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85화 (285/760)

285화

“…….”

성필은 당장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감정적으로 대응해봤자 좋은 일은 그다지 없단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히무라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보기로 했다.

“경연 프로그램에 나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계십니까?”

“순위를 가른단 뜻입니다.”

그렇다.

경연 프로그램은 순위를 가른다.

세상에 어떤 아티스트가 2위나 3위로 불리길 좋아하겠는가. 다들 1위를 목표로 달려 나가는 사람들이다.

‘경연은 언제 어디서든 화제가 되기 좋아.’

경연은 인지도에 목마른 이들이 주로 나가는 편이다. 그렇기에 1티어 그룹이나 톱 아티스트가 경연에 나가진 않는다.

당연히 톱 아티스트라면 그만한 실력이 있으니 왕좌에 올랐을 것이다. 경연에 가서도 팬덤과 실력으로 상대를 찍어누를 가능성이 높겠지.

하지만, 만약 아니라면?

“잃는 게 너무 많지 않겠습니까.”

소녀연맹은 경연 프로그램 ‘뉴아사’에 나올 아티스트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다. 그러니 출연하는 순간부터 페널티를 안고 시작하는 것이다.

“저는 이 프로그램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소녀연맹이 어중간한 순위를 달성해봤자 좋은 일이 없으리란 건 압니다.”

서류를 보니 ‘뉴아사’의 주요 시청자층은 대중들이라고 한다.

일본의 유명 인사들, 즉 가수가 아니더라도 출연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호기심에 챙겨보는 사람들이 많겠지.

그들이 아이돌에 호의적일까? 그것도 케이팝 아이돌에? 성필은 아니라고 본다.

“불리한 싸움이잖습니까.”

“저는 소녀연맹의 1위가 가능하리라 봅니다.”

“……실장님. 저희 애들을, 아니. 소녀연맹을 좋게 평가해주시는 건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건 일본에 관한 문제만 있는 게 아닙니다.”

소녀연맹이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한단 소식은 금세 한국에도 퍼질 것이다.

‘한일전 급으로 불타오르겠지.’

안 그래도 일본에 관심이 많은 게 한국 사람들이다. 일본과 관련된 경기만 있다면 시간 가리지 않고 시청하는 게 일상이지 않은가.

그런데 케이팝 아이돌이 일본의 경연 프로그램에 나간다고? 당장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 게 틀림없다.

‘그러다가 1위를 하지 못하면?’

글쎄.

쉽사리 결과를 예상할 수는 없지만, 좋은 취급은 받지 못할 건 분명하다.

한국 사람들은 케이팝 아이돌이 해외에서 거두는 업적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때론 국뽕이라고 매도하긴 해도, 케이팝의 위상을 알고 있긴 하다.

그런 케이팝 아이돌이 경연 프로그램에서, 심지어 일본 경연 프로그램에서 지고 돌아온다면…….

“농담 하나도 안 하고 가루가 되도록 까일 게 분명해요. 안 그래도 일본 아이돌…….”

성필이 급히 말을 멈췄지만, 히무라는 이어질 이야기를 알아챘다.

“저도 한국에서 일본 아이돌이 어떤 식으로 희화화되는지 압니다. 문화적인 무지에서 비롯되는 일이니 나쁘게 보진 않습니다.”

과장되게 말하자면, 한국에서 대중음악이란 곧 아이돌이다.

차트에 이름을 올리는 대부분이 아이돌이며, 나머지는 발라드와 트로트, 팝 그리고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곡이 차지한다.

“즉,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일본의 음악 또한 아이돌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겠죠. 한국 사람들에겐 일본 아이돌이 곧 일본 시장을 대표하는 걸로 여겨질 것.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본 시장에서, 일본 경연 프로그램에서, 케이팝 아이돌이 패배했단 건 일본 아이돌보다 음악성이 부족한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사님이 하시는 걱정 모두 소녀연맹이 우승하지 못했을 때를 상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1위만 한다면 문제가 없어요.”

“……문제가 없다고요?”

그래, 문제가 없겠지.

소녀연맹이 1위를 하면, 한국에서도 ‘케이팝 아이돌, 일본 경연 프로그램에서 낭낭하게 우승 차지’ 같은 기사가 돌아다닐 것이다. 그리고 재빨리 잊힐 게 확실하다.

리턴과 리스크의 차이가 크다.

“실장님, 역으로 1위를 하지 못할 때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소녀연맹은 영원히 일본에 뿌리를 박고 있지 않습니다. 한국에서의 이미지가 중요해요.”

케이팝 아이돌은 해외에서 아무리 인기가 있더라도, 한국에서 인기가 식으면 금방 하향세를 탄다.

한국은 EPL(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과 같다. EPL에서 뛰던 선수가 중국에서 수백, 수천억을 받고 좋은 성적을 거둬도, EPL에서 오랫동안 멀어지면 중국의 대우도 차가워질 것이다.

“일본에서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라? 너무한 제안입니다.”

“‘원활한 활동’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웨벡스를 설득하면, 그 이상을 보장합니다.”

“……이런 말씀 굉장히 실례된단 건 압니다만. 설령 소녀연맹이 1위를 하더라도, 히무라 실장님이 소녀연맹에게 쏟아지는 부정적인 시선을 바꿀 수 있으십니까?”

“예.”

히무라가 단호히 답해서, 성필이 오히려 당황해버렸다.

“이사님이 말씀하신 문제점은 저희 모두 인지하고 있습니다. 웨벡스의 아티스트와 직원들은 물론이고 일본 사람들도 말입니다.”

케이팝 아이돌이 일본의 경연 프로그램에 나오는 건 매우 큰 위험 부담이 있다.

적절한 예시는 아니지만, 미국의 인지도 있는 팝 아티스트가 한국 경연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그가 이긴다면 ‘그렇구나’란 시선을 받겠지만, 아니라면 ‘왜 져?’란 눈총을 얻는 것이다. 무려 대중음악의 정점인 나라에서 온 팝 아티스트가 한국 경연에서 진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소녀연맹이 ‘뉴아사’에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현재의 상황을 크게 바꿀 수 있다는 거죠.”

성필은 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녀연맹이 커다란 리스크까지 감수하고 일본 경연에 나온단 건, 그만큼 일본 시장을 진심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니까.’

‘일본에 아무런 애정도 없이 돈이나 빨러 온 주제에 웨벡스 식구인 에스타스의 입지를 갉아 먹을’ 소녀연맹이란 이미지는, 웨벡스 내에서 상당히 불식될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쨌든, 소녀연맹은 웨벡스와 일본 입장에서는 신인이야.’

응당 신인이라면 리스크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여기저기 박고 다니는 게 상례 아닌가.

“단지 출연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상황은 극적으로 바뀝니다.”

“목이 뻣뻣한 케이팝 아이돌이 숙이고 들어오는 모양새일 테니까요?”

“과격한 어휘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군요. 즉, 소녀연맹이 일본 진출에 전력을 다하겠단 진심을 보여줄 수 있단 겁니다. 사실 경연에서 1위를 하고 말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웨벡스에서 쏟아지는 부정적인 시선을 바꾸기 위해서라면 출연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걸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리스크 쪽이 훨씬 높아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판단합니다.”

“그럼 충분 이상의 지원을 약속드리면 되겠습니까. 만약 소녀연맹이 ‘뉴아사’에 출연해주신다면…….”

“히무라 실장님.”

성필은 이 젊은 나이의 벼락출세자, 월급쟁이의 말을 끊었다. 그가 얼마나 능력이 있든,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건, 결국엔 월급쟁이다.

충분 이상의 지원?

히무라가 약속해주는 지원이란 게, 소녀연맹이 1위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의 위험을 상회할 리가 없다.

“자꾸 이야기가 헛도는데, 히무라 실장님이 무엇을 해주시든 제 결정을 살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웨벡스 사장의 아들입니다만.”

“…….”

……?

“……그렇, 군요.”

성필은 흥분한 기세를 가라앉혔다.

그는 지금까지 히무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월급쟁이의 급진적 의견으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장의 아들이라면 이야기가 아예 다르다.

‘이제 알겠네. 실장님은 사장 아들이라는 위치에 합당한 힘을 과도하게 행사하다가 역풍을 맞은 거야.’

그 힘을 다시 사용하기 위해선 명분을 충전할 필요가 있다.

‘그게 소녀연맹이고.’

아무튼, 소녀연맹을 성공시키겠단 의지는 잘 알았다. 그런 힘도 충분히 가지고 있고. ‘충분 이상의 지원’이란 말도 허풍이 아니겠지.

하지만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도 대화를 더 이어나갈 가치는 있었다.

“소녀연맹이 1위를 할 거라는 보장이 혹시 있으십니까? 방송국을 구워삶았다던가?”

“저희를 뭘로 보시는 겁니까!”

“아, 죄송합…….”

“사실, 그럴 힘이 있죠. 연예계에 미치는 힘은 박 이사님의 상상 이상이니까요. 하지만 전통 있는 ‘뉴아사’의 순위를 조작하는 건 누구도 불가능합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의 문제입니다. 경연의 생명은 공정이니까요.”

“…….”

“단지, 저는 HPT 뮤직 어워드를 봤을 뿐입니다. 현장에서요.”

“예?”

“본 겁니다, 그 광채를.”

히무라의 눈동자에 빛이 채워졌다. 과거를 떠올리며 한없이 깊은 영광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소녀연맹을 택한 제가 틀리지 않았었다, 그런 확신을 얻었습니다. 소녀연맹에게는 실력이,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은, 히무라가 에스타스에게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성필은 바뀌지 않는 그의 의견을 보곤, 시선을 떨어뜨린 뒤 고민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자신의 손을 문지르고 깍지를 끼기도 하는 등 정신 사나운 행동을, 히무라는 그저 보고 있기만 했다.

고민의 끝에 성필이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필은 두 번 말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입니다.”

다신 말을 번복하지 않겠다. 그 의지를 담아 성필은 고개를 꾸벅 숙이, 려고 했다.

성필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 * *

소녀연맹의 일본 활동이 무사히 종료됐다. 차창 밖으로 가까워지는 공항 청사의 정경을 바라보면서, 성필은 일본에서 얻은 성과를 종합해보았다.

‘훌륭한 발판을 마련했다, 정도인가.’

소녀연맹은 일본에도 자생적인 팬덤이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내년에도 일본에서 활동할 가치가 있음을 입증했다.

계획대로, 일본은 소녀연맹의 주요 활동국이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드디어 가네.”

밴의 뒷자리에 앉은 조아라. 그녀가 피로감에 절어서 뱉은 말이 성필의 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조아라는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후련함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아저씨, 우리 진짜 내년에도 일본에 와요? 꼭 와야 해요?”

“와야지. 계약인데.”

“하아.”

조아라의 언뜻 무례한 반응에도 멤버들은 말리지 않았다. 그녀들 또한 근 3개월 동안 웨벡스로부터 험한 꼴을 당했으니,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조아라에게 동감했다.

운전석에 앉은 슈이치는 강박적으로 백미러를 바라보면서 미안한 티를 냈다. 이미 사과는 질리도록 해왔으니, 이제 와서 말해봐야 효과도 없을 터다.

“팬분들은…… 정말 다 좋았는데.”

백설하가 조아라에게서 불평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회사 사람들이…… 아, 슈이치 씨 말구요. 또 히무라 실장님도 빼고.”

그게, 저기.

자꾸만 말을 더듬던 슈이치는, 기어코 닳디 닳아버린 사과를 또 꺼냈다.

“죄송합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멤버들이 일본에 좋은 감정을 가지길 바랐는데. 한국으로 가지고 돌아가는 건 부정적인 기억밖에 없다니, 슈이치는 속이 쓰렸다.

그건 리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저희 이번에 열심히 했잖아요! 다음에 올 때는 더 좋게 봐주실 거예요!”

리카는 누구보다 멤버들이 일본을 좋아해주길 바랐던 사람이었다. 때문에 쉬는 날이면 멤버들을 데리고 여러 곳에 관광도 가지 않았던가.

“야 리카. 넌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 못 차렸어?”

신아름의 일갈에 리카가 금세 쭈그러들었다.

“우리가 왜 그딴 꼴을 당해야 하는데. 다음에 오면 더 좋게 봐줘? 좋게 보이고 싶지도 않다 야.”

“…….”

“막말로 설하 언니가 머리채 쥐어뜯을 기세로 딴 사람들이랑 안 싸웠으면 어떻게 됐겠어? 만만한 줄 알고 계속 지랄…….”

신아름이 자신의 입술을 찰싹 때렸다.

“계속…… 안 좋은…… 그거, 했을 거 아니야. 대놓고 미친년인 척을 해야 그나마 가만히 놔둔다고? 이게 괴롭힘 아니고 뭐야.”

“내가 미친년 같았어……?”

“아니 쌤. 말이 그렇단 거죠.”

소녀연맹의 권리를 위해 싸우던 백설하는 그야, 조금 미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동생들을 지키려 이미지 손상도 각오했던 그녀의 기백은 누구든 인정해야만 하리라.

멤버들이 수다를 떠는 사이, 리카가 점점 더 의기소침해지는 동안, 밴은 공항으로 도착했다.

멤버들은 위장을 마치곤 밴에서 내렸다.

“여러분.”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히무라가 튀어나왔다. 멤버들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놀라면서도 착실하게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오늘 일이 있다더니, 일찍 끝나서 배웅이라도 하려던 것일까?

히무라는 여름 햇볕에 눈가를 찌푸리면서도 입에서는 미소를 놓지 않았다.

“세 달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 네.”

백설하가 대표로 히무라의 인사를 받았다. 그는 소녀연맹이 일본에서 이룬 업적들을 찬양하곤,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보길 희망한단 말로 작별 인사를 끝냈다.

그리고 그는 성필에게로 몸을 돌렸다.

“박 이사님.”

“실장님.”

둘은 악수했다. 더위로 끈적해진 손. 촉감은 좋지 않았다. 뜨거워서 기분이 안 좋았다.

두 남자 모두 그런 기분이었으나, 놓지 않았다. 마치 손으로 감정을 전달하려는 것처럼.

미소만을 걸고 있던 히무라의 입가가 점점 내려왔다.

“이사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요. 제가 처음부터…… 실장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을 걸 그랬네요. 사태 파악이 미진했습니다.”

“그게 어떻게 이사님 탓이겠습니까. 다 제가 부족하기 때문이죠. 힘든 상황에서도 소녀연맹과 이사님은 열심히 하셨습니다. 제가 놀랄 정도로요.”

박 이사님이 없었다면, 일이 더 힘들어졌겠죠. 그리 말하는 히무라는 슬픔을 드러냈다.

히무라가 부정적인 감정을 대놓고 보인 건, 성필의 기억으로는 처음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박 이사님. 그나마 결과가 좋아서 다행입니다.”

결과는 좋았다. 과정이 순탄치 않았을 뿐.

아니, 결과도 좋지 않았던가.

‘멤버들은 일본에 부정적으로 변했고. 웨벡스와의 협업은 엉망진창이고. 사실상 나랑 히무라 실장님이 따로 기획사를 차려서 영업을 다닌 수준이었으니까. 어바이비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거보다 더 심했겠지.’

어쩌면 처음에 히무라의 제안을 받아들였더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이코 씨도 그렇게 되진 않으셨겠지.’

그녀가 했던 짓은 도저히 옹호할 수 없지만, 동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랜 악수 끝에 히무라가 먼저 손의 힘을 풀었다. 둘은 손을 뗀 뒤 작별에 어울리는 미소를 지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다음에 봐요, 실장님.”

성필과 소녀연맹은 공항 청사 안으로 향했다. 그때 리카가 성필의 곁에 조용히 붙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이사님, 이거.”

성필은 책을 받았다.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문고본이었다.

일본에 오고 며칠 뒤였나, 리카가 일본 귀화의 필요성을 역설했었다. 그러다가 성필이 노력해보겠다고 했고, 그 노력의 첫 번째는 문화의 이해였다.

그때 리카가 추천해줬던 게 ‘도련님’이었다.

“아, 맞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하이(네).”

리카가 우울한 기색을 띠면서 말했다.

그녀는 성필에게 ‘도련님’을 선물로 사준다고 했었지만, 그날 이후로 워낙 많은 일이 있어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것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리카는 ‘도련님’을 선물로 줬음에도, 끝까지 일본 귀화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장난기가 줄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멤버들 때문에 장난으로라도 일본 귀화 같은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성필은 처진 리카를 바라보는 게 힘들었다.

“고마워, 리카. 잘 읽을게.”

성필은 책을 가방 안에 넣고 공항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끊겼다.

뒤로 돌아보니, 리카가 입구 바로 앞에서 멈춰 서 있었다.

“리카?”

리카는 뒤, 일본을 돌아보고 있었다.

“왜 그래. 뭐 두고 온 거 있어?”

“……이에(아뇨).”

리카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고개를 저었다.

“가요.”

리카는 공항 안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이로써 소녀연맹의 일본 활동도 끝났다.

비즈니스적으로는 성공한, 하지만 떠올리면 나쁜 추억밖에 없는, 후회가 가득한 땅을 뒤로했다.

* * *

“굉장히…… 단호하시군요.”

히무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로써 성필은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아마 가슴을 가득 채운 불쾌한 기분과 비슷하겠지. 끝도 없는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 발버둥 치지만, 오감이 막힌 데다가 숨조차 쉴 수 없는 느낌이다.

‘뭐지?’

미래에 소녀연맹은 비즈니스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미래의 성필이 내심 자찬할 정도라면 상상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이만한 후회를 가슴에 지니고 있는 건가?

‘애들이 일본에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해서?’

그건 아마 웨벡스와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백설하가 미친년처럼 싸웠다고 하니, 성필로선 상상도 하지 못할 사건이 터졌었겠지.

하지만 성필의 후회는 그것으로 향해 있지 않다. 물론 그것도 후회하고 있다. 미래의 리카는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중충했으니까.

자신감 자체를 잃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미래의 나는 리카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

아마 시간이 지나면 리카도 회복되리라 생각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거밖에 없다.

‘세이코란 사람.’

미래의 성필은 그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눈앞을 쓸었었다. 마치 아무것도 보기 싫다는 듯이.

현재의 성필도 그러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세이코란 이름을 곱씹을 때마다 진창에 처박힌 것만 같다.

“알겠습니다.”

성필이 고민하는 사이 히무라가 한발 물러났다.

“매니지먼트 권한은 가로 엔터와 공유하고 있으니, 저도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프로듀서인 박 이사님의 생각이 그러하시다면…….”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성필은 자세와 표정을 바로잡았다.

“경연에는 누가 나오는지, 어떤 형식인지, 또 역대 기록 같은 거요.”

후회할 미래를 보았다.

그렇다면 후회하지 않도록 바로잡아야겠지.

이 순간이 분기점이다.

‘사업의 방향과 관련해서 후회한 건 오랜만이야.’

가로 엔터에선 잃어버린 감각이지만, 석세스 엔터에 있을 적엔 너무나 자주 겪어서 일상이었었다. 성필은 그때의 경험을 살려 머리를 최대한 차갑게 만들었다.

‘배우를 어떤 작품에 출연시킬 것인가. 아티스트에게 어떤 곡을 줄 것인가. 스케줄은 어떻게 짤 것인가. 어떤 예능에 출연시킬 것인가…….’

익숙하지만 생소한 상황.

이 공기 속에서, 성필은 마치 전생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히무라도 갑자기 달라진 성필의 기세를 느꼈다. 성필은 몇 분 만에 오랜 세월로 벼려진 비즈니스맨이 된 듯했다.

“물론입니다. 다만,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꾸셨는지…….”

“동업자니까요. 실장님이 강권하신다면, 제게 설명한 것 외에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유야 차고 넘친다. 다만 성필의 태도가 너무나 강경했던 터라 빠른 시간 이내에 설명하려고 했을 뿐이다.

설득이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불리하다. 상대도 생각을 멈추는 게 아니라, 본인의 판단을 더욱 강화하니 말이다.

최대한 빠른 시간 이내에 논리를 쌓고 상대의 판단을 무너뜨리는 게 설득의 핵심이다.

‘마음을 바꾼 건 내 설득 때문이 아닌 거 같지만.’

뭐 어떤가.

“그럼 먼저, ‘뉴아사’에 나갈 다른 이유부터 말씀드리자면…….”

“잠시만요. 뭐 하나만 묻고 싶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세이코’란 사람을 아십니까?”

히무라는 의문을 드러냈다. 그 의문은 ‘나도 모른다’가 아니라, ‘세이코를 몰라?’란 뜻이었다.

“웨벡스의 간판 가수입니다.”

아니, 간판 가수였었습니다.

* * *

일본에 도착한 날은 소녀연맹에게 주어진 온전한 휴일이 되었다.

조아라는 그 휴일에 성필을 이끌고 도쿄를 돌아다녔다.

“아저씨 일본 운전면허도 있어요?”

“국제운전면허증이 있어.”

“오, 아저씨 뭔데. 무슨 에이전트 같네.”

“내가 바로 매니저의 귀감 아니겠냐.”

그런데 차선과 운전석이 반대라서 어지간히 불편한 게 아니었다.

자칫하면 반대편 차선으로 꼬라박을 것만 같아, 성필은 조아라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근데 아라야. 너 점점 말이 짧아진다?”

“뭐.”

“뭐?!”

“어쩌라고요.”

“이, 이이, 이, 배은망덕한……!”

“말이랑 다르게 표정은 안 바뀌는데. 의외로 나랑 반말하고 싶은 거 아녜요? 좋네, 탕탕탕 결정.”

“뭐가 좋아. 너 지금 가로 엔터와 한국의 위계질서를 부정하고 있거든?”

“옛날에 나 어린애로 안 대할 거라면서요. 그럼 어른으로 대해줘요. 빨리 반말 인정해요. 아저씨한테 반말 쓰고 싶어 죽겠어요.”

“난 너를 죽이고 싶은데 어쩌면 좋겠니?”

“빨간불.”

끼이익!

다급히 멈춘 터라 차가 앞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지인짜 아저씨도 못 쓰겠다. 운전을 10년 넘게 했는데도 신호등도 못 보네.”

“요시(좋아), 결정! 오늘이 아라의 제삿날이다! 육개장 무한 리필 전문점 개장!”

“아니 농담이 너무 심하잖아요?!”

“어른으로 대해달라며.”

“친구로 대하란 뜻은 아니거든요!”

“그럼 뭔데.”

“뭐, 뭐냐뇨.”

조아라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그냥 짜증스레 눈을 감았다.

“에휴, 아저씨랑 내가 뭔 대화를 나눌까.”

“아라야.”

“뭐요.”

“오늘 사무실 분위기 안 좋았었잖아.”

소녀연맹이 인사를 하는데도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멤버들은 그걸 그저 그렇게 넘겼고 말이다.

“오기 전에 무슨 일 있었어?”

“아, 티가 났구나. 쌤이 괜히 분란 일으키지 말자고 아저씨한텐 말하지 말랬거든요. 근데 아저씨도 눈치챘으면 뭐.”

조아라, 리더와 약속한 지 몇 시간도 안 돼서 약속 파기 선언.

“우리 숙소로 데려다준 매니저가…… 쓰읍, 좀 애매하거든요? 왜 일본인들 말하는 거 들으면 그렇다잖아요. 돌려 말하고.”

“리카가 옆에 없는 게 아쉽네.”

그럼 바로 ‘인종차별이야!’라고 외쳤을 텐데.

“내가 이해하기로는 ‘나대지 말고 처신 잘하라’는 투로 말했어요.”

“……뭐?”

“아니, 내가 해석한 거예요. 그 매니저가 말할 땐 당연히 세상 친절하고 따뜻했죠. 근데 아무리 되짚어봐도 ‘처신 잘해라’란 뜻 같거든요.”

미래를 보지 못한 성필이라면 당장 과대해석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를 보았으니, 조아라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히무라와 웨벡스의 갈등. 웨벡스 사람들이 소외당한 에스타스를 옹호. 그리고 소녀연맹에 대한 적개심…….’

모든 요소가 섞여 있다.

성필 홀로는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 벽들이다.

“또 회사 로비에서 뭔 배우인가 가수를 한 명 만났거든요. 그 여자는 진짜 과장 안 보태고 리얼로 개띠껍게 말했어요.”

“뭐라고 했는데?”

“아니, 이것도 직접적이진 않거든요? 근데.”

조아라는 팔짱을 끼고 고혹적인 태도를 취했다. 턱을 치켜들고 아래를 깔보면서.

“‘흐응’, ‘허어’, ‘으음’, 이러면서 막. 자기가 뭔 부잣집 따님 악녀 캐릭터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거예요. 저희 막 깔보고. 무슨 말인지 알겠죠?”

“대강 알겠다…….”

전생의 조아라를 떠올리니 쉽게 이해가 됐다. 전생의 그녀도 ‘일상적이지 않은 매우 특수한 상황’에서 깔보는 태도를 취하곤 했었으니까.

“아저씨 또 뭐요.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요.”

“아냐. 아라 연기 잘하네. 나중에 부잣집 따님 악녀 캐릭터로 연기해도 되겠다.”

실제로 조아라가 배우로 데뷔한 작품에서 맡았던 배역이 그러한 캐릭터였다.

조아라가 얼마나 실감 나게 연기했던지, 드라마 팬들이 조아라의 얼굴을 악녀의 표본으로 등록할 정도였다.

“그죠? 나 사람 깔보는 거 잘할 거 같아요. 당장 아저씨도 깔볼 수 있는데.”

“……그래.”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운전을 하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

주차장에서 내리자마자 조아라가 감탄을 흘렸다. 사각 케이크처럼 넓은 4층의 건물. 도쿄에서 가장 크다는 댄스 스튜디오가 있는 곳이다.

스튜디오의 이름은 ‘레드원’이다.

둘은 레드원이 입점하고 있는 2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내리자마자 레드원의 안내 데스크가 있었다.

안내원이 미소를 지어주고 용무를 묻자마자 조아라가 신나서 대답했다.

“데일리 클래스 신청할게요. 어반 스타일이요.”

“데일리 클래스 어반 스타일, 알겠습니다. 가장 가까운 건 30분 뒤입니다만, 어떡하시겠습니까?”

“그걸로 해주세요.”

레드원에는 하루만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상품도 존재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온갖 종류와 기한의 수업이 안내원 뒤의 안내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신기하네. 이 정도면 일반인도 호기심에 몇 번 올 수도 있겠다.”

“그죠? 한국에도 이런 거 있으면 좋겠다.”

조아라는 춤이 대중화된 한국을 꿈꾼다.

뉴욕처럼 아무 건물이나 들어가면 연습실이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춤이 활성화된 나라를 말이다.

옛날에 지나가듯이 말하길, 아이돌을 관두면 학원을 열 거라고 했던가.

“두 분 맞으신가요?”

“네, 두 사람이요.”

“어?!”

성필이 기겁하자 조아라는 재빨리 카드를 꺼내 결제하려 했다. 성필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아저씨도 왔는데 한 번 해봐요. 혹시 알아요? 아저씨가 아이돌 춤에 재능이 있을지.”

“없어!”

사실, 있다.

성필은 춤을 꽤 잘 춘다. 전부 전생의 조아라 덕분이지만 딱히 고맙진 않다.

“언니 빨리 계산해줘요!”

조아라는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했다.

성필의 눈동자에 갈등이 수도 없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한숨을 쉬곤, 조아라의 손에서 카드를 빼앗았다.

“네 용돈 이런 데 쓰지 마. 내가 계산할게.”

“됐어요. 내가 놀려고 온 건데요 뭐.”

“계산이요.”

결국 계산은 성필의 카드로 했다. 조아라는 그게 못내 미안한지, 평소에는 박하디박한 ‘미안하다’란 말까지 했다.

“갑자기 왜 그래. 나한테 뭐 얻어먹든 아무런 가책도 없었으면서.”

“나도 이제 어른이잖아요. 아저씨한테 어른으로 대우해달라고 했는데, 뭐 할 때마다 아저씨 돈 쓰는 건 좀…….”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더 내는 거지.”

“그럼 정산받으면 내가 아저씨 거 다 사줘야겠네요?”

“부럽다 아이돌! 나도 과거로 돌아가면 아이돌이나 할까.”

“아저씨가? 참 잘 되겠네요.”

성필이 조아라의 뒷목을 손날로 가격했다. 그녀는 쓰라린 목덜미를 문지르면서 수업이 시작될 연습실로 향했다.

그러던 도중, 복도 의자에 앉은 어느 남자에게 시선이 꽂혔다.

“아저씨.”

“응?”

“저거, 리카 동생 아니에요?”

진짜다.

리카의 동생, 이시카와 유우토가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조아라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유우토의 앞으로 다가갔다. 성필이 말릴 새도 없었다.

유우토는 갑자기 그림자가 지자 고개를 위로 들었지만, 금방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이. 네놈, 유우토 맞지?”

“아, 아뇨. 사람 잘 못 보셨습니다.”

“맞잖아.”

“아니에요…….”

“계속 거짓말할래?”

“자, 자꾸 이러시면 직원분한테 말할…….”

“똑바로 말 안 하냐 잔챙이 새꺄!”

“흐이익 죄송합니다!”

유우토가 한국의 일진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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