

“멤버들 다 동의하던데.”

“담합이얏!”

성필은 억울했다.

그런데 성필은 본인의 기억력을 믿지 못했으므로, 심란한 마음으로 다음 줄을 읽어야만 했다.

[신아름

내가 최고의 아이돌 되는 거 보겠다고 했잖]

‘중간에 지웠네.’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하긴, 성필이 죽을 사람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롤링 페이퍼를 쓰는 건 부끄러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리카나 조아라도 문장에서 장난스러움이 묻어났다.

이걸 쓸 당시의 멤버들도 성필에게 큰일이 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어떻게 너 놔두고 사라지겠어.’

다음은 장하양이었다.

[장하양

최고의 아이돌이 되면 소원 들어주겠다고 했으면서 이토록 심각한 물리적 타격을 입으면 약속을 위반하겠단 생각이 가득한 거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이번만 믿어줄 거니까 꼭 일어나서 과업을 완수…… (생략).]

‘마침표가 어디 찍힌 거야.’

문장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한 세 줄 정도를 이어가던 글은 어느 순간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하양이도 부끄러웠나 보네.’

이렇게 산만한 글을 썼으니 부끄러울 만도 하다. 성필은 마지막이라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착실히 백설하의 글로 시선을 옮겼다.

[백설하

돔 투어로 100만 관객 동원하면 소원 들어주기로 하셨어요.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무사히만 일어나주세요.]

“…….”

“감동적이지? 역시 리더라서 뭔가 달라.”

“…….”

“성필아 울어?”

“응.”

“설하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돼야 했었겠다.”

“그러게.”

몇 글자로 사람을 울리다니.

대단한 재능이 아닐 수 없다.

“일단 회사에 연락할게.”

손혜빈은 홍규헌에게 전화를 걸어 성필이 깨어났음을 알렸다. 그리고 잠시 후 통화가 끝났다.

“……사장님이 나 안 바꿔 달라셔?”

섭섭하다.

“울먹이는 사람이랑 어떻게 통화하게.”

“아.”

기쁘다.

“근데 누나 이제 안 가봐도 돼? 일주일이나 있었으면 회사 일도 지장 많을 거 아니야.”

“뭐, 괜찮아. 너 좀 더 보고 가지 뭐. 일본 쪽에 일이 있기도 하고.”

“일본에?”

“신인개발팀 쪽으로.”

가로 엔터는 신규 채용을 늘린바, 회사 내부가 이전보다 훨씬 북적이게 됐단 모양이다.

그리고 이전엔 없던 부서인 신인개발팀의 등장으로 오디션과 연습생 선발 업무도 박차를 가하는 중이라 한다.

“누나가 고생이 많네.”

“고생 많지. 너 안 일어나는 동안은 소련이들 업무를 내가 컨트롤했으니. 아, 그러고 보니.”

손혜빈이 시계를 확인하곤 문득 말했다.

“곧 올 시간이네.”

“누가? 또 올 사람이 있어?”

“소련이들.”

동시에 문밖에서 북적이는 소리가 전해 들어왔다. 이윽고 예고도 없이 문이 열리고, 리카가 위풍당당히 외쳤다.

“이사님 건강하신가요!”

“어.”

“에에에에에엑?!”

리카는 무덤에서 되살아난 인간이라도 본 것처럼 기겁했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성필이 깨어났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던 눈치였다.

“이, 이이, 이사님…….”

리카가 갓 태어난 새끼 양처럼 다리를 비틀거리더니, 곧 치타 저리 가라 할 속력으로 달렸다.

달리려 했다.

“놔요 하양 언니! 아타시(저)는 할 일이 있다구요!”

“지금 박 이사님한테 달려들면 뼈 또 부러지실 거야.”

“그게 대수인가요! 제 기분이 먼저예요!”

리카, 언제 이렇게 이기적인 인간이 됐니.

“리카, 와라.”

“에, 정말인가요!”

“그래. 친구 계약 1조 위반했잖아.”

그 말에 리카가 돌처럼 굳더니, 곧 굵은 방울을 눈가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맞아요오…… 박 이사님은 거짓말쟁이니까…… 저, 저한테 소원 들어줘야 해요오…….”

“뭐, 이걸로 되겠어?”

대답도 없이 리카가 성필에게 달려와 꽉 끌어안았다.

의외로 아프지 않아서, 성필은 멀쩡한 오른팔로 리카의 등을 감쌌다.

“이사님 거짓말쟁이! 나쁜 사람!”

“미안, 리카.”

“더럽고 추잡하고 사람 기분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무뢰배에 불한당, 사악하고 치졸하고 옹졸한 인간! 시네(죽어)!”

“말이 좀 심하다?!”

리카는 마치 데뷔 때처럼 성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마음껏 눈물을 뿜어냈다.

얇은 병원복이라 눈물이 실시간으로 가슴을 적시는 게 느껴졌다. 아니, 눈물만이 아니라 콧물도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성필은 떨떠름했지만 리카를 떨쳐낼 수 없었다. 친구 계약이 있으니까.

“뭐야. 나도 소원 들어줘요.”

조아라는 내려가려던 어조를 억지로 끌어올리면서 농담을 던졌다.

성필은 그녀를 잠깐 응시하고는, 조아라에겐 보여주지 않던 미소를 걸고 신아름에게 말했다.

“아름이 소원은 시간이 좀 걸리겠네.”

“또 사람 무시하네. 그냥 콱 깨어나지 말지.”

“조아라 너 뭐 그딴 말을 해?!”

“춤 안 춰주는 아저씨는 필요 없어.”

신아름이 진심으로 조아라에게 달려들 것처럼 기세를 키웠다. 다행히 뒤에서 장하양이 말려서 신아름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그리고 하양이 소원도, 아름이처럼 시간이 꽤 걸릴 거야. 바로 못 들어줘서 미안해.”

장하양은 입술을 꽉 물고, 괜찮다는 뜻으로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좋은 날에 눈물을 보이고 싶진 않은 거겠지.

장하양은 울먹임을 필사적으로 삼키면서 미소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아니, 에요. 천천히, 들어주세요.”

“알겠어. 그리고…….”

성필은 백설하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설하는 소원 필요 없다고 했지? 그럼 어쩔 수 없네. 설하만 안 들어줘야겠다.”

평소처럼 백설하가 ‘네?!’라며 화들짝 놀랄 줄 알았다.

그런데.

“네.”

성필이 생각했던 반응과 달랐다.

백설하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돌리다가, 갑자기 어색한지 헤헤 웃고는, 참고 있던 눈물을 한 줄기 떨어뜨렸다.

“관객 100만 명 모아도, 소원 안 들어주셔도 돼요. 그냥,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설하의 미소는 어느 때보다도 밝아 보였다.

“아, 아니, 쌤이 그러면 우리는 뭐가 돼요…….”

“맞아 설하야 네가 그러면 애들이 전부 이기적인 어린애로 변하잖아.”

“아저씨 우릴 그렇게 생각했어요?”

“막 깨어난 사람한테 빚 타령해놓고, 그럼 아니게?”

“그런 말 할 거면 아저씨 가슴에 매달린 리카나 어떻게 해봐요.”

“아이도루우…… 아이도올…… 아, 아타시…… 아이돌이 됩니다아아…….”

“근데 아까부터 리카 뭐라는 거냐.”

“나도 몰라요.”

그때 병실의 문이 열렸다.

다들 의사나 간호사일 거라 생각하고 예를 차렸지만, 나타난 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파쿠 이사.”

휠체어에 탄 세이코였다.

그녀를 보자마자 장하양의 눈동자에서 끝을 알 수 없는 검은빛이 끓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전부 뼈만 남을 것만 같은 유독성의 무언가가 눈동자를 가득 채운 것이다.

“당신 무슨 낯짝으로…….”

그러나 장하양은 멈춰야만 했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얇은 병원의 반 팔 환자복. 그로부터 드러난 세이코의 팔은 자해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어린아이가 본인의 키를 벽에 칼자국으로 새긴 것처럼, 흔적은 촘촘하기 그지없었다.

세이코는 좌중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다들 이야기하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말, 사과.

세이코가 진심을 담아 사과를 전했다.

“파쿠 이사, 잠깐 저랑 대화할 수 있을까요?”

세이코의 얼굴이 유리로 된 가면처럼 연약한 빛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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