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롯폰기.
일본 최대의 유흥가.
술집과 호스트바, 캬바레, 클럽, 풍속업소가 가득한 거리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창녀의 아이란 딱지를 얻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그와 정반대였다.
“세이코(聖子)로 할게요.”
캬바레 클럽에서 일하던 여자는,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낳은 아이에게 ‘성스러운 자’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정말 세이코로 괜찮겠어?”
“네. 딱히 생각나는 이름도 없고.”
동료들의 당황과 웃음이 섞인 말에도, 여자는 큰 고민 없이 세이코란 이름을 확정시켰다.
쇼와 시대의 끝에 태어난 아이는, 쇼와 시대를 휩쓴 아이돌 가수와 같은 이름을 얻었다.
총 앨범 판매량 2,900만 장으로, 쇼와 시대의 모든 아티스트를 앞지른 성적을 낸 불세출의 가수와 같은 이름을.
그리고 세이코는 석 달 뒤 버려졌다.
“점장님 어쩌죠?”
캬바레 클럽의 점장은 홀로 남겨져 울고 있는 세이코를 보며 침묵을 지켰다.
침대보에 싸인 아이는 클럽 휴게실에서 계속 울었다. 그 옆에는 절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글씨체로 ‘죄송합니다’라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
“보육소에 맡기고 올까요?”
“……아니.”
점장은 결심했다.
“키우자.”
그렇게 세이코는 클럽의 휴게실을 집으로 삼아 자라게 되었다. 일을 마친 아가씨나 댄서, 웨이터들이 세이코를 돌보았다.
그렇게 세이코는 캬바레 클럽을 집으로 삼아 중학생이 되었다. 게다가 주변 환경 탓인지 노래를 곧잘 불렀다.
“점장, 나도 나중엔 무대에서 노래 불러도 돼?”
철이 없단 것만 빼면, 좋은 아이였다.
세상에 캬바레 클럽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게 꿈인 중학생은 그녀밖에 없을 터였다.
점장은 웃으면서 넘겼지만, 곧 그게 진짜 세이코의 꿈이란 것을 알게 됐다. 그날 점장은 처음으로 세이코를 혼냈다.
“뭐가 나쁜데?! 언니들도 다 하는 거잖아!”
“넌 우리가 뭘 하는지 모르냐?”
“알아! 안다고! 남자들한테 술 따라주고 노래 부르는 거잖아!”
“그런데…….”
“그게 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 아니야?!”
그 답에, 점장은 할 말을 잃었다.
평생 떳떳하게 자기 직업도 밝히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 작은 아이가, 그의 직업을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점장은 세이코의 반발에 무어라 답하지도 못했다. 그 사이 세이코는 가출했다.
3일 후 다시 돌아온 세이코에게, 점장이 말했다.
“세이코. 노래를 부르고 싶으냐.”
“…….”
“그래, 불러라.”
“저, 정말?”
“하지만 여기선 안 된다. 너는 이런 곳에 있어선 안 돼. 더 빛나는 세계가 있다. 네가 사랑을 얻어야 할 대상은 술 취한 남자들이 아니라, 전 세계의 인간들이다.”
점장은 세이코를 악기와 보컬 학원에 보내주었다.
버블 경제가 붕괴된 여파가 아직도 회복되지 못한 시대. 자연스럽게 일본의 유흥 산업도 침체기에 들어갔던 시대다.
점장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세이코는 그걸 알고, 학원 따위 안 가도 된다고 했다. 그러자 점장이 말했다.
“넌 후회할 거다. 난 그걸 알아. 세이코, 잘 들어라. ‘그때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할 만한 선택들이 네 인생에서 수도 없이 있어. 그런 후회를 남기지 마라. 하고 싶은 건 전부 하는 거야. 사정이나 환경 따위 안 봐도 돼. 할 수 있으면, 해라.”
세이코는 그렇게 했다.
학원에 다닌 지 6개월.
“안녕, 이름이 뭐니?”
미사토를 만났다.
그리고 1년 후, 세이코는 웨벡스에서 앨범을 냈다. 데뷔 앨범의 리드곡은 현재까지도 전설로 회자된다.
제목은 ‘롯폰기의 아방튀르’였다.
그 곡은 화자도, 청자도 명시하지 않고 술 취한 이들만이 가득한 롯폰기의 거리만을 노래한다.
마치 시대를 그려내는 세태시(世態詩)처럼, ‘롯폰기의 아방튀르’는 그 시대의 일본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 쓸쓸하고 우울하며 어딘가 멍한 시대를.
세이코의 곡은 ‘세태가(世態歌)’라고 불리며 많은 이들을 위로했다.
발매 3개월째, 총판매량 300,000장 이상.
작곡, 후나비키 세이코.
작사, 후나비키 세이코.
가수, 후나비키 세이코.
불과 그녀가 만 15세일 때의 일이었다.
* * *
세이코는 ‘뉴아사’의 무대에서 완벽하게 ‘롯폰기의 아방튀르’를 완창했다.
사방에서 퍼지는 환호는 그녀가 익히 겪어온 것이라 신기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역시, 3년 만에 듣는 환호라 그런지 조금은 감동이 있었다.
[아아, 후나비키 세이코! 완벽한 무대였습니다!]
MC의 찬양에 관객석에 있는 200명이 더욱 커다란 박수를 보낸다.
세이코는 운이 좋게도, 경연에서 본인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행운이지만, 처음 이 곡이 걸렸을 땐 걱정하기도 했다. 만약 이 무대를 망치면 도망칠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해냈어…….’
세이코는 한여름의 태양처럼 내려오는 조명을 받으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어…….’
히무라, 봤어?
미사토, 봤어?
그리고 파쿠 이사, 당신, 봤겠지?
‘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어!’
마침내 3년의 트라우마를 극복했다.
이젠 다시 가수로 돌아갈 것이다. 노래를 부르는 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다들 축포를 터뜨려라.
여왕의 귀환이다.
세이코는 떨리는 걸음으로 대기석으로 돌아갔다. 희미한 정신으로 다른 참가자들의 무대를 보다가, 2부 촬영 전 휴식 시간에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미사토!”
“세이코!”
세이코는 당장 미사토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녀가 기대했던 대로, 미사토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기뻐해 주었다.
“미사토 왜 울어? 내가 잘하는 건 당연하잖아!”
“응, 으응, 당연해. 세이코쨩이 잘하는 건 당연해, 당연하지…….”
“울지 마아……!”
“미안해, 안 울게…….”
방청권을 얻어 온 웨벡스의 식구들도 두 사람에게 박수를 퍼부어주었다.
여왕의 귀환.
이제 세이코와 함께 웨벡스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이다.
새 앨범을 발표하고, 전국 콘서트를 돌며, 다시금 가후(歌后)란 이름을 방방곡곡에 알릴 것이다.
“미사토, 이제 웃게만 해줄게. 고마워. 정말 고마웠어.”
* * *
2부 촬영 전 휴식 시간.
백설하는 터덜터덜 복도를 걸어 화장실로 왔다.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다리로 세면대 앞에 섰다. 그리고 더럽지도 않은 손을 박박 문질렀다.
‘할 수 있어. 이길 거야. 이길 수 있어.’
세이코의 무대는 대단했다.
‘롯폰기의 아방튀르’는 그녀의 데뷔곡이라 했던가? 기교적으로는 대단하지 않으나, 보컬의 호소력이 달인급이라 불리기 모자람이 없다.
또한 그녀의 데뷔곡은 일본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단 모양이다.
‘세이코 씨의 홈그라운드지만, 이길 수 있어.’
소녀연맹은 그것을 뛰어넘을 퍼포먼스를 준비해왔다.
‘그래, 우리의 퍼포먼스는 대단해.’
돔 투어로 100만 관객을 동원했던 다키스트의 퍼포먼스를 재해석한 무대이다.
심지어 마지막엔, 다키스트의 부활이라도 보이려는 듯 그들의 퍼포먼스를 완벽히 재현했다.
그러니, 세이코와 상대하는 건 소녀연맹이기도 하면서 다키스트다. 케이팝 아이돌의 최고봉이라는 다키스트…….
‘그런데.’
나는, 주어진 퍼포먼스도 완성하지 못했는데.
3연속 고음, 결국엔 하지 못했는데.
‘박 이사님이 주신 과제를 달성 못 했는데…….’
감히 나 따위와 다키스트를 비교…….
“어, 당신?”
어느새 세면대 옆에 사람이 서 있었다.
세이코였다.
백설하는 영혼이 빠져나간 듯 천천히, 초점이 없는 눈동자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생기 없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흐응…….”
세이코는 오만한 눈빛으로 백설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는, 비웃음을 날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네?”
“아무도 그쪽네들한테 뭐라고 안 해요. 저한테 진 거면, 일본에서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까 긴장은 좀 풀어요.”
놀랍게도 세이코는 백설하를 위로했다. 물론 세이코 입장에서만 위로로 여겨질 뿐이었다.
“어차피 경연은 가수의 무대예요. 아이돌이 나서서…….”
세이코는 여유롭게 자신의 앞머리를 정돈했다.
“부족한 모습을 보여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어요.”
세이코가 백설하를 보면서 활짝 웃었다.
“너무 긴장해 있길래 말해봤어요.”
이젠 그녀에게도 여유가 생겼다.
마음에 들지 않는 후배에게 조언을 할 정도의 여유가 말이다.
오만한 파쿠 이사의 담당 아이돌이지만, 선배로서 한두 마디 해줄 아량은 있었다.
“뭣하면 제가 쓰던 긴장 완화 스트레칭이라도 알려줄까요?”
“하하, 네 그러시면 저야 좋죠.”라고, 옛날의 백설하였다면 그리 말했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호의만을 갈구했던 옛날, 아직 아이였을 때였다면.
“선배님.”
백설하는 세면대를 짚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아래로 쳐져서 얼굴을 가렸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네?”
“승부란 건 승리가 아니라 패배를 생각하고 가야 한다구요. 새는 높이 날수록 떨어질 때 아프잖아요. 미리 떨어질 준비를 해야 그나마 덜 다칠 수 있어요.”
“무슨…….”
“저는 질 준비가 돼 있어요. 질 각오가 있어요. 무대 위에서 울고, 무릎 꿇고, 오열이라도 할 각오는 돼 있어요.”
백설하가 머리칼을 한 번에 뒤로 묶어 넘겼다.
다시 드러난 그녀의 눈동자는 사냥을 앞둔 짐승의 것이었다.
세이코가 섬찟할 정도로 끝이 없는 호승심, 본능적으로 승리와 생존을 탐하는 짐승의 것처럼 어둡고 깊었다.
“선배님은 돼 있으신가요? 질 준비가, 각오가.”
울고, 무릎 꿇고, 다시 오열할 각오가 있는가?
“내가 왜…….”
“왜냐뇨.”
소녀연맹이 이길 거니까.
* * *
“갑옷…….”
성필은 무대 의상을 입은 채 나란히 선 소녀연맹을 보며 읊조렸다.
그 곁엔 피로로 파들파들 떠는 이유이가 있었다. 익숙지 않은 나라에서 의상을 디자인하고 재료를 모으며 재단하느라 고생한 디자이너였다.
“갑옷이네요.”
“네, 네에.”
“유이 씨, 멋져요.”
“제, 제가요……?”
“제 주위 사람들은 왜 이렇게 듣는 귀가 어두울까요. 설하도 그렇고.”
“알아요. 농담한 거예요.”
“밤새시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 쉬세요.”
“무대는 보고 쉬어야죠…….”
소녀연맹이 데뷔하기도 전, 홍규헌이 이유이에게 멤버들을 위한 간단한 디자인 스케치를 요구했었다.
그때 이유이는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의 어록을 빌려 이렇게 말했었다.
세상과 맞서 싸우기 위해선 갑옷이 필요하다고, 멤버들에게 갑옷을 입히고 싶노라고.
이 의상이 그러했다.
“잘 어울리네.”
성필이 리더인 백설하의 목깃을 다잡아주었다. 백설하는 서훈을 받는 기사라도 된 것처럼 허리를 곧추세웠다.
“멋져.”
멤버들은 검은색을 베이스로 한 제복 차림이었다.
저마다 디자인의 차이는 있었으나, 목부터 발끝까지 살을 드러낸 부분이 없었다. 심지어 손마저 검은 장갑으로 살을 가린 마당이다.
단출하게까지 느껴지는 제복엔 붉은 샤슈(어깨에서 엉덩이를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천)가 얹어져 고풍스러움을 살렸다.
그리고 그녀들의 어깨와 가슴 위로 황금 술이나 장식이 박혀 기풍이 느껴졌다. 또한 이유 모를 삼각 훈장과 견장도 가슴을 채웠는데, 잘은 몰라도 멋지니까 OK다.
“우리 설하, 타임머신으로 과거에 돌아가면 황족이라고 해도 되겠어.”
근대 시대의 황족이 입을 법한 제복으로 만든다더니, 시대극 제복으로 써도 좋을 듯하다.
물론 진짜 시대극에 등장시키기엔 과히 아이돌리시하긴 하지만.
“그래, 여왕이네.”
여왕이란 칭찬에 백설하는 좋아하긴커녕 얼굴이 더 굳기만 했다.
거기서 성필은 칭찬이 별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단 것을 깨달았다. 지금 무대로 올라가는 이들에게 외모 칭찬은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럼 얘들아, 잘하고 와.”
“네.”
백설하는 대표로 답하곤 등을 돌렸다. 멤버들은 그녀의 뒤를 따라 무대로 향하는 복도로 들어섰다.
밖에선 흥을 돋우는 MC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몰아쳐 복도마저 울리고 있었다.
신아름은 모퉁이 너머로 얼굴을 슬쩍 내밀어 밖의 상황을 확인했다.
‘사람이 많진 않네.’
그때 신아름은 자신이 등줄기를 훑는 손길을 느꼈다.
‘아 씨, 조아라 얘가 중요한 순간에 또 장난치고 있네.’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보니, 예상외로 장난의 주인공은 백설하였다.
게다가 백설하의 표정은 장난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진지했다. 그 순간 신아름은 번개라도 맞은 듯 등골이 떨려왔다.
“쌤, 설마…….”
이건 사인이다.
며칠 전 밤 연습 때, 둘은 약속했었다. 만약 당일에 퍼포먼스를 완성하면 등줄기를 훑는 것으로 사인을 주자고.
그럼 완성된 퍼포먼스대로 움직이자고.
[다음은 소녀연맹의 무대입니다!]
신아름이 진심이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백설하가 무대로 나갔다.
백설하를 따라 소녀연맹도 무대로 향했다. 고작 음방 무대 정도 될 법한 크기의 공간이 그녀들을 맞이해주었다.
멤버들은 이백 명은 될까 의심되는 관객들 앞에서 오프닝 포즈를 취했다.
‘처음이야.’
백설하는 호흡이 떨려왔다. 무대를 앞두고 이렇게나 호흡이 불안정한 건 처음이었다.
온몸의 근육이 긴장으로 도배되어 노래는 제대로 나올까 싶다.
‘이런 적은…….’
인생 최초다.
‘나를 믿지 못하고 무대에 선 적은.’
백설하는 실전에서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오늘 방송 전까지도 완성하지 못했던 퍼포먼스를. 또한, 완성하기만 하면 승리가 확정되는 퍼포먼스를.
백설하는 눈을 질끈 감고 성필을 떠올렸다.
그가 일본에 오기 전에 해주었던 말을.
‘설하야, 하면 좋겠네요가 아니야.’
백설하가 눈을 번쩍 떴다.
‘한다!’
목표, 돔 투어로 100만 관객 동원.
‘고작 여기서 무너질 순 없어.’
그래, 성필의 말이 옳다.
‘하면 좋겠네요’ 같은 부정확한 정신 상태로 최고의 아이돌이 될 수 있을 리 없다.
하겠다고 다짐했으면, 한다.
그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최고의 아이돌이 될 사람이 아니다.
‘이미 최고의 아이돌이다.’
[소녀연맹의 무대, 지금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