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성필과 세이코를 부르기 전, 웨벡스의 사장실에선 삼자대면이 있었다.
가수 관리 1부 부장, 미사토.
아이돌 관리 2실 실장, 히무라.
웨벡스 사장, 리히토.
투명한 원형의 유리 테이블을 둘러싸고 웨벡스를 이끄는 위치에 선 세 명이 모였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세이코는 제가 잘 타이르겠으니…….”
“부장님. 도련님이라고 하지 마시라니까요.”
“아, 죄송합니다.”
히무라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웨벡스에 입사했다. 그 전부터 웨벡스에 자주 드나들어 도련님으로 불렸고, 미사토와는 어릴 적부터 자주 보았었다.
미사토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사과를 전했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미사토는 줄곧 저자세였다. 그녀에게선 세이코를 감싸려는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
히무라는 그녀의 사과를 들으면서 조용히 차로 입을 적셨다.
성필에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건 확신이 있어서였다. 미사토는 세이코를 두둔하면서 성필에게 날을 세우진 않을 테니까.
물론 그녀가 히무라를 두려워해서는 아니었다.
“미사토 부장.”
사장 리히토가 부르자, 미사토는 벌써 꾸지람이라도 들은 것처럼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소녀연맹은 웨벡스가 홀대해선 안 될 손님이네. 아니, 손님이 아니라 웨벡스 소속이나 마찬가지지.”
“예, 압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리히토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땐 화가 났지만, 미사토의 태도를 보니 화를 내는 것도 못 할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미사토 부장이 고생하는 건 알아.”
미사토는 소녀연맹에 적대적인 웨벡스의 민심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 하나로, 웨벡스 사람들은 소녀연맹을 대놓고 욕하지 못한다.
과거, 케이팝 아이돌을 매니지먼트하자는 기획안을 제출했던 게 그녀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그 기획은 성공적이었다.
감히 웨벡스에 새로운 자금원을 창출했다고 평해도 좋을 정도였다.
“자네에게 무슨 죄가 있겠나. 걱정을 더해주고 싶진 않지만.”
그래, 정말 이러고 싶진 않지만.
“이제 세이코는 포기하는 게 어떻겠나.”
미안함만이 가득했던 세이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사장의 앞임에도 깊은 생각 없이 즉각 반발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리히토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래 참았어. 3년이네, 3년. 3년 동안 세이코는 노래는커녕 적성에도 안 맞는 연기만 붙들고 있지 않은가.”
“사장님 그건……!”
“세이코, 글자도 잘 못 읽는다지.”
미사토는 경악했다.
‘그걸 어떻게?’라고 묻는 듯 당황이 한껏 서린 얼굴이었다. 리히토는 그녀의 반응으로부터 또다시 확신을 얻었다.
“문장 자체가 눈에도 안 들어오고, 이해하려면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고. 미사토 부장, 그건 병일세.”
마음의 병이다.
“그런 상태로 대본을 제대로 읽거나 외울 수 있을 리 없잖은가. 이젠 세이코한테 배우 일을 주는 것도, 방송가 사람들에게 못 할 짓이야.”
웨벡스는 세이코에게 큰 빚을 졌다. 그녀 덕분에 굴지의 기획사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던 것이다.
그래서 세이코의 요구라면 최대한 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이르렀다.
“……알겠습니다.”
미사토가 수긍했다.
“그럼, 제가, 시간을 주시면, 세이코에게 말해서 배우 일은…….”
“배우만이 아닐세.”
“사, 사장님…….”
“병이 있는 아이를 이 업계에 계속 둘 순 없어. 이제 그만하세. 그 아이는 다시 노래 부를 마음이 없어.”
아니, 노래를 부를 수 없다.
3년이나 시간을 줬으면 재기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세이코는 믿음에 보답하지 않았다.
“자네도 세이코에게서 손을 떼게. 그만하면 잘했어. 노력했어. 언제까지 엄마 노릇을 할 텐가.”
“…….”
“자네를 위해선 본부장 자리를 준비해뒀네.”
드디어 미루고 미뤄두었던 승진이 이루어질 차례이다.
미사토는 세이코를 발굴하고, 케이팝 아이돌을 매니지먼트하자는 기획의 최초 발의자이며, 외에도 수많은 아티스트를 성공적으로 프로듀싱했다.
그녀는 이미 웨벡스의 이사직이 내정되어 있다. 본부장에 오르는 것조차 너무도 늦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선 조건이 있다.
“이만, 세이코는 보내주게나.”
미사토는 느꼈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웨벡스의 사장이 자신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3년, 참으로 긴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인내심을 발휘해주었으니, 리히토 사장이 어느 정도의 인격자인가 설명하려면 입만 아플 뿐이다.
그렇기에 미사토는 항변할 수 없었다.
“시간을…… 주십시오…….”
리히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언젠가 해야 했을 일이야.’
다만, 그 기폭제가 성필과 소녀연맹이었을 따름이다. 시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겠지.
‘1억 엔을 들여서 매니지먼트 권한을 따낸 그룹. 차후 아이돌 기획의 중심이 될 그룹이야. 그런 그룹의 프로듀서에게 세이코가 행한 불손은, 그냥 덮을 수는 없지.’
아니, 덮기야 할 수 있다.
다만 리히토가 덮을 생각이 없을 뿐이었다.
“히무라.”
리히토가 아버지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이제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알기에.
“세이코와 박 이사를 불러라.”
“예, 사장님.”
* * *
미사토는 벌벌 떨고 있는 세이코를 도저히 직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세이코, 사과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세이코의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빈혈이 왔을 때와 비슷한 증상이었다. 몸에 힘이 없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
세이코는 평소의 습관대로 행동했다.
“미사토오…….”
미사토 쪽을 보았지만, 그녀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 채였다.
당장이라도 ‘도와줘’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세이코는 그럴 수 없었다. 애처롭게 떠는 미사토의 모습은 자신보다 더욱 처량한 듯했기에.
세이코는 다시 정면을 보았다. 자신의 앞에 선 성필을.
“세이코.”
사장 리히토가 그녀를 채근했다. 그러자 그녀에겐 또 다른 감정이 찾아왔다.
분노였다.
“사장, 님. 왜, 왜 제가 사과해야 하는데요……? 제가 한 말의 어디에 잘못이 있는데요……?”
리히토는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더는 세이코와 말을 섞을 기운도 없단 태도였다.
그에 히무라가 대신 답했다. ‘이런 것까지 말해줘야 하나’란 뜻을 담아서.
“무례를 범하면 사과하는 게 당연하잖습니까.”
“……무례를, 범해?”
말도 안 된다.
세이코는, 자신은, 겁쟁이처럼 입 다문 웨벡스의 식구들을 대신하여 최전선에 나선 것이다.
고작 앨범 하나의 성적이 안 좋았다고 집 지키는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에스타스를 위해 나서준 것이다.
칭찬이 떨어져도 모자랄 일에 사과까지 하라고? 아니, 소녀연맹을 관리하는 히무라야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미사토는, 미사토는 왜 가만히 있는 거야?
“나한테 이래도 돼?!”
세이코가 목청껏 소리쳤다. 바로 앞에 서 있던 성필이 깜짝 놀랐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외침은 보통 사람의 외침이 아니었다.
분노가 서린 목소리에도 사람의 귀를 파고드는 청량함과 공기를 꿰뚫는 힘이 있었다.
“나는, 난 세이코야! 후나비키 세이코란 말야! 가후(歌后) 세이코……!”
“맞습니다. 세이코 씨는 가후라 불릴 정도로 위대한 가수셨습니다. 그러니, 후배를 상대로 텃세 부리는 건 그만둬주십시오. 거기다 뒤로 물러나신 상태이니 말입니다. 그만해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에?”
뒤로 물러났다니?
“무슨…… 뜻이야…….”
“더는 노래를 안 부르시지 않습니까. 물러난 와중에도 열심히 해보겠단 후배를 상대로 날 세우는 거, 좋지 않습니다.”
“나는, 안 물러났어, 활동하고, 있잖아……?”
“아니요, 세이코 씨는 은퇴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말이다.
말일 뿐이다.
하지만 세이코는 그 말만으로도 자신을 지탱하는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은퇴…… 내가……?”
3년 전, ‘쉬어야겠다’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세이코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앨범 작업이나 트레이닝도 관두었다. 그 이상 가수로서 활동했다간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하지만 세이코는 일은 그만두지 않았다.
‘쉬기만 하면 미안하잖아.’
자신을 톱스타로 만들어준 웨벡스에 보답하고 싶었다. 그러니 노래는 부르지 않더라도, 일만큼은 착실히 하기로 했다.
연기를 시작했다. 행사장도 많이 다녔다. 예능도 다수 출연했다.
오히려 가수일 때보다 더 열정적이었다. 웨벡스에 폐를 끼치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더, 더, 더 노력했다.
그런데…….
‘나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노력한 게 아닌 거야? 난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더 노력한 건데. 하기 싫은 일도 잔뜩 했는데……?’
3년을 갈아 넣은 노력이, 자신을 몰아붙여서 하기 싫은 일도 성실하게 해왔던 노력이, 실은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노래가 아니라서?’
타인이 보기에 자신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던 것이었다. 노력이 아니라 노는 것에 불과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세이코를 지탱하고 있던 발판이 무너져내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 깨달았을 사실이다. 하지만 세이코는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은 병들어 있었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으니까.
드디어 그 세계가 깨졌고 차가운 현실의 바람을 맞은 것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항구에 남아 있지 못할 배였다. 바다를 향할 용기도 의지도 없어서 3년간 항구에 메여 있기만 한, 이제는 수명을 다하여 해체되어야 할 배다.
“세이코 씨, 이제 그만합시다. 세이코 씨의 아집도, 이런 이야기도. 앞에 계신 박 이사님께도 실례입니다. 어서 사과해주세요.”
“…….”
세이코는 묵묵부답이었다. 감각이 차단된 듯 멍한 눈으로 바닥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히무라가 기다리길 30초 정도가 지났을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필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박 이사님,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히무라로부터 대략적인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히무라는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사과를 전하며, 이렇게 설명했었다.
‘박 이사님께는 불편한 자리가 될 겁니다. 이런 식으로 박 이사님을 이용하는 모습이 된 것,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히무라는 이 자리가 끝나면 더 이상 소녀연맹을 향한 어떤 견제도 없을 것임을 설명했었다.
세이코를 향한 직언은 웨벡스 전체에게 보여주는 대수술이었다. 회사의 민심을 업은 세이코가 소녀연맹과 적대하는 동시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면, 누구도 감히 반발하지 못할 테니까.
‘제가 바라던 모습은 아니지만, 앞으로 소녀연맹의 활동이 탄력을 받을 건 틀림없습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는 세이코.
그녀는 사실상 은퇴 권유를 받았다.
기획사에 몸담은 성필의 입장에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참으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또한 히무라나 리히토, 미사토는 얼마나 괴롭겠는가. 떠날 때를 모르고 뻔뻔히 자리를 지키는 아티스트를 내쫓은 건, 여태껏 쌓은 인연을 떠올리면 고통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누군가의 환상과 착각을 깬단 건 그런 의미다.
“미사토 부장, 세이코 씨를 데리고 나가주세요.”
미사토는 대답 없이 세이코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미사토는 입술을 씹는 중이었는데, 아마 울음을 참는 듯했다.
두 사람이 나가자 히무라는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두 사람.”
리히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다리는 애처롭게도 떨리는 중이었다.
“여기서 얘기 끝내고 나가게. 나는…… 잠시 안쪽에 있겠네.”
성필과 히무라는 사장실의 안쪽 방으로 향하는 사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자, 히무라는 다시 한숨을 토했다.
“박 이사님, 죄송합니다.”
“몇 번이나 사과하시는 거예요.”
“보기 불편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죠.”
차라리 세이코가 완벽한 악인에다가 절로 분노를 들끓게 만들 악행을 저질렀으면 속이 통쾌했을 텐데.
그녀는 끝끝내 어린아이 같았다.
“미사토 부장님이…… 마음고생이 심했겠네요.”
“그런 편입니다. 세이코 씨의 귀로 그녀를 향한 비판이 들어가지 않도록 노력해왔으니까요. 오래된 비유입니다만, 온실 속의 화초처럼 세이코 씨를 관리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까지 온실 안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히무라의 말에는 ‘이용 가치가 없는’이란 수식어가 빠져 있었다.
세이코를 온실 속에서 뺀 이유는 이용 가치가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아직도 가수로 활동했었다면, 히무라가 상대해야 할 건 어린아이가 아니라 웨벡스의 명망을 등에 업은 괴물이었을 것이다.
“변명입니다.”
문득 히무라가 그리 말했다.
“변명입니다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이코 씨의 일을 너그러이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보시다시피 그녀의 정신연령이…… 몸에 따라갈 수준이 아닙니다.”
변명이 아니라 험담 같은데.
“그리고 병이 있습니다. 마음의 병이죠. 그런데도 치료를 완강하게도 거부합니다. 본인이 병을 앓는단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거죠. 거기서 미사토 부장의 잘못이 드러납니다.”
“세이코 씨를 긍정해줬나요?”
“예. 언젠가 바뀔 거라 믿고, ‘난 아픈 게 아니야’라고 고집부리는 세이코 씨를 가만히 놔두었죠. 그래서…….”
히무라가 허탈한 투로 ‘짜잔’이란 제스처를 취했다.
“이렇게 됐습니다. 설명이 됐다면 좋겠습니다. 세이코 씨를 너무 미워하진 말아주십시오. 웨벡스에 있다 보면 앞으로 아마 몇 번 정도는 마주칠 수도 있을 텐데, 그땐…….”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악수한 뒤 사장실을 나왔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세이코와 마주쳤다.
미사토에게 안겨 울고 있는 세이코와.
“…….”
성필과 미사토는 한 번 눈빛을 교환하곤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성필은 히무라를 따라 미사토와 계속해서 멀어졌다.
“박 이사님?”
갑자기 성필의 걸음이 멈추자 히무라가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눈빛으로 물었지만, 성필은 멈춰 있을 뿐이었다.
“……잠시.”
성필은 뒤로 돌아 세이코를 향해 다가갔다. 그것을 본 히무라가 기겁하면서 그를 잡으려 했지만, 성필은 멈추지 않았다.
‘뭔가 해야 해.’
마음이 찝찝하다.
성필이 본 미래. 그곳에서 세이코를 떠올렸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올라오려고 한다.
이 감정은 일종의 나침반이다. 후회할 미래를 다잡으라는 미래의 계시와 같다.
“세이코 씨.”
성필이 다가오자 미사토는 세이코를 더 강하게 감쌌다. 세이코는 마르지 않는 눈물을 계속 손등으로 훔치는 중이었다.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건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세이코를 지나쳐선 안 된다. 최소한 그녀에게 위로가 되는 말을 해야 할 텐데.
“저는, 그러니까…….”
그래, 아티스트를 칭찬하려면 이것밖에 없다. 그 결과물을 칭찬해주는 것이다.
“세이코 씨가 출연한 드라마를 봤습니다.”
단, 그녀의 노래를 칭찬해선 안 된다. 3년 전 세이코는 돌연 앨범 작업과 가수로서의 활동을 중단했다고 한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본인의 직업과 관련해서 트라우마가 생긴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사람의 앨범이나 곡을 칭찬해줘봤자 좋은 결과가 돌아오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작업물을 칭찬하자.
“‘사랑으로의 한 걸음엔 용기 따위는 필요 없어’를 봤는데, 여고생 역을 맡으셨더라구요. 그게,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사람이면 도전하기도 쉽지 않았겠죠.”
세이코의 울음이 뚝 그쳤다.
“잘…… 어울, 어울렸…… 습니다. 그게, 뭐랄까, 제가 여고생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정말 여고생다웠다고 해야 하나. 그 나이에 맞게, 조금 덜 어른 같은 느낌이, 그게, 저는 그게 좋았습니다. 연기 잘 봤어요.”
세이코의 울음이 그치고.
“으아아아아앙……!”
더 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성필은 우는 아기를 마주한 심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미사토는 세이코를 더 강하게 감싸고 성필에게 분노를 드러냈다.
‘꺼져라’는 의지를 눈빛으로 전달하는 방법이 개발된다면, 미사토의 눈빛을 교본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박 이사님.”
어느새 다가온 히무라가 성필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그를 빨리 세이코의 앞에서 치우려고 했다.
그때.
“히무라아아아……!”
세이코가 여전히 대성통곡하면서 소리쳤다.
“노래애…… 하면…… 될 거 아냐아……! 내가, 노래하면, 되잖아아아……!”
“…….”
히무라는 입을 뻐끔대다가 그냥 성필을 이끌고 자리를 떴다.
충분히 거리가 멀어졌다 싶자, 히무라는 당장 성필에게 따지고 들…….
“하아.”
따지고 들 마음도 들지 않았다.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만, 이렇게 바로 동정심을 발휘하시면 어떡합니까.”
“그, 죄송합니다. 제 나름 세이코 씨한테 용기를 드리고 싶었는데…….”
“정말 세이코 씨의 연기가 좋았던 겁니까? 그게? 칭찬할 마음이 드셨습니까?”
“……노래를 칭찬하면 안 될 거 같아서요.”
그 부분은 상당히 날카롭지만, 결국 세이코를 울려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방금 세이코 씨가 다시 노래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런 말을 수백 번은 들었습니다. 이번이라고 다를 리가 없죠. 아무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세이코와 관련된 일은 끝났다.
소녀연맹의 ‘뉴아사’ 출연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면, 웨벡스 내에서의 반발도 자연스레 사그라들 것이고 말이다.
“이제 박 이사님은 소녀연맹에 온전히 집중해주시면 됩니다. 그 외의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네, 그럴게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둘은 사장실에 이어 다시금 악수했다.
* * *
“오늘 촬영은 곡 선정 파트뿐입니다.”
슈이치는 ‘뉴아사’의 PD와 작가에게서 들어온 촬영 스케줄을 멤버들과 성필에게 브리핑해주었다.
“한 명씩 무대로 나가서 장르와 곡을 랜덤으로 배정받게 됩니다. 본무대 녹화는 3주 후. 가끔 제작진이 여러분의 연습 장면을 촬영하러 올 겁니다. 때론 대본이 주어질 수도 있고요.”
“오늘은 부담이 크게 없네요.”
“그렇습니다. 할 일은 신께 제발 좋은 곡이 나오길 비는 것밖에 없죠.”
성필은 멤버들을 대기실 밖으로 보내기 전, 조아라를 마주하고 신신당부했다.
“아라야, 알지?”
“네, 아니.”
조아라는 고개를 젓고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다고 임마.”
성필이 확인을 요구하듯 슈이치를 보았다. 그는 엄지를 치켜올렸다.
“완벽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로 엔터의 이미지 메이킹 전략 중 하나, 조아라의 태도였다.
그녀가 일본어로 양아치 말투를 구사하는 영상이 아이튜브에 올라간 적이 있다. 팬이 소녀연맹의 뷔라이브 영상을 따로 잘라 편집한 것이었는데, 그게 일본에서 상당한 주목을 모았었다.
현재 그 영상의 조회 수는 800만에 육박한다.
“아라야, 네가 일본에서 예능 블루칩으로 떠오를 수 있는 기회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와.”
“……진짜 괜찮아요?”
“그럼. 사람들이 좋아한다니까.”
이미 뷔라이브와 아이튜브로도 여러 번 검증을 거쳤다.
가로 엔터는 소녀연맹의 일본 공식 채널을 개설했는데, 그곳에 올라온 영상 댓글 대부분이 조아라의 말투를 흉내 낸 것이었다.
현재 소녀연맹은 그녀들의 곡보다 조아라의 말투로 더 유명하다.
“뭐, 그럼 나도 좋고요. 리카 때문에 이 말투가 더 입에 익어서.”
“아라쨩 일본어 너무 잘해!”
“처음 알았을 땐 쳐죽이고 싶긴 했는데.”
“아, 아라쨩 ‘처죽이고’는 너무 어감이 강해…….”
“뭐 이 쌔꺄?”
“무셔…….”
“아무튼 잘하고 와라.”
성필이 손바닥을 내밀자, 조아라는 픽 웃으면서 그와 손을 맞추었다.
“내가 다 ‘처죽이고’ 올게요.”
그렇게 소녀연맹은 ‘뉴아사’의 출연을 위해 촬영장으로 이동했다. 슈이치는 매니저로서, 성필은 프로듀서로서 촬영장 바깥에서 자리를 지켰다.
멤버들은 큐시트에 따라 성실히 촬영에 임했다. 일단 무대로 들어와 인사하는 것부터 MC와 제작진의 관심을 끌긴 충분했다.
“쟤네들 일본어 진짜 잘하네.”
“그러게. 다른 케이팝 그룹들은 한두 명만 일본어 할 줄 알던데.”
소녀연맹은 무려 전원이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가로 엔터 최고의 엘리트, 한구인의 눈물겨운 분투가 있었음을 세상 사람 모두가 알아야만 하리라.
“에에, 몇 등이 목표냐면요……. 최소한 3등 내엔…….”
“웃기지 마 이 자식아!”
“에엑?!”
“정점을 따낸다(텟펜 토루제).”
리카의 소심한 목표 설정에 조아라가 버럭 성을 냈다. 그에 촬영장 전체가 웃음바다에 빠졌다.
조아라의 말투는 가로 엔터의 예상대로 일본에서 꽤나 잘 먹혔다.
“박 이사님.”
“예. 잘 돼가네요.”
이 기세라면 소녀연맹이 데뷔 쇼케이스 전에 이름을 크게 알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이 느낌은 성필과 슈이치만 받는 게 아니었다. 소녀연맹 멤버들도 같았다.
‘분위기가 좋아.’
백설하는 첫 일본 예능 데뷔라는 사실에 느끼던 중압감마저 사라졌다.
그녀들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MC는 물론이고 다른 출연자들도 너무나 잘 받아준다.
무엇보다 촬영 세트 바깥의 제작진들도 소녀연맹의 멘트 하나하나에 웃음을 보내준다. 뭔가 동물원의 동물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잘 봐주는 게 어디야.’
성필이 말했었다.
소녀연맹은 일본에서 신인이라고.
그러니 신인다운 태도로, 바닥에서부터 일어난다 생각하고 촬영에 임해야 하리라.
하지만 걱정은 없다. 백설하는 멤버들을 보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우리가 일본어를 배운 나날은 쓸모없지 않았어.’
그야말로 끼가 폭발하고 있다. 특히 리카와 조아라가 그러했다.
리카는 본인의 고향에서 예능을 촬영한다는 게 기뻐서 참지도 못하겠는지, ‘나 행복해요’란 티를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조아라가 그런 리카를 훌륭하게 서포트했다. 그녀의 발언과 드립에는 거침이 없었다.
‘외국어를 써서 그런가 봐.’
모국어였다면 생각을 거치고 나왔을 말들이, 외국어이니 일단 뱉고 본다. 그렇다고 생각 없이 말을 한단 건 아니었다.
조아라는 자신이 일본에서 외국인이라는 점과, 일본어에 익숙지 않을 거란 선입견을 최대한으로 활용했다.
마치 리카가 한국어로 실수를 하면 다들 웃고 넘겼던 것처럼 말이다.
“쉬고 가겠습니다!”
스태프가 휴식을 선언하자 대기석에 앉아 있던 멤버들이 곧장 모여들어 수다를 떨었다.
“리카, 우리 일본어 어땠어?”
“최고예요! 한 이사님도 천국에서 기뻐하고 계실 거예요!”
“한의사님 안 죽었거든?”
“아라쨩도 최고야!”
리카는 조아라의 머리를 끌어안고 이마에 뽀뽀를 날렸다. 조아라는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으나, 리카가 너무도 꽉 안아서 그럴 수도 없었다.
“리카 얘가 오늘 왜 이러지. 더 기가 살았네.”
신아름이 실실 웃으면서 말하자, 장하양이 미소와 함께 답했다.
“고향이잖아.”
이른바 고향 버프인 것이다.
한국에서 유명해지고 방송에 나오는 것도 기쁜 일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고향의 방송에 나와 유명해지는 건, 리카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리카의 친구와 가족들이 전부 이 방송을 보게 될 테니까.
“다들 준비해주세요!”
촬영이 재개되었다.
출연자 등장, 설명, 토크, 인사 등으로 이어졌던 포맷에 변화가 생겼다. 출연자가 무대로 나와 랜덤으로 곡을 받는 것이었다.
소녀연맹은 앞선 출연자들이 받는 곡을 유심히 관찰했다. 물론, 전부 일본 노래였기에 멤버들이 잘 알지는 못했다.
그럴 때면 리카가 등장했다.
“이거 2004년 드라마 ‘눈꽃 정원’에서 OST였던 곡이야! 엄청나게 어려워!”
안 그래도 어려운 곡이란 걸 알겠다. 그 곡을 받은 예능인이 절망하면서 무릎을 꿇었으니까.
“에엑?! 이 곡이 나온다구?!”
“왜, 뭔데 저게.”
“코미디언들이 유닛으로 모여서 만든 곡이야! 엄청 웃겨!”
그 곡을 받은 건 여자 아이돌이었다. 그녀는 전광판에 떠오른 곡 제목을 보자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눈썹을 움찔댔다.
이번엔 소녀연맹도 그저 그렇게 넘길 수 없었다. 저 아이돌의 미래가 자신들의 것이 될 수도 있으니까.
“우리다.”
소녀연맹의 차례다.
그녀들은 중앙으로 나가 전광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옆에선 MC가 재치 있는 멘트로 기대감을 높였다.
먼저 장르.
룰렛이 돌아가면서 대략 10개의 장르명이 빠르게 오갔다. 어지럽게 돌아가던 단어들이 마침내 멈췄다.
[아이돌 팝]
“끼에에에에엑!”
리카가 비명을 지르면서 멤버들을 얼싸안았다. 다른 멤버들도 새된 소리를 뱉어내면서 기쁨을 표했다.
아이돌 곡이라면 소녀연맹에게 유리함이 틀림없을 테니까.
“오오, 소녀연맹! 이거 이번 방송의 유력한 우승 후보겠는데요?”
MC는 기대감을 끌어올리면서 룰렛을 재가동하란 멘트를 주었다. 그러자 룰렛이 다시 돌아갔다.
아까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룰렛의 단어들. 그것을 멤버들은 집요하게 눈으로 쫓았다.
하지만 대부분이 가타카나나 한자라서, 독해력이 일본인보다 떨어지는 그녀들은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룰렛이 느려졌다.
느려지고.
하나의 곡에서 멈췄다.
[The king(Japanese ver)]
“어?”
멤버들이 깜짝 놀랐다.
그녀들이 익히 아는 곡이었으니까.
“이거, 언니, 그거 맞죠?”
“어, 어, 그런 거 같은…….”
“이럴 수가!”
MC가 호들갑을 떨었다.
“소녀연맹의 곡은, 케이팝 보이그룹 ‘다키스트’의 ‘The king’입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행운!”
소녀연맹은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는 것과 같은 어드밴티지를 얻었다.
그녀들은 순간 멍해져 있다가, ‘아이돌’ 장르가 정해졌을 때보다 더욱 기쁘게 소리쳤다.
* * *
“잘됐군요.”
슈이치가 안도하면서 성필을 보았다. 그러나 성필의 표정은 절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박 이사님?”
“…….”
최악이다.
‘하필 걸려도 이게 걸리냐…….’
다키스트.
KS 엔터의 2세대 보이그룹.
아이돌 2세대가 끝날 무렵,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정점에 있던 그룹이다. ‘더 킹’은 제목처럼 그들 자신이 왕좌에 올랐음을 선언한 곡이다.
그리고 이 곡은.
‘어떤 아이돌이나 연습생도 제대로 커버한 적이 없어.’
웃음거리가 되거나 다키스트의 열화판으로 취급받을 뿐.
즉 ‘더 킹’은 오직 다키스트만이 소화할 수 있는 곡이다.
보컬도, 댄스도, 퍼포먼스도, 분위기도.
그야말로.
“최악의 곡이에요.”
성필의 설명을 들은 슈이치는 사색이 되었다. 아이돌 장르에다 케이팝 그룹의 곡이 걸렸다기에 좋아했건만, 그렇게 어려운 곡이라고?
“그, 그럼 어떡합니까. 소녀연맹이 완벽히 소화할 수 없는 곡이란 의미잖습니까.”
“아아, 부를 수밖에 없겠군요.”
성필의 말투가 갑자기 이상해졌다. 중이병 같은 분위기에 슈이치가 떨떠름해하는 것도 잠시, 성필의 의도에 따라 질문해주었다.
“예? 누구를…….”
“아아, 모르는 건가.”
“…….”
편곡의 천재.
“지음이요, 정지음.”
원래 부를 생각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