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미사토는 황당하단 듯 서 있기를 잠시, 아주 잠시. 곧 옷을 꼭 껴안으면서 성필의 차로 달렸다. 폼이 육상 선수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었었다.
이어서 그녀는 미식축구 선수처럼 조수석에 골인했다.
“위치는…….”
“내비게이션 찍어주세요. 저 도쿄 지리 몰라요.”
“어떻게 우리 회사 들어온 거예요?!”
미사토는 입으로는 불평을 말하면서도 착실하게 내비게이션으로 위치를 찍었다.
“최대한 빨리!”
말 안 해도 그럴 작정이다.
성필은 미사토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성필도 과거 스케줄에 맞추지 못했을 때가 꽤 있어서, 그런 상태일 때 사람이 얼마나 망가지는지 알았다.
물론 미사토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그녀의 행동을 납득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건 세이코를 만나기 위한 것이니까.
“꽉 잡아요.”
성필은 위험하다 싶을 만큼 차의 속도를 높였다. 미사토의 정신이 출발 3초 만에 아득해졌다.
잘못하면 기둥이나 다른 차에 처박을 만한 속도였다.
성필은 묘기와 같은 솜씨로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대로에 나오자마자 속도위반에 걸릴까 말까 한 속도로 달렸다.
“그냥 밟아요!”
“딱지는요?”
“경리부가 해결할 거예요!”
“예.”
차가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미사토는 앞만 바라보았다.
초조하게 도로를 바라본다고 차가 더 빨라지는 건 아닐 텐데도, 그러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는 것처럼.
그러더니 그녀는 갑자기 떠올랐단 것처럼 전화를 걸었다.
“세이코쨩 지금 어디야? 아니 안 된다니까! 거기서 기다려! 아니 아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자리가 아니야! 내가 전에 말해줬잖…… 미안, 미안. 소리 안 지를게. 거기서 기다려줘 제발. 너 그 차림으로 안에 들어가면 안 된다니까……. 응, 응, 착하다 우리 세이코. 알겠지? 기다려야 해?”
전화를 끊자마자 미사토는 다시 앞만 바라보았다. 그녀는 끔찍이 초조할 텐데도, 품에 안은 옷만큼은 구겨지지 않도록 쫙 편 상태로 유지했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한적한 거리의 5층 빌딩이었다. 그런데 빌딩 바로 앞의 주차장에는 온갖 비싼 차가 가득했다.
“에에?!”
미사토는 옷을 들고 내리자마자 비명을 토했다.
“여, 여기 있어야 하는…….”
미사토는 옷을 한 손으로 들려다가, 구겨지리라 생각했는지 조심스레 어깨에 걸쳤다.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내려니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성필은 그녀에게서 옷을 받아냈다.
“고마워요.”
미사토는 빠른 걸음으로 건물로 향하면서 세이코에게 전화했다. 성필은 그녀의 뒤를 착실히 쫓았다.
“세이코쨩? 나 왔는데 어디…… 안 돼 안 돼! 올라가지 마! 아니 조금 늦어도 되니까 기다려! 으아, 5분? 지금 어디…… 알겠어.”
미사토는 포O몬 트레이너라도 된 것처럼 검지로 앞을, 건물 입구를 가리켰다.
“계단 타고 3층 화장실 앞으로 최대한 빨리 올라가요!”
“제가요?”
“남자잖아요! 나보다 빠르잖아요! 제발 빨리!”
성필은 옷을 팔 안에 안고…….
“아아악 구겨져요! 구겨진다고요!”
성필은 옷을 쫙 펴서 어깨에 걸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앞에는 경비원으로 보이는 이가 둘 있었는데, 성필이 가까이 오자 그냥 순순히 물러났다.
미사토의 얼굴을 봐서인 듯했다.
1층 홀에 도달한 성필은 곧바로 비상구 계단을 찾았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서 달렸다. 1층에서 출발한 엘리베이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허억, 허억.”
이게 대체 갑자기 뭐 하는 일이지……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성필은 화장실의 위치를 찾아냈다.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세이코가 있었으니까. 성필이 인터넷 프로필로 찾아보았던 얼굴 그대로다.
검은 생머리에 날카로운 눈매, 차가운 인상.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신경질이 나 있는 것만 같았지만, 그게 매력인 사람이다.
“세이코 씨!”
성필이 허겁지겁 달려오자 그녀가 말했다.
“뭐야. 미사토는?”
“제가 더 빠르다고, 후우, 저한테, 시키셨습니다.”
성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답하자, 그녀는 ‘흐응……’이라며 여유롭기 그지없는 태도를 보였다.
미사토의 절박한 태도와 너무도 대비된 모습에 성필의 정신이 멍해졌다. 어쩌면 너무 빠르게 달려서 뇌까지 산소가 잘 안 와서일 수도 있고.
동시에 성필은 조아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세이코 이 사람…….’
멤버들이 웨벡스 1층에서 만났다던 어떤 여자. 그녀는 ‘흐응’, ‘허어’, ‘으음’이라면서, 사람을 깔보는 투로 말했었다고 했다.
혹시 그 여자가 세이코 아닐까?
“줘요.”
세이코가 성필에게서 옷을 받아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 즉시, 계단에서 숨을 헐떡이는 미사토가 올라왔다.
“세, 세이코쨔앙…….”
그녀는 거의 기다시피 하여 성필의 앞까지 왔다.
“세이코, 쨩은……?”
“방금 화장실로 가셨어요.”
“아, 아아…….”
미사토는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시계를 확인하더니 사색이 됐다.
“시간이 지났잖아! 세이코쨩!”
“알아.”
들어간 지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세이코가 나왔다. 그녀는 미사토가 준비해 온 붉은빛과 검은빛이 어지러이 교차한 드레스 차림이 되었다.
“여기.”
세이코가 성필을 향해 옷을 던졌다. 성필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받았고, 즉각적으로 옷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기겁했다.
방금까지 세이코가 입고 있던, 몸에 딱 달라붙던 드레스다. 성필이 거의 경기를 일으키자 미사토가 재빨리 그 옷을 채갔다.
“그럼, 다녀올게.”
세이코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모퉁이를 향해 사라졌다.
남은 두 사람은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후.
“하아…….”
미사토가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지던 아틀라스가 하늘을 놓았을 때와 같이, 자신의 후련함을 표현하기라도 하듯이 자꾸만 긴 긴 숨을 토해냈다.
“그런데.”
성필은 드디어 그녀와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입을 열었다.
“여긴 어딥니까?”
미사토는 계속해서 쪼그려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아까와 동일 인물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죄송해요. 아까 제가 너무 심하게 대했었죠? 사과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미사토가 허리를 숙이자 성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아까 성필을 향했던 고함과 분노는 터무니없다시피 했었으니까.
“아직 통성명도 못 했네요. 나가레 미사토입니다.”
“박성필입니다.”
미사토의 얼굴에 일순 충격이 지나갔다. 그러더니 이젠 거의 맹수를 대면한 것처럼 놀라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아으…… 그, 그분이네요. 한국에서 오신……. 죄송합니다, 저, 우리 회사 직원인 줄 알고……. 네, 다시 한번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 일 있다고 하셨죠? 이제 가셔도 돼요.”
“아뇨. 시간적으로 급한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이젠 더 급한 일이 생겼다. 세이코의 정보를 얻는 것이다.
그걸 위해선 이 미사토라는 매니저와 대화를 나누는 편이 나았다. 단순한 매니저라기엔 나이가 많아 보이긴 하지만.
“근데 무슨 일입니까? 아까 보니까 세이코 씨는 크게 이상한 옷을 입은 거 같지도 않던데요.”
본인의 스타일에 맞게 잘 차려입었다. 솔직히 성필은 미사토가 가져온 옷과 세이코가 원래 입고 있던 옷의 차이도 잘 모르겠다.
둘 다 파티용으로 디자인된 옷이었으니까. 회사 스타일링 방침에 어긋나기라도 했나?
“여기 신규 의류 브랜드 론칭 행사장이에요. ‘후쿠요 히다카’ 디자이너 팀이 자회사로 독립해서 새로 내놓는 건데, 그럼 같은 회사 옷을 입고 가야 예의잖아요. 세이코한테 가져다준 게 ‘후쿠요 히다카’ 옷이었거든요. 근데 세이코가 입은 건…….”
‘후쿠요 히다카’와 경쟁하는 업체의 명품 옷이었다. 물론 세이코는 그걸 몰랐고, 그저 자신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입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뭐라는지 아세요? 갑자기 ‘오늘은 지하철 타보고 싶어’라면서 매니저를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행사장으로 온 거예요! 그 꼴로, 그 옷을 입고 지하철을 탔다구요! SNS에서 난리 났을 거야…….”
미사토는 한풀이할 상대가 생겨 기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멈추지 않았다.
성필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톱 아티스트를 매니지먼트하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전생에 뼈저리게 겪었기 때문이다.
‘아티스트나 배우가 톱의 자리에 오르면 여간 힘든 게 아니지.’
이전까지는 회사가 갑이지만, 아티스트가 톱이라 불릴 위치에 오면 그가 갑이 된다.
톱 아티스트는 그 자체로 걸어 다니는 기업이다. 그냥 기업과 다른 점은, 통제하기가 말도 안 될 만큼 힘들단 것이다.
아티스트와 기싸움하고 자유를 제한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다.
재계약 시즌에 아티스트가 ‘나 나갈래’라고 하면, 회사는 그대로 억 단위의 손해를 입는 거나 마찬가지다.
걸어 다니는 기업이기에, 그가 회사를 떠나면 기업을 하나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회사는 을이 되어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다.
‘아티스트가 태업을 벌일 수도 있고.’
아티스트가 ‘컨디션적으로 힘들다’며 일을 안 하면 회사가 고소하더라도 이길 수 없다.
아티스트 본인이 힘들다는데 법원에서 뭐라고 하겠는가? ‘안 힘든 거 같은데요’라며 벌금을 물릴 리도 없잖은가.
아티스트 본인이 입을 평판 손해는 차치하고서라도, 톱 아티스트는 회사에 차고 넘치도록 피해를 끼칠 수가 있다.
“저, 나중에 사례할게요. 아니, 제대로 사과할게요. 명함 있으시면 주시겠어요?”
“어디 가시게요? 차는 제 거잖아요.”
“아, 행사장 안에서 세이코쨩, 아니 아니. 세이코 돌봐야 해서, 아니 아니 아니! 세이코를 매니지먼트해야 해서요!”
보아하니, 세이코란 톱스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연예인이 되어 회사의 과보호 아래서 성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안하무인에, 옆에 매니저가 안 붙어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겠지.
그야말로 노래 외엔 아무런 능력도 없는 인간이다. 물론 그 노래란 능력이 인류 중에서도 상위 0.1%를 훌쩍 넘겠지만.
성필은 그녀에게 명함을 넘기며 말했다.
“저도 행사장에 같이 들어가도 될까요?”
“네? 어…….”
“저도 한국에선 뭐, 나름 매니저 일을 했고. 저희 그룹도 일본에서 진득하게 활동할 거니까요. 저 안에 유명한 사람들 얼굴 봐두면 좋겠죠.”
“……아!”
미사토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단 듯 손뼉을 쳤다. 마치 만화 같은 제스처였다.
실제로 저러는 사람이 있구나.
“빚 갚을 방법 떠올랐어요. 안에 계신 분들 소개해드릴게요!”
“정말요? 그럼 저야 좋죠.”
“네네, 가죠!”
미사토는 성필을 데리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유리문을 열자 마치 클럽과 같은 분위기가 성필을 덮쳤다. 어두운 내부엔 은은한 조명이 가득했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성필은 특이한 광경이 행사장 곳곳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저긴 뭐 하는 거죠?”
그 특이한 현상은 곳곳에 벌어졌다.
중간에 모델처럼 보이는 사람이 서 있고, 그 주변에 사람들이 전시물이라도 바라보는 듯한 태도로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모델이 입은 브랜드 옷을 보고 있는 거예요. 저분들은 쇼룸 모델이라고, 그러니까, 움직이는 마네킹 같은 거죠.”
“패션쇼 느낌이네요.”
패션쇼보다는 덜 공적인 분위기긴 하다.
“어떤 분들 소개해드릴까요? 여기 인플루언서, 연예인, 패션 업계인, 기업가들이 있…….”
미사토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자연스레 성필도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을 보았다.
세이코는 무려 5층짜리 플레이트 스탠드 앞에 서서, 층마다 자리를 차지한 디저트를 물처럼 먹어대는 중이었다.
방금은 칼로리가 100을 넘을 게 분명한 마카롱을 한입에 삼켰다. 아, 이번에는 초콜릿을…….
“세, 세이, 세이코, 세이, 세…….”
미사토는 고장 난 인형처럼 어버버 거리더니, 곧 포기한 것처럼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인사…… 다니죠…….”
“네.”
톱스타 매니지먼트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 * *
성필이 행사장에서 알게 된 점 하나.
미사토는 굉장히 발이 넓다. 이 행사장에서 그녀가 모르는 인물이라곤 각 업계의 신입들뿐이었다.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다가가면 웬만한 사람들은 따뜻하게 맞아주곤 했다. 그렇게 잠시 이야기가 오가면, 미사토가 성필을 소개한다.
“안녕하십니까, 가로 엔터 박성필입니다.”
그렇게 자기소개를 한 뒤 이 업계 이야기를 조금 하다 보면, 상대의 흥미가 식는다.
그걸 몇 번 반복하니 성필은 상대의 흥미를 안 식게 만드는 법을 찾아냈다.
“히무라 실장님과 같이 일하신다고요?”
바로, 히무라의 이름을 꺼내는 것이다.
그가 웨벡스 사장의 아들이란 사실은 유명했다. 웨벡스는 일본 연예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회사이니, 히무라와 친해지고픈 인물은 이곳에 널리고 널렸다.
성필이 히무라와 협업 관계이며 그와 영혼의 파트너(과장)란 사실을 강조하면, 십중팔구 상대는 성필과 명함을 교환했다.
미사토는 그런 성필을 어이없단 듯이 보았다.
“실장님 이름 팔아서 명함을 얻어도, 그분들한테 뭘 부탁할 순 없을 거예요.”
“알아요.”
“그런데 왜 굳이?”
“지금은 히무라 실장님 이름으로 관계를 다졌지만. 앞으로는 소녀연맹이란 이름만으로도 이럴 수 있을 거예요.”
당연히 일본에서 무명이나 다름없는 소녀연맹의 이름을 댄다 해도, 성필이 명함을 교환한 업계인들을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연맹이 인지도를 획득한 뒤라면, 그들도 성필의 연락을 그저 무시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얻은 명함들은 잠금이 걸려 있는 스킬이죠. 레벨업하면 사용할 수 있는 스킬들요.”
“게임 좋아하시나 봐요.”
“마땅히 생각나는 비유가 이거밖에 없어서…….”
“아닌 거 같은데.”
미사토가 픽 웃었다.
같이 시간을 보낸 건 채 2시간도 안 됐지만, 둘은 벌써 꽤나 친해졌다.
두 사람 모두 매니저 출신인지라 타인과 친목을 다지는 데는 전문가급이다. 그런 사람끼리 모였으니 친해지지 않는 게 힘들 것이다.
“그런데 세이코 씨 매니지먼트하러 오셨다면서요. 계속 떨어져 있어도 돼요?”
미사토는 성필과 함께 다니면서 업계인들과 친분을 다졌을 뿐, 정작 세이코에겐 다가가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힐끔힐끔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사고가 일어나면 가야죠.”
세이코도 홀로 무언가를 하는 경험을 점점 늘려야 할 테니까요.
미사토는 어쩐지 씁쓸한 투로 그리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다르게, 세이코는 디저트를 해치우거나 무알코올 칵테일을 마시고.
메이크업 부스로 가서 신규 브랜드 화장품을 체험해보는 등으로 시간을 날렸다. 그리고 가끔 어색할 만큼 형편없는 대화 실력으로 다가오는 상대를 쫓아냈다.
“성필 씨.”
“네.”
미사토는 무알코올 칵테일 잔을 기울이며, 세이코를 바라보며, 성필에게 말했다.
“오랫동안 맡아온 배우나 가수가 있나요? 정말 어릴 때부터 봐서, 이제는 가족처럼 느껴지는…….”
성필은 전생의 신아름을 떠올리면서 ‘예’라고 답했다.
“매니저란 건 그렇잖아요. 어린애를 관리하는 매니저라면 더욱 그렇지만, 아티스트를 성공시키는 동시에 사회화도 도와줘야 하잖아요.”
어린 나이에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 이들은, 평범한 사람과 달리 학교에서 사회화 교육을 규칙적으로 받지 못한다.
빨리 성공했다면 더욱 그렇다. 학교에 갈 시간에 스케줄로 눈코 뜰 새 없이 보내는 것이다.
매니저는 그런 이들을 교육할 의무 또한 있을 것이다. 아티스트를 가장 오랜 시간 접하는 매니저가, 부모가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 맡아야만 한다.
미사토는 그리 주장했다.
“부모…… 라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저는 부모의 심정으로 가끔 죄책감을 느껴요.”
아니, 가끔이 아니다.
거의 매일 그럴 것이다.
“제가 잘했나 싶어서요.”
성필은 세이코를 보았다.
그녀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신규 화장품에 대해 대화하는 중이었다. 이거 정말 좋다, 언제 나오냐, 몇 개 줄 수 있느냐…….
딱히 모난 구석은 없는 사람 같다.
“성필 씨는 그분이랑 지내면서, 이런 생각 드신 적 없나요?”
신아름에게?
당연히 있었다.
전생의 성필은 신아름에게 말로 못 할 부채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지금이 더 클까.
“있죠. 그래도, 아이가 멋대로 자라나는 걸 부모가 어쩔 순 없잖아요. 부모가 어째서도 안 되고요. 사람 구실만 할 수 있으면 잘 큰 거죠. 그런 의미에서 세이코 씨는 잘 컸죠.”
미사토는 의외의 답에 멍해졌다. 성필은 그녀를 향해 격려하듯이 미소를 보였다.
“톱에 오른 가수잖아요. 매니저님 덕이에요. 이 정도면 잘 큰 거 아닌가요?”
“……톱 가수, 네. 그러게요.”
둘은 칵테일 잔을 부딪치면서 건배했다.
“잘 컸죠? 우리 세이코쨩.”
“네.”
그녀는 곧 ‘우리 세이코쨩’의 자랑으로 대화의 공백을 모두 메웠다. 성필은 부모의 자랑을 들어주는 심정으로, 그 모든 것을 미소로 받아주었다.
‘세이코란 사람, 그래도 아예 이상한 사람은 아니구나.’
* * *
운전석에 앉은 성필, 조수석에 앉은 미사토. 이 둘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두 사람 다 다른 의미였다.
성필은 분노로.
미사토는 당황으로.
“솔직히, 아이돌이란 애들이 여기저기 나타나는 거 기분이 많이 나쁘거든요.”
뒷좌석의 세이코는 다리까지 꼬고 앉아 자신의 인성을 마음껏 드러내는 중이었다.
“에에, 얘들은 뭐야? 무슨 자신감으로 방송에 나와서 노래 부르는 거야? 내가 옆에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나? 그러면서 꼬박꼬박 선배님 선배니임. 누가 선배냐구, 정말 믿기지가 않아. 너희 같은 후배 둔 적 없단 말야. 이쪽이 부끄러워.”
얼굴이 첫인상의 호감을 결정한다던가? 또한 첫인상은 웬만해선 바뀌지 않는다고도 한다.
성필은 처음 세이코를 보았을 때 꽤 좋은 첫인상을 가졌었다. 일단 예쁜 데다가, 그다지 모난 태도를 보이지도 않아서 ‘톱스타치고는 유별나지 않구나’ 했다.
그런데 같이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 그녀의 민낯을 보니 살인 충동이 절로 끓어오른다.
첫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지만, 그녀의 언어 사용 행태를 보고 있자면 어째서 톱스타인지 의문까지 들 지경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아니 최근도 아니지. 한 10년 전부터 한국에서도 아이돌이란 애들이 막 오더라구요. 아하니 참, 일본 아이돌도 참기 힘든데 막 외국 애들이 계속 나와. 뭘까 걔네는…….”
미사토는 자꾸만 성필을 곁눈질했다. 그의 심기를 살피는 동시에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성필은 묵묵부답으로 핸들만 쥐고 있었다.
“이봐요, 제 말 듣고 계세요?”
“……네,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이젠 우리 회사에도 한국 아이돌이 막 와요. 뭐예요 이게. 일본어라곤 한두 개 하는 게 전부면서 예능에 얼굴 비추고 하하호호, 그리고 자기네들 곡 딱 보여주고. ‘많이 사랑해주세요!’ 이러기나 하고. 진짜 뭐냐고. ‘앨범 많이 사요 돈 벌러 왔으니까요! 딱히 일본을 좋아하진 않아요. 그냥 돈이나 주세요!’라고 하면 덜 밉기나 하지. 아아, 진짜. 짜증 나는 건 일본 아이돌만으로 족하다구요.”
의문, 왜 미사토는 세이코의 입을 닥치게 하지 않는가?
그 의문은 빠르게 풀렸다. 미사토가 스마트폰에 텍스트를 써서 성필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돌아가서 제가 따로 혼내겠습니다. 여기서 뭐라고 하면 사태가 나빠지기만 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요컨대 세이코의 성질이 돌아버릴 정도로 더러우니, 그냥 다물고 있는 게 그나마 심신 건강에 좋단 뜻이었다.
그래, 이해한다.
한국에서도 아티스트나 아이돌이 스태프 상대로 갑질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잖은가.
나중에 미사토가 혼낸다니까…… 그래, 참자 참아…….
‘웨벡스 간판이었던 사람이라지. 웨벡스에서 힘도 강할 테니까, 괜히 대립각 세우면 안 좋아.’
히무라에게도 폐가 될 것이다.
일단 히무라에게 이 사태를 말하긴 하겠지만, 별다른 조치가 가해지리라고 보긴 힘들었다.
참는 게 이기는 거다.
“이번에 이름이? 맞다, 소녀연맹. 뭐야 그게, 소녀연맹이 뭐예요? 무슨 사회단체 이름? 엄청 웃기네요.”
참는 게 이기는 거다.
“저기, 조금 미안하단 생각은 안 드세요? 정말 궁금해서 여쭤보는 거예요. 히무라 실장님을 어떻게 꼬셨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우리 회사 애들도 제쳐놓고 푸시 받는 중이잖아요. 그럼 열심히 노력한 회사 아티스트들은 뭐가 돼요. 별 노력도 없이 예쁜 얼굴로 인기 얻어서, 노래 같지도 않은 노래 부르고, 또 일본에 와서까지 돈을 벌어야 해요? 솔직히 민폐거든요. 아, 이건 제 개인 의견이 아니에요.”
참는 게 이기는 거…….
“세이코 그런 말은……!”
“왜 그래 미사토. 나 틀린 말 하는 거 아니잖아. 부도칸 쇼케이스? 말이 돼? 다들 실장님 무서워서 쉬쉬하기만 하지.”
참는 게…….
“저번에 소녀연맹인가 1층에서 만나 보니까, 어린 나이에 바람만 잔뜩 들었더라구요. 자기네들이 뭐 대단하기라도 한 줄 알던데요? 아 뭐, 한국에서야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다른 나라 왔으면요, 좀 숙여야 할 필요도 있지 않나. 파쿠(박) 이사, 오늘 돌아가면 걔네한테 이렇게 말씀해주실래요? ‘얘들아 나대지 말고 조용히 있다 가자. 한국에서처럼 같잖은 노래 부르고 웃기만 하면 돼’라구요.”
끼익.
차가 갑자기 도로변에 정지하자 미사토는 깜짝 놀랐다. 뒷좌석의 세이코도 마찬가지였다.
성필은 뒤로 돌아보고,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저기요, 세이코 씨.”
“뭐, 뭐요.”
세이코는 마치 옆에 누군가가 있기라도 한 듯이 옆좌석을 더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옆으로 뺐다. 마치 도망가려는 모양새 같았다.
그녀는 누군가의 적의를 대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자신을 상대로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몸을 피하려 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미사토가 성필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제발 그만하란 뜻이었다.
하지만 성필은 멈추지 않았다.
“이유나 들읍시다.”
“이, 이유요? 선, 선배로서의 충고죠.”
“아깐 아이돌은 후배 아니라면서요.”
“회사에, 회사 후배잖아요.”
“민폐라면서요. 민폐 끼치는 사람도 후배로 쳐줍니까? 그냥 관계없는 사람으로 보고, 욕만이라도 안 하면 됩니까? 아니, 다른 사람 앞에선 몰라도 저는 소녀연맹 프로듀서입니다.”
성필의 말투는 절대 곱지 않았으며 명백한 적의가 느껴졌다. 이에 면역력이 없는 세이코는 너무나 두려워서 눈물마저 나올 것 같았다.
감히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해? 그런 분노보다도 두려움이 앞섰다.
그녀는 무균실에서만 자라온 식물 같았다. 갑자기 열대야로 꺼내지자 괴로움을 호소하면서 말라만 가는 것이다.
“선배, 선배로서, 저는 톱스타예요! 충고도 못 해요?!”
“선배, 선배, 라…….”
성필의 어깨를 쥔 미사토의 손힘이 더욱 강해졌다. 이제 제발, 제발 그만해달란 뜻이었다.
하지만 성필은 아예 손으로 좌석을 붙잡으면서 세이코에게 더욱 가까이 몸을 들이밀었다. 뒷좌석과 운전석의 경계마저 넘어서 그녀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세이코는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시트와 한 몸이 되려는 듯 등을 붙였다.
“…….”
하나, 둘, 셋.
“미, 미사토오…… 이, 이이, 이 사람, 빨리 데려가아…… 빨리이…….”
그래, 후회할 미래는 떠오르지 않는다.
“세이코 씨, 선배로서의 충고요? 네, 할 수 있죠. 그런데 세이코 씨는 그럴 수 없어요. 공백기가 3년을 넘었는데, 현역으로 치진 않잖아요?”
세이코의 눈동자에 번개가 내리꽂혔다. 그녀는 경악한 나머지 언어마저 잊어버렸다.
“선배로서의 충고는 마음껏 듣겠습니다. 하지만 진짜배기 선배들한테서만요. 세이코 씨의, 현역도 아닌 가수의 충고를 우리 애들이 받을 의무는 없습니다. 아시겠어요?”
“…….”
성필이 자신의 입술을 두드렸다.
“입조심 하시라고요. 나중에 소녀연맹 만나더라도 그런 말은 절대…….”
여전히 후회하는 미래는 그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
“미사토오……!”
세이코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주 서럽게.
세상이 떠나갈 듯이.
그에 성필이 당황해버렸다. 설마 30살 먹은 성인이 어린애처럼 오열할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으니까.
“어, 어, 우, 웁니까?”
“미사토오, 끅, 미사토…… 미사토오……!”
박성필 최초업적.
30대 여자 면전에서 울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