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죄송해요, 박 이사님.”
세이코가 다시 노래하게 됐다.
그것만으로도 미사토는 새 삶은 얻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기쁨에 걸맞지 않은 슬픔도 함께했다.
“세이코쨩과 소녀연맹이 한 경연에 나가는 건 제 살 파먹기죠.”
또한, 히무라가 ‘뉴아사’ 제작진으로부터 그나마 강한 경쟁자가 적은 회차를 겨우 얻어낸 기회를 날리는 게 된다.
경연 프로그램 제작진이 출연자를 미리 알려주는 일을 하고 싶을 리 없다.
그들은 히무라의 애원과 강권 때문에 억지로 내준 것이다. 히무라도 그게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란 것을 알고도 했다.
‘소녀연맹의 승률을 조금이라도 올리기 위해, 히무라 실장님은 스스로의 평판마저 깎으신 거야.’
그렇게 잡은 기회를, 미사토는 가후(歌后) 세이코의 출연을 허가함으로써 날려버린 것이다.
성필과 히무라, 소녀연맹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럼에도 미사토는 이 결정을 번복할 수 없었다.
“박 이사님.”
미사토는 울음기를 지우고 마음의 심지를 다잡았다. 이어서 사과하는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아무리 변명해도 박 이사님이 느끼실 배신감을 해결할 순 없겠죠.”
“…….”
“그러니, 모자라나마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소녀연맹의 데뷔 쇼케이스에 나오는 게스트들요.”
웨벡스의 스타들을 대거 포함하여 이목을 모으는 게 데뷔 쇼케이스의 기본적인 전략이다.
“아이돌 들러리가 되긴 싫다면서 거절한 아티스트들이 꽤 있어요. 그중에서 인지도가 높은 분들을 모실게요. 쇼케이스가 더 성공하도록요.”
성필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미사토는 조금이라도 사죄하고자 자신이 준비해 온 답례들을 술술 말했다.
“소녀연맹이 각종 유명 잡지나 텔레비전 방송에 나갈 수 있도록 손을 쓸게요. 히무라 실장님의 영향력이 닿지 않을 곳도 있어요. 그쪽엔 제가 힘을 쓸 수 있어요.”
역시 성필은 답이 없었다.
“소녀연맹의 성공에 제가 손을 보탤게요.”
웨벡스의 가수 관리 1부 부장. 아니, 이제는 본부장이 될 그녀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다.
이런 파격적인 제안이 주어졌지만 성필은 묵묵부답이었다. 미사토는 자신이 진 죄의 무게가 더욱 깊이 느껴졌다.
‘이러실 수밖에 없겠지.’
케이팝 아이돌이 일본에서 아무리 성공해도, 평생 일본에서만 활동할 수도 없잖은가.
케이팝 아이돌의 본진은 한국이다. 전 세계의 케이팝 팬들이 주목하는 것도 한국에서의 인지도다.
일본 경연 프로그램에서 패배한 아이돌에게, 한국의 대중이 어떤 시선을 보내겠는가.
‘아예 국적을 일본으로 옮길 게 아니고서야, 내가 드리는 답례는 가치가 적어.’
미사토는 비즈니스 파트너와의 신뢰보다 딸의 재기를 바랐다. 그녀는 신의를 어긴 죄책감을 잔뜩 맛보면서 말을 이었다.
“소녀연맹을…….”
“미사토 부장님.”
미사토는 드디어 열린 성필의 입을 바라보며 군인처럼 각을 잡았다. 그녀는 그에게 어떤 심한 비난을 듣더라도 묵묵히 감내할 생각이다.
설령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이 나와도 화 따위 낼 수 있을 리 없다. 그녀는 배신을 저질렀으니까.
“아까부터 소녀연맹이 반드시 진다는 투로 말씀하시네요.”
“……네?”
아까부터 미사토는 감히 성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었다.
세이코가 ‘뉴아사’에 출연한단 이야기를 꺼내고 처음 본 성필의 표정은.
“솔직히 당황스럽네요.”
어이가 없는 사태를 본 사람과 같았다.
“제 살 파먹기……. 소녀연맹에게 답례로 비즈니스적 호의를 베풀고……. 미사토 부장님은 꼭 소녀연맹이 꼭 지리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으세요.”
“그건, 아니, 그야.”
노래의 여왕이라 불렸던 세이코가 아닌가.
국민적인 인지도를 가진 가수가 경연에 나온다.
일본에서의 지명도가 한없이 0에 가까울 소녀연맹이 이기리라 생각하는 쪽이 이상한 거 아닌가?
그리고 무대에서의 기량을 생각하더라도, 소녀연맹은…….
“처음 부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나긴 했습니다.”
아, 그럼 그렇지.
성필도 세이코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끼는 게 분명…….
“제정신이십니까?”
미사토는 더욱 멍해졌다.
성필에게 욕을 듣더라도 꿋꿋이 고개만 숙이기로 결심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예상했던 성필의 비난은 이런 어조와 맥락이 아니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선수라도 3년이나 트레이닝과 관리를 안 하면 망가지기 마련입니다. 갑자기 경기에 내보내봤자 망신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겠죠. 세이코 씨는 3년 동안 한 번도 노래한 적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 아닌 겁니까?”
“아, 아니요. 세이코쨩은 정말 노래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요?”
그런데도, 세이코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단 것인가?
노래라고 운동이나 스포츠와 다르진 않다.
사람들은 흔히 노래를 재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지만, 노래 또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설하만 해도 그렇지.’
백설하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오직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스트레칭에 가벼운 운동은 물론이고, 회사에 와서는 기초 중의 기초인 스케일 훈련도 거르지 않는다.
거기에 식습관까지 오직 노래를 위해 맞춰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설하는 현재의 경지에 오른 것이고, 또한 오른 채로 버틸 수 있다.
“세이코 씨는 노래와 마찬가지로 3년 만의 미디어 출연이 아닙니까?”
연예계는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신성들이 등장한다.
어느 한 연예인을 향한 애정과 동경은, 그가 고작 몇 개월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사라지기 십상이다.
“특정 팬덤을 겨냥하지 않고 오직 노래로만 대중을 상대하던 세이코 씨는, 시간에 따른 인지도 저하가 더 심할 거 아닙니까.”
물론 경연으로 컴백한단 사실은 대중의 관심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관심은 오로지 호기심에 의한 것일 뿐. 몇 명이나 세이코를 애정 어린 눈길로 봐주겠는가.
“이번 경연은 세이코 씨가 국민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손쉽게 승리할 수 있는 무대가 아닙니다. 살얼음판일 거예요. 3년의 공백을 깬 가수가 어떤 상태일지, 수천만 명이 사소한 실수 하나 놓치지 않고 바라볼 겁니다.”
그저 그래선 안 된다.
세이코는 3년 전과 거의 동등한 퍼포먼스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세이코는 환영이 아닌 비난을 감수해야 하리라.
“히무라 실장님께 들었습니다. 세이코 씨가 활동을 중단했던 이유는 악플을 견디지 못해서라고요.”
세이코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단 모양이다.
거의 몇 분에 한 번씩 폰을 들고 트잇터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했다던가.
당연히 좋은 말만 있지는 않았다.
비난은 유명세에 비례한 세금처럼 인기가 있을수록 많아진다.
세이코는 하루에만 수백, 수천 개씩 늘어가는 비난을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보아왔다. 그런 환경을 감내할 수 있는 인간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을 경연에 세우겠단 겁니까? 확실히 말하겠습니다. 이번 경연은 세이코 씨의 화려한 컴백, 그딴 이름을 붙일 만큼 좋은 결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 시점에서 미사토는 성필의 어조가 점점 격해져만 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박 이사님은 세이코쨩을 걱정하는 거야.’
소녀연맹의 승리로 화려한 일본 데뷔를 알렸어야 할 경연에, 갑자기 노래의 여왕이라는 강적이 출연했다.
그런 데서 발생한 분노가 아니었다.
성필은 진심으로 세이코를 걱정하는 것이다.
동시에.
‘소녀연맹의 승리를 확신하고 계셔.’
세이코란 여왕을 상대하면서, 심지어 그녀의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면서, 너무나 당당히 소녀연맹의 승리를 말하고 있었다.
“제가 드리고픈 말은 하나입니다. 세이코 씨를 못 나오게 하세요.”
미사토는 가냘픈 미소를 띠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성필의 진심이 담긴 걱정을 온전히 수용할 수가 없었다.
“박 이사님, 전에 저는 세이코한테 엄마 같은 존재라고 했었죠? 그런 제가 3년 동안 세이코한테 말해왔어요. 조금이라도 노래를 해보자고, 한 소절만이라도 좋으니까. 노래 부르는 걸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니까…….”
아까 지웠던 울음기가, 다시금 미사토의 얼굴에 나타났다.
“한 번도, 단 한 소절도 부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어제, 어제…….”
세이코가 노래를 불렀다.
비록 콧노래에 불과했지만, 세이코는 3년 만에 처음으로 노래 비슷한 소리를 냈던 것이다.
미사토는 그때의 감격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치, 어머니가 딸이 처음으로 걸음마를 떼었을 때와 비슷한 환희였으니까. 이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기엔, 언어란 도구는 너무나 조잡하다.
“그런 세이코쨩이 스스로 경연에 나갔다고 했어요.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어요. 저는, 저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요…….”
“…….”
성필은 미사토에게 풍기는 분위기에 무심코 공감하게 되어, 더는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
예전에 신규 의류 브랜드 론칭 행사에서, 그녀는 성필에게 자식처럼 느껴지는 아티스트가 있냐고 물었었다.
성필은 신아름을 떠올렸었다.
‘미사토 씨한테 세이코는, 나에게 아름이 같은 존재일 거야.’
신아름이 불운한 사건으로 그만두었던 가장 좋아하는 일.
만약 그런 게 있고, 그녀가 그것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면.
성필은 그녀가 지옥을 앞두고 있단 것을 알고도 말릴 수 있을까?
아니, 성필은 이미 절반쯤 그런 짓을 하고 있다.
‘회귀했는데도 아름이에게 다시 아이돌을 시킨 거 자체가…….’
성필은 반쯤 남은 칵테일를 한입에 털어 넣고 물었다.
“미사토 부장님이 계속 권했는데도 하지 않던 노래를, 세이코 씨가 갑자기 하기로 한 이유가 뭡니까. 설마 싶은데, 저인가요?”
세이코는 성필이 날린 비판(언어폭행)에 운 적이 여러 번이었다.
사람이 단순히 말만으로 운다면, 심적인 피해가 어찌나 컸겠는가?
말로 깎인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건 인간의 동기로써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은 아니다.
‘그 동기가 나 따위로부터 시작됐다는 게 이해하기 힘든 거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부모 같은 미사토도 실패했던 일을 성필이 해버린 게 된다.
미사토는 성필의 물음에 눈가를 닦으며 답했다.
“박 이사님께 증명하고 싶댔어요.”
20대 초반, 컴퓨터나 인터넷 따위에는 관심도 없던 세이코의 손에 스마트폰이 생기게 되었다.
세이코는 그 신문물로 자신의 이름을 많이도 검색하고 다녔다고 한다. 항상 상처밖에 받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20대 후반,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비난의 한계점을 넘어섰다.
“퇴물이다. 늙었다. 노래를 못 부른다.”
“그런 말은…….”
“맞아요. 신경 안 써도 되죠. 그런데 세이코는 그걸 못 했어요.”
세이코는 유명한 만큼 비난도 많이 받았다. 악플과 비난은 유명인에게 세금과 같아서, 절대 피할 수가 없다.
세이코는 아직 20대 후반에 불과했음에도, 늙었다거나 못생겼단 악플을 보곤 미용에 돈을 훨씬 더 많이 썼다.
앨범 커버나 화보를 찍을 때도 화장과 보정에 더 신경 썼다.
“그래도 악플은 더 늘어가기만 했어요. 세이코가 유명해질수록 더요.”
노래를 못 부른다. 곡이 안 좋다.
그런 악플에 세이코는 더 열심히 연습하고 앨범 작업에 돈을 더 쏟아부었다.
하지만 악플은 줄어들지 않았다.
곡이 좋으면 회사 덕.
곡이 안 좋으면 세이코 때문.
비난의 굴레는 끊이지 않고 영원히 돌아갔다. 결국 세이코는 그것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린 것이다.
“물론 세이코한테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한 명도요.”
당연하다.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의 가수의 면전에서, 감히 누가 그딴 망발을 지껄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 박 이사님은 하셨어요.”
공백기가 3년이 넘은, 현역이 아닌 사람. 그렇기에 진짜배기 가수가 아니다.
“박 이사님의 말씀은 세이코가 난생처음으로 마주한, 형태가 있는 비판이었어요. 인터넷에 바다처럼 넘쳐나는 비난이…….”
형태를 갖춰서, 실체화하여, 성필로서 나타난 것이다.
성필은 깨닫는 바가 있었다.
어째서 세이코가 그토록 성필의 사과에 집착했는지. 어째서 ‘뉴아사’로 소녀연맹과 겨루길 바라는지.
심리학적으로 따지자면, 세이코는 방어기제인 전위를 사용한 것이다. 세상 모든 비난을 칭찬으로 바꿀 수 없으니, 성필에게나마 인정을 받고픈 것이다.
“세이코는 그냥 인정받고 싶은 거예요. 3년 만에 용기를 냈어요. 이건 다시 없을 기회예요.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세이코쨩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천운이요…….”
세이코가 굳이 소녀연맹을 이길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바라는 건 실체화한 비난, 성필의 인정일 테니까.
“그러니, 저는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세이코 씨가 바라는 게 제 인정이라고요?”
“네? 어, 그렇, 죠?”
“그럼 그냥 주면 되잖아요.”
“그냥, 준다고요?”
“하늘을 날아갈 정도로 칭찬해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음악을 그만두었던 가수. 그녀가 바랐던 건 비를 그치게 하는 것이었다.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제 가능하게 됐다. 성필은 인간의 모습을 갖춘 소나기였고, 세이코는 그런 성필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또한.
“인정,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굳이 경연에 나올 필요 없이요.”
소나기도 그칠 생각이 가득하다.
* * *
성필은 출근하여 사무실에서 히무라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가 끝나곤 즉시 연습실로 향했다.
연습실엔 소녀연맹 멤버들이 몸을 푸는 중이었다.
“앗, 이사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좋은 아침이네요!”
“숙소 나올 때 인사했잖아. 왜 또 해.”
“인사는 몇 번을 해도 좋은 거라구요!”
애초에 성필과 소녀연맹은 같은 숙소에서 지낸다. 출근할 때도 함께였다.
웨벡스로 도착하고 나서 성필은 사무실로, 소녀연맹은 연습실로 직행했었을 뿐이다.
“후후, 이사님 이거 보세요!”
“권총이야?”
리카는 아까부터 양손을 허리 뒤로 숨기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짠!’이라고 외치면서 크리스털 왕관을 꺼냈다.
리카는 왕관을 엄숙히 자신의 머리에 썼다.
“어제 유이 언니가 가져온 소품이에요!”
“크리스털은 너무 가벼운 느낌 아니야?”
“다른 것도 많아요!”
리카의 발밑에 놓인 박스에는 온갖 종류의 소품 왕관이 있었다.
보기만 해도 중세가 떠오르는 고풍스러운 것부터, 어린아이 장난감으로 쓰일 법한 과도하게 화려한 것까지.
“박 이사님이 이것 중에서 정해주세요! 어떤 게 제일 잘 어울리나요?”
리카는 어린아이처럼 여러 왕관을 손에 들고 자신의 머리에 마음껏 씌웠다.
이 왕관은 ‘더 퀸’ 오프닝에 쓰일 것이다.
가톨릭 성가(聖歌)를 연상시키는 신성한 보이스가 이어지며, 백댄서들이 소녀연맹에게 왕관을 씌우는 퍼포먼스다.
“천천히 살펴보자.”
“하이(네)! 그리고 또 아타시(제)가 생각한 거 있는데요!”
“어떤 건데?”
리카는 칭찬받을 생각이 가득하여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퍼포먼스를 펼칠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그녀는 머리에 쓴 왕관을 가볍게 벗어 던지더니 손가락을 하늘 위로 높이 뻗었다.
“쇼죠렌메가 키타(소녀연맹이 왔다)!”
“다키스트를 모욕하지 마!”
“에엑?!”
리카가 한 건 다키스트의 쿄세라 돔 콘서트의 오마주였다.
다키스트도 콘서트 오프닝에서 ‘다키스트가 키타(다키스트가 왔다)!’면서 왕림(王臨)을 당당하게 선포했었다.
“아, 아라쨩이 하자고 했어요!”
성필의 반응이 좋지 않자 리카가 즉시 동료를 팔아먹었다. 그러자 성필은 조아라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조아라는 예상치 못한 성필의 태도에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깨에 올라오는 성필의 따스한 손길에 긴장이 전부 풀어졌다.
“멋지다 아라야. 확실히 임팩트 있겠어.”
다키스트의 콘서트나 무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퍼포먼스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소녀연맹이 다키스트의 후신(後身)이란 직접적인 선포는, 일본의 케이팝 팬들에게 무엇보다 강력한 인상을 남길 것이다.
“우리 아라 좀 하는데?”
“아타시(제)가 낸 의견이에요!”
리카가 쪼르르 달려와서 성필의 팔에 매달렸다. 하지만 성필은 리카에겐 신경도 쓰지 않고 조아라를 칭찬하기 바빴다.
“아라 잘했으니까 상 줘야겠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아라쨩이 아니라 제 의견이라구요! 아라쨩도 뭐라고 해줘!”
“나는 오마카세 먹고 싶어요.”
“손나(그런)!”
연극이 끝난 건 리카가 억울해 미치겠다는 기색으로 길길이 날뛰기 직전이었다.
“그럼 아타시(저)한테 먹을 거 사주시는 건가요!”
“아니. 넌 친구 계약 1조를 어겼다. 거짓말을 한 거지.”
“에엑?!”
“오히려 리카가 나한테 사줘야 해.”
“어쩔 수 없네요!”
의외로 싫어하진 않네?
분명 ‘손나(그런)!’라고 하면서, 20대의 용돈을 뜯는 나쁜 어른으로 몰아붙일 줄 알았건만.
“이제 장난 끝. 회의하자.”
회의란, 소녀연맹 멤버들이 생각한 퍼포먼스 아이디어를 수합하는 것이었다.
소녀연맹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성필은 그룹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단 기조를 세워왔다.
본인이 생각했기에 본인만이 표현할 수 있는, 본인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퍼포먼스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이번 경연 무대라고 다르진 않았다.
“이거 어제 밥 먹다가 나온 생각인데요.”
조아라가 장하양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장하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연습실 안쪽에 마련된 간이 탈의실로 들어갔다.
다시 나온 장하양은 정장 차림이었다.
보통 정장과 다른 점은, 안쪽에 와이셔츠 대신 크롭티를 입었단 것이었다. 재킷이 가리지 못하는 배와 목 부분이 드러나 보였다.
“‘롱 포’ 때 의상 같네. 정장으로 가고 싶다고? 아라 취향 진짜 확고하다.”
“중요한 건 정장이 아니에요. 하양 언니.”
“응.”
갑자기 장하양이 재킷의 목깃을 쥐더니, 꽉 잡아당기면서 풀어헤쳤다.
그러자 단추가 전부 터져 나오면서, 재킷에 가려져 있던 장하양의 가슴과 배가 드러났다.
“이건……!”
장하양은 크롭티가 아니라 가슴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아니, 아마 크롭티에 붕대를 붙인 의상일 것이다.
성필의 반응을 본 조아라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면서, 자신의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설명하려 한 순간.
“아라 너 미쳤어?! 하양이 가슴에 붕대만 두르게 하고 무대에 내보낼 거야?! 우리가 나갈 데는 스트립 클럽이 아니라고!”
“부, 붕대만 감은 게 아니라 안에 제대로 티도 있어요! 크롭티에 붕대를 접착한 거라고요!”
참고로 이유이가 고생해주었다.
“아니, 그래도 너무…….”
장하양을 가족처럼 여기는 성필이어서 그런 것일까. 너무나 선정적으로 보인다.
조아라는 ‘선정적이다’란 성필의 의견을 일축했다. 그녀가 아이디어를 얻은 영상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세쿠시(섹시)!”
리카가 손으로 눈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영상을 전부 보면서.
영상에 나타난 건 어느 보이그룹의 메인댄서였다. 그의 의상은 성필도 익히 아는 것이었다.
한때 케이팝씬에 엄청난 열풍을 몰고 왔던 것이니까.
“여기 이 선배님 의상 보고 아이디어 얻었어요.”
그 남자 아이돌의 의상은 기본적으로 장하양과 비슷했다. 다른 점은 붕대를 가슴에 사선으로 감아서 한쪽 유두만 가렸단 것이다.
탄탄한 흉근은 오일이라도 발랐는지 조명을 받을 때마다 번쩍였다. 보기 싫어도 드러난 한쪽 유두로 시선이 가버릴 정도로 충격적이다.
“이거 진짜 여덕들이 미치긴 했었지.”
가히 남자 아이돌 의상의 혁명이라 보아도 좋았다.
상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의상들은 이전에도 많았지만, 천을 사선으로 감아 절반만 드러낸 게 오히려 섹시함을 더 살렸다.
연말 시상식 때 여자들 함성이 얼마나 크던지, 당시 직관하고 있던 성필은 귀청이 떨어질 뻔했었다.
“여기서 아이디어 얻어서 하양 언니한테 적용해봤어요. 뭐, 당연한 얘긴데 이 선배님처럼 사선으로 천을 두를 순 없고.”
“아라 너 취향 진짜 확고하다. 요즘 남돌 댄스 영상 안 본다더니 이런 거 보고 있었니?”
“아이돌이 아이돌 연구하는 게 나빠요?!”
“아라쨩 엣찌(음란)!”
반발이 거세지자 조아라는 자신의 순수함을 열렬하게 어필했다.
“아니 내가 이상한 생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춤! 춤 연구하는 거라고요! 옷도 춤의 일부예요! 머리카락이랑 똑같다고요! 나는, 이 조아라는, 아이돌로서 더 나아가기 위해 의상도 연구……!”
혓바닥이 긴 조아라.
그녀의 변명이 길어질수록 추하기만 했다.
적어도 성필은 그녀의 말이 진실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전생처럼, 현생에서도 조아라의 취향은 너무나도 확고했다.
이 정도면 그녀의 취향이 초, 중학생 때 형성되었다고 봐도 좋으리라.
성필이 어지러워…….
“암튼, 어때요?”
변명을 마친 조아라가 다시 성필에게 의견을 물었다.
성필은 아까부터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장하양에게로 눈을 돌렸다.
장하양은 성필과 눈이 맞자 아하하 웃다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하양아, 부끄럽구나?”
“네, 네. 크롭티랑 다르진 않은데, 붕대니까 더 그런 거 같…….”
“그래도 아라 말이 맞네. 사람을 끄는 힘이 있어. 퍼포먼스 중에 재킷 단추 뜯으면 비주얼 임팩트는 확실하겠어.”
“하나도 안 부끄러워요.”
“어, 그래……?”
장하양, 10초 만에 의견 수정.
“하양아, 그것도 보여드릴까?”
“그거요?”
백설하와 장하양이 비밀 사인이라도 교환하듯 소곤댔다.
“‘그게’ 뭐야?”
“이사님은 모르실 텐데 하양이가 스쿼트를 되게 열심히 하거든요. 그래서 될까 싶어서 어제 하양이한테 말해봤는데요…… 하양아.”
“네.”
장하양은 투명의자를 해 보였다.
말 그대로 허공에 앉은 것이다. 다리를 꼬고서. 심지어 상체가 앞으로 숙어지지도 않고, 허리가 직각으로 유지된다.
“손나(그런)!”
“아앗, 저 따라 하지 마세요!”
일본으로 오느라 홍규헌, 한구인과 함께 다니는 피트니스 센터 1년 회원권을 날리고 있는 운동 애호가, 성필이 즉각적으로 감탄을 표했다.
성필은 투명의자를 한 장하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전후좌우를 샅샅이 살폈다.
“하양아 코어 힘이 얼마나 센 거야? 허리가 전혀 안 굽혀지잖아.”
진짜 의자에 앉은 것 같다.
“한 다리로 투명의자를…….”
이 정도면 장하양은 플란체(바닥과 몸을 직각으로 만들고 팔로만 몸을 띄우는 동작)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장하양은 스트릿 워크아웃이나 기계 체조를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또 대한민국의 금메달이 하나 날아갔다.
“하양아, 다음.”
백설하가 명령하자, 장하양은 그 상태로 몸을 좌우로 까딱였다. 거기서 또 성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든 동작에서, 장하양은 몸 전체를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다.
하체와 코어 힘이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하다!
“다른 댄서분들은 하양이 춤 따라서 좌우로 똑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괘종시계 시계추처럼요. 어떨까요?”
“어떠냐고……?”
이건 퍼포먼스의 혁명이다.
진짜 될 수 있을지 몰라, 최고의 퍼포먼스형 아이돌!
“이, 이 상태로 혹시, 노, 노래도 부를 수 있어?”
성필은 과도하게 흥분했다. 이 모습을 본다면 누구든 그러리라.
“노, 노래…….”
장하양은 꽉 다문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이제까지 참고 있던 숨이 한 번에 들어가면서 장하양의 자세가 무너졌다.
“꺅!”
성필의 기억으로는 처음인, 장하양의 귀여운 신음까지 더하여.
“아, 죄, 죄송해요. 노래는 못 부르겠어요.”
“아냐. 하긴, 그 상태에선 노래는 못 부르지.”
전신의 근육이 과할 정도로 팽창해 있었을 것이다. 가슴과 폐도 압박당했을 테니, 노래를 부르는 게 불가능하다.
가능했다면, 장하양은 정말 신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이다.
“팀장님 하양 언니 언제까지 볼 거예요.”
성필은 자세가 무너진 장하양을 홀린 것처럼 빤히 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신아름이 그를 저 멀리 밀어서 이젠 못 보게 됐다.
못 보게 됐다…….
“맞다, 나 이제 가봐야겠다.”
“우리랑 안 있고요? 뭐 일 있어요?”
“응. 세이코 씨 노래 부르는 거 보러 가야 해.”
“세이코…… 가 누군데요?”
그때 조아라가 ‘아’ 소리를 냈다.
“그 사람이잖아. 첫날에 개띠껍게 말했던 사람.”
멤버들의 시선이 성필에게 꽂혔다.
“팀장님, 그 사람 노래 부르는 걸 보러 간다고요? 우리랑 무대 준비해도 모자랄 시간을 쪼개가면서요?”
“…….”
성필은 속으로 ‘설마’했다.
‘애들이 따라온다고 하진 않겠지?’
성필은 그냥 세이코가 노래 부르는 걸 보러 가는 게 아니다.
그녀가 그렇게도 바라는 인정을 주기 위해, 오늘 세이코가 좋아 죽도록 칭찬할 예정이었다.
타 회사의 아티스트를 성필이 죽도록 칭찬하면, 소녀연맹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이미 케이어스로 수도 없이 겪은 사태였고, 다시 겪고 싶지도 않았다.
“얘들아.”
백설하가 험악해지려는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세이코 선배님은 유명한 가수셔. 박 이사님도 프로듀싱 참고삼아서 보러 가시는 걸 거야. 뭐라고 하면 안 되지.”
“그건 그런데요…….”
신아름의 기세가 바로 누그러졌다.
역시 설하밖에 없…….
“모처럼이니까 우리도 같이 보러 갈까? 내가 따로 찾아봤는데 정말 노래 잘 부르시더라. 직접 들으면 너희한테도 도움이 될 거야.”
백설하, 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