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잘못 봤겠지.”
“응…….”
김채현은 이선주를 계속해서 위로했다. 이선주는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공연장으로 들어오는 도중에도 자꾸만 떨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진소유, 혹은 진소유를 무섭도록 닮은 그녀의 눈빛은 짐승과 닮았었다. 어딘가 먼 곳, 인간으로서는 닿을 수 없는 장소를 응시하는 짐승의 것과 같이 어두웠다.
이선주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인간에게서 짐승을 보았다.
“소유가 왜 여깄겠어? 그냥 닮은 사람이야.”
“그럴까……?”
“그래. 1학년에도 글로브 걔, 누구냐, 암튼 걔랑 똑같이 생긴 애 있잖아. 그런 사람이겠지.”
“……부럽다.”
“푸흨, 그렇게.”
이선주는 조금은 기운을 차린 모양인 듯 농담까지 했다.
“소유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니까, 인생 사는 게 얼마나 재밌을까?”
“매일 거울만 봐도 안 질릴 듯.”
“그러게.”
아무리 봐도 방금 마주친 그 여자는 진소유 같았다. 하지만 진짜 케이어스 진소유라면, 사람을 상대로 그토록 차가운 얼굴을 하진 않을 것이다.
아이돌이지 않은가.
정체가 밝혀지면 웃어도 모자랄 판에 죽일 듯이 쳐다볼 일은 없겠지.
“근데 나 진짜 무서웠어. 갑자기 그 사람이 머리채 잡거나 할까 봐.”
“어, 나두. 옆엔 남자친구였을까? 그 사람은 착해서 다행이다.”
“아으, 어떡해. 세탁비라도 드렸어야 했는데. 그냥 왔네.”
“앞으로 만날 일 없을 거잖아. 그 사람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잊어버려. 오늘 소녀연맹 보잖아. 자꾸 꿍해 있을래?”
“……응.”
이선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소련이들 응원해야지!”
“그래. 폰 용량 비워뒀지?”
“모찌론(당연)!”
오늘 학교까지 조퇴하고 이곳에 온 이유는 오로지 소녀연맹뿐이다. 괜히 기분이 안 좋아서 소녀연맹의 무대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면 본인 손해일 것이다.
‘그래, 앞으로 만날 일도 없을…….’
“너무 멀잖아요. 가까이 못 가요?”
“어, 어쩔 수 없지. 늦게 들어왔잖아. 앞줄에 가려면 일찍 왔어야 해.”
만났다!
이선주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객석의 외곽이라 중심부의 열기에 소외된 듯하지만, 그나마 쾌적한 게 장점이던 자리인데.
아까 아이스크림을 가슴에 박아버린 사람과 바로 옆에 자리하게 됐다. 여기서 더 물러나면 소녀연맹이 면봉보다 훨씬 작게 보일 터라 자리도 못 옮기겠다.
“채, 채현아아…….”
“모른 척해. 없는 사람 취급해. 아무리 성깔이 더러워도 연예인이니까 대놓고 뭐라곤 못할 거야.”
“……아까는 소유 닮은 사람일 거라면서?”
“상식적으로 그딴 일이 있을 리 없잖아! 걍 옆으로는 눈도 돌리지 마!”
그런데 곧 돌릴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얘들아, 미안한데 잠시만 너희들끼리 있을래? 나 화장실 좀.”
진소유와 진저의 보호자인 신태웅이 자리를 비운 것이다.
두 사람만 남기를 잠시, 어느 남자가 그녀들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저기, 제가 이런 말 하는 건 정말 처음이거든요. 정말 용기 내서 온 건데요. 보니까 너무 제 스타일이시라 그런데 혹시 번호 주실 수 있을까요?”
이런데 어떻게 안 보겠냐고.
* * *
진저는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렸다. 설마 신태웅이 사라지자마자 이런 난관이 오다니, 예상치도 못했다.
‘어, 어떡하지?’
진저는 펑퍼짐하고 후줄근한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몸의 굴곡도 드러나지 않고, 머리에는 두건에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같이 썼다.
직설적으로, 진저는 수상하고 이상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소유는 다르다. 그녀는 달라붙는 크롭티에 스키니진, 거기에 도발적인 힐과 백까지 구비한 상태이다.
비록 알이 큰 선글라스가 그녀의 얼굴 절반을 가렸지만, 하관만 보이더라도 미녀임을 의심할 사람은 없으리라.
지나가기만 해도 사람들의 시선이 자동소총처럼 박히니, 번호를 따여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진저는 25살의 언니를 향해 불안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진소유는 대답도, 행동도 없었다.
“……저기.”
객관적으로 보아도 미남임이 분명한 남자는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와 핸드폰을 내밀었다.
“정말 제 이상형이시라서요.”
진소유는 팔짱을 낀 채 정면만 바라보았다. 마치 남자가 없다는 투였다.
차라리 모기가 옆을 돌아다녀도 그 남자보다는 관심을 더 많을 받을 듯했다.
“저기요? 대답이라도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런데 남자는 모기보다도 훨씬 끈질겼다. 최소한 진소유가 ‘아니’라고 말하기 전까진 떨어질 기색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신태웅에게 신신당부를 받았었다. 절대 목소리를 노출하지 말라고 말이다.
진소유의 신분이 드러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로써 일어날 혼란이 문제다. 이목이 다 이쪽으로 쏠릴 테니, 축제 측에도 실례이지 않은가.
“저기…….”
진소유는 묵묵부답. 남자가 그녀의 관심을 끌려 더 가까이 다가간 순간.
“어, 언니 남자친구 있어요!”
옆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이선주가 난입했다.
“네?”
남자는 이선주의 등장에 당황하더니, 그녀와 진소유를 번갈아 보았다.
“일행…….”
“네, 네! 언니 남자친구 있어요! 지, 지고지순해서 다른 남자랑은 말도 안 섞어요!”
“아…….”
“언니가 싸가지없는 건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이선주의 필사적인 변호에, 남자는 납득하지 않으면서도 머쓱 고개를 숙인 뒤 자리를 떴다.
이선주는 100m 달리기라도 한 듯 거칠어진 숨으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잡덕이긴 해도, ‘유스’로서의 사명감을 지니고 진소유를 지킨 것이다. 옆에선 실시간으로 김채현이 이선주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이선주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사과를 한 뒤, 진소유에게서 몸을 돌렸…….
“‘유스’?”
움찔.
이선주가 진소유를 보자, 그녀는 선글라스를 살짝 올렸다.
“음.”
진소유는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린(林), 종이랑 펜 있어?”
진저가 손가락으로 X 표시를 만들었다.
“그래, 아쉽네요. 사인이라도 드리고 싶었는데.”
“있어요! 저 있어요!”
이제 확실해졌다.
그녀는 진소유 닮은 사람이 아니라 진소유 그 자체다.
이선주는 백팩에서 허겁지겁 노트와 펜을 꺼내 진소유에게 내밀었다.
진소유는 복잡한 수학식이 적힌 노트를 몇 장 넘기더니, 공백에 자신의 사인을 유려하게 써 내려갔다.
“여기요.”
“가,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용서해드릴게요.”
“……네?”
진소유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곳엔 말라붙은 소프트아이스크림 자국이 있었다.
이선주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곤, 다시 김채현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야, 야, 진짜, 소유야?”
“으, 응. 그런가 봐…….”
이선주는 노트를 확인했다. 수학 풀이 과정의 옆에는 진소유의 사인이 0.38밀리 볼펜으로 가늘게 쓰여 있었다.
밑에 사족까지 덧붙여서.
[지고지순하고 4가지 없는 소유♡]
“…….”
좋아해야 하나?
좋아해야…… 겠지?
* * *
소녀연맹의 컴백 타이틀곡 중 하나, ‘보라색 튤립’의 전주가 시작되자 사방에 함성이 들끓었다.
그에 진저는 천둥이라도 친 것처럼 몸을 거세게 떨었다. 그녀의 고막에 꽂히는 수천 명의 함성은 커다란 스피커에서 퍼지는 음악보다도 더욱 선명하고 강렬했다.
‘대단하다.’
진저는 무대를 향해 소리치는 쪽이 아니었다. 적어도 한국에 오고 나선 무대에 서서 열광을 받는 쪽이었다.
관객석의 열기를 느끼는 건 생소하며 신기한 경험이었다. 또한 가슴에 불이 지펴진 듯한 흥분이 감돌았다.
“진저, 너 그거……?”
진저의 가방에서 나오는 물건을 보자, 신태웅이 아연하게 질문했다.
“샀슴미다.”
“아, 그래, 샀구나…….”
그 물건의 정체는 소녀연맹 응원봉이었다. 횃불을 형상화한 공식 응원봉은 진저의 손에 아담히 자리하는 크기였다.
“이게, 이렇게…….”
진저는 자신의 핸드폰과 응원봉을 블루투스로 연결하고, 전용 앱을 실행하여 응원봉의 불을 밝혔다.
여름인지라 해가 밝게도 떠 있어 불빛 따위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지만, 분위기란 게 있는 법이다.
진저의 응원봉은 불꽃과 같은 붉은색으로 햇볕 아래 환히 타올랐다.
그리고.
“밤밤 밤바라 밤밤, 튤립!”
진저는 ‘보라색 튤립’의 공식 응원법을 피가 맺히도록 외쳤다.
당연히 관객 중엔 소녀연맹의 팬인 ‘인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응원 구호까지 전부 외운 팬은 극히 적었으며, 이런 자리에서 외칠 리도 없다.
그렇기에 진저의 응원은 주변에서도 이질적으로 느껴지기 충분했다. 신태웅이 부끄러움을 느끼기에도 충분했고.
“유 어 온리 원 댓 아이 러브!”
“…….”
신태웅은 이 작은 중국인 소녀를 대하는 게 점점 어려워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세상에, 아이돌이면서 아이돌 팬이라니. 이미 환상 속에 살고 있으면서 환상을 탐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진저는 주변에서 이상하게 여기는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그나마 면봉보다 살짝 큰 크기로 보이는 소녀연맹을 바라보며 행복에 젖을 뿐이었다.
‘이런 기분이구나.’
팬이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진저는 이 순간, 소녀연맹과 진한 일체감을 느꼈다.
만약 소녀연맹의 콘서트를 가게 된다면, 팬과의 일체감도 느낄 수 있겠지.
비록 이곳엔 인민이가 없는 것 같…….
“밤밤 밤바라 밤밤!”
그때 바로 옆에서 ‘보라색 튤립’ 응원 구호가 들려왔다. 진저가 깜짝 놀라 그쪽을 보자, 마찬가지로 응원봉을 들고 있는 김채현이 눈에 들어왔다.
김채현은 원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었다. 대학 축제까지 와서 응원봉을 들고 구호를 외치기엔 창피하지 않은가.
하지만 진저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고, 서로를 향해 동지애가 가득 담긴 미소를 교환했다.
김채현의 옆에 있던 이선주는 부끄러워서 그녀와 살짝 떨어진 채였다. 이선주는 아직 김채현만큼 용기가 있지는 않았다.
“‘아니’다!”
두 번째 곡은 소녀연맹의 데뷔곡인 ‘아니’였다. 특유의 밝은 분위기로, 무대 행사에서 선보이기 가장 좋은 곡이었다.
반면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김채현은 사람들에게 호응이 없을까 걱정했지만, 역시 공연의 분위기란 게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아니’의 밝은 에너지에 이끌려 흥겹게 공연을 즐겼다. 그것을 보자 인민인 김채현이 다 뿌듯해졌다.
‘잘하네…….’
댄스 트레이너인 신태웅은 소녀연맹의 무대 자체를 보기보다 그녀들의 댄스에 집중했다.
그중에서도 조아라에게 관심이 갔다. 미국의 댄스 아카데미에서 본 바로, 조아라는 춤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때도 나이에 비해 월등한 실력이라 생각했는데, 이젠 춤에 여유와 개성까지 붙었다. 확연히 데뷔 때보다 나아진 모습이다.
‘쟤는 아이돌이 아니라 댄서를 했으면…….’
신태웅은 한때 무대에 서는 플레이어를 꿈꿨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한계를 느끼고 트레이너로서 정착했다.
그렇기에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
‘댄서를 했으면…….’
아니, 이런 생각을 해서 뭐 하는가.
조아라는 어느 분야에서든 재능이 있던 것일 뿐이다. 굳이 어느 쪽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아이돌로서의 자질도 뛰어나지 않은가. 신태웅 자신조차 무심코 춤에서 눈을 떼고 무대 자체를 즐기게 할 정도면 말이다.
‘소유는 즐기고 있나?’
오늘 이곳에 온 건 진소유의 요청 때문이다. 거기에 진저가 곁다리로 온 데 불과하다.
과연 이곳에 오자고 말한 장본인인 진소유는…….
‘어?’
진소유는 평소보다 더 싸늘한 무표정으로 소녀연맹을 바라보고 있었다. 척 보아도 기분이 좋은 것 같진 않았다.
* * *
[입실렌티 체이홉 카시코시코시코 칼마시 케시케시 고려대학 칼마시 케시케시 고려대학!]
마이크를 통해 울리는 고려대학교 교호. 그것을 말하는 장하양의 목소리에선 기쁨이 묻어났다.
소녀연맹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교호를 틀리지 않고 외치는 챌린지를 하는 중이었다.
장하양은 무사히 교호 제창을 마치자, 자신이 제대로 했음을 확인받은 뒤 한껏 기쁨을 표했다.
자신은 머리가 안 좋아서 매일 보면서 연습했다니 뭐니, 다분히 서비스 정신이 가득한 멘트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하양아.’
진소유는 불쾌감을 느꼈다.
아까도 장하양의 표정을 보면서 생각했지만, 장하양은 정말로 무대에 서고 관객들과 교감하는 걸 즐기는 듯했다. 아무리 봐도 연기가 아니다.
그게 불쾌했다.
‘정말 지금 재밌니? 행복해?’
사람들에게 애교를 떨면서 웃음을 얻는 게 그렇게나, 진심으로 기쁜 건가?
진소유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본인과 비슷한 처지였을 게 분명한 장하양이, 생판 모르는 타인의 사랑을 갈구하며 그것으로 행복을 느낀다는 게 말이다.
불특정 다수의 환호와 사랑으로 자존감을 채우는 게 진정으로 가능한가?
자신이 사랑받을 것을 의심치 않고 살아온 인간이라면 가능하겠지. 주어지는 사랑을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에리카 같은 사람이면.
‘그런데 넌 그러면 안 되잖아.’
무대에서 웃음으로 팬들에게 맞춰줄 수 있다. 그게 아이돌의 일이니 당연하다.
그런데, 진심으로 좋아하면 안 되잖은가. 값싸게 얻는 사랑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광대짓으로 얻어지는 관심마저도 진심으로 기뻐할 만큼 사랑에 굶주려 있나. 혹은 정말 머리가 나빠서 대중의 사랑이 지닌 가치를 높이는 건가.
‘어차피 네가 조금만 달라지면 손바닥 뒤집히듯 바뀔 것들인데.’
그런 값싸고 변동 가능성이 높은 것에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기뻐하는 건 너무 멍청하잖아.
주식에 애정을 주는 것만큼이나 멍청하다.
“소유야,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어?”
신태웅의 질문에도, 진소유는 장하양을 보면서 입을 다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소녀연맹의 차례가 끝나고 무대는 잠깐의 휴식을 맞게 되었다.
벌써 몇 시간이나 서 있던 관객들은 피로를 호소하면서 앉거나, 혹은 무엇이라도 기댈 곳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였다.
갑자기 이지러지는 인파에 진소유와 진저, 신태웅도 각자 조금씩 떨어지게 되었다. 신태웅은 조금 당황했지만, 이 물결이 조금 가라앉고 나서 합류하면 될 것이니 걱정하지는 않았…….
“안녕하세요.”
바로 걱정할 게 찾아왔다.
어떤 남자가 진소유에게 말을 건 것이다.
자신은 위험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웃는 얼굴과 힘을 빡 준 머리와 옷. 진소유에게 접근한 그의 의도는 누가 보아도 명확했다.
“잠시만요……!”
신태웅은 회사에서 교육받은 대로 곧장 이 위험을 제거하려 했다. 진소유와 자신 사이에 놓인 몇 명의 사람을 헤치고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저 혹시 연락처 좀…….”
큰일 났다.
회사 사람에게마저 차갑고, 더 나아가서 띠껍단 평가를 받는 진소유라면 어떤 짓을 벌일지 몰랐다.
솔직히, 신태웅은 진소유가 상대를 향해 ‘꺼져라’라고 하더라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소유가 짜증을 내기 전에 빨리…….
“어?”
진소유가 선글라스를 벗고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
남자는 진소유의 눈빛을 받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폰마저 떨어뜨렸다.
진소유가 무표정으로 물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남자는 입만 살짝 벌린 채 대답도 못 했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났다.
광고를 한 것도 아닌데 주변에서 시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언의 눈빛은 곧 웅성거림으로 바뀌고, 이내 소란으로 나아갔다.
사방에서 ‘소유’, ‘케이어스’라는 단어가 돌아다녔다. 이윽고 진소유가 이 장소에 나타났다는 게 사방으로 알려지기까지, 고작 20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젠 굳은 것을 넘어 떨기까지 하는 남자를 향해, 진소유는 비웃음인지 모를 것을 날리곤 걷기 시작했다.
선글라스를 다시 쓰지 않은 채로.
“트레이너님, 가요.”
이 인파를 뚫고, 나가자고?
하지만 신태웅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진소유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주변의 인파가 홍해처럼 갈리기 시작했다.
진저와 신태웅은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만 가면 될 뿐이었다.
진소유는 걸었다. 그녀의 뒤로 아우라가 혜성의 꼬리처럼 흩뿌려졌다.
사방에서 환호와 감탄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진소유는 그 흔한 미소 한번 없이 담담히 나아갔다.
마치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듯이.
‘괜히 보러 왔어.’
* * *
신태웅은 회사로 돌아오자 진이 다 빠졌다.
스탠딩석에서 몇 시간을 보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야 연예인 얼굴을 보는 게 어려우니, 그런 고통도 감내하고 몇 시간도 버티겠지만.
‘나야 회사에 오면 질리도록 보는 게 연예인이니까.’
가수나 보자고 몇 시간의 고통을 버티기란 힘들고, 또 여간 지겨운 게 아니었다.
물론 그에게도 수확은 있었다.
‘소녀연맹 무대는 좋았지.’
그는 신인개발팀에 적(籍)을 두고 있었다.
신인개발팀은 A&R팀이나 비주얼팀과 연이 있는 편이다. 회사의 프로듀싱 의도에 맞춰 신인을 뽑고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A&R팀이 소녀연맹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자주 들었다.
‘왜 대형 기획사도 아닌 회사 밖 아이돌에 관심을 그렇게 가지는가 했더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퍼포먼스 하나하나가 마치 시상식 무대라도 고려한 것처럼 대단했다. 평범한 무대 행사에 올리는 게 낭비라는 생각이 들 만큼이나.
회사 화장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면서 오늘 보았던 무대를 복기하고 있자니.
“애들 잘 보고 왔어요?”
갑자기 정호환 이사가 나타났다. 신태웅은 깜짝 놀라서 손을 씻던 것도 잊어버리고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하던 거 해요.”
“네, 네. 감사합니다.”
정호환은 방금 식사를 했는지 입 안에 가글을 털어 넣었다.
신태웅은 최대한 빨리 비누로 손을 박박 문질렀다. 그러던 도중, 가글을 마친 정호환이 친근한 투로 물었다.
“진저랑 많이 친해졌나 봅니다.”
“아, 예, 예. 그런 편인…… 미국에도 같이 다녀와서…… 예.”
“다행이네요. 진저랑 소유는 좋아하던가요?”
진소유는 잘 모르겠지만, 진저는 응원봉까지 챙겨 들고 와선 영혼을 다해 무대를 즐겼었다. 그 이야기를 해주니 정호환이 호탕하게 웃었다.
“시간을 빼준 보람이 있었네요.”
“하하, 예.”
신태웅은 푸근한 인상의 정호환을 보았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에선 푸근함과는 정반대인 정호환의 모습이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그였다. 아니, 당장 5, 6년 전만 해도…….
“진저도 많이 밝아져서 마음이 놓입니다.”
“예. 이사님도…….”
많이 밝아지셨어요.
“저도…… 뭔가요?”
“아, 아닙니다.”
“허허, 태웅 씨 상사들 말 아무거나 맞춰주는 버릇이 들었네.”
“하하, 하…….”
정호환은 핸드타월로 손을 닦더니 신태웅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신태웅은 화장실을 나서는 그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사님도 많이 달라지셨어. 정말로.’
과거의 그였다면, 진소유나 진저가 공연 따위에 가는 건 허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들이 망가지는 걸 봐서겠지…….’
케이어스의 오랜 선배 그룹.
2세대의 정점을 찍었던 그 보이그룹은 KS 엔터의 상징이자 자랑이었다. 또한 정호환의 명예를 드높였으며 그의 능력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켰다.
KS 엔터를 무너지지 않는 금자탑에 올려두었지만, 정작 그 그룹의 멤버들은…….
‘생각하지 말자.’
정호환은 달라졌다.
수석 프로듀서였던 윤상열도 사라졌다.
케이어스는 그들과 같은 전철을 밟진 않을 것이다.
* * *
사무실의 모두가 퇴근한 시각. 경리 권아인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서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와악!”
“끼아아아아악!”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소리치자 권아인은 전기충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벌벌 떨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미안해 죽기 직전의 리카가 있었다.
“고,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리리, 리리리, 리리, 리카, 리카 씨……?”
리카는 권아인이 말마저 더듬자 더욱 미안했다.
“이, 이렇게 놀라실 줄 몰라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안 그럴게요…….”
“아, 아녜요. 저 완전 괜찮아요.”
전혀 안 괜찮은 거 같다.
“뭐 하시나요?”
“아, 이거…….”
권아인이 보고 있던 서류를 리카에게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각종 세무, 회계 관련 자격증의 목록이 있었다.
가장 말미에는 이 분야의 끝판왕인 세무사, 회계사 자격증마저 있었다.
“오늘 한 이사님이 주셨어요.”
권아인이 아무런 걱정도 없이 싱글벙글 업무를 하고 있던 도중, 평소와 다른 표정의 한구인이 그녀를 응접실로 불렀다.
그러곤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인 씨만 괜찮으시다면 이 자격증들을 따길 추천 드립니다. 연봉협상에 적극적으로 반영될 겁니다.’
한구인의 말인즉슨, 권아인이 지금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바란다면 스펙업을 하란 뜻이었다.
물론 지금 이대로도 아무런 불이익은 없다. 연차에 따라 연봉도 착실하게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추후 가로 엔터가 성장하면 승진이나 업무 분담에 차별점이 생길 겁니다. 그러니까…….’
권아인보다 연차는 낮겠지만 스펙은 높은 이들과 비교해서 말이다.
그의 말을 듣고 권아인은 충격에 빠졌었다. 그녀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그다지 생각해본 경험이 없었다.
상고를 졸업한 만큼 특기를 살려서 계속 살아갈 거라고만 생각했다. 5년, 10년, 20년 뒤의 일 따윈 고민한 적도 없다.
“……저기.”
권아인의 고민을 들은 리카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이거, 모시카시테(혹시), 토사구팽하겠단 뜻인가요……? 나중엔 대체하겠다는……?”
지금이라도 스펙을 올려두지 않으면, 후일 더 스펙이 높은 이들로 본인의 자리가 대체될 줄 알아라.
이런 뜻이 아닐까?
리카는 드라마에서 보았던 온갖 블랙 기업을 떠올리면서 공포에 떨었다. 그리고 그녀는 공포에 떠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일어나서 결연히 외쳤다.
“아타시(제)가 이 부당한 조치에 항의해볼게요!”
“아,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에요!”
“이게 어떻게 아닌가요! 아인 언니(리카랑 나이 같음)는 아직 사회의 무서움을 모르는 거예요! 이건 한 이사님의 간접적인 압박이라구요!”
“그게, 그치만…….”
한구인은 권아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독학사나 사이버 대학 비용을 지원해주겠다고 말했다.
“한 이사님이요?! 그, 그거 대가를 바라는 개인적인 후원 행태……!”
“당연히 회사 차원이죠?!”
물론 권아인이 새로운 자격증 취득으로 본인의 노력과 열정을 증명해야만 했다.
“회사에서 대학을 지원해준다구요?!”
“네. 또, 저는 2년 채우고 정직원 되는 것도 약속받았으니까…….”
가로 엔터는 대체 어떤 회사일까. 이 정도면 살아 있는 복지기구가 아닐까?
“최종적으로는 회계사 자격증을…… 따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구요…….”
회계사 자격증은 관련 대학 강의 학점이 필요하다. 그래서 회계사에 도전하는 이들은 대다수가 대졸자들이다.
독학사나 사이버 대학으로 관련 학점만 취득하고 회계사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다.
애초에 회계사란 게 되기만 하면, 어떤 대학이든 현수막을 걸어줄 만큼 난이도가 높은 시험을 거쳐야만 한다.
그런데 가로 엔터는 권아인에게 그것을 지원해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인재를 뽑는 게 아니라…… 만들어……?’
하긴, 가로 엔터는 소녀연맹을 만들 때도 연습생을 여러 명 뽑아서 그중에서 고르지 않았다.
딱 그룹으로 길러낼 이들만 뽑았었다. 그걸 직원들에게 적용한다 해도 이상한 건 아니…….
“이상해!”
“네?”
“이건 다시 없을 기회잖아요! 반드시 잡아야 해요! 지금부터라도 노력해서 꼭 가로 엔터에 남으세요!”
리카는 확신했다.
이런 기업 다시 없다!
“그, 그렇겠죠…….”
권아인은 수많은 자격증 명단을 보더니, 의지를 굳힌 듯 다부진 눈빛을 띠었다.
“오늘부터라도 조금씩 공부해야겠어요.”
평소엔 퇴근해서 예능이나 드라마 보는 것을 낙으로 삼았지만, 오늘부터는 최소 한두 시간씩이라도 공부해야겠다.
“잘 생각했어요! 그럼 어떤 것부터 도전하실 건가요?”
“세무사요.”
“갑자기 허들이 너무 높은데요?! 대졸자도 고전하는 시험이잖아요!”
“아, 그럴까요…….”
“하, 하지만 언니(동갑)는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음, 그럼 세무회계 2급부터 따야겠어요. 3급은 고딩 때 땄으니까요.”
그렇게 권아인은 용기를 얻고 퇴근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리카 씨는 왜 오셨어요?”
“아, 소다(맞다)! 박 이사님 어디 계세요?”
“박 이사님은 왜요?”
리카가 수줍게 웃었다.
“저희 내일 일본 가잖아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인사라도 드리려구요.”
* * *
성필은 하등 쓸모없는 자부심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다른 야근자가 있으면 은근히 불편했다. 왠지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는 듯한 어린애 같은 마음…….
‘오늘 아인 씨 야근하시려나? 특이하네.’
성필은 퇴근 시각이 되어도 남아 있는 권아인을 보곤, 사무실에서 자리를 옮겨 응접실로 왔다.
노트북을 보면서 여러 프로듀싱 자료를 정리하던 중, 소녀연맹 멤버 중 한 명을 맞아들였다.
리카였다.
“헤헤, 이사님.”
리카는 어쩐지 수줍은 투로 응접실로 들어와 지그재그 동선을 그렸다. 마지막 종착지는 당연하게도 성필의 앞이었다.
성필은 노트북을 닫고 리카를 향해 진한 미소를 띠었다.
“어, 리카. 왜?”
“내일 저희 일본 가잖아요! 마지막 인사드리려고 왔어요!”
“무슨 마지막 인사야. 내일 너희 배웅 갈 텐데.”
“그래도요!”
성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리카의 기특한 마음을 보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자신의 몰래카메라가 잘 먹혔음을 확인해서기도 했다.
‘내일 공항에서 밝히면 깜짝 놀라겠지.’
내일은 소녀연맹이 드디어 일본으로 떠난다.
성필은 공식적으로 일본에 따라가지 않기로 했었다. 지독하게도 일본 동행 사실을 숨겨온 것이다.
오로지 몰래카메라로 멤버들을 놀라게 해주겠단 일념 하나로 말이다.
“앞으로 세 달 동안 못 보…….”
갑자기 리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울음을 참을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크흠.”
리카는 헛기침을 한 뒤, 살짝 물기가 맺힌 목소리로 말했다.
“세 달 동안 못 보니까요! 일하는 중이어도 마음껏 실례할래요!”
리카가 성필의 옆에 턱 앉았다.
“저, 일본에서 꼭 스타가 돼서 돌아올게요!”
“응. 꼭 할 수 있을 거야. 외국 가서도 기죽으면 안 돼.”
“아타시(저)는 일본인이라구요!”
“세계시민이라면서?”
“……일본인이면서 일본인이 아니에요! 만국인이자 그 어느 나라의 국민도 아닌 것처럼요!”
시답잖은 이야기를 이어가던 리카는 어느 순간부터 말수가 팍 줄었다.
잎에 맺혀가던 안개가 물방울로 고여 떨어지는 것처럼, 리카의 목소리도 뚝 떨어졌다.
“이사니임…… 같이 와 주시면 안 되겠죠……?”
“미안.”
“으, 차가워요…… 제 심장이 얼어버리겠어요…….”
“나도 마음 아파. 대신 전화 자주 하자.”
“꼭이에요……. 바쁘다고 안 받으시면 안 돼요…….”
“응.”
리카는 더는 일을 방해하지 않겠다면서 깔끔하게 일어났다. 그녀는 작별 포옹을 하곤, 해병대 출신 성필을 거슬리게 만드는 불완전한 경례를 마친 뒤 응접실을 나섰다.
5분 뒤, 멤버들끼리 무슨 얘기라도 한 것인지 순번을 바꾸듯 백설하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아니.”
“네?!”
“농담이야. 들어와.”
백설하는 헤어지기 전날까지 자신을 놀리냐는 듯 뚱한 표정이면서도, 착실히 성필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
“드디어 일본이네요.”
“그러게. 참 길었지.”
“조금 기뻐 보이시는데?”
“내가? 전혀.”
“……하하. 저 여기 오기까지 할 말 되게 많았는데 다 잊어버렸어요.”
“설하야.”
“네?”
“가서도 애들 잘 부탁할게. 내가 없어도 잘할 수 있지?”
그 순간, 백설하는 섭섭한 티를 전부 지워버리고 눈동자에 의지를 새겨 넣었다.
프로듀서인 성필과 떨어지는 일이 이번만으로 끝날 리 없다. 멤버들이 믿고 따르는 성필이 없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백설하의 것이 되어야 한다.
“네.”
백설하는 소녀연맹의 리더로서, 외국에서도 멤버들의 버팀목이 돼주어야 한다.
아마 한국에서보다 힘들 것이다. 성필이 없으니 멘탈적인 부분으로 도움도 받지 못하겠지.
그럼에도 해낼 것이다.
“믿고, 맡겨두세요.”
“응, 고마워. 네 덕에 나도 마음이 놓여. 설하 없으면 내가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
“하, 하하…… 저 없으셔도 잘 사셨을 거예요…….”
“아닌데. 설하 없음 못 사는데?”
백설하는 대답하지 않고 쭈뼛쭈뼛 고개만 숙이며 방을 나섰다.
다음 차례는 조아라였다. 그녀는 마지못해 이곳에 왔단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쌤이 오래서 왔어요.”
“응, 이제 가.”
“죽여버릴까?”
막상 성필이 차갑게 대하자 기분이 상한 조아라는 괜히 머리칼을 꼬았다.
“뭐, 나 가는데 아쉽지도 않아요? 한의사님은 목 막혀서 말도 제대로 못 하던데.”
그야 성필은 일본으로 따라갈 거니까 슬픔으로 목구멍이 막히는 일 따윈 없다.
“뭐, 별로?”
“아니, 진짜? 리얼로?”
“다 큰 성인끼리 왜 이래. 징그럽다 야.”
“아니…….”
조아라의 입매가 움찔거렸다. 단단히 비위가 상한 듯했다.
“장난치지 말고…… 하아. 나는요, 좀, 솔직히, 약간은…….”
“뭐래. 너 오늘따라 왜 이래? 앞으로 몇 번이나 이런 일 있을 텐데. 그때마다 이러게?”
“아니 이번엔 처음이잖아요. 세 달이나 떨어지는 거, 회사 떠나는 거…….”
“하이고 그만해라. 나 소름 돋았다.”
조아라의 입꼬리가 쭉 내려갔다. 부정적인 감정을 억지로 참는 듯했다.
“왜 나한테만…….”
조아라는 벌떡 일어나서 나가려 했다. 그때 성필이 그녀를 불렀다.
“아라야, 왜 안 섭섭하겠냐.”
“……뭐요.”
“그냥, 나도 네 마음 알고, 나도 그런데, 괜히 슬퍼하면 그렇잖아. 네 말대로 세 달이나 헤어지는데 웃으면서 보내자.”
성필은 세상의 모든 쓸쓸함을 담아 미소를 지었다. 마치 울음이라도 참는 것처럼.
그의 처량한 미소를 본 조아라는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아까 성필에게 했던 말이 무색하게도 싸늘해졌다.
“뭐래…….”
그러곤 갑작스레 따스해진 분위기를 견딜 수 없는지, 창피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가버렸다.
막상 원하는 대로 해주면 부끄러워할 거면서.
다음 차례는 장하양이었다. 그녀는 다른 멤버들보다 훨씬 간결했다.
“이사님.”
입술 한 번 씹더니.
“내일 봬요.”
그렇게 금방 방을 나갔다. 성필이 생각하기로 눈물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것만으로도 성필은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신이 났다.
‘몰래카메라가 제대로 먹히고 있구나.’
이제 내일 진실을 밝히고 멤버들이 기뻐하는 걸 볼 일만 남았다.
‘마지막은 아름이겠지?’
그런데 신아름은 30분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 혹시 먼저 숙소로 가버린 건가?
‘그런 거면 조금 섭섭하네.’
성필은 잠시 응접실을 나가 멤버들이 모여 있는 연습실 쪽으로 갔다. 불이 켜져 있는 1번 연습실, 그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신아름의 것이었다.
“아름아 영원히 이사님 못 보는 것도 아니잖아! 울지 마!”
“그치만, 리카아, 근데에…….”
“지, 지금이라도 인사드리자. 이사님이랑 진득하게 얘기할 수 있는 건 오늘이 끝일 텐데…….”
“못 보겠어요오, 쌤, 못 보겠다구요…….”
신아름은 거의 오열하는 중이었다. 멤버들이 번갈아 성필을 만나는 중에도, 그녀는 감히 성필을 마주할 용기를 내지 못했었다.
헤어지는 게 두려워서, 마지막 작별마저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성필은 무의식적으로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울던 신아름은 물론이요 멤버들이 깜짝 놀라서 성필을 바라보았다.
성필이 깜짝 발표했다.
“얘들아 나 일본에 따라간다!”
성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단지 신아름의 울음을 그치고 싶단 마음만이 있었다.
“지금까지 너희들한테 숨긴 거야! 그, 그러니까 아름아 안 울어도 돼! 나 내일 공항에도 따라갈 거고 그럴 거고 어, 어쨌든 그래!”
“…….”
“…….”
“…….”
“…….”
“…….”
“하하, 기쁘지 다들? 난 일본에서도 너희 프로듀서로 같이 있을 거야. 일본 데뷔잖아. 나도 같이 있어야지.”
장하양이 조아라를 보면서 눈짓했다. 조아라가 끄덕이면서 성필에게 다가왔다. 그의 뒤로 가서, 그의 오금을 무릎으로 쳤다.
“악!”
성필이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그러자 신아름을 제외한 멤버들이 달려들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하하, 얘, 얘들아 그래! 때려! 나를 때리고 후련해 아악! 누가 내 척추 쳤어!”
성필은 집단 린치를 당하면서도 반항할 엄두를 못 냈다. 오열하는 신아름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라서, 자신이 당하는 게 당연하단 생각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멤버들의 표정에 서린 게 오직 분노였으니, 당연히 반항할 수가 없었다.
“쌤! 언니! 조아라! 리카!”
신아름은 집단 구타 현장을 목격하곤 호들갑 떨면서 그쪽으로 향했다.
‘아, 그래도 나 챙겨주는 건 아름이밖에 없구나.’
“손속을 두지 마!”
신아름이 성필을 발로 찼다. 그 순간 멤버들의 한계가 풀렸다. 이젠 주먹만 아니라 발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잠시 후, 성필은 폐인이 되어 바닥에 몸을 뉘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멤버들의 얼굴에는 보기 드문 행복감이 감돌았다.
신아름이 기쁨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으로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잔뜩 기대감이 서린 음성으로 물었다.
“팀장님, 이번엔 거짓말 아니죠?”
성필이 바들바들 떨면서 검지와 엄지로 O를 만들었다. 그것을 본 신아름이 환호하는 것을 시작으로, 멤버들이 기쁨을 표출했다.
그래, 일본 데뷔면 당연히 프로듀서가 함께 있어야지!
“누가 구급차 좀 불러줘어…….”
한 명의 고통과 다섯 명의 기쁨.
소녀연맹은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여실히 보여주려는 듯, 성필의 신음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기쁨만을 나누었다.
* * *
비행기가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스튜어디스가 미소를 띠며 승객들의 안전한 퇴장을 안내했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새벽 일찍 비행기를 타야 했던 까닭인지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특히 백설하는 심각했는데, 아예 눈을 감은 채 걷는 듯했다.
“슈이치 씨, 시간 맞춘 거 맞죠?”
“예. 웨벡스 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슈이치는 가로 엔터에선 A&R 쪽의 파견 직원이었지만, 일본 활동 기간에는 소녀연맹의 전담 매니저가 된다.
멤버들도 슈이치와 여러 유대를 쌓았으니, 갑자기 웨벡스에서 새로운 사람을 붙이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팀장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신아름이 성필과 팔짱을 꼈다. 그녀는 어젯밤부터 기분이 굉장히 좋았는데, 성필이 일본에 동행한단 사실 때문이었다.
성필은 독하게도, 일본에 가기 전날까지 그의 동행 사실을 숨겨왔었다. 오직 서프라이즈를 하겠단 일념 하나로 말이다.
덕분에 대가를 치른 성필은 다신 몰래카메라 따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아름아, 팔짱 끼지 마. 팬들이 이상하게 보면 어떡해.”
“에이, 일본에 저희 알아보는 사람이 어딨다구요? 주변에 봐요.”
소녀연맹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예쁜 이들이 있으니 흘끔 보고 그만둘 뿐, 그런 단발적인 관심이 그녀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었다.
“그래도야.”
성필이 팔짱을 빼자 신아름이 삐친 듯 뚱한 표정을 지었다.
입국 수속을 마친 멤버들과 성필, 슈이치는 공항 청사를 나섰다.
그 순간.
“온니!”
“쇼죠렌메(소녀연맹)!”
“코코(여기), 코코!”
청사를 나서는 순간, 백수십 명의 사람들이 소녀연맹을 향해 열띤 환호를 보냈다.
멤버들은 갑작스레 쏟아지는 열광에 어쩔 바를 모르고 발을 멈춰버렸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사인시테구다사이(사인해주세요)!”
“온니들 사라앙해여!”
수백 명의 팬이 터진 둑을 타고 흐르는 물처럼 소녀연맹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아저씨, 이거 어떻게 된…….”
“모르겠어.”
모르겠지만.
“슈이치 씨!”
“예!”
성필과 슈이치가 다급하게 소녀연맹의 앞을 막아섰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본에서의 첫 번째 일은, 팬을 돌파하여 공항을 벗어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