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82화 (282/760)

282화

리카는 폐점한 카페를 뒤로하고 터덜터덜 밖으로 나왔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힐이 이토록 불편할 수가 없었다. 많이 걷지도 않았고, 종일 앉아 있었을 뿐이지만 다리에 힘이 없다.

리카는 성필에게 전화를 걸었다.

꺼져있다.

“…….”

아직 불 켜진 가게가 많았다. 어디든 들어가서 시간을 때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리카는 가까운 벤치로 가서 털썩 앉았다. 그렇게 가만히 정신을 놓고 있자니 10시도 한참 넘어갔다.

“…….”

10시 30분.

앞으로 1시간 30분이면 하루가 끝난다. 아니, 이미 끝나버렸다.

이제 리카는 숙소로 들어가서 씻고 자야만 한다. 그래야 내일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

‘축제, 가고 싶었는데.’

못 가게 됐다.

리카는 바닥을 향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멀리서 누군가 그녀를 보았다면, 술에 취해 등을 구부린 채 잠든 줄 알 것이다.

그녀는 지루하지도 않은지 그대로 오랜 시간을 가만히 있었다.

‘21살, 여름, 축제.’

리카의 인생에서 앞으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날이다. 그날이 정오의 햇볕을 받은 그림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괜찮아. 다음에 오면 되지.’

축제는 가을에도 있다.

‘그런데 그때쯤이면 콘서트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음, 그럼 내년에 오면 되겠구나.

‘내년에 올 수 있을까?’

내후년에는?

아니, 아이돌 활동을 하면서 여유로이 축제를 즐길 수 있는 날이 앞으로 몇 번이나 있을까?

‘몇 번’이라고 말할 만큼 많기나 할까?

소녀연맹은 성공할 것이다. 리카는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멤버들이 있고, 프로듀서로 성필이 있으니까.

성공한 소녀연맹에게 일상이 존재할까?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마지막, 이잖아. 처음부터 마지막이었어.’

21살, 여름, 축제는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리카.”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리카는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세게 문질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단 듯 고개를 들어 성필을 바라보았다.

“늦어요!”

“미안.”

성필은 리카의 옆에 놓인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대기 화면으로 바뀐 지 얼마 안 된 액정에는, 미약한 불빛을 받아 ‘부재중 통화 4’란 글자가 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전화를 걸었지만, 리카는 받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녀가 기다린다고 했던 카페 근처로 왔더니, 리카가 벤치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것이다.

“원래 8시 전에 온다고 했잖아요!”

“미안.”

“적어도 10시 전에는 온다고 했구요!”

“미안.”

“지금은 11시라구요!”

리카가 벤치에서 폴짝 내려왔다.

“숙소에 데려다주세요! 가는 길에 한라봉 에이드도 사주세요!”

“안 돼.”

“서, 설마 또 일 있나요…….”

“축제 가자.”

“……에?”

성필이 머뭇거리는 리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직 축제는 안 끝났어.”

리카는 멍하니 그 손을 잡으려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목소리를 키웠다.

“안 돼요!”

“어?”

“박 이사님 일 마치고 오신 거잖아요! 피곤하잖아요! 빨리 가서 쉬셔야죠!”

성필은 아침부터 일본에 가서 일하다가 이제야 돌아온 것이다.

그런 사람을 데리고 다녀봤자 리카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리카는 삐친 듯 ‘흥’ 고개를 돌렸다.

“이사님 기다리느라 아타시(저)도 피곤해요! 빨리 돌아가요!”

“정말? 안 놀아도 돼? 괜찮겠어?”

……아니,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놀고 싶다.

하지만 리카는 성필이 걱정되어, 그가 혹여나 자신을 귀찮게 여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물론 성필은 본인이 직접 한 약속이니 성심성의껏 지키려 할 것이다. 리카는 그것을 알기에, 약속을 어기는 그의 죄책감을 덜어주려고 더 삐치고 피곤한 티를 냈다.

내려 했다.

“나 오늘만 기다렸는데.”

성필의 아쉬움이 잔뜩 배인 한숨.

“리카랑 노는 거, 일하면서도 계속 기대했는데. 그런데…….”

성필은 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곤 쓰게 웃었다.

“역시, 안 될까?”

“…….”

성필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리카는 그 손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바라보기만 하다가, 바라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손을 뻗어 잡았다.

“어쩔 수 없네요! 친구의 기대를 배신할 순 없잖아요! 빨리 가요!”

그래, 축제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 * *

끝났다.

성필과 리카는 대학교 내부를 이 잡듯이 돌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파장 분위기다.

‘옛날에는 안 이랬는데. 갑자기 뭐지?’

왜 이런가 고민을 거듭하고 있자니, 얼마 전 뉴스에서 봤던 게 떠올랐다.

학교 내에서 주류 판매 금지. 그에 따라 새벽이 넘어가도록 학생들이 운영했던 수많은 주막은 파리만 날리는 중이었다.

주막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가게에서 술을 먹기 위해선, 손님 본인이 직접 술을 사 와야 한다. 당연히 굳이 소주를 몇 병씩 사 와서 술집과 같이 달리는 사람은 없었다.

‘푸드트럭들도 전부 문 닫았고.’

성필은 자신의 옆을 착실히 따라오는 리카는 흘끗했다. 그녀도 실망한 기색을 보이긴 매한가지였다.

“뭔가, 아타시(제)가 생각했던 거랑은 많이 다르네요.”

“주류 판매 금지 때문인가 봐. 공연도 다 끝난 시간이고…….”

한산한 주막에 앉아 시간을 보내봤자 축제 분위기 따위는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성필은 과거의 기억에 의존해서 찾아온 어느 단과 대학의 매점에 도착했다. 규모가 훨씬 작아졌고,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사람이 줄긴 했다. 여기 유명해서 자리 받으려면 진짜 몇 시간 기다려야 했거든. 헌팅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랬는데.”

“이사님이 그걸 어떻게 아나요.”

“……들었어. 친구한테.”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래, 왔다. 왜, 난 오면 안 돼?”

“의외네요. 이사님도 대학 축제에 오고 그러셨나요?”

“리카, 정말 놀랍겠지만 나도 20대 초반인 시절이 있었어. 대학 축제도 당연히 가고 그랬지.”

대학생은 아니었지만.

“음.”

매점이 들어선 곳보다 약간 높은 위치. 리카는 아래에 펼쳐진 가게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어깨를 감쌌다.

“왜 그래?”

“뭔가, 제가 여기 있으면 안 될 거 같아요. 대학생이 아니라서 그런가? 헤헤.”

“…….”

성필도 이해한다. 그가 로드매니저였던 시절, 축제 시즌에 하루의 휴가를 얻은 그는 들뜬 마음으로 대학생이 된 친구들과 축제에 갔었다.

하지만 그가 맞이한 건 청춘의 공기가 아니었다. 있으면 안 될 곳에 있다는 압박감이었다.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70%가 넘는다던가. 그렇다면, 대학에 가지 않았던 성필은 명백히 일반 사람들과 다른 궤도에 선 것이었다.

평범한 청춘을 느낄 수 있을 리 없었다.

“생각보다 재미도 없네요!”

장장 수십 분 동안 허탕만 치자 리카가 그리 말했다. 그녀는 빨리 돌아가자는 듯 성필의 소매를 흔들었다.

“그냥 가요! 늦었어요!”

리카의 미소는 환하기만 했다. 하지만 성필은 그녀에게서 아쉬움을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든…….

‘즐거운 추억을 주고 싶었는데.’

그때 성필의 눈에 무언가가 잡혔다. 넓은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두고 앉아 있는 네 명의 남녀였다.

곱게 차려입은 옷에 비해 그들이 앉은 자리는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편의점에서 사 온 마른안주 몇 개와 몇 병의 소주.

그런데도 세상이 떠나갈 듯이 웃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리카,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하이(네)?”

성필은 리카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전속력으로 뛰었다. 어두운 숲길에 버려진 리카는 멀뚱히 서 있을 뿐, 무엇을 할 수도 없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성필이 품에 무언가가 잔뜩 든 비닐봉지를 안고 나타났다.

“리카. 야외에서 술 먹어본 적 있어?”

“서, 설마 밖에서 술을 먹는 건가요! 안 그래도 선글라스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피크닉하자.”

“음주를 피크닉이라고 하지 않아요!”

“대학생답지 않아?”

“대학생은 술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사사건건 성필에게 태클을 거는 리카는, 말투와는 달리 조금 기대하는 눈치였다.

성필은 근처의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았다. 두 사람은 그 위에 앉아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급하게 데운 냉동 치킨, 양에 비해 비싼 편의점 안주용 막창, 육포, 그리고 소주 세 병과 병맥주 두 개.

그것을 본 리카가 화들짝 놀랐다.

“술을 얼마나 먹을 생각인가요!”

“죽을 때까지.”

“이사님이 죽으면 차도 못 타잖아요!”

“너, 은근히 나를 운전기사로 생각하는 거 같아서 기분이 나빠. 난 가로 엔터 이사야.”

성필은 핸드폰 라이트를 켰다. 엄청난 광량이 리카를 비추었다. 그녀가 빛을 받자, 그제야 성필은 리카의 차림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런 말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리카는 정말 또래의 아이 같았다. 하늘거리는 블라우스와 말끔한 바지, 그리고 투명한 메이크업.

“아타시(저) 실명하겠어요!”

“아, 미안.”

성필은 핸드폰 라이트가 하늘을 향하도록 바닥에 두었다.

“에에, 이렇게 안 해도 주변은 볼 수 있어요.”

리카는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밤임에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성필이 자신을 배려해서 라이트를 켠 줄 알았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녀의 생각이 바뀌었다.

“아.”

성필이 핸드폰 라이트 위에 소주병을 올려두었다. 그러자 녹색의 맑은 빛이 무드등처럼 주변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리카는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순백의 블라우스로 은은한 녹빛이 파고들어 와 신비롭게만 보였다.

아름답다.

“와, 와, 우와! 이사님 이거 뭔가요!”

“예쁘지?”

“예뻐요!”

리카는 핸드폰을 꺼내 소주병을 수십 장이나 찍었다. 밤의 중간에 선 녹빛의 탑은, 그 정체를 소주병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소주병이 그렇게 좋아?”

“분위기를 찍는 거예요!”

“사진으로는 분위기가 안 담기지.”

눈으로 보아야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어디서 배운 건가요! 이사님이 여자 꼬시려고 배운 방법인가요!”

“이런 거에 넘어오는 여자가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겠지.”

“저는 넘어갈 거 같은데요!”

리카는 행복의 역치가 너무 낮다.

남자를 보는 눈을 기르게 하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행복을 경험해야만 한다.

“리카, 잘 봐라.”

성필은 소주병을 역으로 잡고 바닥을 팔꿈치로 팍팍 때렸다. 그것을 본 리카는 기겁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깨지면 어떡하나요!”

“안 깨져.”

성필은 기포가 오른 소주병의 뚜껑을 따고 병의 목을 손날로 쳤다. 가장 위에 맺혀 있던 소주가 하늘을 날다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뭐 한 건가요?”

“소주 독소 빼는 거.”

“에엑?! 소주에 독이 있나요!”

실은 성필도 정확한 과학적 사실은 모른다. 그가 사회생활을 시작할 시기, 대학에 간 친구들을 만날 때 배운 것이다.

“자, 너도 해봐.”

리카는 성필이 한 대로 따라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바닥을 쳐도 성필처럼 통통거리는 맑은소리는 나지 않았다.

“네 힘으로 절대 안 깨져. 있는 힘껏 해.”

“있는 힘껏!”

팡!

경쾌한 소리를 낸 리카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타시(저), 바텐더가 됩니다!”

그녀는 뚜껑마저 경쾌하게 따버리고, 상대를 기절시키려는 닌자처럼 병의 목을 손날로 후렸다. 소주의 1/3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아까워!”

“안 아까워. 다 독소잖아.”

“앗, 그럼 제가 이사님의 수명을 하루 정도 늘려드린 거네요!”

“먹자.”

둘은 술을 마셨다. 마시고 또 마셨다.

밤이 깊어지자 추위가 더해졌지만, 리카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체온이 올랐으며, 또한 웃음도 많아졌다.

그녀는 가로 엔터 회식 때도 이렇게나 많이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이렇게 빨리 마신 적도 처음이었다.

정신이 몽롱하고 시야가 흐릿하다. 하지만 이상해지는 신체에 비례하여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

“하, 합니다! 저 정말로 합니다!”

“빨리 빨리!”

리카는 백설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리카. 다 끝났어? 이제 오는 길이야?]

“언니 바보!”

뚝.

전화를 끊자마자 리카와 성필이 미친 듯이 웃었다. 리카는 아예 돗자리 위를 굴러다니기까지 했다.

“이제 박 이사님 차례예요! 손 이사님한테 빨리!”

“잠만. 뭐라고 할까?”

“이사님이 가지고 있던 모든 울분을 토해내세요!”

“오케이.”

성필은 손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성필이 웬일이야. 시간도 늦었는데.]

“누나.”

[너 술 마셨어?]

“어. 누나한테 할 말 있어.”

[……뭔데?]

성필은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나 이제 애 아니야! 누나 간다고 눈물 질질 짰던 박성필 아니라고! 언제까지 누나한테 애처럼 대해질 생각 없어!”

“박 이사님 남자다!”

“난 어른이야! 어른 대접해줘!”

“멋지다아!”

[어른은 밤에 술 먹고 전화 안 하…….]

성필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전화를 끊었다.

“근데 박 이사님 우셨었나요? 손 이사님 때문에?”

“그런 일은 없었다.”

“방금은…….”

“술이나 마셔!”

“하이잇(네에엣)!”

* * *

민경섭이 성필을 발견한 건 새벽 2시 무렵. 대학 내의 숲길에서였다.

축제여서 그런지 아직도 활발히 돌아다니는 이들이 많았지만, 굳이 이 어두운 숲길로 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곳에 성필과 리카가 있었다.

“리카, 너 언제 이렇게 듬직해졌, 우욱, 듬직해졌니…….”

성필이 커다란 사철나무 앞에 무릎을 꿇고 매달려 있었다. 그 뒤에선 리카가 성필에게 매달려 있었다.

“이사니임…… 그거 저 아니에요……. 저 여기 있어요……. 그건 나무라구요…….”

민경섭은 마른세수를 했다. 도저히 맨정신으로 이 광경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의지를 다잡은 뒤 백설하에게 문자를 보냈다. 리카가 제정신이 아니니 숙소로 돌려보내지 않고 자신이 케어하겠다고 말이다.

민경섭은 성필에게로 다가갔다.

“형.”

“어, 경섭이냐?”

“앗 민 팀장니임……. 이사님을 나무한테 뺏겨버렸어요……. 나무한테도 지면, 아타시(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오? 아이돌 실격 아닌가요?”

“경섭아 미안하다. 정말 미안. 이 시간에 부르고, 미안…….”

“박 이사님 저 여기 있다구요……! 민 팀장님은 알아보면서 왜 나무랑 저를 헷갈리는 건가요오……!”

“…….”

민경섭은 성필을 나무에게서 떼어내고, 리카를 성필에게서 떼어냈다. 그리고 둘을 데리고 성필의 차를 찾아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경섭아 미안.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다신 안 이럴게. 미안. 내가 해준 거도 없는데…….”

“형 괜찮아요. 저 내일 프리잖아요. 이상이랑 수희 차례예요.”

민경섭은 성필을 달랬고.

“민 팀장님? 내일 스케줄, 어디죠? 언제였지? 내일 스케줄 없나요? 여긴 어디에요? 아, 몇 시지? 숙소, 가야 하는데……. 언제 도착하나요?”

“곧 있으면 도착해. 눈 좀 붙여둬.”

리카도 달랬다.

짜증이 나지는 않았다. 민경섭도 과거 성필에게 수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말이다. 성필에게 받은 도움에 비하자면 이런 건 일 축에도 못 낀다.

그런데 리카는 이야기가 좀 달랐다.

“헤헤, 민 팀장님 여자친구 있단 거 진짜인가요? 진짜면 왜 소개 안 시켜주시는 건가요? 거짓말이죠? 그렇죠? 창피해할 필요 없어요!”

“…….”

리카는 평소에 이렇게 생각했던 건가? 민경섭 자신에게 여자친구가 없으리라고?

아니, 애초에 여자친구 자체가 거짓말이라고?

민경섭은 두 사람을 질질 끌다시피 하여 자신의 집 앞에 도착했다. 낡은 빌라의 계단을 올라가다가, 취한 둘을 케어하느라 멈추길 몇 번.

마침내 문 앞에 당도했다.

“여자친구분 소개해달라니까요! 결혼식에도 불러주세요! 지금 안 보여주시면 없는 거라고 알……!”

그때 문이 열리면서 어느 여자가 나타났다. 머리칼을 뒤로 묶은 그녀는 담요를 두른 채 문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제 왔어?”

“늦게 와서 미안. 이 둘…….”

“괜찮아. 아이구, 성필 씨는 왜 이렇게 취했대.”

“제수씨 안냐세요…….”

“네네, 어서 들어오세요.”

성필은 민경섭의 여자친구를 보자마자 갑자기 정신이 말짱해졌는지, 비틀거렸던 걸음마저 지우고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발걸음했다.

성필이 제대로 신발을 벗는지 확인한 그녀는, 이번에는 리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리카 씨?”

“…….”

리카는 멍하니 있다가, 다급히 자신의 앞머리를 정돈하곤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형수님! 아니, 제수, 아니 아니 새언니!”

진짜 있었구나.

그렇게 리카의 대학생 체험은 끝났다.

다음 날 깨자마자 흑역사가 물밀듯이 머리를 치고 들어와, 눈을 뜨고도 30분 동안 이불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침 식사 시간. 민경섭과 그 여자친구, 성필과 리카는 함께 해장국을 먹었다.

“형 술을 왜 그렇게 먹었어요.”

“리카가 청춘을 즐기고 싶대서.”

“속은 괜찮아요?”

“어, 괜찮아. 축제 스케줄은 1시에 출발하지?”

“네. 시간 넉넉해요.”

“이상 씨랑 수희 씨가 잘할까.”

“몇 번 걔들끼리만 보내 봤는데 잘하더라고요. 저도 처음엔 걱정돼서 30분마다 문자 보내고 그랬는데.”

“한두 명 더 뽑으면 휴일 챙겨주면서 로테이션 돌릴 수 있겠네.”

“세상 참 좋아졌다. 저희 석세스 엔터 초기 땐 어떻게든 3명 쥐어 짜내면서 돌았잖아요.”

“어허, 밥상에서 일 얘기 그만해요.”

여자친구의 장난스러운 참견에 성필이 쑥스럽게 웃었다.

“리카 씨는 어떻게, 입에 좀 맞으세요?”

“네, 네엡! 천상의 맛입니다! 천하일미예요!”

“그래요? 대기업 제품이 좋긴 하나 보네요. 그거 인스턴트거든요.”

“…….”

성필과 리카는 식사를 마치고 민경섭의 집을 나왔다.

“제수씨 신세 많이 졌습니다. 경섭이도 미안하다.”

“뭘요. 오랜만에 형 정신 나간 거 보니까 재밌었어요.”

빌라를 나와서, 성필은 꾹 입을 다문 리카를 향해 웃음을 날렸다. 아무런 조짐도 없이 나타난 웃음에, 리카는 흠칫 떨 수밖에 없었다.

“리카, 어제 재밌었어?”

“어, 아니, 네, 재밌었어요.”

“나도.”

“…….”

“참고로 나 기억 다 남아 있어.”

“……?!”

“영상도 찍었는데, 볼래?”

“지우세요! 지워주세요! 제발 지워주세요!”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리카가 울고불며 매달렸지만, 성필은 끝끝내 핸드폰에 저장된 그녀의 흑역사를 지워주지 않았다.

“씻고 나와. 기다릴게.”

“흥!”

리카는 성필에게 단단히 삐친 채 숙소로 들어왔다. 멤버들은 전부 회사로 가서, 숙소 안은 적막했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 샤워실로 가는 길, 리카는 핸드폰을 꺼내 갤러리를 뒤졌다.

어제 찍은 사진을 하나씩 확인할 때마다 리카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 사진. 성필과 리카가 어깨동무를 한 채 찍은 것.

성필은 카메라를 향해 뽀뽀하듯이 입술을 쭉 내밀었고, 리카는 그런 성필이 기분 나쁘단 듯 토하려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헤헤.”

리카는 행복한 웃음을 흘리면서 샤워실로 들어갔다.

‘축제는 못 즐겼지만.’

리카는 깨달았다.

성필과 함께하는 매일이 축제다.

* * *

케이어스의 팬인 ‘유스’이자 소녀연맹의 팬인 ‘인민’이기도 한 고등학교 2학년 이선주.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다!

“아아, 이곳이 내 미래의 모교인가.”

이선주는 고려대학교 내부의 공기를 마음껏 탐닉하면서 거리를 걸었다.

그녀의 손에는 지하철 화장실에서 갈아입은 교복이 든 종이백이 있었다. 즉, 현재 이선주는 일상복이었다.

오로지 축제를 즐기기 위해 학교에 일상복을 챙겨가고, 수업마저 조퇴한 뒤 축제에 온 것이다.

“진짜 미쳤어.”

친구인 김채현이 이선주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프레젠테이션해주었다.

“그럼 따라온 너는 뭔데?”

“야, 난 그래도 네가 오자고 해서 왔지. 넌 계획부터 실행까지 전부 맡았잖아.”

심지어 김채현이 이곳에 온 것도 이선주가 축제 공연 티켓을 구해줬기 때문이었다. 고대에 다니는 친척에게 애걸복걸하여 겨우 구했다는 모양이다.

혼자 오기 무섭다고 어찌나 보채던지. 그 때문에 김채현도 그만 정신줄을 놔버리고 이곳에 있게 됐다.

“그래서 싫어?”

“싫겠냐?”

오늘 축제 공연에 소녀연맹이 오는데 싫을 리가 있나!

김채현은 친구인 이선주가 사랑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조퇴 따위 별거 아니다. 김채현은 이미 학교를 완전히 째고 소녀연맹의 음방을 갔던 전적까지 있었으니.

“빨리 가자.”

축제 입장은 1시부터 시작이다. 두 사람은 그 시각에 딱 맞춰서 갔지만.

“뭐냐, 이거.”

이미 줄이 끝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지금 줄을 서봤자 가장 외곽의 자리에 배정될 게 뻔했다. 그럴 바에야 조금이라도 돌아다니다가 한산해질 때 오는 편이 나을 것이다.

“더운데 아이스크림이나 먹자.”

“그래.”

둘은 빠른 합의를 마치고 적당한 푸드트럭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한 개에 4,000원이나 되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을 각자 손에 들고 거리를 거닐었다.

“베라보다 훨씬 못한데……. 이게 4,000원이야?”

“축제잖아. 다 이렇게 바가지 씌우는 거지 뭐.”

이선주는 울면서 4,0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하지만 크게 슬프지는 않았다.

몇 시간 뒤에는 소녀연맹의 찬란한 무대를 맨눈으로 볼 수 있을 테니까.

음방을 여러 번 뚫은 운 좋은 친구, 김채현과는 달리 이선주는 운이 매우 없는 편이었다. 그녀는 여태껏 소녀연맹의 무대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소녀연맹을 직접 보겠다는 오래된 숙원을 풀 수 있겠…….

“아.”

축제 분위기에 취해.

친구와 정신없이 대화하며.

웃음꽃이 피어 있던 이선주.

그녀는 앞에서 느껴지는 저항감에 몇 걸음 물러났다. 누군가와 부딪친 것이다.

아이스크림도.

이어서 부딪친 사람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퍼졌다.

“아…….”

이선주는 감히 고개를 들어 상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녀의 시야는 상대 턱 바로 아래에서 멈춰, 한눈에 보아도 비싸 보이는 옷의 가슴팍에만 머물렀다.

흰 아이스크림이 옷의 가슴에 처박혔다.

한동안의 침묵.

이선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 죄송합…….”

사과하려면 눈을 맞추는 게 예의다. 사과하면서 시선을 올리던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돌처럼 굳어버렸다.

방금 부딪쳐서 벗겨진 선글라스로 드러난 맨얼굴. 그녀와 마주 본 이선주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깔보는 눈빛. 벌레를 보는 시선. 차가운 눈동자. 이선주는 이 사람, 그녀를 알고 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선글라스를 주워 그녀에게 다시 씌웠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이선주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어디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네, 네, 죄송, 그게, 세탁비…….”

“괜찮습니다. 얼마 들지도 않는데요 뭐.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녀와 매니저,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자는 이선주를 지나쳐 사라졌다.

이선주는 떨리는 입술을 꾹 물었다.

“야, 방금…….”

김채현도 못 믿겠단 투였다. 하지만 이선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 그 눈빛을 떠올리니, 떨림이 더 심해진다.

* * *

진소유는 걸음을 빨리했다. 또각거리는 힐의 소리는 그녀가 지닌 분노를 여실히 표현해주었다.

가슴이 아이스크림 때문에 축축하다.

“소유 언니, 안 닦으심미까?”

진저가 걱정하면서 진소유를 불러도,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소유야 티슈 있으니까 일단은…….”

보호 역으로 따라온 댄스 트레이너 신태웅도 안절부절못하면서 진소유의 뒤만 따랐다.

그런 이들을 뒤에 두고 진소유는 입술을 까득 물었다.

“짜증 나…….”

이렇게 사람이 붐비는 곳 따위 오는 게 아니었는데.

“소유야 너…….”

“됐으니까, 공연장 어디에요? 빨리 가요.”

소녀연맹을…… 아니.

장하양을 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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