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95화 (295/760)

295화

녹음실에서의 한바탕 전투를 마치고 나오는 길. 그제야 성필은 원래 계획을 떠올렸다.

‘맞다, 세이코 씨 칭찬해주기로 했었는데…….’

뒤늦게 떠올려보니 칭찬 비슷한 말은 많이 했던 것 같다.

너무 흥분했던 터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된 듯하다.

‘세이코 씨가 바라는 게 부정적인 사람들에게서 받는 인정이라고 했었지.’

현재 성필은 세이코의 머릿속에서 부정적인 인간 넘버1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세이코 씨는 정점이에요!’ 같은 말을 잔뜩 했으니, 세이코도 만족하지 않았을까.

‘만족하시고 경연엔 안 나오셨으면 좋겠는데.’

혹시 너무 흥분해서 일을 망친 건 아닐까. 맨정신이었으면 더 유려한 칭찬이 가능했을 텐데.

성필은 그게 못내 아쉬웠다.

“아저씨 일본에도 케이어스 한 명 두게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조아라의 비아냥에 성필의 고민이 자취를 감추었다.

“응?”

“아저씨 순진한 표정 짓는 거 봐. 리카, 방금 아저씨 어땠어?”

“일생의 사랑을 변호하는 드라마 주인공 같았어…….”

“봐요 아저씨. 리카가 충격받은 거 보라고요.”

그제야 성필은 조아라가 왜 이러는지 깨달았다.

성필이 흥분한 나머지 있는 말 없는 말 전부 꺼내어 칭찬했던 게, 리카의 말마따나 멤버들 눈에는 ‘일생의 사랑을 변호하는 드라마 주인공’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아라야 왜 그래. 내가 세이코 씨 칭찬할 거라고 말해줬었잖아.”

기어코 멤버들은 성필을 따라 세이코의 노래를 함께 구경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성필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오늘 세이코가 구름 위를 걷도록 칭찬할 것이란 계획을 들려줬었다.

신아름이 ‘팀장님 우리 못 믿어서 세이코 자진 하차시키려는 거예요? 네?’라며 태클을 걸긴 했었지만. 어쨌거나 계획은 원래대로 진행하기로 했었다.

“아니 그건 아는데. 딱 봐도 그냥 생각해온 칭찬이 아니던데요?”

“소다(맞아)! 박 이사님 사실대로 말하세요! 웨벡스랑 매니지먼트 계약 체결한 거 세이코 선배님이랑 어떻게 해보려는 거죠!”

“맞네 맞네. 나이도 비슷하네.”

리카와 조아라가 영혼의 콤비를 이루어 성필을 압박해왔다.

성필은 상대해주려다가, 그냥 귀찮아서 장하양에게 도움을 구했다.

“하양아, 애들이 또 나 괴롭혀. 도와…….”

“이사님 세이코 선배님 앨범 가지고 계세요?”

이젠 장하양도 비난의 물결에 동참하려는 듯했다.

“없지 당연히. 나 가수 앨범은 안 사본 지 10년은 됐지 싶다. 애초에 내가 왜 일본 가수 앨범을 사겠어.”

백설하에게 선물로 팝스타의 앨범을 사다 준 것을 제외하면, 성필이 마지막으로 산 솔로 아티스트의 앨범은 손혜빈의 것이 마지막이었다.

“정말 세이코 선배님한테 마음 없는 거죠?”

대체 녹음실에서 자신이 어땠기에 장하양마저 이러는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굉장히 열정적이긴 했나 보다.

“팀장님.”

장난스럽게 성필을 몰아붙이는 분위기가 되어가던 중.

신아름이 드물게도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아까 그 세이코란 분 경연에 나오죠? 확실하게 나오는 거죠?”

“어, 그렇지. 나온다고 하시더라.”

성필이 세이코를 인정하고 칭찬 세례를 퍼부었으니 이젠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노래 엄청 잘 부르시던데, 우리가 이길 수 있어요?”

“어?”

“야 신아름, 뭐 그런 말을 하냐. 우리한텐 쌤이 있잖아.”

조아라가 백설하에게 어깨동무했다.

“우리 쌤이 세이코란 사람 상위호환이더구만.”

“어, 응?”

“세이코가 우리 이기려면 춤이랑 퍼포먼스 배우고 백댄서로 케이어스 데려와야 할걸?”

조아라의 논리는 이러했다.

백설하와 세이코의 실력은 동급이며, 비주얼적으로도 백설하가 낫노라고.

게다가 백설하는 혼자가 아니라 소녀연맹이란 든든한 지원군마저 있다.

즉, 세이코가 소녀연맹과 싸우는 건 1대10으로 붙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아라 너 진짜 그렇게 생각해?”

신아름이 여전히 의견을 접지 않자 조아라는 불편한 티를 냈다.

“또 뭐.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세이코는…….”

“저, 저기 후타리(둘)…….”

리카가 소심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으, 그래도 선배님인데 이름만 계속 부르는 건 조또(조금)…….”

조아라와 신아름이 동시에 노려보자 리카는 힉 소리를 내면서 성필의 뒤에 숨었다.

“……세이코 선배님은.”

다행히 신아름은 리카의 지적에 따라주었다.

“국민적인 가수라고 하잖아. 공백기가 3년이라도 그 사실은 안 사라져. 우린 일본 국민 가수 상대로 일본 경연 무대에서 붙는 거라고. 전성기 세이코 선배님이라도 한국 경연 무대에서 우리랑 붙으면 져.”

홈그라운드 효과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우린 그런 무대에 올라가는 거잖아.”

“넌 매사에 왤캐 부정적이냐.”

“부정적인 게 아니라…… 됐다.”

다들 왜 이렇게 신아름이 날이 돋아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성필은 신아름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는 그녀의 뒤로 다가가 가볍게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아름이 대견하네. 사자는 토끼를 상대해도 전력을 다한단 거잖아. 맞아, 세이코 씨는 대단한 가수시지. 특히 우리보다 경력이 훨씬 기시니까, 무대 장악력도 보통 수준은 아닐 거야.”

서구권의 음악계에서는 존재감(Presence)를 굉장히 중시한다.

오죽하면 실용음악학에서 아티스트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존재감이 있을 정도다.

아티스트만의 아우라와 기세, 그리고 무대를 휘어잡는 힘.

설령 수만 명의 한 가운데에 있더라도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존재감.

그것은 재능인 동시에 경험으로 쌓을 수 있는 능력이다.

일본의 톱에 올랐던 가수인 세이코라면, 그 존재감 또한 대단하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도 이점이 있어. 케이팝 퍼포먼스는 경연에 최적화돼 있으니까. 일단 보는 맛이 있잖아. 이건 내가 아는 대중음악 쪽 교수님에게 들은 얘긴데.”

매니지먼트 관련 서적에 성필이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인연을 튼 ‘남 교수’란 사람에게서 들었다.

그는 아시아와 유럽, 미국의 주요 시상식이나 무대에 뻔질나게 다닌다. 그리고 칼럼을 써서 언론에 투고하거나 잡지에 싣기도 한다.

그런 그가 이리 말했었다.

“해외는 걸그룹이 거의 없잖아. 그나마 보이밴드가 좀 남아 있는데. 그분 눈으로 보기엔 콘서트가 좀 심심하다고 하시더라.”

남 교수가 보기에 무대에 올라 멤버들끼리 돌아가면서 노래만 부르거나, 혹은 악기만 연주하는 것은 맹맹하기만 했다.

왜 그런지 생각해보니, 강렬한 댄스 퍼포먼스나 무대 연출이 없기 때문인 듯하다고 추측했었다.

“아이돌은 백댄서까지 합쳐서 십수 명이 댄스 퍼포먼스를 하고, 레이저랑 불 빵빵 쏘고 그러잖아. 거기에 익숙해지셨으니까 다른 무대는 밍밍한 거지. 그건 ‘뉴아사’ 무대도 마찬가지일 거야.”

소녀연맹에게는 비교우위가 있다.

다른 참가자는 사용하지 않을, 다수를 이용한 군무 퍼포먼스와 화려한 무대 연출이다.

음악의 역사는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바뀌어왔다. 그리고 케이팝 아이돌은 ‘보는 음악’의 가장 큰 수혜자 중 하나였다.

“우리가 이길 수 있어.”

성필이 어깨를 조물거리면서 달콤한 이야기를 속삭이자, 신아름도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성격을 죽였다.

“아뇨, 저도 우리가 진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고요. 걍, 세이코란 사람 노래 들으니까 쌤 생각나서 그랬어요.”

“으, 응? 나?”

“네. 느낌이 비슷해서요. 만약 경연에 쌤이 상대로 나오면,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싶어서요. 그래서 좀 걱정이 됐어요.”

만약 백설하와 나머지 소녀연맹 멤버들이 경연에서 붙는다면, 과연 소녀연맹이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절대 벌어지지 않을 일이지만, 결과를 예상해보라고 하면 쉽게 답을 내리기 힘들다.

이상한 일이지만, 신아름은 세이코와 백설하를 겹쳐서 본 것이다.

신아름이 본 사람 중 최고의 가수라고 단언할 수 있을 만한 사람, 백설하와 말이다.

“신아름 너 좀 심하다.”

“뭐가?”

“쌤 너무 띄워준다고. 쌤이 일본 최고 가수급이란 거 아니야. 너무 칭찬해주면 쌤 그거 진짜인 줄 안단 말야.”

“진짜 아니었어?!”

백설하가 경악한 채 답을 요구하듯 성필을 쳐다보았다.

왜 신아름이 아니라 성필을 보는지는 몰랐지만, 그는 성심성의껏 답해주었다.

“우리 설하가 훨씬 낫지.”

“아, 그, 그래요……? 헤헤, 그런가……?”

“아저씨도 심하다 진짜. 그리고 쌤은 사기 조심해요.”

* * *

“이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소녀연맹의 매니저 역할을 톡톡히 할 기회도 없이 회사에서 죽치는 게 일상인 슈이치가 CD를 가져왔다.

“일단 가져와봤습니다.”

“이게 뭔데요?”

성필이 슈치이가 가져온 상자 속을 뒤져보았다.

안에는 CD가 어지러이 쌓여 있었는데, 겉에는 ‘20130630D’라고만 쓰여 있었다.

“다키스트 일본 콘서트 투어 촬영 영상 원본입니다.”

“원본이요? 아, 그렇겠네요.”

웨벡스가 처음으로 매니지먼트했던 케이팝 아이돌이 다키스트였다. 성공적으로 아레나 투어, 돔 투어까지 마쳤었던가.

“다키스트의 일본 매니지먼트는 웨벡스가 주도했습니다. 콘서트 기록물도 남아 있었죠.”

성필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와 같은 눈빛이었다.

CD를 차례로 확인하면서, 당장 보고 싶어 죽겠단 듯 어깨마저 움찔댔다.

“저도 다키스트 도쿄 돔 콘서트 블루레이는 있거든요. 근데 원본이라니. 생각도 못 했어요.”

콘서트 영상은 편집자의 의도에 맞게 짜깁기되어 있다.

성필은 항상 줌인, 줌아웃이나 장면 전환이 난무하는 영상보다 앵글이 흔들리지 않는 원본을 바라왔었다.

“웨벡스 오자마자 찾아볼 걸 그랬어요.”

“소녀연맹 분들이 퍼포먼스를 구상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슈이치가 은근히 기대하는 투로 물어오자, 상자를 뒤지던 성필의 손이 멈췄다.

그는 아주 잠깐 고민하더니, 그의 기대에 보답하듯 미소를 보였다.

“도움 될 거예요. 찾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지 쌓인 기록보관실을 뒤졌던 슈이치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 영상이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다키스트의 무대는 아이튜브에 널려 있고, 그나마 이 CD가 나은 건 편집이 가해지지 않았단 점이나 고정된 앵글 정도니 말이다.

게다가 소녀연맹은 다키스트의 퍼포먼스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니까.’

다키스트이기에 표현할 수 있는 퍼포먼스다. 소녀연맹은 분위기뿐 아니라 아직은 퍼포머로서의 기량도 부족하다.

그래서 소녀연맹은 그녀들이 소화할 수 있는 스타일로 ‘더 킹’을 ‘더 퀸’으로 바꾸었다.

전체적으로 퍼포먼스의 난이도도 낮추고.

“도움이 돼서 기쁩니다.”

이 CD는 성필의 심미적 욕망을 충족하는 용도로만 쓰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슈이치가 괜한 일을 한 게 되니, 성필은 나긋하게 감사를 전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 날, 히무라가 섭외해 준 약 10명에 이르는 백댄서들과 멤버들이 인사했다.

백댄서를 지휘하는 건 안무가이자 트레이너로 한국에서 온 백민정이었다.

“여러분들이 가장 신경 써주셔야 할 건 동선이에요. 뒤로 빠지거나 옆으로 퍼지는 동작이 많으니 꼭 여러 번 복기해주시고…….”

백민정이 백댄서들과 소통하려면 통역이 필요했다.

그 역할은 슈이치가 맡게 됐다.

슈이치는 자신이 할 일이 생기자 근래 잃어버렸던 생기를 되찾았다.

‘꼭 한 이사님 같으시네.’

한국에서 잘 어울리더니, 성격이 비슷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유이는 백댄서들의 체형을 재면서 그들에게 입힐 의상을 고민했다.

“‘더 퀸’이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쓰잖아요. 컨셉도 여왕이구요. 그래서 백댄서분들…….”

이유이는 황급히 단어를 바꾸었다.

“백업 댄서, 분들 의상은 궁정의 신하 같은 느낌이 어떨까 하거든요.”

그녀는 얼마 전, 조아라가 ‘백댄서’란 단어를 싫어한단 사실을 알게 된 참이었다.

무심코 백댄서라고 말했다가 조아라에게 장장 5분 동안 설교를 들어야만 했었다.

“좋네요. 그런데 유이 씨, 시대상은 어떻게 잡으실 거예요? 중세? 근대?”

“어, 중세랑 근대는 어떻게 다르죠?”

“……그러게요?”

성필이나 이유이는 역사 전공도 아닌 터라, 두 시대의 구분법은 몰랐다. 시대에 따른 정확한 복식 차이도 모르고 말이다.

애초에 패션이란 게 중세, 근대 이렇게 딱딱 나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근대 쪽이 낫지 않을까요? 그쪽이 의상 만들기도 쉽고 아이돌 무대에 어울릴 거 같아요.”

‘아니’ 뮤직비디오에서 리카의 의상은 중세풍을 염두에 두었었다. 잘 어울리기도 했었고.

하지만 이번에 소녀연맹이 펼칠 ‘더 퀸’엔 근대 쪽 복장이 어울릴 것이다.

한 100년 전 황족이나 귀족들이 입은 제복처럼 금실이나 술을 박아서 말이다.

“그럼 그렇게 해볼게요.”

이유이는 성필과의 협의를 마치고 본업으로 돌아갔다.

성필은 연습실 구석으로 가서 전체적인 풍경을 훑었다. 연습실이 북적하니, 드디어 뭔가 진행된단 느낌이 들었다.

‘경연까지 2주 남았어.’

소녀연맹은 기간 내에 퍼포먼스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백민정이 만든 안무를 상당히 잘 소화하고 있으니.

성필은 일이 잘 진행되는 모습을 확인하곤 연습실을 나왔다.

‘나는 지휘권자, 제일 높은 사람이니까 자리를 피해 주는 편이 낫겠지.’

멤버들은 몰라도 백댄서들은 압박감을 느낄 수도 있다.

성필 또한 상급자가 일터에 있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잘 알았기에 조용히 자리를 피한 것이다.

‘나를 찾으면 바로 갈 수 있는 곳에 있을까.’

그런 곳은 어디일까 생각하며 돌아다니던 중, 성필은 미사토와 마주쳤다.

“부장님 안녕하세요.”

“박 이사님도 안녕하세요.”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성필은 기대하는 눈치로 그녀에게 물었다.

“세이코 씨는 어떠세요?”

미사토는 대답을 끌더니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게, 세이코쨩이 기운을 더 차렸어요. 꼭 경연에서 이기겠다면서요.”

“네? 세이코 씨가 바라는 건 드렸잖아요. 그런데 왜 경연에 나오신다는 건데요?”

“박 이사님 칭찬 덕분, 아니. 때문에요.”

세이코는 어제 머라이어 캐리의 노래를 부르곤 더 기세가 등등해졌다고 한다.

3년 동안 못한 노래를 전부 할 속셈인지, 눈 감을 때까지 노래만 불렀었다.

성필은 혼란스러웠다.

“부장님이 그러셨잖아요. 세이코 씨는 제 인정을 받으려고 경연에 나가려는 거라고요. 경연에 나가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 그런다고요. 그런데, 원하는 걸 줬는데 왜 그만두지 않는 겁니까?”

“더 칭찬받고 싶은 거…… 같아요.”

“…….”

성필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던가? 그 당연한 사실을 세이코를 보고서야 알았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저도 어제 이사님 말씀 듣고 조금 감명을 받아서, 세이코쨩한테 다시 말해봤어요. 굳이 경연에서 네 능력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고요.”

“그랬더니요?”

미사토가 고개를 저었다.

사태가 어떻게 흘렀을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자신감 넘치는 세이코는 경연마저도 쉬이 이기리라 판단한 것이다.

“세이코 씨는 아직도 제 인정을 바라십니까? 아님 인정받았으니 이젠 끝입니까?”

“어제오늘 계속 물어보더라구요. 이사님이 경연 무대를 보러 오는지요.”

“…….”

이제 어떡하지.

세이코가 울면서 도망가도록 욕이라도 퍼부어야 할까? 혹은 성필이 그녀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서 오열해볼까?

‘어떡하지.’

성필은 세이코가 제발 경연에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아직도 그의 마음속 깊은 구석에는, 옛날에 보았던 미래의 풍경이 남아 있었다.

그 풍경을 떠올릴 때마다 솟아오는 끈적한 불쾌함도 같이 남았다.

‘세이코 씨는 내가 봤던 미래에서 어떻게 됐던 걸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좋은 결과가 아니란 것만은 확실했다.

그 미래가 점점 다가오는 듯한 예감은 성필의 착각일까.

“어떻게 세이코 씨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을까요? 제가 직접 가서 말해본다던가 해서요.”

“나오지 말라고 설득하면 할수록 세이코쨩은 오기가 생길 거예요.”

10년 넘게 세이코를 봐 온 미사토의 말이니, 그녀의 의견은 타당할 것이다.

“특히 박 이사님이 세이코쨩을 설득하면 더 그럴 거고요.”

성필은 진심으로 걱정됐다.

소녀연맹이 세이코를 이기는 미래가 다가오면, 세이코가 어떻게 될 것인지.

‘패배감 주지 않고 적당한 수준에서 이기는 법은 없을까?’

경연이 정확한 수치를 측정할 수 있는 기록 스포츠도 아니고, 그딴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적당히 손만 보고 이긴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사고방식이다.

성필이 소녀연맹의 승리를 확신하는 것도 오만하긴 매한가지지만, 그로선 어쩔 수가 없었다.

‘소녀연맹의 퍼포먼스는 협의를 거치면서 점점 진화하고 있어.’

옆에서 이야기만 들어도 설렐 만큼, 성필은 멋진 무대가 되리라고 믿는다.

이 진화는 경연 전날까지 이어질 것이다.

또한 성필은 프로듀서로서 꼭 구현하고픈 연출이 있었다. 아직은 확신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구현된다면 반드시…….

‘경연에서 우승할 수 있을 만한 연출이 있어.’

동시에 성필은 세이코를 떠올리게 된다.

소녀연맹의 무대를 보고, 그에 패배한 세이코가 어찌 될 것인가.

3년 만에 무대에 올라 노래했는데 타국의 아이돌에게 패배한 가수는 어떤 심정일 것인가.

“그런가요…….”

하지만 성필은 세이코의 패배를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런 말은, 세이코의 전설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 온 미사토의 마음에 조금도 닿지 않을 테니까. 또한 실례이기까지 할 것이다.

“모쪼록 좋은 무대를 만드시길 빕니다.”

“……네, 죄송합니다 박 이사님. 일이 이렇게 돼서요.”

성필은 세이코가 부디 무대를 잘 소화하길 바란다.

후회하지 않고 가슴에 후련함만을 가지기를.

비록 패배하더라도.

* * *

소녀연맹은 성필이 불러온 디렉터들과 자주 협의를 갖는다.

백민정과는 안무에 대해.

정지음과는 음악에 대해.

이유이와는 의상에 대해.

그리고 성필과는 무대의 전체적인 구상에 대해 협의한다.

“이건 어떨까?”

로 시작하는 의견 개진은, 수많은 사람들의 입과 머리를 거쳐 가며 마침내 구체적인 형태로 거듭난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한 명보다는 백 명이다.

인간이란 망상의 파편을 모아 이데올로기의 수준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동물이다.

“이거 진짜 멋지다.”

때론 무심코 감탄할 만한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했다.

좋은 결과로 이어질 때마다 다들 이러한 협의에 더욱 열성적으로 변해갔다.

소녀연맹은 단순한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게 아니다. 한국 대표로 경연에 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심지어 상대는 국민적인 인지도를 가진 톱스타인 세이코다.

다들 머리를 모아 더 나은, 더 좋은, 더 완벽한 무대를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래, 다 같이 머리를 모아도 부족할 판인데.

“야 신아름.”

조아라가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 ‘좋다’만 반복하지 말고.”

바닥에 앉아 무료하게 턱을 괴고 있던 신아름이 한숨을 쉬었다.

“생각이 없는데 뭐 어떡하라고. 나 없어도 잘 되는구만.”

평소 신아름의 말투였다. 평소처럼, 조아라와 은근히 기세 싸움을 하는 듯한 분위기.

하지만 상황이 달랐다.

“우리 머리 부서지도록 아이디어 내고 있잖아. 너도 손 좀 보태라고.”

케이팝 아이돌이 일본의 경연에서 패배할 수는 없다.

애초에 아이돌은 한국에서조차 경연 프로그램에 잘 나가려 하지도 않는다. 본인들의 실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평가받을 테니까.

아티스트 중 누가 그런 상황을 바라겠는가.

하지만 소녀연맹은 나가게 됐다. 그러니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

멤버들은 지혜를 쥐어 짜내 퍼포먼스에 매달렸다.

신아름만 제외하고.

“아 진짜…….”

심란한 건 조아라만이 아니었다.

‘별 되지도 않는 이유 들먹이면서 시비 거네.’

신아름도 그러했다.

“아름아.”

분위기가 과열되는 것을 느끼자, 장하양이 두 사람의 손을 잡으면서 진정시켰다.

“박 이사님이 옛날부터 항상 말씀하셨잖아. 아티스트 본인이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퍼포먼스가 있다고. 그래서 우리 생각이 가장 가치가 있다고. 우리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고 하셨어. 아라 말은 그거야.”

말투는 장하양보다 투박했지만, 조아라 또한 이런 의도로 말한 것이다.

장하양, 조아라가 성필과 지내 온 시간이 평균 3년에 이르렀다.

그녀들은 성필을 만나기 전까지 아이돌엔 관심도 없었다. 따라서 아이돌의 영역에서만큼은 백지나 다름없었다.

그 백지를 3년간 성필의 생각으로 칠해왔다.

“사소한 거라도 좋아. 바꿨으면 좋겠는 거나 추가했으면 좋겠는 거. 조금이라도 말하면 돼. 아름이도 그런 건 있을 거잖아.”

딱히, 없다.

옛날에도 손혜빈이 이와 비슷한 논거로 신아름에게 무어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어쩌라고’라 생각했던 신아름이었는데, 장하양이 성필의 말을 빌려온다고 마음이 움직일 리 없었다.

“없어요. 그리고 팀장님은 그냥 나인 대로 있어도 된댔거든요. 걍 시키는 거 잘하면 되지. 난 진짜 생각 없어요.”

“그럼 나중에라도…….”

“저기이이…….”

신아름은 화를 억누르듯이 말을 길게 끌었다.

경연에 나간단 것 때문에 긴장되고, 비록 작전이었지만 성필이 경연 상대를 칭찬했단 게 아니꼬운데.

설교를 듣고픈 마음은 없었다.

이미 옛날부터 수도 없이 들어왔던 설교라면 더욱더 들을 마음이 없다.

심지어 성필이 이런 자신을 옛날옛적에 인정해주었으니까.

“저는 진짜, 정말, 없다니까요?”

안 그래도 신아름은 불만이 많았다.

춤과 노래를 연습해도 모자랄 시간을, 소녀연맹은 아이디어 협의로 매일 몇 시간씩 날렸는지 모르겠다.

신아름은 가만히 앉아 이야기를 듣는 게 고역이었다. 고역도 이런 고역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춤추고 노래해야 하는데, 눈앞의 멤버들은 말만 교환하고 있으니.

그 짜증이 지금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

“춤은 백민정 쌤 계시고. 음악은 지음 오빠 있고. 옷은 유이 언니가 해주잖아요? 무대 연출도 팀장님이 해주고?”

그런데 대체 왜…….

“2주밖에 없잖아요. 왜 우리끼리 다과회라도 온 거처럼 둘러앉아 하하호호…….”

“야 신아름.”

조아라가 눈에 불을 붙였다.

“됐으니까, 걍 닥치고 있어.”

신아름이 맞불을 놓았다.

“닥치고 있을 거니까 되도 않는 걸로 팀장님이 했던 말 들먹이면서 귀찮게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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