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저도 이명(異名) 붙여주세요.”
소녀연맹의 창창히 빛날 앞날을 상상하고 있자니, 장하양이 뜬금없는 요구를 해왔다.
리카처럼 정지음의 민망함을 덮어주기 위한 건 아닌 듯했다.
“하양이? 하양이는 얼굴 천재.”
“그럼 아저씨는 얼굴 바보예요?”
“아라는 나를 화나게 하는 천재.”
“에이, 아저씨 화났어요?”
조아라가 사람 열받게 어깨를 톡톡 쳤다.
“아주 천재적이네.”
성필이 손을 들어 올리자 조아라는 입을 꾹 다물며 딴청을 피웠다.
요즘 조아라의 장난이 도를 넘어가고 있는바, 성필도 특단의 조처를 해왔었다. 바로 손바닥으로 등 때리기였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아하하.”
“아저씨 봐요. 하양 언니도 동의하잖아요.”
“어? 농담 아니야?”
“네?”
“그래서 웃었는데. 사실이랑 반대로 말해서 재밌는 거…… 아니야? 농담 아니었어?”
“…….”
조아라는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겠단 표정을 지었다.
“팀장님 저는요?”
이젠 신아름까지 이명 붙이기에 손을 보탰다. 은근히 하다 보니 재밌었던 모양이다.
“아름이는 천재.”
“무슨 천재요?”
“그냥 천재.”
“음, 맞는 말이긴 한데 좀 성의가 없네요.”
“그럼 춤신노래왕은 어때?”
“좋네요. 근데 왜 노래는 신이 아니라 왕이에요?”
“설하가 있잖아.”
백설하가 쑥스럽단 듯 손사래 치면서 웃었다. 성필의 말을 뒤집으면 백설하는 노래신이 되는데, 썩 듣기 좋은 듯했다.
“아니 아저씨. 그럼 신아름도 춤왕이죠. 춤신은 나인데.”
“안물.”
“아저씨 애 같은 거 알죠?”
“안궁.”
“…….”
성필은 울상 짓는 조아라에게서 백설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백설하는 다른 사람 못지않게 자신의 이명을 기대하는 듯 볼까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설하는 귀여움 천재.”
“……네?”
백설하가 어벙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에 성필이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했다.
“봐, 귀엽지?”
“이, 이사님, 제가 무슨…….”
“언니 귀여워요.”
“쌤 카와이(귀여워)!”
“…….”
백설하, 귀여움 천재 등극!
“어쨌든 편곡의 천재 지음이가 왔으니까 너흰 걱정 덜어도 돼.”
“형 그거 쪽팔리니까 그만 해요.”
“편곡의 천재, 부탁할게.”
“계약 끝나면 퇴사함 수고.”
성필이 간신히 정지음을 달랬다.
정지음은 배낭으로부터 노트북을 꺼내어 멤버들에게 편곡 의도를 설명했다.
“일단 ‘더 킹’이란 곡은…….”
정지음은 약 10분 동안 KS 엔터의 A&R팀과 프로듀싱팀, 그리고 정호환을 찬양한 뒤에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더 킹’이란 곡이 좋긴 한가 보다.
“이게 남녀차별적 발언은 아닌데, 원곡 그대로면 여자가 소화할 수 없을 정도야.”
“남녀차별이야!”
“……가장 큰 문제점은 다키스트랑 비교될 거란 점이지. 진짜 원곡 그대로 재현할 거 아니면 거들떠도 보면 안 돼. 아라야, 다키스트 댄스는 어때?”
“우리가 절대 못 해요.”
정확히 표현하자면, 3주 만에 완성할 자신이 없다.
조아라나 신아름은 몰라도 나머지 인원이 완벽하게 소화하리라 기대하긴 힘들었다.
“조금만 합이 어긋나도 우습게 보일 파트가 곳곳에 있어요. 댄스 브레이크가 세 번이나 있고, 그거 하나 빼고 군무예요. 그냥 ‘똑같이 따라한다’ 수준으로 어쩔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더 킹’의 오프닝만 보아도 그렇다.
일단 멤버들이 전부 정자세로 서서 시작한다. 그리고 한 명씩 차례로 주어진 춤을 소화하다가 바닥에 대(大)자로 드러눕는다.
모든 멤버가 드러누우면, 자신이 했던 춤을 정확하게 역(逆)으로 재현하여 다시 기립해야 한다. 마치 비디오를 되감듯이 말이다.
이것을 모든 멤버들이 순서대로 진행해야 하며, 듣기만 해도 인간이 할 만한 게 아니다. 한 명만 이상하게 어긋나도 모든 퍼포먼스를 망칠 것이다.
“모든 파트가 어렵단 건 아니에요. 근데, 진짜 때려 죽어도 3주 안에 해내기 불가능한 파트들이 산재해 있어요.”
“그래. 그럼 설하야, 보컬은? 한 명에게 비중이 쏠리지 않고 고루 분배한다고 치면.”
“어…….”
백설하는 리더로서 멤버들의 기량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 그 데이터에 근거해 고민한 후, 그나마 현실적으로 ‘더 킹’을 구현할 방안을 내놓았다.
“일단 마지막 하이라이트에 5인 연속 고음은…… 저희가 못해요.”
3옥타브를 안정적으로 넘길 수 있는 인원은 그나마 백설하와 리카 정도다. 신아름도 한 곡만을 연습하면 가능은 할 것이다.
하지만 장하양과 조아라는 아니다.
조아라는 멤버들 중 보컬 능력이 가장 낮으며, 장하양은 천성적인 성종(聲種) 자체가 여자 중에서도 낮은 음역대에 속한다.
“만약 한다면 첫 번째 고음을 아름이가, 두 번째를 리카가,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를 제가 연속으로…… 해야 할 걸요……. 그거 외에도 1절 후렴, 2절 후렴, 브릿지 애드립을 리카랑 아름이랑 저랑 분담하고…….”
“역시 그렇구나.”
정지음의 ‘역시’란 표현은 멤버들의 기량을 정확하게 파악한 거기도 하지만, 소녀연맹의 능력을 낮게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에 멤버들은 조금 기가 죽었다.
최고의 아이돌이 목표인데, 정작 한때 최고의 아이돌에 도달했던 그룹의 곡을 소화할 수가 없다니.
“댄스는 포기해야 할 파트가 많고. 보컬도 하양이랑 아라를 빼놓고 해야 할 수준이면, 편곡이 불가피하긴 하네.”
“지음아, 방법 있어?”
“이런 경우엔, 아예 원곡이 생각나지 않을 수준까지 바꿔야 해요.”
그러고선 정지음은 비행기에서 대충 손보았던 ‘더 킹’의 편곡 버전, ‘더 퀸’을 들려주었다.
가장 먼저 귀에 들어오는 건 바이올린이고, 그 뒤로 은은하게 깔린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들렸다.
“제목이 ‘더 퀸’이 될 예정이잖아요. 여왕이라고 하니까 뭔가 중세 같은 느낌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써봤어요. 현악기로 따뜻한 느낌을 줘서 원곡의 강렬함을 최대한 다른 방향으로 바꾸고, 동시에 전자 악기도 추가해서…….”
정지음이 바꾼 곡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아직 그에게 ‘더 킹’을 편곡해야 한단 사실을 알린 지 하루도 안 지났음에도, 벌써 이 정도 수준까지 도달한 것이다.
“너희들은 어때? 일단 여기까지가 내가 손본 뼈대고, 이후로 너희들한테 아이디어 받아가면서 편곡할 생각인데.”
성필의 물음에 멤버들이 기다렸단 듯 즉답했다.
“좋아요!”
이 정도면 다키스트란 그룹을 관객들의 머리에서 지울 수도 있을 것이다. 곡의 초반부까지는 이게 ‘더 킹’이란 것도 못 알아차릴 수도 있겠다.
“아예 새 곡으로 가는 거야. ‘더 퀸’으로.”
성필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위에 정지음의 손이, 그리고 차례로 멤버들의 손이 쌓였다.
“투쟁!”
“해방!”
“소녀!”
“연맹!”
“승리!”
“가로 엔터!”
마지막으로 성필이 외쳤다.
“파이팅!”
박수 소리가 한 차례 휘몰아치고, 정지음이 계속 가지고 있던 걱정을 표했다.
“근데 형. 이거 저희만 있어서 될 일이 아니에요. 무대 구성이랑 춤이랑 의상이랑, 웨벡스에서 좀 도와준대요?”
“걱정 마. 내가 다 생각해뒀어.”
“어떻게요?”
“테스크 포스를 꾸릴 거야.”
각 분야의 디렉터를 모실 거다.
“먼저 뮤직 디렉터 정지음.”
“거야 뭐, 당연하네요.”
“비주얼 디렉터.”
한국에 있는 이유이.
“유이 씨를 불러온다고요?”
“응. 그리고 퍼포먼스 디렉터.”
한국에 있는 댄스 트레이너이자 안무가, 조아라의 스승 백민정.
“아저씨 백 쌤 몸값 알아요?”
“어?”
“아니, 설하 쌤 말고요.”
“알지.”
“근데 일본에 직접 불러온다구요? 안무도 받고 트레이닝도 맡기고?”
“우리랑 연이 있잖아.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너희들 특성 다 신경 쓰면서 디렉팅할 사람 민정이밖에 없어. 그리고 사장님도 OK 했어.”
홍규헌은 소녀연맹의 무대를 2,000만 명이 볼 수도 있다니까 기겁하면서 승인해주었었다.
그리고 반드시 최고의 무대를 만들란 명령 아닌 명령까지 준 참이다.
“마지막, 이 사람이 가장 중요해.”
정지음과 멤버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과연 이 테스크 포스에 들어올 인물은 누구일까? 일본 전국에 퍼져나갈 소녀연맹의 무대를 담당할 인물이니, 범상치 않은 이일 것이다.
다른 이들의 궁금증을 한 몸에 받은 성필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프로듀서, 박성필. 내가 모두를 지휘한다. 그러니까 다들 안심하라구!”
“…….”
“가로 엔터 파이팅!”
“…….”
“반응이 너무 짜다 얘들아.”
익스큐티브 프로듀서, 박성필.
경력: 소녀연맹 프로듀싱.
* * *
다음 날, 한국에서 도착한 디렉터들과의 미팅을 끝내고 한숨 돌리려던 차.
“아.”
성필은 미사토와 마주쳤다.
두 사람 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만남이라 우물쭈물하기를 잠시, 미사토가 먼저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박 이사님.”
미사토는 히무라와 같이 ‘이사님’을 한국어로 발음했다.
성필은 그녀가 히무라와는 달리 부정확한 발음으로 ‘이사니므’라고 할 때마다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세이코의 일이 있고 난 뒤가 아닌가.
“부장님 잘 지내셨죠?”
“며칠 지났다고 그러세요.”
“하하, 그러게요.”
어색한 공기가 흐르기 전, 미사토가 말했다.
“박 이사님, 오늘 저랑 술 한잔하실래요?”
비즈니스적으로 연결된 직장인끼리의 술 한 잔이란,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가 오갈 거란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사토에게선 그런 분위기가 풍기지 않았다. 아마 그날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의 연장선이 아닐까, 성필은 막연히 그리 추측했다.
“네, 좋죠. 퇴근하고요?”
“어…….”
미사토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전에는 급박한 상황에서만 미사토를 마주하여 몰랐는데, 그녀가 몸에 걸친 건 전부 한눈으로도 알 수 있는 명품들이었다.
부장급답게 회사의 위신을 위하여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또한 담당하는 아티스트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지금 바로 갈까요?”
곧 6시가 될 시점이다.
성필도 오늘은 더 이상 업무가 없었기에 흔쾌히 알겠다고 답했다.
30분 뒤 회사 앞에서 만나기로 한 후, 성필은 소녀연맹의 남은 스케줄을 재검토할 겸 사무실로 향했다.
“이사님.”
그때 연습을 마친 듯한 장하양이 복도 멀리서 성필을 불렀다. 그녀는 천천히 달려와 성필의 앞에 섰다.
“하양이, 연습 잘하고 있어?”
“네. 아라가 말해서 시험 삼아 ‘더 킹’ 춰봤어요.”
“힘들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살짝 젖은 장하양의 상의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아하하, 네. 오프닝만 따라 해 보려고 했는데도 결국 못 했어요.”
“내가 봤을 땐 그게 제일 어려워 보여. 어떻게 췄던 춤을 비디오 역재생처럼 다시 하겠냐.”
“다키스트는 했잖아요.”
그녀의 답에는 ‘최고의 아이돌이었던 다키스트는 했는데 자신도 못 하면 안 된다’란 뜻이 담겨 있었다.
장하양의 목표는 최고의 아이돌이니까.
성필이 옅게 웃었다.
“그러게. 다키스트는 했던 거네. 그런데 다키스트도 진짜 연습 열심히 했을 거야. 분명…….”
그랬을 것이다.
다키스트는 2세대 케이팝의 황금기를 찬란하게 밝힌 그룹이면서, 또한 비운의 그룹이다.
멤버 다섯 명 중 세 명이 불운한 이슈로 연예계 활동을 잠정 중단했으니 말이다.
다키스트의 계약 기간이 끝날 즈음, 그 세 명은 차례로 정신적인 문제를 이유로 삼으면서 활동 중단은 선언했다.
‘KS 엔터에 대한 비난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였지.’
그 덕에 KS 엔터의 아이돌 팬덤 사이에서도 자정 작용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너무 과하고 힘든 퍼포먼스를 내지 말고, 아이돌의 건강과 정신을 신경 쓰고 매니지먼트 하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다키스트의 3인이 활동을 중단하게 된 근원적인 이유가 퍼포먼스의 과도한 난이도 때문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중요한 건 어려운 게 아니라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니까. 쉽고 간단한 춤으로도 얼마든지 멋질 수 있어. ‘보라색 튤립’ 해봤잖아.”
“감사합니다. 근데 어디 가세요?”
“나? 약속이 잡혀서.”
“일이요? 곧 퇴근 시간인데 바쁘시네요.”
“일…… 은 아니고.”
“그럼요?”
“그냥, 웨벡스 직원분이랑 술자리.”
“히무라 실장님이요?”
“아니.”
“그럼요?”
성필은 살짝 당황했다.
대강 대답을 흘리면 거기서 납득할 줄 알았는데, 장하양은 집요하게도 상대를 물어오는 것이다.
“미사토 부장님.”
“그 아주머니요?”
아주머니, 로 보일 수도 있다. 미사토는 30대 중반이니까.
그런데 미사토는 아직 미혼이다. 엄격하게 아주머니라고 불릴 수는 없다.
“하양아, 부장님 아직 미혼이시니까 그렇게 부르면 안 돼. 기혼이시더라도 그렇게 부르면 좀…… 그렇잖아?”
성필이 조아라에게 아저씨라 불릴 때마다 조금씩 상처를 받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물론 조아라는 정말 성필을 아저씨로 보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놀리느라고 그리 부르는 것이지만 말이다.
‘아니, 나 아저씨 맞나? 정말 나를 아저씨로 생각해서 아저씨라고 부르는 건가?’
아니, 아니다.
전생의 조아라는 줄기차게 오빠라고 불렀지 않은가. 사실 조아라도 마음속으로는 오빠라고 부르고 싶을 것이다.
분명 그럴 거야…….
“두 분만 드세요?”
“어, 그렇게 됐네. 어쩌다 보니까.”
뭐야, 왜 내가 변명하고 있는 거지? ‘어쩌다 보니까’라니, 완전히 변명하는 투가 아닌가.
성필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믿기지 않았다. 마치 장하양에게 죄라도 짓고 있는 기색이잖은가.
왜 이러지……?
“부장님이 먼저 권하셨죠?”
“어? 어…….”
“그럼 그거 아니에요? 작업 걸린 거.”
“에이, 아니야. 국적이 다르잖아. 나도 부장님도 나이가 있는데 국제결혼은…….”
“결혼?”
“어, 아니. 아니다. 나도 나이가 있다 보니까 결혼부터 생각하게 되네.”
“결혼 생각했어요?”
“아니 부장님이랑 그렇단 게 아니라!”
“알아요.”
장하양이 장난스레 웃었다.
아, 또 놀린 거구나.
성필도 미소로 받아주고 장하양을 떠나보냈다. 얼마 걷던 중, 성필이 불현듯 뒤를 보았다.
아직도 장하양은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가 손을 흔들어서, 성필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 * *
미사토와 함께 온 곳은 어느 호텔의 라운지 바였다. 바 테이블에 앉자마자 미사토는 익숙하단 듯 칵테일을 두 잔 주문했다.
“제가 살게요. 마음껏 드세요.”
“…….”
그 칵테일을 보자 성필은 장하양에게 들었던 ‘작업 걸린 거’란 말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거 스크류 드라이버잖아.’
‘레이디 킬러’란 별명이 있는 칵테일이다. 속된 의미로 사람을 잡는, 여자를 자빠뜨리는 술이란 뜻이다.
주문을 넣는 것에 따라 특색이 조금씩 달라지지만, 양주에 비견되는 도수에 비해 맛은 주스와 같아서 멋모르고 계속 마시기 십상이다.
‘뭐지? 날 자빠뜨리겠단 뜻인가? 그래서 호텔로 온 건가?!’
“술 약하세요? 잘 못 시켰나. 다른 거 드실래요?”
“아뇨, 저 술 잘 마십(기절해서 홍규헌 집에 2번 실려 감)니다.”
취하는 건 금방이었다.
미사토가 굳이 강한 칵테일을 주문한 건 속에 담긴 이야기를 하기 위함인 듯했다.
“세이코쨩이 있잖아요, 한국 아이돌을 싫어해요. 그게, 걔가 저를 엄마처럼 여기는데요. 이건 진짜 아무한테도 말씀하시면 안 돼요. 제가 한국 아이돌이랑 사귀어서…….”
“지금도요?”
“네, 지금도요. 동거 중이에요. 걔는 밖에 거의 안 나오지만요.”
“아, 은퇴하셨구나.”
거기서 성필은 미사토가 자신을 자빠뜨릴 거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뭐야, 애인이 있었잖아.
왠지 씁쓸하구만.
“그래서어…… 세이코쨩은 엄마를 뺏긴 느낌…… 이었을 거예요. 저는 그걸 알고도…….”
미사토는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하등 느낄 필요가 없음에도 말이다.
사랑이야 자유가 아닌가. 담당 연예인을 위해 연애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적어도 성필은 그렇게 생각한다.
‘근데 한국 아이돌이랑 사귄다니.’
성필의 머릿속엔 당장 몇몇 이름이 지나갔지만, 곧바로 잡생각을 털어냈다. 아마 대중적으로 유명하진 않은 인물일 터다.
“또 에스타스 문제도 있구…….”
“그건 꼭 물어보고 싶었어요. 에스타스가 뭐 어떻게 된 겁니까?”
히무라가 소녀연맹의 프로듀싱 노하우를 습득하여 에스타스에게 적용할 거란 계획은 들었다. 웨벡스에서 그 사실을 믿는 사람은 극소수란 것도 말이다.
“에스타스는 거의 초상집 분위기죠. 박 이사님도 아시겠지만, 저흰 가족 같은 분위기가 강해요.”
일본 연예인은 보합제라 하여 직장인처럼 월급을 받는다. 설령 인기가 없는 연예인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생활은 보장되는 것이다.
그런 제도가 연예인에게도 회사에 대한 애정과 소속감을 부여한다.
유서 깊은 연예 사무소인 웨벡스는 이런 룰을 특히 더 잘 따랐다. 덕분에 회사는 연예인들에게도 단순한 매니지먼트사가 아니라, 가족이 있는 집처럼 느껴지게 된다.
“히무라 실장님은 에스타스 애들한테 말했어요. 자기는 너희들을 버리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1년 넘게 손가락만 빨고 있는 애들한테 그런 말이 먹힐 리가 없잖아요.”
“허언 같겠죠.”
“네, 맞아요. 실장님은 그때까지 연습만 하라고 하고…… 믿기가 힘들죠. 믿어주면 좋을 텐데.”
“실장님이 약속을 지키리라 보시나요?”
“그럼요, 당연하죠.”
미사토가 흔쾌히 긍정했다.
“실장님은 대단한 분이에요. 죽어도 본인 입에서 나온 말은 지키세요. 에스타스를 되살리겠단 말도…… 이러면 에스타스 애들이 죽었단 것처럼 들려서 좀 그렇지만, 히무라 실장님은 에스타스를 부활시킬 거예요.”
히무라는 일본식 아이돌을 바라지 않는다.
케이팝 아이돌이 일본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을 증거로 삼아, 일본에서도 퍼포먼스력에 중점을 둔 아이돌을 탄생시키길 바란다.
“귀엽기보다는 멋진. 걸크러쉬, 라고 하죠?”
“네, 뭐.”
일본에서는 한국 아이돌이 청순이든 섹시든 진짜 걸크러쉬든 가리지 않고 걸크러쉬라고 한다고들 한다.
그들에겐 컨셉이나 분위기는 관계없이, 퍼포먼스 실력이 높은 거 자체가 걸크러쉬인 것이다.
“그런데 불안할 만하죠. 에스타스 애들도 점점 나이를 먹어가잖아요.”
일본이나 한국이나, 아이돌에겐 나이가 깡패란 말이 통용된다.
특히 청순한 컨셉의 아이돌이 많은 일본에선 나이를 더욱 따질 것이다.
성필은 에스타스의 불안감을 이해했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세월에 비해 히무라는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니, 배신당했다고 느낄 만도 하다.
나이를 먹어가는 스트레스는 한국 연습생들에게도 자주 보이…….
“리더인 유미는 벌써 17살이에요. 마음이 급하겠죠.”
“뭐라고요?”
“에스타스 리더 유미요. 맏언니인데 이제 17살이거든요.”
“……?”
맏언니가 17살인데, 나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국은 여자 아이돌 활동의 상한을 보통 20대 중후반으로 잡는데, 일본은 그보다 훨씬 더 짧은 걸까?
‘17살에 마음이 급할 정도면, 20대 초반이 아이돌 상한선이라고 생각하는 거……?’
일본의 아이돌 문화에 대해 고민하는 성필의 마음도 모르고, 미사토는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세이코쨩도 히무라 실장님을 안 믿은 거죠. 근데 눈에 에스타스 애들이 밟히고, 자기가 엄마라도 된 거처럼 보호 본능이 생겼나 봐요.”
“그래서 저한테?”
“네. 박 이사님도 그냥 들이박으면 다른 사람들처럼 납작 엎드릴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근데 생각과는 달랐던 거죠.”
“그런데, 그때 세이코 씨가 했던 말로 생각하면 아이돌을 싫어하는 거 같던데요?”
“걘 자기가 무슨 말 하는지도 몰라요. 자기 생각이랑 달라도 이사님 기분만 나쁘게 만들 수 있으면 좋다, 그런 거예요. 그래서 제가 떨어져 있으면 안 되는데…….”
미사토는 우울하게 침음을 삼켰다.
성필은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성필은 히무라와 사장 리히토의 도구에 불과했지만, 그가 명분이 되어 세이코를 쫓아내지 않았던가.
“죄송…….”
성필이 사과를 입에 담으려던 때, 갑자기 미사토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늘은 감사드리려고 불렀어요.”
“네?”
“세이코쨩 일로요. 덕분에, 이사님 덕분에…….”
미사토가 갑작스레 눈물을 글썽이며 성필의 손을 맞잡았다. 성필이 당황할 새도 없이 그녀가 말을 이어갔고, 그의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세이코쨩이 다시 노래를 부르게 됐어요. 당당히 컴백하겠대요. 무려 경연 프로그램에서, ‘뉴아사’에서요.”
가후(歌后) 세이코가 돌아온다.
노래의 여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