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89화 (289/760)

289화

성필이 운전하는 차가 털털털 웨벡스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차를 세운 뒤 백미러로 뒷좌석의 상황을 확인했다.

세이코가 미사토에게 안긴 채로 아직도 끅끅 거리는 중이었다.

백미러로 눈이 마주친 미사토가 애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성필은 그것을 보곤 키를 꽂아둔 채 차에서 나왔다.

“…….”

계단을 타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성필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그의 머릿속을 채우는 건 30대 여자를 오열하게 만들었단 죄책감이 아니었다.

‘어떡하지?’

성필은 심각하게 사태가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는 그가 예상했던 것과 사뭇 다른 전개였다.

대충 성필이 세이코에게 반박하면서 그녀의 오만함을 꼬집으면, 그녀는.

‘흐응, 나한테 그래도 되겠어요? 내가 누군지 알 텐데?’

라고 말하며 본인의 지위를 과시할 줄로 알았다.

성필이 본 미래에서는 백설하가 미친년처럼 소녀연맹에게 트집 잡는 이들과 싸웠다던가? 이번엔 성필 자신이 그리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작 돌아온 반응이 오열이라니.

정상적인 성인의 반응이 아니었다.

‘어떡하지, 진짜.’

만약 세이코가 정상적인 성인이었다면 본인의 지위와 명성을 이용하여 소녀연맹을 방해했을 것이다. 흔한 드라마나 소설의 악역처럼 말이다.

성필도 그런 사태를 예상했었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으로 세이코의 방해를 타파해가면서, 웨벡스에서 소녀연맹의 지위를 강화할 생각이었다.

‘근데 운다고?’

이 사태가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면 어찌 되겠는가. 모든 논리적인 설명을 차치하고서, 성필은 톱스타를 울려버린 언변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말싸움이라도 했으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여지라도 있지.’

세이코는 대뜸 울어버렸다…….

성필은 도무지 이 사태를 다른 사람들에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전달할 방법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들은 성필이 잘못했다고 여길 테니까.

‘사람들이 추궁하면 나도 울어버릴까?’

그래, 눈물은 여자만의 무기가 아니다. 인류 공통의 무기인 것이다.

물론 사회의 보편적인 관념으로, 남자의 눈물은 나약함과 찌질함의 상징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성필은 타인의 동정심을 유발할 정도로 신나게 오열할 자신이 있었다.

‘……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이돌 관리 2실 사무실 앞에서, 성필은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 히무라에게 보고해야겠다.

성필은 그를 잠깐 응접실로 불러내어 사건의 전말을 들려주었다.

“세이코 씨가…… 음…….”

의외로 히무라는 놀라지 않았다.

성필은 초조하게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웨벡스의 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그로서는 히무라의 판단을 신뢰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세이코 씨는 웨벡스를 현재의 위치에 올려둔 공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는 힘이 있죠.”

이윽고 나온 히무라의 말은 성필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제 세이코는 앙심을 풀기 위해 소녀연맹을 공격할 것이다.

거기에 변명의 여지가 있을까? 그녀를 울려버린 성필의 변명이 통하기나 할까? 웨벡스 전체가 적으로 돌아서도 이상하지 않을…….

“하지만 세이코 씨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네?”

“정말 걱정해야 할 건 미사토 부장이죠.”

“……미사토, 부장이요?”

“모르셨습니까? 미사토 씨는 가수 관리 1부 부장이십니다.”

미사토가 한 부서를 관리하는 부장이라고?

성필은 순수하게 놀랐다. 부장급 인사가 가수의 스케줄에 직접 옷을 가져다주러 간다곤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하기야 직접 밝히지 않으면 모를 만도 하군요. 미사토 부장의 모습은 지위에 어울리지 않았을 테니까요. 미사토 부장은 단 한 명만을 직접적으로 담당하는데, 그게 바로 세이코 씨입니다.”

“아, 톱스타니까 부장 본인이 직접 관리하시는 거군요.”

“그런 것도 있지만, 애정 때문이죠. 세이코 씨를 캐스팅한 것도 미사토 부장이고, 줄곧 그녀의 매니저로 활동했으니까요.”

왜 히무라가 미사토를 걱정해야 한다고 했는지 알겠다. 미사토는 웨벡스를 반석에 올린 톱스타, 세이코를 발굴한 자이자 부장급 인사다.

그녀에게 반감을 사는 건 세이코를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 위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사토 부장은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시간을 내서 대화해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폐를 끼치게 돼서…….”

“아닙니다.”

히무라는 성필의 걱정을 없애주려는 듯 밝은 미소를 보였다.

“담당 아이돌이 대놓고 무시당하는데 참을 순 없는 노릇이죠. 그리고, 세이코 씨도 언제까지고 안하무인일 수는 없습니다.”

“혹시 이런 일이…….”

“꽤 있었죠. 세이코 씨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 건 그녀의 행실 탓도 있습니다. 웨벡스 사람들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또?’란 반응일 겁니다.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다. 히무라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이 기회에 미사토 부장과 세이코 씨를 바꿔야겠어. 바뀌지 않으면…….’

이젠 세이코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3년이면 많이 참았다.

무엇보다 히무라는 성필이 받은 취급을 참을 생각도 없었다. 성필에게 무리한 사과를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다.

‘오히려 내가 사과해야겠지. 아니.’

세이코가 사과해야 한다.

“협력사로서 소속 아티스트가 미진한 태도를 보인 건 제가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성필과의, 가로 엔터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다질 수 있을 것이다.

* * *

‘앨범 확인이고 뭐고 할 마음이 안 드네.’

다 큰 여자가 오열하는 모습을 봐서일까. 성필은 히무라와의 협의를 마친 후에도 영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빨리 이틀이 지났으면 좋겠다.’

소녀연맹이 ‘뉴아사’ 사전 촬영에 들어가면 그에 집중할 수 있을 텐데.

그때까지 소녀연맹은 명확한 목적이 없는 나날을 보내야 한다.

데뷔 쇼케이스 연습은 완벽에 완벽을 겹쳐두어, 멤버들이 만나면 두세 시간 연습하고 쫑 내곤 한다.

거의 몇 달째 같은 레퍼토리만 연습하고 있으니 질릴 만도 하다. 게다가 그 레퍼토리란 게, 이미 십수 개월 전에 마스터한 것이라면 더욱 질리겠지.

“어.”

성필은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지자 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 뒤에서 손바닥으로 성필의 눈을 가렸다.

“하양이야?”

“……어떻게 아셨어요?”

장하양이 재빨리 손을 떼고 성필의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손이 차가워서.”

“아하하, 그런 걸로도 아세요?”

당연하다.

성필은 멤버들의 손 크기, 체온, 샴푸향마저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보일 것 아닌가.

“연습은?”

“2시간 전에 끝났어요. 저는 개인 연습 좀 하다가 회사 돌아다니는 중이에요.”

“회사를 돌아다녀?”

“회사 지리 익히거나…… 아하하, 네, 심심해서요. 멤버들은 다들 따로 일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오늘 장하양을 제외한 멤버들이 여러 용무를 대며 성필에게 톡을 보냈었다.

성필은 그녀들의 용무를 하나씩 댔다.

“리카는 잠깐 본가에 갔고. 아라는 댄스 스튜디오. 아름이는 어바이비 하라주쿠점에. 설하는, 설하는…….”

“소녀연맹 채널에 올릴 커버곡 촬영이요.”

“아, 맞다.”

백설하는 정기적으로 소녀연맹 채널에 커버곡을 올린다. 이젠 운동선수의 루틴처럼 된 듯, 일본에 와서도 거르지 않고 진행 중이다.

‘이번엔 일본 노래를 부른댔지.’

게다가 웨벡스가 백설하를 위해 따로 촬영 스튜디오도 대여해주어서, 한국에서 영상을 찍는 것보다 퀄리티가 높을 것이다.

“우리 하양이는 심심해서 어떡해?”

“저 안 심심한데요.”

“그런데 회사 돌아다니는 거야?”

“아까까진 심심했는데, 이젠 안 그래요. 이사님이랑 만났잖아요.”

“뭔데. 내가 무슨 놀이기구야?”

“빨리 놀아주세요.”

장하양이 목말을 조르는 어린아이처럼 팔을 활짝 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성필은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근심이 싹 씻겨 나가는 듯했다.

‘하양이가 내 기분이 안 좋단 걸 아나 보네.’

그래서 평소보다 더 장난스레 행동하는 듯했다. 그럼 계속 우중충해 있는 것도 실례겠지.

“그래, 열심히 연습했으니까 놀러 갈까?”

“……정말요?”

“왜 놀라. 어차피 이틀 뒤부터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야. 조금은 여유를 즐겨도 되겠지. 모처럼 일본에 왔으니까…….”

성필이 뭐라고 하기도 전, 장하양이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전에 톡으로 보내주었던 웬 디저트 카페의 사진이었다.

“…….”

“싫으세요?”

“……아냐, 가자. 근데 여긴 다 같이 가기로 하지 않았었어?”

“사전답사하는 것도 좋잖아요.”

“그러게. 사전답사하면 애들이랑 다 같이 갔을 때 창피함이 덜하겠지…….”

“아하하.”

장하양은 이 사태를 예견이라도 한 듯 가방에서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꺼냈다.

둘은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일본의 인상이라거나, 웨벡스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담소를 나누던 중.

“이봐요.”

절대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복도 저 멀리서 들려왔다.

성필의 고개가 뻣뻣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모습이 보였다.

“파쿠(박) 이사.”

세이코는 브랜드 론칭 행사장에서 입던 옷, 즉 관능적인 파티 드레스 차림 그대로였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눈물을 흘리면서 오열했을 때와는 달리 의기양양하기 그지없었다.

“기회를 줄…….”

[문이 열립니다.]

성필은 엘리베이터와 세이코를 번갈아 보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지금 일이 있어서요. 다음에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잠깐!”

세이코도 덩달아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사님, 이분은?”

“……후우.”

[문이 닫힙니다.]

“하양아, 이분은 세이코 씨야. 세이코 씨, 이쪽은 하양이에요.”

“궁금하지 않아요.”

“아, 그래요.”

“아까 하던 말을 계속하자면, 기회를 주…….”

[문이 열립니다.]

성필은 엘리베이터를 나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려다가, 곧 자신에게 키가 없음을 깨달았다.

‘맞다. 차 키를 꽂아두고 나왔었지. 미사토 씨가 가지고 있을까?’

성필이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세이코는 미사토의 품에서 울고 있었다. 그래서 달래는 게 끝나면 미사토가 가지고 오리라 생각해서 키를 남겨두었었다.

“사람이 말하면 들어요!”

세이코가 자꾸 무어라 했지만, 성필은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사적으로 그녀와 대화하는 건 피하고 싶다. 괜히 또 서로 기분만 상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대화한다면 히무라나 미사토 같은 중개역을 두어야만 할 것이다.

“세이코 씨, 정말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일이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시죠.”

“이거 찾아요?”

짤랑짤랑.

뒤를 돌아보니, 세이코가 성필에게 배정된 차 키를 흔들고 있었다. 성필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하자 그녀의 표정이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이제야 대화할 준비가 된 거 같네요. 다시 말할게요, 기회를 주…….”

“감사합니다.”

성필이 세이코의 손에서 키를 낚아챘다. 동시에 장하양의 손을 붙잡고 차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이, 이사님…….”

“빨리 와. 저 사람이랑 얘기하면 안 돼.”

“내가 불한당이라도 돼요?!”

“안 되겠다, 뛰자!”

성필과 장하양은 서로 손을 잡고, 한여름 밤의 아방튀르를 떠나는 남녀처럼 거침없이 달렸다.

성필은 차 앞에 도착해선 황급히 구멍을 찾아 키를 찔러댔다. 한 번에 넣지 못하고 두세 번씩 헛손질을 한 뒤에야 키를 꽂을 수 있었다.

“하양아 빨리 타!”

“네, 네!”

“잠깐! 나 힐, 힐 신었다구요!”

부릉―.

차에 시동이 걸렸다. 하지만 세이코를 따돌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밴의 문을 힘겹게 열어젖히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

차 안, 조수석, 장하양의 무릎 위로.

장하양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눈만 크게 뜨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세이코는 장하양이 조수석을 채우고 있음에도 굳이 조수석으로 들어온 것이다.

세이코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성필은 핸들에 머리를 박아서 자신의 절망을 표출했다.

“하아, 대체, 왜, 하아, 도망, 가는 거, 예요!”

“……세이코 씨. 저에게 앙금이 있는 건 압니다. 그런데 저는 세이코 씨와 이성적인 대화를 할 자신이 없어요.”

이건 진심이었다.

아마 세이코는 자신이 당한 억울한 처사에 대해 성토하면서 성필의 사과를 강요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과격한 말이 오갈 건 뻔했다. 성필은 그 상황을 굳이 견디고 싶지 않았다.

이미 히무라가 미사토 부장과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한 뒤가 아닌가. 결과가 나오기 전에 세이코와 따로 만나는 건 악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일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일본에서 일이 없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저는 세이코예요!”

“압니다.”

“아뇨, 파쿠 이사는 몰라요! 잘 들어요, 제가 누구냐면…….”

홍백가합전 7회 연속 출장.

오리콘 밀리언셀러 다 회차 달성.

각종 음악상 다수 수상.

현재는 배우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좋은 성적을 내는(본인의 의견) 중.

“저는 전설이에요! 살아 있는 전설이라구요! 아시겠어요?”

세이코는 겨우 진정했는지 천천히 심호흡하더니.

“좋아요. 이제 정말 대화할 준비가 된 거 같네요. 파쿠 이사, 기회를 주…….”

부웅―.

차가 출발했다.

갑자기 가해진 속도에 세이코의 몸이 관성에 따라 뒤로 밀렸다. 세이코의 균형이 틀어지자, 장하양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안았다.

그렇게 세이코는 장하양의 무릎 위에 앉아 안긴 모습이 되었다.

“한국인들은 다 이래요?!”

“선배님, 인종차별이에요.”

“뭐라구요?”

“인종차별이라고 했어요.”

“뭔…….”

세이코는 안전벨트 역할의 장하양마저 지긋지긋하단 듯이 바라보았다.

“파쿠 이사, 내가 나쁜 말 하려는 거 아니에요. 마지막, 진짜 마지막이에요. 기회를…….”

“‘기회를 준다’는 거 자체가 나쁜 말 아닙니까.”

“‘기회’ 뜻을 몰라요?”

‘기회를 준다’가 오만함이 배인 문장이란 건 안다. 위에 선 자가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선심을 베푼다는 뜻이니 말이다.

“내가 3년 공백에 진짜배기 가수가 아니란 말 취소하고 사과하세요. 진정성 있게 사과하세요. 그럼 아무 일 없던 걸로 만들어드릴게요.”

“제가 사과하면, 세이코 씨도 우리 애들한테 한 말 사과해주십니까?”

“우, ‘우리 애들’이요?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쪽 애 낳은 적 없어요!”

세이코가 얼굴을 화악 붉히면서 역정을 냈다.

“아, 아니, 소녀연맹 애들한테 사과해주십니까?”

“내가 왜요?”

성필은 핸들에 머리를 쾅쾅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래서 아예 그녀를 피했던 건데, 같은 차에 있으니 피하지도 못하게 생겼다.

‘아니다. 그냥 사과하자.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자.’

고작 고개 한 번 숙이는 것으로 세이코에 관한 리스크를 줄일 수만 있다면야 훨씬 남는 장사일 것이다.

“빨리 사과하세요. 조금 더 있으면 사장님이 뭘 하실지 몰라요.”

“네?”

세이코는 의기양양과 기세등등이 합쳐진 것 같은 열받는 미소를 띠었다.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얼굴이다.

“사장님도 파쿠 이사가 저한테 어떤 비인륜적인 언동을 취했는지 알고 계세요. 그러니까 빨리 저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세요.”

“그럼 사과하고 말 것도 없잖아요?!”

웨벡스의 사장이 세이코의 편파적인 상황 설명을 들었다면, 성필이 그녀에게 사과한다고 사태가 진정되리라 보기는 어렵다.

왜 편파적일 거냐 생각하냐고? 세이코가 사용하는 단어들을 보라. 자신은 무죄이며 모든 죄는 당신에게 있다, 그런 마음가짐이 느껴지지 않는가.

사장에게 어떤 식으로 얘기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피해자가 합의를 해주느냐 안 해주느냐도 갈등에서 매우 매우 중요한 요소 아닌가요? 파쿠 이사는 법정에 가기 전에 합의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진실된 사과 한 번으로요. 이게 기회가 아니고 뭔가요? 관대하죠?”

성필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갈무리하면서 주먹을 쥐었다. 주먹을 아주 꽉 쥐었다. 그의 손안에 세이코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예 터뜨려버릴 기세로.

“아니, 그래, 네, 사과야 얼마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 할 수 있는 사과 말고요. 진정한 사죄…….”

“사과하기 전에 하나만 물어봅시다.”

성필이 사과를 입에 담자 장하양이 그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어떤 일이 있는진 모르지만, 성필에게 불리한 상황이란 건 알 수 있었다.

“세이코 씨가 하신 말씀은 그럼……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정말 그것만 듣고 싶네요. 세이코 씨가 하신 말씀들요, 정말 조금의 문제도 없나요?”

“당신들은 욕먹어도 싸요.”

“……뭐요?”

성필은 자신의 귀가 망가졌나 의심했다. 혹은 일본어를 잘못 배웠거나. 어느 쪽이든 틀렸단 게 슬픈 점이었다.

“우리가…… 뭘 했기에…… 대체 제 애들이……!”

“그럼 에스타스 애들은 뭘 잘못했는데요.”

세이코가 서슬 퍼런 원망을 뿜어냈다.

“에스타스……?”

웨벡스의 걸그룹 말인가? 히무라가 맡고 있는?

“걔들은 무슨 죄로 버려진 애들처럼 구석에 내팽개쳐져야 있어야 하는데요. 당신들 때문이야, 에스타스가 그런 꼴이 된 건. 알아요? 우리 회사 전부 파쿠 이사랑 소녀연맹을 싫어해요. 그러니까 해맑은 얼굴로 돌아다니지 말라고요.”

명확한 원인도, 이유도 모르고 받는 분노와 원망이란 이렇게나 불쾌한 것이었나.

성필의 뇌는 탈색된 듯 새하얗게 변했다.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아는 사람이 있다면 알려주길 바랄 정도다.

“선배님.”

침묵 속에 불쾌감만이 가득 차 당장이라도 터지기 직전, 장하양이 입을 열었다.

세이코를 껴안고 있느라 우스운 모양새이긴 했으나 장하양의 목소리만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저희가 욕먹어도 싸다고 하셨나요?”

“네, 그래요.”

세이코는 목소리의 당사자와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게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모처럼 심각하게 만든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등의 얇은 드레스 천을 넘어 전달되는 장하양의 숨결이 마치 바로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눈길을 세웠다.

“파쿠 이사는 너무 거만해요. 자기 처지도 모르고 피해자인 척하지만, 실은 가해자거든요. 그쪽도 같아요.”

“선배님, 욕은 겸허히 받아들일게요. 저희가 잘못했다면요.”

장하양의 입에서 사과가 나오자 성필은 훨씬 더 큰 충격에 빠졌다.

소녀연맹이 웨벡스 내의 사정에 신경 쓰지 않고 맡은 업무에만 충실할 수 있길 바랐는데, 이제 그것도 물 건너갔을지도 모른다.

“흐응, 아이돌 쪽은 이야기가 통하…….”

“그런데 겸허히 받아들일 필요가 없겠는데요.”

장하양이 순식간에 말을 바꾸었다.

“저희가 욕먹는 이유가 잘못해서라면 이해해요. 하지만 저희가 욕먹는 이유가 잘해서라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거든요. 소녀연맹이 에스타스보다 뛰어나서 더 큰 지원을 받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잘한 게 욕을 먹는 이유가 될 수 있나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세이코가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표정을 장하양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허윽…….”

장하양이 세이코를 안은 팔에 힘을 더욱 주었다. 배가 압박당한 세이코는 폐 안의 공기를 모두 뱉어낼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사님 욕하지 마세요.”

장하양이 성필을 향해 고개를 살짝 돌려 윙크했다. 그 모습이 당차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여, 성필은 허허 웃는 수밖에 없었다.

세이코는 헐떡이면서 말했다.

“이, 일본어나 써……. ‘이사니므’인지 뭔지……. 너,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딴 말 함부로 지껄이지……. 네, 네가 에스타스 애드르으을…….”

“하, 하양아 힘 빼! 그러다가 죽겠어!”

장하양이 팔에서 힘을 빼자 세이코는 두려움에 떨면서 차 문 손잡이를 더듬었다. 차가 달리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 밖으로 나갔을 기세였다.

그녀는 공포에 떨면서도 표정에서 적개심을 지우지 않았다.

“파, 파쿠 이사는 제가 준 기회를 버렸어요.”

정확하게는 장하양이 버린 것이지만.

“앞으로 당신은…….”

그때 성필의 전화가 울렸다.

본인의 말이 끊기자 세이코가 울상을 지었지만, 성필은 상관 않고 벨소리가 세 번 울리기 전에 받았다.

히무라였다.

[박 이사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밖에 있습니다.”

[바로 오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사장님께서 모시라고 하십니다.]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세이코가 더욱 진한 웃음을 띠었다.

“자, 이제 제가 왜 기회라고 했는지 아시겠죠?”

장하양이 성필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머리 박을까요?’

“…….”

성필은 고개를 저었다.

‘머리는 내가 박는다.’

성필이 핸들을 꺾었다. 차는 오던 길을 돌아 웨벡스로 향했다.

세이코는 아까보다 더 기세가 살아선, 장하양에게 목숨줄이 잡혀 있단 것도 잊어버리고 오만한 분위기를 풍겼다.

“파쿠 이사, 이제 늦었…….”

“하양아.”

또 말이 끊긴 세이코는 거의 격분하기 직전이 됐다.

“네?”

“네 말이 맞아. 잘한 게 욕먹는 이유가 될 수는 없어. 그런데 잘못한 것도 욕먹을 이유는 아니야. 욕은 나쁜 짓 한 사람이 먹는 거야.”

그 말에, 장하양은 데뷔하기 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맞추지 못하고 실패만 거듭했던 자신이.

그때 장하양은 자신을 향한 비난이나 욕을 기꺼이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잘못하는 것 자체가 죄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성필은 그것을 부정했다.

‘아, 그렇구나.’

성필은 장하양의 말을 부드럽게 꼬집은 거다.

‘내 말대로면, 에스타스가 소외되거나 욕을 먹는 것도 당연한 게 되니까…….’

장하양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해요 이사님.”

“당신들 암호라도 만들어뒀어요? 뭐라고 하는 거예요. 대화가 전혀 안 이어지잖아요.”

아무튼.

“둘 다 각오해요.”

세이코는 자신의 배를 휘감은 장하양의 팔을 불안하게 바라보면서도, 곧 성필에게 닥칠 불운한 미래를 암시했다.

“이젠 사과 정도로 안 봐 줄 거니까.”

* * *

웨벡스 사장실.

선반을 채운 무수한 트로피, 벽면을 메운 무수한 상패.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웨벡스가 승리한 역사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이 영광스런 공간에는 성필, 히무라, 미사토, 세이코가 자리했다.

“사과해라.”

가장 상석에 있던 자.

경험을 주름으로써 얼굴에 새긴 노인, 웨벡스의 사장이 담담히 읊조렸다. 그의 형형한 눈빛이 정면을 꿰뚫듯이 쏘아졌다.

“세이코.”

그 시선을 받은 세이코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녀의 상징인 기세등등함과 의기양양함 따위, 더는 보이지 않았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