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손혜빈은 가로 엔터의 모든 직원을 불러 모았다. 그들의 면면을 확인하면서 미소를 지어주기를 반복하고, 여전히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외쳤다.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이 있어요! 바로 인센티브 제도의 도입이랍니다!”
인센티브란 소리를 듣자마자 불안함을 띠는 이들이 몇 있었다.
A&R팀의 이재호가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취준생이던 시절 인터넷에서 보았던 중소기업의 여러 악행을 떠올렸다.
‘인센티브제로 바꾼다면서 기본급을 낮추려는 걸까? 인센티브는 아예 받기로 힘들 만큼 어렵게 기준을 정하거나, 그냥 안 주는 수준이고?’
이재호는 두려움에 떨면서 손혜빈을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 시선을 알았는지, 손혜빈도 그를 쳐다보았다.
눈이 맞자마자 이재호에게서 불안감이 사라졌다.
‘손 팀장님이 그러실 리 없어!’
이재호는 손혜빈에 대한 충성심을 불태우면서 경청의 자세를 취했다.
과연, 손혜빈은 이재호가 걱정하는 것처럼 괴상한 인센티브제를 말하지 않았다.
“곧 가로 엔터도 신규 인력이 확충되고 여러 부서가 생길 거예요. 그리고 또 뭐가 생길까요? 네, 재호 씨.”
손혜빈은 번쩍 손을 든 이재호를 지목했다.
“연습생입니다!”
“맞아요! 오디션 일정을 홍보팀에서 열심히 기획하고 있긴 한데, 오디션만으로 보석 같은 연습생을 모으는 건 힘들죠? 그래서 여러분들께도 도움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큰 회사들은 캐스팅 디렉터가 따로 있다. 회사에 전속된 경우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프리랜서로 활동하기도 한다.
그들은 오디션 시스템이 정착되기 전에는 전국 8도를 돌아다니며, 과거 소위 ‘얼짱’이라고 불리는 이들을 찾아다녔다.
인터넷을 보는 건 당연하고 동네를 수소문하면서 보석을 찾아냈던 것이다. 요즘은 그 정도론 하지 않는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란 말이 있죠. 즉, 아이돌이 될 만한 인재는 거의 대부분이 서울에 있단 뜻이에요.”
학원이든 지역 대회든, 아이돌의 재능을 갖춘 자들이 서울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엔터계에 속해 있으면서 많은 보석을 봤을 거예요. 우연히 지나가다가, 거래처에 가다가, 뭐 기타 등등의 이유로요. 그러다가 ‘아, 저 사람은 아이돌 하면 괜찮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쯤 있을 텐데요. 이젠 생각만으로 안 끝내도 됩니다.”
직접 말을 걸고 스카우트할 권한을 줄 것이다.
“이사진의 심사하에 그 연습생이 가로 엔터로 영입되면 인센티브를 제공할게요. 전달 사항은 이상입니다.”
물론 아직 밝힐 게 더 있었다. 하지만 손혜빈은 극적 효과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반응이 있었다. 이 이야기와는 가장 관계가 없을 법한 인물, 경리 권아인이 손을 든 것이다.
“저, 이사님.”
“네 아인 씨.”
“인센티브면, 얼마인가요?”
손혜빈은 씨익 웃으면서 손가락을 세 개 폈다.
“아, 30만 원.”
“아뇨. 300만 원이에요.”
“……?!”
직원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300만 원이면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평균 월급을 뛰어넘는다. 연습생 하나만 잡으면 한 달 월급 이상을 얻는 것이다.
이는 큰 회사의 캐스팅 디렉터가 뛰어난 연습생을 하나 구해오면 받는 금액과 거의 비슷하다.
“어때요? 구미가 당기죠? 퇴근하고 댄스, 보컬 학원 돌아다닐 의욕이 팍팍 나죠?”
손혜빈은 자그마한 박스를 하나 가져와서 그 안에 담긴 것을 직원들에게 돌렸다.
가로 엔터에서 제작한 명함 지갑과 각자의 새로운 명함이었다. 그중에는 경리 권아인의 것도 있었는데, 그녀는 새로운 명함을 보자 당황했다.
[가로 엔터 신인개발부 권아인]
“아무래도, 단순히 홍보팀이나 비주얼 팀인 것보다야 이런 식이 상대한테도 더 먹히겠죠? 악용하진 마시구요. 자자, 그럼 인센티브를 위해 열심히 해봅시다! 구호 외치고 해산!”
가로 엔터 파이팅!
손혜빈은 회의실을 나서는 직원들의 등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직원분들이 데려오는 후보가 전부 보석 같을 리는 없겠지.’
그럼에도 인센티브제를 운용하는 이유는 하나다.
‘단 한 명. 저분들이 데려오는 수십 명 중에 단 한 명만 보석이 있어도 돼.’
인센티브제는 그 희박한 운명과 기적을 기대하는 제도다.
인터넷으로 진행하는 영상 오디션은 편한 데다가 많은 후보를 빠르게 골라낼 수 있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는 많이 차이가 있다.
가로 엔터의 이사진은 직원들의 안목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안목은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지. 오랜 경험으로 쌓인 사회적 맥락으로 읽어내는 거야.’
그래서 모델계나 연예계의 캐스팅 디렉터는 안목에 관해 말하라면, ‘일하다 보니 어느 순간 눈이 트였다’고 설명한다.
그건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안목이란 결국 업계에서 일하다 보면 쌓이는 것이니 말이다.
‘성필이처럼 진짜배기 보석만 바로 골라낼 수는 없겠지만.’
소녀연맹과 함께 일해왔던 저들에게라면, 어느 정도의 안목은 기대할 수 있으리라.
손혜빈은 막연한 기대를 느끼며 업무를 하기 위해 사무실로 향했다. 그러던 도중 한구인이 그녀를 불렀다.
“박 이사님이 회의를 요청하셨습니다.”
“성필이가요? 빠르네.”
십수일 동안은 정기 보고를 제외하곤 이야기할 일이 없겠다고 여겼는데.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일까?
홍규헌, 한구인, 손혜빈이 회의실에 모였다. 그러자 잠시 후 프로젝터 스크린에 성필의 얼굴이 떠올랐다.
“박 이사, 잘 지내?”
[이제 이틀째잖아요. 잘 지내고 뭐도 없죠. 근데 사장님은…….]
“응? 내가 뭐?”
[얼굴이 더 핼쑥해지셨네요.]
“내가?”
홍규헌은 고양이가 세수하듯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제가 없어서 그런가? 하하! 빨리 저 보고 싶으시죠? 알아요, 사장님이 아끼는 제가 없으니까 많이 외로우시겠…….]
“박성필 이사를 노동자 대표 이사에서 해임하고 프로듀싱 권한을 박탈한다.”
[에에엑?!]
일본에 있다 보니 감탄사마저 리카를 닮아간다. 홍규헌은 그에 질린 기색을 띠면서도 옅은 웃음을 보였다.
“그래서, 박 이사 무슨 일이야?”
[히무라 실장님이 방송을 하나 잡아주셨거든요. 평균 시청률이 10%를 넘어가요!]
“평균 10%? 진짜 대단한데. 일본에서 10%면 1,000만 명 이상이 본다는 거잖아. 웨벡스가 힘을 실어주는 게 보이네.”
[근데 경연 프로그램이에요. 가수들 나와서 순위 가르는 거요.]
“힘을 실어주는 게 아니라 절벽에서 밀려고 하네.”
[저는 나가는 게 좋다고 봐요.]
“박 이사, 누구한테 사주받았어. 그 사람이 얼마 준대? 솔직히 말해.”
소녀연맹이 일본에 간 지 이틀째, 벌써부터 가로 엔터에 난관이 찾아오다.
* * *
소녀연맹의 데뷔 쇼케이스의 세트리스트는 ‘롱 포’, ‘아니’, ‘팅글’ 순서로 진행된다.
오늘은 그 세트리스트를 웨벡스의 기획팀 앞에서 선보이는 날이었다. 넓은 연습실을 기획팀은 물론 여러 부서의 사람들이 꽉 메웠다.
“진짜 많네.”
“그러게.”
조아라와 신아름은 점점 자리를 채워가는 의자들을 보며 황망히 말했다.
처음 연습실로 들어오자 의자가 30개쯤은 있기에, 공연히 안 올 사람의 의자까지 가져다 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자들이 전부 채워졌음을 물론, 정해진 숫자 이상의 인물들이 서 있으면서까지 자리를 메웠다.
덕분에 연습실은 미니 콘서트 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안녕하십니까.”
히무라 실장이 들어오자 의자에 있던 인물들이 전부 일어나선 예를 표했다.
그는 한 부서를 맡은 높은 위치이긴 했지만, 그에게 향해지는 예의는 위치 이상을 드러내었다.
‘웨벡스 사장 아들이라고 했지.’
그럼 그에게 표해지는 존경은 그뿐만 아니라 사장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성필은 히무라를 뒤따라오면서 그의 후광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놀랍기도 했지만, 동시에 불안감이 덮쳐온다.
‘그런 배경을 등에 업고서도 반발에 직면해 있단 건가.’
같은 부서의 걸그룹인 에스타스를 뒤로하고 소녀연맹에만 매달린 실권자. 히무라를 향한 적개심은 보통 수준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직원들이 감히 사장의 아들을 향해 반발을 표하진 못할 테니까.
‘그만큼 웨벡스 내에서도 분위기가 좋지 않단 거겠지. 실장님이 한발 물러서서 나에게 무리한 도움까지 요청할 정도이니.’
직원들의 분위기를 파악하던 성필은 문득 소녀연맹에게로 눈길이 갔다. 그리고 그녀들이 잔뜩 긴장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성필이 그녀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수십 명의 시선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갑자기 무대로 아이돌이 아닌 사람이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당연했다.
“얘들아.”
성필이 친근하게 인사하자 멤버들은 구세주라도 찾은 것처럼 표정이 밝아졌다.
“많이 긴장했어?”
“저희 회사랑 분위기가 다르긴 하네요.”
가로 엔터에서는 월말 평가라 하더라도 자리를 채운 이들이 10명을 넘지 않는다.
심지어 이곳에 온 이들은 소녀연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도 않기에, 멤버들이 느끼는 압박감은 더 클 것이다.
“뭐야, 아름이 겁먹었어?”
“아니 팀장님. 겁 안 먹게 생겼어요? 저기 봐요. 사람들 눈빛이 이상하잖아요.”
성필은 뒤를 흘끗 보았다.
과연, ‘뭐 하나 실수라도 해봐라’라는 기운이 풀풀 느껴진다. 저런 이들 앞에서 공연하려면 마음이 실시간으로 깎여나가겠지.
“저는 겁 안 나요!”
“음, 리카는 겁 안 나?”
“하이(네)!”
“장하다. 그래, 아름아. 어떡하면 긴장 조금이라도 풀 거 같아?”
“히도이(너무해)…… 이사님 반응이 너무 싸늘하다구요…….”
“긴장을 어떻게 풀어요. 그냥 해야죠.”
“음, 그러면.”
성필은 신아름의 어깨를 잡고 객석과 더욱 가깝도록 당겼다. 갑자기 웨벡스 사람들과 더 가까워지자, 신아름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가려 했다.
하지만 성필이 그러도록 두지 않았다.
“아름아, HPT 뮤직 어워드 때 떠올려 봐.”
HPT 뮤직 어워드 때는 정말 일이 어떻게 풀리려나 싶었다.
환호성 가득했던 객석은 소녀연맹이 등장하자마자 짜기라도 한 것처럼 침묵을 지켰으니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울면서 도망가고 싶었었다. 수천 명이 한 번에 보내는 침묵은 그 자체만으로도 폭력이 된다.
“그거랑 비교하면 이건…… 어때?”
신아름이 픽 웃었다.
“네, 애들 장난 같네요.”
소녀연맹은 흠집만 찾아내려는 수천 명 앞에서도 박수를 끌어냈었다. 이번이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다.
“다들 아직도 긴장돼? 아니, 긴장은 되더라도 자신감도 없는 건 아니지?”
“난 원래 괜찮았어요. 신아름 쟤가 유난 떤 거지.”
조아라의 허세에 신아름이 중지를 들려다가 말았다. 이런 곳에서 그런 제스처를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설하야, 네가 묵직하게 중심을 잡아줘야 해. 리더, 믿는다.”
“네!”
멤버들의 두려움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몰라 말을 아끼던 백설하는, 성필이 판을 깔아주자 가진 것 이상의 자신감을 보였다.
“몇 번이라도 할 수 있어요!”
“그래, 이제…….”
“전 아직도 떨려요.”
장하양이 말했다. 그런데 그녀는 전혀 떨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무서워요.”
“아, 그래……? 음, 어떡하지…….”
“언니 이래도 떨리나요!”
리카가 장하양을 꼭 안았다.
“응, 떨려.”
“엑?!”
“이래도?”
백설하가 장하양을 뒤에서 꼭 안았다.
“네, 떨려요.”
“어?!”
이 정도면 협박 수준이다. 당장 내 떨림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면 무대를 망치겠단 선언이다.
“평가 무사히, 완벽히 끝내고 다 같이 놀러 간다고 약속해주시면 안 떨릴 거 같아요.”
“오늘?”
“아뇨, 오늘 아니라도 언제든지요.”
그 정도라면 몇백 번이고 약속해줄 수 있다. 성필이 장담하자, 장하양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박 이사님.”
히무라가 그를 불렀다. 이제 평가 준비가 끝났단 것이었다.
성필은 그녀들을 다시 한번 격려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중앙인 히무라의 바로 옆이었다.
그곳에 앉아 정면을 보았다. 그러자 아까의 어리광은 어디로 갔는지, 오직 프로다운 아우라만이 흘러나오는 소녀연맹만이 있었다.
“자, 그럼.”
히무라가 선언했다.
“1차 시연 시작하겠습니다.”
* * *
“박 이사님 죄송합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히무라가 사과했다.
“원랜 부서 내에서만 조용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쇼케이스의 시연이니까요.”
그런데 회사에서 비정상적인 관심을 표해왔다. 그래서 타 부서의 인원마저 전부 모여서 시연을 진행한 것이다.
성필은 몰랐지만, 회사에서도 입김이 강한 이들이 많이 모였단 모양이다.
“괜히 멤버분들께 중압감만 준 건 아닌지…….”
“괜찮아요. 가장 힘드셨던 건 실장님이시잖아요.”
히무라도 평정을 가장했었지만, 수십 명이 시연에 온단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머리가 지끈거렸던가.
다들 소녀연맹의 흠을 찾으러 왔을 테니 맨정신으로 있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연맹은 해냈다. 아니, 원래 하던 대로 했다.
“예, 힘들었다…… 는 말은 틀리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전부 쓸모없는 걱정이었습니다만.”
그 말대로, 소녀연맹의 시연은 성공적이기 그지없었다. 모두의 입에서 무의식적인 탄성이 나오게 하기 충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성필은 자만하지 않았다. 이 시연만으로 상황이 나아지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건 당연한 거니까.’
웨벡스는 소녀연맹 전에도 케이팝 아이돌 두 그룹이나 매니지먼트한 경력이 있다. 그것도 다들 상당한 명성을 자랑하는 이들을 말이다.
소녀연맹은 완벽한 무대를 보여야, 그나마 그들과 비교해서 꿀리지 않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즉, 이번의 완벽한 시연은 당연한 거다.
“덕분에 체면치레는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뭘요. 소녀연맹을 선택한 실장님의 안목 덕분이죠.”
그 칭찬에 히무라는 헛웃음을 뱉었다. 히무라의 안목을 칭찬하는 건 곧, 소녀연맹을 프로듀싱한 성필을 칭찬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유려한 자기 자랑에 히무라는 여러 번 웃었다.
“실장님?”
“아, 죄송합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히무라는 사장의 아들이란 지위에 있었다. 이 회사의 누구도 그에게 농담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성필은 달랐다.
히무라를 향한 친근하면서도 선은 지키는 아슬아슬한 태도는, 그에게 새롭기 그지없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히무라는 성필에게 서류를 하나 주었다.
소녀연맹이 출연할 경연 프로그램 ‘뉴아사’의 출연자 목록이었다.
소녀연맹을 제외한 총 7명의 프로필과, 한국인인 성필은 알지 못할 그들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쉽게 말해서, 소녀연맹이 걱정할 만한 강자는 없습니다.”
‘뉴아사’에는 가수만 나오는 게 아니다. 인기 있는 예능인이나 모델, 아이돌이 나오기도 한다.
이번 ‘뉴아사’의 라인업에는 예능인이 한 명, 아이돌이 두 명이었다. 나머지 4명은 그럭저럭 인지도가 있는 가수였다.
“출연 아이돌 두 명은 아마추어 수준입니다.”
“음.”
한국에서 ‘아이돌이 출연한다’는 소리를 들었다면, 그들이 혹시 메인 보컬 포지션은 아닌가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메인 보컬이 아니더라도 얼마나 실력이 있을지 걱정했을 것이고.
하지만 히무라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야말로 ‘아마추어’에 불과했으니까.
“예능인과 아이돌을 제외하면 소녀연맹이 신경 써야 할 대상은 가수 네 명입니다. 프로필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분들도 ‘정말 못 이기겠다’는 수준은 아닙니다.”
국민적인 인지도나 인기를 가진 가수는 없다. 다만, 본업이 가수인 만큼 보컬 실력은 가수라 불리기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성필은 걱정이 하나 있었다.
“경연에선 보통 감성적인 노래가 먹히지 않습니까. 솔로 가수의 발라드나 감성을 건드리는 곡이 우승하는 경우가, 제가 알기론 많습니다.”
“그건 일본도 비슷합니다.”
경연이란 딱지가 붙은 만큼 보컬 기교를 폭발시키는 곡이 호응을 얻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뉴아사’의 특징 중 하나를 생각하시면, 그것도 큰 걱정은 아닐 겁니다.”
‘뉴아사’의 인기 요소 중 하나는 랜덤이다.
일단 아티스트는 십수 개의 장르 중에서 하나를 랜덤으로 배정받는다. 그중에서도 제작진이 고른 10개 가운데서 또 랜덤으로 곡이 정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발라드 가수가 갑자기 헤비메탈 곡을 부르거나, 예능인이 난이도 높은 발라드를 배정받아 곤욕을 치르기도 합니다.”
그게 이른바 ‘세일즈 포인트’다.
웃긴 장면이 경연마다 한두 번씩 꼭 있다.
“소녀연맹과 경쟁할 가수분들도 주특기인 곡이 배정받을 가능성은 크게 없습니다. 소녀연맹도 마찬가지지만요.”
즉, 소녀연맹은 진짜배기 가수들에게 보컬 기교를 강조한 곡으로 싸울 필요가 없어진다.
“군인한테 총 놓고 싸우라는 거 같네요, 이 프로그램은.”
“그게 재미죠. 그에 비해 소녀연맹에겐 강점이 있습니다. 케이팝 아이돌이라 여러 장르에 능하다는 점. 그리고 프로그램의 룰에 따라 편곡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해외에서 케이팝의 특징 중 하나로 꼽히는 게 바로 장르의 융합이다. 곡 하나에도 장르가 몇 개씩 섞여 있어, 아이돌은 원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많은 장르를 체험한다.
그건 작곡가와 편곡가도 마찬가지다.
“어떤 곡이든 정지음 작곡가님이 수정할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렇네요. 다른 출연자분들에 비해선 저희의 장점이 잘 발휘되겠어요.”
극단적으로는, 발라드곡을 받더라도 댄스곡으로 편곡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일본 출연자들은 편곡에 그만큼 공을 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괜히 편곡했다가 상황이 더 안 좋게 흐를 걸 우려한다는 모양이다.
성필은 다시금 출연자 목록을 훑었다.
‘이 정도면 가능성이 있네.’
소녀연맹 멤버들의 기량. 편곡의 천재인 정지음의 존재. 이것들이 소녀연맹의 승리에 무게를 두게 한다.
또한 소녀연맹이 신경 써야 할 출연자는 네 명에 불과하다.
이 모든 요소를 종합하자면 이길 가능성이 충분할 것이다.
“제가 드릴 정보는 이 정도입니다. 가로 엔터 쪽에서 답은 들으셨습니까?”
“네. 허락받았습니다.”
“다행입니다.”
미래의 지식을 노출할 수 없는 성필로선, 오직 머릿속에 꽃밭밖에 없는 설득만을 펼쳐야 했지만.
어쨌거나 홍규헌에게서 허가를 얻어냈다. 지금까지 쌓은 신뢰 덕분이었다.
물론 웨벡스가 ‘자그마한 도움’을 줄 거란 MSG도 좀 쳐야 했지만…….
“그럼 3일 뒤 바로 촬영에 가면 되겠군요.”
“……네? 3일 뒤에요?”
“하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3일 뒤는 출연자들끼리 모여서 경연곡을 뽑는 것만 촬영하니까요. 본 공연은 25일 뒤입니다.”
“25일 뒤면…….”
쇼케이스 전인데?
* * *
보통 경연 프로그램도 준비 기간이 일주일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걸 생각하면 25일은 차고 넘치도록 넉넉하다.
하지만 쇼케이스를 앞두고 경연까지 준비할 수 있을까?
‘어차피 아니, 롱 포는 죽도록 옛날에 연습했던 거니까. 팅글은 한국에서 완성했었고.’
사실상 소녀연맹은 일주일은 연습을 안 해도, 공연 당일 완벽히 무대를 소화할 정도이다.
하지만 일본 데뷔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있다 보니, 계속해서 완성도를 다듬고 싶은 마음도 있다.
결론 내리지 못한 고민을 지니고 주차장에 도착한 성필은 자신의 차를 찾았다. 여러 방향으로 리모콘을 누르던 그는, 갑자기 저 멀리서 들린 고함에 화들짝 놀랐다.
“기름 채워놓으라고 했는데에!”
30대 중반의 여자가 비닐 커버가 씌워진 옷을 들고 사자후를 내질렀다. 그녀는 분노를 가눌 길이 없는지 발마저 동동 굴렀다.
‘매니저인가?’
그때 성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확인하니 장하양이 보낸 톡이었다.
[(디저트 카페 내부 사진)]
“와…….”
성필은 무심코 질린 탄성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장하양이 보낸 디저트 카페는 분홍색 외의 색을 찾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눈이 닿는 가게의 모든 인테리어가 분홍색이었다.
[장하양: 리카가 추천해줬어요.]
[장하양: 언제 갈까요 ㅋㅋㅋㅋㅋㅋ]
오늘 시연을 무사히, 완벽히 끝내면 다 같이 놀러 가기로 했던가. 설마 벌써 그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니.
‘그런데, 나도 같이 간다고?’
성필이 이 가게에 들어가는 순간 모든 시선이 쏠릴 게 틀림없다. 이 디저트 카페의 주요 고객층은 젊은 여성일 테니까.
성필은 가시방석에 앉은 자신을 떠올리자마자 심장이 죄어들었다.
가고 싶지 않아…….
‘그래도 약속이니…….’
“저기요.”
바로 앞에서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
아까 옷을 들고 소리치던 여자였다. 그녀는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얼굴로 성필의 앞에 서 있었다.
“어느 팀 소속?”
“네?”
“어느 팀 소속이냐고요.”
“어…….”
“아 됐어요. 차 있죠? 따라와요.”
여자는 성필이 따라올 것을 의심도 하지 않는지 벌써 저만치 가버렸다.
그러곤 성필이 따라오는 기색이 들리지 않자 홱 돌더니, 아까와 같이 고함을 내질렀다.
“빨리 오라니까요?!”
거기서 성필은 기분이 팍 상했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것 같은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토록 무례하게 대하다니.
“누구신데 이러십니까.”
“네? 저를 몰라요?”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숨을 고르더니, 그럴 수 있다는 듯 차분한 투로 돌아왔다.
“신입이구나. 가수 관리 1부 미사토예요. 됐죠? 빨리 와요.”
“저도 일이 있습니다.”
방금 프레스가 끝난 소녀연맹의 앨범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러 갈 참이다.
회사로 견본이 오길 기다려도 되지만, 성필이 미리 확인하는 게 더 빠를 테니까.
“……뭐요?”
성필의 대꾸에 여자의 얼굴은 더더욱 붉어졌다. 감히 자신에게 대꾸를 해? 이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조바심과 초조함이 겹쳐서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뭔 일인지는 몰라도 이거보다 큰일은 아니니까 빨리 오라고요!”
“자꾸 그러시면…….”
“어디 소속이에요!”
“……아이돌 관리 2실입니다.”
“아니, 뭔, 허, 아니, 아니 아니, 진짜. 시, 신입이라서 그러죠?”
미사토는 전략을 바꾸었다. 성필의 명함을 듣고 겁먹은 것 따위는 아니었다.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신입을 강제하는 게 힘드리라 판단해서였다.
“진짜 어떤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전부 커버해줄 수 있으니까 저 좀 따라오면 안 될까요? 네? 저 정말 급하거든요? 그러니까 좀 도와주세요 제발 제발 제발 제발!”
갈수록 가관이다.
그녀가 어떤 일이 있는지 성필도 모르긴 매한가지다. 하지만 이렇게나 고압적인 태도로 나오는 사람을 도와줄 마음이 들 리가 만무하.
“‘세이코쨩’ 일이라고요! 난 몰라도 세이코는 알 거 아니……!”
그 순간 여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성필이 도망쳤기 때문이다.
아니, 도망이 아니다.
“뭐 해요? 빨리 와요!”
성필은 이미 자신의 차 앞에 가서 운전석 문을 열고 있었다.
‘저 여자 세이코 매니저구나.’
일이 잘 풀린다. 어쩌면 오늘 그녀를 직접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본, 후회하는 미래의 주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